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하늘이...선포하고 궁창이...나타내는도다 - 혹자는 선포하고 나타내는 주체가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라고 말하나(Delitzsch) 오히려 하늘이나 궁창이 의인화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Lange, Briggs, Craigie), 성경에서 자연 만물이 의인화된 경우들은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하늘(50:6;97:6)이나 새벽별(욥 38:7), 언덕과 나무들(사55:12), 일반적인 자연(148:3-13;욥 12:7)이 의인화되어 표현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하늘과 궁창이 선포하고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는 곧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한 광대하면서도 질서 정연하고 아름다운 우주의 하늘은 그것이 아무렇게나 우연히 형성된 것이 아니라 최고의 건축가이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임을 공공연히 찬양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무언적(無言的)인 선포이다. 한편, '하늘'과 '궁창'은 동의어로서 굳이 구분하자면 2절에 근거하여 전자는 낮의 하늘을, 후자는 밤의 하늘을 각기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Craigie). 결국 하늘은 낮과 밤의 모든 장면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선포하고'나 '나타내는도다'는 모두 분사형으로 이는 중단 없는 계속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즉, 하늘의 선포 활동은 창조 이래로 계속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Briggs)
=====19: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 1절에서와 같이 낮과 밤이 의인화되었으며 1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하늘의 사역이 낮과 밤의 두 차원으로 구분되었다. 즉, 낮은 낮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밤은 밤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그런데 계속되는 낮과 밤의 하늘은 창조 이래로 변화됨이 없이 그 모습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즉, 조상의 문화를 전수하듯 본래의 하늘이 전승되어 인간에게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Lange). 이와 같은의미가 '말하고', '전하니'라는 용어에 함축되어 있다. 한편, 여기서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의미한다. 하늘은 옛날모습 그대로 전승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인간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하늘은 탁월한 계시이다(Craigie). 따라서 인간은 하늘을 바라보고 연구하며 묵상할 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실마리를 잡을수 있게 된다(8:1, 3;33:6;95:5).
=====19:3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 하늘의 선포나 언어는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 아니라 무언의 계시이며 선포이다(롬 1:19).
=====19:4
그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 '소리'는 원문에 '카왐'(* )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말은 사실상 소리를 의미하는 말이라기보다 오히려 '측량하는 줄'을 의미한다(왕상 7:23;욥 38:5;사 28:17;렘 31:39). 이에 근거하여 혹자는 본구절이 하늘의 모든 천체들이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길을 따라 운행해야 한다는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한다(Knight). 하지만 이 주장은 전체 맥락과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 다윗이 말하고자하는 주제는 하늘의 무언적 계시의 소리인 것이다. 따라서 '카왐'은 3절의 '소리' (* , 콜람)에서 '라멧'(* )이 빠진 형태인것이 확실하다(Gesenius, Maurer, Kraus, Craigie, Rawlinson). 70인역(LXX)에서도 목소리나 악기의 소리를 뚱하는 '프동고스'(* )로 번역되었다.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 '세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인간의 생존이 가능한 모든 곳을 의미하는 말이다(TWOT, Kraus). 따라서 본 구절은 지구상에 사는 어떠한 인간도 자연 계시(自然啓示)의 영역안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帳幕)을 베푸셨도다 - 다윗은 갑작스럽게 해를 의인화하여 묘사하고 있다. 해는 하나님의 손으로 지어진 것들 중 하나이며(1절) 특별히 창조된 하늘들, 곧 천체의 면류관이라고 말할수있다(Craigie). 애굽에서는 해가 최고의 신(神)으로 여겨졌으며 그 백성들은 바로 왕을 해가 성육신(成肉身)한 존재로 여겼다. 또한 바벨론에서는 해의 신 '솨마쉬'(* )가 미신적으로 숭배되었다(Kraus). 하지만 다윗에게 있어서 해는 신적 존재가 결코 아니었고 다만 하나님에 의해 운행되는 찬란한 피조물이었다(창 1:17). 하나님께서는 해를 위해 장막을 베푸셨다. 여기서 장막이란 태양이 운행하는 한정된 장소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Hupfeld). 하지만 이는 밤 동안의 거처로 해석되는 것이 더 적합하다(Geier, Craigie, Kraus). 왜냐하면 다음 절에서 아침에 해가 그 거처에서 나오는 신랑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합 3:11). 한편, 고대의 많은 주석가들은 본 문맥을 풍유적으로 해석하여 하늘은 교회를 상징하고 해는 복음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19:5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 본 구절은 매일 아침 힘있게 떠오르는 태양의 일출에 대한 시적(詩的) 묘사이다. 아침 해는 인간에게 항상 신선함과 기쁨과 기운을 불어 넣어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해를 신랑에 비유한 것이다(Perowne). 또한 아랍어에서는 해가 여성형이지만 히브리어와 아랍어에서는 남성형이므로 신랑으로 비유된 것 같다(Delitzsch).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 이는 해가 끊임없이 자기의 길을 운행하 는 모습을 시적으로 표현한 구절이다. 즉, 해는 지칠 줄 모르고 힘있게 운행하기 때문에 장사로 비유된 것 같다. 그런데 이장사는 기뻐하는 장사이다. 여기서 '기뻐하는'이란 말은 해의 밝음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빛과 기쁨은 서로 연관성이 많기 때문이다(Kraus). 한편, 고대 근동 지방의 신비 종교에서도 해는 장사에 비유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수메르의 주술에도 해의 신이'나아가는 영웅' 으로 묘사되었다(Schroeder)..
