행 1: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 "데오빌로"란 말(* )은 하나님께 사랑스러운 자란 뜻이다. 어떤 학자
는 이것이 개인의 이름이 아니고 일반 기독 신자들에 대한 통칭(通稱)이라고 하나, 눅
1:3에는 이와 같은 이름에 "각하"(* )라는 존칭까지 붙여져 있는 것을
보아 이것이 개인의 이름인 것이 분명하다. "먼저 쓴 글"(* )
은 처음 말씀이라는 뜻인데 누가복음을 가리킨다. 그 이유는 데오빌로에게 보낸 책이
사도 행전 외에는 누가복음 뿐이기 때문이다. 본서가 누가의 저술인 것은 다음과 같
은 사실로 증명된다. 곧, 본서에 "우리"라는 말이 여러번 나오는데(16:16,17,
20:5,6,7,13,14, 21,:1,5,6,11,12,16,17,18, 27:1,2,4,6,27, 28:1,15,16), 그것은 그
집필자가 바울의 선교 여행에 동반한 자인 사실을 보여준다. 그 뿐만 아니라, 사도
행전이나 누가복음에는 의학상 술어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그 저작자가 의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바울의 수종자들 중 누가만이 의사였으니(골 4:14), 그가 이 책들
을 기록하였다고 생각된다.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라는 문구의 헬라어(*
...
)를 직역하면,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 시작한 모든 것들에 관
하여"이다. 우리 한역에는 이 문구의 끝에 "부터"란 말이 있으나, 헬라 원문에는 없
다. 그러면 이 문구의 의미하는 바는,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모든 행적들과 교
훈들이 다만 그의 일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얼른 보면 이상한 것 같
으나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땅에서 행하신 모든 일보다 승천 후에 행하실 일들은 무
한히 많다. 사도 행전은 특별히 그의 승천 후의 행사, 곧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시
는 구원 행사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니, 이런 머리말이 어울린다. 이 점에 대하여 노
울링(R.J. Knowling)은 말하기를, "누가는 예수님의 땅 위의 생활 전부를, 그의 승천
으로 완성되어 나타날 영광과 구원 역사를 지향한 전주곡으로 생각한 것이다."라고 하
였다(The Expositor's Greek Testament, Acts of the Apostles, p.51).
그러면 우리가 이 점에 있어서 기억할 것이 두어 가지 있다.
(1)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행하시는 구속 사업의 분량이 무궁하다는 것이다. 히
7:24-25에 말하기를,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
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
가 항상 살아서 저회를 위하여 간구함심이니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그가 승천하
셔서 계속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계신다. 기도는 이 세상에서도 가장 효과 있는 일
이요, 내세(來世)에서도 주님이 영원히 하실 일로 되어 있다. 주님의 이 무궁하신 일
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고 하였다(요 21:25).
(2)인간들이 모르는 가운데 일하시는 일군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 세상에도
실상 참되이 일을 일답게 하는 이들은 사람들이 모르는 수고를 하고 있는 일군들이다.
이 세상에서 일한 보수를 다 받아버리는 일군들은 실상 영적으로 큰 운동을 일으키지
못한다. 하나님은 아무 소리도 없이 지구를 굴리시며 온 우주를 주장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하시는 일이 역시 이렇게 오묘하다.
"행하시며 가르치시기." 복음 기자는 특별히 예수님의 행하신 일과 가르치신 일을
중점으로 기록하였다.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 사건에 대해서도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의 유년 시절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적은 분량으로 되어 있다. 그는 예수님의 유년
시절을 기록함에 있어서 그 탄생 기사로부터 갑자기 12세 때의 일로 뛰어 넘어갔고,
그 뒤에는 곧바로 18개년을 뛰어서 공중 성역(公衆聖域) 기록에 착수하였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생애의 요점은 공중 성역, 곧 "행하신과 가르치심"이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공적 성격이 없는 부분은 비교적 나타내지 않으셨다. 하나님
은 그의 백성의 구원 성취를 목표하고서만 계시(啓示)하실 것을 계시하신다.
