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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 18:1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 "고린도"는 아덴에서 50마일쯤 된
다. 이 도시는 주전 146년에 반 로마 운동을 격멸하기 위한 멈미우스(L.Mummius) 대장
으로 인하여 파멸되어 1세기 동안 페허로 있었다. 그 후 주전 46년에  율리우스  씨자
(Julius Caesar)로 말미암아 재건되었다. "아덴"은 우상이 가득한 도시인 반면에, "고
린도"는 도덕적 부패로 이름났다. "고린도"란 이름의 뜻이 방탕하다는 것과  관련되어
고린디아조마이(*                         =창기노릇 하다)란 말도 생겼다. 전도자는
부패한 도시에도 찾아가서 부패를 막기에 능력있는 복음을 전해야 된다.

 

 행 18: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
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고린도로 오기 전부터 그
리스도를 믿는 자들이다(Zahn). 저희 집에 있는 교회(고전 16:19)는 이들이 바울과 함
께 있던 그 때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그 때에 교회를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두 사람의 이름이 행 18:18; 롬 16:3; 고전 16:19; 딤후 4:19에 나오는데, 어떤 때
에는 브리스길라(혹은 브리스가)의 이름이 그 남편의 이름(아굴라)보다 앞서  나온다.
이렇게 된 것은 (1) 브리스길라가 그의 남편보다 먼저 그리스도께로 나아온  까닭이라
고 생각되기도 하며, (2) 그의 신앙 생활이 남편보다 우수했던  까닭이라고도  생각된
다. 이들은 바울의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던 부부이다(롬 16:4).
바울이 이들과 함께 거하게 된 사실은 특필(特筆)을 요한다. 외로운 나그네로서  복음
을 위하여 충성하는 주님의 종을 수종든 성도들을 성경은 칭찬한다(왕상 17:10-16; 왕
하 4:8-16). 이 부부 두 사람은 자기들도 망명객처럼 이리저리 쫓겨다니는 가련한  형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선대하였다.
   "본도"는 흑해 연안 소아시아 지방에 있는 곳이다. 그들이 로마에서 쫓겨난 이유는
글라우디오(Claudius) 황제가 유대인들을 철거시켰던 까닭이다. "글라우디오"는  주후
41-51년에 로마 제국을 다스렸다. 그가 유대인들을 축출한 이유는 역사가  슈도니우스
(Suetonius) 가 밝힌 대로, 유대인들이 그레스도(그리스도란 의미)의 지도 아래서  계
속적으로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Judaeos  impusore  Chresto  assidue
tumultantes Roma expulit.-Life of Claudius 25:4).  여기  슈도니우스(Suetonius)가
말한 "그레스도"(Chresto)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켰는지, 혹은  그런  이름을
가진 어떤 유대인 지도자를  의미했는지  확실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오로시우스
(Orosius)의 기록(Adv. Pagan., 7, 6, 15)도 역시 로마에서 유대인을 축출한  사건(주
후 49년 1월과 50년 1월 어간)이 있었다고  말한다(Grosheide,  De  Handelingen  Der
Apostelen, II. 1948, p.169). 디오 캐시우스(Dio Cassius)는 그가 저술한 로마  역사
에 말하기를, 글라우디오가 유대인을 축출하지 않고 다만 그들의 집회만 금지하였다고
한다(60, 6, 6). 그러나 이 기록은 다른 사건에 관한 말일 것이다.

 

 행 18:3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  바울과
아굴라 부부는 외지에서 나그네 된 점에서도 처지가 같을 뿐 아니라 그  생업도  같았
다. 그보다도 서로 가장 끌리는 점은 동일한 주님 예수를 믿는 믿음이다.  그들은  이
점에서 생사를 같이 하였다. "장막을 만드는 것"(*                   )은,  가죽이나
혹은 염소털로 짠 천으로 장막을 만드는 업이다. 이 장막은 사람이  가지고  다니면서
사용할 수 있는 종류인데 여행자, 목자, 상인 등에게 요구되었다고 한다.

