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
두로에 관한 경고라 - 열방들에 관한 경고(* , 마사)는 바벨론에서 시작하여(13장)두로에서 끝난다. 바벨론과 두로는 각각 세계의 대극점(동과 서)에 위치하면서, 세계의 두 힘 곧 권력과 재물을 대표한다. 계 18장에서 이들 두 나라는 영적으로 함께 결합된다. '두로'는 동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고대 페니키아(베니게)의 주요한 네 성읍-아라두스, 비블로스, 시돈, 두로-가운데 하나로 유명한 항구 도시였다. 그 자매 항구인 '시돈'은 약 40km 북쪽에 있다.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두로는 일찍이 바다를 개척하여 지중해를 통한 해상 무역에 활발히 종사하였다. 두로는 이사야 선지자의 때로부터 B.C.322년에 이르기까지 약 5번의 공격을 받았는데, 2번은 앗루르에 의해(느부갓네살), 또 1번은 바사에 의해(아타르크세르크스 3세), 그리고 마지막은 마게노냐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서였다(Oswalt). 본문의 예언이 이중 어느 것과 관련되는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바벨론에 의한 점령이 가장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13절). 두로에 대한 예언으로는 겔 26-28장을 보라.
다시스의 선척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 '다시스의 선척들아'란 말에는 이중의 수사법이 들어 있으니, 그것이 지중해를 오가는 페니키아의 해상 활동을 대표하는 한에서 환유법이요, 또한 그것이 인격화되어 부름을 받는 한에서 돈호법이라 할 수 있다. '다시스'는 스페인의 타르테수스를 가리키는데, 그곳은 두로의 해상 식민지였다(2:16;60:9;왕상 10:22;22:48;시 48:7;겔 27:25;욘 1:3). 다시스를 돌아 고향으로 귀항 중인 선원들에게 슬픈 소식이 전해진다. 그것은 두로가 파멸되어 들어갈 항구도, 쉴 집도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 소식이 들려온 곳은 최종 정박지인 '깃딤' 곧 구브로 섬(Cyprus)이다(창 10:4;렘 2:10;단11:30).
=====23:2
바다에 왕래하는 시돈 상고(商賈)로 말미암아 부유하게 된 - '시돈 상고'는 페니키아의 상인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시돈'은 페니키아를 대표하는 가장 크고 오래된 도시이며(삿 3:3;왕상 16:31), '상고'(* ,소헤르)는 상인, 장사꾼을 뜻한다. 이들은 지중해를 오가며 인접한 나라들의 물건을 중개 무역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덕을 본 나라들이 많았다.
=====23:3
시흘의 곡식 곧 나일의 추수를...열국의 시장이었도다 - 시돈 상고로 대표되는 페니키아의 해상 활동이 구체적으로 예시된다. 이들은 고대 세계의 곡창 지대였던 애굽으로부터 곡식을 사서 이것을 '큰 물' 곧 지중해(시 107:23;겔 27:26)로 운반한 뒤에 곡식을 필요로 하는 나라에 되팔아서 큰 이윤을 남겼다. '시흘'(* )은 나일 강을 뜻하는 애굽어 '예오르'(* , 19:6)의 히브리어 발음이다(수 13:3;렘 2:18).
=====23:4
시돈이여...생육지도 못하였다 하였음이니라 - '바다', 엄밀히 말해서 '바다의 요새'(* , 마오즈 하얌)가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바다의 요새'는 내륙에서 보건대, 섬과 같은 두로를 가리킨다. 두로에게 임한 재난은 시돈으로 대표되는 페니키아 땅에 부끄러움을 강요한다. 왜냐하면 한때 지중해를 석권하며 많은 식민지들을 건설할 두로가 이제 재난을 당하여 모든 것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23:5
그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통도(痛悼)하리로다. 두로의 패망 소식은 애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안겨준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곡물 수출업자들인 그들의 몰락으로 애굽의 경제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겠기 때문이요, 둘째는 동방 국가의 서진(西進)을 저지시켜 주는 방파제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던 두로의 몰락으로 애굽 역시 동일한 군사적 위험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23:6
너희는 다시스로 건너갈지어다...슬피 부르짖을지어다. 적의 포위 공격을받는 두로 거민들에게 가능한 한 멀리 다시스로 도피하라는 동정어린 명령이 주어진다. 알렉산더 대왕이 두로를 포위했을 때 이와 유사한 광경이 벌어졌는데, 늙은이, 부녀자, 어린아이 할 것없이 모두 페니키아의 식민지 중의 하나인 카르타고 (Carthage)로 도피하였다고 한다(Diodorus, Curtius, Justin). 그들의 경제력을 두로와의 해상 교역에 거의 의존하다시피 해온 해변 거민들 역시 두로의 몰락으로 자기들에게 미칠 손실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에 부르짖는다.