행 1:2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 이것은 저자의 "먼저 쓴 글"(누가복음)의 종결로 기록된 것인데, 예수님의 땅 위의
행적의 최종 계단를 소개한 말씀이다. "성령으로 명하시고." 이것은 주님께서 사도들
에게 성령을 주셔서 복음 증인으로 삼으실 것을 약속하신 사실에 대하여 말한다. 여
기서 주님의 약속을 명령(* )이라고 한 것은 사도들이 성령을
받게 될 일이 확실함을 암시한다. 사도들은 성령을 의탁하여 주님의 복음을 전하였으
니, 사도들의 선교 행위는 실상 성령의 행적이다. 그러므로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전
한 사도 행전을 성령의 행적이라고 해서 틀릴 것은 없다 (Grosheide, Kommentaar Op
Het Nieuwe Testament V :Handelingen, 1-14, p.10). 여기에 쓰인 "승천"이란 말(*
)과 70인역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에서 엘리야의 승천(왕하
2:11)을 표현한 말이 같다. 눅 9:5 에도 같은 말이 사용되었다.
행 1:3
이 귀절부터는, 복음의 요점인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한다.
해 받으신 후에 - "해 받으심"은 예수님의 수난(受難)을 가리킨 말인데, 그의 죽으
심까지 포함한다. 그의 죽으심을 수난이란 말에 포함시킨 이유는, 그의 속죄의 죽음
에 해당하는 고난을 맛보심을 중점으로 삼기 때문이다(히 2:9). 그것은 그가 죽음의
고통을 당하셨다는 뜻이다. 이 말씀들이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하여 이렇게 고난의
요소를 지적하여 말하는 이유는, 우리의 구원이 그의 고난 때문에 이루어질 까닭이
다.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 그가 "나타내심"은 너무 확실하여 처
음에 의심하던 제자들도 그 사실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확실한 많은 증거."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믿고 남을 터인데 그런 확실한 증거가 많다고 하니 우리가 더욱
믿어야 된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증거를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다. 그 몇
가지를 들면, (1)그가 한 사람에게만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셨으며(요
20:16-18, 21:1-13), (2)그가 같은 사람들에게 여러 차례 나타나셨다(눅 24:30-43; 요
20:19-20, 26-29). (3)그러므로 제자들이 주님의 나타나신 것을 보고 서로 찾아 만났
을 때에 같은 경험을 말하였던 것이다(눅 24:33-35). 또한 (4)주님께서 죽으시기 전
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후에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약속
하셨는데, 과연 그대로 이루어졌다(마 26:32, 28:10, 16-17).
사십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에 땅 위에 계신 날수 "40
일"은 여기에만 기록되었고 다른 데는 없다. 벴겔(Bengel)은 말하기를, 이 날수는 계
속적인 40일 기간을 말함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던 날만 합한 날수를 가리킨
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옳지 않다. 40일이란 수는 선지자나 예수님의 생애에
종종 채용되었으니, 상징적 의미도 가졌다고 생각된다. 모세와 예수님이 금식하신 날
수도 40일이고(출 34:28; 마 4:2), 엘이야가 천사의 공급한 떡과 물을 먹고 마시고,
그 힘으로 호렙산까지 간 날수도 40일이다(왕상 19:4-8). "보이시며." 이것은 주님께
서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 다만 환상이 아니고 실체(實體)를 보여주셨던 사실을 말함이
다. 같은 말이 왕상 8:8에도 나오는데(70인역에) 거기서도 이 말이 실물이 보이는 여
부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본서의 저자 누가는 눅 24:39-43에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진술할 때에 실물(實物)을 취급하는 심리로 말한 것이 확실하다(Knowling, The
Expositor's Greek Testament, Acts of Apostles, p.53).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
터 이루어지고 그 재림으로 완성되는 나라를 가리키는데, 이는 복음 운동과 그 완성을
말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28:31). 복음 운동의 골자는 성령의 운동이니만큼,
다음 귀절들은 성령에 대하여 말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는 나의 요한복음 주석
133페이지에 자세히 설명되었다.
