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17:1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
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 "암비볼리"는 군사 도시로서 빌립보에서 33마일쯤 떨어진 곳인데 거기서
"아볼로니아"까지는 30마일쯤 더 멀다. 그리고 아볼로니아에서 37마일쯤 더 가면 "데
살로니가"이다.
"규례대로"란 말은 바울이 어느 곳에 가든지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 전함을 가리
킨다(롬 1:16). 바울이 "세 안식일"이나 걸쳐서 유대인의 회당에서 "성경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하였다. "성경을 가지고"란 말(* )은 "성경에
서"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곧, 성경에서 증거 재료들을 끌어내어 예수님의 메시야인
사실을 증명하였다는 뜻이다. (1) 기독교 복음은 구약 성경의 성취로 나타난 것이므로
바울의 설교는 성경 중심이 아닐 수 없고, (2)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니 그의 설교
가 성경에 기준하였고 (3) 성경은 그리스도를 중심한 책인 만큼 그리스도를 전하기만
위주하는 그가 성경으로써 설교할 수 밖에 없었다. "강론하며"란 말(*
)은 변론한다는 뜻이니, 바울이 유대인들을 상대로 서로 문답하면서 변론한 것을
가리킨다.
행 17: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 그리스도께서 죽으셨
다가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언한 것이 구약의 내용이다. 그리고 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는 것이 그 백성을 구속(救贖)하시는 하나님의 방침이었다. 그러니만큼 본문
에 "...야 할 것"(* )이라는 말은 신적 필연성(神的 必然性)의 의미를 가진다.
그리스도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사건은, 하나님께서 예언하셨고 하나님께서 이루
실 일이니, 그대로 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성이었다. 예수님도 자지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되실 일에 대하여 성경으로 논증하셨다(눅 24:25-27).
행 17:4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 - 이들은 유대교에 입교한 헬라인을 가리킨
다. 바울의 회당 전도를 듣고 회개한 유대인은 별로 없었으나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
리는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다. 유대인은 구약 성경을 오랫 동안 소유했으나 강퍅하여
져서(고후 3:14) 외식으로 흘렀고 영안이 어두워졌다. 따라서 그들은 성경이 예언한
메시야가 예수님이신 줄 몰랐고, "예수가 곧 그리스도(메시야)"라고 하는 바울의 성경
적인 주장을 받지 않았다.
"귀부인"이란 말(* )은 "중요한 사람들의 부인
들"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Grosheide). 13:50 참조.
행 17:5-9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참된 복음 전도 운동의 결과로 믿는 자들이 많이 생긴 반면
에, 유대인들의 시기로 인한 핍박도 일어났다. 이 핍박하는 자들의 운동 성격을 보면,
(1) 시기함(5절 상반). 비진리로 움직이는 자들은 시기와 증오로 행한다. (2) 괴악한
자들을 내세워 이용함(5절 중간). 악도는 악도와 합작하는 법이다. (3) 소동함(5절 하
반). 악도들은 혈기와 악독으로 행하기 때문에 소동한다. (4) 관헌(官憲)을 동원함(6
절 상반). 하나님의 복음을 핍박하는 자들은 언제나 이런 버릇이 있다. (5) 복음 전하
는 사람들을 가리켜 도리어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라고 악선전함(6절 하반). 복음
은 세상에 속한 악인들에게 전연 이해되지 못한다. (6) 예수교가 세상 나라 정치에 반
역한다고 악선전함이다(7절).
복음을 반대하는 무리들의 이와 같은 운동에 있어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배경을 소유하지 못한 그들의 인간적인 발악이다. 그들의 방법은 "소
동"(* ), "소리지름"(* ), "놀람"(* ) 등
이다. 이런 것들은 연약한 인간들의 무모한 발악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평화
롭고 능력 있고 여유있는 행동 원리와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행 17: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 "밤에...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낸"것은 그들의 피신을 위한 것이
었다(Ironside). 신자들이 특별한 이유 없이 위태한 자리에 머물거나 그런 데 뛰어드
는 것도 잘하는 일이 아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
든 저 동네로 피하라"고 하셨다(마 10:23).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이렇게 유대인의 회당을 먼저 찾아 감은 사도 바울
의 전도 순서였다(13:5, 14, 14:1, 17:5; 롬 1:16).
