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시험 (마태복음 4:1-11)
이곳에는 백중지세(伯仲之勢)의 유명한 백병전, 즉 천사장 미가엘과 용,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 아니 뱀 그 자신과의 싸움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 이야기에서 여인의 후손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함으로써 그의 발꿈치를 상하였다. 그러나 뱀은 그의 시험에서 완전히 실패하였으며 따라서 그의 머리를 깨어졌던 것이다. 우리의 주 예수님은 정복자가 되심으로써 그를 따르는 충실한 추종자들에게 확실한 위로를 보장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시험에 관하여 다음의 몇 가지 사실들을 관찰할 수 있다.
Ⅰ. 이 시험이 일어난 시기, "그 때에"란 말이 강조되어 있다. 그리스도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내려와" 하나님의 아들과 세상의 구세주로 선포된 바로 직후, 우리가 그에 관하여 들은 소식은 "그가 시험을 받으셨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 때에" 그는 시험과 더불어 맞붙어 가장 잘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다음과 같다.
1. 큰 특권들이나 특별한 신적 은혜의 표적이 우리를 "시험"받는 곳으로부터 굳게 지켜 줄 수는 없다.2. 아니 오히려 큰 명예가 우리들에게 주어진 후에도 겸손케 하는 어떤 것을 기대해야 만 한다. 이것은 마치 바울이 삼층천에 갔다온 후 사탄의 사자(使者)가 그를 때려눕히기 위해 찾아왔던 사실과 대동소이하다.
3. 하나님은 흔히 그의 백성들을 시험하시기 전에 그 시험을 대처할 수 있는 준비를 시키신다. 그는 "날을 따라 힘을 주시며," 쓰라린 시험 전에는 평범한 위로보다 더 큰 능력을 부여하신다.
4.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는 확신은 시험에 대처할 수 있는 가장 큰 준비가 아닐 수 없다. 만일 선한 성령이 우리의 양자 된 것을 친히 증거 하신다면 양자권에 대한 확신은 우리를 타락시키고 불안케 하려는 계획을 가진 악령의 모든 제안들에 대해 응답해 주실 것이다.
"그 때에," 즉 그리스도께서 엄숙한 세례식을 마치시고 새로이 오셨을 그 즈음에, 다시 말하면 그가 세례를 받으셨을 때 바로 "그때에 시험을 받으신"것이다.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를 가지도록 허락된 후에는 사탄에 의해 기습을 당하리라는 것을 기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부요 해진 영혼은 두 배의 감시와 경계를 해야한다. "너희가 먹고 배부를 그때에 조심하라."
"그 때에," 즉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을 이스라엘에게 나타내어 보이기 시작하셨을 바로 그때에 "시험을 받으셨으며," 이와 같은 시험은 그가 홀로 계실 때에는 결코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마귀는 유용한 사람들, 즉 선할 뿐만 아니라 선행을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그들이 처음 시작할 때에 특별한 악의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시락의 아들에 대한 충고이기도 하다. 즉 "내 아들아, 만일 네가 주님을 섬기려 한다면 시험에 대처할 준비를 하라"이다(Ecclesiasticus ii. 1). 젊은 교역자들은 앞으로 다가올 것과 이에 따른 무장을 단단히 하라!
Ⅱ. 이 시험이 있었던 장소. 그 장소는 "광야"였다. 이 광야는 아마도 모세와 엘리야가 "40일 간 금식하였던 시내"의 대광야인 것 같으며, 그 이유는 유대 광야가 아니라면 마가복음 1장 13절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이 들짐승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세례를 받으신 후 예루살렘으로 그에게 주어진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가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광야로 후퇴하여 물러가셨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진 후에는 우리가 받은 것을 많은 군중과 세상적인 번잡함 때문에 잃어버리지 않도록 잠시 동안 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좋다. 그리스도께서 광야로 물러가신 목적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1. 그 자신에 유익을 얻기 위함이다. 물러남(후회)은 하나님과 더불어 명상과 교제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가장 활동적인 생활을 한다고 일컬어지는 자들일지라도 명상할 시간을 가져야 하며 하나님과 더불어 홀로 있는 시간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그 자신 스스로 은밀하게 하나님의 일들에 관하여 대화를 가지지 못한 사람이 공공연하게 그 일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부적당하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으로 나타나셨을 때 그에 관하여 말하기를, "그는 여행에서 최근에 돌아왔다. 그는 해외에 다녀왔으며 세상을 살펴보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는 광야에서 최근에 나오셨으며, 하나님과 그 자신의 마음과 더불어 대화하시면서 홀로 계셨다"고 말해야 한다.2. 그가 광야로 물러가신 것은 시험하는 자로 유리하게 하여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있을 때보다는 시험하는 자에게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선한 마음에는 고독이 친구이지만, 사탄은 우리들을 대항하여 그 고독을 이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홀로 있는 자에게 화가 있도다." 성결과 헌신을 가장하여 토굴과 광야로 물러가는 사람은 그들의 영적인 원수들의 미치는 활동범위를 벗어나 있지 않다는 것과 또한 거기에서 성도 교제의 유익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가 물러가신 것은 다음과 같은 일을 하기 위함이었다.
(1) 즉 사탄으로 하여금 제멋대로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승리를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하여 자기편에서 해와 바람을 원수에게 제공하였으나, 그 원수는 그를 좌절시키지는 못하였다. 그리스도가 마귀를 유리하게 하신 것은 "이 세상의 왕은 그에게 있어서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으므로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고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2) 그리스도께서 물러가신 것은 그 자신이 전력을 다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 위하여, 즉 그 자신의 힘을 돋우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홀로 포도 짜는 틀을 짓밟으리니," 사람들 중에 나와 같은 자가 없었음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단번에 마귀와의 접전에 돌입하였다.
Ⅲ. 이 시험을 위한 두 가지 준비.
1. 그리스도는 전투를 하도록 명령받았다. 그는 자발적으로 시험에 그 자신을 내맡기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비둘기와 같이 내려온" 성령은 그를 "온유하게" 만들었지만 "담대하게"는 만들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게 조심해야 하지만,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로 우리를 연단 시키기 위해 시험의 환경 속으로 들어가도록 명령하신다면 우리는 이러한 것을 이상히 여겨서는 안되며, 이에 대한 방어를 갑절이나 튼튼히 해야한다는 사실이다. "주안에서 강건하라, 신앙 안에서 견고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잘되어 나갈 것이다. 만일 우리 자신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마귀로 하여금 우리를 시험하도록 시험해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게 하도록 자극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느 곳으로 인도하시든지 우리는 그가 우리와 함께 동행하실 것과 "정복자들보다 더욱" 우리를 데려가기를 희망할 수 있다.그리스도는 오직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이끌리셨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기 때문이다"(약 1:14). 마귀는 그 핸들을 잡고 있으며, 그 암송아지로 밭을 간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은 타락한 성품을 소유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마치 전사(戰士)와 같이 아무런 두려움이나 떨림이 없이 순전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담대하게 이끌리셨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시험받으신 것은
(1) 그 자신의 겸손과 비하(卑下)의 본보기이다. 시험은 "급격한 돌진이요, 육체의 가시이며, 돌연한 타격이며, 체로 치는 것이며, 씨름하는 것이며, 전투하는 것"으로 이 모든 것은 어려움과 고난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을 감수하셨으며, 이는 그가 "이 모든 일에서 그의 형제와 같이 되시기 위하여" 그 자신을 낮추셨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자기를 치는 자에게 기꺼이 등을 돌려주었다."
(2) 그리스도께서 시험받으신 것은 사탄을 당황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투 없이 정복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시험받으신 것은 시험하는 자를 이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사탄은 첫 아담을 시험하여 이겼지만 언제나 승리할 수는 없었으니, 곧 둘째 아담이 그를 쳐부수어 승리함으로써 그를 포로로 사로잡아 결박해버린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 시험받으신 것은 모든 성도들에게 위안을 준다. 그가 시험받으신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원수는 교묘하고 사악하고 매우 대담하게 시험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원수는 타도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그 원수가 아무리 "강하게 무장되었다"고 할지라도 우리 구원의 대장은 "그보다 더 강하다." 그리스도께서 "시험받으시면서" 고난 당하신 것은 생각만 해도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 왜냐하면 시험이란 그것에 굴복하지만 않는다면 죄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시험들은 단지 고난에 불과하며 때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자들의 신분(몫)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에게는 대제사장이 있으니 그는 실제로 시험을 받아 고난 당하셨으므로 "시험받을 때에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지 않고" 더욱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져 주실 것이다(히 2:18; 4:15).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시험을 받으시되" 우리를 위해 승리하신 것을 생각하면 더욱 위로가 된다. 즉 우리가 맞붙어 싸우는 그 원수는 정복당하여 좌절되고 무장이 해제된 원수일 뿐만 아니라 그 원수를 쳐부수어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를 통하여 우리는 "더 큰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2. 그리스도는 "이기기를 다투는 자가 절제하듯이"(고전 9:25), 전투를 위해 음식을 조절하셨다. 그가 보통 사람들과 달리 더욱 빼어나신 것은 "사십 주 사십 야"를 주리신 것인데, 이는 구약에 나타난 두 인물, 즉 위대한 율법 수여자 모세와 위대한 개혁자 엘리야의 모형과 실례에 준하는 사실이다. 세례 요한은 엘리야로 왔으며 금식한 사실은 단지 도덕적인 것이었고 이적적인 것은 아니었다(요 10:14). 그러한 영예는 그리스도를 위해 마련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금욕이나 고행을 위해 주리실 필요가 없으셨다(그는 억제해야 될 타락된 욕망을 소유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그가 "주리신" 이유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1) 그리스도께서 주리신 것은 그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시고 또한 "아무도 흠모하지 않는" 버리운 자로 보이게 하기 위함이다.
(2) 사탄에게 그리스도를 대적할 수 있는 계기와 장점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귀를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함이다.
(3) 거룩케 하거나 우리에게 금식하도록 권장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로 이 일을 명하실 때는 우리가 궁핍한 지경에 처해 있을 때, 일용한 양식이 모자랄 때, 육신을 억누를 필요가 있을 때, 생기 있는 기도를 해야할 때, 즉 시험을 위한 특별한 준비를 해야 할 때이다. 만일 선한 사람이 낮아지거나, 친구나 구원자가 없어지게 될 때에는, 그들의 주님 자신도 동일한 처지를 당하셨다는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떡이 궁핍하더라도 하늘의 총아(寵兒)가 되거나, 성령의 지배 아래 있을 수 있다. 가톨릭교도들이 예수님께서 사십 일간 금식하신 날을 사순절(四旬節) 금식일로 기념하는 논거는 영구의 법 반대하는 일종의 겉치례와 추측에 불과하다(Stat. 3 Eliz. chap. V. sect. 39, 40). "그는 사십 일을 주리셨지만" 배고프신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늘과의 대화가 곧 고기요, 양식이었다. 그러나 "후에는 시장기를 느끼셨다." 이것은 그가 참으로 인성의 소유자이심을 나타내 보여 준다. 또한 그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육신적인 연약성을 취하셨다. 사람은 먹는 것으로 말미암아 넘어지며 그 때문에 종종 범죄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굶주리신 것"이다.