=====23:7
이것이 고대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성...유하던 성이냐 - 두로의 어제와 오늘이 대비된다(14:16,17;애 2:15 참조). 선지자는 이것을 놀람이 함의된 의문문의 형태로 표현한다. 두로와 관련된 세 가지 요인이 이 놀람을 더욱 증폭시킨다. 첫째, 두로의 유구한 역사이다.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는 두로의 도성이 약 2,700년의 역사를 가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둘째, 두로의 활력성이다. 이 활력성은 모험성과 진취성이 충만한 상업적 활동에서 기인된 것이며, 두로의 사치와 교만을 반영해주는 것이다. 셋째, 두로의 끝없는 개척 정신이다. 그들은 넘쳐나는 활력으로 먼 데까지 나아가 시장을 개척하는 한편, 카르타고, 다시스 등과 같은 식민지들을 건설하기에 바빴다(Oswalt).
=====23:8
두로에 대하여 누가 이 일을 정하였느뇨 - 히브리어 원문에 이 물음이 문두에 나온다. 실상 이 물음이 8-14절의 주조를 이룬다. 두로처럼 역사성이 깊고, 활력이 충만하며, 개척 정신이 강한 나라가 몰락한 데는 역사의 우연 이상의 더 큰 무엇이 개입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이에 대해 답변하기 전에, 선지자는 두로의 몰락이 주는 충격을 더하기 위해 과거 두로가 국제 사회에서 점했던 위치를 상기시킨다.
=====23:9
세상의 모든 존귀한 자로 멸시를 받게하려 하심이니라 - 직역하면 '땅의 모든 존귀한 자들(* - - , 콜-니크바데-아레츠)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 (* ,레하켈)'이다. 어원적인 면에서 '니크바딤'(* )과 '하켈'(* )은 '무겁다'와 '가볍다'는 대조적인 의미를 갖는다.
=====23:10
딸 다시스여...너를 속박함이 다시는 없으리라 - 두로의 패망은 곧 그 밑에서 속박당해 온 속국들의 해방과 독립의 계기가 된다. 다시스는 그 한 예로서 본문에 언급된다. 구속된 상태에서의 두로와 그 식민지 다시스와의 관계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로 비유된다.
그러나 해방의 그날, 다시스는 어머니의 품을 떠나 어떤 간섭도 받음이 없이 마치 나일 강이 넘쳐서 제멋대로 흐름과 같이 그렇게 자유를 만끽할 것이다(Delitzsch)=====23:11
여호와께서 바다 위에 손을 펴사 열방을 흔드시며 - 두로의 파멸이 전적으로 여호와의 손에 의한 것임을 선지자는 다시 강조하고 있다. 손을 펴시는 여호와의 모습은 선지자 이사야에게 친숙한 이미지이다(5:25;9:12, 17, 21;10:4;14:26;31:3). 그가 바다에 손을 펼치심으로 바다에 의존하던 열방들 곧 독자적으로 자신들의 왕을 섬기고 있던 페니키아의 여러 나라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힌다(Gray)=====23:12
너 학대받은 처녀 딸 시돈아...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 본문의 전체적인 의미는 6절과 유사하다. 한때 순결한 처녀와도 같이 그 부(富)와 명예를 자랑하던 시돈 곧 페니키아가 능욕당하여 모든 즐거움울 상실한 여인의 모습으로 비유된다. 그에게 깃딤으로 도피하라는 권유가 주어진다. 그러나 어디로 가든지 바라는 안식은 찾지 못할 것이다.
=====23:13
갈대아 사람의 땅을 보라...황무케 하였느니라 - 두로를 멸망시킬 도구가 제시된다. 그러나 이 도구가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해 크게 두 가지 견해로 나뉜다. 두로의 파멸이 앗수르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본문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가나안 땅(페니키아)을 보라. 이 나라는 더 이상 존재치 않는다. 앗수르가 그것을 광야로 바꾸어 버렸다. 그들(페니키아인들)은 망대를 세우고 궁전을 건설했으나 그(앗수르)가 그것을 황무케 하였다'(Ewald). 그러나 이것은 과도한 본문 수정을 요구한다.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갈대아 사람이 여기서 언급되고 있다는 견해를 취한다. 이때 그 해석은 다음과 같다:'갈대아 사람(바벨론)의 땅을 보라. 이 백성(지금 거주하고 있는 바벨론인들)은 존재하지 않았다(즉, 원주민이 아니었다). 앗수르가 그것을 광야의 거주자들(전에 유목 생활을 하던 갈대아인들)을 위해 건설하였다. 이 백성(갈대아인)이 망대를 세우고 그녀(두로)의 궁전을 헐었으며 그것을 황무케 하였다'(Alexander, Delitzsch). 언급된 '망대'는 고대 사회에서 포위 공격할 때 사용된 것이다. 후대의 역사가들에 따르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이토발 왕 치하의 두로를 13년간이나 포위했으며(요세푸스, [고대사]) 부왕(父王)의 사망 소식을 듣고 고국 바벨론으로 귀환할 때 수 많은 페니키아의 포로들을 끌고 갔다고 한다(Berosus).
=====23:14
다시스의 선척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으라 - 1절의 반복이다. 슬피 부르짖는 이유도 앞과 유사하다. 즉, '너희 견고한 성'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4절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두로가 견고하 요새(* , 마우즈)로 묘사된다. 수미 쌍관의 형식으로 두로에 대한 비극적인 예언은 종결된다. 이하에서 선지자는 두로의 회복을 노래한다.
