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시편 022장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 이 표현은 고통의 심연(深淵)에서 울부짖는 듯한 외침이다. `어찌'란 표현은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드러낸다. 그런데 이 부르짖음은 단순히 절망만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과 소망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내 하나님...내 하나님' 이란 표현 자체가 바로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고있다. 즉, `내 하나님이여'라는 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를 다윗 자신에게 적용한 것으로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므로 `나는 당신의 도움과 구원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Kraus, Rawlinson). 그리고 본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인용하신 구절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는 마지막 순간까지 언약의 하나님의 신실성을 끝까지 바라보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Delitzsch). 한편, 본구절의 히브리어는 `엘리 엘리 라마 아자브타니'인데, 주께서 인용하신 구절에는 `아자브타니'(* )가 `솨바크타니'(* )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내용상의 차이가 있는것은 아니며, 단지 그리스도께서 아람어를 사용하신 까닭에 이 같은 차이가 있게 된 것뿐이다. 어찌 나를 멀리하여...듣지 아니하시나이까 - 원문에는 `어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마'(* )가 앞의 구절에만 속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개역 성경에서는 두 번의 부정문이 사용되었으나, 원문에는 `아니'에 해당되는 부정어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 혹자는 본 구절을 `나의 구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내가 신음하는 소리를 냅니다'로 번역한다(Rawlinson, Briggs, Delitzsch). 그러나 대부분의 영역 성경이 개역 성경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그 이유는 `어찌하여' 나 `아니'란 용어가 단순히 앞 구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본 구절과도 연결된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역 성경과 같은 번역이 다윗의 탄식을 극대화시킬 뿐만 아니라 문장 구조상으로도 적절하다.

=====22:2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 본 구절은 끊임없는 부르짖음과 애통함을 표현한 것이다. 이와같이 계속적인 탄식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시지 않고 있는 사실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여기서 `잠잠함'은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완전한 체념을 상징한다. 그러나 잠잠치 아니했다고 하였으니, 이는 체념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소망했음을 보여준다(Lange).

=====22:3
이스리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 여기서 다윗은 고통중에서도 불평하지 않는 신앙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는 설혹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으실지라도 역시 거룩하신 분이시라고 찬송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이란 80:1; 99:1 의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이란 표현과 매우 유사하다. 다윗은 그룹위에 좌정하셔서 그룹의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 위에 계셔서 그 백성의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과 연관지은 것 같다. 또한`거룩하시니이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과 절대적으로 구별되이 계신 분임을 나타낸다. 이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은 기도에 대한 응답을 지체 하실지라도 여전히 세속과는 완전히 구별되신 존귀하신 분이다'라는 의미이다(Kraus, Delitzsch, Rawlinson).

=====22:4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건지셨나이다 - 열조들의 신앙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이 반복적으로 강조되어 있다. 이와 같은 은혜스러운 과거를 회상함으로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더욱 굳게 하고 있다(Rawlinson). 다시 말해서 그는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 곧 전능하신 능력을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발견한 것이다(Kraus).

=====22:5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 이는 구원의 근거로서 부르짖음에 대한 강조이다. 다윗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구원의 근거가 부르짖음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재발견했다. 그런뎨 본 구절이 어떤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진술인지는 분명치 않다.

=====22:6
하나님의 잠잠함에 대해 신앙적으로 항의한 다윗이 이제 인간들로부터 받은 수치를 호소하고 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 인간으로서의 모든 존귀함이 짓밟히고 있으므로 다윗은 자신을 벌레에다 비유하고 있다. 여기서 `벌레'라는 말은 인간의 모든 존엄성의 상실을 상징하며 아울러 죽음 직전의 절박한 상태를 암시하기도 한다(사 14:11).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한 그리스도께 적용될 수 있는 구절이다(사 49:7; 52:14; 53:3).

=====22:7
입술을 비쭉이고 - `비쭉이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타르'(* )는 `열다'는 뜻으로 이는 입술을 벌려 조롱 한다는 의미이다(35:21; 요 16:10).
머리를 흔들며 - 이는 조롱의 몸짓이다(44:14; 64:8).
이러한 조룽의 몸짓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했던 무리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마 27:39)=====22:8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 여기서 `의탁하니'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골'(* )은 `굴려버리다'는 뜻으로 이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짐을 맡김을 의미한다. 그러나 악인들은 다윗을 조소하기 위해 이 말을 사용했을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 악인들은 그들 안에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이와같은 사실은 다윗을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을 것이다(Craigie).

