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촛대의 환상 (스가랴 4:1-10)
Ⅰ. 예언자는 그에게 이루어지기로 되어 있던 새 사건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웠다" (1절). 비록 그가 한 천사와 중대하고 공적인 관심사를 의논하고 있었지만 그는 그 천사가 아직 말하고 있는 도중에 피곤해져 잠에 빠졌던 것 같다. 이와 같이 제자들도 그들이 변화된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곤하여 졸았다" (눅 9:32).
의심할 바 없이 예언자의 마음은 장차 보여질 것과 들려질 것을 주의하려고 했으나, 육신이 약하였다. 그의 몸은 거룩한 명상에 있어서 마음을 따라가지 못했다. 환상의 기이함이 아마 그를 멍청하게 하였고, 그래서 그는 잠에 굴복당했거나, 아마 환상의 달콤함이 그를 가라앉혀 노래로 잠들게까지 했던 것 같다. 다니엘은 "천사의 말소리를 들을 때에 깊이 잠들었었다" (단 10:9). 우리가 이 육신을 벗어나기까지는 영과 대화하기에 결코 합당해질 수 없을 것이다. 천사가 잠시 동안 그를 이완시켜, 그가 새 계시를 받기에 신선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였던 것 같은데, 그 후 "그를 깨우니," 그는 놀라 "마치 자는 사람이 깨어난 것 같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들을 알게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주목하게 해 줄 하나님의 성령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그는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신다" (사 50:4).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마다 우리를 깨우셔서, 우리로 "스스로 떨쳐 일어나도록" 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Ⅱ. 그가 이처럼 준비된 후 그에게 주어졌던 새로운 사건을 보자. 천사가 그에게 물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2절) 그가 깨었을 때 만일 이처럼 주위를 돌아보도록 자극되지 않았었더라면, 그가 전망에 제시되었던 것을 아마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주목했을 때 이전에 성전에 있던 것과 같은 것으로, 이 성전이 때가 되면 갖추어야 할 것과 유사한 "순금 등대" 를 보았다. 교회는 이 어두운 세상을 밝게 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세상에 비추는 빛을 견지하려고 세워진 등대이다. 그 촛불은 하나님의 것이며, 교회는 촛대에 불과한데 순금으로 되어 있었으니, 하나님의 교회의 큰 가치와 뛰어남을 뜻했다. 이 금 촛대는 그로부터 가지 뻗은 "일곱 등잔" 이 있었는데, 그 많은 꽂이 구멍에 각각 불타고, 빛나는 등이 있었다. 유대 교회는 오직 하나였다. 비록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다른 나라들에서 회당을 소유했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들은 한 촛대에 속한 많은 등잔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 복음 아래서는, 그리스도가 일치의 중심이며, 예루살렘이나 어떤 다른 곳도 중심이 아니다. 따라서 일곱 개의 교회들이 "일곱 등잔들" 로서 표현되지 않고 일곱 개의 "금 촛대" 로서 상징된다(계 1:20). 이 촛대는 한 "주발," 혹는 공동 수용기를 꼭대기에 지니고 있어서, 그 안으로 기름이 끊임없이 떨어지고, 그로부터 보이지 않는 일곱 관, 혹은 통로에 의해 일곱 등잔에 보급되어, 더 이상 사람의 보살핌없이도 소비되는 속력에 따라 기름을 공급받는다(우리가 "만년필" 이라고 부르는 것들처럼 말이다). 그들은 결코 부족되거나 과잉되지 않고, 항상 깨끗이 계속 탔다. 그리고 그 주발 역시 끊임없이 관리나 사람의 살핌없이 기름을 공급 받았다. 왜냐하면 촛대의 양편에 "두 감나무" 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살지고 풍성하여 스스로 끊임없이 주발 속에 다량의 기름을 부었고, 두 개의 큰 관(12절)에 의해 작은 관들 속으로 각각 등잔불이 타도록 계속하여 기름을 보냈다. 그리하여 아무도 이 촛대를 보살피거나, 기름을 공급할 필요가 없었다(그것은 사람을 기다리거나 사람의 아들들을 기다리지 않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쉽게 그리고 종종 그의 교회에 관한 자신의 목적을 그 자신의 지혜와 능력에 의해서, 즉 인간의 어떠한 기술과 노력에 관계없이, 하실 수 있으며 또 하신다는 것을 말해주며, 비록 가끔 도구들을 사용하시지만, 그는 그들을 필요로 하지는 않으시며 그들에게 매이시지도 않으며 오히려 그들 없이도 자기 일을 반드시 완성하실 수 있으시다는 것을 보여준다.