 

 행 18: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 바울은 가
는 곳마다 회당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먼저 구약 계시를
받아 거기 약속된 메시야를 기다리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말한  "헬라인"은
이미 개종하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당에 참여하는 자들일 것이다.

 

 랭 18: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
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란 말(*        
                       )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예레미야의 체험으로 잘 설명
된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
나이다"고 하였고(렘 20:9), 또 "선지자들에 대한 말씀이라 내 중심이 상하며 내 모든
뼈가 떨리며 내가 취한 사람 같으며 포도주에 잡힌 사람 같으니 이는 여호와와 그  거
룩한 말씀을 인함이라"고 하였다(렘 23:9).
   신자로서 누구든지 (1) 하나님 말씀의 단 맛에 끌리면 그것도 말씀에  붙잡힘이고,
(2) 하나님 말씀의 옳음에 대하여 강하게 느낌도 역시 그렇게 됨이고,  (3)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함도 역시 그 말씀에 붙잡힘이다. 요한 번연(John Bunyan)은 몇  만명의
군대가 습격해 오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 어기기를 더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 뿐 아니라 (4) 구원의 능력이 되는 복음의 위대성을 느끼는 자는,  그것을  전하지
않을 때에 자기에게 화(禍)가 임할 줄 알게 된다. 그것이 역시 말씀에 붙잡힘이다.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유대인들은  메시야(그리스도)
약속을 받은 민족이다. 그러므로 메시야가 오셨다는 소식처럼 그들에게  기쁜  소식은
없다. 메시야 약속은 구약에 많이 기록되었는데, 후푸만(J.A. Huffman)이 요약한 대로
다음과 같은 여러가지로 약속되었다. (1) 여자의 후손(창 3:15), (2) 아브라함의 자손
(창 15:5), (3) 유다 지파와 자손(창 49:8-10), (4) 별(민 24:17), (5) 여러가지 구약
의 제도와 의식의 예표(히 9:9-14, 24-26), (6) 모세의 뒤로 장차 오실  "그  선지자"
(신 18:15), (7) 다윗의 자손(삼하 7:13-16), (8) 왕이요 또 제사장(시 110:1-7), (9)
열국의 심판자(사 11:1-5), (10) 이방인들의 소원과 빛(학 2:7) (11) 처녀의  아들(사
7:14), (12) 기름 부음 받은 자(시 2:2), (13) 베들레헴에서  탄생하는  자(미  5:2),
(14) 은 30에 팔릴 자(슥 11:12), (15) 찔릴 자(슥 12:10), (16) 열린  샘(슥  13:1),
(17)정화(淨化)시킬 자(말 3:1-3),  (18)  의(義)의  태양(말  4:2)(The  Progressive
Unfolding of the Messianic Hope, pp.79-80). 후푸만의 이 촬요가 물론 완전한  것은
아니다. 이 밖에도 여러가지 형태로 예언되었다. 예를 들면 고난 받는 종으로  약속된
것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사 53장).
   유대인이 하나님에게서 이런 귀한 약속들을 받았으며, 이제 그 약속들의  성취로서
메시야께서 오셨다. 이 사건이야말로 유대 민족에게는 전무  후무한  축복(영광)이요,
세계 인류에게 비취는 빛이다(눅 2:32). 그러므로 바울은 저 유대인에게 "예수는 그리
스도라"고 혀가 닳도록 외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울이 전한 케뤼그마(*       
   ), 곧 전도 내용의 처음이요 나중이다. "예수는 그리스도라"란 문구(*           
                               )는 "그 그리스도는 예수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여
기 정관사 "그"가 역설(力說)하는 의미로 쓰였고,  어순상(語順上)으로  "그리스도"란
말은 "예수"란 말보다 먼저 나와서 역시 역설체이다(grosheide). 이렇게 유대인이  기
다리던 "그 그리스도"는 곧바로 "예수"라고 여기서 역설되었다.
   "밝히 증거하니." 이 말의 헬라어(*                         )는 법정 증인의  증
언에 대하여 사용되는 말이었다. 여기서 바울이 "그리스도는 예수라"고 말하는 모습은
정식 법정 증인처럼 확신과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법정에서  증언
하는 증인의 말을 받아들일 책임을 진다. 그와 같이 하늘나라의 법정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바울 사도의 말도 액면 그대로 받아야 한다.