Ⅳ. 시험 자체들, 사탄이 그 모든 시험에서 궁극적으로 노린 것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해 죄를 짓도록" 함으로써 영원히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 근본 저의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마귀가 노린 것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① 그의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실망케 하기 위하여 ② 그의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케 하려고 ③ 그의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영예를 사탄에게 내어 줌으로써 소원(疏遠)케 하기 위함이었다. 위의 ①과 ②에서 마귀가 그를 "하도록"(to) 시험했던 것은 무지함에서 비롯된 것 같으며 여기에는 시험하는 자의 교활함이 나타나 있다. ③에서 그를 "으로써"(with) 시험했던 것능 그것을 가지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앞의 두 항목(①, ②)이 분별할 수 있는 큰 지혜를 필요로 했던 간교한 시험이라고 한다면, 뒤의 항목 (③)은 저항할 수 있는 큰 결심을 필요로 했던 강한 시험이었다. 그러나 마귀는 이 모든 것에서 실패의 쓴잔을 마시었다.
1. 마귀가 그리스도를 시험한 것은 그로 하여금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실망케 하고 그를 보살피는 아버지의 배려를 불신케 하기 위함이었다.(1) 이 시험이 어떻게 진척되었는가를 살펴보자(3절).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왔다."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마귀는 "시험하는 자"로서 "사단"(대적자)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마귀는 우리의 철천지 원수로서 우리를 범죄하다록 유혹하며, 또한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그의 일을 하며, 그의 계획을 수행한다. 마귀가 강조적으로 "시험하는 자"로 불리워지는 것은 우리의 첫 조상에게도 이와 같은 일을 행하였고 지금도 그렇게 하기 때문이며, 그 밖의 모든 시험하는 자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역사하고 있다. 시험하는 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을 가지고 그리스도에게 나아왔는데, 이것은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민할 때와 같이 두려움과 협박을 주던 모습은 아니었다. 일찍이 "자신을 빛의 아들로 가장하였던" 마귀는 지금도 그렇게 가장할 뿐만 아니라 수호신이나 수호천사로 꾸미는 것이다. 이 첫 시험과 이전 것과는 연관하여 그 시험을 더욱 강하게 하려는 "시험하는 자"의 간교함을 살펴보기로 하자.
[1] 그리스도는 주리셨으므로 그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데 꼭 필요한 영양을 공급하기 위하여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는 것은 매우 적절한 행동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탄의 간계들 중의 하나는 우리의 외부적인 조건을 이용하여 그것을 그의 시험의 포대로 세운다는 것이다. 그는 간교할 뿐만 아니라 매우 조심스럽다. 그가 교활하게 우리를 대적하여 이용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더 부지런하게 그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가 주리셨을 때, 더욱이 그것도 먹을 것이라고는 도무지 않는 "광야에서" 주리셨을 때 마귀는 그를 공격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궁핍과 가난은 불만과 불신앙을 야기시키는 가장 큰 시련으로서 필요에는 법칙이 없다는 격언을 구실로 삼아 우리의 안락을 위해 부당한 수단을 사용하도록 유혹한다는 사실이다. 굶주림이 돌로 된 벽을 깨뜨릴 것이라는 사실은 이것으로 변명되지만 그 변명이 결코 합당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에게 돌로 된 별돌보다 더 강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굴이 가난에 대해 기도한 것은 그것이 고통이나 비난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시험이 되기 때문이다. "즉 내가 가난하기 때문에 도적질하게 될까봐 두려워하나이다." 그러므로 궁핍한 처지에 몰리게 된 자들은 그들의 방어를 갑절로 대비해야 하며, 또한 죄로 말미암아 살고 번창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굶주려 죽는 편이 나을 것이다.
[2] 그리스도는 그 즈음에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으며, 여기에서는 마귀가 그로 하여금 이러한 사실을 의심하게 하려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는 말로 유혹하고 있다. 마귀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면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또한 이 예수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추측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리스도가 지금 그의 영광을 덮은 베일을 벗기지 않았거나 또한 마귀가 철면피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면 이와 같은 말을 감히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첫째, "너는 지금 하나님의 아들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받고 있다. 만물의 상속자인 하나님의 아들이 과연 이렇게 궁핍한 처지로 떨어질 수 있을까? 만일 하나님이 네 아버지라면 그는 네가 굶주려 죽는 것을 차마 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삼림의 모든 짐승들이 다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시 50:10, 12). 하늘로부터의 소리, 즉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소리는 실제로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망상에 불과하며, 너는 그것에 속은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네 아버지가 아니든지 매우 몰인정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1. 사탄이 좋은 사람을 시험할 때 크게 노리는 것은 그들과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려 버림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신뢰, 그에게 대한 의무, 그와의 교제를 단절시켜 버리는 것이다. 형제의 위로자로서의 선한 성령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입증하지만, 형제의 고소자로서의 악한 영은 할 수만 있으면 그 증거를 동요시키려고 하는 것이다.2. 사탄은 외부적인 고통이나 궁핍, 무거운 짐 등을 근거로 내세워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의 부성적인 사랑이 참으로 그들과 함께 한다면 고통은 있을 수 없다는 식으로 그들의 양자 됨을 의심나게 한다. 그들은 이 시험에 대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잘 알고 있으며, 경건한 욥과 같이 "그가 나를 죽일지라도, 그가 나를 굶기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지할 것이며, 그가 비록 원수와 같이 나를 대적하러 나오는 것같이 보일지라도 그를 친구로 사랑할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3.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믿음을 흔들려고 의도하며, 그 말씀의 진리에 대하여 의심나게 한다. 따라서 마귀는 처음부터 우리의 첫 조상에게 "그래,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나?라고 속삭이면서, "정녕 그렇게 말씀하시지는 않았을꺼야"라고 말로 의심을 자아내게 만들었던 것이다. 여기에서도 마귀는 "참으로 하나님이 너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하더냐? 정녕 그는 그렇게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혹 그가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들 중 여하한 진리에 대해서라도 의심할 때는, 바로 그 때가 "마귀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때"임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거짓의 아버지인 마귀가 하는 주임무는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반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4. 마귀가 그의 계획을 수행할 때는 대부분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하나님은 몰인정하고 불신실 하거나 또는 용감하게 자신들의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잊어버린 것처럼 꾸며 그에 대해 강팍한 생각을 가지게 한다. 마귀는 우리의 첫 조상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지식의 나무를 금하셨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려고 갖은 애를 다 쓰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는 지식의 나무로 말미암아 그들이 이익을 얻게 될 것을 질투하고 꺼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귀는 여기에서 우리 주님에게 넌지시 속삭이기를 그의 아버지는 그를 내어던져 버렸으며, 자기 힘으로 모든 일을 꾸려 나가도록 방치해 두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암시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이며, 또한 어떻게 쉽사리 답변되었는가를 살펴 보라. 만일 그리스도가 시장기를 느끼셨기 때문에 이제 단순한 사람으로 보였다면, "40일을 금식하신 후에"는 사람 그 이상인 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왜 고백하지 않았는가?
둘째, "너는 지금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지고 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아마 그 앞에 놓인 돌무더기)이 떡덩이가 되게 함으로써 그것을 증명하라(3절). 세례 요한은 언젠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흔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했으니,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능력은 그 자녀들을 위하여 돌들로 떡덩이를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만일 네가 그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네 자신을 위해 필요한 시기인 바로 지금 그 일을 행하라."
마귀는 "돌들로 떡덩이가 될 수 있도록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고, "그렇게 되라고 명령하라"고 하였다. 즉 네 아버지는 너를 버렸으므로 이제는 네 스스로 자립하여 더 이상 네 아버지의 신세를 지지 말라는 것이었다. 마귀에게는 겸손이라곤 조금도 없으며 하는 일마다 건방지다.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을 그만 두게 할 수만 있다면 자기의 의견을 통하게 하며, 또한 혼자서도 충분히 자급자족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2) 이 시험은 어떻게 격퇴되고 극복되었는가를 살펴보자.
[1] 그리스도는 그것에 응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는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라고 명령하시지는" 않았으며, 그것은 그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은 아니었다. 바로 이 시험을 받고 난 후 그리스도께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으며," 이러한 그의 능력은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왜 그는 이와 같이 하시지 않았는가? 언 듯 보면 이 일은 매우 타당한 듯 보이며, 참으로 시험이 그럴 듯하고 겉으로 아름답게 보이면 보일수록 더 위험하다. 이 일은 논의할 것이었지만, 그리스도는 즉각적으로 풀 속에 도사린 뱀을 알아차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는데, 즉 ① 그가 하늘로부터 들었던 음성에 대한 진리를 의문시하거나 이미 결정된 것을 새로이 시험하려고 하는 듯한 일이나 ② 그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불신하려는 듯하거나 그로 하여금 그를 위해 준비한 한가지 특별한 방법에 제한하려는 듯한 일. ③ 그 자신을 내세우거나 그 자신이 조각사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 ④ 사탄의 거동에 따라 일을 함으로써 사탄을 만족시키는 듯한 일 등을 도무지 하시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실이 마귀에게도 응분의 몫을 주려는 좋은 계획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시종드는" 자가 마귀와 논의하는 것은 응분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셨음에도 에그론 신에게 물었던 것과 같다.
[2] 그리스도는 마귀의 이 질문에 답변하려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4절). 그는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으로써 사탄의 모든 시험에 대답하시고 좌절시키셨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영원한 말씀으로서 모세의 글에 의거하지 않고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성경 말씀을 존중하셨으며, 또한 율법에 쓰여진 것에 호소함으로써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다. 그는 기록된 말씀에 대해 의심할 여지없이 충분히 잘 알았다고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사탄에게 하신 것이다. 마귀의 자녀들이라도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 것을 매우 잘 알 수 있다. 즉 "마귀도 믿고 떠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죄에 대한 시험을 받을 때마다 이 방법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기록되었으되"란 말로 시험을 저항하고 격퇴시켜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으로서 기독교인의 전신무장 중에서 유일한 공격용 무기이다(엡 6:17). 또한 이것을 마치 다윗이 골리앗의 검에 대해 말하듯이, 우리의 영적인 투쟁에 있어서 "그와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대답은 다른 세 가지 대답과 같이 "제2율법"을 의미하는 "신명기"에서 인용한 것인데, 이 책에는 의식적(儀式的)인 것이라고는 거의 없다. 레위적인 제사나 정결은 그것이 비록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라 할지라도 사탄을 내어쫓을 수가 없거늘 하물며 인간이 만들어낸 성수(聖水)나 십자가 상(역주:카톨릭 교회에서는 이것을 의식에 사용하거나 붙이고 다님)이랴! 그러나 신앙과 혼합된 도덕적인 교훈이나 복음적인 약속들은 사탄을 물리치는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있는 말씀은 신명기 8장 3절에서 인용되었는데,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나로 양육하신 것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임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이 말씀을 그 자신의 경우에 적용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불러낸"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호 11:1),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였다(마 2:15). 그때에 이스라엘은 광야에 있었고 그리스도도 지금 광야에 계시며, 아마 그 광야는 동일한 광야였는지 모른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 수 있다.
첫째, 마귀가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의 아들 됨을 의심하게 한 것은 그가 궁핍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아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들의 소행을 참고 사랑하였던 그의 아들이었지만 그들을 궁핍한 처지에 있게 하였다"고 하였다. 인용된 이 구절에 이어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신다"(신 8:5)고 기록이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성자로서의" 그리스도는 "순종을 체득하고 있다."
