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 이는 바벨론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를 주기 위해 이사야가 공식적으로 위임받는 대목으로 이해도리 수도 있다(Gesenius, Rosemnuller).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메시야에 관한 언급으로 해석되어지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결정적 근거는 예수께서 본절을 자신에 관한 예언으로 명시하셨다는 사실이다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에 응하였으니라"(눅 4:18-21). 예수께서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신 순간에도 그 사역의 공적 인정을 위하여 성령이 임하신 바 있다(마 3:16;요 1:32).
기름을 부으사( , 마솨흐) - 이 용어에서 '메시야'란 단어가 유래된다. 이스라엘의 왕(삼상 16:13), 제사장(출 30:30), 선지자(왕상 19:16) 등은 그들의 중요 직책을 위해 구별될 때 그 머리 위에 기름 부음을 받았다(삼상 16:1-5 주제 강해, '기름 부음의 영적 의미' 참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구별해 세우신 것을 암시하기 위해 본 표현이 사용되었다. 메시야를 언급하려고 이와 동일한 용어를 사용한 것은 시 45:7;히 1:9 등에도 나온다.
가난한 자( , 아나윔) - 원래 이 용어는 상처나 억압으로인해 고통당하는 자를 뜻하며, 여기서는 1차적으로 낙담 중에 있었던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을 뜻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는 이 용어는 자신에게는 소망이 없으므로 오직 하나님이 보낼 메시야를 고대하며 사는 심령이 가난한 자를 가리킨다고 봄이 더 정확하겠다(마 5:3). 이 말은 시편에서 개인적 재난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고대하였던 신실해 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종종 사용되었다(시 9:12,18). 예수께서는 자신의 지혜를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이신 자신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알아보지 못한 마음이 교만한 자를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라고 풍자하셨고 반대로 그를 알아본 자들을 '어린 아이들'이라고 부르셨는데 이자들이 바로 가난한 자들이다(눅 10:21).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 1차적으로는 포로 귀환을, 더나아가서는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예언하는 내용이다. 또한 본 표현은 희년의 때에 모든 종된 자에게 선포되는 자유를 동시에 연상케 한다(레 25:10;렘 34:8,9).
갇힌 자에게 놓임 - 원문상으로는 '갇힌 자의 감옥문을 여는 것'이란 뜻이다. 여기서 '여는 것'이란 메시야의 도래와 연관지어 볼 때 죄와 사망의 올무로부터의 해방(롬 6:18;7:24,25;히 2:5) 혹은 영적으로 장님되었던 자가 영의 눈을 뜨는 것을 가리킨다(Ewald). 눅 4:18은 본절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본절에는 없는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이란 구절을 첨가함으로써 후자의 뜻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61:2
여호와의 은혜의 해( , 쉐나트 라초 라훼) - 문자거인 뜻은 '여호와의 기뻐하시는 해'이다. 이것은 나팔이 올리고 온 이스라엘 땅에 자유가 선포되었던 희년의 때를 연상시키는 표현이다(레 25:9,10). 희년의 때와 마찬가지로 메시야의 때도 '해방'이란 이미지를 내포한다. 메시야의 도래의 때는 온 세계 인류를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시키는 때인 것이다. 메시야의 도래로 시작된 해방의 때는 은혜의 때라고 불리기도 한다('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2).
하나님의 신원의 날 - 문자적인 뜻은 '하나님의 보복의 날'이다. 1차적으로 이날은 바벨론으로부터의 포로 귀환의 날을 가리킨다. 그런데 바로 이날을 '복수의 날'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만하다. 바로앞에 언급된 바 '여호와의 은혜의 해'의 대비적 표현으로 본 표현이 언급된 것은, 이스라엘에게 '은혜의 해'가 되는 때가 그 대적에게는 '복수', 곧 '심판'의 때가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를 역으로 말하면, 마지막 심판날에 하나님이 대적들을 멸하시는 보응은 곧 성도들에게는 영광을 얻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요 12:47;고전 15:52;고후 4:17;계 21,22장).
=====61:3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 원문 직역은 '아름다움을 주어 그재를 대신하며'이다. '아름다움'에 해당하는 '페에르'( )는 본래 여자들이 머리에 쓰던 아름답고 화려한 관을 말하며, '희락의 옷', '찬송의 옷'과 함께 즐거운 축제 때를 연상시킨다(G.W. Grogan). 이제 여호와의 구원과 은혜의 때가 이르면 슬픔의 표로 뒤집어 썼던 재를(에 4:1,3;렘 6:26) 털어내고 대신 아름다운 관을 쓰고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희락의 기름 - 당시는 기쁨의 축제 때 특히 초청한 귀빈의 머리 위에 향내나는 값비싼 기름을 붓곤 하였다(시 23:5;45:7;암 6:6). 그외 성경은 축제 혹은 기쁨 그 자체를 뜻할 때 '기름'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57:9). 공적인 재난 혹은 슬픔의 때에는 결코 기름을 사용하지 않았다(삼하 14:2).
찬송의 옷 - 절망에 빠진 자를 삼베옷을 입은 것에 비유하는 대신, 찬송과 감사를 드리고있는 자는 밝은 채색옷을 입은 것에 비유한다.