Ⅲ. 예언자가 이 일의 의미에 관해 물은 질문, 그리고 그의 미련함 때문에 그에게 주어진 부드러운 꾸지람을 보자(4절).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그가 얼마나 주의 깊게 천사에게 말하는가 보라. 그는 그를 "내 주" 라고 불렀다. 가르침을 받을 자는 그들의 선생들에게 영예를 돌려야 한다. 그는 이것들이 "어떠했는가" 는 보았으나, 무엇을 "뜻하였는지를" 몰랐다. 하나님의 말씀, 그의 섭리 그리고 계시에 의해 그 자신에게와 그의 마음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현현들의 뜻을 아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이 상징들, 이 일들이 "무엇을 뜻합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자들은 꼬치꼬치 캐물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알려고 좇는 것을 알아야 하니," 우리가 "들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우리가 듣는 것에 관해 "묻기도 해야" 한다 (눅 2:46). 천사는 질문으로써 대답했다.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이것은, 그가 숙고하고 영적인 것들과 비교하면, 이 일들의 뜻을 추측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그는 제단에 금촛대가 있어서 제단의 사용을 위해 기름을 공급하고 계속 타게 하는 것이 제사장들의 끊임없는 직무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이상 중에 항상 타고 있는 촛대와, 어떤 제사장들도 보살피지 않고, 아무도 그것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보았다면, 이것의 뜻이 비록 하나님께서 다시 제사장을 세웠으나, 그는 그들 없이 그의 백성을 위해, 그들에게서 그 자신의 일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가 더 쉽게 하나님의 새 사건들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할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천사는 그에게 이 질문을 했으니, 그로부터 그 자신의 우매함과 어두움에 대한 시인과 이해가 늦음을 시인케 했다.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나는 이들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이상들은 각각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흔히 은밀하고 이해하기 어려웠고, 예언자들 자신도 처음에는 잘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가르침을 받을 자들은 그들 자신의 무지와 가르침받을 필요를 알고 또 시인하고, 하나님께 지도를 요청해야 한다. 우리에게 금고를 주신 자에게 그것의 열쇠를 요청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만하고 그들 자신의 이해라는 상한 갈대에 의지하는 자들이 아니라, 온유하고 겸손한 자들을 가르치시리라.
Ⅳ. 이 환상의 일반적 의도를 보자. 이상의 주위 사정에 대한 비판적 상술(詳述)을 떠나 그 의도는 예언자를 확신시키고, 또 그것에 의해 백성을 확신시켜, 비록 그 원수들이 수가 많고 강하며 친구들과 후원자들은 거의없고 약하지만, 이 성전 건축의 선한 사업이 행복한 결과를 초래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상들과 비유들의 설명에 있어서, 우리는 그들의 주된 목적을 바라보아야 하며, 비록 우리가 모든 상황을 다 설명할 수 없더라도, 그 목적이 명백하다면 그것에 만족해야 하며, 그것을 우리의 목적에 적용시켜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천사는 일반적으로 이 환상이 주께서 스룹바벨에게 말해야 할 말을 예시하며 그를 격려하여 성전 건축을 계속하도록 하기 위해 계획되었다는 것을 예언자에게 알게 하였다. 그로 하여금, 자신이 그것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라는 사실과, 그것은 하나님께서 소유하시고 관 씌우실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라.