행 17: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
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 여기 "신사적"이란 말(*
)은 문자적으로 귀족 출신을 의미하는데, 이는 심령의 고상함을 가리킨
다. 심령이 고상하다 함은, 즈안(Theodore Zahn)의 해석대로 열심을 다하여 날마다 성
경을 상고하는 태도이다(das Wort mit aller Willigkeit aufnahmen, taglich die
Schriften unter suchend.-Apostelgeschichte II, 1927, s.593). 그들의 이와 같은 심
령은 성령으로 새워진 결과였다. 성경을 상고한 그들의 태도가 고상하다고 할 이유는,
(1) 그들이 받은 전도의 말씀을 인간적 지식으로 비판하려 하지 않고 성경에 의하여
자기들의 의심을 끝가지 없애려고 한 까닭이며, (2) 바울이 전해 준 말씀도 과연 성경
(기록된 말씀)과 부합 하는지 알아본 까닭이다. 윌렝가(Wielenga)는 말하기를, "성경
은 언제나 교회의 기초가 되며, 신앙을 견고케 한다."고 하였다(De Schrift is het
fondament van de kerk, de vastigheid des geollfs.-Van Jerusalem Naar Rome,
Tweede Deel, 1928, p.351).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여기 이른 바 "간절한 마음"이란 말(*
)은 모든 열심이란 뜻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그것을 귀히 여겨 간절
히 사모하는 자에게 생명으로 임한다. 간절하지 않은 자들은 개나 돼지와 같이 복음의
귀중성을 모르는 자들이니, 그들에게는 복음의 은혜가 임할 이유가 없다(마 7:6). "이
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상경을 상고하므로." 이 세상 책들은 천단(淺短)하고 구원
진리가 없으나 성경 진리는 깊고 구원 진리가 확실하기 때문에 "이것이 과연 그러한
가?"하고 깊이 탐구하는 자들을 환영한다. 성경은 깊이 탐구하지 않는 자들을 자격 있
는 제자로 여기지 않으며 그런 자들에게는 문을 닫는다.
행 17: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 성경을 간
절히 사모하는 자들에게는 믿음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성경은 실패가 없으므로 성경을
간절히 상고하는 자들도 실패하지 않는다. 4절 주석 참조.
행 17: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
5-9절에 대한 주석을 참조하라.
행 17: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어 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유하더라. - 여기 "형제들"이란 말(* )은 기독 신자들을 가리키고,
"곧"이란 말(* )은 그들의 급속한 처사를 가리킨다. 그곳 신자들은 유대인
들의 박해가 미치기 전에 즉시 바울을 피신시켰다. 그들이 "바다까지 가게"한 목적은
그로 하여금 해로(海路)로 아덴에 가도록 하려는 것인 듯하다. 그리고 실라와 디모데
를 베뢰아에 체류하게 한 목적은 그곳 어린 교회를 돌보게 하려는 것이었다.
행 17:15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인도하는 사람들"이란 말(*
)은 안전한 곳에 가져다 두는 자들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을 바울의 여행길을 안내할 뿐 아니라 그를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
다. 바울의 선교 활동에는 이렇게 많은 협조자들이 필요하였다. 하나님의 교회 건설은
여러 지체(肢體)들을 합작을 절대 필요로 한다. 이런 합작이 있어서 그 지체들도 영적
으로 참되이 살고 몸 된 교회도 참되이 성장하게 된다. 고전 12:14-17 참조.