=====22:9
주쩨서...의지하게 하셨나이다 - 이 순간에 다윗은 큰 모순을 발견하고서 애통하고 있다. 즉, 출생의 순간부터 다윗은 하나님께 맡겨진 존재였으나 지금은 커다란 고난 중에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과거의 모든 신앙의 경험들은 지금 원수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기에 그가 느낄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다는 사실 뿐이었다.

=====22:10
본절은 9절과 평행 대구를 이루고있다 - 다윗이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을 의지했던 사실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이런 표현 기법을 사용했는데, 이는 그런 신앙에 따라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하나님께서 속히 해결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암시한다 =====22:11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 다윗은 탄식에서 간구로 하나님께 대한 자세를 바꾸고 있다. 그는 절망 중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았기에 하나님을 향해 간구할 수 있었다.

=====22:12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 악인들이 황소에 비유되고 있다. 팔레스틴의 황소들은 아주 난폭하며 야성적이라고 알려져 있다(Rawlinson).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 바산은 갈릴리 바다 북동쪽에 위치한 광활한 평야로서 팔레스틴에서 가장 비옥한 목초지였으며 이곳의 소들은 대단히 힘이 세었다. 따라서 바산의 소들은 힘센 자를 상징한다(신 32:14; 암 4:1). 따라서 본절 전체는 다윗의 대적들이 얼마나 난폭하며 강한 자인지를 암시해 준다.

=====22:13
부르짖는 사자 - 이에 대해서는 10:9 주석을 참조하라. 사자의 포효(咆哮)가 모든 들짐승에게 두려움을 주듯이 다윗의 대적들도 다윗을 삼키기 위해 큰 위협을 가하였음을 알 수있다.

=====22:14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 이는 다윗이 대적들의 핍박으로 인하여 완전히 탈진한 상태를 의미한다(수 7:5; 겔 7:17; 21:12).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 본 구절은 모든 뼈들이 연결되지 않았다는 뜻으로서 다윗 자신이 대적들의 위협 앞에 무기력하게 되었다는 표현이다.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 여기서 다윗은 자신이 육체(뼈)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탈진해 버렸음을 보여 주고 있다. `속'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아'(* )는 주로 (1) 사람의 내장, (2) 남녀의 생식 기관, (3) 감정의 자리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3)의 의미로 사용된 것 같다.

=====22: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 원수들의 위협 앞에서 극도로 허약해진 다윗 자신이 마치 쉽게 부숴지는 질그릇 조각과 같이 회생(回生)불능의 상태에 빠져 있음을 보여 준다.
내 뼈가 잇틀에 불었나이다 - 이런 다윗의 처지는 극도로 피곤함의 결과이다(69:3) 이와같이 `내가 목마르다'(요 19:28)는 그리스도의 외침 역시 극도의 탈진 상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 다윗은 자신의 영육간의 상태를 점층법적으로 묘사해 오면서 본 구절에서는 죽음 직전까지 몰린 절박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죽음을 진토에다 비유한 것은 인간이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성경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창 3:19).

=====22: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 악인들이 개에 비유되고 있다. 개는 율법에서 금지한 죽은 고기를 먹으며 물고 뜯는 잔인성을 가지고 있기때문에(59:7, 15; 왕하 9:35, 36; 렘 15:3)속된 자. 또는 악한 자에게 비유되었다.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 다윗의 대적들은 그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에워 싸고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대적들이 기회만 있으면 그를 공격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 `찔렀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히키푸니 카아리'(* ) 어원에 따라서 달리 해석될 수 있다. 즉 `카아리'는 `사자같이'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며, 또한 `히키푸니'는 `에워싸다'란 의미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본 구절은 `내 수족을 사자같이 에워쌌나이다'로 번역된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개들'이 언급되었기 때문에 사자가 개와 대비되어 여기에 등장한다는 것은 부자연 스럽다. 또한 둘러싸는 행동은 사자에 의한 것이기 보다는 개들에 의한 것으로 보여 진다(Briggs). 왜냐하면 사자는 무리를 지어서 먹이를 좇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번역은 타당치 않다. `카아리'는 `파다', `꿰뚫다'는 뜻의 동사 `카라'(* )에서 유래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의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형벌에 적용 될 수 있다. 더욱 이 대부분의 영역 성경도 이 견해를 따라 번역했다. 따라서 이 견해를 취하는 것이 무난하다(Calvin, Delitzsch, Hengstenberg).