1. 하나님께서 계속하사, 그가 외적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인간의 마음에 대한) 은밀한 작용과 내적 영향에 의해 그들을 바벨론에서 구해내기 시작하셨듯이, 이 일을 또한 완수하실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 이시며 vi et armis - 즉 힘으로 그것을 할 수 있으시며, 명령에 따르는 군대를 가지고 계신 자가 이를 말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힘이나 능에 의해서" 가 아니라 "오직 그의 신으로" 그것을 행하시리라. 그의 신에 의해 행해진 것은 힘과 능으로 되지 않고, 보이는 힘에 반대된다. 이스라엘은 힘과 능에 의해 애굽에서 인도되어 가나안으로 향했다. 이 양자의 놀라운 일들에 있어서 큰 살륙이 행해졌다. 그러나 그들은 두 번째로 바벨론에서 인도되어 나와 가나안으로 행했는데, 고레스의 마음에 역사하사 그로 하여금 그들에게 자유를 선포하게 하였고, 포로들의 마음에 역사하사 그들에게 부여된 자유를 받아들이게 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신에 의해" 인도되었다. 백성들이 자극되어 성전을 건축하는 활력을 받은 것은 "만군의 여호와의 신" 에 의해서였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예언자들의 도움을 받는다" 고 말하여지니, 그 까닭은 그들이 성령의 입으로서 그들의 마음에 말했기 때문이다(스 5:2). 다리오의 마음이 호의를 보이게 되고 선한 사업을 촉구하여, 그의 철천지 원수들이 그들의 회의 중에 매료되어, 그들이 계획하였던 대로 그 일을 방해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도 같은 성령에 의해서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가끔 그것이 매우 잠잠하게 수행되는 때에도, 매우 성공적으로, 인간 힘의 도움없이 수행된다는 점을 명심하자. 복음의 성전은 힘이나 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싸울 것은 육체가 아니요"), "만군의 여호와의 신" 에 의하여 지어지니, 그 성령이 인간의 양심에 행하시는 역사는 강력을 파해 무너뜨리는 힘이 있다. 이리하여 능력의 뛰어남은 하나님께 속함이지 인간에게 속함이 아니다.도구들이 실패할 때도, 그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께 그 자신의 성령에 의해 친히 그의 역사를 행하시도록 맡기자.
2. 도중에 있는 모든 환난과 반대는 극복되고 제거될 것이며,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리되리라(7절).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여기서 볼 것은,(1) 그 곤란이 어떻게 표현되는가? 그것은(극복할 수 없고) 움직일 수 없는 "큰 산" 이니, 큰 산과 같은 쓰레기더미로서 반드시 가지는 데에 되지 않으면 그 역사가 진척될 수 없다. 유대인의 원수들은 큰 산들처럼 교만하고 완고하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하실 역사가 있으실 때, 그 앞에 놓인 산들은 두더지가 파놓은 흙더미같이 될 것이다.
(2) 이 곤란들이 어떻게 무시되는가?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너는 하나님의 길에 서서, 그의 역사의 진척을 멈출 생각을 하는구나! 너는 무엇이기에 그처럼 크게 보이며, 이처럼 위협하고 이처럼 두렵게 되는가? 하나님의 사절로서 오는 스룹바벨 앞에서 너는 평지가 되리라. 모든 곤란들은 사라지고 모든 반대들은 극복될 것이다. 여호와의 길이 예비될 때 모든 산과 작은 산마다 낮아지리라" (사 40:4). 믿음은 산들을 옮기어 평지로 만들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스룹바벨이다. 곤란의 산들이 그의 착수하시는 길에 있었으나, 그 앞에 그들은 모두 평지가 되었다. 아무 것도 그의 은혜가 역사하지 못할 어려운 일은 없다.
3. 이 선한 역사를 시작한 같은 손이 그것을 완수하시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으리라" (7절). 그리고 또한(9절), "스룹바벨의 손이 이전의 지대를 놓았다." 그것이 그의 영예를 위해 말해졌고(아마 그 자신의 손들로 그는 첫 돌을 놓았다), 비록 그것이 오랫동안 지체되어 왔으며, 아직 크게 반대되지만, 마침내 완공되리라. 그는 그것이 마치는 것을 볼 때까지 살 것이니, 아니, "그 손이 그것을 마치리라."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의 모형이니, 그가 "우리 믿음을 시작하시는 분" 이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그가 "마치시는 분" 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 된다.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역사를 완성하시기" 때문이다. 그가 시작하시고 끝맺지 않겠느냐?