=====19:6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 '하늘 이 끝'은 해가 떠오르는 동쪽 끝을, '하늘 저 끝'은 해가 지는 서쪽 끝을 의미한다.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 이 표현은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4절)와 같은 의미이다.
=====19:7
여호와 - 본절에 와서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로 바뀌어졌다. '엘'(* )은 온 우주의 창조자이심을 나타내는 이름인 반면(1절), '여호와'(* )는 언약의 하나님을 나타낸다. 이제 본절 이하에서 언약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율법에 대한 묘사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여호와란 이름이 쓰여진 것이다(Lange). 한편, 본절에서부터 시의 내용이 달라지고 있으나 앞에 묘사된 자연 계시와 이제 묘사되는 특별 계시 사이에는 유비 관계(類比關係)가 있다(Rawlinson). 따라서 본시를 두 개의 시편으로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율법 - 본절에서부터 9절까지에서 율법은 여섯 가지 이름으로 달리 표현되었다. 그표현들은 동의어이지만 한편으로 인간을 위한 율법의 다양한 기능을 보여 준다(Craigie). 그리고 '율법'(* , 토라)은 넓은 의미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나 특별히 모세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만을 뜻하기도 한다(말 4:4).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 완전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밈' (* )은 제사 용어이다. 다시 말해서, 이 용어는 흠없고 점없는 제물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율법의 완전성은 성경의 충족성(充足性)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율법이 인간의 영혼을 소성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완전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처럼 율법이 영혼을 소성시키기에 충족한 까닭은 그것이 인생의 영혼에게 좋은 양식이 되기 때문이다(Craigie).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자로 지혜롭게 하며 - 여기서 '우둔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페티'(* )는 일반적으로 무엇이든 믿는 경향이 있는 순진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울러 '우둔한 자'는 율법을 받아들일수 있는 겸손한 자. 또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를 의미한다(Briggs). 이러한 자가 율법의 지혜를 배우지 아니한다면 시험에 빠지게 되고 죄를 저지르게 된다(잠 1:10-14;7:7). 그러나 이러한 자가 율법의 지혜를 배우게 되면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한편, '증거'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에두트'(* )로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범죄한 자에게는 형벌의 증거가 되며 의를 행하는 자에게는 상급의 증거가 된다. 우둔한 자는 이 증거를 대함으로써 형벌을 피하고 상급을 얻는 지혜를 얻게 된다.
=====19: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 여기서는 율법이 교훈으로 표현되었다. '교훈' (* , 피쿠딤)은 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의무들을 의미하는 말이다(TWOT, Knight). 그리고 '정직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솨르' (* )는 옳고 바른 것을 의미한다. 여호와의 교훈이 옳고 바른 까닭은 (1) 성품이 올바르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며, (2) 아울러 인생들을 옳은 목적지로 인도해주기 때문이다(Lange, Delitzsch).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 '개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츠와'(* )는 '명령하다'는 의미의 동사 '차와'(* )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그리고 '순결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라'(* )는 주로 '깨꿋한'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때로 '빛나게 하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아 6:10;사 49:2).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Delitzch). 왜냐하면 이어지는 구절에 '밝게 하도다'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눈을 밝게 하도다'라는 구절은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는 의미와(Craigie),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만든다는 의미를(Calvin) 내포하고 있다. 또한 본 구절은 하나님의 계명 이외에 다른 것으로는 인간이 참된 진리를 이해할 수 없으며 선악을 분별할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여호와의 계명은 인간의 영적인 지식을 밝혀 주는 유일한 등불이다(잠 6:23).
=====19: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 - 원문에는 '도'라는 말이 없다. 본 구절을 직역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란 의미이다. 혹자는 이를 '여호와를 경의하는 자에게 베풀어진 교훈'이라고 해석하였으나(Rawlinson), 이 같은 해석은 원문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 느낌을 준다. 여기서 '여호와를 경외함'이란 율법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Delitzsch). 왜냐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율법이 한결같이 선포하는 대주제이기 때문이다(신 17:19;잠 15:33).
