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 다윗은 보호를 위한 간구로써 본시를 시작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그가 특별한 위기 중에 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위기 상황은 9-11절에서 죽음(음부)의 위기로 더욱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주께 피하나이다 - 이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저자의 확신을 보여준다. 여기서 '피하나이다'는 완료형으로서 이는 그가 새롭게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계속하여 하나님을 의지하여 왔음을 나타내는 것이다(Lange).
=====16: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 '내가...아뢰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마르'(* )는 문법상 2인칭 동사이다. 그러므로 이를 그대로 번역하면 '당신이...아뢰되'가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문맥상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대부분이주석가들은 '타우'(* ) 뒤에 '요드'(* )가 생략된 것으로 간주하여 본 동사가 본래 1인칭 형태인 '아마르티'(* )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70인역(LXX)도 이런 동사의 형태로 번역했다.
주는 나의 주시오니 - 문자적 으로 이는 '당신은 나의 주시오니'이다. '나의주'는 히브리어로 '아도나이'(* )이며 이는 '주인'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이 말은 종을 부리는 주인을 가리킨다(창24:9). 따라서 이말은 '내가 당신의 종입니다'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한편, 본시 저자가 이러한 고백을 하게 된 데는 특별히 배경이있는 것 같다. 아마도 저자는 그 주위의 우상을 섬기는 자(4절의 '다른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로부터 여호와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라는 유혹의 말 또는 혐오스런 말을 들었을 것이다. 이 우상을 섬기는 자는 여호와를 모르는 자가 아니었다. 그는 분명 여호와를 알면서도 다른 신을 섬기는 혼합주의자였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유혹을 뿌리치고 그의 견고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주 밖에는 나의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 저자는 참된 행복이 오직 여호와께로부터 말미암는다고 확신했다(Kraus, Hengstenberg). 이러한 확신 가운데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는(9절) 저자는 유혹자들에게 큰 확신을 가지고 대답했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확신의 말은 저자가 십계명 중 제1계명을 굳게 지켰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불 수도 있다(Kraus, Craigie).
=====16:3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 '땅에있는 성도'란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자, 또는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를 의미한다(Kidner, Kraus). 그리고 여기서 '존귀한 자'란 이 세상의 권세나 영화를 누리는 자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신령한 세계에서 영광과 존귀를 차지하는 자를 말한다(Delitzsch)
=====16:4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 혼합주의자들은 여호와 이외에 다른 신에게도 예물을 드렸다. 이것은 제1계명을 범한 행위이므로 형벌이 저들에게 임하여 영육간의 괴로움을 당하게 되었다.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奠祭)를 드리지 아니하며 - 여기서 '피의 전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 구절에는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혹자는 이를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피 흘리는 살인적 행위를 상징한다고 주장한다(Briggs). 그러나 본 문맥은 분명히 예배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피의 전제'는 사실적인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Calvin). 따라서 이 '피의 전제'는 이방 종교에서 행해진 하나의 제사 의식으로 제물을 드리는 중에 피를 마시는 의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혹자의 견해대로 어린아이를 제물로 삼아 드린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Baethgen). 왜냐하면 이스라엘 주변 이방국가에서는 국가신에 대한 제사에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 여기서 이름은 물론 이방신들의 이름이다. 그리고 율법은 우상의 이름만이라도 부르지 못하게 금하고 있다(출23:13;신 12:3). 따라서 다윗은 본 구절을 통해 자신이 전적으로 하나님만 섬기며 그 명령을 준수했음을 고백하고 있다.
=====16:5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 이는 한마디로 여호와께서 자신의 모든 것이 되신다는 다윗의 신앙 고백이다. 이러한 내용의 신앙 고백은 아마도 제사장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기업의 약속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민 18:20). 다윗은 이 약속대로 오직 하나님만 자기의 기업으로 삼은 것이다(Kidner, Rawlinson). 한편, '잔'이란 인간 누구에게나 주어진 분복을 상징하는 말이다. 이에 대해 11:6주석을 참조하라.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이 말은 에게 주어진 기업과 잔을 다른 사람들이 뻬앗아가지 못하도륙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말이다.
