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욥 1: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 "우스 땅"은 에돔 땅을 말한다(애4:21). 욥과  같은 신앙가(信仰家)가 이방인(에돔 사람)이란 사실은 편협한 유대인들을 놀라게  한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에 찾아 왔던 동방 박사들도 유대 나라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오히려 경건하였다.
   "순전하고 정직하여." "순전"(*     )이란 결코 무죄를 말함이 아니고(Calvin)  외식(外飾)과 반대되는 진실을 가리키며, 남들이 알아주든지 말든지 상관할 것 없이  중심의 진실을 파수함을 말한다(시51:6). 이것이야말로 참 신자의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오직 진실한 자를 상대하시고 일하신다. 사람도 역시 자기 자신을  숨기고 자기 아닌 자로 나타나는 거짓된 자와는 대화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 않는다.  피차간 말을 주고 받아도 그것은 시간을 낭비할 뿐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진실을 지킨다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믿는 체하여 종교적으로 외식하는 소위 신자는 불신자보다 악하다. 믿기를 원하나 믿어지지 않는  자로서 자기의 불신(不信)을 고백하여 은혜를 받는 일은 있다. 루마니아에서 핍박을  받아 14년 동안 옥고를 겪은 범브란드(Wurmbrand) 목사는 믿기 전에 다음과 같은 기도하였다고 한다. 곧, "하나님이시여! 만일 당신이 참으로 계시다면 당신 자신을 내게  보여주십시오."라고.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 예수님에게도 기도하기를, "당신께서는 나를 제자로 삼지 못하실 것입니다. 나는 돈과 여행과 쾌락을 원합니다. 당신을 따르는  것은 무거운 십자가의 길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때에 예수님은 영음(靈音)으로 그에게 말씀하여 주시기를, "너는 나를 따르라. 십자가의 길이 가장 즐거운 길이다."라고  하셨다. 범브라드 목사는 이 때에 회개하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왔다고 한다.
   "정직"(*     )이란 말은 사람들에게 대하여 옳게 행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외부적으로 나타난 의로운 행실이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중심의  진실성("순전")은  반드시 외부의 의로운 생활로도 나타나기 마련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하나님을 경외함과 악을 떠남은 서로 관련되었다. 하나님 경외가 있는 동안 악이 용납되지 않는다(잠16:6). 그러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한 공포심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성경)에 의하여 하나님을 알게 된 자가 그를 신뢰하면서 사랑하며  또  두려워함을  가리킨다(시2:11). 그런데도 불구하고 옳지 않은 학자들은 기독교 신앙도 초자연적  계시와  관계 없이 단지 인간의 공포심에서만 생기는  듯이  잘못  주장한다.  예를  들면  럿셀(B. Russell)은, 사람이 본래 그의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신화(神化)시켜서 그것을 믿는다는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종교는 "공포심에 근거하고 있다...과학의 발달은 우리로 만물을 조금씩 깨닫게 하여 우리의 공포심을 경감(輕減)시켜 나간다. 이렇게 되노라면 우리는 가상적(假想的) 구원자들을 바라보지 않게 될 것이며, 하늘의 친구들을 발명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 초역(religion is  based, I think, primarily and mainly upon fear. Science can help us to  get  over  this cravan fear in which mankind has lived  for  so  many  generation.  Science  can teach, and I think our own hearts can teach us, no longer to  invent  allies  in the sky, but rather to look to our own efforts here below.-Why I am not a Christian, Simon and Schuster, 1957,p.22).
   그러나 기독자의 신앙은 공포심의 산물이 아니다. 기독자의 신앙은 결코 주관적 심리의 산물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진정으로 신앙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들은 신앙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 안다. 엡2:8참조. 아브라함이 자기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이 자연계의 어떤 재앙을 두려워한 심리적 결과였던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를 불러 내신 하나님은 그의 생각 밖에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외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것도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사람의  심리에서는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재물로 바치던 행동은 그의 심리로 할 수 있었던 일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심리(心理)의  산물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계시(啓示)와 은혜의 산물이다.
   이렇게 기독교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성립된 것인데, 이 계시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함은 참으로 옳은 것이다. 공포심이라고 하여 그것이 모두 다  나쁜  것은 아니다. 과학 행위도 역시 인간으로 하여금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도록 하기  위하여 만물을 옳게 분변하려는 것이 아닌가? 인간은 전능자가 아닌만큼 천지 만물을  주관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공포심도 있다. 서물(庶物) 숭배자들은 공포심을 어리석게 사용한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자들은 공포심을  바로 사용한다. 욥이 하나님을 두려워한 것은 옳은 일이었다. 그것은 죄악이 떠난  거룩한 생활의 열매이다. 헹스텐버그(Hengstenberg)는 말하기를, "선한  공포는  신앙에서 나오고 거짓된 공포는 의심에서 나온다. 선한 공포는 소망으로 인도하고 거짓된  공포는 절망으로 인도한다."라고 하였다(Die gute Frucht kommt vom Glauben, die falsche Furcht kommt vom Zweifel. Die gute Furcht fuhrt zur Hoffnung,  die  bose  Furcht fuhrt zur Verzweiflung. - Das Buch Hiob, Leipzig, 1875,s.86).