스룹바벨은 스스로 "소리를 지르며 머릿돌을 내어 놓을" 것이며, 관중들 중에서 큰 기쁨의 박수를 발하리라. 박수 갈채는 "만세" 가 아니라 "은총, 은총" 이다. 그것은 교회가 부르는 승리의 노래들의 제목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여겨질 것이니,
(1) 값없이 주시는 은총을 찬미하며, 그것에 행해진 것에 대한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 역사가 마칠 때, 그것이 완수된 것이 우리 자신의 어떤 정책이나 능력에 의하지 않았고, 은총 -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선하신 뜻과 우리 안에서와 우리를 위한 그의 선한 사업 - 이 그것을 행해졌다는 사실이 감사하게 시인되어야 한다. "은총, 은총" 이 머릿돌에만 아니라 기초석, 모퉁이돌, 그리고 참으로 하나님의 건축물의 모든 돌들에게 외쳐져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은 선행의 산물이 전혀 아니요, 은총의 결과이니, 우리의 모든 면류관이 값없는 은총의 발에 던져져야 한다. "우리에게가 아닙니다. 오 주여! 우리에게가 아닙니다."
(2) 값없는 은총에 의지하며, 아직 행해질 일을 위해 그것의 지속을 바라는 것이다. "은총, 은총" 은 찬양뿐만 아니라 기도의 언어이다. 이제 이 건물이 끝났으니, 모든 행복이 그것을 수종드는도다! 그 벽 안에 평화가 있을지며, 그를 위해 "은총이" 있을지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아름다움이 그 위에 있으라!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오는 것은, 믿음 안에서 충분한 근거 위에, 하나님의 은혜에 맡겨질 수 있으니,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손으로 행하신 일은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점에 주목하라.
4. 이는 유대인의 회복과 그들의 재정착에 관한 이전 예언들의 완전한 비준이 될 것이다. 성전이 완성될 때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성경의 예언들의 정확한 성취는 성경의 신적 원천을 확신시키는 증거라는 점을 명심하자.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대하여 이르기를 거기 사람이 살리라고 하심으로써 그 종의 말을 응하게 하신다" (사 44:26). 어떤 하나님의 말씀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그 일점 일획도 폐해지지 않으리라. 교회의 구원의 날이 다가 온다는 스가랴의 예언은 곧 그 성취에 의해 하나님께로 온 것임이 나타나게 되었다.
5. 이는 결과적으로 이 역사의 시초를 멸시했던 자들을 침묵하게 하리라(10절). 이제 작은 것들의 날을 멸시했고 이 일이 어떤 결과도 내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자가 누구며, 어디 있는가? 유대인 자신들도 제 2 성전의 기초를 멸시했으니, 그 까닭은 그것이 처음 것보다 매우 열등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스 3:12). 그들의 원수들은 성벽이 건축 중이었을 때, 그것을 멸시했다(느 2:19; 4:2, 3). 그러나 그들로 그런 짓을 말게 하라.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는 작은 일들의 날이 무시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하자. 비록 도구들이 약하고 그럴 듯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흔히 그런 것을 택하사, 그들에 의해 큰 일들을 일으키신다. 그가 원하시면 큰 산이 그의 앞에서 평지가 되듯이 손에 의하지 않고 산에서 깨어져 나온 한 작은 돌이 땅을 채우게 된다(단 2:35). 비록 처음은 작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끝을 크게 증가하도록 만드실 수 있다. 겨자씨 한 알이 큰 나무가 될 수 있다. 새벽의 밝음을 무시하지 말지니, 그것은 한낮까지 더욱 더 빛나리라. 작은 것들의 날은 귀한 것들의 날이며, 큰 것들의 날이 될 것이다.
6. 이는 풍족하게 하나님의 이익에 대한 진실한 소원자들 모두를 만족시킬 것이다. 그들은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데서 스스로 속았다는 것을 알고 기뻐할 것이다. 그 역사의 마침에 대해 절망하였던 자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그가 건축자들 중에서 명령과 지시를 하달하고 그 역사가 매우 정밀하게 행해지며 훌륭하고 굳건하도록 보살피는데 분주한 것을 볼 때 즐거워하리라. 청지기들이 여호와의 집안의 계몽에 주의 깊고 활동적인 것을 보고, 또 마음만 먹으면 많은 일을 할 만한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손에서 다림줄을 보는 것은 모든 선한 사람들에게 큰 기쁨이 된다.