=====16:6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곳에 있음이여 - 혹자는 '아름다운 곳'이 다윗의 거주지였던 예루살렘과 그 근방이라고 주장하나(Rawlinson) 오히려 이는 다윗의 행복한 삶의 경험을 비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Calvin, Craigie). 즉,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으로 자기의 기업을 삼겠다고 이미 선언한 바 있다(5절). 이러한 다윗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어떠한 환경적 요인을 아름답게 보았을 리 만무하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곳'이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땅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모신 그의 삶이 행복한 것이었고 이러한 행복한 삶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구별하여 정해주신 기업이었다.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 여기서 '기업'이란 5절에 언급된 산업, 또는 잔의 소득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이 기업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16:7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아름다운 기업(행복한 삶)을 주신 것에 감사하여 지금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다. 더욱이 지금까지 누려온 이 하나님의 기업은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여기서 '훈계'란 말은 바로 하나님의 내적인 인도하심을 의미한다. 그래서 칼빈(Calvin)은 이를 '성령의 내적 조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바로 이것이 아니었다면 다윗은 결코 하나님의 기업을 누리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한없이 찬송하고 있는 것이다.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다 - '심장'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킬랴' (* )는 본래 콩팥을 의미하며(출 29:13,22;레 3:4, 10, 15;4:9;7:4;8:16, 25;9:10, 19) 구약에서는 이곳에서 인간의 영혼의 내면적인 활동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다(73:21;렘 17:10). 따라서 이 구절은 다윗이 밤마다 영감을 받은 사실을 보여준다(Calvin). 한편, 다윗이 밤마다 받은 영감은 감사의 느낌(Rawlinson)과 영원한 즐거움(11절)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의 허영을 밝혀주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영적인 깨우침이었을 것이다(Calvin, Kraus).
=====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 가운데 항상 임재하여 계신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과의 교제는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지속되었을 것이다(119:, Craigie). 이구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중요한것은 '항상'이란 표현이다. 이 말은 지금 다윗이 고난 가운데있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이다. 즉, 그는 평안할 때뿐 아니라 고난 받을때에도 하나님에 대해 변 치않는 신앙을 유지할 것이라는 신앙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Rawlinson, Calvin).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 본구절은 문자적으로 '나의 오른 손에'로 번역된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도우실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임재하여 계신다는 말이다(Briggs). 특히 우편은 하나님의 권세를 상징한다(110:5;121:5). 따라서 본구절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강력한 보호자가 되신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Kraus).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 가까이 계신다는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이 구절의 자세한 의미에 대해서는 15:5 주석을 참조하라.
=====16:9
영광도 즐거워하며 - 이는 앞 구절과 평행대구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영광은 앞 구절의 '마음'과 동의어이다(Briggs, Rawlinson).
내 육쳬도 안전히 거하리니 - 영혼(마음)과 육체는 인간의 구성 요소이다. 다윗은 자신의 모든것이 기쁨과 안전함으로 충만해 있음을 묘사하기위해 마음에 이어 육체에 대한 진술로 나아가게 되었다. 즉, 다윗에게 주어진 기업은 영혼만의 기쁨이 아니고그 육체까지도 행복한 상태로 사는것이었다. 한편, 본 구절은 다윗이 이제 막 죽음의 위기로부터 구출받았음을 시사해 준다(Craigie).