=====22: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 내용상 이 구절은 14절의 `내 모든 뼈는 어그러 졌으며'와 유사한 구절로서 극도로 쇠약해진 다윗의 모습을 묘사해 주고 있다. 즉 다윗의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피골이 상접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Calvin, Delitzsch ,Lange, Rawlinson).
저희가 보고 - 여기서 `보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아'(* )는 특별히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보다'라는 의미를 가진다(TWOT). 따라서 이 말은 저희가 다윗의 불행에 대하여 흥미를 느끼고 그를 바라보았음을 시사해 준다(Delitzsch).

=====22: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 본 구절은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는 구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의 생애에 이와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고 하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복음서의 저자들은 로마 군인들의 행위를 통해 이 예언이 그리스도에게 직접 성취되었음을 기록하고있다(마 27:35; 요 19:24. Rawlinson).

=====22:19
본절에서는 다윗의 탄식시에 전형적으로 언급되었듯이 또다시 절박한 상황 중에서낙심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다윗의 기도 장면이 언급되고 있다.
나의 힘이시여 - `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얄루트'(* )는 힘의본질, 또는 힘의 원천을 뜻한다 (Delitzsch). 이처럼 다윗은 극한 상황에서도 힘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잊지 않고 찾았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

=====22:20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 여기서 `칼'은 죽음의 세력에 대한 상징적 표헌이다. 이와 흡사한 기도의 내용을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신 그리스도의 기도에서 발견할 수 있다(마 26:39; 눅 22:42).
내 유일한 것 - 이는 영혼을 뜻한다. 이 영혼이 `유일한것'으로 표현된 까닭은 지금 다윗이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외로운 형편에 있기 때문이다(Calvin).
개의 세력 - 악한 무리들을 상징한다. 이에 대해서는 16절 주석을 참조하라.

=====22:21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 여기서 사자는 개와 같이 악인들을 상징하는 말일 수도 있으나 보다 본질적으로 악인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사단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Lange, Rawlinson). 이와 마찬가지로 신약 성경에서도 사단이 우는 사자에 비유되었다(벧전 5:8; 계 10:3).
들소 뿔에서 - 여기서 `들소' 나 `바산의 힘센 소들'을 가리킨다(12절).

=====22:22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 `주의 이름'은 하나님의 임재와 그로 인한구원의 역사를 강조하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는 20:1 주석을 참조하라. 그리고 `형제'는 여호와를 경배하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의미한다. 한편, 본절은 히 2:12에서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구절인데, 이 경우에 형제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을 일컫는다.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 `회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할'(* )은 회집된 이스라엘 공동체를 의미하는 말이다(35:18; 출 16:3; 레 4:13-21; 민 10:7; 15:15; 20:6). 이들의 특성은 여호와를 찬송하며 경배하는 것이다.

=====22:23
본절에 언급된 세 구절은 서로 평행 대구를 이루고 있다 - 여기서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해야 함을 강조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그렇게 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고 의지하는 자를 버리지 않으시며 환난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기 때문이다(21절).

=====22:24
그는...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 이 구절에서 우리는 다윗이 이미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체험했음을 엿 볼 수 있다. 즉, 전에는 밤낮으로 기도하여도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으나(2절), 이제는 하나님의 응답을 이미 체험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체험이 그에게 찬송의 근거가 되고 있다(Kraus, Craigie). 한편 `곤고한 자의 곤고'에서 `곤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니'(* )는 `가난'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용어이다. 하지만 가난의 의미는 본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 여기서 `아니'(* ) 는 앞에서 다윗의 호소한 바 있는 극도의 고통을 의미하는 말이다(1, 14-17절).