둘째, 마귀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의 아버지의 사랑과 배려를 불신케 하려고 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아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이 궁핍에 처해 있을 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냐? 또는 그가 광야에서 탁자를 마련할 수 있느냐? 떡을 줄 수 있느냐?고 말했던 것과 똑 같은 일을 하는 격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셋째, 마귀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가 주리시기 시작할 바로 그 무렵에 즉시로 먹을 것을 찾도록 하려고 했다. 한편 하나님은 현명하고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을 먹이기 전에 굶주리게 함으로써 겸손하게 하고 시험을 받게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궁핍할 때에 그들을 기다리실 뿐만 아니라 호위할 것이다.
넷째, 마귀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의 굶주림을 떡으로 채우도록 하려고 했다. 그리스도는 말하기를 "아니다. 그렇게 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로 40일간 살았던 것과 같이 사람이 떡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것은 오랫동안 아무런 의의없이 입증되어온 정설(定說)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그의 섭리 가운데서 일반적으로 "지면에서 나오는 식물"(욥 28:5)로 사람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만일 그가 기뻐하신다면 사람을 생존시키기 위하여 다른 방법도 사용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 하나님이 그 목적으로 명령하시고 지정하신 어떤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빵과 같이 좋은 생계 수단이 될 것이며, 그들의 생명을 잘 연장시켜 줄 것이다. 우리가 "떡을 가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의 축복을 몰리치신다면 배부르지 못할 것이며(학 1:6, 9; 미 6:14, 떡이 목숨을 지탱해 주지만, 실제로 목숨을 지탱해 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떡이 부족하여"도 다른 방법으로 배부를 수 있다.
하나님은 떡 없이도 모세와 엘리야를 생존케 하셨으며, 바로 지금 그리스도 자신이 사십 일 동안 떡 없이도 사신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 즉 천사의 음식으로 이스라엘을 양육 하셨고, 엘리야 에게는 기적적으로 까마귀가 날라다 준 떡과 기적적으로 늘어난 과부의 밀가루로 배불리셨으며, 따라서 그리스도는 돌들로 떡이 되게 할 필요가 없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주리시기 이전 사십 일 동안 행하셨던 것같이(역주:그리스도는 사십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주리셨음) 현재 주린 상태에 있는 그로 하여금 다른 방법으로 살게 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가장 부요 할 때에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가장 궁핍할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는"것을 배워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무화과나무가 꽃을 피우지 않을 때, 들판이 고기를 내지 않을 때" 원조와 공급의 일상 수단이 끊어졌을 바로 그때에 우리는 "여호와를 즐거워해야"한다.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위배되는 것이지만 자신의 임의대로 원하는 것에 대하여 명령하려고 해서는 안 되며, 그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장 합당하게 생각하여 주려고 하는가를 기도해야 한다. 또한 그것이 비록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일용한 양식을 주심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여기에서 배울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찾으신 것이지 그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또한 우리의 궁핍이 매우 절박할 때에 변칙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쓸 것을 공급해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배워야 한다(시 37:3). "여호와 이레," 즉 여호와는 여하한 방법으로도 "준비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의 열매를 의지하여 가난하게 사는 것이 우리 자신의 죄의 소산물에 기대어 풍족하게 사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다.
2. 마귀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의 아버지의 능력과 보호하심을 믿도록 유혹하였다. 마귀는 얼마나 끈질기고 지칠 줄 모르는 원수인가! 그가 한 번 공격하여 실패했다면, 또 공격하려고 준비하는 것이다.이 두 번째의 공격 시도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있다.
(1) 그 시험은 어떤 것이었으며, 또한 어떻게 수행되었는가를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마귀는 아버지께서 그를 양육하신다는 점에서 그의 돌보심을 매우 확신하고 있다고 알아차린 후 그로 하여금 그를 안전하게 보호하신다는 점에서 그의 돌보심을 믿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는 좌우 양편에서 자칫하면 길을 잃어버릴 위험에 놓일 때가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한편을 피하면 사탄의 간교에 의하여 다른 편으로 달려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하며 또한 우리의 방탕성을 극복함으로써 탐욕에로 떨어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우리의 영혼 문제에 있어서 실망이나 추측보다 더 위험한 극단은 없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그들을 "죄로부터"(from sins) 구원할 수 있으며, 또한 구원하려고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으면서도 그가 그들을 "죄 가운데서"(in sins) 구원하실 것이라고 믿도록 유혹 당할 때가 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열심으로 경건에 힘쓰려고 할 때 사탄은 급히 서둘러 그들을 완고한 신앙과 매서운 더위 속으로 몰아놓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 시험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살펴볼 수 있다.
[1] 마귀는 이 시험을 어떻게 진행시켰는가? 그는 그리스도를 억지로나 강압적으로 이끌어간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스스로 예루살렘으로 가게 했고 자신을 따르게 했다. 그리스도가 지면에 가셔서 계단을 거쳐 성전 꼭대기로 가셨는지, 또는 공중으로 가셨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그가 "성전의 작은 뽀족탑"(pinnacle 또는 spire)이나 "신전"(fane, 어떤 사람들의 주장), 흉벽(胸壁)(battlements, 어떤 사람들의 주장), 익면(翼面), (wing 단어의 뜻)에 놓여지신 것만은 확실하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으로 하여금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기 위해 이와 같이 재촉되어 시험을 받는데 그대로 순응하였다. 그렇지만 마귀는 그를 꺼꾸러뜨릴 수 없었다. 여기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인내는 후에 그가 고난받고 죽으실 때와 마찬가지로 사탄이나 그의 하수인들의 능력보다 더 크고 놀라운 것이었다. 사탄이나 그의 하수인들은 "위로부터 그들에게 주어진 것" 이외에는 그리스도를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거스리는 사탄의 능력을 풀어놓아 주지만 우리를 거스리도록 그와 같이 내버려두지는 않으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그것을 견제하신다는 이 사실을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인가!
둘째, 마귀는 그의 시험할 장소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매우 교활하였다. 마귀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거나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허영 된 신뢰를 두도록 하기 위하여 인구가 조밀하고 "온 땅의 즐거움"인 예루살렘의 공공연한 장소로 그를 이끌어간 것이다. 세상의 경이 중 하나인 성전은 뭇 사람들의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지니고 있었다. 바로 이 장소야말로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을 드러내어 많은 사람들에게 내보임으로써 그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절호의 장소가 될 수 도 있었다. 즉 이것은 그가 광야의 어둑한 곳에서 겪은 이전의 첫 번째 시험 때에 몰아 부쳐진 것과는 달리 많은 무리들 앞에서 모든 행동이 가장 잘 두드러지게 보이는 곳에서 시험 당하신 것이다. 이 사실을 더 자세히 고찰해 본다면,
1. 여기에서 예루살렘이 "거룩한 성"이라고 불리운 것은 이름과 신앙 고백에서 그러하였고, 또한 그 안에는 그 성의 실체였던 "거룩한 씨"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알아야할 것은, 이 세상에는 마귀와 그의 시험을 면하거나 그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만큼 "거룩한 성"은 없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아담은 "거룩한 동산"에서 시험받았지만, 두 번째 아담은 "거룩한 성"에서 받으셨다. 그러므로 어떠한 장소에서도 우리의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자. 아니, "거룩한 성"은 마귀가 큰 장점을 가지고 성공리에 사람을 교만하고 건방지게 하도록 유혹하는 장소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위에 있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는 어떠한 불결한 것도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영원무궁토록 시험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다.2. 마귀는 그를 "성전 꼭대기"에 두었는데, 이 꼭대기는(조세푸스가 Antiq. lib. XV. cap. 14에 기록한 것과 같이) 매우 높았으므로 사람이 이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알아야할 것은 성전 꼭대기가 시험의 장소라는 사실이다. 나는 이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1) 높은 장소는 다 이와 같다. 즉 높은 장소는 미끄러지기 쉬운 곳이다. 세상의 출세는 사탄으로 하여금 그의 난폭한 화살을 겨냥하여 쏠 수 있는 선명한 표적을 만든다. 하나님은 내려뜨린 후 일으켜 세우지만, 마귀는 일으켜 세운 후 내려뜨린다. 그러므로 넘어질까 조심하는 자들은 기어오르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2) "교회에서의" 높은 자리는 특별한 방식에서 위험스럽다. 은사면에서 특별한 사람들이나, 주요한 직책을 맡은 사람들, 또는 큰 명성을 얻은 사람들은 겸손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사탄은 확실히 그들을 겨냥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만에 부풀게 함으로써, "마귀의 저주 속으로 떨어지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높은 위치에 서 있는"자는 모름지기 "견고히 서 있기를" 유의해야 한다.
[2] 마귀는 어떻게 이 시험을 일으켰는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지금 네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어 보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라. 네 자신이아래로 뛰어내리라. 그리하면, ① "네가 하늘의 특별한 보호 아래 있는 것으로 뭇 사람들의 존경과 찬탄을 받을 것이다. 네가 이렇게 높은 벼랑에서 떨어질지라도 다치지 않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멜리데의 토인들이 바울에게 말하였던 것 같이), 당신은 하나님이라고 말할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박수인 시몬"은 바로 이와 같은 일로 그 자신이 신(神)임을 증명하려고 했지만 그의 거짓은 이내 탄로나 버렸다. 왜냐하면 그는 거꾸러져 처참하게 찢기웠기 때문이다. ② "네가 하늘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온 것으로 영접을 받을 것이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네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그 이상의 분이라는 것과 "홀연히 그 전에 임하실"(말 3:1) 언약의 천사, 즉 사자(使者)라는 것을 알고 깨닫게 될 것이며 또한 그 이후로 거룩한 성의 거리로 퍼질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신시키는 일을 간단히 끝나 마무리될 것이다."
마귀가 "뛰어내리라"고 말한 것에 유의하라. 비록 사소한 일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마귀는 결코 그를 성전 꼭대기에서 내어 던질 수 없었다. 여기에서 알아야할 것은, 사탄의 능력은 제한되어 있으며, "이제까지 왔지만 그 이상은 더 나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마귀가 "그를 내어 던져 떨어지게 했다면," 자기의 주장을 내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마귀에 의해 강제적으로 밀쳐냄을 당하였다면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어떠한 불행이 우리에게 닥친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자신의 행동 여하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단지 "뛰어내리라"고 말할 수 있지만 억지로 뛰어내리게 할 수는 없다. 사람마다 시험을 받는 것은 그 자신의 정욕에 이끌릴 때이며, 그것은 강제적이 아니라 유혹을 받아 스스로가 이끌릴 때이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 해를 입지 말자." 그 누구도 우리를 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자(잠 9:12).
[3] 그리스도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시험을 물리치셨는가?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라." 그러나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는가?" 사탄도 성경 말씀을 재빨리 인용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숙달되었는가? 아마도 그런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마음에 하나님과 모든 선에 대하여 적대심으로 가득찬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머리는 성경 말씀의 개념으로 꽉 차있고, 입으로는 거침없이 성경적인 표현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마귀가 성경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은 그들의 불행과 고통을 증가시킨다. 마귀는 그리스도에게 "나는 네가 누구인지를 안다"고 말했을 때보다 더 그 자신이 화나게 말하지는 않았다. 마귀가 그리스도에게 "뛰어내리라"고 말한 것은 그 스스로가 자살자가 되어, 그 자신이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그리스도와 그의 임무를 끝장나게 하려고 했다. 마귀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이 일을 하도록 권하기 위해 그에게 전혀 위험이 없다는 것과 사자들이 그를 떠받들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었으며(시 91:11),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속살거렸다. 이 인용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여기에는 "옳은 것"이 있었다. 성도의 보호를 위해 천사들의 직무에 대한 이러한 약속들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마귀는 경험으로 이와 같은 것들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마귀는 그들에게 대항해 보아야 아무런 소득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또한 그렇게 두드러지게 말한 욥에 대해 철저한 봉쇄를 감행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그것에 대해 조바심을 내고 격노하는 것이다. 그가 이 말씀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한 것도 역시 옳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성도 보호에 대한 모든 약속은 원래적으로 또는 두드러지게 그에게 속한 것이며, 또한 그들에게는 그를 통하거나 그 안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뼈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않을 것이라"(시 34:20)는 약속은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요 19:36). 천사들은 그리스도를 인하여 성도들을 보호하시는 것이다(계 12:5, 11).