=====16:10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 '영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페쉬' (* )는 '생명', '자신'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본시는 죽음의 위기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구출해 달라는 간구의 시이므로 우리는 이 용어를 '생명'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음부'에 대해서는 6:5 주석을 참조하라.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 베드로와 바울은 이 구절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예언 성취의 증거로 인용하였다(행 2:25-29;13:35). 혹자는 이에 근거하여 다윗이 자신의 부활을 소망하며 이 구절을 노래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Kidner, Rawlinson). 그러나 혹자는 이러한 주장에 반대하여 다윗은 다만 죽음의 위기로부터 벗어난 그의 경험을 기술하였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본시가 부활을 주제로 하는 시가 아니고 죽음의 위기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간구의 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Craigie, Kraus). 여기서 어떤 견해를 취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과연 구약에도 부활에 대한 사상이 존재했는가 라는 사실에 달려 있다. 어렴풋이나마 욥 14:14에서 부활 사상이 발견된다. 그렇다고 부활 사상이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뚜렷하게 정립된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다윗은 부활에 대한 사상이 있었기에 본 구절과 같은 표현을 하게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다윗은 구약에서 영감있는 인물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 같은 사실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구절이 유혹자들의 말에 대한 자신의 신앙 고백으로, 앞 절과 연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두 가지 해석 모두를 인정해야 한다. 즉, 일차적 의미에서는 죽음의 위기를 벗어나는 것을 가리키며 궁극적으로는 부활에 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16:11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 '생명의 길'이란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길을 의미한다. 다윗이 다만 이 땅에서 불과 몇 십년을 살다가 죽는 짧은 생명을 가리켜 '생명의 길'이라고 표현했다고 보는 것은 너무나 터무니 없다. 그는 궁극적인 구원, 곧 부활을 내다보며 이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Calvin, Kidner, Rawlinson).
영원한 즐거움 - 이 즐거움은 세상에서 잠시 잠깐 맛보는 그런 즐거움과는 전혀 다르다. 그는 궁극적으로 부활을 미리 내다보고 있기에 그 부활시에 얻을 수 있는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하고 기도하는 본시는 (1) 혼합주의자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전반부(1-4절)와, (2) 하나님의 축복과 영생의 소망을 언급하는 후반부(5-11절)로 구성되어 있다.
다윗이 본시를 쓸 당시의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 관하여 어떤 학자들은 다윗이 반역으로 인하여 피난하던 시기 혹은 황무지에서의 커다란 위협에 직면했을 때로 추측하기도 하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다.다만 본시를 상고해 볼 때 다윗이 생명의 위협을 심각히 느끼느 상황에서 저술했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시에는 절망 속에 빠져 있는 자의 고통스러운 비탄과 한숨섞인 호소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본시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믿음과 영생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차 잇다. 다윗은 자신이 처한 위기 상황에 대해 비관적 태도를 지니지 않았고 오히려 굳센 믿음으로 미래에 대한 낙관적 태도를 견지한다. 그러므로 본시는 일반적으로 '확신시'(ca psalm of confidence)로 분류된다. 다윗은 사망을 목전에 둔 상황 속에서 공포와 불안을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였다.
이러한 다윗의 신앙은 육적인 차원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으로 확장된다. 다윗은 사망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부활과 이후의 영생을 제시한다(10, 11절). 그는 하나님과 영속하는 관계가 유지됨에 대하여 무한한 행복감을 느끼고 찬송하며, 이러한 관계가 결코 죽음으로 인하여 단절되지 않으리라는 신념을 가진다. 이러한 다윗의 신앙은 신약 시대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실제적으로 성취된다( 행 2:29-32; 13:35-37).
이제 성도의 신앙 고백과 그에 따른 축복을 노래하고 있는 본시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좀더 자세히 고찰해 보고자 한다.
첫째, 성도의 신앙 고백과 절개가 드러나 있다(1-4절).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시작하고 있는 본 대목은 (1) 죽음의 위기 중에 구원을 간구함(1절), (2) 혼합주의자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여호와 신앙을 고백함(2-4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에서 우리는 다윗의 신앙의 절개를 발견할 수 잇다. 당시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던 다윗은 혼합주의자들로부터 이방의 신들응 마경배하라는 유혹을 받았다. 이에 대해 다윗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나의 주인이시라고 고백함으로써(2절) 그들의 유혹을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다윗은 이방의 우상들이란 괴로움만 가중시키는 허상임을 알고 있었다. 이방 신을 숭배하는 이방인들의 의식(儀式)은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의식(儀式)과는 달리 세속적이요 더러운 것에 불과하다(4절). 따라서 다윗은 그들의 피의 제사를 멀리하였고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도 하지 않았다.
다윗은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피조물과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았고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만을 의지하였다. 그 결과 하나님의 아름다운 기업을 상속받았으며 마음의 기쁨과 육체의 안전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운 유업은 어떠한 환경가운데서도 끝까지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성도의 몫임을 알 수 있다.