=====22:25
대회 - 문자적으로는 `큰 회중'(* , 카할 라브)이다. 이는 절기 때에 모인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數)를 가리킨다(Kraus).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 이는 찬송시 내용을 일일이 하나님께로 부터 계시받아 작성하였다는 뜻이 아니고 그의 찬송의 모든 근거가 하나님께 있다는 뜻이다. 즉, 구원의 근거가 오직 하나님께 있으며 바로 이러한 사실에서부터 그의 찬송이 흘러나오게 되었다는 말이다(Briggs, Lange).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 다윗은 고난 중에 감사제(레 7 :15, 16)를 서원한 것 같다(Lange, Kraus). 이제 모든 고난에서 벗어난 후, 다윗은 이전의 서원을 갚고자 했다. 그런데 혹자는 `서원'을 단순히 헌신과 일치시켜 생각하였으나(Rawlinson), 이는 다음 절에 기록된 감사제의 의식들에 비추어 볼때 비합리적이라고 보여 긴다.

=====22:2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 `겸손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윔'(* )은 24절의 `곤고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니'(* )의 복수형으로 여기서도 `곤고한 자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곤고한 자는 악인에게 억압받는 의인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후자는 `아나윔'을 `가난한 자'로 번역하여 다윗이 과부나 고아등 가난한 자들을 초청해 이 감사제에 동참하게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Delitzs ch, Lange). 그러나 본 구절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라는 예수의 말씀과 일맥 상통하는 것으로 이해돤다.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 다윗이 의를 끝까지 좇은 자들에게 복을 비는 장면이다. 한 조각의 음식이 저들의 마음을 영원히 살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앞 구절과 함께 영적으로 해석되어야 향다. 그래서 혹자는 이 구절을 주의 성만찬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당하신 희생의 살과 피를 나누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에 대한 예언으로 본다(Delitzsch, Rawlinson). 그러나 본 구절은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본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의의 원리를 따를 때 영혼이 소생할 것을 예표하는 구절이기도 하다는 것이다(렘 15:16; 겔 3:1-3, Lange). 이렇게 볼 때 `너희'는 단순히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들, 곧 경건한 무리들을 가리키는 것이다(Kraus). `여호와를 찾는자' 란 표현이 그와 같은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22:27
본절에서 부터 마지막 절 까지의 내용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시대를 예고 하고 있는부분이다. 이로써 우리는 다윗이 자신의 경험만을 기록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경험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을 본시에서 예언적으로 기록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Delitzsch, Lange, Rawlinson).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 `땅의 모든 끝'은 지구 전체를 포괄하는 구절이며(2:8; 67:7; 72:8; 사 45:22; 52:10), 특별히 이 표현은 이방인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 세 이방인들은 우상 섬김으로 잊어버렸던 여호와를 기억하고 이전의 무지함에 대해 회개할 것이다. 여기서 `돌아온다'는 말은 곧 회개의 행위를 의미한다(Briggs).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 위의 구절을 보다 구체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본 구절은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창 12:3 ; 28:14).

=====22:28
나라는...열방의 주재 - 여기서 `나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멜루카'(* )는 `왕권'(royalty)이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주재'라는 용어가 뒤이어 나오기 때문에 본절에서 `나라'란 표현보다 `왕권'이란 표현이 더 적합하다. 즉, 이 왕권은 온 세상에 대한 왕권이다. 이는 이방의 나라들이 여호와께 돌아옴으로 말미암아 그의 통치하에 있게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왕권에 의해하나님은 `열방의 주재'로 경배 받게 된다. 한편 여기서 `열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고임'(* )은 특별히 이방 민족을 가리킬 때 사용된 용어이다.