정결하여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호르'(* )는 순금과 같이 아무것도 섞이지 아니한 순수 상태를 표현하는 용어이다. 특히 이 용어는 세속적인 것과 반대되는 개념을 나타낸다(레 13:17). 따라서 '정결하여'라는 말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 자체가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거룩하고 순수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영원까지 이르고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가장 순수한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썩지 아니한다는 말이다. 즉, 세속적인 것은 더러운 것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사라져 버리지만 순전한 경외는 영원토록 보존된다는 의미이다(요일 2:17).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 '확실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메트'(* )는 '진리'로 번역될 수 있는 용어이다. 율법은 이방 종교의 법 조항들과는 달리 영원히 변하지 아니하는 유일한 진리의 표준이라는 말이다(Lange, Delitzsch). 또한 '에메트'는 '신뢰성'이라는 기본적인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율법은 인간이 믿고 따르기에 완전한 것이다.
다 의로우니 - 이는 율법에 대한 결론적인 정의라고 볼 수 있다. 율법은 질적인 면과 양적인 면에서 모두 의롭다. (1) 질적인 면에서 율법은 그 기원이 하나님이므로 의로우며 그 목적이 선한 것이므로 의로운 것이다(Craigie). (2) 양적인 면에서 모든 율법의 조항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의로운 것들이다(Barnes).
=====19:10
여기서 다윗은 율법의 가치를 찬양한다.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것이며 - 정금은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것을 비유한것으로 세상의 모든 재물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 '송이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노페트 추핌' (* )이다. 여기서 '추핌'(* )이란 '흘러 넘치다', 또는 '벌집'을 의미하는 '추프'(* )에서 파생한 것으로 '벌집에서 흘러 넘친'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Lange, Delitzsch). 따라서 '송이꿀'이란 벌집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넘친 덩어리꿀을 의미한다. 이러한 꿀은 팔레스틴 산지에 혼히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꿀은 최고의 즐거움을 상징한다. 다윗이 이처럼 금이나 꿀과 같은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은 여호와의 율법이 그에게 그와 같은 가치를 가지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은 외면적으로는 그의 모든 재산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귀중한 것으로 느껴졌으며 내면적으로는 달콤한 행복이 되었던것이다(Delitzsch).
=====19:11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 여기서 '경계를 받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니즈하르'(* ) '권고하다', '가르치다'는 뜻의 동사 '자하르'(* )의 수동형이다. 이는 율법의 교훈적 기능을 보여준다. 즉, 율법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길을 제시하여 주며 아울러 심판받아 마땅한 행위들을 경고함으로써 성도로 하여금 근신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 이는 시편 전체의 주제 중의 하나이다. 이 표현이 사도 바울의 이신칭의(利信稱義) 사상과 모순되는 개념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상급의 문제이다. 즉, 율법을 지킨 자, 곧 의를 행한자는 그에 상응하는 상급을 받는다는 것이다.
=====19:12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 '허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쉐기아' (* )는 '길을 잃다', '잘못하다', '정도에서 벗어나다'라는 뜻의 동사 '솨가'(* )의 명사형이다. 그러나 동사 '솨가'의 일차적 강조점은 비고의적인 범죄라는사실에 있다. 즉, 이 동사는 부지중에 범한 비고의적 행동, 또는 무의식적인 범죄를 뜻한다(레 4:13;욥 6:24;19:4). 따라서 여기서 '허물'이라는 말은 모르고 지는 죄, 또는 비고의적인 죄를 의미한다(TWOT, Lange, Delitzsch). 흔히 이러한 종류의 죄는 미묘한 것이거나 자신의 생각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발견되지 않지만다윗은 율법의 말씀안에서 이러한 종류의 무수한 죄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 다윗은 '숨은 허물'이라는 말로 앞에서 언급된 '허물'의 의미를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벗어나게 하소서'라는 말은 죄사함을 구하는 기도이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카'는 '깨끗하다', '무죄하다'는 뚱으로 이는 모든 허물을 깨끗이 씻어달라는 기도이다(Calvin, Briggs).
=====19:13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 '고범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제딤'(* )은 '끓다', '완고하게, 또는 건방지게 행동하다'는 뜻의 동사 '지드'(* )에서 파생한 명사형으로 '교만으로 행한 죄', 또는 '완악한 죄'를 뜻한다(TWOT, Calvin). 이러한 죄를 범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없었다(민 15:27-31). 한편, 혹자는 '고범죄'를 인격체로 보고 '교만한자들', '교만히 행한 자들'로 해석하였으나(Ewald, Briggs), 본 문맥이 죄사함을 구하는 기도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볼 때 이러한 해석은옳지 않다(Delitzsch).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 이말은 죄의 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즉, 죄가 한번 행하여지기만 하면 그 죄는 인간을 종으로 삼아버리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창4:7).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죄가 의인화되어 표현된 것이다(Briggs).