둘째, 이 성경 말씀의 인용에는 커다란 "잘못"이 있었다. 아마도 마귀는 이 약속을 대항하려는 특별한 흉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그것을 악용하였다. 왜냐하면 이 약속은 그의 길에 훼방을 놓았으며, 성도들을 대적하려는 그의 악랄한 계획들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1. 마귀는 이 성경 구절을 "잘못 인용하였다." 또한 그것은 매우 사악하였다. 그 약속은 그들이 "당신을 지켜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네 모든 길에서" 그 밖의 뜻은 없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길에서" 벗어나 버린다면, 우리의 의무의 길에서 벗어난다면, 우리는 약속을 잃어버리게 되고, 따라서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시험하는 자를 거스리게 했고, 따라서 마귀는 부지런히 이 말씀을 무시해 버렸던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밑으로 뛰어내리셨다면" 그는 하나님의 길을 벗어나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사명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필요에 따라서 종종 하나님의 말씀을 참고로 하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무용지물로 만들거나 뒤섞어버리는 자들에게 속지 않도록 사물들에 신뢰를 두지 않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는 매일 성경을 상고하였던 숭고한 베뢰아인들과 같이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2. 마귀는 성경 말씀을 "잘못 적용하였다." 그것은 더욱 나쁜 일이었다. 성경은 죄를 장려하는 것이 강조될 때에 잘못 악용된다. 따라서 사람이 성경 말씀을 그들 자신의 시험에 맞추어 왜곡시킬 때 "스스로의 멸망을 자초하고야 만다"(벧후 3:16). 이 약속은 견고하며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마귀가 신적 배려를 믿도록 격려하는데 이 말씀을 사용할 때는 "그릇되게 사용하고" 마는 것이다.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릇된 것으로 바꿔지는 것"이나 또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한 뜻을 발견한 것에 근거를 두어 죄 가운데서 격려를 받는다는 것은 결코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 "은혜가 풍성하기 위하여 죄 가운데 계속 머무를 것이냐?" 천사가 우리를 떠받들게 하기 위하여 뛰어내릴 것이냐? 하나님은 이를 금하시고 계신다.
(2) 그리스도는 어떻게 이 시험을 극복하셨는가? 그는 조금 전에 말씀하신 "기록되었으되"라는 말로 이 시험을 물리치고 승리하셨다. 마귀가 성경을 "악용"한 것이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것은 사용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지는 못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즉시로 신명기 6장 16절, 곧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을 힘주어 강조하셨다. 이 의미는 "그러므로 너는 나를 시험하지 말라"가 아니라, "그러므로 나는 내 아버지를 시험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 말씀이 인용된 구약 성서에는 "너희는 시험하지 말라"라고 복수로 되어 있으나, 이곳에는 "너는 시험하지 말라"고 단수로 되어있다. 여기에서 알아야할 것은 우리가 각별히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일반적인 약속들을 경청하고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탄은 말하기를 "기록되었으되"(역주:개역 성경에는 "기록하였으되"로 되어 있음), 예수님도 똑같이 "기록되었으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것은 성경 구절의 서로 배치되지 않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그의 말씀도 하나이며, 또한 하나님은 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다. 그러나 전자는 약속이며 후자는 계명이다. 그러므로 전자는 후자에 의해 설명되고 적용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성경에 대한 최고의 번역자이기 때문이다. 예언을 하거나 성경을 해설하는 자는 이 일을 믿음의 분수대로(롬 12:6), 계속적으로 실제적인 경건으로 행해야만 한다.
만일 그리스도가 "뛰어내렸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1] 이것은 이미 완전히 확인된 것에 대해 "더욱 확실한 확증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이미 자신의 아버지이셨다는 사실과 그를 보살피고 천사로 하여금 자신을 떠받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충분히 확신하고 만족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새로운 경험으로 확인하려는 것은 마치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를 시험하듯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이미 지상에서 많은 기적 기사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제한하고 있다.
[2] 이것은 할 필요가 없는데도 "특별한 보호를 요청"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시지 않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의무의 길에서 자신을 뒤따라야만 하며, 우리의 궁핍을 채워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자신의 비위를 맞추고 자신의 취미를 즐겁게 해 주어야 하며, 또한 우리를 지켜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기꺼이 우리 자신을 위험 속으로 뛰어들 수 있으며, 지정된 수단을 사용하지 않아도 소원하는 것은 끝까지 다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한낮 망상에 불과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만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그러한 분이라면 죄악은 더욱 더 악화될 것이며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할 특권을 악용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는 이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를 믿으라고 권고하였지만 우리가 그를 시험한다면 그것은 배은망덕한 일이 될 것이다. 즉 이것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그분에게 마땅히 해야할 의무에도 배치된다.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영광 돌려야할 분에게 공공연히 모욕을 주는 행동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 이상의 어떤 것을 스스로 약속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3. 마귀는 "어둠침침하고 소름이 끼치는 우상," 즉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시험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1) 마귀는 어떻게 이 시험으로 주님을 공격하였는가?(8,9절) 가장 악질적인 시험이 맨 나중에 마련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때로 성도의 마지막 접전은 "아낙" 자손들과 더불어 싸우는 것이며, 마지막 타격은 격심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공격이 우리에게 엄습해 오더라도 우리는 그것에 대처할 준비를 갖추어야 하며, 좌우편에 의의 갑옷을 입고 모든 공격에 대해 이를 단호히 격퇴할 수 있도록 완전무장을 해야한다.
[1] 마귀가 보여 준 "천하만국." 이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마귀는 그를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갔다. 발락이 발람 선지자에게 원했던 것처럼 마귀는 승리를 기대하여 전 지면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성전 꼭대기는 그렇게 높지 않았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임금인 마귀는 그리스도를 이끌어 그의 영토에서부터 더 높이 올라가야만 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기록된 높은 산은 요단강 맞은 편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추측한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 1장 28, 2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시험을 받고 나신 바로 직후에 그곳에 계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높은 곳은 모세가 하나님과 더불어 기도할 때에 그가 모세에게 가나안의 모든 나라들을 보여 준 바 있는 "비스가산"일지도 모른다. 우리 주님은 마귀에게 이끌리어 이곳에서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마귀는 세상에 대해 천하 만국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통치하신 주님께서 이미 알고 계셨던 것보다 더욱 더 많은 것을 보여 줄 듯이 그를 데리고 간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비록 그 영광은 아닐지라도 유대 인근에 위치한 몇 개의 왕국들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속임수와 미혹이 있었다. 아마 마귀가 보여 준 것은 단지 하나의 경치, 즉 대사기군이 쉽사리 세우고 짜맞추는 것과 같은, 구름 속의 공기와 같이 가볍고 환상적인 표현들에 불과하였다. 어울리고 생생한 색으로 왕들의 영광과 휘황찬란한 모습들을 나타내었으며, 그들의 화려한 옷들과 왕관, 수행원들과 마차, 경호원들, 또한 화려한 행차, 어전회의 품위 있는 궁전들, 성 안에 있는 사치스러운 건물들, 부귀영화와 쾌락의 극치를 보여 주는 데 저택의 정원들과 들판들을 진열하여 나타내 보임으로써 강력하게 마음을 끌어 탄성을 발하며 이것들을 좋아하게 되기를 바랐다. 마귀가 그를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보인 것은 단지 "그것들에 심취되게" 하며, 또한 속임수를 착색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 시험에 속지 않으셨으며 이 속임수들을 꿰뚫어 보셨다. 그리스도께서 사탄이 하는 짓을 그대로 내버려두신 것은 그의 승리를 더욱 빛내기 위함이었다.
사탄의 시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이러한 시험들은 마땅히 보아야할 것을 보지 못하는 어두운 "눈"을 가진 사람에게 밀어닥친다. 또한 마땅히 돌이켜야할 허영심에 눈을 현혹함으로써 시험한다. 첫 번째 범죄는 눈에서 시작되었다(창 3:6).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눈과 더불어 계약을 맺고 하나님께서 이 허영심을 보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둘째, 이러한 시험들은 일반적으로 세상과 그것의 사물들에서 비롯된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마귀가 시험할 때 사용하는 가장 매력적인 주제이다.
셋째, 이 시험은 마귀가 빈약한 영혼들을 유혹할 때 사용하는 "큰 속임수"이다. 그는 속이고 파괴한다. 마귀는 어두운 그림자와 거짓된 색채로 사람을 속이며, 세상과 그 영광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 모든 영광의 자랑을 더럽히는 죄나 슬픔이나 죽음, 또는 큰 재산에는 늘 붙어 다니는 염려와 재난, 왕관에 둘러쳐 있는 가시는 감추어버린다.
넷째, "세상의 영광"은 "지각이 없거나 경솔한 자"에게 가장 매력적인 시험이며, 사람은 대부분 이 시험에 속한다. "라반"의 아들들이 "야곱"을 질투하고 미워한 것은 "이러한 모든 영광들" 때문이었으며, "이생의 자랑"은 가장 위험한 덫이다.
[2] 마귀는 그리스도에게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9절)고 말하였다. 마귀는 앞서의 시험에서 다소간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마귀가 요구했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귀는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단지 하나의 인간으로 보아 넘기고 있다. 마귀는 말하기를 "보라, 네가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아버지는 너를 버렸고 굶어 죽게 하지 않느냐! 그것이 바로 네 아버지가 아니라는 표식이야. 그러나 만일 네가 나의 지배를 받는다면 하나님이 하는 것보다 더 잘해 줄 수 있어. 나를 너의 아버지로 삼고 축복을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마귀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도록 설득할 수 있을 때는 사람들이 쉽사리 달라붙을 수 있는 미끼를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이 약속의 기만성은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는 데 있다. "이 모든 것"이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참되고 실속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지도와 그림, 환상에 불과하였다. 마귀는 이러한 것을 그에게 주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사탄의 속임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있지 않은 것을 바라봄으로써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마귀의 미끼는 모두가 가짜 모조품이다. 이 모든 것들은 마귀가 그들을 속이거나 그들이 그들 스스로를 속이는 한낮 겉치레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지상의 나라들"은 오래 전에 메시야에게 약속되었었다. 만일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세상의 나라들은 그에게 속할 것이다. 사탄은 선한 천사, 아마 왕국을 넘겨 줄 수 있었던 천사들 중의 하나인 것처럼 가장하였고, 또한 약속을 따라 그에게 소유물을 넘겨주는 사명을 맡은 자로 행세하였다.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일지라도 마귀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받기를 조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죄악된 방법으로 그것을 붙잡음으로써 그 실행을 촉진하게 될 때 특히 유의해야 한다.