의의 나무( , 엘레 하체데크) - '나무'에 해당하는 '엘레'( )는 팔레스틴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상수리나무를 뜻한다. 이 나무는 굵고 튼튼하여 힘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한다(이런 맥락에서 탈굼역, 제롬역, 시리아역 등은 이을 '강한 것' 혹은 '힘센 것'으로 번역했음). 본문의 '의의 나무'는 한때 죄악으로인해 넘어졌으나 은혜로 말미암아 회복되어 굳건한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주의 백성을 가리킨다. 그들이 그렇게 변할 수 있는 것은 정원사가 나무를 심듯이 하나님이 친히 그들을 구원하여 세우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영광을 열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에 의해서만 세움을 받는 사실은 주님이 사용하신 비유에도암시도이가 있다 : "예쑤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나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마 15:13).
=====61:4
대대로 무녀져 있던 것들 -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동안 유다 본국 팔레스틴 땅과 성읍이 황폐해졌던 사실을 가리키며(렘 20:6;28:6), 나아가서는 본장 전체의 문맥상 메시야의 도래가 있기 전 혹은 메시야를 영접하기 이전의 상태를 나타낸다.
=====61:5,6
이는 새로이 회복될 이스라엘이 이방 가운데서 제사장 나라로서(추 19:6) 우뚝서게 되며 이방인들로부터 물적 조력을 받을 것을(60:10)가리킨다고 해석되기도 하나,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해석이 더 나을 것 같다. 즉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편입된 이방인들 가운데서, 마치 아론의 후손이 이스라엘 중에서 감당했던 것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Delitzsch). 그러나 이방인들 중에서도 제사장과 레위인을 택하리라고 하신 말씀(66:21)이나 특히 이방인과 유대인 간의 벽이 완전히 허물어질 복음 시대(엡 2:14)의 상황을 염두에 둘 때, 이는 문자적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에 대한 적절한 해답을 사도 바울의 언급에서 찾을 수 있겠다 :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은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롬 15:27).
=====61:7
수치 대신에 배나 얻으며 - 바벨론에서 당한 고통에 비교해볼 때 메시야 왕국의 도래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누릴 축복은 더욱더 엄청나게 크고 값진 것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당한 고통과 메시야 사역으로 인한 축복을 단순히 비교한다는 의미보다는 메시야의 구원 사역으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누릴 축복이 그 무엇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엄청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1차적으로는 포로지의 이스라엘에게 큰 위로를 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능욕 대신에 분깃을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라 - 여기 '능욕'에 해당하는 '켈리마'( )의 문자적인 뜻은 '혼돈', '혼란'이지만 바로 앞 구절과 동의적 평행을 이룸을 고려할 때 '수치', '슬픔' 등으로 번역함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분깃'도 메시야의 구속 사역으로 얻게 될 구원의 축복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한편 원문에 보면 앞 구절과는 달리 본절의 주어는 2인칭에서 3인칭으로 바뀌어 있는데, 이것은 본서 저자가 자주 사용하는 화법의 일종이므로 큰 의미없이 동일한 주체를 의도하고 있는 화법으로 보면 되겠다.
=====61:8
대저 나 여호와는 공의를 사랑하며 - '대저'는 '키'( )로서 앞절에 진술된 바벨론 포로 생활로고통받은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이 배의 축복을 주시겠다는 사실의 이유를 밝히는 접속사이다. 하나님이 그같이 하실 이유는 그가 공의를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방의 손을 빌어 그의 백성을 심판하신 것도 공의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본절에서 하나님의 공의는 바벨론의 교만과 불의의 강탈에 대한 분노로 나타난다.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며( , 세네 가젤 베올라) - 본문에 대한 번역은 구구하지만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견해가 이처럼 둘로 나뉘는 것은 '베올라'( )의 '베'( )를 그대로 두고번역하느냐 아니면 '베'를 빼고 대신 접속사 '와우'( )를 삽입하여 번역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먼저 후자의 경우를 따르면 '나는 강탈(혹은 약탈)과 범죄를 미워한다'가 된다(시리아역, Lowht, Noyes). 그러나 이 번역은 받아들일 수없다. 왜냐하면 본 번역의 경우 필요 이상의 원문 수정을 가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전자의 경우를 따르면 '나는 번죄에 수반되는 강탈(혹은 약탈)을 미워한다'가 된다. 이는 바벨론이 유다 백성을 압제하고 강탈하는 등 필요 이상으로, 월권 행사를 도모한 사실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은 그 영적 우매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을 이방이라는 수단을 통해 받았다. 그러나 수단으로사용된 이방 세력은 본연의 임무인 징벌의 집행 외에 과도한 불의를 저질렀다. 바로 이 사실은 공의로운 하나님의 의해 체크되었던 것이다.
=====61:9
알리리니 - '구별되게 하리니' 혹은 '명예롭게 하리니'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시 67:2;76:1;79:10등의 용례들이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 -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참자녀들이 세상나라로부터 하나님의 축복을 방은 자들임을 완전하게 인정받는 때는 구원 역사의종말, 곧 재림의 때이다. 그러나 그때가 이르기 전에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 인정을 받을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이 올려진다(마 5:16). 인정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마 5:13-15).