행 17:16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
여. - 아덴은 옛날부터 철학의 도시요, 동시에 우상의 도시였다. 철학은 우상을 없애
지 못한다. 그 이유는 철학 역시 우상 종교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인간 자율주의 산물
이기 때문이다. 우상은 신화(神話)의 종교적 표현인 동시에, 철학은 신화의 지적 표현
이다. 그만큼 이 둘은 서로 자매 관계를 가진다. 우상주의를 없이하는 능력은 계시 종
교(啓示宗敎), 곧 기독교 뿐이다.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이 분하여." "분하여"란 말(*
)은 흥분됨을 의미한다. 이런 심리는 물론 통분한 감정을 포함한다. 이는, (1)
우상의 거짓된 것에 대한 분노요, (2) 하나님을 섬기도록 지음 받은 인류가 우상 섬기
는 데로 타락한 것을 원통히 여김이다.
행 17: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
하니. - 헬라 원문에는 "그러므로"란 말(* )이 이 귀절 앞에 있다. 그러면 바울의
변론은 그의 분한 마음(16절)에서 나왔다는 뜻이다. 그는 각계 각층의 인사들에게 각
기 적합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한 것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행동 원리 그대로이다.
곧,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율법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고 한 그대로이다(고전 9:20-21). 그는 유대인들을 회개케 하려고 "회당"에 찾아 갔
고, 아덴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는 "저자"로 가서 "변론"했다. 여기
"저자"란 것은 도기 시장(* )이었을 것이다. 그곳이 아덴의 상업
중심지였다. 아덴의 철학자들은 저자에서 가르치며 변론하는 풍속이 있었다. 쏘크라테
스(Socrates)는 시장에서 가장 사람이 많이 모인 시간에 가르쳤다고 한다(Knowling).
더우기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찾아가야 된다. 기독교는 은밀한 모퉁이나 구석진 곳에 숨어 있을 것이 아니다. 눅
12:3 참조.
행 17:18
어떤 에비구레오아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
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 "에비구레오"(*
) 철학은 에피큐로스(Epicurus B.C.341)란 철학 자가 세운 학파이다. 그는 사모
스(Samos) 섬에서 출생한 사람인데 열두 살 때에 그의 스승이 우주의 창조에 대해서
말해주면서 이르기를 모든 것이 처음엔 혼돈체에서 나왔다고 하니, 그가 묻기를, "혼
돈체는 어디서 나왔습니까?"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는 윤리 철학에 있어서 쾌락을 추
구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쾌락 생활을 하기 위하여는 (1) "신(神)들을 두려워하
지 말지니 신은 인간계를 다스리지 않는다"고 하였고, (2) "사망을 두려워하지 말지니
사망은 인간을 감미있는 잠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3) "먹으라, 그러나 남
들과 함께 먹으라 그리해야 더욱 쾌락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런 윤리 철학은 하나님
의 뜻을 모르는 순 인본주의(人本主義)니, 반유신론(反有神論)이다.
그의 우주론은 그가 소년 시절부터 관심을 두고 있던 혼돈체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데서 나온 것인데, 혼돈체란 것은 없다고 하며 세계는 원자(原子)의 우연적 운동으로
인한 진화체(進化體)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의 영원설이니 창조론을 반대하는 것으로
서 그릇된 우주론이다. 그는 말하기를, 인간의 영혼은 원자들의 합성체인데 뜨거운 기
운과 같은 것으로서 그 감각하는 부분은 이름 모를 무슨 물질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파멸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이론은 순전히 유물론(唯物論)이며, 반유
신론이다.