둘째,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이라는 조건은 얼마나 야비한가?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마귀는 "경배 받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이방인들은 그들의 신들에게 드리는 경배는 모두 마귀에게 하는 것이며(신 32:17), 따라서 마귀는 "이 세상의 신"이라고 불리 운다(고후 4:4; 고전 10:20). 마귀는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를 추어올리고 그것을 다시 유대인들에게 소개하려고 선생으로 자처하였으며, 그때에 세상의 나라들은 곧 그에게로 몰려들 것이라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흥미를 돋우어 설득하려고 했다. 이보다 더 가중되고 음흉한 시험이 또 있을까? 여기에서 알아야할 것은 최고의 성도는 최악의 죄에로 시험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특별히 우울의 세력 아래 있을 때이다. 죄악의 죄란 무신론, 불경죄, 살인, 자살 등과 같은 것들이다.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역경임에 틀림없으나, 그것에 동의나 시인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죄는 아니다. 그리스도는 사탄을 경배하라는 시험을 받았다.
(2)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마귀의 돌격을 방어하시고, 그 공격을 좌절시키셨으며, 또한 어떻게 정복자가 되었는가를 살펴보자.
[1] 그리스도는 혐오와 증오로써 마귀의 제안을 물리쳤다. 즉 그리스도는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앞의 두 시험은 생각할 여유를 주는 듯한 어떤 느낌이 있었으나 이 시험은 어떤 담판의 기회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순간적이며 전격적이었다. 첫눈에 혐오할 만큼 보였으므로 즉시 거절해 버린 것이다. 만일 이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이상과 같이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고 우리에게 제안했다면 꾸준히 들어서는 안 된다(신 13:6, 8). 어떤 시험들은 그것들의 사악함이 앞 이마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이미 공개되어 있는 것들이며 논쟁할 필요없이 단번에 거절해 버리야 한다. 즉 "사단아 물러가라. 거둬 치우라. 나는 그런 생각을 도저히 할 수 없단 말이야!"라고.
사탄이 그리스도로 하여금 스스로 뛰어내림으로써 불행을 자초하도록 시험했을 때, 그는 이에 굴복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듣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 시험이 하나님을 향해 정면으로 대들어온 이상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단호히 "사단아 물러가라"고 명령하였다. 하나님의 명예를 손상시키거나 그의 왕관에 일대 타격을 가하는 어떤 일의 제안에 대해 의분(義憤)을 내는 것은 정당한 것임을 유의하라. 아니, 주님이 미워하시는 것으로 확신되는 가증한 것은 무엇이든지 이와 같이 철저히 미워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멀리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시험을 물리는데 있어서는 단호해야 하며, 사탄이 속살거리는 말에는 우리의 귀를 막는 것이 좋다는 사실이다.
[2] 그리스도는 마귀의 이 제안을 성경에서 끄집어낸 논증으로 거절하였다. 죄를 대항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결심을 굳게 하려면 그러한 결심에 대한 상당한 논거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좋다. 신명기 6장 13절과 10장 20절에서 인용한 논증, 즉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은 그 목적에 완전히 부합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마귀가 빛의 천사(그는 빛의 천사로 가장하였다)인지 아닌지를 논쟁하지 않았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마귀에게 경배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오직 경배하고 영광 돌릴 분은 하나님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마귀로 하여금 반대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하여 시험에 답변하는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충분하고 간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주님은 이 경우에 긴요하면서도 보편적으로 필수적인 기본법을 사용하고 있다. 종교적인 경배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드려야 하며 또한 어떤 피조물에게도 바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분리될 수 없는 왕관의 꽃이며, 또한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주지 않을 영광의 가지로서, 그가 "하나님과 같거나 동등하지"않은 분이었다면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함에도 그의 아들에게 이 영광을 주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종교적인 예배에 관한 이 법칙을 인용하고 있으며 또한 그 자신에 적용하여 이것을 인용하고 있다.
첫째, 그의 겸손의 신분에서 그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그는 스스로 "이 법칙 아래" 놓이셨다(율법 아래 나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경배를 받으셨지만,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공적으로 개인적으로 경배하였다. 그는 맨 처음에 그 자신을 기꺼이 하려 했던 것 이상을 우리로 하여금 하게 하시지 않는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모든 의로움을 성취하셨다.
둘째, 이것은 종교적 예배의 법칙이 의무상 영원히 당연한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그는 비록 예배의 많은 격식과 제도를 폐지하고 수정하셨지만 이 기본적인 자연법, 즉 하나님만이 경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확신시키려 오셨다.
Ⅴ. 이 싸움의 결말은 11절에 서술되어 있다. 비록 하나님의 자녀가 많고 큰 시험을 겪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결코 허락지 않으신다(고전 10:13). 그들이 많은 시험을 통해 어려운 가운데 처해 있는 것은 잠시 동안에 불과하다.
이제 그 결말은 영광스러웠으며, 그리스도의 영광은 더욱 빛나게 되었다.
1. 마귀는 실패하였고, 그 싸움터를 떠나고 말았다. 이에 마귀는 "사단아 물러가라"는 예수님의 추상같은 명령에 압도되어 어쩔 수 없이 그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망신만 당한 마귀는 수치와 창피를 느끼며 황망히 물러가 버렸다. 그의 공격이 무모하면 할수록 그에게 주어진 칼은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Magnis tamen excidit ausis-어쨌든 그 공격은 실패하였고 무모하였다. 마귀는 제멋대로 천하만국과 그 영광으로 그리스도를 시험하려 했지만 그는 결코 이 미끼에 걸려들지 않았으며 또한 이전에 수많은 사람의 자녀들을 넘어뜨린 시험으로는 도저히 그를 이길 수 없음을 알아채리고는 이내 떠나고 말았다. 마귀는 이제 그를 사람 이상으로 알고 단념하였다. 마귀는 그리스도를 이러한 시험으로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음을 알자 이에 대해 실망을 느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결론을 내림과 동시에 그를 더 이상 시험하는 것이 무익하다고 단정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만일 우리가 마귀를 거절하면 그는 도망할 것이며, 또한 우리의 입장을 고수한다면 그는 우리에게 굴복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마치 "나오미가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쳤던"(롬 1:18) 것과 같다.마귀가 그리스도를 떠났을 때 그는 스스로 완전히 참패하였음을 자인하였다. 그의 머리는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물어뜯으려고" 공격하였을 때 이로 말미암아 깨어졌다. 마귀가 그를 떠난 것은 그에게 더 이상 할 일이 없으며 붙잡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해보아야 소용없음을 안 마귀는 모든 것을 단념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마귀는 모든 성도의 원수이지만 정복된 원수라는 사실이다. 우리 구원의 대장 되신 그리스도는 그를 패배시켰고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승리를 추구할 것밖에" 없다.
2. 거룩한 천사가 나아와 승리하신 우리 구속주를 수종들었다.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11절). 그들은 마귀가 그리스도를 시험하던 때와 같이,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나아왔다는 사실이다. 마귀가 우리 주님에게 공격을 가하고 있는 동안 천사는 멀찌기 서서 지켜볼 뿐 즉각적인 원조와 수종을 중지하였다. 그것은 그가 사탄을 자신의 힘으로 물리침으로써 그의 승리가 더욱 두드러지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후에 천사장 "미가엘"이 그의 천사들로 하여금 "용과 그의 천사들"과 더불어 싸우도록 했을 때, 이것은 그가 "그들을 필요"로 하거나 그들 없이는 싸움을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을 거느리고 있는 한 그들의 위선과 명예를 기꺼이 높여 주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 천사가 그에게 음식을 날라다 주는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많은 천사들이 그를 수종들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존경하고 그의 명령을 받을 만한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져 있음을 입증하기 위함이다.이것을 보라!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1) 즉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또는 모든 특별한 성도들에 대항하여 싸우려는 사악하고 악의에 찬 영들의 세계가 있는가 하면 그들을 위해 예비 되고 고용된 거룩한 영들의 세계도 있다는 사실이다. "마귀와의 싸움"과 연관하여 우리는 "천사와의 교제"에서 많은 위로를 얻을 수 있다.
(2) 그리스도의 승리는 천사의 개선(triump)이기도 하다. 천사들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축하하고 그와 더불어 기뻐하며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기 위해 그에게 나아왔다. 왜냐하면 큰 용이 내어 쫓김을 당할 때 하늘에서는 큰 소리로 이를 축하하여 찬송하기 때문이다(계 12:9.10). 이제 "구원과 힘"이 이르렀다.
(3) 천사들은 주 예수님을 음식으로만 아니라 이 큰 굶주림에 뒤따른 모든 궁핍을 채워 줄 수 있는 것으로 공궤하였다. 그리스도의 비하(卑下)와 겸손의 모본이 어떻게 그의 영광의 표식과 평행 되는지를 살펴 보라. 그가 "연약하
전도의 근거지 (마태복음 4:12-17)
이곳에는 그리스도께서 갈릴리의 회당에서 전파하신 사실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가 전도자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애써 완성하신 이 큰 구원을 전파하기 시작하셨는데(히 2:3), 이는 그가 이 큰 구원에 대해 얼마나 심혈을 쏟았으며, 우리가 어떻게 이에 합당한 자가 되어야 할 것인가를 그대로 보여 주기 위함이다.
마태복음 이외의 복음서들, 특히 요한복음에 있는 몇 기적들은 그리스도의 생애의 순서에 있어서 그의 시험과 갈릴리 전도 사이에 삽입된 것으로 추측된다. 예수님께서 시험받으신 후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신 것은 세례 요한이 그를 가리켜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고 말하였을 때이다. 그 후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으며(요 2:), 니고데모(요 3:)와 사마리아 여인(요 4:)과 대화하신 후 갈릴리로 돌아와 거기에서 전파하셨다. 마태는 갈릴리에 머물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 전파를 하신 그의 공적인 활동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Ⅰ. 시기.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12절).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성도의 고통의 부르짖음이 주님의 귓전을 울렸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요한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따른 자신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는 속박과 고통을 기억하신다."
1. 그리스도는 "요한이 잡힌 사실에 대해 듣기 전에는" 마을로 가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주님 자신이 나타나시기 전에만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그에게 주어진 시간을 가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빛나기 전에" 요한은 마땅히 "빛을 잃고 사라져야만" 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섭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현명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사람들의 마음은 예수님과 요한으로 말미암아 엇갈려 어수선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요한에게 속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예수님에게 속하였다"고 말하였을 것이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선구자이지, 결코 그의 적수는 아니다. 달과 별들은 태양이 떠오르면 사라지는 법이다.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촉구하여 이를 행함으로써 그의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스스로 길을 비켜선 것이다. 증인들은 그들의 증거를 다 마치기 전에는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계 11:7).2. 그리스도는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내 마을로 가셨다.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하신 것은, 헤롯이 요한을 대적한 것처럼 유대에 있는 바리새인들이 그를 원수시하는 것을 알았으므로 자신의 안전을 위해 어떤 대책을 강구해야 했으며, 또한 세례 요한의 공백을 메꾸고 그가 닦아둔 좋은 기초 위에 쌓아 올리기 위함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은 그 자신을 증인 없이 내버려두시거나, 자기 교회를 인도자 없이 방치해 두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가 유용한 도구를 없이 하실 때는 또 다른 도구를 일으켜 세우실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의 남은 부분을 소유하시며 해야 한다면 행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내 종 모세는 죽었으나" 그 대신에 여호수아가 계승한 것처럼, 요한은 잡혔으나 이제 예수님은 그 뒤를 이으신 것이다.