행 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
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심은, (1)예
루살렘이 역시 신약 운동 출발의 장소로 예언되었기 때문이다(사 2:3). (2)신약 운동
과 예루살렘과의 관련성은, 일반 역사(歷史)의 원리로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된다. 중
심 지대는 대중이 움직이는 곳이니, 진리를 전파하는 일이 그런 곳에서 시작될 것이
자연스럽기도 하다.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전쟁에 나아갈 군인은 먼저 훈련의 시기를 가
지는 것처럼, 이제 복음 전선에 나아갈 사도들은 영력의 준비를 이곳에서 갖추어야 했
다. 이 영력은 주님께서 일찌기 약속하신 것이다(요 14:15-16, 25-26, 15:26, 16:7).
그 약속은 그가 솔선하여 하신 것이다. 어떤 때에는 우리가 일하는 것보다 가만히 기
다려 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가 기다림으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볼 수 있
고, 또 기다리며 바랄 때에(기도함으로) 성령의 은혜를 받게 된다. 신자들은 종종 사
업욕에 끌려 덤비면서 기도는 하지 않고 일만 한다. 그렇게 나아가면서 하나님의 일
을 사람의 힘으로 하려다가 결국 실패한다.
행 1:5
요한은 물론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 이 말씀은 윗절의 "약속하신 것"이란 말씀에 대한 설명이다. 약속은 다
른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것이다. "성령 세례"는 오순절에 내릴
성령의 은혜를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비단 그 오순절 때에 사도들에게만 국한된 은
혜가 아니고 모든 후대 신자들도 받게 될 신약적인 성령의 은혜를 포함한다. 우리가
이 귀절에서 생각할 것은, (1)세례 요한의 물 세례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령의 강
림을 예표한다는 것이다(F.F. Bruce). (2)이 귀절의 뜻은 역시 세례 요한이 물 세례
의 직책을 수행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데 그것은 그의 직책
상 불가결한 것임을 내포한다는 것이다(Calvin).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성령 주시는 그 역사를 가리켜 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첫째, 성령을 물 붓듯이 풍성이 주실 것을 의미한다(롬
5:5). 그리고 둘째, 물 세례는 외부적으로 씻음을 말하는 반면에, 성령 세례는 영적
이어서 인간의 심령을 새롭게 하심을 가리킨다(요 3:5; 고전 6:11; 딛 3:5). 세째,
신자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을 가리킨다(고전 12:3). 곧, 그리스도와 함께 죽
고 또한 살게 되는 관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립됨을 의미한다(롬 6:3-4). 다시 말
하면 이것은 신자와 그리스도의 연합을 의미한다. 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할
때에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다. 머레이(Joha Murray)도 세례가 죄를 씻음(중생)과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을 상징한다는 의미로 말하였다(Christian Baptism, pp.4-8).
성령 세례를 받는 방법에 대하여 우리로서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그 일이 하
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다음 몇 가지를 말할 수 있다. (1)성령
이 오시는 것은 전혀 하나님의 주권(主權)에 달렸으니 누가 언제 그 일을 당할지 모르
며(요 3:7-8), (2)신자로서는 겸손한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함으로 성령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눅 11:13). (3)그리고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의 은혜가 임한다(행
5:32).
행 1: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까 하니 -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질문으로써 그들의 사상이 기회주의(사람이
좋은 기회를 만나야 한 번 榮達할 수 있다고 믿는 사상)임을 나타낸다. 제자들은 이
스라엘 나라가 정치적으로 독립되고 행복스러운 기회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였다. 그들
의 이같은 생각은 물론 운명론 사상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다. 그
러면서도 그들이 현재의 개인이 책임 문제보다 시대에 흥미를 가진 점은 일종의 기회
주의이다.
