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
화 있을진저...사람이 속이리라 - 앞에서 유다에게 내려진 '화'(* ,호)가 본장에서는 '유다를 학대하며 속이는 자', 곧 앗수르에게 선고된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애굽)의 도움을 의뢰하는 자의 결국은 파멸이나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의 결국은 구원이다'는 선지자의 일관된 확신에서 기인한 것이다(Oswalt). 이것을 구체적인 역사의 배경 속에서 고찰하면 이해하기 쉽다. 히스가야 왕 14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은 군대를 이끌고 유다를 공격하였다. 히스가야 왕은 막대한 양의 공물을 받쳐 그 침입을 저지하려 하였다, 산헤립을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언약을 깨고 재차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왕하 18:13-17). 이 절대 절명의 위기 앞에서 히스가야 왕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했으며 하나님은 그 종 이사야를 보내어 응답하셨다.스미스(G. A. Smith)는 그것이 본장에 기록된 것이라 한다. 선지자는 언약을 파기한 앗수르에 대해 재앙을 선포하는데, 그 내용은 '악인은 그 행한 대로 보응을 받는다'는 한마디로 요약 가능하다.
=====33:2
여호와여...우리의 구원이 되소서 -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응에 대한 깨달음은 기도를 통해서 주어질수 있으므로 선지자는 문득 예언을 중단하고 기도를 삽입시킨다. 여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성도의 기도의 자세가 잘 나타나 있다. (1)스스로에게 아무런 공적도 없음을 겸손히 시인하고,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의지하듯이 참으로 무력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은혜를 베푸소서'). (2)하나님의 도우심을 소망하고 믿음으로 인내해야 한다('주를 앙망하오니').
=====33:3
진동 시키시는 소리로 인하여...열방이 흩어졌나이다 - '진동시키는 소리'와 '주의 일어나심'은 성도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현재의 위기 상황에 개입하셔서 그 원수들을 물리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청각적, 시각적으로 묘사한 말이다. '진동시키는 소리'에 대하여는 30:30;삼상 2:10;7:10;욥 37:4,5;40:9;시 18:13;29:3-9;77:18;104:7;단 10:6;계 1:10을 '주의 일어나심'에 대하여는 민 10:35;시 68:1을 참조하라. 본문은 아마도 산헤립의 군대가 여호와의 사자에 의해서 하룻밤에 궤멸된 사건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37:36)
=====33:4
황충의 모임같이...뛰어 오르리라 - '황충'이라고 번역된 '하실'(* )은 '잘라 먹다', '탐식하다'는 뜻의 '하살'(* )에서 파생된 명사로, 메뚜기의 일종을 의미한다(신 28:38;왕상 8:37;시 78:46;욜 1:4).이들은 떼로 몰려 다니면서 곡식을 남김없이 갉아먹었다. 비유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 메뚜기떼가 들판을 휩쓸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처럼, 앗수르군의 노략을 또한 그처럼 신속하고도 철저하게 유다 백성들에 의해 노획될 것이다.
=====33:5
여호와께서는 지존하시니...시온에 충만케 하심이라 - 승이의 결과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아지실 것을 묘사한 말로 본장의 서론부(1-6절)는 일단락된다(Delitzsch,Oswalt). '지존하시다'로 번역된 '니스가브'(* )는 '사가브'(* ) 동사의 수동 분사형으로, 높아지신 상태만이 아니라 높임을 받으시게 된 변화를 또한 암시한다(Alexander). 지극히 '높은 데'에 거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스스로 높은자로 자처하실 뿐 아니라, 한편 그 백성에 대하여는 당신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셔서 시온 곧 예루살렘에 의와 공평을 충만하게 하신다(Calvin).