=====23:15
그 날부터 두로가...기생 노래의 뜻 같이 될 것이라 - 본문에서 선지자는 두로를 기생에 비유하니, 이는 물건을 사고 파는 상업 도시의 면모가 노래와 몸을 파는 기생과 비슷한 데가 있기 때문이다(17절). 이 기생은 일정한 기간 동안 손님으로부터 잊어버림이 되었다가 70년이 지난 뒤, 다시 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언급된 70이란 숫자는, '7(하나님의 사역을 가리키는 수)X10(완전을 가리키는 수)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도대로 일을 성취시켜 나가는 충만한 때를 상징하는 말로 봄이 무난하다(단 9:24). 실제로 70년이란 기간은 바벨론 유수의 시한과 일치한다(대하 36:21;렘 25:12;29:10;단 9:2;슥 1:12).
=====23:16
잊어버린 바 되었던 기생 너여...다시 기억케 하라 - '기생 노래'의 가사가 일부 소개 된다. 이는 선지자의 예언을 보다 생생하고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한 것이다. 노래의 내용은 사람들로부터 잊혀진 한 기생이 다시금 옛 명성을 되찾고 인기를 회복하기 위해 기묘한 곡조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다. 이는 항간에 유행하던 소곡에서 따온 표현인 듯하다(Dillmann).
=====23:17
여호와께서 두로를 권고하시리니 - 직역하면 '여호와께서 두로를 방문하실 것이니'이다. 두로의 멸망이 여호와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면, 그 회복 또한 여호와의 은총으로부터 기인됨을 말하는 것이다.
=====23:18
그 무역한 것과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리고 - 직역하면 '(그녀의) 소득과 (그녀의) 보수가 여호와께 거룩히 여김이 될 것이며'이다. '하나님께 거룩히 여김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뜻이다. 이때 '열방과 음란한 행위를 해서 번 돈이 하나님께 바쳐질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왜냐하면 율법은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하나님께 가져오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다'(신 23:18)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는 두로에게 적용된 '기생'이라는 말이 상업 활동에 종사하는 두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Oswalt). 상행위 자체는 근본적으로 악하지 않다. 다만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됨'(딤전 6:10)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13장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는 본장에서 당시 해
상 무역을 통해 치부한 두로에 대한 심판 예언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본장에는 두로에 대한 심판 예언뿐 아니라 심판받은 지 70년만에 찾아올 두로의 회복
에 대해서도 예언되었다. 이 같은 두로의 심판에 대한 예언은 에스겔 26-28장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그런데 본장에 드러난 두로의 멸망에 관한 예언은 아마도 B.C.
605년경에 바벧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한 두로 공략 사건을 예언한 것으로 보인다(13
절). 그때 두로는 이토발 3세(Ittobaal III)의 치하에서 13년 동안이나 바벧론에 대항
하였지만 팔레스틴 땅 지중해 연안에 붙어 있던 두로가 점령당했을 때 그 힘은 완전히
쇠약되고 말았다. 그러나 두로는 그로부터 70년 후인 바벧론 제국의 말기에 다시 회복
되어 지중해 해상 무역에 이전처럼 참여하게 되었다.
사실, 팔레스틴 서쪽의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페니키아(한글개역 성경은 베니게로
음역함)에서 제일 큰 도시는 시돈이고, 그 다음으로 큰 도시는 시돈의 영광이 쇠퇴할
무렵 번영을 누렸던 두로였다. 이 두로는 지중해 해상 무역을 통해 부와 영광을 축적
했는데, 앗수르 시대에 페니키아의 도시들 중 최고의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역사적으
로 살펴볼 때 두로는 다윗 시대부터 이스라엘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국가로서
극심한 우상 숭배가 성행하던 나라였다. 그들의 우상 숭배 문화는 이스라엘에 유입되
기도 했다(왕상 16 : 31-33). 또한 그들은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영리 추구의 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일으켰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탐욕을 인한 부의 축적
(5 : 8), 이웃에 대한 억압과 탈취(3 : 14, 15), 불공정한 상거래 등은 아마도 두로와
의 무역으로 인한 치부의 모습에서 배운 것 같다. 이러한 이기적 상업주의 정신의 유
입이 초래한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 내의 폐단으로 실로 막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
님은 이러한 허영과 자만으로 가득 창 두로에 대해 심판을 선고함으로써 세속적 지혜
와 부귀의 허무함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다.
