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13:1,2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통달하엿느니라. 너희 아는 것
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한 내가 아니니라. - 욥은 여기서 "이것"이란 말로 앞장(12
장)에서 말한 내용을 가리킨다. 욥의 이와 같은 말은 하나님의 진리를 주장하는 것 뿐
이고 교만함은 아니다. 진리를 알고도 모르는체 하는 것이 도리어 교만이 될 수 있다.
그런 행동은 하나님의 진리를 무시함이다. 욥의 깨달은 것은 그 친구들의 깨달은 것보
다 앞섰다.
욥 13:3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혼하려 하노라. - 여기 "하나님
과 변론하려 하노라"고 한 말(* )은 하나님과 의논하
겠다는 뜻이고 그와 다투겠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의논하는 것을 하나님
께서 심히 원하신다(사1:18). 학자들 중에는 욥의 이런 말도 경건치 못한 말인 듯이
잘못 평하는 자들도 있다.
욥은 그 친구들의 말로써는 만족을 얻을 수 없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문
제 해결을 보고자 한다. 그렇게 함이 언제나 인생 문제 해결의 유일한 방법이다. 다윗
도 말하기를,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고 하
였다(시 109:4).
욥 13:4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데 없는 의원이니라. - 욥은 그 친구들을 향
하여 "쓸데 없는 의원"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그 친구들이 그에게 해당되지 않는
말로써 그를 위로해 보려고 헛된 노력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을 고쳐주는 자는 가장 귀한 의사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영혼의 참된 의사가 없다(마 9:13). 그러므로 다윗도 자기 영혼을 고
치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다(시 41:4).
욥 13:5-11
너희가 잠잠하고 잠잠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너희는 나의
변론을 들으며 내 입술의 변명을 들어 보라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려느
냐 그를 위하여 궤휼을 말하려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좇으려느냐 그를 위하여 쟁
론하려느냐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너희가 사람을 속임 같이 그를 속이
려느냐 만일 가만히 낯을 좇을진대 그가 정녕 너희를 책망하시리니 그 존귀가 너희를
두렵게 하지 않겠으며 그 위엄이 너희에게 임하지 않겠느냐. - 욥은 그 친구들의 변론
이 자기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고 역설(力說)한다. 그들이 그렇게 말할 바에는
침묵함이 더 좋다고, 그는 말한다(5-6). 욥은 그들의 담화에서 다음과 같은 결점을 발
견하였다. 곧, (1)그들이 경건하게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나 그 말이 의롭지 못하다는
사실과(7절), (2)그들이 자기를 향하여 죄값으로 환난을 당한다고 주장하나 그것은 자
기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8절). 그 친구들의 말은 남을 정죄하는 불의한 일
이다. 그것은 욥이 지적한 대로 하나님의 낯을 보아드리려는(좇으려는-8절)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 행동은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지 않는다.
욥은 그 친구들의 행동에서 이와 같은 옳지 않음을 발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
행을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그들에게 경고한다(9,11). 곧,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
신다면, 그들을 기뻐하시지 않을 것이니 만큼, 그들은 놀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욥 13:12
너희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 너희의 방어하는 것은 토성이니라. - "너희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 이것은 이때까지 말한 그 친구들의 말이 전적으로 무가치하다는
뜻이다(Freidrich Horst, Hiob I, s.200).
"토성"이란 것은 전쟁 방어에 아무 힘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욥은 그 친구들의 변
론을 그와 같이 무력하다고 한다.
욥 13:13
너희는 잠잠하고 나를 버려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임하든지 내가 당하리라. -
욥은 여기서 그 친구들의 원조답지 못한 원조를 거절한다. "무슨 일이 임하든지 내가
당하리라"고 한 것은, 그의 강력한 독립 정신을 보여 준다. 욥의 그 독립 정신은 하나
님을 의뢰한 강한 신앙을 배경한 것이다(14-15). 다윗도 이와 같은 신앙적 독립성을
지니고 있었다. 시 27:1-3 참조.
욥 13:14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 이 귀절의 의
미는 다음과 같다. 곧, (1)짐승이 고기를 입에 물고 놓지 않으려고 싸우는 것처럼 욥
은 자기의 생명을 자력(自力)으로 구원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
면 그는 하나님 밖에서는 살 소망이 없다고 여기서 단언한다. (2)그러나 어떤 해석가
들은 여기서 "어찌하여"란 말을 70인역(LXX)과 같이 제외시키고 해석하였으니, 곧 욥
이 자기 생명을 구하려고 극도로 애쓴다는 뜻이라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첫째 해석을
취한다.
욥 13:15,16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
라 사곡한 자는 그의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 - 우리는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개역할 수 있다. 곧,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내가 그를 믿으리
라 그러나 다만 내가 내 행위를 그의 앞에 변증하리라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나니 그
이유는 사곡한 자는 그의 앞에 이르지 못함이니라"고 할 것이다. 이 귀절들이 이렇게
변역되어야 할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 본문에 "내가 소망이 없노라"(* )고 한 문구에 있어서, 맛소라 성경
은 "없노라"(* )란 말을 "그를"(* )이라고 읽어야 한다고 난외(欄外)에 밝혔
다. 그것을 그렇게 읽을 때에, "내가 소망이 없노라"란 말은 "내가 그를 믿으리라"고
번역된다. 그것을 이렇게 번역하면 그 아래말과 문맥상으로 잘 통하게 된다. 곧, 욥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의 앞에서 자기 행위를 변백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
원 받는다는 말이다(16절 하반). 고대와 근대의 모든 번역문들은 "내가 그를 믿으리
라"는 번역을 지지한다. 욥의 이와 같은 신앙 고백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교훈을 준
다.