 

 행 18:6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
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 윗절에서  볼  수
있는 대로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힘껏(말씀에 붙잡혀) "밝히 증
거"하였다(5절). 그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의 말을 대적하였으니, 그들의 멸망
에 대하여 그에게는 책임이 없다. "옷을 떨어" 버림은 하나의 상징적인 행위로서  "나
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표시이다. 그가 이렇게 전도자의 책임을 다 한 것은 모든 전도
자들에게 모본이다. 누구든지 목회하다가(전도하다가) 그임지를 떠나게 되는 때에  바
울처럼 "옷을 떨" 수 있으리만큼 책임을 완수한 자로 나서게 된다면 만족하다. 그러나
게으른 교역자, 무능한 교역자로서는, 그 임지를 떠날 때에 도리어 많은 책임들을  실
행하지 못한 형편에서 엎드러질 정도로 정도로 무거운 짐만 지고 떠나게  될지니,  그
얼마나 비참한가!

 

 행 18:7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집이
회당 옆이라. -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들의 회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유하였으니, 다만 그 옆집으로 옮긴 것이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핍박하
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생겼으며(8절), 또 더 생길  소망이
있기 때문이었다(9-10). 사도는 성령님의 인도로 처신하였으니, 핍박을 당할 때에  멀
리 다른 곳으로 옮긴 일도 있었으나(9:25) 이번 경우와 같이 핍박하는 장소 가까운 곳
에 머무는 일도 있다. "디도유스도" 는 그 이름으로 보아서 로마 사람인 듯하다. 바울
이 아굴라로 더불어 여전히 친근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을 떠나서  유스도의  집으로
옮겨 거주하였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이방인들과 교제하며 복음을 전하려는  것이었
을 것이다(Zahn Apostelgeschichte II, 1927, s. 648-649).

 

 행 18: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 "회당장"이 자기 가족들과 함께 주님을 믿게 된 것은 작은  사
건이 아니다. 그는 많은 유대인들에게 지도력을 가졌을 것이다. "주를 믿으며"란 말(*
                                    )은 문법상 구조로 보아서 구원 받을 믿음을 가
리킨다(Cremer-Kogel). "수다한 고린도 사람"이란 것은 헬라 사람들일 것이다. 그  이
유는 고린도 전서를 읽어볼 때에 고린도 교회는 주로 헬라인 신자들로 구성되었기  때
문이다(고전 1:22).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될터이므로 바울이 핍박을  받
으면서도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성령니가의 인도로 그렇게  되었
다. "듣고 믿어"란 문구(*                                    )는  "들으면서  믿는
중에 있으며"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이 말은 과거  미완동사(過去未完動詞)로  되어서
행위의 계속을 가리킨다. 그 때에 많은 이방인들의 회개 운동이 계속되고 있었다.
   하나님의 복음을 참되이 전하는 사역자들에게는 일면 핍박을 받는 괴로움이 있으나
(6절), 다른 한편 놀랄 만한 위로도 있다. 그것은 회당장 그리스보와 같은 요긴한  인
물이 온 가족과 함께 열심으로 복음을 받고 믿은 일과 또 많은 고린도 사람들도  믿고
세례를 받은 귀한 사실이다. 복음의 사역자가 핍박 중에 괴로와도 이와 같은 귀한  사
실때문에 절대적인 힘과 위로를 받아 능히 핍박 받는 괴로움을 감수하게 된다.