"스도이고"(* )철학은 주전 340년 경 구브로(Cyrus)에서 출생한 제논
(Zenon)이란 철학자로 말미암아 세워진 학파이다. 세네카(Seneca), 아우렐리우스
(Aurelus-그는 후에 기독교로 돌아왔음)등이 이 학파에 속한다. 이 학파는 지식론(知
識論)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우리의 지식은 감각에 의해서 얻는 것인데,
근 진위(眞僞)의 표준은 그 감각한 바가 그 감각의 객관적 대상과 부합하는가 봄
(Correspond)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관적으로 생각하여 말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참되다는 명목론(名目論)이다. 명목론은 실재론에 반대되는 명칭이다. 실재
론은 추상적 방법으로써 감각 세계의 근본체를 탐구하고, 명목론은 감각으로써 감각
세계 곧 현상 세계를 참되다고 보는 것이다. 이 명목론은 지식론에 있어서 진위의 궁
극적 심판을 사람의 주관에 돌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식론은 궁극에 이르러서
는 해답이 막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소가 무엇이냐?" 할 때 명목론자는 대답하기
를, "그것은 동물이요" 할 것이며, 다시 "동물이 무엇이냐?" 할 때엔 그가 이것을 대
답하기 위해서는 생명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생명이 무엇인가 알려면 그것이
무생물과의 관계 여하를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다시 그렇게 궁리하여 우주의
끝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그래도 소에 대한 궁극적 해답은 얻지 못한다. 소에 대한
궁극적 해답은 결국 인간의 지식 행위가 탐득(探得)할 수 없고 오직 절대적 지능자,
곧 우주를 창조하신 자(하나님)만이 아실 수 있다. 우주론에 있어서 스토이고 철학은
물활론(物活論)을 주장한 셈이니, 그것을 바꾸어 말하면 물심 일원론(物心一元論)이
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은 우주 이성(宇宙理性)의 일부분을 받아 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일종의 범신론적(汎神論的) 경향을 가진 영혼론(靈魂論)이고, 창조주를 생각하
지 못한 자율주의 학설이요 반유신론이다.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이것은 바울을 업신여기는 욕이다. "말장
이"(* )라는 것은, 그 어원으로 보아서 새가 낟알을 쪼아 먹듯이
여기 저기서 지식의 조각들을 얻어 가지고 남을 모방하여 말하는 자라는 뜻이다. 이것
은 바울을 오해한 그릇된 말이다. 바울의 설교는 철학이 아니니, 어찌 철학의 수준에
서 비판을 받으리요? 바울의 설교는 모든 철학을 거짓이라고 심판하는 유일한 진리인
것이다.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여기 "이방 신들"(*
)이라고 한 것은 본래의 헬라 신(神)과 다른 신들을 말함이다. 이런
신들을 전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도록 되었었다. 쏘크라테스(Socrates)는 이런 혐의를
받고 사형을 받았는데(Xen, Memm 1:1, Plato, Apol.,24B), 이 때에 바울도 그런 위험
한 누명을 쓰게 될 처지에 있었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성경에 그렇게 생각
될 만한 근거는 없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
보자(仲保者)가 되셨다는 바울의 전도는 아덴의 철학자들에게 새로운 말이었다(19절).
하나님의 복음을 이세상 지혜로는 깨닫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고전 1:20에,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
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라고 하였다.
행 17:18,20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새 교가 무엇인
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
자 하노라 하니. - 바울이 붙들리어 "아레오바고"(戰爭神의 언덕)로 간 것은 재판 받
기 위함이 아니고 자유로이 진리를 강론할 기회를 얻도록 되기 위한 것이었다. 아덴
사람들이 바울에게서 어떤 새로운 말을 듣고자 한 것은 하나의 지식욕으로 그러한 것
뿐이고 양심적 요구나 종교적 요구로 그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바울의 이번 설
교는 별로 열매를 가져오지 못하였다(32절).
22-31. 이 부분은 아덴에서의 바울의 설교이다. 그가 아덴의 아레오바고에서 설교
한 것은 언뜻 보면 이방의 우상주의와 어느 정도 타협한 듯하다. 특별히 22절의 말씀
이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그 설교도 해석해 보면 타협 정신을 보인 것이 아니다. (1)
16절에 있는 대로 바울이 아덴에서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한 생
각이 있었다. 그리고 (2) 그의 전도를 들은 자들도 그를 가리켜 "새교"를 말하는 사
람, 혹은 "이상한 것"을 들려주는 사람으로 여겼으니, 이는 그들의 종교와 아주 딴 것
을 가르친다는 뜻이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에
대하여 말한 까닭이었다(18절 하반). 이런 전도는 실상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가 헛된
일임을 지적하여 그것을 내버리게 하려는 것이다. 14:1-15 참조. 그러므로 바울이 아
덴 사람들의 우상 종교와 아주 반대되는 참 종교를 가지고 그들과 자기 사이에는 공통
점이 없음을 명백히 한 것이 사실이다. (3) 24-29절까지는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이
신 것을 성경적으로 말하여, 하나님은 아덴 사람들의 우상과 다르다고 지적하였다. 특
별히 하나님께서 만물의 창조자이심을 지적하여, 사람이 그를 손으로 만든 물건으로
섬길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24절 하반, 25절 상반 참조. 이 점에 있어서 특별히
29절을 밝혀준다. 거기에 말하기를,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
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고 하였
다. 이렇게 바울은 아덴 사람들의 우상 숭배를 책망하였다. 사람이 복음을 알게 된 시
대에는 더욱 그런 우매한 짓을 할 수 없다는 진리가 여기에 고조되었다.(F.F. Bruce,
The Book of The Acts, p.361).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전도하면서 그곳 사람
들의 제사 행위를 금지시킨 일이 있었다(14:11-15).