한편, 본장은 일부 비평학자들에 의해 이사야의 저작권이 의심받고 있다. 혹자는
1-14절까지만을 이사야의 저작으로 인정하기도 하며. 포흐레르(Fohrer) 같은 학자는
본장에 신앙적인 내용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이사야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장이, 해석에 있어서 몇 가지 난해한 요소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별로 심각한
것은 아니다. 본장 전체는 열방의 예언을 선포하는 이사야의 사상과 문장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으므로 철저히 이사야의 저작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본장은 형식적인 면
에서 17, 18절을 제외한 대부분의 내용이 한 행에 5박자로 된 운율을 갖고 있다. 저자
는 이러한 음악적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더욱 생동감 있게 하나님의 심판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는 본장은 두로의 심판에 대한 예언을 기록하고 있는
전반부(1-14절)와, 두로의 회복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는 후반부(15-18절)로 기록되어
있다. 이제 본장을 두 단락으로 나누어 핵심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두로의 심판에 대한 예언(23 : 1-14)
본문은 팔레스틴 해변 북쪽의 베니게 지방 최남단에 위치한, 고대 항해와 상업의
요충지에 해당되는 두로에 대한 심판 예언이다. 여기서 저자는 두로의 영광과 부에 위
세에 대한 상징으로 언급된 다시스 배들의 슬픈 부르짖음을 통해 두로에 임할 심판을
극적으로 예언하고 있다. 특별히 저자는 돈호법을 사용하여 심판 메시지를 더욱 생생
하게 전달하고 있다. 예를들면, '다시스의 선척들아'(1절), '너희 해변 거민들아'(2
절), '시돈이여'(4절) 등이다. 이처럼 허용과 자만으로 가득 찬(겔 28 : 12-15) 두로
에 대해 경고하는 본 단락의 중심적인 교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본 단락은 두로의 멸망이 파급시킬 효과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2, 3, 5절) :
두로의 멸망 소식은 그들과의 무역을 통해 부요하게 된 지중해 연안의 도시와 나라들
(겔 27 : 5-25)을 경악시켰다. 그 한 가지 예를 들면, 에굽은 두로를 통하여 이전에
나일강 삼각주에서 추수된 곡물과 농산물을 판매하여 큰 이익을 보았으나, 이제는 두
로의 패망으로 이익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두로와 함께 지중해 해상 무역에 참
가하여 부요케 된 지중해 연안의 모든 나라들은 동일한 슬픔을 맛보게 되었다(겔 26 :
18 : 27 : 35). 여기서 선지자는 이 세상의 권력을 의지하는 자들의 허무함을 생생하
게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강대한 세력이라 할지라도 결코 영원한 보호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약 4 : 14).
(2) 본 단락은 패망한 두로의 슬픔을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6-12절) : 선지자는 패
망한 두로의 백성들에게 전에 그들이 지배하며 위세를 떨쳤던 다시스와 깃딤으로 건너
가라(6, 12절)고 권고한 후, 거기서도 환영받지 못할 것을 선언한다. 왜냐하면 전에
자신들을 속박하던 두로를 환영하며 편의를 제공할 나라는 하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
다. 이와 같은 두로의 입장에 대해 저자는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는 여인의 슬픔을 비
유하고 있다. 한때 지중해 연안의 도시 국가들을 지배하던 두로는 이제 대조적으로 지
중해 맨 서쪽 끝에 위치한 다시스로 도망가는 처지로 전락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릴수록 더욱 주의해야 함을 알 수 있다. 만약 자신의 권력
과 힘을 의지하며 교만하게 된다면, 두로처럼 더욱 처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48 : 22 ; 57 : 20 ; 신 28 : 67 ; 빌 4 : 6 ; 벧전 5 : 7).
2. 두로의 회복에 대한 예언(23 : 15-18)
두로의 심판에 대해 예언된 전 단락(1-14절)에 이어서 본문은 두로의 회복에 대한
예언이 시작되는데, 심판에 관계된 예언의 양에 비해 매우 짧게 나타나고 있다. 선지
자는 여기서 갈대아 사람(바벧론)의 손에 의해 멸망당란 두로는 그후 70년만에 다시
회복되어 이전과 같이 지중해 해상 무역을 통해 큰 이익을 얻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다. 그러나 여기 묘사된 두로의 회복은 그리 긍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선지
자는 회복된 두로가 마치 열방을 호리는 기생처럼 세상 열방과 짝하여 음란하게 행한
다고 말한다. 즉 두로의 국가적 면모는 회복되었으나 여전히 부에 대한 세속적 욕망에
사로잡혀 이전의 교만하고(9절 ; 겔 28 : 5, 6, 13-18) 죄악된 생활을 재개한다는 뜻
이다.
그러나 두로는 무역을 통해 얻은 상품과 이익 중 일부를 여호와께 드린다. 왜냐하
면 열국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며 심
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운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예언
의 성취 기사는 예스라 1 : 4 ; 3 : 7에 제시되어 있다. 두로는 바벧론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유다의 백성들이 재건 사업에 착수하자 이전 다윗 시대에 두로 왕 히람이 한
것처럼 필요한 물질을 유다에 공급하였다. 여기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보호에도 불구
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두로의 모습과 함쎄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은
끝까지 반역하는 두로를 변화사켜 참다운 모습으로 만드시는 분이다.
이상과 같이 부의 축적에만 관심이 있었던 두로의 멸망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심각한 경종을 울려 준다. 사실 바울의 말처럼 돈을 사랑함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 그러므로 세상적 부에 지나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게 된다(딤전 6 : 6-10). 그러므로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아는 기독교적 지족 상락(知足常樂)의 원리를 깨닫고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갖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가난하지도 부하지도 않을 만큼 적당한 물질을 주시도록 기도한 아굴의 태도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잠 30 : 8, 9).