=====33:6
너의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 - 선지자는 계속해서 히스가야 왕의 통치하에서 백성들은 '안정감'(* ,에무나)을 잃지 않고 '구원과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을 향유하게 되리라고 말하는데, 이 모든 것은 '여호와의 경외함이 너의 보배'라는 결론적인 말속에 담겨 있다. '여호와 경외'(* ,이르아트 야훼)는 하나님을 무서워한다기보다는 그의 본성을 바르게 인식함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기꺼이 복종하고 공경하려는 마음으로 그를 예배하고자 하는 내적인 자세를 가리킨다. 다른 곳에서 이것은 '지혜의 근본(실체)'이라 불리기도 한다(시 111:10;잠 1:7;9:10). 이같이 영적으로 개화되는 시대에 있어서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이지 않을 뿐더러 금과 은 같은 보물 대신 하나님 경외함을 그 즐거운으로 삼게 된다. 메시야 시대의 영적 속성들을 기록한 11:2과 비교하라.
=====33:7
보라 그들의 용사가...평화의 사신들이 슬피 곡하며 - 선지자는 앞에서 간략한 형태로 본장의 주체를 소개한 뒤에 다시 그것을 세부적으로 확대하는 방식으로 진술한다. 그느 먼저 아무데서도 도움받을 길 없는 현재의 비참함을 슬퍼하는 용사의 애가로 시작한다(7-9절). 언급된 '용사'(* ,에르엘람)는 평행하는 '평화의 사신들'과 동의어로서, 평화 협상을 위해서 산헤립이 평화의 조건으로서 내세운 금과 은을가지고 갔으나(왕하 18:14), 산헤립은 평화의 조건으로서 다시 예루살렘의 완전 항복을 요구하면서 언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33:8
대로가 황폐하여 행인이 끊치며 - 앗수르의 침공으로 인해 유린당하는 유다의 형편을 묘사한다. 대로가 황폐하여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자 끊기고 여행객도 보이지 않으며 장사하는 이들의 자취도 찾아볼 수 없는 것(삿 5:6)은 전쟁 상황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풍경이다.
대적이 조약을 파하고 성읍들을 멸시하며 - 어떤이는 '성읍들'(* ,아림)을 '중인들'(* ,아딤)로 수정해서 읽을 것을 제안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언약을 파기했다'는 말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Duhm, Oswalt, J. Watts). 그러나'성읍들'로 읽어도 뜻이 통하는 터에 굳이 맛소라 본문을 바꿀 필요는 없는 듯이 보인다.
=====33:9
땅이 슬퍼하고...목엽(木葉)을 떨어치는도다 - 유다의 참상이 땅에 반영된다. 가장 비옥한 땅으로 일컬어지던 대표적인 네 곳들-레바논, 사론, 바산, 갈멜-이 하나같이 황폐해진다. 백향목과 전나무로 꽉차 있어서 언제나 울창한 이스라엘 북쪽의 레바논은 바짝 말라 볼품 없는 모양이 될 것이며(2:13), 감멜 산 남쪽 기슭에서 욥바에 이르는 지중해 연안의 넓은 평원으로서 아름다운 들풀과 목초지를 자랑하던 사론(대상 27:29)은 아무것도 자랄 수 없는 사막과 같이 될 것이며, 동과 서에 위치한 비옥하고 기름진 땅들로서 과일 나무와 삼람으로 유명한 바산 (2:13;렘 50:19;미 7:14;슥 11:2)과 갈멜은 나뭇잎들을 떨어뜨리게 될 것이다.
=====33:13
너희 먼데 있는 자들이...가까이 있는 자들아 - '먼데 있는 자들'과 '가까이 있는 자들'은 '멀고 가까움을 막론하고 모든 곳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Alexander). 앗수르를 파멸시킨 하나님의 권능에 너무나 놀랍고 위대한 것이어서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에 족하다는 말이다.
=====33:14
시오의 죄인들이 두려워하며...함께하리요 하도다 - '시온의 죄인들'곧 '경건치 아니한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 중에 거하면서도 그 행위와 습성이 앗수르와 별로 다를바 없는 불법하고 불의한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앗수르를 삼킨 하나님의 심판의 불이 그들 또한 삼킬 줄 모른다는 극도의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33:15
앞절에서 제기된 물음에 대한 답으로서 선지자는 그가 이상으로 삼고 있는 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 보인다. 시 15편; 24:3-6과 유사한 내용이다.