우리는 그의 손에 흙손을 가진 스룹바벨을 보는 것이 아니라(그것은 일꾼, 즉 사역자들에게 넘겨졌다), 그의 손에 다림줄을 가진 그를 보니, 그것은 망신이 아니라 영예가 된다. 청지기들은 사역자들의 역사를 조사하고, 자기들의 의무를 행하는 레위인들에게 평안히 말하게 되어 있다.
7. 이는 하나님의 섭리의 지혜와 보살핌을 높이 찬양한 것이니, 그것은 항상 그의 교회의 이익을 위해 종사된다. 스룹바벨은 그의 역할을 하는데, 그 역사를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행하나, 그것은 우리가 3장 9절에서 읽는 "여호와의 일곱 눈" 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는 만일 하나님의 보살피는, 강력한, 은혜스러운 섭리가 그의 앞에 가며 그것 안에서 그와 함께 가지 않았더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여호와께서 이 집을 건축하지 않으셨다면 스룹바벨과 나머지 사람들은 "그 수고가 헛될" 것이었다(시 127:1). 이 "여호와의 눈들" 은 "전 세계를 이리저리 달리며," 모든 피조물과 그들의 모든 행동을 인지하고(대하 16:9), 하나님의 충고에 따라 모두를 북돋우고 지시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 일을 못할 만큼 교회의 일에 매이진 않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지상의 나라들을 다스리시는) 동일하신 전지전능의 섭리가 특수한 방식으로 교회와 대화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온 세상을 두루 행하는 저 일곱 눈은" 스룹바벨이 잘 놓였는가를 보려고 그의 다림줄을 가지고 똑바로 놓고 있는 "돌 위에" 있는 모든 자이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 다림줄을 가진 자들은 "저 여호와의 눈들을" 우러러보고, 신적 섭리에 끊임없는 관여를 하고, 그 인도에 의존하며 그 뜻에 순복하여 행동해야 한다.
감람나무의 이상 (스가랴 4:11-14)
스가랴를 격려하며, 그들이 이제 착수했던 성전 건축의 선한 역사에 관하여(그로 하여금) 다른 이들을 격려할 수 있도록 하는 말은 충분하였다. 그것이 그가 보았던 이상의 주요 의도였다. 그러나 아직 그는, 어떤 헛된 호기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 사실을 위해 가졌던 가치와 그들과 교제하며 가졌던 기쁨에 돌릴 특수한 것들에 대해 알고 싶어한다.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자들은 더 이상 알고자 하는 겸손한 욕구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제 살필 것은 다음과 같다.
Ⅰ. 그의 질문이 무엇이었는가? 그는 등잔이 있는 촛대의 의미를 이해하였다. 그것은 예루살렘이며, 성전이니, "타는 등잔처럼 나아가는" 그들의 구원이다. 그러나 그는 이 "두 감람나무" (11절)와 이 "감람나무 두 가지" (12절)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 마음을 여기서 살피자.
1. 그는 물었다. 하나님의 일에 관계하는 자들은 그 일에 관하여 캐물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물으라, 그러면 말을 듣게 되리라.2. 그는 첫 질문이 대답을 얻지 못하자 다시 물었다. 만일 우리의 질문과 요구에 즉시로 만족할 만한 대답이 주어지지 않으면, 다시 되풀이하며, 요청을 계속하고 성가시게 조르면, 이상은 마침내 "말하고, 거짓말하지 않을" 것이다.
3. 그의 두 번째 질문은 이전 것과 다소 달랐다. 처음에는 묻기를 "이 두 감람나무" 는 무엇이냐고 했는데, 후에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냐" 고 물었다. 즉 주발 위에 매달려 그 안으로 기름을 흘려 넣는 나무의 저 가지들을 뜻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관하여 물을 때, 우리의 모든 샘들이 있는 좋은 감람나무에 대해서 보다는 말씀과 신의의 열매를 맺는 가지에 대해 우리가 질문해야 하니(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와 우리 후손에게 속한," "계시된 일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은밀한 것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4. 그의 질문에서 그는 그가 이상에 대해 행하였던 바를 언급했다. 그는 첫 눈에 명백했던 것, 즉 두 감람나무가 자랐으니 하나는 "촛대의 오른 편에 또 하나는 촛대의 왼 편에" 있었던 것(하나님의 은총은 그처럼 가깝게, 기꺼이 교회에게 주어졌다) 뿐만 아니라 또한 더 정밀한 조사를 하여, 그로부터 개별적으로 촛대가 "감람나무의 뿌리에서 양분을" 받았던(사도가 교회에 대해 말하듯이, 롬 11:17) "두 감람나무 가지" 가 "두 금관을 통해," 혹은 (난외주가 그러듯이) "그로부터 두 금관의 손에 의해 기름이 금으로 비워지는," 즉 촛대의 꼭대기에 있는 "금 주발" 로 비워지듯이, "금 기름을 흘려 보냈다" (즉, 깨끗한 기름, 최상품으로, 큰 가치가 있는 것, 마치 aurum potabile-" 액체 금" 과 같았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채우시려고 자신을 비우셨다. 그의 귀한 피는 우리가 그 안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받는 금 기름이다.