행 1: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
벴겔(Bengel)은 말하기를, "천국이 임하는 시간에 대하여 예언들이 확연하지 않게 된
사실(알기 어렵게 된 사실)을 보아도, 그것에 대한 권한이 하나님께만 있다는 증표이
다."고 하였다. 그는 또 말하기를, "그것이 멀지만 역시 가깝다. 우리는 시간 거리
의 멀고 가까움을 상관할 것 없이 그저 근면히 주님을 섬길 뿐이다."고 하였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
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이 때 예수님의 대답의 적극적
내용은 사도들과 일반 신자들의 할 일이 장래의 시일 문제에 대한 궁구(窮究)가 아니
고, 현재에 성령의 권능을 받아서 복음을 증거할 일이란 것이다. 여기 이른 바 "증인
이 되리라"고 한 말(* )은 "내 증인이리라"(Ye
shall be my witnesses)란 뜻이다. 그들은 성령의 권능을 받을 때에 벌써 그리스도의
증인의 성격을 지니고 있고, 장차 그렇게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증인은 사실에 근거
하고 말하는 것을 그 자격으로 한다. 전도자들은 이론가도 아니고, 이상가(理想家)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사건을 그대로 파악하고 신앙하고 남들에게 증거하되, 그것을 믿
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는 것을 선포하는 자이다.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들은 "교훈과
피로써 증거한다."(Bengel).
이 귀절에 포함된 지방들의 순서와 그 범위는 우리의 흥미를 끈다. (1)"예루살렘"
부터라고 했으니, 이것은 가까운 데서 시작하여 먼 데로 이르는 자연스러운 순서이다.
(2)"땅 끝까지" 이른다고 하였으니, 이는, 복음은 누구나 믿어야 할 지극한 진리요 보
배인 사실을 알려 준다. 누구든지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려면 인력(人力)으로는 못
할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는 말
씀이 먼저 나왔다.
이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은 "증인"이 될 것이니만큼, 그들이 수난(受難)하는 일은
있을지언정, 왕노릇 하거나 그 복음을 증거하면서 권세를 잡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행 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
게 하더라 - 후 불트만 학파 헨켄(Haenchen)에 의하면, 여기 묘사된 주님의 승천은 누
가(사도 행전 저자)가 그의 신학에 따라서 개편한 것이라고 한다. 곧, 초대 교회는
주님의 가가운 장래에 곧 강림하실 줄 알았는데 일이 그렇게 되지 않았기 때문에 누가
는 이제 새로운 재림으로 바꾸어 말하였다는 것이다. 즉, 주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가리워졌으니, 그 재림이 금방 실현된다는 생각은 아주 포기해야 된다는 것이
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에 대한 이와 같은 사상은 그가 땅에 계실 때에 그의 교훈에
(마 25:14-30) 벌써 계시(啓示)된 바이다. 헨켄은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여기에 관중(觀衆)의 흥분하는 정서는 전연 기록되지 않았다. 여기서 누가는 역사가
(歷史家)로서의 저자는 아니다."라고 하였다(Apostelgeschichte, 1965, s. 119). 헨
켄의 이 말은, 결국 사도 행전이 사도 시대에 저술된 사도 수종자의 작품임을 부인하
고, 그것이 후대의 산물이라고 간주함이다. 그가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이 승천 기사
(昇天記事)에 감상적인 요소가 없는 까닭이라고 한다(Unsere Geschichte ist
unsentimental). 그러나 그의 이 말은 성립될 수 없으니,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란 말은 제자들의 흥분되고 놀란 정서를 표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구름이 저를 가리워"란 말에 대하여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제자들은
그 때까지 예수님을 알게 된 그 지식의 분량으로써 만족할 것이고 그 이상 더 질의하
며 더듬을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구름이 가리웠다."고 한다. 이 해석은 일고(一考)를
요한다.