토색한 재물을 가중히 여기는 자 - '토색한 재물'(* ,베차 마아솨코트)은 다른 사람을 착취함으로 해서 얻어지는 부당한 소득을 가리키며, '가중히 여기다'(* ,마아스)는 말은 '거절하다', '멸시하다'는 뜻이다. 의로운 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연야한 자를 이용하거나 억누르지 않으며 더 나아가 재물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히지 않으므로 그의 손은 언제나 깨끗하다.
=====33:16
그느 높은 곳에 거하리니...그 물은 끊이지 아니하리라 -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경건한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그로부터 풍족한 사랑을 호흡하며 복된 삶을 영위해 나간다. 선지자는 그것을 두 가지로 표현한다. (1)하나님께서 그를 지켜 모든 위협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몸소 그의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이다. '높은 곳'(* ,메로밈)은 적의 위협이나 어떠한 자연의 재해도 접근 불가능한 난공 불락의 요새 곧 가장 안전한 장소를 가리킨다(25:12). (2)하나님께서 일상의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실 것이다. '양식'(* ,레헴)과 '물'(* ,밈)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근본적으로 구비해야 할 필수품들을 총칭하는 말이다.이러한 축복은 오직 하나님으로 주인을 삼고 그 보시기에 의롭고 경건하게 살기를 힘쓰는 자들에게만 허락되는 것이다. 그럴진대, 성도가 먼저 구할 것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마 6:33)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33:17
너의 눈은...목도하겠고 - 선지잔는 계속해서 앞에서 말한 경건한 신자들을 향해 그들이 누릴 풍요한 미래의 모습을 말한다(17-24절).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여기 언급된 '왕'(* ,멜렉)이 히스가야 왕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히스가야 왕은 유다의 위기 상황에서 찢긴 의복과 삼베옷을 입은 수치스런 모습을 보였으나(37:1) 위기가 끝나고 적들이 물러간 이후에는 다시 존귀의 위엄을 회복한 영광스런 모습으로 백성들 앞에 나타날 것이다(Delitzsch, Alexander). 그러나 이것을 배타적으로 히스가야 왕에게만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 않다. 왜냐하면 (1)동일한 문맥 속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분명히 묘사하고 있으며(22절), (2) '왕' 앞에 관사가 붙어 있지 않다는 사살은 선지자가 역사상의 특정한 왕뿐 아니라 이상적인 왕을 염두해 두고 있음을 시사하며, (3)히스가야 왕이 다스렸던 협소한 영토와 본문에 언급된 '광활한 땅'과는 문자적인 의미에서는 잘 조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히스가야 왕은 메시야의 모형으로서 거론되었다는 견해를 취한다(Calvin).
=====33:18,19
너의 마음에는 두려워하던 것을 생각하여 내리라...깨닫지 못하는 자니라 - 구원 받은 백성들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그들이 겪었던 두려웠던 순간들을 회고하게 될 때, 그들은 말할 수 없는 희열과 감격 속에서 승리의 환호성을 터트리게 될 것이다 :'지난날 우리를 그토록 괴롭히던 자들은 지금 어디 있느냐?...어디있느냐?'(고전 1:20;15:55 참조). 한때 공물과 전리품들을 계산하고 장부에 기입하던 서기들(* ,소페르)과 그 공물을 저울에 달아 무게를 재던 관리들(* ,쇼켈)과 탑 (망대)을 세워 도성을 습격하려던 계획을 세우던 앗수르 관리들(* - , 소페르 에트-하미그달림)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더불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들을 지껄이며 길길이 날뛰던 '강포한 백성'(* ,암 노아즈) 곧 앗수르인들 또한 꿈과 같이 사라질 것이다.