두로에 관한 경고라 - 열방들에 관한 경고(* , 마사)는 바벨론에서 시작하여(13장)두로에서 끝난다. 바벨론과 두로는 각각 세계의 대극점(동과 서)에 위치하면서, 세계의 두 힘 곧 권력과 재물을 대표한다. 계 18장에서 이들 두 나라는 영적으로 함께 결합된다. '두로'는 동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고대 페니키아(베니게)의 주요한 네 성읍-아라두스, 비블로스, 시돈, 두로-가운데 하나로 유명한 항구 도시였다. 그 자매 항구인 '시돈'은 약 40km 북쪽에 있다.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두로는 일찍이 바다를 개척하여 지중해를 통한 해상 무역에 활발히 종사하였다. 두로는 이사야 선지자의 때로부터 B.C.322년에 이르기까지 약 5번의 공격을 받았는데, 2번은 앗루르에 의해(느부갓네살), 또 1번은 바사에 의해(아타르크세르크스 3세), 그리고 마지막은 마게노냐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서였다(Oswalt). 본문의 예언이 이중 어느 것과 관련되는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바벨론에 의한 점령이 가장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13절). 두로에 대한 예언으로는 겔 26-28장을 보라.
다시스의 선척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 '다시스의 선척들아'란 말에는 이중의 수사법이 들어 있으니, 그것이 지중해를 오가는 페니키아의 해상 활동을 대표하는 한에서 환유법이요, 또한 그것이 인격화되어 부름을 받는 한에서 돈호법이라 할 수 있다. '다시스'는 스페인의 타르테수스를 가리키는데, 그곳은 두로의 해상 식민지였다(2:16;60:9;왕상 10:22;22:48;시 48:7;겔 27:25;욘 1:3). 다시스를 돌아 고향으로 귀항 중인 선원들에게 슬픈 소식이 전해진다. 그것은 두로가 파멸되어 들어갈 항구도, 쉴 집도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 소식이 들려온 곳은 최종 정박지인 '깃딤' 곧 구브로 섬(Cyprus)이다(창 10:4;렘 2:10;단11:30).
=====23:2
바다에 왕래하는 시돈 상고(商賈)로 말미암아 부유하게 된 - '시돈 상고'는 페니키아의 상인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시돈'은 페니키아를 대표하는 가장 크고 오래된 도시이며(삿 3:3;왕상 16:31), '상고'(* ,소헤르)는 상인, 장사꾼을 뜻한다. 이들은 지중해를 오가며 인접한 나라들의 물건을 중개 무역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덕을 본 나라들이 많았다.
=====23:3
시흘의 곡식 곧 나일의 추수를...열국의 시장이었도다 - 시돈 상고로 대표되는 페니키아의 해상 활동이 구체적으로 예시된다. 이들은 고대 세계의 곡창 지대였던 애굽으로부터 곡식을 사서 이것을 '큰 물' 곧 지중해(시 107:23;겔 27:26)로 운반한 뒤에 곡식을 필요로 하는 나라에 되팔아서 큰 이윤을 남겼다. '시흘'(* )은 나일 강을 뜻하는 애굽어 '예오르'(* , 19:6)의 히브리어 발음이다(수 13:3;렘 2:18).
=====23:4
시돈이여...생육지도 못하였다 하였음이니라 - '바다', 엄밀히 말해서 '바다의 요새'(* , 마오즈 하얌)가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바다의 요새'는 내륙에서 보건대, 섬과 같은 두로를 가리킨다. 두로에게 임한 재난은 시돈으로 대표되는 페니키아 땅에 부끄러움을 강요한다. 왜냐하면 한때 지중해를 석권하며 많은 식민지들을 건설할 두로가 이제 재난을 당하여 모든 것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23:5
그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통도(痛悼)하리로다. 두로의 패망 소식은 애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안겨준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곡물 수출업자들인 그들의 몰락으로 애굽의 경제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겠기 때문이요, 둘째는 동방 국가의 서진(西進)을 저지시켜 주는 방파제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던 두로의 몰락으로 애굽 역시 동일한 군사적 위험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23:6
너희는 다시스로 건너갈지어다...슬피 부르짖을지어다. 적의 포위 공격을받는 두로 거민들에게 가능한 한 멀리 다시스로 도피하라는 동정어린 명령이 주어진다. 알렉산더 대왕이 두로를 포위했을 때 이와 유사한 광경이 벌어졌는데, 늙은이, 부녀자, 어린아이 할 것없이 모두 페니키아의 식민지 중의 하나인 카르타고 (Carthage)로 도피하였다고 한다(Diodorus, Curtius, Justin). 그들의 경제력을 두로와의 해상 교역에 거의 의존하다시피 해온 해변 거민들 역시 두로의 몰락으로 자기들에게 미칠 손실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에 부르짖는다.