행 1:10,11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
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
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 예수
님의 승천 기사는 우리의 주목을 끈다. 이렇게 그의 승천은 시간을 잡고 제자들의 눈
앞에서 실시된 것이 알려진다. 제자들의 이 체험은 순간에 된 일이 아니고 참되고 구
체적인 시간 동안 바라본 것을 의미한다(Grosheide). 그러면 예수님의 승천은, 어떤
찰나적인, 혹은 순간적인 환상 같은 일이 아니고 구체적인 사건인 것이 드러난다.
"갈릴리 사람들아"라고 부른 것은 특별히 땅에서 예수님과 오랫 동안 사귀었던 그 정
든 곳을 연상케 하는 표현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제자들과 땅에서 사귄 것을 하늘에
가셔서도 단단히 기억하시고 늘 은혜로 도와주실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이 부분의
신령한 뜻에 대하여는 다음 페이지에 있는 설교를 참조하라.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이 말씀에 대하여 예수님이 그 때 승천하시
던 그 광경과 같이 오시리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이것
이 예수님의 인격의 불변을 가리킨다. 곧, 그는 하늘에 가셔서도 계속 우리의 중보자
(仲保者)로 계시다가 (히 13:8)다시 오실 때에도 중보자(仲保者)로 오시리라는 뜻이
다.
행 1: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 천국 운동은 이제 "예루살렘"에서 출발하게 되
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곳도 예루살렘이고, 부활하신 곳도 예루살렘이다. 주님
은 그의 제자들이 이 예루살렘에서, 성령을 받도록 작정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에도 제자들은 흩어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모이게 되었다.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란 것은 모세 율법에 작정된 어떤 법규에 의한 거리가
아니고, 다만 랍비의 법이었던 듯하다. 제롬(Jerome)은 말하기를, "이 법은 아트리바
(Atriba)와 시몬 헬리(Simon Heli)라는 두 랍비에게서 결정된 것이다."고 하였다
(Calvin).
행 1:13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 즈안(Zahn)에 의하면, 이 "다락"은 요한 마
가의 다락을 가리킨다고 하나(행 12:12) 확실하지 않다. 그들의 집회 장소가 이 다락
방만 아니었겠고 아마 성전도 사용된 듯하다. 120명이나 되는 대중이 한 다락방에서
모두 거처할 수 있었을까? 여기 언급된 "다락"은 그들이 거처한 주요한 장소만을 가
리킨 듯하다. 교회 역사상 복음의 큰 운동들은 언제나 주님의 말씀 중심으로 모인 그
가운데서 일어나곤 하였다.
행 1:14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
도에 힘쓰니라 - 이 때에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눅 24:49; 행 1:4)성령 받
기를 기다리며 기도에 전력하였다. 이 기도에는 두 가지 특색이 보인다. (1)"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함. 하나님의 은혜는 합심한 곳에 더욱 많아지는 법이다. 마음에 불
평이 있어서 서로 다투는 곳에서는 진정한 기도의 분위기를 이루지 못한다. 약 4:2
하빈-3에 말하기를,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
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하였다. (2)"전혀" 기
도에 힘씀. 이것은 끝까지 참으며 힘씀을 의미한다. 우리의 기도 생활에는 방해가
많다. 우리가 어떤 때에는 너무 사무에 분망하여 기도하지 못하고, 어떤 때에는 게울
러서 기도하지 못한다. 이런 방해들을 이기려면 힘써야 된다.