=====22:29
세상의 모든 풍비(豊備)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여 - 이는 아무런 차별없이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게 될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 `풍비한 자'란 세상에서 부요한 자, 또는 나라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이나 나라도 그리스도의 시대에는 하나님 나라에서 제의되지 아니할 것이다(Hengstenberg, Briggs, Lange, Delitzsch). 한편, 여기서 또다시 `먹는다'는 말이 언급되어 있는데 조절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는 영적인 양식을 먹음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Delitzsch, Lange). 여기서 이들의 먹는 행위가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관련되어 진술되고 있다. 즉, 이 표현은 세상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만찬에 초대되어 함께 먹으며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을 암시하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옴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구원의 양식'(영적인 양식)을 먹은 부요한 자들이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게 될 것임을 예언한 구절이다.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 - 이에 대해 학자에 따라 견해가 서로 다르다. (1) 죽을 수 밖에 없는 모든 인간으로 간주하는 견해이다(Rawlinson) 이 견해에 따르면, 한번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 인간들이 생명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무롸을 굻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보여준다. (2) 이미 죽은 자로 해석 하는 견해이다(Kraus, Knight). 이는 그리스도의 시대에는 죽은 자들도 죽음의 세계에서 라도 그에게 절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3) 죽어가는 나라를 비유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견해이다(Briggs). (4) 앞의 `풍비한 자'와 대조적으로 가난한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Delitzsch, Lange). 여기서 (1)의 견해는 `풍비한 자' 에 대한 진술 이후에 모든 사람을 언급하게 된 이유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그리고 (2)의 견해도 타당치 않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에는 사후(死後)의 세계에서는 종교적 활동이 중지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6:5; 88:10-12). 따라서 죽음의 세계에 있는 사자(死者)들이 그리스도께 절한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생각될 수 없었던 일이었다. (3)의 견해 또한 받아 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본절은 나라에 대한 언급 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언급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4)의 견해를 취해야 할 것이다. 그 까닭은 본절 전체가 부요한 자든 가난한 자든 누구나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진토'는 `죽음'의 의미가 아니라 가장 `천한 곳'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란 가난과 질병으로 스스로 살 수 없는 자, 즉 거의 죽어가는 인생을 의미할 것이다(사 9:1-4).

=====22:30
후손이 그를 봉사할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 여기서 `후손'은 직접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믿음의 자손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은 죽어도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히 지속될 것임을 바라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본구절은 모든 인간이 죽음을 피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은 대대로 선포될 것임을 다윗이 깨달았다는 말이다(Craigie).