 

 행 18: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
하라. - 주님은 핍박 받는 바울에게 놀라운 위로를 주셨다. 그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만으로도  바울에게 용기를 백배나 주셨을 터인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고  격
려해 주셨다. 전도하는  말씀에 대하여 유대인들의 반대를 받고 있는 그때에,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말을 하기에  곤란하게 된 그 때에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고  하
신 주님의 명령은 전도자 바울에게 가장  큰 힘이 되었다.
   "두려워하지 말며."  이 말(*               )은 현재사이니만큼  계속되는 행동을
가리키므로 어떤 한  가지 사건 때문에 순간적으로 공포를 느끼게  될 것을  금하시는
말씀이 아니고, 계속적으로 두려움 없이  지내라는 것이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도 하
나님에게서  이런 부탁을  많이 받았다.  출 3:12;  수 1:6-7, 9; 사 43:5; 렘 1:8 참
조.  두려워 하지 말라는 말씀이 성경에 365 차례나 나온다는 학설도 있다. 이것은 하
나님 밖에 다른 것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고 다른 것들을  너무 두려워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죄요, 유황
불 못에 던짐 받을 죄악이다(계 21:8 상반).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듣든지 말든지 전파되어야 한
다. 겔  2:7; 딤후 4:2 참조.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이 많이 있는 곳에서는 더욱 그렇
게  되어야 한다. 이렇게 말해야  할 이유는, 그 말하는 바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
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헛되지 않고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삼상3:19; 사 55:10-11
).

 

 행 18:10,11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
는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일 년 육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
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 여기 "내가"란 말(*     )이 강세(强勢)를  띠고  있다.
그것은 바울과 함께 계신 이가 주님이신 사실을 역설하심이다. 이 사실은, 바울이  고
린도에서 선교해야 될 사실과 또  그  선교에  열매가  반드시  있을  것을  확보한다
(Grosheide).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은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들이 받은 것이다(출
3:12; 렘 1:8).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다시는
폭력의 박해를 당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그 어떤 박해가 와도 그를 실
제로 해롭게 하지는 못한다는 의미의 약속이다., 하나님의 종이 때로는 반대와 난관을
당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해를 받지 않음은 이적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주
시는 결과이다. 그런 난관 중에서 그는 한 동안 답답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님께 계속 부르짖으면 그 가운데서 마침내 벗어나서 해를 당하지  않게
된다. "이는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여기 "백성"이란 말(*       )은  하나
님의 택한 백성을 이름이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
나님의 보호를 받는다. 이렇게 그곳에 하나님의 백성이 많았던 고로 바울은 "일 년 육
개월"이나 거기에 유하며 가르쳤다.


 행 18:12,13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재판
자리로 데리고 와서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 "갈리오"는 스토이고 철학자 세네카(Seneca)의 형이다. 그는 성격이
온화하고  친절한  사람이라고,  역사가는  전해준다.  특별히  고린도의  델피  신전
(Templeof Dellphi)의 벽에 글라오디오 황제의 편지가 조각되어 있는데, 거기에  갈리
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곧, "나의 친구 갈리오"(*                              
                   )라고(Grosheide, Handelingen II, 1948, pp.178-179). 그 때  아
가야 총독은 로마 의회에 속하지 않고 로마 황제에게 직속했었다. 이 때에 유대인들이
갈리오의 권세에 의지하여 바울을 핍박하려고 했다. 그러나 선량한 사람 갈리오는  유
대인들의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이렇게 주님의 약속(10절)은 성취되었다.  하나
님은 그의 종들을 이적으로 보호하시는 일도 있으나 때로는 보통 섭리에 의하여  그들
을 보호하신다.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이것은 유대인들이 바울의 복음을  오전(誤
傳)한 말이다. 바울은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 공경하는 종교를 말하지  않았을  것이
다. 그는 율법이 성취된 형태인 복음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하였을  것이다.  그는
율법이 성취된 형태인 복음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하였을 것이다.  복음은  율법과
선지자의 성취로 나타난 것이니 율법 그것은 아니다. 그러나 복음이  율법(도덕적  율
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그것을 완전케 한다(롬 3:31). 다만 의식적(意識的)
율법만은 복음이 온 때에 점진적으로 해소되었다(히 9:10). 이상과 같은 것이  바울의
사상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왜곡하여 바울이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공경
하라"고 한다고 고소하였다. 언제나 의인(義人)을 대적하는 자들은 말을 오전하며  과
장하는 진실치 않은 수단을 사용한다. 마 26:60-61 참조.