Ⅱ. 그가 전파하신 장소.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신 곳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갈릴리 지방이었는데, 이곳은 야만적이고 촌스러운 지방으로 멸시를 받았다. 이 지방의 주민들은 억세고 야비한 사람들로 취급받았고, 또는 군인으로나 적합하다고 여겨졌으며, 버릇이 없을 뿐 아니라 학자로서는 합당치 않은 자들로 취급되었다. 그리스도는 이곳으로 가셨으며, 그곳에서 복음의 가치를 높이 세우셨다. 그는 다른 일에서와 같이 이 일에서도 자신을 낮추셨다.
1.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자신의 거처로 삼으신 곳은 그가 자라셨던 나사렛은 아니었다. 아니, 그는 나사렛을 떠나셨다. 우리는 특별히 이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13절). 그가 나사렛을 떠나신 것은 그곳 사람들이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냈기" 때문이었다(눅 4:29). 그리스도는 맨 처음으로 매우 공평하게 그들을 봉사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그와 그의 가르침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분노가 가득차 살기등등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나사렛을 떠났으며 그의 가르침을 방해한 자들에 대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버렸다. 나사렛은 그리스도를 거절했던 최초의 동네이며, 이로 말미암아 그에게서 버림을 당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복음이나 은혜의 수단을 멸시하거나 밀쳐버리는 자들에게서 이것들을 빼앗아 버리는 것은 하나님에게 합당하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환영하지 않는 곳에서는 오래 머물지 않으신다. "불쌍한 나사렛이여! 네가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번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그러나 그리스도가 "가서 사신 가버나움"은 나사렛에서 멀리 멀어진 갈릴리 지방의 한 고을로서 그 규모가 크고 번화하였다. 여기에서는 이 고을이 "해변"에 위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해변"이란 큰 바닷가는 아니고 디베랴 바다, 즉 "게네사렛 호수"로도 불리우는 육지안의 큰 바닷가였다. 가버나움은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곧 갈릴리 호수의 서북편에 위치하였다(역주:현재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음).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그의 아버지 요셉이 이곳에 살았었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적어도 그가 거처할 집이 있었다고 하며, 또한 어떤 사람은 그가 거의 확실히 시몬 베드로의 집에 살았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 계속적으로 정착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가 선행을 하면서 돌아다니셨기 때문이다. 때로 이곳은 그의 사령부가 되기도 하였다. 그는 잠시나마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였고 머리를 두었다. 아마도 그는 나사렛에 있을 때 보다는 가버나움에서 더 환영과 대접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거절한다면 다른 사람이 이를 환영하고 받아들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가버나움은 나사렛이 버린 자를 기꺼이 환영하였다. 그의 고향 사람들은 모여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는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너 가버나움아, 이제 영광의 날은 이르렀도다. 이제 너는 하늘에까지 들어 올리워졌다. 현명하여 네 방문의 때를 알지어다."
2. 이곳에서 성취된 예언(14-16절)은 약간의 변동이 있기는 하나 이사야 9장 1,2절에서 인용되고 있다. 선지자 이사야는 여기에서 임마누엘을 멸시하는 자에게 닥쳐올 고통의 큰 흑암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는데, 이것은 비교적 경미하였던 벤하닷에 의한 제1차 포로시(왕상 15:20)나, 보다 극심했던 앗수르의 제2차 포로시(왕하 15:29)에 그곳에 임했던 고통보다 더 큰 것이었다. 복음을 거절한 유대 민족에게 내릴 형벌을 이보다 더 비참한 것이 될 것이다(사 8:21, 22 절을 보라). 왜냐하면 이들 포로 된 장소들은 속박에서 해방되어 다시 큰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9:2). 이것이 바로 이사야가 나타내려고 하는 뜻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예언에 대한 많은 성취가 기록되어 있으며, 복음서 기자는 여기에서 후반절을 취하고 있는데, 이 구절은 포로의 흑암 속에 싸여 있었던 이러한 땅에 자유와 번영의 빛이 회복되어 다시 비추었다는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에게 복음이 나타난 사실을 이것에 적용시키고 있다.15절에는 이 장소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스볼론 땅"이 "해변가"에 있다고 한 것은 옳다. 왜냐하면 "스볼론은 배 매는 곳이며, 나가는 것을 기뻐하였기" 때문이다(창 49:13; 신 33:18). 납달리에 대해서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며"(창 49:21), 또한 "은혜가 족하다"(신 33:23)고 한 것은 복음이 그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복음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다운 소리이며 하나님의 충족한 은혜를 전해 준다. 요단강 저편에 있는 지방도 이와 같이 언급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종종 이곳과 이방의 갈릴리, 즉 이방인들의 상업 거래가 빈번했고 유대인들이 섞여 사는 갈릴리 윗 지방에서 전파하였는데, 이는 가난한 이방인들을 위해 예비 된 긍휼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가버나움에 오셨을 때 복음은 그 인근의 모든 땅에 골고루 전파되었으니 이와 같이 의의 태양은 그 빛을 널리 비추었던 것이다.
이 장소에 거주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다음의 몇 가지 사실들을 고찰할 수 있다.
(1) 복음이 이르기 전 그들이 놓여있던 상태(16절). 그들은 "흑암 속에" 있었다. 그리스도가 없는 자는 흑암 속에 있는 자일 뿐 아니라 그들 자신이 곧 흑암이며, 이 흑암은 "깊음 위에 있는"(창 1:2) 흑암과 같은 것임을 유의하라. 아니, 그들은 "사망의 땅과 그늘"에 있었다. 이것은 무덤이 흑암의 땅인 것처럼, "큰 흑암"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큰 위험"을 나타내기도 한다. 거의 소생할 수 없을 정도로 병든 사람이나 회복할 가망이 전혀 없는 사람은 비록 생명이 끊어지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사망의 그늘의 골짜기"에 놓여있다. 마찬가지로 가난한 백성들은 아직 정지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정죄의 경계선에 놓여 있었다. 즉 실제로는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을 이러한 상태에 "앉아" 있었다. 앉는 다는 것은 계속적으로 머무르는 자세를 말한다. 앉는 것은 곤 머무르는 것이다. 그들은 흑암 속에 처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였고, 절망과 자포자기 속에 허우적거렸다. 또한 앉는 것만 만족한 자세이다. 그들은 흑암 속에 있었으며, 흑암을 사랑하였고, 빛보다는 오히려 흑암을 택하였다. 그들은 자진해서 무지한 자가 되었다. 그들의 상태는 실로 처참하였다. 많은 강대국들의 상태도 여전히 이와 같이 이들에 대해 긍휼함으로 기도하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상태는 더욱 처참하다. 이는 그들이 복음의 빛 가운데 흑암 속에 앉았기 때문이다. 밤이기 때문에 흑암 속에 있어야만 하는 자들은 머지 않아 태양이 떠오를 것을 확신할 수 있지만, 소경이기 때문에 흑암 속에 있는 자들은 그렇게 빨리, 그의 눈이 열리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빛을 가지고 있지만, 그 빛이 주님 안에서 빛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2)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이 이르렀을 때 그들이 얻는 특권은 일찍이 미개한 여행자를 비추었던 빛만큼 매우 생동적인 것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복음이 이를 때는 빛도 함께 이른다는 사실이다. 이 빛이 어떤 장소나 어떤 영혼에게 임하여 그곳을 환한 대낮으로 만든다(요 3:19; 눅 1:78, 79). 빛은 찾아내고 지시하는 역할을 한다. 복음도 이와 같다.
복음은 계시의 명백성과 그 증거를 나타내는 "큰" 빛으로서 촛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태양 빛이다. 지금은 폐기되어버린 한낱 그림자에 불과한 율법의 빛에 비하면 복음의 빛은 큰 것이다. 복음이 "큰 빛"인 것은 크고 중대한 일을 밝히기 때문이다. 이 복음의 빛은 다함이 없고 멀리 퍼진다. 이 단어는 "솟아오른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점점 커지는 빛"이다. 그들이 복음을 받을 때는 단지 새벽녘에 지나지 않았으며, 지금은 노을이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이후에는 "더욱 더 빛나는" 때가 이를 것이다. 겨자씨나 새벽빛과 같이 복음의 왕국은 처음에는 작지만 점점 성장하여 그 완성 때는 매우 커지는 것이다.
"빛은 그들에게 솟아올랐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들은 그것을 찾으러 가지 않았지만 이 선한 축복이 먼저 그들에게 찾아온 것이다. 이 빛은 그들이 이것을 알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지정된 시간에 이르렀는데, 이일은 "아침을 명하고 새벽으로 그 처소를 알게 하여 그것으로 땅 끝에 비취게 하신"(욥 38:12, 13) 그분의 처리에 의한 것이다.
Ⅲ.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신 주제(17절). "이때부터"란 그가 갈릴리와 스볼론, 납달리 땅으로 오신 때부터를 말하며 이때부터 전파하셨다. 그는 이에 앞서 유대에서 전파하셨으며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푸셨다(요 4:1). 그러나 그의 전파는 대중적이거나 또는 지금 시작하는 것처럼 지속적인 것이 아니었다. 목회의 사역은 매우 중대하고 두려운 것이므로 점차적인 과정과 진도를 따라 수행해 나가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곳에 있는 그의 설교에서 강조한 주제(그것은 그의 모든 설교의 총합이며 골자이기도 함)는 요한이 설교한 주제, 즉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와 대동소이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복음은 여러 시대에 걸쳐서 그 주제가 똑같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 명령이 같고 그것들을 수행해야 하는 이유가 똑같기 때문이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사"라도 감히 다른 복음을 말할 수 없으며, 오직 이 복음만을 전해야 한다(갈 1:8).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한 복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회개함으로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계 14:6, 7). 그리스도께서 요한이 그 이전에 전파했던 것과 똑같은 의도로 전파하셨을 때 그는 요한의 전파에 대해 상당한 존경을 표하였다. 이로써 그는 요한이 그의 사자와 전권대사였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의도를 있는 그대로 전달한 심부름꾼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의 사자의 말을 확증하셨다(사 44:26). 아들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얻기 위하여" 이전에 왔던 종과 같이 심부름으로 왔던 것이다(마 21:27).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가슴속에 있었으며 박학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수 있는 신적(神的)이고 천적(天的)인 일들에 대한 탁월한 개념을 전파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낡고 평범한 주제, 곧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을 선정하고 있다.
[1] 그는 먼저 이 주제를 전파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이 주제로 시작하였다. 목사는 새로운 의견을 제창하거나 새로운 구조를 짜 맞추거나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 내는 데 야심을 가져서는 안 되며 그들 스스로가 평범하고 실제적인 일, 또는 우리의 입이나 마음에 있는 가장 가까운 말에 자족해야 한다. 우리는 설교에 사용할 내용이나 언어를 찾기 위해 하늘에 올라가거나 깊은 곳으로 내려갈 필요가 없다. 요한이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했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길을 준비하였으며, 회개를 촉구함으로써 더욱 전개시켜 나갔던 것이다. "만일 사람이 그의 뜻을 행하려"하면 "그의 교훈에" 대해 더 "알게 될 것이다"(요 7:17).
[2] 그는 종종 이 주제에 대해 전파하셨다. 그는 어디에 가시든지 이 주제에 대해 교훈하셨으며, 또한 그나 그를 따르는 자들은 "가려운 귀"를 가진 자나 참으로 교훈적인 것보다는 신기하거나 다양한 것을 더 좋아하는 자들처럼 이 회개에 대한 주제를 케케묵은 것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이전에 전파되고 들려진 내용이 매우 유익하게 다시금 전파되고 들려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다시금 전파되고 들려질 때는 이전 것보다 더 낫고, 새로운 애정과 감동으로 행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바울은 이전에 말했던 것을 "눈물을 흘리며"(빌 3:1, 18) 다시 말하였다.