=====22:31
와서 그 공의를 장차 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 이는 한 세대가 새로 오는 다른 세대에게 구원의 도(道)를 전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저들이 전하는 `공의' 란 하나님께서 고난 당하는 자신의 종을 보호하시고 악인들에게서 건지신 의로운 행위를 의미한다(Briggs).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 `이를 행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을 가리킨다. 즉, 이 구절은 최종적으로 본시를 마무리 짓는 구절로서 고난 당하는 다윗을 구원하신 개인적 사건 뿐만 아니라 모든 족속과 나라들을 구원해 내신 하나님의 구원의 전역사(全役事) 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Briggs). 그런데 이 하나님의 구원의 전역사는 본시에서 예언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통해 인류의 역사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우주적인 구원의 전 역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메시야의 고난과 승리를 예표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본시는 (1) 버림받은 자의 고통
스러운 탄식이 드러나 있는 전반부(1-8절), (2) 두려운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간구가 나타나 있는 중반부(9-21절), (3) 응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선포
되고 있는 후반부(22-31절)로 구성되어 있다.
  본 시는 다윗이 사울에게 박해를 받으며 온갖 수난을 당하는 상황 속에서 쓰여진 것
이다(삼상 23:24-29). 이 시기에 다윗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고통을    받았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매우 극심한 고난 가운데 처해 있었음은 사실이다.    다윗은    자신에게
임한 무서운 재난을 목격하면서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을 완전히 버린 것으로 낙심하였
다. 이러한 자신의 심정을 다윗은 본시에서 처절하게 묘사하였다.
  이러한 본시편은 신약 성경에 의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예수님께서는  십자
가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고통을 표현할 때 본시에 나타난 다윗의  울부짖음을
사용하셨다(마 27:46;막 15:34). 또한 본시의 첫 번째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일치하고 있는데, 십자가에 못박혀서 손과 발에 그 심한 통증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모
습이 문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14-17절). 아울러 십자가 상의 주님을 비웃는  무리들
이 주님의 옷을 찢어 나누어 가지고, 그 속옷을 소유하기 위하여 제비뽑기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18절;마 27:35). 본시의 두 번재 부분은 예수님께서 부활을  통
하여 성취하게 된 결과와 일치한다. 예수님께서 사망을 정복하시고 인종과 민족을  초
월하여 모든 신자의 구원을 성취하셨음을 분명하게 드러난다(27, 28절;빌 2:10, 11).
  이상을 통하여 볼 때 본시는 다윗의 삶과 감정에 기초한 내면적이고 서정적인  고백
이지만 동시에 메시야의 고난과 구원의 역사를 예표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다시 말하
며면 다윗의 심령 속에 경험되었던 고통과 구원을 통하여 메시야의 비하(卑下)와 승귀
(昇歸)를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신정국(神政國) 이스라엘이 왕 다윗은 예수  그
리스도의 참된 모형이다. 기름부음 받은 자신 다윗은 왕위에 오르기 전 예수 그리스도
의 고난과 유사한 환난을 경험했다. 다윗이 겪은 극도의 고통은 인간의  한계  상황을
넘어선 신적 아픔으로서 메시야의 대속덕 고난을 상징화한다. 또한 다윗의 영화와  존
귀는 인간 세상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최상의 축복으로 메시야의 영과을  예표한
다. 이같이 본시는 다윗과 관련하여 사용된 수사학적인 과장법을  활요하여    메시야의
사역을 효과적으로 예언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인하여  그
리스도 안에서 역사를 미리 조망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성령님은    다윗의    현실적인
고통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미래에 받은 수난을 미리 예시하셨다. 그러므로 본시는  다
윗의 체험을 통하여 오실 메시야를 예표하는 전형적인 예표시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
다.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본시를 감상할 때 우리는 본 작품에 담긴 의미와 정취를 더
욱 감동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본시는 내용상으로 볼 때 '비탄시'로 분류될 수 있다. 본시는  다양한  감정과
내용이 복합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학자에 따라서 '기도시', '감사시', '찬양시'  등
으로 주장되기도 한다. 또한 본시가 내용에 의해  비탄(1-21절)과  찬양(22-31절)으로
명확히 구분되므로 두개의 독립된 시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본시는 비탄에서  출
발하여 기도롤 나아갔다가 찬양과 감사로 귀결되는 단일한 시로서 전형적인    비탄신의
유형을 따르고 있다.
  이제 본 시편의 내용을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어 각각의 내용적 특성과 주도적  사상
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버림받은 것같이 된 자의 탄식(22:1-8)
  본 대목은 그 유명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에서의 외침인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
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로 시작하고 있다.  이와같이
본문에는 '나'라는 말이 계속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서 '나'는 밤낮 부르짖어
도 응답받지 못하는 '나'이며(2절), 인간으로서의 모든 존귀함을 짓밟히고 있는  '나'
(6절), 사람들에게 조롱과 수치를 있는 '나'이다(7, 8절). 그런데 이처럼 불행한 '나'
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그 궁극적인 원인은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
았다는 사실에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다윗은 시의 초두부터 절마의 심연 속에서
절망스러운 탄성을 발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인생들의 비극적인  종말
적 외침을 들을 수 있다. 이와 같은 비극적인 외침은 십자가 상의 그리스도에게서  재
연(再演)된다. 그리스도는 온 인류를 대표하여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절망을 십자가 위에서 부르짖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탄식을 하지 않아도 될 의로운 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의 탄식을 자원하셨다.
  한편,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라는 이 탄식은 단지 하나님께 자신의 고난
만을 털어놓고 불평하는 식의 부정적인 성격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와 더불어 이
탄식은 하나님에 대한 변함없는 의지와 신뢰를 나타내고 있다. 즉,'내 하나님이여' 라
는 부르짖음은 내가 비록 지금은 고통을 당하여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의 하나님으로서 도움과 구원을 베푸실 것을 역설적으로    확신하는
고백이다. 그러므로 본 대목에 나타난 탄식은 다윗의 경우건 그리스도의 경우건  모두
다 하나님에 대한 불변의 믿음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다윗이 고난에서 구원받은 사실이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사실
은 모두 불변하는 믿음의 결과였음을 자각할 수 있다.