=====33:20
우리의 절기 지키는 시온성을 보라...그 줄이 하나도 끊이지 아니할 것이며 - 결코 정복되지 않는 도성 예루살렘은 그곳에서 하나님과 백성의 만남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축제(절기)의 성읍'(* ,키르아트 모아테누)이라 불린다.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란 말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예루살렘에 성소가 고정되기 전, 즉 광야를 떠들며 대적과 싸우던 불안정한 시절에는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가 '장막'(성막)이라는 협소하고 유동적인 공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장막은 본래 하나님의 거주하심을 상징하는 처소로 세워졌다(출 25:8; 29:44,45).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 '거주하심'은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다. '거주한다'는 말은 성경적 의미에서 '친밀하게 연합함을 뜻한다(창 30:20; 시 5:4).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는 자력으로는 건널 수 없는 깊은 심연이 놓여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제사드리는 행위를 통하여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과 백성의 참교제는 그런 연후에라야 허락되었다. 이 경우 성막은 동물의 피를 뿌려 백성의 만남이 실현되는 '친교의 공간'(* ,오헬 모예드)으로 기능하였다(출 40:2). 성막은 언제나 12지파의 한 가운데 위치하였으며 그들과 더불어 진퇴(進退)를 같이하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함께하시며(임마누엘의 원리), 와으로서 그들을 다스리심(신정의 이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장막은 하나님의 통치(하나님의 나라)의 모형론적인 표현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새것이 옛것을 대신하고 실재가 그림자를 대신하는 그때에는 응당 폐기되어야 할 것이다(히 11:9,10).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적들로부터 구원하시는 미래의 그날에는 '임마누엘의 원리'(21절)와 '신정의 이상'(22절)은 더욱 완전한 형태로 구현될 것이다(G. Vos,Biblical Theology).
=====33:21
여호와께서는...넓은 하수(河水)나 강이 둘림 같을 거싱니라 - 참으로 '권능 있는자'는 예루살렌을 위협하는 앗수르가 아니라 예루살렘과 함께하시며 그 도성을 지키시는 여호와이시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과 함께하시면 그 도성은 큰 강이 빙 둘러서 아무라도 접근할 수 없게 하는 천혜의 요새들처럼 그 영구한 안전을 보장받게 될 것이다(시 46:4-5;겔 47:1-12;슥 14:8). 선지자는 아마도 유브라데 강에 둘러싸인 바벨론이나 나일 강에 둘렀인 애굽의 테베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33:22
대저 여호와께서는 우리 재판장이시요...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 - 예루살렘과 함께하시며 그 권능으로써 도성을 방비하시는 여호와가 본문에서는 거의 동일한 뜻을 가진 세 가지 칭호로 불려진다. (1)그는 우리의 재판장이시다(* ,쇼푸테누). 그는 공의에 입각하여 백성들의 옳고 그름을 준열하게 판단하신다(11:3,4). (2)그는 우리의 율법 수여자이시다(* ,메호케케누). 그는 하나님으로서 마땅히 따라야만 되는 삶의 규범을 제정해 주신다(신 33:21). (3)그는 우리의 왕이시다(* ,말루케누). 그는 이스라엘을 통치하신다(삼상 12:12). 그에게 현대적 의미의 입법권, 사법권, 행전권이 모두 속해 있다. 이는 그분만이 인생과는 질적으로 다른 완전한 분이시며, 우리의 참된 주관자이시며, 우리의 유일 무이한 구원자이심을 고백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33:23
너의 돛대 줄이 풀렸었고...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할 것이며 - 옛주석가들은 물론 현대의 많은 주석들까지도 21절의 '배'(앗수르를 가리킴)의 표상이 본문에서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데는 큰 난점이 따르니, 다른 데서 앗수르가 항상 남성형으로 취급되는 반면, 본문의 '하발라이크'(* ,너의 돛대줄)의 어미는 여성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앗수르가 아니라 유다가 언급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낫겠다(Delitzsch, Oswalt). 앞에서 승리자로 묘사되었던 유다가, 여기서는 정비조차 제대로 안 된 낙후한 배로 묘사된다. 그러나 '때가 되면'(* ,아즈) 모든 것이 뒤바뀐다. 유다의 결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앗수르에게 대승을 거두게 된다. 그러므로 본문의 의미는 간명하다 : 승리는 외적인 조건에 달려 있지 않고 불가능을 가능케 만드시는 하나님의 권능에 달려 있다.