=====61:10
의의 겉옷 - '겉옷'은 입은 옷 위에 걸쳐 몸 전체를 가리다시피하는 느순한 망토 따뤼를 가리킨다(시 132:9;계19:8). 이 땅토는 추위 또는 외부로부터의 침해 따위로부터 몸을 보하하는 구실을 한다. 여기서 이 망토가 의미하는 바는 '의'이다. 이 '의'는 이스라엘의 자격, 능력과 관계없이 하나님이 주권적으로덧입히신 그 무엇으로 메시야의 구원 사역의 결과로 야기된 것이다. 원래 이스라엘은 스스로 영적 파멸로부터 구원하거나 사단의 집요한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이스라엘 역사가 그 사실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아들 메시야를 보내시고 그로 구속 사역을 이루게 하시어서 그 사역을 근거로 그들을 보호하는 영적인 옷을 입히셨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였다. 따라서 영적 이스라엘, 교회는 그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61:11
땅이 싹을 내며 - 본서 저자가 여러 차례 사용한 이미지(45:8;55:10,11)로, 의미하는 바는 적시에 내린 단비로 촉촉해진 땅에서 새싹이 움트듯이, 메시야가 오시면 진리와의가 돋아 자라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그의 택한 백성을 그곳으로 모으시는 목적은 그의 백성들로부터 찬양을 받기 위함이다. 본절에서의 찬양은 교회가 세상과는 다른 구별적, 거룩한 모습을 나타냄으로써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 칭송을 듣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죄악(58, 59장)에 이어, 시온의 외적 영광(60장)을 언급한 이후에 드러
나는 본장은 메시야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먼저 메시야의 도래에 대해 간략하
게 언급한 후(1-3절) 그것으로 인하여 성도들에게 나타날 환희와 영광을 생생하게 묘
사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장은 (1) 메시야의 사명을 기술하는 전반부
(1-3절), (2) 메시야의 사역의 결과를 드러내는 중반부(4-9절), (3) 메시야의 사역으
로 인한 기쁨이 묘사되고 있는 후반부(10, 11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본장은 외견상 사역의 주인공이 예언 당사자인 이사야처럼 보인다(1, 10절).
그래서 학자들 사이에는 여러 가지 논란이 존재한다. 그러나 가장 완벽한 성경 해석자
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장을 자신에게 적용(눅 4 : 17-21)하셨으므로 메시야의 사
역으로 보는 데 있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더구나 본장은 희년의 선포 이미지로
시작되고 있다(1, 2절). 그런데 희년은 속죄를 전제로 하고 있으므로(레 25 : 9) 본장
이 52 : 13-52 : 12의 희생적 제사의 가르침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은 분명해진다. 즉,
사도행전의 복음 선포가 위대성을 강조하고 이스라엘을 위로하는 '종의 노래'에 해당
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본장은 인칭 변환을 통해 단락의 범위를 결정하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즉
동일한 인칭의 주격이 사용되는 절들은 동일 단락으로 구분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라는 1인칭 주격이 사용되는 1-3절, '그들' 및 '너희'라는 3인칭 및 2인칭 주격
이 사용되는 4-9절, '내가'가 다시 사용되는 10, 11절 등은 서로 다른 단락으로 구분
된다. 다만 4-9절의 경우 서로 다른 호칭이 사용되었지만 그 내용의 연관성 때문에 동
일 단락으로 보게 된다.
또한, 저자는 본장에서 반복 기법을 많이 사용한다. 4-9절은 전장(60장)과의 연속
성을 나타내기 위해 60 : 10-14의 내용을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3절은 10, 11절에 그
내용이 재현되었고, 8절 역시 주제이 있어서 10, 11절에 다시 나타났다. 이러한 반복
법을 사용하여 저자는 독자의 내용 이해를 도울 뿐 아니라 더욱 큰 위로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본장은 메시야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질 시온의 내적 영
광을 중점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당시 이스라엘은 죄로 말미암아 바벧론의 포로로
사로잡혀 있는 절망적인 상태였다(1절).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선지자는 포로
상태에서의 해방을 의미하는 희년을 선포하고, 시온이 다른 나라로부터 인정받은 명예
로운 국가가 될 것을 선언한다. 슬픔을 당한 자는 위로를 받고(3절) 이스라엘의 과거
영광이 재현될 것이다(4절). 이방인들을 섬기는 대신 이방인의 섬김을 받게 되며(5절)
'제사장의 나라'가 되리라는 위대한 약속(출 19 : 6)이 성취될 것이다(6절). 아브라함
의 언약(창 12 : 3)이 성취됨으로써 이방인들조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축복하셨다
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9절). 이사야는 본장에서 이처럼 메시야를 통해 주어질 영광
스러운 하나님의 구원을 소개하면서 기쁨의 찬송과 기도를 드리고 있다(10절).
이제 종의 구속 사역을 근거로 한 시온의 미래적 영광을 기술하는 본장을 몇 단락
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종의 직무(61 : 1-3)
미래에 성취될 시온의 외적 영광에 대해 묘사하였던 전장(60장)에 이어지는 본 단
락에서는 복된 구원을 초래할 메시야의 직무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즉, 메시야는 복
된 구원의 소식을 선포하는 선지자(행 3 : 22), 슬픔과 고통 속에 있는 심령을 치유하
는 제사장(히 5 : 6), 공의와 진리로 백성들을 다스리시는 왕(시 2 : 6)의 역할을 동
시에 수행한다는 것이다. 특히 저자는 전장 마지막 단락(60 : 15-22)과 이어지는 단락
(4-9절)에서 나라의 이미지를 부각시킴으로써 메시야의 핵심적인 사역이 하나님 나라
의 건설임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본 단락은 (1) 하나님이 종을 파송한 이유(1, 2절), (2) 종의 파송이 초래
할 결과(3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제 본문의 핵심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
다.