(1)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방법을 보여줌. 사람은 죽을 지경에 떨어져 자기라는 것
이 죽어야 하나님을 믿게 된다. 죽으므로 사는 것이 기독교 진리이다. 그러므로 예수
님도 말씀하시기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눅14:26-27; 마16:24-25).
(2)신앙이 하나님 앞에 인정 받는 원리를 보여줌.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란 말
씀에 대하여 우리는 주의깊게 생각해야 된다. 이 말은, "나를 죽도록 하나님께서 놓아
둘지라도"란 뜻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나의 원수처럼 되어 나를 죽인다
는 뜻을 내포한다. 그렇게 하나님은 그를 냉대, 아니 적대하실 때에도 그는 하나님을
믿겠다는 뜻이 이 문구에 나타나 있다. 신자가 하나님의 친절한 대우를 받을 때에 하
나님을 믿기는 쉽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적대를 받을 때에도 믿는 것은 좀 어렵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렇게 믿어야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 나의 참 친구는 역경을 이겨
나가면서 나를 사랑하는 자이다.
(3)신앙 연단의 필요성에 대하여 배움. 새로 지은 배를 운항하려면 먼저 시험적으
로 운전해 봄이 필요하다. 그와 같이 죽음이란 큰 바다에 나가기 전에 견디기 어려운
시험들을 신앙으로 통과해 봄이 절대 필요하다.
욥 13:18,19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스스로 의로운 줄 아노라 나와 변론할
자가 누구이랴 그러면 내가 잠잠하고 기운이 끊어지리라. - 욥은 여기서 자기의 당한
환난이 자기의 어떤 범죄건으로 인한 것이 아님을 확신한다. 그것은 그의 신앙 양심에
서 확신하는 사실이다. 그것이 15절에 기록된 그의 믿음의 바탕이다. 믿음은 착한 양
심을 바탕으로 하고야 자라난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믿음과 관련하여 착한 양심을
강조한다(딤전 1:5,19 3:9). 신앙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고 인간의 심리적 조작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됨이 없는 마음을 가진 자에게서 장성한
다. 인간이 타락한 뒤에는 그와 하나님과의 조화가 파상되었음으로 그 파상된 사실이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양심의 작용이다(H. Bavinck, Geref. III, 1910, pp.175
-176). 거듭난 자의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처지를 바로 알려준다. 인간 존재에
있어서 양심의 작용은 자기와 하나님과의 사이에 일어난 사고(事故) 발생을 경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심의 경고를 무시하는 인간은 영구히 하나님을 떠나게 된다. 욥은
하나님과 자기와의 조화를 힘썼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 점에서 양심상 담력을 가진
것이다. 욥이 그 고통스러운 환난 중에서도 자기의 양심적 주장을 끝까지 지킨 것은
역시 그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기의 괴로움으로 인하여 비진리와 타협하는
일은 없다.
욥 13:20
오직 내게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옵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얼굴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오리니. - 욥은 하나님 앞에 애원하는 것이 두 가지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경우에 그는 공의로우신 주님 앞에 당연히 할 말을 하겠고(22절)
피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자기의 수난(受難)의 원인이 될 만한 죄는 자기에
게 없다고 담대히 주장한다. 그 두 가지 애원은 다음 귀절에 나타난다.
욥 13:21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옵시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마옵실 것이니이다.
-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옵시며." 이것은 그의 고난을 멈추어 주시기를 애원하는 기
도이다. "나를 두렵게 마옵실 것이니이다." 이것도 그를 적대하시는 태도를 돌이켜 주
시기를 원하는 간구이다.
욥 13:22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나로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
는 내게 대답하옵소서. - 욥은 자기의 당하는 고난의 원인이 될만한 죄는 자기에게 없
다고 하면서 주님의 심문에 응하기를 원한다. 이것은 진리와 사실에 입각한 그의 신앙
적 담력이다. 이런 애원은 주님을 대항함이 아니고 사랑으로 그를 의뢰하는 신앙이다.
욥 13:23-26
나의 불법과 죄가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날리
는 낙엽을 놀래시며 마른 검불을 따르시나이까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나로 나의 어렸을 때에 지은 죄를 받게 하시오며 내 발을 착고에 채우시며 나의 모든 길을 살피사 내 발자취를 한정하시나이다 나는 썩은 물건의 후패함 같으며 좀 먹은 의복 같으니이다. - 여기서 욥은 자기가 그렇게 환난의 깊은 자리에 빠지게 된 원인으로서 자기의 죄악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23절). 그는 이와 같이 생각하면서 자기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한 것을 다시 묘사한다. (1)자기는 하나님의 원수 같이 취급된다고 함(24절). (2)자기는 나부끼는 낙엽과 또는 마른 검불과 같다고 함(25절). (3)어렸을 때에 지은 죄를 받게 되지나 않는가 하고 회고함(26절 하반). 곧, 그가 어렸을 때에 알지 못하여 지은 죄는 용서 받은 줄 알았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괴로운 환난을 당하면서 생각케 된 것은 그런 죄도 용서되지 않고 그 보응을 받고 있는 듯하다는 것이다.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란 말은 하나님께서 욥이 어렸을 때에 지은 죄도 기록하듯이 기억하셨다가 지금 벌하신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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