여호와의 정의로운 나라에 대한 예언을 묘사하고 있는 전장(32장)과 달리 본장은
앗수르에 대한 멸망과 이스라엘의 구원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전장에서는
여호와께서 장차 이루시는 나라가 누구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인가를 예표적으로 보여
주는 반면에 본장은 앗수르의 심판이라는 역사의 배경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회복에
대해 중점적으로 논한다. 또한 전장이 이상적이며 암시적인 반면에 본장은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특성을 담고 있다. 왜냐하면 당시의 백성들이 앗수르의 침공 속에서도 소망
을 잃지 않게하기 위한 저자의 의도가 짙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묘사하고 있는 본장은 당면한 환난 가운데서 구원을
간구하는 전반부(1-6절), 이스라엘의 구원을 묘사하는 중반부(7-16절), 하나님께서 이
루시는 왕국의 모습에 대해 묘사하는 후반부(17-24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15, 16, 20-24절 등이 지니는 내용의 독특성 때문에 이 구절
들을 이사야의 제자가 후대에 삽입한 것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좀더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일관적인 논리적 진전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15, 16절은 죄인들에
대한 심판의 예언(13,14절)에 이어 그중에서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묘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독립된 문단으로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본장 전체는 이사야의 저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심판의 와중에서도 당신의 백성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긍휼이 매우 두
드러지게 나타나는 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본장의 신학적인 특징은 천국의 현재성과 미래성에 대한 개념이다. 흔히 어떤
학자들은 신약의 복음서에서만 천국의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성격을 찾는데, 사실 이러
한 내용은 신약의 저자들이 독창적으로 고안해낸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 선포된 바 있다. 본장은 천국의 현재적인 성격에 대해, 앗수르의 심판이 철저하
게 이루어지는 상황 속에서 은혜를 구하는 기도(2절)를 통해 그 평안함을 암시적으로
보여 준다. 저자는 하나님 나라의 다스리심이 경건한 백성들을 통하여 실제적으로 역
사 속에서 임하였음을 보여준다.
이제 이러한 특징을 담고 있는 본장을 좀더 세분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심판 중에서의 기도(33 : 1-6)
종말론적으로 임재하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전 단락
(32 : 15-20)에 이어서 본 단락은 앗수르를 통해 북이스라엘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 가
운데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으로 일관
하고 있다. 즉, 전 단락이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이며 미래적인 성격을 강하게 보여
주는 반면에, 본 단락은 어두운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
루어져 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 단락의 내용상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환난 중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도한다(1-4절) : 앗수르에게 침략당하는 절
박한 환경 속에서 저자는 여호와를 향해 기도한다(2절). 이러한 태도는 환난의 날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준다. 사실 이처럼 환난 중에 기
도할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며, 동시에 이러한 환경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 전혀 있지 않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아는 자이다. 그러기 때문
에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요청하는 기도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기도는 단지 환난을 피하기 위한 소극적인 자세가 아니라 오히려 이 절망스러운 현실
을 극복할 수 있는 성도의 적극적인 자세이다.
(2)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가치이다(5, 6절) : 저자는 심판의 상
황 속에서도 평강과 지혜의 풍성함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라고 밝히고 있다. 특별히 저자는 여호와를 경외함이 보배라고 표현함으로써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치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신구약 성경의 일
관된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며(잠 1 :
7) 풍성한 삶의 유일한 길임을 알려주고 있다.