(1) 본문은 아름다운 소식을 듣는 자의 대상을 이스라엘 포로로 국한시키지 않고,
죄에서 해방된 모든 자들로 확장시킨다 : 저자는 아름다운 소식을 받는 자를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갇힌 자로 부르고 있다. 이들은 일차적으로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보고 슬퍼하며 회개하는 경건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이 보내실 구원자를 기
다리는 모든 심령들을 의미한다. 신약은 이처럼 심령이 가나한 자에게 복이 있으리라
고 말한다(마 5 : 3). 이사야는 겸허하게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은 죄의 노예였던
상태에서 벗어나 영적 자유와 구원을 누릴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롬 8 : 21 ; 갈 5 :
1).
(2) 복음은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수납하도록 촉구하고 있다(2
절) :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이후에는 복음을 듣고 회개하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라고 하였다(고후 6 : 2). 그러나 이 시기가 종결되면 두려운 심판의 날,
곧 복수의 날이 시작된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는(요 12 : 48 ; 고전 15 : 52) 은혜의
때를 살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거부한 자들은 죄, 사단, 죽음 등과 함께 불
못으로 던지움을 당하고 만다(계 20 : 12-15). 그러므로 그날이 오기 전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세상을 향해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전파해야 할 것이다.
2. 종의 사역의 결과(61 : 4-9)
앞에서(1-3절) 종의 직무에 대해 언급한 저자는 이제 직무 수행에 따르는 사역의
결과를 기록하고 있다. 즉, 바벧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는 황폐한 성읍이 재건되고,
압제에서 벗어나 이방의 섬김을 받게 되며, 모든 민족들이 우러러보는 영광스러운 위
치에 도달하게 된다는 사실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본문은 (1) 가까운 미래에 성취될 종의 사역의 결과(4절)와 (2) 먼 미래
에 성취될 종의 사역의 결과(5-9절)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저자는 포로의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위로를 전달하고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고 있다. 이제 본문에 나타
난 핵심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저자는 메시야의 사역을 통해 이스라엘이 제사장의 나라가 될 것임을 선언한다
: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출애굽 후 모세에게 하신 약속(출 19 : 5, 6)의 성취로서
이스라엘이 이방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국가가 된다는 의미이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
의 대속을 통해 모든 성도가 직접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음을 가리킨다
(행 10 : 43 ; 롬 10 : 13 ; 벧전 2 : 5, 9 ; 계 1 : 6).
(2) 저자는 메시야의 사역의 결과 하나님의 공의가 세상에 드러난다고 말한다(7, 8
절) : 하나님은 친히 언약 백성을 침략하여 늑탈한 바벧론을 진멸하셨고(욥 5 : 6 ;
58 : 3 ; 64 : 7 ; 92 : 7), 그 이외의 대적들도 모두 응징하셨다. 하나님은 불의를
결코 용납하지 아니하시고 공정한 기준에 의거하여 처벌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
류의 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 그 결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은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다(롬 3 : 24, 28 ; 5 : 1).
(3) 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축복하시는 이유가 오직 약하기 때문이라고 밝
힌다(9절) : 이러한 사실은 인간의 사고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견해이다. 하나님은 이
스라엘의 조건이나 자격을 보지 않고 오직 연약한 가운데서 은혜와 긍휼로 구원하신
것이다(신 7 : 7).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오직 겸손하게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
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를 구원하심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3. 감사의 찬송(61 : 10-11)
종의 직무(1-3절) 및 직무 수행의 결과(4-9)를 기록한 이후 저자는 마지막으로 여
호와의 종에 대한 찬양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지금까지 언급한 메시야의 도래와 사역
에 대한 예언을 확증시키기 위해 과거 시제를 사용하였으며, 성취 이후에 부를 노래를
미리 부르고 있다.이처럼 미래에 대한 확신 가운데서 불리워지는 찬송이 드러나는 본
문은 (1) 찬양의 이유(10절), (2) 찬양을 일으키시는 하나님(11절) 등으로 나눌 수 있
다.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본문은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유다 민족은 오직 하나님의 구
원을 기억하고 찬양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만약 구원을 받은 후에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잊어버린다면 대단히 배은 망덕한 행위일 것이다. 저자는 연약하고 보잘것 없
는 이스라엘을 성실하게 지키시고 보호하신 하나님에 대해, 결혼할 신부에게 옷을 입
히고 온갖 치장을 시키는 신랑의 모습에 비유하여(계 19 : 14) 찬양의 정당성을 강조
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양해야 한다(대하 23 : 18 ; 마 26 : 30 ; 행 16 : 25). 찬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며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힘의 원천이다. 저자는 메시야의 사역을 모두 소개한 후 오직 하나님께만 찬양을 돌리도록 요구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상과 같은 본장에서 우리는 메시야의 사역을 통해서 오직 진정한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다. 여호와의 종은 인류를 죄의 사슬로부터 해방시키고, 일체의 모순과 불의를 제거하고, 의와 평화만이 지배하는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시 2 : 6). 그러므로 불안과 회의 속에서 고통받는 모든 심령들은 거짓된 평화를 약속하는 세속적 세력에 현혹되지 말고 오직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할 것이다. 이 길이 유일한 행복의 문이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 이는 바벨론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를 주기 위해 이사야가 공식적으로 위임받는 대목으로 이해도리 수도 있다(Gesenius, Rosemnuller).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메시야에 관한 언급으로 해석되어지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결정적 근거는 예수께서 본절을 자신에 관한 예언으로 명시하셨다는 사실이다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에 응하였으니라"(눅 4:18-21). 예수께서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신 순간에도 그 사역의 공적 인정을 위하여 성령이 임하신 바 있다(마 3:16;요 1:32).