=====23:7
이것이 고대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성...유하던 성이냐 - 두로의 어제와 오늘이 대비된다(14:16,17;애 2:15 참조). 선지자는 이것을 놀람이 함의된 의문문의 형태로 표현한다. 두로와 관련된 세 가지 요인이 이 놀람을 더욱 증폭시킨다. 첫째, 두로의 유구한 역사이다.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는 두로의 도성이 약 2,700년의 역사를 가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둘째, 두로의 활력성이다. 이 활력성은 모험성과 진취성이 충만한 상업적 활동에서 기인된 것이며, 두로의 사치와 교만을 반영해주는 것이다. 셋째, 두로의 끝없는 개척 정신이다. 그들은 넘쳐나는 활력으로 먼 데까지 나아가 시장을 개척하는 한편, 카르타고, 다시스 등과 같은 식민지들을 건설하기에 바빴다(Oswalt).
=====23:8
두로에 대하여 누가 이 일을 정하였느뇨 - 히브리어 원문에 이 물음이 문두에 나온다. 실상 이 물음이 8-14절의 주조를 이룬다. 두로처럼 역사성이 깊고, 활력이 충만하며, 개척 정신이 강한 나라가 몰락한 데는 역사의 우연 이상의 더 큰 무엇이 개입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이에 대해 답변하기 전에, 선지자는 두로의 몰락이 주는 충격을 더하기 위해 과거 두로가 국제 사회에서 점했던 위치를 상기시킨다.
=====23:9
세상의 모든 존귀한 자로 멸시를 받게하려 하심이니라 - 직역하면 '땅의 모든 존귀한 자들(* - - , 콜-니크바데-아레츠)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 (* ,레하켈)'이다. 어원적인 면에서 '니크바딤'(* )과 '하켈'(* )은 '무겁다'와 '가볍다'는 대조적인 의미를 갖는다.
=====23:10
딸 다시스여...너를 속박함이 다시는 없으리라 - 두로의 패망은 곧 그 밑에서 속박당해 온 속국들의 해방과 독립의 계기가 된다. 다시스는 그 한 예로서 본문에 언급된다. 구속된 상태에서의 두로와 그 식민지 다시스와의 관계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로 비유된다.
그러나 해방의 그날, 다시스는 어머니의 품을 떠나 어떤 간섭도 받음이 없이 마치 나일 강이 넘쳐서 제멋대로 흐름과 같이 그렇게 자유를 만끽할 것이다(Delitzsch)=====23:11
여호와께서 바다 위에 손을 펴사 열방을 흔드시며 - 두로의 파멸이 전적으로 여호와의 손에 의한 것임을 선지자는 다시 강조하고 있다. 손을 펴시는 여호와의 모습은 선지자 이사야에게 친숙한 이미지이다(5:25;9:12, 17, 21;10:4;14:26;31:3). 그가 바다에 손을 펼치심으로 바다에 의존하던 열방들 곧 독자적으로 자신들의 왕을 섬기고 있던 페니키아의 여러 나라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힌다(Gray)=====23:12
너 학대받은 처녀 딸 시돈아...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 본문의 전체적인 의미는 6절과 유사하다. 한때 순결한 처녀와도 같이 그 부(富)와 명예를 자랑하던 시돈 곧 페니키아가 능욕당하여 모든 즐거움울 상실한 여인의 모습으로 비유된다. 그에게 깃딤으로 도피하라는 권유가 주어진다. 그러나 어디로 가든지 바라는 안식은 찾지 못할 것이다.
=====23:13
갈대아 사람의 땅을 보라...황무케 하였느니라 - 두로를 멸망시킬 도구가 제시된다. 그러나 이 도구가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해 크게 두 가지 견해로 나뉜다. 두로의 파멸이 앗수르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본문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가나안 땅(페니키아)을 보라. 이 나라는 더 이상 존재치 않는다. 앗수르가 그것을 광야로 바꾸어 버렸다. 그들(페니키아인들)은 망대를 세우고 궁전을 건설했으나 그(앗수르)가 그것을 황무케 하였다'(Ewald). 그러나 이것은 과도한 본문 수정을 요구한다.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갈대아 사람이 여기서 언급되고 있다는 견해를 취한다. 이때 그 해석은 다음과 같다:'갈대아 사람(바벨론)의 땅을 보라. 이 백성(지금 거주하고 있는 바벨론인들)은 존재하지 않았다(즉, 원주민이 아니었다). 앗수르가 그것을 광야의 거주자들(전에 유목 생활을 하던 갈대아인들)을 위해 건설하였다. 이 백성(갈대아인)이 망대를 세우고 그녀(두로)의 궁전을 헐었으며 그것을 황무케 하였다'(Alexander, Delitzsch). 언급된 '망대'는 고대 사회에서 포위 공격할 때 사용된 것이다. 후대의 역사가들에 따르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이토발 왕 치하의 두로를 13년간이나 포위했으며(요세푸스, [고대사]) 부왕(父王)의 사망 소식을 듣고 고국 바벨론으로 귀환할 때 수 많은 페니키아의 포로들을 끌고 갔다고 한다(Berosus).
=====23:14
다시스의 선척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으라 - 1절의 반복이다. 슬피 부르짖는 이유도 앞과 유사하다. 즉, '너희 견고한 성'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4절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두로가 견고하 요새(* , 마우즈)로 묘사된다. 수미 쌍관의 형식으로 두로에 대한 비극적인 예언은 종결된다. 이하에서 선지자는 두로의 회복을 노래한다.