  2. 지독한 환난 중의 간구(22:9-21)
  극심한 고통으로 인한 다윗의 탄식에 이어지는 본 대목은 (1)모태에서 나오게  하신
여호와에 대한 신뢰(9-11절), (2)원수들에 의해 고통받는 현실에 대한 호소(12-18절),
(3) 고난 중에서 주의 도움을 간구함(19-21절)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고난의 사람 다윗은 과거와 현실의 모순 속에서 괴로워하며 울부짖는다.  그
는 과거 출생 때부터 하나님의 보호 안에 있었다. 그는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에  의
해 선택된 자엿고 하나님의 지극한 돌보심 가운에 세상에 태어났다(9, 10절).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다윗이 직면한 상황은 과거에 베풀어진 하나님의 언약적 선택과  인
도를 전혀 발견할 수 없는 참담한 입장이다. 잔인한 원수들이 많은 황소나 바산의  힘
센 소들과 같이 그를 죽이려고 덤벼들고 있으며(12, 13절) 고통과 질병으로 그의 모든
영과 육은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렀다(14, 15절). 또한 개와 같은 원수들은 원수들은
그의 수족을 찔렀으며 피골이 상접한 육체는 뼈를 셀 수 있을 정도였다(16, 17절). 아
마도 이보다 더한 고난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다윗의 극심한 고통은 바로  예
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본문의 기록은  한편으로는  다윗의
고난을 묘사하고 있지만 종국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엄청난 수난을 예언한 것이다.그
리스도는 처음부터 거룩하신 분이요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당신의 본질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고난과 연약함을 자발적으로 체휼하셨다. 그리스
도의 고난의 실상에 대해서 우리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그분의 고난
은 결코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이 고난으로 인해 결국 죽음을 당하시고
말았지만 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으며 하나님의 모든  권세를  부여바도(마
28:18)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모든 자들로부터 경배를 받게  되셨다(빌  2:9,
10).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일지라도 세상에서 여러  가
지 고난을 만나게 될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구원받은 성도가 이 세상에서  고
난을 당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품에 안길 수만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
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치 않을 때가 많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 많은  모순을  보며
괴로워하게 된다. 그럴 때라도 성도는 그리스도의 의로우신 수난을 기억하면서 인내해
야 할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의 수난이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면그리스도
께 속한 제자들의 의로운 고난도 반드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근거가  되
는 것이다(빌 3:10, 11;약 1:2;벧 1:6).

  * 본 시에 나타난 예언의 성취.  본시의 내용이 신약에서 성취된    사례들을  도표로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
|         시 22편            |          복음서           |
| ----+---------------------------------+----------+---------------------------+
|1절  |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마 27:16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     | 나를 버리셨나이까        | 막 15:34 |                   |
|     |                 |       |                   |
|7절  |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 마 27:39 |   자기 머리를 ...모욕하여 |
|     |                 | 막 15:29 |                   |
|     |                 |       |                   |
|8절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시    | 마 27:43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
|     | 걸,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       |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구|
|     |                 |       |원하실 지라            |
|     |                 |       |                   |
|15절 |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 요 19:28 |   내가 목마르다           |
|     |                 |       |                   |
|18절 |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 | 마 27:35 |   그 옷을 제비뽑아 나누고 |
|     | 나이다                |       |                   |
|     |                 | 요 19:23 | 그의 옷을 취하여 네깃에 나|
|     |                 |       |눠 각각 한깃씩 얻고 속옷도 |
|     |                 |       |취하니               |
+-----+---------------------------------+----------+---------------------------+