[3] 그는 이 주제를 복음으로써 전파하였다. "회개하라. 네 길을 살피라, 네 자신을 돌이키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회개의 교리는 올바른 복음적 교리라는 사실이다. 우울하고 침통하게 보였던 엄격한 세례 요한뿐만 아니라 그 입술이 꿀샘과 같이 달콤하고 은혜스러운 예수님도 "회개를 전파하셨다." 왜냐하면 회개할 여지가 남아 있다는 사실은 말할 수 없는 특권이기 때문이다.
[4] 그 이유는 여전히 대동소이하다.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성령의 충만한 임재가 있기 전에는 완전히 도래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은 이보다 한 해 앞서서 천국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더 많이 가까워졌으므로 그 논증은 한층 더 강력한 것이다. 지금은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다"(롬 13:11). 우리는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히 10:25) 우리의 의무를 서둘러 완수해야만 한다.
처음 제자들 (마태복음 4:18-22)
그리스도께서 그가 전파하실 때에 먼저 "제자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하였는데, 이 제자들은 지금은 그의 가르침을 "듣는 자"에 불과하지만 이후에는 "전파자"가 될 것이며 또한 지금은 그의 기적들을 본 증인에 불과하지만 이후에는 그것들에 관해 직접으로 증거 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 이곳에는 그리스도께서 그와의 사귐을 위해 친히 부르셨던 첫 번째 제자들에 대한 기사가 있다.
1. 이것은 그리스도에게로 부르심을 받은 "효과적인 소명"의한 실례이다. 그는 자신이 행한 모든 설교에서 모든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부르셨지만, 여기에서는 특별히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자들만을 부르셨다. 그리스도의 은혜의 능력을 보고 찬미하자. 그리고 그의 말씀을 그의 능력의 막대기로 인정하고, 복음 소명을 더욱 유효하게 하는 데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능력 있는 영향력, 즉 두드러진 영향력을 얻기 위해 그를 모셔들이자. 모든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 중에서도 이 사람들만이 불러내어져 구원함을 받았다. 그리스도는 이들에게만 자신을 드러내셨으며, 모든 세계에 드러내신 것은 아니다.2. 이것은 목회 사역에 대한 계율과 명령의 한 실례이다. 선생인 그리스도께서 큰 학교를 세우셨을 때 그가 착수한 첫 번째 사업중의 하나는 교장 밑에서 가르치는 일을 전담할 보조교사를 임명하는 일이었다. 이제 그는 사람들에게 은사를 베풀고 토기 그릇에 보화를 담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그가 일찍이 자기 교회를 돌 본 하나의 좋은 본보기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살펴볼 수 있다.
Ⅰ. 그들이 부르심을 받았던 "장소" ─ "갈릴리 바다"로서, 이곳을 예수님이 걷고 계셨는데 가버나움은 이 바다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 디베랴 바다에 관하여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그가 만든 일곱 바다 가운데서 이 게네사렛 바다만을 선택하셨다"고 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이곳에 나타나시어 이적 기사를 행하심으로써 영광스럽게 된 사실과 잘 들어맞는다. 여기에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광야를 거닐 때 이삭과 같이 바다의 둑길을 따라 묵상하면서 걷고 있었다. 그는 이곳으로 제자들을 부르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는 헤롯의 궁전(권세가나 귀족이 부르심을 받은 예는 거의 없음)이나 예루살렘(거기에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있었음)으로 가시지 않고 갈릴리 바다로 오셨다. 확실히 그리스도께서 보시는 것은 사람이 보는 것과 전혀 다르다. 베드로나 안드레를 유효하게 부르셨던 똑같은 능력이 안다스나 가야바에게는 미칠 수 없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대화나 배려에 있어서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셨으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세상의 가난한 자"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갈릴리는 유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북반부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그 주민들은 거의가 다 미개하고 상스러웠으며, 또한 그들의 언어 역시 순사투리였고 시비하거나 싸울 때는 매우 거칠게 들렸다. "그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그 신분과 지방을 알 수 있는 정도였다." 갈릴리 바다에서 선택함을 받은 자들은 그들보다는 좀더 세련된 갈릴리 사람들이 지니고 있었던 특권이나 장점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장차 그의 왕국에서 우두머리 장관이 될 사람들을 부르시기 위하여 이곳으로 오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기" 때문이다.
Ⅱ. "그들의 신분". 우리는 이곳에서 두 쌍의 형제들에 대한 기사를 읽어볼 수 있다. 즉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다. 베드로와 요한(아마 야고보와 요한도)은 이미 그리스도로 알고 있었으나(요 1:40, 41), 그때까지 친밀하고 지속적으로 그를 따르도록 소명 받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는 가난한 심령들과 더불어 점차적으로 교제를 맺으신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으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회개의 연단을 거친 자들은 신앙의 즐거움에 영접될 것이다. 이것들에 대해 다음의 사실들을 알 수 있다.
1. 그들은 "형제들"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골육으로 친척 된 자"(롬 9:3 에서 바울 사도가 말한대로)가 함께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은 축복이라는 사실이다. "한 가족"이 "하나님의 식구"가 되었을 때 그것은 가문의 영예요 위로이다.2. 그들은 "어부들"이었다.
(1) 어부였으므로 그들은 "가난한 자들"이었다. 만일 그들이 재산이나, 또는 상업상 적지 않은 저장품을 가지고 있었다면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며, 오히려 이런 것은 한낮 취미나 오락으로 즐겼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를 멸시치 않으시며, 따라서 우리도 그렇지 않음을 유의하라. 즉 가난한 자에게 복음은 전파되며, 영예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때로 가장 부족한 자에게 더욱 풍성한 영예를 베푸신다는 것이다.
(2) 그들은 "무식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애굽의 모든 지식을 통달하였던 모세와 같이 책과 문학으로 양육 받지 못하였다. 종종 주님께서는 보잘 것 없는 자들을 택하여 풍성한 은혜의 선물을 안겨 주려고 하신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지식과 언변에 대한 특별한 은사가 지금 당장에 기대되지는 않지만 필수적인 능력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얻어져야만 한다. 또한 이것들의 충분한 능력과 분량이 없이는 그 누구도 목회의 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
(3) 그들은 노동으로 잔뼈가 굵어진 "직업을 가진 자들"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성실한 직업에 있어서 근면은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며 거룩한 생활을 하는데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모세는 양을 지킬 때, 다윗은 양 무리를 칠 때에 두드러진 사역에로 부르심을 받았다. 게으른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보다는 사탄의 시험에로 더 개방되어 있다.
(4) 그들은 "곤경"과 위험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어부라는 직업은 다른 직업보다 더 힘들고 위험한 직업이다. 어부는 종종 물에 젖고 추위에 떨어야만 한다. 그들은 주시하고 기다리고 수고해야만 하며, 때로 물의 위험을 당해야만 할 때도 있다. 고난을 참고 위험을 극복할 줄 아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갖거나 그의 제자가 되기에 매우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는 어려운 고난을 참고 견디어야만 한다.
Ⅲ. "그들의 직업." 그 때에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들의 그물을 사용하여 고기를 잡고 있었으나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그물을 "깁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들의 근면성과 절약성을 보여 주는 한 실례이다. 그들은 새로운 그물을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아버지에게로 가지 않았으며, 고생스럽기는 했지만 낡은 그물을 깁고 있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힘껏 해보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아버지인 세베대"와 함께 있으면서 그의 일을 돕고 거들어 주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자녀들이 그들의 양친을 돌보고 의무를 다하는 일은 즐겁고도 고무적인 일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살펴볼 수 있다.
1. 그들은 모두가 한 가지로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들이었고 게으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그렇게 하는 것이 보여질 때는 매우 행복한 일이 될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라고 우리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내가 내 직업 속에 있는가?"를 물어야할 것이다.2. 그들은 서로 다르게 "일하고 있었다." 그들 중 두 사람은 고기를 잡고 있었고, 두 사람은 "그물을 깁고" 있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목사는 가르치든지 연구하든지 항상 일해야만 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언제나 할 수만 있다면 그들 스스로가 일할 것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물을 깁는 일은 한창 때에 고기를 잡는 일에 못지 않게 꼭 필요한 일이다."
Ⅳ. "그들의 소명"(19절) "나를 다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들은 이전에 평범한 제자로서 그리스도를 따랐으며(요 1:37), 동시에 그리스도를 따르면서도 그들의 직업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보다 친밀하고 지속적인 참여가 필요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그들의 직업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소명된 자라 할지라도 특히 목회의 사역을 위해 택정함을 받았을 때는 더욱 더 가까이 그를 따르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1.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무엇을 의도하셨는가?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것은 그들이 이전에 가졌던 직업을 넌지시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새로이 부과된 영광스러운 지위에 대해 자만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는 그들이 여전히 일개 어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새로이 할당된 임무에 대해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는 그들이 고기 잡는 것을 계속해 왔고 지금도 여전히 어부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일에서 끄집어낸 이러한 암시나 표현으로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것을 말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다윗은 양을 먹이는 데서부터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먹이도록 소명을 받았다. 그는 왕이면서 목자였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1) 목사는 "고기를 낚는 어부"로서, 사람들을 다른 환경으로 옮김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고 오히려 구원하는 것이다. 그들은 진노나 부귀, 명예나 진급, 또는 그 자신을 얻기 위해서 고기를 낚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고기를 낚아야만 한다.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며'(히 13:17), 또한 "그들이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너희인 것이다"(고후 12:14, 16).
(2) 그들을 어부로 만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는 사람들에게 이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며, 이 일을 하도록 불러내며, 권한을 주고 성공케 하신다. 또한 그들에게 영혼을 위해 고기를 낚는 사명을 주며, 그들을 얻을 수 있는 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와 같이 소명을 받은 교역자들은 모름지기 자신들의 사역에 큰 보람과 위로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2. 그들은 이 일을 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곧 "나를 따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제쳐놓고 부지런히 그리스도를 따르고 겸손히 그를 닮아가야 하며, 그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삼고 따라가야만 한다.
(1)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봉사를 위해 무엇보다도 우선 이에 합당한 자격을 구비한 자를 쓰신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 쓰임을 받으려는 자는 그의 부르심에 합당한 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2) "그리스도를 전파"하려고 하는 자는 먼저 그리스도를 "배우고," 또한 그에 대해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우리가 그를 잘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자식에로 데려올 수 있을 것인가?
(3) 그리스도와 교제를 가지려고 하는 자는 모름지기 그를 따르는 일에 부지런하고 계속적이어야만 한다.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항상 출입하실 때 그와 함께 동행함으로써"(행 1:21) 그들의 사역이 준비되었다. 지식을 얻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지도를 받았으므로 그의 후계자가 되기에는 매우 적합하였다.
(4) 사람을 낚으려는 자는 부지런하고 신실하게, 또한 온유하게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가 행하는 것을 본받아 그대로 행해야만 한다. 그리스도는 설교자들에 대한 초대의 모본이며, 설교자들은 "그와 더불어 함께 일하는 동역자"가 되어야만 한다.