행 17: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
이 많도다. - 여기 "종교성"이라는 말(* )은 "미
신"(迷信)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 한역과 같이 종교성
을 의미한다(Grosheide). 곧, 선한 데로나 악한 데로 흘러 판정 받기 전의 인간의 종
교적 본능 그 자체를 의미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덴 사람들의 종교성의 잘못된 발전을
벌써 죄악시(罪惡視)한 것이 사실이다(16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저 이교도들
에게서 대화의 접촉점을 찾고자 하였으니, 그 접촉점은 "종교성"이란 것이다.
행 17: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
"알지 못하는 신"이란 말은 어떤 학설에 의하면, 아덴 사람들이 처음엔 알다가 후에
잊어버린 신(神)을 의미한다고 하나 근거없는 해석이다. "알지 못하는 신"이란 말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신을 말함인데(Bengel), 그 나타낸 일들을 통하여 그의 존재함
이 알려졌지만 그의 이름만은 사람들이 모르는 신이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아덴 사
람들이 잘 모르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 아래에 자세히 알게 하여 준다.
행 17: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 만물을 창조하신 신은 없던 것을 있게 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
므로 그를 인조(人造)의 전당(殿堂)속에 좌정시킬 수 있다고 생각함은 어리석다. 창조
주 하나님을 창조주답게 공경하는 방법은 인간 편에서 믿음으로 그와 관계함이다(히
11:6). 창조주는 우리의 신앙을 일으킨다. 우주 만물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니 만큼
그것을 창조하신 이가 계시다는 것이 진리이다. 우연으로 된 만물이라면, 그것이 무법
칙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상대한 과학도 있을 수 없다. 그 뿐 아니라 우연에 의하여
이법(理法)있는 것들이 생겨날 수 있다면 그런 일이 현재에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
재에는 그런 일이 전연 없다. 그러므로 우연히 우주 만물이 되었다는 것을 믿기는 이
적(異蹟)을 믿기보다 더 어렵다. 우리는 창조의 진리를 믿으며 창조의 권능을 기쁘게
믿는다.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시대로 건축된 성전
에도 계시지 아니하신다(왕상 8:27). 다만 성전은 그의 이름, 곧 그의 계시가 있는 곳
이다. 그러므로 그곳에서, 혹은 그곳을 향하여 기도하는 자들의 기도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상달되었다(왕상 8:28-31). 신(神)께서 일정한 장소에 머문다는 사상은 우상
주의에 속한다. 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하시므로 가까운데도 계시고 먼 데도 계시며, 만
유 안에도 내재(內在)하시고 또한 만유를 초월하여 계신다(렘 23:23-24). 그러므로 우
리가 그의 말씀에 의하여 그를 믿음이 곧 그를 섬김이다(요 6:29; 행 17:31).