 

 행 18:14-16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무슨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가하거니와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
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고 저희를 재판 자리에서 쫓아내니. - 갈리
오는 여기서 합법적인 단안을 내렸으니, 곧 법정(法廷)에서는 불의하게 남을 해친  사
건이나, 혹은 불량한 행동만 취급한다는 것이다. 여기 "부정한 일"이라고 번역된 것(*
             )은 남을 해친 불의한 행동을 가리키고, "괴악한 행동"이라고 번역된 것
(*                     )은 불량한 행동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는 종교적 술어나  명
칭 같은 것에 대한 논쟁은 법관으로서 상관하지 않는다고 덧붙여 말하였다.
   "언어"(*         )는 종교상 교리를 가리키며, "명칭"(*             )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하는 그 말을 가리킨다. 갈리오가 이 때에 유대인 앞에  내세운  주장은
그가 유대인과 바울의 쟁점(爭點)(13절)을 바로 파악한 말이다. 바울이 주장하는 종교
적 사실을 유대인들은 반대하였다(Alford). "너희 법"이란 것은 유대인들의 율법(로마
의 법률이 아님)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의 율법은 종교적인 것이므로 그런  것에  관한
논쟁에 대하여 로마의 법관들이 관계하지 않았다.

 

 행 18:18

  바울은 더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 갈새  브리
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 서원에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
았더라. - "브리스길라"는 아굴라의 아내인데도 그의 이름이 그 남편의 이름보다 먼저
나온 것은, 그 여자의 신앙이 그 남편보다 앞선 까닭이겠다(Bengel). 이들 부부가  바
울을 따라서 먼 길을 같이 떠남은, 그들 세 사람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
으로 하나가 되어 서로 헤어질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울도 그리스도를 사랑하
거니와 이들 부부도 바울 못지않게 그러하니(롬 16:3-4)여기서 저들 세 사람의 관계는
영적으로 밀접했다.
   "서원"(*         )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위험한 일을 당했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
로 구원 받은 것 때문에(12-17) 다시 헌신하는 의미로 한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말하기를, 바울이 이제 멀고 위험한 여행을 경영하고  있으니만큼(18절
상반) 이런 재헌신을 의미하는 서원을 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그 서원은 일종  나시르
(*       )서원인데, 일정한 기간 동안에 머리를 안깎고 있다가 그 기간이 다하는  날
에 머리를 깎는 것이다. 나시르 서원에 대하여는, 민 6:1-21; 삿 13:5 을 참조하라.
   "겐그레아"는 고린도 동쪽으로 9마일쯤 떨어진 항구이다. 이 항구는 아시아와 교역
이 빈번한 무역항이다.

 

 행 18:19

  에베소에 와서 저희를 거기 머물러 두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
하니. -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도시로서 아데미 신전(神殿)이 있는 곳이
다. 이곳은 바울이 얼마 후에 다시 와서 3년동안이나 유하면서 복음을 전한  도시이다
(20:31). 그가 이 때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이곳에 머물도록 하였다.  여기  "자기
는"이란 말(*         )은 역설체로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대조되는 바울의 처지
를 말해준다. 곧,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에베소에 오랫동안 거주하는 반면에  바울은
회당에 가서 전도한 후에 그곳을 떠날 처지라는 것이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회당에 가서 그들과 변론한 것은 규례였다(13:5,  14,  14:1,  17:1-2,  10,
19:8). 유대인들의 회개를 위한 그의 열심은 말할 수 없이 뜨거웠다(롬 9:1-5, 10:1).