기름을 부으사( , 마솨흐) - 이 용어에서 '메시야'란 단어가 유래된다. 이스라엘의 왕(삼상 16:13), 제사장(출 30:30), 선지자(왕상 19:16) 등은 그들의 중요 직책을 위해 구별될 때 그 머리 위에 기름 부음을 받았다(삼상 16:1-5 주제 강해, '기름 부음의 영적 의미' 참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구별해 세우신 것을 암시하기 위해 본 표현이 사용되었다. 메시야를 언급하려고 이와 동일한 용어를 사용한 것은 시 45:7;히 1:9 등에도 나온다.
가난한 자( , 아나윔) - 원래 이 용어는 상처나 억압으로인해 고통당하는 자를 뜻하며, 여기서는 1차적으로 낙담 중에 있었던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을 뜻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는 이 용어는 자신에게는 소망이 없으므로 오직 하나님이 보낼 메시야를 고대하며 사는 심령이 가난한 자를 가리킨다고 봄이 더 정확하겠다(마 5:3). 이 말은 시편에서 개인적 재난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고대하였던 신실해 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종종 사용되었다(시 9:12,18). 예수께서는 자신의 지혜를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이신 자신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알아보지 못한 마음이 교만한 자를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라고 풍자하셨고 반대로 그를 알아본 자들을 '어린 아이들'이라고 부르셨는데 이자들이 바로 가난한 자들이다(눅 10:21).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 1차적으로는 포로 귀환을, 더나아가서는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예언하는 내용이다. 또한 본 표현은 희년의 때에 모든 종된 자에게 선포되는 자유를 동시에 연상케 한다(레 25:10;렘 34:8,9).
갇힌 자에게 놓임 - 원문상으로는 '갇힌 자의 감옥문을 여는 것'이란 뜻이다. 여기서 '여는 것'이란 메시야의 도래와 연관지어 볼 때 죄와 사망의 올무로부터의 해방(롬 6:18;7:24,25;히 2:5) 혹은 영적으로 장님되었던 자가 영의 눈을 뜨는 것을 가리킨다(Ewald). 눅 4:18은 본절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본절에는 없는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이란 구절을 첨가함으로써 후자의 뜻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61:2
여호와의 은혜의 해( , 쉐나트 라초 라훼) - 문자거인 뜻은 '여호와의 기뻐하시는 해'이다. 이것은 나팔이 올리고 온 이스라엘 땅에 자유가 선포되었던 희년의 때를 연상시키는 표현이다(레 25:9,10). 희년의 때와 마찬가지로 메시야의 때도 '해방'이란 이미지를 내포한다. 메시야의 도래의 때는 온 세계 인류를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시키는 때인 것이다. 메시야의 도래로 시작된 해방의 때는 은혜의 때라고 불리기도 한다('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2).
하나님의 신원의 날 - 문자적인 뜻은 '하나님의 보복의 날'이다. 1차적으로 이날은 바벨론으로부터의 포로 귀환의 날을 가리킨다. 그런데 바로 이날을 '복수의 날'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만하다. 바로앞에 언급된 바 '여호와의 은혜의 해'의 대비적 표현으로 본 표현이 언급된 것은, 이스라엘에게 '은혜의 해'가 되는 때가 그 대적에게는 '복수', 곧 '심판'의 때가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를 역으로 말하면, 마지막 심판날에 하나님이 대적들을 멸하시는 보응은 곧 성도들에게는 영광을 얻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요 12:47;고전 15:52;고후 4:17;계 21,22장).
=====61:3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 원문 직역은 '아름다움을 주어 그재를 대신하며'이다. '아름다움'에 해당하는 '페에르'( )는 본래 여자들이 머리에 쓰던 아름답고 화려한 관을 말하며, '희락의 옷', '찬송의 옷'과 함께 즐거운 축제 때를 연상시킨다(G.W. Grogan). 이제 여호와의 구원과 은혜의 때가 이르면 슬픔의 표로 뒤집어 썼던 재를(에 4:1,3;렘 6:26) 털어내고 대신 아름다운 관을 쓰고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희락의 기름 - 당시는 기쁨의 축제 때 특히 초청한 귀빈의 머리 위에 향내나는 값비싼 기름을 붓곤 하였다(시 23:5;45:7;암 6:6). 그외 성경은 축제 혹은 기쁨 그 자체를 뜻할 때 '기름'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57:9). 공적인 재난 혹은 슬픔의 때에는 결코 기름을 사용하지 않았다(삼하 14:2).
찬송의 옷 - 절망에 빠진 자를 삼베옷을 입은 것에 비유하는 대신, 찬송과 감사를 드리고있는 자는 밝은 채색옷을 입은 것에 비유한다.