=====23:15
그 날부터 두로가...기생 노래의 뜻 같이 될 것이라 - 본문에서 선지자는 두로를 기생에 비유하니, 이는 물건을 사고 파는 상업 도시의 면모가 노래와 몸을 파는 기생과 비슷한 데가 있기 때문이다(17절). 이 기생은 일정한 기간 동안 손님으로부터 잊어버림이 되었다가 70년이 지난 뒤, 다시 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언급된 70이란 숫자는, '7(하나님의 사역을 가리키는 수)X10(완전을 가리키는 수)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도대로 일을 성취시켜 나가는 충만한 때를 상징하는 말로 봄이 무난하다(단 9:24). 실제로 70년이란 기간은 바벨론 유수의 시한과 일치한다(대하 36:21;렘 25:12;29:10;단 9:2;슥 1:12).
=====23:16
잊어버린 바 되었던 기생 너여...다시 기억케 하라 - '기생 노래'의 가사가 일부 소개 된다. 이는 선지자의 예언을 보다 생생하고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한 것이다. 노래의 내용은 사람들로부터 잊혀진 한 기생이 다시금 옛 명성을 되찾고 인기를 회복하기 위해 기묘한 곡조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다. 이는 항간에 유행하던 소곡에서 따온 표현인 듯하다(Dillmann).
=====23:17
여호와께서 두로를 권고하시리니 - 직역하면 '여호와께서 두로를 방문하실 것이니'이다. 두로의 멸망이 여호와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면, 그 회복 또한 여호와의 은총으로부터 기인됨을 말하는 것이다.
=====23:18
그 무역한 것과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리고 - 직역하면 '(그녀의) 소득과 (그녀의) 보수가 여호와께 거룩히 여김이 될 것이며'이다. '하나님께 거룩히 여김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뜻이다. 이때 '열방과 음란한 행위를 해서 번 돈이 하나님께 바쳐질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왜냐하면 율법은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하나님께 가져오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다'(신 23:18)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는 두로에게 적용된 '기생'이라는 말이 상업 활동에 종사하는 두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Oswalt). 상행위 자체는 근본적으로 악하지 않다. 다만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됨'(딤전 6:10)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13장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는 본장에서 당시 해
상 무역을 통해 치부한 두로에 대한 심판 예언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본장에는 두로에 대한 심판 예언뿐 아니라 심판받은 지 70년만에 찾아올 두로의 회복
에 대해서도 예언되었다. 이 같은 두로의 심판에 대한 예언은 에스겔 26-28장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그런데 본장에 드러난 두로의 멸망에 관한 예언은 아마도 B.C.
605년경에 바벧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한 두로 공략 사건을 예언한 것으로 보인다(13
절). 그때 두로는 이토발 3세(Ittobaal III)의 치하에서 13년 동안이나 바벧론에 대항
하였지만 팔레스틴 땅 지중해 연안에 붙어 있던 두로가 점령당했을 때 그 힘은 완전히
쇠약되고 말았다. 그러나 두로는 그로부터 70년 후인 바벧론 제국의 말기에 다시 회복
되어 지중해 해상 무역에 이전처럼 참여하게 되었다.
사실, 팔레스틴 서쪽의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페니키아(한글개역 성경은 베니게로
음역함)에서 제일 큰 도시는 시돈이고, 그 다음으로 큰 도시는 시돈의 영광이 쇠퇴할
무렵 번영을 누렸던 두로였다. 이 두로는 지중해 해상 무역을 통해 부와 영광을 축적
했는데, 앗수르 시대에 페니키아의 도시들 중 최고의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역사적으
로 살펴볼 때 두로는 다윗 시대부터 이스라엘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국가로서
극심한 우상 숭배가 성행하던 나라였다. 그들의 우상 숭배 문화는 이스라엘에 유입되
기도 했다(왕상 16 : 31-33). 또한 그들은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영리 추구의 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일으켰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탐욕을 인한 부의 축적
(5 : 8), 이웃에 대한 억압과 탈취(3 : 14, 15), 불공정한 상거래 등은 아마도 두로와
의 무역으로 인한 치부의 모습에서 배운 것 같다. 이러한 이기적 상업주의 정신의 유
입이 초래한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 내의 폐단으로 실로 막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
님은 이러한 허영과 자만으로 가득 창 두로에 대해 심판을 선고함으로써 세속적 지혜
와 부귀의 허무함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다.