둘째, 영생과 부활에 대한 확신이 나타나 있다(5-11절). 신앙의 절개를 지킨 다윗의 축복이 소개되고 있는 본 대목은 (1) 여호와의 기업을 소유함(5-9절), (3)부활과 영생의 소망(10, 11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묘사되는 다윗의 삶은 참으로 행복한 모습이다. 다윗은 현실 세계에서는 결코 획득할 수 없는 아름다운 기업을 소유하였다(6절). 그의 마음에는 요동함이나 두려움이 없었고 반면에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찼다. 그는 정신적인 측면에서만 아니라 육체까지도 안전히 거하는 복(福)을 누렸던 것이다(9절).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다윗을 가장 행복하게 만들었던 요소는 다름 아닌 영생에 대한 소망이었다. 이 세상의 즐거움은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생명의 단절과 함께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한나가 안에서 영원한 부활 생명을 얻은 자는 결코 상실도지 않는 복을 소유할 수 있다. 다윗은 하나님게서 결코 자신의 육체를 영원히 부패한 상태에 처하도록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계시로 전달받았었다(10절). 바로 이와 같은 소망에 근거해 다윗은 현재 자기에게 주어진 극도의 위험 속에서도 평안과 기쁨을 유지하고 있다.
다윗이 이렇게 죽음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생명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이었다(롬 4:17). 우리도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할 때 동일한 은혜 가운데 동참할 수 있다. 우리는 이상에서 중요한 영적인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1)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성도는 궁극적으로 영육간에 완전한 보호를 받을 수 있다(9절). (2)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는 일시적이 아닌 영원한 복을 소유한다(11절). (3) 복은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어떤 결과이기 이전에 하나님 그 자체이다(2절).
* 구원의 부활(復活) 사상. 구약에 부활 사사이 존재하느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을 상고해 볼 때 부활 사상이 계시(啓示)의 점진성(漸進性)이라는 차원에서 조금 희미하게 나타나 있을지라도 분명히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이제 본 강해에서는 구약에서 부활 사상이 어떻게 언급되고 있는지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역사적인 사실: 구약 성경에는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난 경우가 세번 나타나고 있는데, 사르밧 과부의 아들(왕상 17:8-22), 수냄 여인의 아들 (왕하 4:32-37), 엘리사의 무덤에 시체가 던져졌던 사람(왕하 13:21) 등이다. 이들의 부활은 현생에서의 일시적인 것이므로 영원한 부활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들은 하나님께서 사망을 정복할 수 있는 전능자이심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징표이다.
(2) 구약 성경에는 종말론적 부활 사상이 매우 어렴풋하게 나타나 있으며, 그것도 후대의 기록들에서 대부분 나타나고 있음은 사실이다. 이러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 사업이 점진적으로 계시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까지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부활 사상을 미숙한 형태로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이 구약 시대에는 부활 사상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부활 사상을 주장하는 구절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까) 모세의 노래 중에 '나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신 32:29) 라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내용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살리시는 역사를 소망했음을 잘 보여준다.
(다) 이삭을 제물로 바친 아브라함의 순종의 행위는 부활 사상에 근거한 것이 틀림없다(히 11:19).
(따)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은 구약의 성도들로 하여금 보다 더 완전한 상태로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소망을 갖게 했음이 분명하다.
(3) 구약에서 부활 사사을 명백하게 언급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까) 한나의 노래: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삼상 2:6). 물론 이 구절이 종말론적 부활 사상을 정확히 표현하는 내용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할지라도 적어도 인생을 부활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줌은 분명하다.
(다) 욥: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
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
(욥 19:25-27). 이 구절은 종말론적인 부활 사상을 나타내 주고 있다.
(따) 이사야: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사 25:8).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사 26:19).
(마)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합쳐져 다시금 소생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겔 37:1-10). 이는 부활 사상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다.
(바) 다니엘: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
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딘 12:2, 3). 다니엘
은 앞으로 큰 재난을 통해 순교하게 될 성도들을 위해 이 구절을 기록한 것이다. 그는
부활이 반드시 있을 것임을 밝힘으로써 순교자들에게 용기를 주고자 했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구약 시대에 부활 사사이 존재함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러한 부활 사상은 개인의 이성적 노력에 의해 파악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구약 시대의 성도들에게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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