행 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
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 이것은, 우상교도들이 물건들을
가져다가 신당에 바치는 행위를 헛되게 여기는 의미에서 한 말씀이다. 그들은 그런 헌
물(獻物)로써 우상에게 제사하고 스스로 위로를 받는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은 무엇
이 부족하여 인간의 헌물을 원하시랴(시 50:7-15). 도리어 하나님께서 친히 인류에게
"생명과 호흡"과 기타 "만물"을 주신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에 관하여 대조적(對照
的)인 말을 사용한다. 곧, 그가 받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을 주시는 이라는
것이다(Hans Conzelmann:Gott nimmtnichts, er gibt alles.-Die Apostelgeschichte,
1963, s. 98-99). 누가 무엇을 하나님께 기증할 수 있으랴? 롬 11:35 참조. 이 점에서
보아서도 인간은 하나님을 믿는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인 줄 알아야 된다(요
6:29).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 하나님의 주시는 것들 가운데
서 "생명과 호흡"이 여기서 중점적으로 진술된다. 현대 과학이 아무리 발달되었어도
생명은 만들어내지 못하며, 임종시에 숨을 거두는 인간에게 아무리 인공 호흡을 시켜
도 그 생명을 연장시키지는 못한다. "생명과 호흡"은 하나님께서만 주장하신다.
행 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
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 인류가 한 조상에게서 발원하였다는 것은 인류
학자들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있다. 위필드(B.B.Warfield)는 말하기
를, "모든 인종이 심리적 통일을 가졌으니, 곧 그들이 다 함께 동물과 달라서 이성적
(理性的) 성격과 도덕적 성격을 가졌다. 그 뿐 아니라 모든 민족들이 공통적인 유전
(遺傳)을 소유한 사실도 있으니, 이런 것은 모두 다 그들이 본래 동일한 근원에서 나
와서 발전되었다는 것을 증거함이다."고 하였다(抄譯)(Studies in Theology, pp.
255-256). 바빙크(Bavinck)도 말하기를, "바벧론 연구자나 앗수리아 연구자들만이 아
니라 광범위한 인종 학자들도 강한 이유를 가지고 인류의 발원지(發源地)는 중앙 아세
아라고 생각한다. ...셈족과 아메리카 홍인종 사이에 서로 유사점이 많은 고로 과거의
어떤 인종학자들은, 아메리카 토인들(홍인종) 중에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열지파가 발
견된다고 생각하였다."고 하였다(The Philosophy of Revelation, p. 180).
우리는 인종의 단일성에 대하여 위에 말한 바와 같은 합리적 증거를 중요하게 생각
한다. 그러나 그보다도 성경의 말씀이 이 문제에 대하여 최후의 결론을 가져오는 것이
다. 성경은 인류를 단일한 근원으로 말씀하고 있고, 인류의 천성도 공통적이며, 그들
의 죄악도 동일하고, 구속(救贖)에 대한 그들의 요구도 동일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곧, 하나님께서 모든 국가들의 흥망의 연대를 주장하신
다는 의미이다. 시 127:1에도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아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라고 하였다.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것은 각 민족의 국경을 정하여 주셨다는
뜻이다. 신 32:8 참조.
행 17: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
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시고 관할하신 역
사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심을 알려주시는 일종의 계시(啓示)이다(다만
죄로 어두워진 인류가 효과적으로 깨닫지는 못하지만).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벴겔(Bengel)은 말하기를, 하
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지만 "패역한 이성(理性)에는 멀어 보인다."고 하였다
(Perverse reason supposes Him to be far off). 도마스(David Thomas)에 의하면, 하
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다"는 말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네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 (1) 하나님께서 장소적으로 우리에게서 멀지
아니하심(렘 23:24). (2) 그는 우리와의 모든 관계에 있어서 우리에게 가까우심. 그가
우리의 주재(主宰)시니 우리 생활의 모든 것을 관할하신다. (3) 그는 우리의 창조자시
니 우리의 모든 세밀한 구조까지 아신다(시 139편). (4) 그는 우리를 동정하심이 깊으
시니만큼 우리에게 가까우시다(호 11: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간절히 찾는 자들에게 대하여 특별히 가까우시다. 시
145:18에 말하기를, "여화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곧 진실하게 간구
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고 하였다.