  욥 1:2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 - 욥은 이렇게 자녀가 많았지만 단순하게 신앙을 지켰다. 그는 그들이 범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늘 기도하였다. 5절  참조.

  욥 1:3
   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 "양"은 그 때에  귀한 재산으로 간주되었으며, 그 털도 의복을 제조하는 데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약대"는 옛날부터 사막 지방에서 먼 길을 여행하는 자들이 타고 다녔다. 사막  여행은  약대가 아니면 할 수 없었다. 약대는 물을 저축하는 위가 따로 있기 때문에 한 번 저축한  물로써 한 달 동안이라도 염려 없이 여행할 수 있다. "소"는 밭을 가는 데  사용되었고, "나귀"는 사람이 타는데 사용되었다.
   욥의 부요했던 사실을 보고 우리가 깨달을 것이 있다. 그것은, 그가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에 손해 없이 경건하게 살았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욥1:1도 어느  정도 알려주지만 욥31:24-25이 더욱 명백히 보여준다. 거기 말하기를,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 언제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던가"라고 하였다.

  욥 1:4,5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
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그 잔치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을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
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
이 말씀을 보면, 욥의 자녀들이 그들의 생일에 연회를 베풀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도 주님을 중심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면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보
다 더하는 큰 죄를 범하게 된다(딤후3:4). 그러므로 정당한 것을  누리는데  있어서도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며 감사해야 된다(살전5:18). 그러나 사람들이 흔
히 그렇게 하지는 않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쉽다. 딤전5:6에 말하기를, "일락을 좋아
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고 하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번제"는 헌신을 위한  것이
다. 물론 이 제사에 있어서도 먼저 생축의 피를 제단에 뿌리는 순서가 있었다. 이  순
서를 먼저 취하는 이유는,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헌신하려면 먼저 속죄를  받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레1:3-9). 욥이 이와 같은 제사를 아침에 일찍 드린 것도 의미심장
하다. 그는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귀한 일에 정성을 다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명심할 것은, 이 때의 번제는 기도하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42:8,10). 욥이 그 자녀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정성을 바쳐 기도한 것은 만고에  모범
이다. 자녀들을 위한 그의 기도의 목적은 그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물질적 번영을 잃을
까 두려워한 것이 아니었다. 우찌무라는 욥이 물질적 번영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기도
하였다고 하며, 그의 신앙은 유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해석은 모순된 것이다. 욥
은 번영 시대에도 재물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중심으로행하였다.1:21, 2:10,  31:24-
25 참조.
   자녀를 위한 부모의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다. 어거스틴(Augustine)의 모친 모니카
(Monica)의 기도대로 어거스틴은 회개하였고, 토레이도 그 모친의 기도대로 마침내 회
개하게 되었다. 그가 자기 모친의 말을 듣지 않고 먼 길을 떠날 때에 그 모친은  말하
기를, "너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내가 믿는 하나님을 기억하여라."고  하였다.  그
후에 그가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하여 자살하려고 하던 중 그 모친의 말("내가 믿는  하
나님을 기억하여라"고 한 말)이 생각나서 자살하지 않고 회개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욥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자녀들을 위한 그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은
것 같다. 그의 자녀들은 연회 중에 모두 횡사하지 않았는가? 욥1:18참조.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야 된다.
   (1)그 자녀들을 위한 욥의 기도의 목표가 무엇이었던가를 명심해야 된다. 그의  기
도의 목표는 그 자녀들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위주함보다 그들의 신앙 생활에  있어
서 마음으로라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되기를 원함이었다. 그러므로 그 자녀들의  죽
음은 욥의 기도와 반대된 사실이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의 죽음이 도리어 그들로  하여
금 범죄 생활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복된 사건일 수도 있다. 사람이 오래 살며 타락
함보다는 차라리 일찍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할 것이다.
   (2)성경 말씀은, 사람의 육신의 죽음을 모조건적으로 불행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전7:1에 말하기를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라고  하였고,  시116:15에는,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라고 하였다. 욥은 그 자녀들의  죽
음에 대하여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취하셨다고 한다(욥1:21). 그리고 사람에게
있어서 그 죽는 형편, 곧 그 죽음의 장소가 문제될 것 없다. 혹은 길에서, 혹은  산에
서, 혹은 바다에서, 또 혹은 전장에서, 그 밖에 불의(不意)의 사고로 죽은 위인(偉人)
들도 많지 않은가? 나의 친구였던 이 석기(李錫基) 장로는 의로운 사람이었는데, 그는
6.25사변 당시 온 가족과 함께 방공호 속에 피신해 있다가 폭격으로 인하여  몰사하고
말았다. 버어마의 천사라고 불리우던 선교사 저드슨(A.Judson)은 바다에서 파선을  당
해 죽었고, 다윗을 위기에서 건져 준 요나단은 전장에서 죽었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3)욥의 자녀들의 당한 사건이 불행하게 보인다고 가정한다 해도 그 사건이 그  자
녀들 자신에게 손해될 것은 없다. 그 이유는 그 사건은 하나님께서 욥으로 하여금  시
험 받도록 허락하셨던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로 하여금 시험 받도록  허락
하심은 궁극적으로 그에게 손해를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
을 번제물로 바치도록 된 시험도 사람에게는 매우 좋지 않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험을 잘 감당한 아브라함에게는 그 사건이 큰 축복으로 바뀌었다(창22:1-19).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
까 함이라." 욥의 자녀들이 먹고 마시는 가운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좋아하는  데로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 욥은 그 자녀들을 성결케하기 위하여 이렇게 그들의  심령에서
부터 범죄함이 없도록 경계하였다. 우리 신자들은 심령에서부터 성결을  소유해야  된
다. 그러므로 바울은 신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 지어다"라고 하였다(빌4:23).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의 기도가 항상 지속된 것은 그의 경건  생활
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였다. 이것은 그의 신앙 생활의 불변성을 말해 준다.  경건에는
이것이 있어서 효과를 발생하며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엡6:24에, "우리 주 예수 그
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하였고, 히3:6에는
말하기를,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고  하
였다.