행 1:15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 "120명"이라는 말의 헬라어(* )
는 대략 120명을 의미한다.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베드로가
선두에 나서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가 회개한 후에 교회의 수반 지도자가 될
일에 대하여는 주님께서 일찌기 예언하신 바이다(눅 22:32). 그런데 로마교에서는 베
드로를 지나치게 높여서 그에게 기도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 나타난 대로도
그는 로마교가 생각하는 것 같은 그런 독특한 지위를 차지한 것이 아니다. 그는 다른
신도들을 가리켜 "형제들아"라고 하였고(1:16; 벧후 3:15하반), 맛디아를 사도 반렬에
세울 때에 자기 단독으로 임명하지 않고 회중으로 하여금 선출하도록 하였고(15-23),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 제비 뽑았다(24-26).
그 뿐 아니라 베드로의 권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도 로마교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이 문제와 관계된 마 16:16-18을 생각하여 보기로 하자. 베드로가 가
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
니이다"라고 고백한 뒤에 예수님의 칭찬을 받았는데, 그것은,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라고 하신 말씀이다. 우리가 여기서 기역할 것은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1)
"반석"이란 말이다. 헬라어에서 이 말(* )은 여성 명사이고, "베드로"란 말
(* )은 반석이란 뜻이 있는 남성 명사이다. 그러므로 여성 명사로 된 "반
석"은 시몬 베드로를 가리킨 것이 아니고, 그의 신앙 고백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
곧, 사도적 고백("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란 고백)을 가리킨
다. 엡 2:20; 계 21:14 참조.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을 "반석"이라고 하였다(마
7:24). (2)또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란 말씀을 기억하자. 이 말씀은 베드
로에게만 그런 독특한 권세를 주시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천국 열쇠"라고 하신 것은
사도의 권위(權威)로써 말씀을 전파할 특권을 가리키는데, 사도들은 모두 다 이 특권
을 받았으며, 그들이 그 권위를 옳게 사용하였다. 여기서 베드로는 그 들 중 하나로
관설된 것 뿐이다. 서기관가 바리새인들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특권을 가졌다(마
23:13). 다만 그들은 그 권세를 잘못 사용한 것 뿐이다. (3)베드로는 실제에 있어서
그의 자연적 인격으로는 교회의 반석이 아니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은 뒤에도
실수하였고(마 16:22-23, 26:69-75), 또 그가 의식하였기 때문에 바울에게 책망을 받
은 일도 있었다(갈 2:11-14).
행 1: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
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란 문구
는, 완전 영감설, 혹은 문자적 영감설을 잘 알려준다. "성령"은 배후의 역사자요
(Causa efficiens), "다윗의 입"은 도구(道具)로서 영감 사역(靈感使役)을 성취시킨
것이다. 그러면 성경의 예언대로 유다에게 성취된 요소는 두 가지니, (1)그가 귀한
직분을 받았던 사람이라는 것과(17절), (2)시 109:8의 성취로서 이 직분을 빼앗긴 것
을, 베드로는 지적하였다. 여기서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라고 하였는데,
"마땅하다"라는 말(* )을 반드시 될 일, 곧 필연성에 속한 것을 가리킨다.
곧, 성경은 신적 필연성에 의하여 성취되고야 만다는 뜻이다. 그 무엇이라도 성경의
성취를 막을 수 없다. 천지는 패할지언정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마 5:18; 요 10:35).
행 1:17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 이것
은 유다의 배신 행위를 지적한다. 그는 예수님의 사도직에 세움 받은 자였으나 종래
배신하고 말았다. 하나님은 사람이 없어서 일을 못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는, 제
사장 엘리의 집이 부패하였을 때에 사무엘을 세우셨고, 사울왕이 부패했을 때에 다윗
을 세우셨던 것이다. 그는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는 능력 있는 주님
이시다. 마 3:9 하반 참조.
행 1:18,19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곧두박질 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역사적 사실이기에 그 사건이 그 당시의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두루 알려진 것이
다. 곧, 예수님을 잡아 죽이도록 한 유다와 관계된 밭을 그 때의 본방언(아람어)으로
이름을 지어 "아겔다마"(* )라고 부르기까지 하였으니, 예수님의 피 흘리
신 사실은 너무도 명백한 역사적 사건이다. "아겔다마"는 피의 밭이라는 뜻이다. 마
27:3-10 참조.