  3. 기도 응답에 대한 찬양(22:22-31)
  본 대목은 (1) 구원받은 후 여호와께 드리는 찬송(22-24절), (2) 고난받을 때  서원
한 대로 감사제를 드림(25, 26절), (3)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영원함에  대한  찬미
(27-31절)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다윗이 부른 는 승리의 노래는 한마디로 우주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다윗
은 땅끝에 사는 이교도들이 여호와께 회개하고 돌아오며(27절), 여호와께서 이방 민족
의 통치자가 될 것을 말한다(28절). 또한 가난한 자나 부요한 자를 막론하고 모든  종
류의 인생이 그 앞에 경배하게 될 것과(29절) 후손들이 대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는 사실(30, 31절)을 밝힌다. 우리는 여기서 다윗의 사유(思惟)의 폭이  얼마나
광대하며 우주적인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다윗은 하나님 나라의 영원성과 광대함을 믿
고 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을 강조한 거이다.
  그렇다면 다윗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인가? 우선 말 그대로 하나
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이상적인 공간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초청되어 풍성한 영의 양식을 먹게 되며 그들은 이 양식으로 영생
을 얻게 된다(26절). 또한 이 날아에는 빈부 귀천의 차별이 없다. 하나님은    자비하시
고 공의로우신 분으로서 곤고한 자의 부르짖음을 멸시하지 아니하시고 그의    부르짖음
을 들으시며 불의한 자를 처벌하신다(24절). 빈부의 격차와 무관하게 모든 사람은  차
별없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29절). 아울러 이러한 하나님 나라는 온 세계에
확장되어 나갈 것이며 그 결과 땅 끝에 사는 모든 이방 민족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
게 될 것이다(27절).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하나님  나라
는 어떠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영원할 것이며 (2) 이 세상의 유일한    통치자가  여호와
한 분뿐이므로 (3)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전파해야 한다.

  *  교회의 성격과 임무.  본시에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인종과 민족을 초
월하여 존재하는 신약 교회의 모습이 예표적으로 드러나고 있다(27절). 이제 본  강해
에서는 본시에 나타난 있는 교회의 성격과 사명에 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교회의 명칭: 25절에는 '대회'라는 말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히브리어로  '카할
'(*      )이며 이는 신약에서 '교회'(*                , 에클레시아)로 번역되었다.
이 용어는 본래 '모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특별히 종교적인 목적으로 모인  모
임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호렙  산에서  율법을  받기   위해   모인     총회(신
9:10;10:4;18:16)나 절기, 금식, 예배를 위한 모임(대하 20:5;30:25;느 5:13;욜 2:16)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말은 단순히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의 총수를 의미하
는 '에다'(*      ) 와는 구별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에다'에 속했다고 하여  반
드시 '카할'에 속하지는 않는다(레 4:13;신 23:2). 25절에 언급되고 있는 '카할'도 이
스라엘 전체 백성들을 의미한다기보다는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모인  경건한  자들,
곧 하나님을 찾는 자들의 찬송하는 모임(26절)으로 볼 수 있다.이와 같은 단어의 의미
로 볼 때 신약의 교회의 개념은 하나님을 찾는 경건한 무리들의 모임으로  정의할  수
있다.
  (2) 교회의 성격: 다윗은 본문에서 '카할'(*      )을 현재 '형제',  또는  '야곱의
자손'으로 표현하고 있다(22, 23절). 사실 하나님을 경배하러 모인  경건한  무리들은
한 조상(祖上)에서 번성한 혈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같은 형제요, 같은  조상의
자손들이었다. 이와 같은 '카할'의 연합 관계(unity)는 신약의 교회에서도 그대로  적
용된다. 구약의 경건한 무리들이 한 조상의 자손들이었던 것처럼 신약 교회의  회원들
도 모두 하나님의 양자로서 한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형제들이다(요 1:12). 이러한 점
에서 신약의 교회는 다른 어떠한 단체나 모임보다 본질상 견고하게    연합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2) 교회의 사명: 첫째, 교회는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한 모임이다. 본문에서  '카할
'도 순전히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만일 교회중에 이  예배
의 임무가 빠지게 된다면 교회로서 존재할 가치가 없어지게 된다. 둘째, 교회는  거룩
한 교제를 도모하는 모임이다. 26절을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잔치가 기록되어 있
는데 이는 신약 시댕의 교회가 교제하는 모습을 예시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경건한
무리들의 모임일 뿐만 아니라 서로간에 신앙의 유익을 주는 교제하는  공동체이다. 셋째, 교회의 중요한 임무중의 또 하나는 구제이다.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제에 가난한 자들을 초청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신약 교회의 구제에 대한 모형으로 볼 수 있다. 교회는 지상에 존재한 불우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여 사랑과 봉사를 계속하여 베풀어야 한다.


Articles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