 

  욥 1: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선한 천사들을 의미하고, "사단"(*      )은 "그  대적하
는 자"란 뜻을 가진 말로서 마귀를 가리킨다.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대적했다(3:
15). 선한 천사들이 하나님 앞에 선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순종하려고  준비
된 자세를 보여준다.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다"는 것은 얼른 보면  이상하게  생각된
다. 어떻게 범죄한 마귀가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었던가? 이와 같은 난제(難題)에 대하
여 아브라함 카이퍼(A.Kuyper)가 말한 바 있는데, 그것이 렌케마(W.B.Renkema)의 욥기
주석(Het Boek Job Voor De Gemeente Verklaard,1899,Leiden,pp.29-30)에 인용된 대로
다음과 같다. 곧, 사단도 하나님 앞에 왔다는 것은 그도 하나님의 종인 사실을 보여준
다. 그의 적대 행위도 별 수 없이 하나님의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
로 그도 하나님의 명령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난다. 그러나 그가 육신을  가
진 것이 아니고 영(靈)뿐이니, 그의 왔다는 말은 우리의 장소 관념으로 해석되면 안된
다. 그는 하나님의 나타내신 뜻을 성취하는 종이 아니고 그 숨겨 있는 뜻을  성취하는
데 사용되는 종이다(A.Kutper, De Heraut. Von de Engelen: Hij dient wel niet  Gods
geopenbaarden, maar toch Gods verborgen will). 자16:4참조.


  욥 1:7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
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 왔나이다. - 사단을 향하신 여호와의  심문은  그가
몰라서 물으신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단에게 대한 그의 지배 행위이다. 사단이  아무
리 돌아다니며 속이는 일을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입에 자갈을 물려 그 고삐를 잡
고 계시다고, 칼빈(Calvin)은 말하였다.
   사단이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님은 할 수 있는 대로 사람들은 시험하여 넘어
뜨리려는 것이다(마24:24; 벧전5:8하반). 눅11:24-26참조. 이 세상의 그 어디든지  사
단의 시험이 없는 곳은 없다. 선한 사업이 있는 곳에 사단의 역사는  더욱  맹렬하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마귀의 궤계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늘 깨어 있어야 된다(벧전  5:8
상반).