Ⅴ. "이 소명에 대한 좋은 결과."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부르신 소명은 성공적이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곧 그물을 버려 두고"(20절) 그를 쫓았으며, 야고보와 요한은 "곧 배와 부친을 버려 두고(22절) 그를 쫓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를 올바로 따르려는 자는 그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기독자는 모든 감정적인 것을 버리고 이것들에 냉담해야 하며, "아버지와 어머니를 미워해야"하며 (눅 14:26), 그들을 그리스도보다 덜 사랑해야 하며, 그들보다는 그리스도에게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목회의 사역에 헌신하려는 자는 특별히 전인(全人)을 요구하는 일에 전념하기 위하여 이 세상의 모든 일들과 인연을 끊어야 한다.
1. 주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이러한 예로 우리로 하여금 그의 은혜의 유효성을 믿도록 좋은 격려를 해 준다. 그의 말씀은 얼마나 강력하고 유효한가! "그가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서로 견주어 볼 만한 능력 있는 말씀이 있으니, 이는 "나사로야! 나오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즐거이 헌신하도록 만드는"(시 110:3) 능력이다.2. 제자들의 유연성에 대한 이러한 예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명령을 순종하도록 하는데 있어서 좋은 본보기가 다녔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그에게 나오거나, 주인이신 그가 인도하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이 마땅히 지녀야 할 좋은 속성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현재 사역이나 가족과의 유대, 소명 받은 봉사의 어려움, 이 부르심에 합당치 못한 자신들에 대해 하 등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과 같이 "갈 바를 알지 못하였지만" 그들이 따르고 있는 분을 매우 잘 알았으므로 순종하여 나갔던 것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을 버려 두고" 그를 쫓았다. 그의 아버지(세베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으므로 알 도리가 없다. 그의 어머니 살로매는 그리스도를 항시 따르던 자였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의 아버지 세베대도 믿는 신자였으나 그리스도는 특별히 젊은이를 불러 자기를 따르게 했음이 분명하다. 청년기는 배우는 시기요, 일하는 시기이다. 제사장들은 한창 나이 때에 직무를 수행하였다.
전도의 개요 (마태복음 4:23-25)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Ⅰ. 그리스도는 매우 부지런한 전파자였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것은 "천국 복음"이었다. "천국," 즉 은혜와 영광의 왕국은 강조적으로 지금 와 있는 왕국, 즉 이 지상의 모든 왕국들을 능가하며 영원히 남아 있게 될 왕국이다. "복음"은 왕의 대관식 선서를 포함한 왕국의 헌장이며, 이로써 그는 이 왕국의 국민들을 용서하고 보호하며 구원하시기 위하여 은혜스럽게 그 자신의 호의를 보이셨다. 복음은 또한 그들의 충성의 맹세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로써 그 왕국의 백성 된 자는 그의 계율을 준수하고 그의 명예를 추구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천국의 복음"이다. 그리스도는 이 천국 복음의 전파자였으며, 그것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확고히 하셨다.2. 그가 전파하신 곳은 "회당"이었다. 이것은 회당에서만 전파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주로 회당에서 전파하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회당은 "집합의 장소"였으며, "지혜가 그 소리를 높이는"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예배를 위한 집합 장소로서 모든 백성들이 복음을 받을 마음의 준비를 이곳에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회당에서는 "천국 복음"을 쉽사리 설명하여 소개할 구약 성서가 읽혀졌다.
3. 그는 전파하는데 많은 애를 쓰셨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전파하셨다." 그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로 모이도록 선포하실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겸손과 또한 자기 은혜의 비하(卑下)를 보여 주시기 위해 그들에게 나아가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은혜로 기다리시며, 찾아 구원하러 오시기" 때문이다. 요세푸스(Josephus)는 말하기를, 갈릴리에는 2백개 이상의 성과 마을이 있었는데 그리스도는 대부분 이곳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그는 "선행을 베푸시면서" 다니셨다. 순례하는 전파자요, 지칠 줄 모르는 분이신 그리스도에 비할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그는 이 마을 저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가난한 죄인들을 찾아 하나님께로 회복시키려 하였다. 이것은 교역자들에게 모본이 되는데 즉 선행을 베풀려고 노력해야 하며 즉각적이고 부단해야 하며 언제나 늘 끊임없이 말씀을 전파하려고 준비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Ⅱ. 그리스도는 매우 효험 있는 의사였다. 그는 두루 다니시면서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병을 고치셨다." 그는 말씀으로 이를 행하셨으며 이로 말미암아 자신을 이름을 널리 드높이셨다. "그는 그들에게 말씀을 전파하셨고, 그들을 치유하셨다."
1. 그는 "예외 없이 거의 모든 병"을 치유하셨다. 의사들이 아무리 최선을 다하여 처방해도 고치기 힘들기 때문에 의사의 치욕이라고 불리는 병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병들은 이 만능적인 의사이신 그리스도에게는 오히려 "영광"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을 전부 치유하셨는데," 아무리 고질적인 병이라도 그에게는 하 등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의 말씀은 참된 panpharmacon, 즉 완치였다.이 병의 명칭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곳에 사용된 세 가지 일반적인 용어는 다음과 같다. 즉 그는 "모든 병"(noson)을 고치셨는데, 이 모든 병이란 소경, 절름발이, 열병, 수종병 같은 병을 말하며, "모든 약한 것"(malakian)이란 이 질병이나 폐병을, "고통에 걸린 자"란 통풍병이나 결석(結石)병, 지랄병, 그 밖에 고통을 주는 병들을 말한다. 그들이 아무리 급성병이든지 만성병이든지, 또는 고통을 주는 병이든지 쇠약케 하는 병이든지 그리스도께서 한 마디의 말씀으로 이를 치유하시는데는 고치기 어렵거나 힘든 병은 하나도 없었다. 세 종류의 특수한 병은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즉 가장 연약한 육체의 병에 걸린 "중풍병자"와 가장 고질적인 정신병에 걸린 "간질하는 자"와 가장 비참하고 처절한 육적, 정신적인 병에 걸린 "귀신들린 자"들인데, 이 "모든 병"을 그리스도께서는 고쳐 주셨다. 왜냐하면 그는 영과 육에 대한 탁월하신 의사이시며 모든 병들을 마음대로 지배하시기 때문이다.
2. 그는 어떤 환자들을 취급하였는가? 접근하기가 매우 쉽고 성공할 것이 확실한 의사, 고통스러운 위험이나 어떤 막연한 기대에 관계없이 또한 아무런 고통이나 어려움 없이 즉각적으로 치유하며, 돈을 한 푼도 받지 않고 무료로 치료하는 의사에게는 많은 환자가 모여들지 않을 수 없다. 각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로 몰려든 이 사실에 유의하라. 많은 백성들이 "갈릴리"와 그 주변에서, 또한 멀리 떨어져 있는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그에게로 몰려들었으니, 이는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 즉 온 유대인들과 이웃에 있는 나라에 퍼졌기 때문이었다. 지금 원근 각처에 퍼진 그에 관한 소문으로 말미암아 이방 나라들은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될 것이며 이후에는 그들에게 이 복음이 전파될 것이다.많은 무리가 그에게로 온 이유는 그의 소문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타인으로부터 그리스도에 관해 들었다면 마땅히 그에게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시바의 여왕도 솔로몬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왔다. 소문은 "와보라"고 외친다. 그리스도는 "가르치시고 치유하셨다." 고침을 받으러 왔던 자들은 "평화에 속한 일들"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어떤 일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또한 그에게로 오는 자는 그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그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수리아의 장군 나아만과 같이 이 수리아인들은 그들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나아왔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개종자가 되었다(왕하 5:15, 17). 그들은 육체의 건강을 찾았으며 또한 영혼의 구원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마치 나귀를 찾고, 왕국도 얻은 사울의 경우와 흡사하다. 그 결과로 치유자로서의 그리스도를 기뻐한 많은 무리들이 선생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잊어버렸던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치유에 관련하여 한꺼번에 그 "이적," "긍휼," "신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병고침의 "이적". 이 이적은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말미암아 즉각적으로 행해졌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사명에 대한 하나님의 인치심이었다. 자연은 도저히 이적을 행할 수 없었으며 이를 행하시는 분은 오직 자연의 하나님이셨다. 의사의 기술로는 도저히 치료될 수 없는 많은 병들이 나음을 얻었고 신분이나 연령, 조건에 구애됨이 없이 거의 모든 사람이 병고침을 받았다. 이러한 병고침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행해졌는데, 물론 이들 중에는 혹 어떤 편견을 가지고 이러한 이적들을 거부하려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치유는 실패를 하거나 이후에 어떤 이의가 제기된 적은 결코 없었다. 그의 이적은 점차적으로가 아닌(자연적인 동기에 의한 치유처럼), 즉시로 행해졌으며, 그것은 말씀으로 이루어진 완전한 치유였다. 이상의 모든 것은 그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심을 증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그가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요 3:2). 그는 이것을 신임장으로 제시하고 있다(마 11:4, 5; 요 5:36). 메시야는 이러한 이적을 행하실 분으로 기대되었으며(요 7:31; 사 35:5, 6), 우리는 그가 메시야가 되신다는 사실에 대해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행하신 분은 일찍이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그의 치유와 설교를 일반적으로 함께 병행된다. 왜냐하면 전자는 후자를 견고히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여기에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셨던 것이다"(행 1:1).
(2) 병고침의 "긍휼." 모세가 자기의 임무를 증명하기 위해 행했던 이적은 대부분 온역과 심판에 대한 것으로서, 이는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는 하지만 그 율법 시대의 두려움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적들은 대부분 치유하는 것이었으며, 이 모든 것(열매 없는 무화과를 마르게 하신 저주의 사건은 예외지만)은 축복과 은혜를 베푸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복음 시대는 사랑과 은혜와 친절에 기초되어 세워졌기 때문이다. 이적을 사용하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공포에 질리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순종케 하려고 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 병을 고치신 것은 백성들의 이목을 집중케 함으로써, 그 자신과 그의 가르침이 그들의 마음에 들도록 하게 하기 위함이다(호 11:4). 병고침의 이적은 그의 교훈이 "신실한 말씀"임을 입증하였고, 사람의 판단을 확신케 했다. 즉 병고침의 긍휼은 그의 가르침이 "모두 받을 만한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였고 그들의 편견에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이적들은 "위대하고 선한" 일들이었으며, 그는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이것들을 그들에게 보였다"(요 10:32). 이러한 선하심은 사람을 인도하여 회개케 하며(롬 2:4), 또한 친절과 긍휼과 선행이 우리의 능력과 기회가 미치는 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세우려 오셨던 거룩한 종교의 필수적인 지선(支線)임을 나타내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3) 병고침의 "신비." 그리스도께서는 "육체적인 질병"을 치유하심으로써 그가 이 땅에 오신 큰 목적은 "영적인 병"을 치유하는 것이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는 "의(義)의 태양"으로서, "그의 날개 아래 이 치유를 지니고 떠오르신다." 죄인을 개심시키는 분이신 그는 "영혼의 의사"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부르도록 가르치셨다(마 9:12, 13). 죄는 영혼의 "질병이요 고통"이다. 그리스도는 "죄를 없이 하려고 오셨으며," 이 모든 질병들을 치유하기 위하여 오셨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치유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는 암시나 예증의 방법에 의하여 영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영적인 일들을 우리에게 계시하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회심과 성화에 있어서 영혼을 다루는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기 위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러한 병고침이 가장 의미심장하고 교훈적인 방법으로 기록되었으며, 이와 같이 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모든 병을 고쳐 주시는" 영광스러운 구속자의 명예와 찬송이 설명되고 드높여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