행 17: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다"고 함은
인간의 생활, 동작, 존재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만 성립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인
간이 하나님의 능력의 붙들어주심 없이는 허무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말씀과 같다.
"시인"은 헬라의 아라투스(Aratus-주전 310년에 길리기아의 쏠리라는 곳에서 출생
함)나 클레안데스(Cleanthes-주전 300년에 드로아의 아쏘스란 곳에서 출생함)와 같은
사람들을 가리켰을 것이다. 그들이 말한 대로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고 함은 인간이
제우스(Zeus) 신의 소생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헬라의 신화(神話)사상이다. 바울이 이
렇게 헬라 신화의 한 귀결을 인용한 것은 헬라의 신관(神觀)을 옳게 여기는 의미는 아
니다. 그것은 도리어 헬라 시인들이 그들의 우상에 관하여 찬양한 말이 사실상(그 우
상에는 적합하지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 곧 참되신 신(神)에게 적합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이교도(異敎徒)가 신에 대하여 표현한
가장 고상한 사상이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에게만 잘 맞는다."고 하였다
(Handelingen 15-28, 1948. p.154).
행 17:29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 즉 시가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
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 사람이 "신의 소생"이 되었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사람을 일반 피
조물과 비교할 수 없이 고귀하게 지으셨다. 이 사실을 내세우는 바울의 논조는, 이렇
게 지음 받은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금이나 은이나 돌에 새긴 신상
(神像)들로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천지의 주재(主宰)"이신 하나님을 소개
하면서(24-27), 하나님을 사람의 손으로 새긴 조각물들과 동일시(同一視)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 115:4-8, 135:15-18; 사 40:18-20, 25, 44:12-17, 46:5-7 참조.
행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란 말(* )은 예
수님 오시기 전 이방인의 우상 섬긴 어두운 일들을 하나님이 죄로 여기지 않으셨다는
뜻이 아니다.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이 이방 세계에 그들의
우상 숭배죄를 회개시키려고 전도자를 보내신 적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말
(* )을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라고 번역할 것이 아니라 "그대로 버려
두셨거니와"라고 개역해야 된다.
"이제는 사람을 다 명하여 회개하라 하셨으니." 여기 "이제는"이란 말(* )
은 "현재 상황으로 말하면"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이것은 중대한 시대적인 새 일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고 하시는 것은 율법적인
명령이 아니고 은혜로운 부탁이다. 그 이유는 그가 "믿을 만한 증거"를 주시고(31절
하반) 그렇게 부탁하시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슐라텔(Schlatter)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모르던 무지의 때를 끝내셨다."라고
(Apostelgeschichte, 1962, s.217).
행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
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
니라. - 여기 "이는"이란 말(* )은 이런 이유에 의하여란 뜻이다. 이것은
회개를 외치게 된 시대가 왔다는 앞절의 말씀을 뒷받침한다. 회개의 동기는 무엇에서
일어나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심판자와 심판날이 있음을 내다봄에서 일어난다.
이 심판자는 참 사람이신 동시에, 부활하신 자시니만큼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가 사
람 뿐이라면 심판자가 되실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자시니만큼 하나님의 아들
이시므로 심판자 되실 확실성을 모든 삶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특별히 심판자로서 그
리스도의 인간성이 강조된 것은 사실이다. 그의 인간성은 그가 우리를 체휼(體恤)하신
성품인 만큼 사람들이 그의 구속(救贖)을 받은 여부를 판단하는 데 적격(適格)이 되신
다(요 5:27).
행 17:32-34
아덴에서의 바울의 전도 열매는 적게 나타났다. 아덴 사람들과 같이 철학적 지식에만 치우치는 자들은 교만하여 단순한 복음을 받지 않는다. 고전 1:19-22 참조. 그러나 이때에 복음을 받은 소수가 있었다. "그를 친하여"란 문구(* )는 "그에게 붙어서"(cleaving to him)라고도 번역된다. 곧, 그들이 많은 반대
를 무릅쓰고 사도 바울 편에 가담하여 떠나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뜻이다. 이들이 비롯 소수였지만 매우 반갑고 귀한 열매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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