 

  욥 1:8-11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
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
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 이 부분에는 사단이 하나님을  대
항하며 성도를 참소한 사실이 진술된다. 하나님은 욥의 경건을 자랑하셨느데,  사단은
그 말씀과 반대로 발언하였다. 그의 반대하는 말은 패배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 이
유는, 그의 말이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사단의 패배 원인은 언제나 거짓말 때문인데도
불구하고 바르트(K.Barth)는 그 무인격성(無人格性) 때문이라고 잘못 말한다. 그는 다
음과 같이 말했다.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요소가 이 세계에 있다. 그것은 '아무  것
도 아닌 것'(das Nichtige)이라고 불리운다...그것은 창조 질서(創造秩序) 안에  실체
(實體)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천지 창조 당시의 혼돈과 공허 그것이다.
그것은 창조 질서의 주변에 있어서 창조 질서를 위협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
고자 하시지 않는 영역이다. 그것의 존재는 이 영역 뿐이다. 하나님의 하시지 않는 점
(non-willing)이 바로 그것의 존재 근거이다."라고 하였다.-초역(Dogmatics III.3,pp.
289-353).
   마귀에 대한 바르트(Barth)의 이같은 견해는 성경이 밝히 말하는 마귀의  인격성을
부정한 것이다. 성경의 말씀을 보면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격성  있는  자이다.
마귀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요(창3:4),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거짓말장이
요 거짓의 아비이다(요8:44). 마귀는 거짓된 자이니만큼, 신자가 하나님의 진리만  믿
고 마귀를 믿어주지 않을 때에 마귀는 없는 것 같이 약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저 진리(그의 말씀)로 나타나심으로 마귀를 물리치신다. 그가 마귀를 꾸짖는다는 것
은 바로 그가 진리로(그의 말씀으로) 나타나심을 의미한다. 사단이 하나님의 백성  이
스라엘을 대적할 때에 하나님은 그저 그의 말씀으로 막으시곤 하셨다. 슥3:2에 말하기
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한 것  뿐이고
다른 행동은 없다. 예수님은 자기를 시험하는 마귀에게 하신 말씀이. "사단아  물러가
라"고 하셨을 뿐이다(마4:10). 그가 가버나움 회당에서도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
치실 때에 귀신을 꾸짖어 나오게 하셨고(막1:25-26), 벙어리 되고 귀먹게  한  귀신도
그가 한 번 꾸짖으실 때에 물러갔다(막9:25-26). 그러므로 피조물인 신자들은 자기 힘
으로는 마귀를 쫓아내지 못할 줄 알고 예수님만 의지한다. 그는 예수님에게 마귀를 쫓
아내어 주시기를 기도할 뿐이다. 제자들이 벙어리 되게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할 때에 주님은  대답하시기
를,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하였다(막9:28-29). 천
사장 미가엘도 주님께 마귀를 꾸짖어 주시기를 기도한 것 뿐이다. "주께서 너를  꾸짖
으시기를 원하노라"고 한 말(유1:9)은 그의 기도이다. 그 기도의 내용은 말씀으로  마
귀를 막아 주시기를 원함이다. 이렇게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굴복하여 물러갈 수
밖에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겁낼 것이 없다. 곧, 마귀의 역사가 힘 있는 것  같으
나 약한 줄 알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다. 마귀는 강한 것처럼  활동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한하여 그것은 실상 허세(虛勢)에 불과하니, 그것을 보는  신
자는 요동하지 말 것이다. 미가엘이 마귀를 판단하지 않는 것은 마귀를  아끼는  의도
(意圖)에서가 아니라, 유일하신 심판장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를 침해하지 않기 위하여 사람들을 마음대로 판단하지  말
아야 된다.

 

  욥 1:1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욥을 시험해 보도록 허락하신다. 그리고 그는 시험의 범위도  정해  주신다.
이것을 보면, 사단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 성도를 시험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여
기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왜 하나님께서 사단으로 하여금 성도를  시험하도
록 허락하실까 하는 의문이다. 이에 대한 답변은, 시험이 성도에게  유익하다는  것이
다. 곧, 성도들도 환난의 시험을 당해보지 않으면 겸손해지지 않느며, 하나님을  전적
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욥도 환난의 시험을 당해본 후에 말하기를, "내가 스스로 한하
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라고 하였다(42:6). 제정  러시아의  황제(Tsar)
알렉산더(Alexander)가 나폴레옹(Napoleon)의 침략을 받았을 때(A.D.1806)에 그는  겸
손히 회개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는 시편 51편의 다윗의 회개를 실천하였다. 그
때에 나폴레옹의 군대가 모스코바(Moscow)까지 왔다가 후퇴하였고, 그의 많은  군대는
얼어 죽었다(Peter Masters, Men of Destiny, The Evangelical Times, London,  1968,
pp.9-17).