한편, 본장은 일부 비평학자들에 의해 이사야의 저작권이 의심받고 있다. 혹자는
1-14절까지만을 이사야의 저작으로 인정하기도 하며. 포흐레르(Fohrer) 같은 학자는
본장에 신앙적인 내용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이사야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장이, 해석에 있어서 몇 가지 난해한 요소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별로 심각한
것은 아니다. 본장 전체는 열방의 예언을 선포하는 이사야의 사상과 문장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으므로 철저히 이사야의 저작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본장은 형식적인 면
에서 17, 18절을 제외한 대부분의 내용이 한 행에 5박자로 된 운율을 갖고 있다. 저자
는 이러한 음악적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더욱 생동감 있게 하나님의 심판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는 본장은 두로의 심판에 대한 예언을 기록하고 있는
전반부(1-14절)와, 두로의 회복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는 후반부(15-18절)로 기록되어
있다. 이제 본장을 두 단락으로 나누어 핵심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두로의 심판에 대한 예언(23 : 1-14)
본문은 팔레스틴 해변 북쪽의 베니게 지방 최남단에 위치한, 고대 항해와 상업의
요충지에 해당되는 두로에 대한 심판 예언이다. 여기서 저자는 두로의 영광과 부에 위
세에 대한 상징으로 언급된 다시스 배들의 슬픈 부르짖음을 통해 두로에 임할 심판을
극적으로 예언하고 있다. 특별히 저자는 돈호법을 사용하여 심판 메시지를 더욱 생생
하게 전달하고 있다. 예를들면, '다시스의 선척들아'(1절), '너희 해변 거민들아'(2
절), '시돈이여'(4절) 등이다. 이처럼 허용과 자만으로 가득 찬(겔 28 : 12-15) 두로
에 대해 경고하는 본 단락의 중심적인 교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본 단락은 두로의 멸망이 파급시킬 효과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2, 3, 5절) :
두로의 멸망 소식은 그들과의 무역을 통해 부요하게 된 지중해 연안의 도시와 나라들
(겔 27 : 5-25)을 경악시켰다. 그 한 가지 예를 들면, 에굽은 두로를 통하여 이전에
나일강 삼각주에서 추수된 곡물과 농산물을 판매하여 큰 이익을 보았으나, 이제는 두
로의 패망으로 이익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두로와 함께 지중해 해상 무역에 참
가하여 부요케 된 지중해 연안의 모든 나라들은 동일한 슬픔을 맛보게 되었다(겔 26 :
18 : 27 : 35). 여기서 선지자는 이 세상의 권력을 의지하는 자들의 허무함을 생생하
게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강대한 세력이라 할지라도 결코 영원한 보호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약 4 : 14).
(2) 본 단락은 패망한 두로의 슬픔을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6-12절) : 선지자는 패
망한 두로의 백성들에게 전에 그들이 지배하며 위세를 떨쳤던 다시스와 깃딤으로 건너
가라(6, 12절)고 권고한 후, 거기서도 환영받지 못할 것을 선언한다. 왜냐하면 전에
자신들을 속박하던 두로를 환영하며 편의를 제공할 나라는 하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
다. 이와 같은 두로의 입장에 대해 저자는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는 여인의 슬픔을 비
유하고 있다. 한때 지중해 연안의 도시 국가들을 지배하던 두로는 이제 대조적으로 지
중해 맨 서쪽 끝에 위치한 다시스로 도망가는 처지로 전락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릴수록 더욱 주의해야 함을 알 수 있다. 만약 자신의 권력
과 힘을 의지하며 교만하게 된다면, 두로처럼 더욱 처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48 : 22 ; 57 : 20 ; 신 28 : 67 ; 빌 4 : 6 ; 벧전 5 : 7).
2. 두로의 회복에 대한 예언(23 : 15-18)
두로의 심판에 대해 예언된 전 단락(1-14절)에 이어서 본문은 두로의 회복에 대한
예언이 시작되는데, 심판에 관계된 예언의 양에 비해 매우 짧게 나타나고 있다. 선지
자는 여기서 갈대아 사람(바벧론)의 손에 의해 멸망당란 두로는 그후 70년만에 다시
회복되어 이전과 같이 지중해 해상 무역을 통해 큰 이익을 얻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다. 그러나 여기 묘사된 두로의 회복은 그리 긍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선지
자는 회복된 두로가 마치 열방을 호리는 기생처럼 세상 열방과 짝하여 음란하게 행한
다고 말한다. 즉 두로의 국가적 면모는 회복되었으나 여전히 부에 대한 세속적 욕망에
사로잡혀 이전의 교만하고(9절 ; 겔 28 : 5, 6, 13-18) 죄악된 생활을 재개한다는 뜻
이다.
그러나 두로는 무역을 통해 얻은 상품과 이익 중 일부를 여호와께 드린다. 왜냐하
면 열국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며 심
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운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예언
의 성취 기사는 예스라 1 : 4 ; 3 : 7에 제시되어 있다. 두로는 바벧론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유다의 백성들이 재건 사업에 착수하자 이전 다윗 시대에 두로 왕 히람이 한
것처럼 필요한 물질을 유다에 공급하였다. 여기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보호에도 불구
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두로의 모습과 함쎄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은
끝까지 반역하는 두로를 변화사켜 참다운 모습으로 만드시는 분이다.
이상과 같이 부의 축적에만 관심이 있었던 두로의 멸망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심각한 경종을 울려 준다. 사실 바울의 말처럼 돈을 사랑함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 그러므로 세상적 부에 지나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게 된다(딤전 6 : 6-10). 그러므로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아는 기독교적 지족 상락(知足常樂)의 원리를 깨닫고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갖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가난하지도 부하지도 않을 만큼 적당한 물질을 주시도록 기도한 아굴의 태도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잠 30 : 8,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