의의 나무( , 엘레 하체데크) - '나무'에 해당하는 '엘레'( )는 팔레스틴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상수리나무를 뜻한다. 이 나무는 굵고 튼튼하여 힘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한다(이런 맥락에서 탈굼역, 제롬역, 시리아역 등은 이을 '강한 것' 혹은 '힘센 것'으로 번역했음). 본문의 '의의 나무'는 한때 죄악으로인해 넘어졌으나 은혜로 말미암아 회복되어 굳건한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주의 백성을 가리킨다. 그들이 그렇게 변할 수 있는 것은 정원사가 나무를 심듯이 하나님이 친히 그들을 구원하여 세우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영광을 열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에 의해서만 세움을 받는 사실은 주님이 사용하신 비유에도암시도이가 있다 : "예쑤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나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마 15:13).
=====61:4
대대로 무녀져 있던 것들 -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동안 유다 본국 팔레스틴 땅과 성읍이 황폐해졌던 사실을 가리키며(렘 20:6;28:6), 나아가서는 본장 전체의 문맥상 메시야의 도래가 있기 전 혹은 메시야를 영접하기 이전의 상태를 나타낸다.
=====61:5,6
이는 새로이 회복될 이스라엘이 이방 가운데서 제사장 나라로서(추 19:6) 우뚝서게 되며 이방인들로부터 물적 조력을 받을 것을(60:10)가리킨다고 해석되기도 하나,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해석이 더 나을 것 같다. 즉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편입된 이방인들 가운데서, 마치 아론의 후손이 이스라엘 중에서 감당했던 것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Delitzsch). 그러나 이방인들 중에서도 제사장과 레위인을 택하리라고 하신 말씀(66:21)이나 특히 이방인과 유대인 간의 벽이 완전히 허물어질 복음 시대(엡 2:14)의 상황을 염두에 둘 때, 이는 문자적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에 대한 적절한 해답을 사도 바울의 언급에서 찾을 수 있겠다 :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은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롬 15:27).
=====61:7
수치 대신에 배나 얻으며 - 바벨론에서 당한 고통에 비교해볼 때 메시야 왕국의 도래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누릴 축복은 더욱더 엄청나게 크고 값진 것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당한 고통과 메시야 사역으로 인한 축복을 단순히 비교한다는 의미보다는 메시야의 구원 사역으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누릴 축복이 그 무엇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엄청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1차적으로는 포로지의 이스라엘에게 큰 위로를 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능욕 대신에 분깃을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라 - 여기 '능욕'에 해당하는 '켈리마'( )의 문자적인 뜻은 '혼돈', '혼란'이지만 바로 앞 구절과 동의적 평행을 이룸을 고려할 때 '수치', '슬픔' 등으로 번역함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분깃'도 메시야의 구속 사역으로 얻게 될 구원의 축복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한편 원문에 보면 앞 구절과는 달리 본절의 주어는 2인칭에서 3인칭으로 바뀌어 있는데, 이것은 본서 저자가 자주 사용하는 화법의 일종이므로 큰 의미없이 동일한 주체를 의도하고 있는 화법으로 보면 되겠다.
=====61:8
대저 나 여호와는 공의를 사랑하며 - '대저'는 '키'( )로서 앞절에 진술된 바벨론 포로 생활로고통받은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이 배의 축복을 주시겠다는 사실의 이유를 밝히는 접속사이다. 하나님이 그같이 하실 이유는 그가 공의를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방의 손을 빌어 그의 백성을 심판하신 것도 공의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본절에서 하나님의 공의는 바벨론의 교만과 불의의 강탈에 대한 분노로 나타난다.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며( , 세네 가젤 베올라) - 본문에 대한 번역은 구구하지만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견해가 이처럼 둘로 나뉘는 것은 '베올라'( )의 '베'( )를 그대로 두고번역하느냐 아니면 '베'를 빼고 대신 접속사 '와우'( )를 삽입하여 번역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먼저 후자의 경우를 따르면 '나는 강탈(혹은 약탈)과 범죄를 미워한다'가 된다(시리아역, Lowht, Noyes). 그러나 이 번역은 받아들일 수없다. 왜냐하면 본 번역의 경우 필요 이상의 원문 수정을 가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전자의 경우를 따르면 '나는 번죄에 수반되는 강탈(혹은 약탈)을 미워한다'가 된다. 이는 바벨론이 유다 백성을 압제하고 강탈하는 등 필요 이상으로, 월권 행사를 도모한 사실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은 그 영적 우매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을 이방이라는 수단을 통해 받았다. 그러나 수단으로사용된 이방 세력은 본연의 임무인 징벌의 집행 외에 과도한 불의를 저질렀다. 바로 이 사실은 공의로운 하나님의 의해 체크되었던 것이다.
=====61:9
알리리니 - '구별되게 하리니' 혹은 '명예롭게 하리니'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시 67:2;76:1;79:10등의 용례들이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 -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참자녀들이 세상나라로부터 하나님의 축복을 방은 자들임을 완전하게 인정받는 때는 구원 역사의종말, 곧 재림의 때이다. 그러나 그때가 이르기 전에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 인정을 받을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이 올려진다(마 5:16). 인정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마 5:13-15).