 

  욥 1:13-16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사자가
욥에게 와서 고하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스바 사람이  갑자
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
려와서 양과 종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갈대아 사람이 세 떼를 지어 갑자기 약대에
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
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
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거친 들에서 대풍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
러 왔나이다 한지라. - 여기 기록된 재앙들에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은, (1)욥의 자
녀들이 즐거이 먹고 마실 때에 그런 재앙들이 임하였다는 사실(13절). 사람이  의외에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잠27:1) 기쁠 때에도 기쁘지 않은 것처럼 처신해야  된다(고
전 7:30). (2)네 차례의 재앙에서 매번 보고할 사람 한 명씩만 남고 모두  전멸되었다
는 사실(15,16,17,19). 일이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욥의 "모든 소유물을 다"  사
단의 손에 붙이신(12절) 까닭이다. 다만 매번 한 사람이 살아 남은 것은 그 재앙을 욥
에게 보고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재앙들이 이렇게 계획성 있게 나타난  것은,
그 사건들이 우연한 것이 아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간섭으로 된 사실을 더욱 확실히
알려준다. 욥은 범죄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재앙들을 받았다. 그는  "악에서
떠난 자"였다(1절 끝). 이렇게 그가 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재앙을 받았으니,  하나님
의 뜻을 모르는 그로서는 낙심할 만한 지경이었다.

 

  욥 1: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 슬픈 때에  옷을
찢고 머리털을 미는 것은 헬라나 근동 지방의 풍속이었다. 욥이 그의  재산뿐  아니라
자녀들까지 전멸된 비극 앞에서 슬퍼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스토익 철학은  사람들로
하여금 슬픔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참된 종교는 슬픈 일에 대한 정서적
인 느낌을 성화(聖化)시킨다. 욥이 이 때에 슬픔을 표시하면서도 문제를 하나님께  밀
어 맡긴다는 의미에서 하나님께 겸손히 경배하였다. 땅에 엎드린 것은,  그의  지극히
겸손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이렇게도 결단성 있게 하나님
경배로 자기 자신을 엎드려뜨린 것이다. 그의 이 태도가 그의 당한 시험을 이기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사람이 죽은 자녀 때문에 지나치게 슬퍼함은 잘못이다. 그 이유는, 그런 태도는 사
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하나님의 경륜과 주권(主權)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은 특별히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사건에 있어서 우리를  지
켜준다.

 

  욥 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아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  이
것은, 욥이 모태에서 나서 모태와 같은 어두운 땅 속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우리 본
문에 "그리로"라고 한 것은 "모태"를 가리킨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물질을 소유해 보아도 마침내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사상은,
성경 다른 데도 있다(시49:17; 전5:14-16). 여기서 강조한 것은, 사람의 소유가  그의
본질이 아닌 것만큼 그 소유 때문에 요동하지 말 것이라는 뜻이다. 신자들도 이  세상
에서 재산상 손해를 보는 일이 있다. 하나님은 그런 일로써 그들의 신앙을 연단시키신
다. 그들이 특별히 욕심으로 사업을 경영하다가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파산을  당
하게 되는 일이 있다. 그 때에 그는 반성하며 회개해야 된다. 욥에게는 이런 죄로  징
계를 받을 만한 허물이 없었으나 하나님은 그를 시련시키시기 위하여 파산케 하셨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 이것은 우리에게 있는 모든 소
유가 여호와의 것임을 강조하는 욥의 신앙 고백이다. 우리는 날마다의 식생활도  하나
님의 것으로 해 나간다. 마6:11참조.