2. 이스라엘의 구원(33 : 7-16)
앗수르를 통한 심판의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성도의 자세와 그 결과에 집중하고 있
는 전 단락(1-6절)에 이어서 본 단락은 앗수르의 침공에서 구원받은 사실을 구체적으
로 묘사하고 있다. 즉 본 단락은 2절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여호와가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하시는가에 대하여 매우 상세하게 기록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당
신의 백성들에게 신실하시다는 사실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을 담고 있
는 본 단락은 구원 전의 이스라엘의 황폐한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전반부(7-9절), 구
원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중반부(10-13절), 구원 이후의 여호와의 백성들의 반응을
묘사하고 있는 후반부(14-16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구성되어 있는 본 단락
의 내용상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인간의 모든 소망이 끊어졌을 때 하나님은 역사하신다(7-13절) : 저자는 이스
라엘이 현재 인간의 능력으로는 결코 개선시킬 수 없는 절망적인 처지에 놓여 있음을
밝힌다(7절). 그리고 나서 바로 이러한 시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내용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의 모든 소망이 끊어졌을 때 구원
하실 수 있는 분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하나
님의 구원의 역사는 바로 극단적인 위기 상황 속에서 강력하게 나타난다. 이에 대한
증거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사와, 그 이후에 전개되는 사사 시
대, 왕정 시대를 거쳐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찾아볼 수
있다.
(2) 여호와의 심판을 통하여 의인과 악인의 삶의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14-16
절). 여호와의 앗수르에 대한 심판의 사건은 악인들이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에 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14절). 반면에 의인들은 '의롭게 행하는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
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로서 평상시에 하
나님을 의식하고 경건하게 생활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날에
있을 심판에서 각자의 삶이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마 25 : 32).
3.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미래(33 : 17-24)
이스라엘의 구원의 사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전 단락(7-16절)에 이어서 본
단락은 이스라엘의 미래의 상태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즉 전 단락이 이
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에 대한 현재적이며 실제적인 언급을 하고 있다면 본 단락은 좀
더 그 폭과 시야를 넓혀서 이스라엘의 미래와 영광스러움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는 것
이다. 이러한 사상은 저자가 항상 오늘의 현재적 상황에서 미래적인 전망을 취하는 역
사적인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같은 내용을 담고있는 본 단락은 이스라엘의 영광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는 전
반부(17-21절), 백성들의 찬양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 후반부(22-24절) 등으로 구성
되어 있다. 이렇게 구성된 본 단락의 주된 내용상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의 땅의 회복(17절) : 저자는 여호와의 백성들이 받을 영광에
대하여 묘사하기를 '광활한 땅'(17절)이 회복될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땅이
란 일차적이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던 영토를 가리키지만 궁극적으로는 장차 그리스
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이러한 땅의 회복에 대한 내용은 아브
라함 시대 때부터 예언되어져 왔다(창 12 : 1 ; 13 : 14-16 ; 15 : 18-21 ; 17 : 8).
이 약속은 이삭(창 26 : 3, 4, 24)과 야곱 광야 여행 중에서(출 33 : 1) 반복되었다.
여호수아 시대에 들어와서는 땅에 대한 약속이 이제 더 이상 약속이 아니라 실재였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광을 묘사하면서 땅의 회복을 우선적으로 언
급하고 있는 것이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의 회복(20, 21절) : 저자는 심판의 상황 속에서 제대
로 드려지기 힘들었던 제사가 다시 회복되고 영원히 끊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사실 제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본질적이며 영적인 관계임을 드러내주는 의
식이다. 그러므로 영속적인 제사에 관한 언급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가 재개되고 지속되리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교제의 회복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요 4 : 23).
(3) 이스라엘 백성들의 찬송의 회복(22절) :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은 찬송을 통하여 그 절정에 이른다. 그들은 여호와의 주권을 통해서 되어진 구원을 목도하고 나서 진정한 찬양을 드리게 되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고 난 이후에 부른 노래(출 15 : 1-18) 또는 신약의 대표적인 찬양이라고 할 수 있는 마리아의 찬송(눅 1 : 46-55)과 유사하다. 선지자는 여호와에 대하여 사역과 관련해서 '재판장', '율법 수여자', '왕', '구원자' 등으로 묘사하면서 하나님을 높이고 있다.
이와같이 본장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환난의 상
황 속에서도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마 6 : 9-13). (2) 항상 하나님의 평
강 속에서 살아야 한다(요 14 : 27). (3) 주님의 심판 때에 삶의 결과들이 엄정하게
평가된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근신해야 한다(마 25 :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