=====61:10
의의 겉옷 - '겉옷'은 입은 옷 위에 걸쳐 몸 전체를 가리다시피하는 느순한 망토 따뤼를 가리킨다(시 132:9;계19:8). 이 땅토는 추위 또는 외부로부터의 침해 따위로부터 몸을 보하하는 구실을 한다. 여기서 이 망토가 의미하는 바는 '의'이다. 이 '의'는 이스라엘의 자격, 능력과 관계없이 하나님이 주권적으로덧입히신 그 무엇으로 메시야의 구원 사역의 결과로 야기된 것이다. 원래 이스라엘은 스스로 영적 파멸로부터 구원하거나 사단의 집요한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이스라엘 역사가 그 사실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아들 메시야를 보내시고 그로 구속 사역을 이루게 하시어서 그 사역을 근거로 그들을 보호하는 영적인 옷을 입히셨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였다. 따라서 영적 이스라엘, 교회는 그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61:11
땅이 싹을 내며 - 본서 저자가 여러 차례 사용한 이미지(45:8;55:10,11)로, 의미하는 바는 적시에 내린 단비로 촉촉해진 땅에서 새싹이 움트듯이, 메시야가 오시면 진리와의가 돋아 자라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그의 택한 백성을 그곳으로 모으시는 목적은 그의 백성들로부터 찬양을 받기 위함이다. 본절에서의 찬양은 교회가 세상과는 다른 구별적, 거룩한 모습을 나타냄으로써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 칭송을 듣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죄악(58, 59장)에 이어, 시온의 외적 영광(60장)을 언급한 이후에 드러
나는 본장은 메시야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먼저 메시야의 도래에 대해 간략하
게 언급한 후(1-3절) 그것으로 인하여 성도들에게 나타날 환희와 영광을 생생하게 묘
사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장은 (1) 메시야의 사명을 기술하는 전반부
(1-3절), (2) 메시야의 사역의 결과를 드러내는 중반부(4-9절), (3) 메시야의 사역으
로 인한 기쁨이 묘사되고 있는 후반부(10, 11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본장은 외견상 사역의 주인공이 예언 당사자인 이사야처럼 보인다(1, 10절).
그래서 학자들 사이에는 여러 가지 논란이 존재한다. 그러나 가장 완벽한 성경 해석자
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장을 자신에게 적용(눅 4 : 17-21)하셨으므로 메시야의 사
역으로 보는 데 있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더구나 본장은 희년의 선포 이미지로
시작되고 있다(1, 2절). 그런데 희년은 속죄를 전제로 하고 있으므로(레 25 : 9) 본장
이 52 : 13-52 : 12의 희생적 제사의 가르침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은 분명해진다. 즉,
사도행전의 복음 선포가 위대성을 강조하고 이스라엘을 위로하는 '종의 노래'에 해당
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본장은 인칭 변환을 통해 단락의 범위를 결정하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즉
동일한 인칭의 주격이 사용되는 절들은 동일 단락으로 구분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라는 1인칭 주격이 사용되는 1-3절, '그들' 및 '너희'라는 3인칭 및 2인칭 주격
이 사용되는 4-9절, '내가'가 다시 사용되는 10, 11절 등은 서로 다른 단락으로 구분
된다. 다만 4-9절의 경우 서로 다른 호칭이 사용되었지만 그 내용의 연관성 때문에 동
일 단락으로 보게 된다.
또한, 저자는 본장에서 반복 기법을 많이 사용한다. 4-9절은 전장(60장)과의 연속
성을 나타내기 위해 60 : 10-14의 내용을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3절은 10, 11절에 그
내용이 재현되었고, 8절 역시 주제이 있어서 10, 11절에 다시 나타났다. 이러한 반복
법을 사용하여 저자는 독자의 내용 이해를 도울 뿐 아니라 더욱 큰 위로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본장은 메시야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질 시온의 내적 영
광을 중점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당시 이스라엘은 죄로 말미암아 바벧론의 포로로
사로잡혀 있는 절망적인 상태였다(1절).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선지자는 포로
상태에서의 해방을 의미하는 희년을 선포하고, 시온이 다른 나라로부터 인정받은 명예
로운 국가가 될 것을 선언한다. 슬픔을 당한 자는 위로를 받고(3절) 이스라엘의 과거
영광이 재현될 것이다(4절). 이방인들을 섬기는 대신 이방인의 섬김을 받게 되며(5절)
'제사장의 나라'가 되리라는 위대한 약속(출 19 : 6)이 성취될 것이다(6절). 아브라함
의 언약(창 12 : 3)이 성취됨으로써 이방인들조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축복하셨다
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9절). 이사야는 본장에서 이처럼 메시야를 통해 주어질 영광
스러운 하나님의 구원을 소개하면서 기쁨의 찬송과 기도를 드리고 있다(10절).
이제 종의 구속 사역을 근거로 한 시온의 미래적 영광을 기술하는 본장을 몇 단락
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종의 직무(61 : 1-3)
미래에 성취될 시온의 외적 영광에 대해 묘사하였던 전장(60장)에 이어지는 본 단
락에서는 복된 구원을 초래할 메시야의 직무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즉, 메시야는 복
된 구원의 소식을 선포하는 선지자(행 3 : 22), 슬픔과 고통 속에 있는 심령을 치유하
는 제사장(히 5 : 6), 공의와 진리로 백성들을 다스리시는 왕(시 2 : 6)의 역할을 동
시에 수행한다는 것이다. 특히 저자는 전장 마지막 단락(60 : 15-22)과 이어지는 단락
(4-9절)에서 나라의 이미지를 부각시킴으로써 메시야의 핵심적인 사역이 하나님 나라
의 건설임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본 단락은 (1) 하나님이 종을 파송한 이유(1, 2절), (2) 종의 파송이 초래
할 결과(3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제 본문의 핵심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
다.