 

  욥 1: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
니라. - 이 말씀을 보면 원망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원망하는 것이 어리석다고
할 이유는 다음 몇 가지로 충분하다. 사람이 난제를 당하여 원망하는  것은,  (1)모든
일이 우연에 속한 것이 아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장중에서 되는 줄을 모르니 어리석
다(마10:29). (2)사람의 힘으로 다 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원망하니 그것은 하나님과
다투는 행동이다. 그것은 발뒤꿈치로 송곳을 차는 어리석은 행동이다(행26:14). (3)원
망은 언제나 자기 영원을 해롭게 하는 것이니(고전10:10) 원망함이 어리석다. (4)원망
은 깊은 생각 없이 행동함이니 어리석다. 사람이 어려운 일에 있어서도  생각해  보면
감사할 조건이 있다(살전5:18).
   이렇게 환난을 당해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 자들은 하늘의 위로와 평안을  받았
고, 또한 남들을 위로할 수 있는 힘의 소유자들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상
에서 자라나는 화초같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바람  맞고
비를 맞아 든든한 재목 같이 되는 것을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뜻대로  우리에
게 각양 풍파와 환난을 주신다. 우리는 이런 시련 속에서 원망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찬송해야 된다. 물론 어려움 가운데서 찬송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로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동안 가능하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도 원망하지 않고  감사했는데(욘2:1-9), 그것은 그가 거기서 기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기도하지 않았을 때에는 작은 일 때문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였다. 곧, 그는 박넝쿨이 자라서  그늘을 이루다가 시드는 것을 보고도 하나님을 원망하였다(욘4:5-8).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공지 박윤선 주석을 읽을 때에 내용이 없는 장
789 역대하 박윤선 주석, 역대하 34장
788 역대하 박윤선 주석, 역대하 35장
787 역대하 박윤선 주석, 역대하 36장
786 에스라 박윤선 주석, 에스라 01장
785 에스라 박윤선 주석, 에스라 02장
784 에스라 박윤선 주석, 에스라 03장
783 에스라 박윤선 주석, 에스라 04장
782 에스라 박윤선 주석, 에스라 05장
781 에스라 박윤선 주석, 에스라 06장
780 에스라 박윤선 주석, 에스라 07장
779 에스라 박윤선 주석, 에스라 08장
778 에스라 박윤선 주석, 에스라 09장
777 에스라 박윤선 주석, 에스라 10장
776 느헤미야 박윤선 주석, 느헤미야 01장
775 느헤미야 박윤선 주석, 느헤미야 02장
774 느헤미야 박윤선 주석, 느헤미야 03장
773 느헤미야 박윤선 주석, 느헤미야 04장
772 느헤미야 박윤선 주석, 느헤미야 05장
771 느헤미야 박윤선 주석, 느헤미야 06장
770 느헤미야 박윤선 주석, 느헤미야 07장
769 느헤미야 박윤선 주석, 느헤미야 08장
768 느헤미야 박윤선 주석, 느헤미야 09장
767 느헤미야 박윤선 주석, 느헤미야 10장
766 느헤미야 박윤선 주석, 느헤미야 11장
765 느헤미야 박윤선 주석, 느헤미야 12장
764 느헤미야 박윤선 주석, 느헤미야 13장
763 에스더 박윤선 주석, 에스더 01장
762 에스더 박윤선 주석, 에스더 02장
761 에스더 박윤선 주석, 에스더 03장
760 에스더 박윤선 주석, 에스더 04장
759 에스더 박윤선 주석, 에스더 05장
758 에스더 박윤선 주석, 에스더 06장
757 에스더 박윤선 주석, 에스더 07장
756 에스더 박윤선 주석, 에스더 08장
755 에스더 박윤선 주석, 에스더 09장
754 에스더 박윤선 주석, 에스더 10장
» 욥기 박윤선 주석, 욥기 01장
752 욥기 박윤선 주석, 욥기 02장
751 욥기 박윤선 주석, 욥기 03장
750 욥기 박윤선 주석, 욥기 04장
749 욥기 박윤선 주석, 욥기 05장
748 욥기 박윤선 주석, 욥기 06장
747 욥기 박윤선 주석, 욥기 07장
746 욥기 박윤선 주석, 욥기 08장
745 욥기 박윤선 주석, 욥기 09장
744 욥기 박윤선 주석, 욥기 10장
743 욥기 박윤선 주석, 욥기 11장
742 욥기 박윤선 주석, 욥기 12장
741 욥기 박윤선 주석, 욥기 13장
740 욥기 박윤선 주석, 욥기 14장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 24 Next
/ 24

All the Bibles, Commentaries and Dictionaries here have their own rights.
All rights are reserved for them, not for us. Thanks! Praise our great God, Christ Jesus!

HANGL Lingua Franca 한글 링구아 프랑카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