 

 행 18:20.21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지 아니하고 작별하여 가로되 만일 하나님
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고를  떠나.  -  몇몇  사본
(D.H.L.P.)에는 "작별하여 가로되"란 문구 다음에 "나는 어떠하든지 예루살렘에  있어
절기를 지켜야 하리라"는 문구를 더 가지고 있다. 바울의
에베소 방문은 그곳 신자들에게 큰 축복이었다. 사람들이 아무리 주님의 종을  체류시
키기를 원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안된다. 바울은 에베소에  다시  올
수 있는 기회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될 줄 알고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
라"고 말하였다. 그는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참된 신자
의 생활이다.

 

 행 18:22,23

   가이사랴에서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 - 바
울이 "가이사랴에서 상륙하여 올라갔다"고 함은 예루살렘 교회로 올라갔다는  말이다.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이것은 바울의 제 3 차 선교 여행의
시작을 말한다. 그의 제 1 차 선교 여행의 출발은 13:4에, 제 2 차 선교 여행의  출발
은 15:36에 각각 기록되어 있다. 이번 제 3 차 선교 여행에 있어서 그는 신자들을  가
르치고 지도하여 그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는 일을 하였다. 그는 또한 많은 새  신자들
을 얻는 전도 집회를 가졌고(19:8-10), 또 많은 핍박도 받았다(19:23-41, 21:27-36).

 

 행 18: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 "알렉산드리아"는 아프리카의 도시로서 옛날의  학도(學都)
였다. "학문이 많고"라고 번역된 헬라어(*                    )는 "말 잘 하는 사람"
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다. 14:12 참조. 벴겔(Bengel)은 말하기를, "사람이 성취한  것
은 무엇이든지 교만이 동반하지 않는 것이면 천국에  유용하다."고  하였다(Gnomon  ,
p.647). "성경에 능한 자라"함은 성경을 잘 알 뿐 아니라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비결
을 잘 활용하여 사단의 궤계(詭計)를 능히 막기까지 함을 말한다(Calvin).

 

 행 18:25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에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
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 아볼로가 학문이 많고 예수님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예수님에게 대한 그의 지식은 넉넉지 못하였다. 그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알았던 정
도의 지식을 가진 것 뿐이었다. 실상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의 완성을 보지  못하
고 별세하였으니 만큼 예수님에게 대한 그의 지식은 빈약하였다(마 11:11).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는 말은 예수님과 관련된 세례 요한의 사역과  증거를
아는 정도란 뜻이다.

 

 행 18: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 "브리스길라"는 아굴라의 아내임에도 불구
하고 여기에 그의 이름이 먼저 나온다. 이것은 그 여자가 신앙과 진리 지식에  있어서
그의 남편보다 앞선 까닭이다(Lenski). 그 여자가 실상 주동이 되어 아볼로를  가르쳤
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가 단독으로 행하지 않고 그 남편과 함께 그런  활동을  한
것은 여자의 덕을 지킨 증표이다. 아볼로아 같은 대학자(大學者)도 신령한 교리에  대
하여는 먼저 아는 자들에게서 배웠다.

 

 행 18:28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말을  이김일러라. - 예수님께서 바로 구약의 예언 대상인 메시야라고 함은 언제나 필요한  전도 내용이다.  특별히 초대  교회에는 이 주장이 더욱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그 이유는 그 때에는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님과  성경과의 관련성이  먼저  밝혀져야하겠기 때문이다. 구약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 들에게는  형식적이나마 구약  성경이그들의 신앙 근거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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