(1) 본문은 아름다운 소식을 듣는 자의 대상을 이스라엘 포로로 국한시키지 않고,
죄에서 해방된 모든 자들로 확장시킨다 : 저자는 아름다운 소식을 받는 자를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갇힌 자로 부르고 있다. 이들은 일차적으로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보고 슬퍼하며 회개하는 경건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이 보내실 구원자를 기
다리는 모든 심령들을 의미한다. 신약은 이처럼 심령이 가나한 자에게 복이 있으리라
고 말한다(마 5 : 3). 이사야는 겸허하게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은 죄의 노예였던
상태에서 벗어나 영적 자유와 구원을 누릴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롬 8 : 21 ; 갈 5 :
1).
(2) 복음은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수납하도록 촉구하고 있다(2
절) :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이후에는 복음을 듣고 회개하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라고 하였다(고후 6 : 2). 그러나 이 시기가 종결되면 두려운 심판의 날,
곧 복수의 날이 시작된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는(요 12 : 48 ; 고전 15 : 52) 은혜의
때를 살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거부한 자들은 죄, 사단, 죽음 등과 함께 불
못으로 던지움을 당하고 만다(계 20 : 12-15). 그러므로 그날이 오기 전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세상을 향해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전파해야 할 것이다.
2. 종의 사역의 결과(61 : 4-9)
앞에서(1-3절) 종의 직무에 대해 언급한 저자는 이제 직무 수행에 따르는 사역의
결과를 기록하고 있다. 즉, 바벧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는 황폐한 성읍이 재건되고,
압제에서 벗어나 이방의 섬김을 받게 되며, 모든 민족들이 우러러보는 영광스러운 위
치에 도달하게 된다는 사실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본문은 (1) 가까운 미래에 성취될 종의 사역의 결과(4절)와 (2) 먼 미래
에 성취될 종의 사역의 결과(5-9절)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저자는 포로의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위로를 전달하고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고 있다. 이제 본문에 나타
난 핵심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저자는 메시야의 사역을 통해 이스라엘이 제사장의 나라가 될 것임을 선언한다
: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출애굽 후 모세에게 하신 약속(출 19 : 5, 6)의 성취로서
이스라엘이 이방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국가가 된다는 의미이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
의 대속을 통해 모든 성도가 직접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음을 가리킨다
(행 10 : 43 ; 롬 10 : 13 ; 벧전 2 : 5, 9 ; 계 1 : 6).
(2) 저자는 메시야의 사역의 결과 하나님의 공의가 세상에 드러난다고 말한다(7, 8
절) : 하나님은 친히 언약 백성을 침략하여 늑탈한 바벧론을 진멸하셨고(욥 5 : 6 ;
58 : 3 ; 64 : 7 ; 92 : 7), 그 이외의 대적들도 모두 응징하셨다. 하나님은 불의를
결코 용납하지 아니하시고 공정한 기준에 의거하여 처벌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
류의 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 그 결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은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다(롬 3 : 24, 28 ; 5 : 1).
(3) 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축복하시는 이유가 오직 약하기 때문이라고 밝
힌다(9절) : 이러한 사실은 인간의 사고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견해이다. 하나님은 이
스라엘의 조건이나 자격을 보지 않고 오직 연약한 가운데서 은혜와 긍휼로 구원하신
것이다(신 7 : 7).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오직 겸손하게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
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를 구원하심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3. 감사의 찬송(61 : 10-11)
종의 직무(1-3절) 및 직무 수행의 결과(4-9)를 기록한 이후 저자는 마지막으로 여
호와의 종에 대한 찬양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지금까지 언급한 메시야의 도래와 사역
에 대한 예언을 확증시키기 위해 과거 시제를 사용하였으며, 성취 이후에 부를 노래를
미리 부르고 있다.이처럼 미래에 대한 확신 가운데서 불리워지는 찬송이 드러나는 본
문은 (1) 찬양의 이유(10절), (2) 찬양을 일으키시는 하나님(11절) 등으로 나눌 수 있
다.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본문은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유다 민족은 오직 하나님의 구
원을 기억하고 찬양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만약 구원을 받은 후에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잊어버린다면 대단히 배은 망덕한 행위일 것이다. 저자는 연약하고 보잘것 없
는 이스라엘을 성실하게 지키시고 보호하신 하나님에 대해, 결혼할 신부에게 옷을 입
히고 온갖 치장을 시키는 신랑의 모습에 비유하여(계 19 : 14) 찬양의 정당성을 강조
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양해야 한다(대하 23 : 18 ; 마 26 : 30 ; 행 16 : 25). 찬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며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힘의 원천이다. 저자는 메시야의 사역을 모두 소개한 후 오직 하나님께만 찬양을 돌리도록 요구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상과 같은 본장에서 우리는 메시야의 사역을 통해서 오직 진정한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다. 여호와의 종은 인류를 죄의 사슬로부터 해방시키고, 일체의 모순과 불의를 제거하고, 의와 평화만이 지배하는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시 2 : 6). 그러므로 불안과 회의 속에서 고통받는 모든 심령들은 거짓된 평화를 약속하는 세속적 세력에 현혹되지 말고 오직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할 것이다. 이 길이 유일한 행복의 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