Ⅱ. 그의 물음에 대해 주어졌던 대답은 무엇이었는가? 이제 다시금 천사에게서 급히 정보를 듣기 전에, 그는 자기의 무지를 고백해야 했다(13절).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만일 네가 교회가 촛대임을 안다면 거기에 기름으로 공급하는 감람나무들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임을 생각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는 그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거나 혹은 그가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고백했다. "내 주여 알지 못하나이다. 누가 나를 인도하지 않고 어떻게 내가 알겠습니까?" 그리고 그 후 그는 그에게 말했다(14절). "이들은 기름의 두 아들이며" (이것이 원문에 가깝다), "기름 발리운 자 둘" 이니(우리는 이렇게 읽는다) 오히려 "두 명의 기름 사람들" 이다. 우리가 "심히 기름진 산" 으로 읽는 말뜻은(사 5:1) 원래 "기름의 아들의 뿔," 즉 기름지고 비옥한 땅인 것이다.
1. 만일 우리가 촛대를 보이는 교회, 특히 그 위로가 일차적으로 의도되었던 당시의 유대인의 교회로 이해한다면, 이 "전 세계의 여호와 앞에 서는 기름의 아들들" 은 당시 두 명의 크고 선한 사람들인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에게 위임되었던 치리자직과 사역자직의 두 가지 큰 신탁과 직임인 것이다. 왕들과 제사장들은 기름부음을 받았다. 이 왕, 이 제사장은 그들이 하나님께 소명받았던 일을 위해 자격을 갖추기 위해 하나님의 신의 은사와 은총을 부여받은 "기름의 사람들" 이었다. 그들은 여호와를 받들고 그로부터 지시를 받으려고, "전 세계의 여호와 앞에 섰다." 그리고 그들은 당시의 교회 일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의 지혜, 용기, 열의는 끊임없이 그들을 비워, 등잔을 계속 태우기 위해 금 주발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가버릴 때, 다른 이들이 그 일을 수행하고자 들려질 것이다. 이스라엘에는 더 이상 왕과 제사장이 없을 것이다. 선한 치리자와 선한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기름부음을 받고 하나님의 일에 대한 신실한 충성자로서 "온 세상의 여호와 옆에 서서, 신앙의 유지와 진보" 와 생명의 말씀을 비추는 데 크게 공헌한다.2. 만일 촛대라는 말이 첫 소산의 교회, 즉, 진실한 신도의 교회라고 이해한다면, 이 기름의 아들들은 그리스도와 성령, 곧 구원주와 보혜사를 뜻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메시야(즉 스스로 "기름부음 받은 자")이실 뿐 아니라, 그의 교회에 "선한 감람나무" 가 된다. 그리고 "그의 충만한 데서 우리가 다 받는다" (요 1:16). 그리고 성령은 우리가 받은 "기름부음" 이다(요일 2:20, 27). 그리스도, 곧 "감람나무" 로부터, "성령, 곧 감람나무 가지" 에 의해 모든 은혜의 금기름이 신자들에게 전달되어, 그들의 등잔을 계속 타게 한다. 그것이 계속 공급되지 않으면 그들은 곧 꺼질 것이다. 그들은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서 있는데," 그는 특수한 방식으로 교회의 주님이시다. 아들이 아버지에 의해 보내졌듯이, 성령도 정해진 시간에 보내졌고, 그들은 그 옆에 서서 갈 준비를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