행 1:20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 이것은 시 69:25,
109:8에서 인용한 것이니, 다윗이 그의 원수들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다윗은 여러
모로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여기서는 그의 원수가 예수님의 원수인 유다의 예표로 해
석되었다. 여기 "기록하였으되"란 말(* )은 흔히 신약에 나오는 구
약 인용의 머리말이다. 이 말은 현재 완료(現在完了)로서 한 번 기록된 후에는 언제
든지 존속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언제나 변치 않는 진리로 남아 있는 성경을
잘 가리킨다.
행 1:21,22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 이것은 예수님의 행적(行蹟) 전부에 걸치는 기간을 말한다. 이만큼 베드로는 복음 전도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고 있어야 할 것을 여기서도 암시한다. 그는 이제 유다의 사실에 기초하고 있어야 할 것을 여기서도 암시한다. 그는 이제 유다의 지위를 보충하기 위해 새로운 사도를 택하려 함에 있어서, 그 자격은 예수님의 역사적 행적을 충분히 목격한 자라야 될 줄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후보자 선거에 앞서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생활을 자초지종 친히 목도한 사람일 것이다. 10:40-41 참조. 이만큼 교회의 기초직(基礎職)인 사도는, 예수님의 행적의 역사성에 생명을 걸고 거기에 근거하고 사역하도록 된 것이다. 그 이유는 기독교는 어떤 이상(理想)들을 전하는 종교가 아니고, 예수님의 속죄 행동, 혹은 그의 속죄 사건을 전하여서 그 듣는 자들로 하여금 거저 받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도록 하는 확실한 역사적 종교이기 때문이다. 요일 1:1-4 참조.
행 1:23
저희가 두 사람을 천하니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 이들은 물론 하나를 택하려고 천거된 후보자들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열 두 사도 중에 망한 사람 유다를 보결시키려는 의도이다. 열 둘은 예수님이 본래 정하신 수효로서 택한 백성의 기본수이다. 우리는 여기서 벌써 교회 정치에 있어서 교직자 선거의 원칙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독재적이 아니다. 사도의 권위를 가진 베드로의 사회(司會) 아래서도 이렇게 회중의 천거에 의하여 일을 진행시켰다.
행 1:24-26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 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 - 그들이 최후적 결정을 하기 전에 기도한 것이 역시 교회 정치에 있어서 신본주의(神本主義) 정신을 보여준다. 교회의 직원 선거가 회중의 천거를 필요로 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순저히 회중의 인간적 의사에 전임된 일이 아니다. 회중해서 그것이 순전히 회중의 인간적 의사에 전임된 일이 아니다. 회중은 이 일에 있어서 사적(私的) 의견을 버리고 순전히 하나님의 뜻을 알고저 하며, 하나님의 간섭을 기구해야 된다.
"제 곳으로 갔나이다"란 말은 유다가 지옥으로 간 사실을 가리킨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말 뜻을 달리 해석하여 유다가 반역자의 자리(지위)로 갔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곳"이란 말(* )을 지위(혹은 직무)로 해석함 보다는 처소로 해석함이 자연스럽다. "제비 뽑는"것은 옛날에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례 16:8; 잠 16:33).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이 풍속은 없어졌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밝히 계시(啓示)되었기 때문이다.
행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 이것은, 그때에 기독 신자들 중에 대다수(大多數)가 육체적으로 우수한 조건 때문에 개종(改宗)된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 개종은 순연히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다. 거기에는 "육체"적 지혜, 능력, 문벌이 하등의 상관도 못가진다. "육체"란 것은, 인생의 물질적 부분만 아니고 정신적 부분까지도 포괄하는 순 자연인(純自然人)의 요소를 가리킨다. 기독자가 기독자 된 것은 이런 자연인의 요소로 성립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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