내가 정직하여 - '정직하여'는 원어상으로 죄악이 없는 순수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태는 점이나 흠없는 희생 제물을 연상케 하며 성도가 힘써야 할 성화의 상태를 암시한다(엡 1:4;5:27;히 9:14).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 '죄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페솨'(* )는 '거역하다'는 의미의 동사 '파솨'(* )의 명사형으로 '반역죄'를 의미하며 여기서는 하나님의 율법과 언약에 대한 반역을 가리킨다(TWOT). 이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분리시키며 인간 내부에 심각한 부패의 영향을 미친다(Delitzsch). 다윗은 숨은 허물과 고범죄에서 깨끗하게 되면 이러한 죄악의 심연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19: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 이는 다윗의 기도의 근거를 보여준다. 먼저 '반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추르'(* )는 거대한 산을 의미하는 단어로 이것의 상징적인 의미는 '힘'이다. 다윗은 모든 죄를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여호와께로부터 온다는 믿음으로 이같이 표현했을 것이다. 또한 본절에서 '구속자'는 죄를 깨꿋하게 속량해 주시며 그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는 분을 의미한다. 다윗은 자신의 무수한 죄를 깨끗이 씻어주실 분은 여호와 한 분뿐이심을 믿고 이처럼 고백하고 있다. 이와같이 모든 죄의 문제를 여호와께서 해결해 주실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는 지금까지 기도하였다.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 - 이는 기도의 다른 표현이다(Lange). 그리고 '말'과 '묵상'은 깊은 연관이 있다. 왜냐하면 마음에 묵상한 것이 그대로 입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 이를 다윗이 기도와 함께 성소에서 제사를 드렸다는 것으로 해석하기 보다는(Briggs) 다윗이 기도 자체를 하나의 제사로 인식했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Delitzsch, Kraus). 성경에서 기도는 하나의 제사로 인정되고 있기 때문이다(호 14:2).
본시는 명확하게 구분되는 두 개의 주제를 가지고 있다. 전반부(1-6절)에서는 자연
에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찬미하고 있으며, 후반부(7-14절)에서는 영혼
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자비를 찬송하고 있다. 그런따[
여러 학자들은 본시가 독립된 두 개의 시였다가 편집자에 의해 하나로 연결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전반부(1-6절)가 창조에 대한 찬양시로서 긴 문장으로 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명칭으로 '엘'(* )을 사용한 반면, 후반부(7-14절)는 율법에 대한 지혜시
로서 짧은 문장이며 하나님의 명칭으로 '여호와'(* )를 쓰고 있다는 점을 근거
로 제시한다. 그러나 히브리 신앙에서 본다며 창조 신앙과 율법 신앙은 상이(相異)한
주제가 아니라 동일한 시상으로 취급될 수 있는 내용이다. 창조는 하나님께서 주신 육
적(肉的) 생명의 터전이며, 율법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영적(靈的) 생명의 기반이다.
특히 본시는 하늘이 태양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처럼 인간의 삶은 율법에 의해 인도되
어야 함을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에 있어서 전반부는 천지 창조
와 연관된 하나님의 위엄과능력을 강조함으로 '엘'을 사용했고, 후반부는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구원하시는 측면과 관계됨을 '여호와'를 썼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시가 다
윗에 의해 쓰여진 단일한 시편이라고 결론 지을 수 있다.
한편 본시의 장르에 대해서는 '찬양시'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본시는 창조와
자연의 질서 속에 내재된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을 찬양한다. 아울러 성문화된 율법에
내재된 하나님의 지혜에 대하여 찬사를 보낸다. 다윗은 본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원
한 권능과 무한한 신성이 우주 만물 안에 내재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음을
웅장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자연과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는 본시는 그 내용에 의
해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진다.
1. 자연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계시(19:1-6)
만유(萬有)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본 대목은 (1) 자연 세
계의 계시적 활동(1, 2절), (2) 자연 계시의 보편성(3-6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
별히 본 대목에서 다윗은 자연이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왕하 23:5;욥31:26, 27) 하나
님의 영광과 지혜를 계시해 주는 피조물이라고 언급하였다.
물론 자연 세계는 특별 세계와는 달리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에 대한 명백한 지식
을 전달해 주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자연 세계는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을 드러내 준
다. 즉, 비록 구원으로 인도하지는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을 명백하게 제시
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연을 초월하여 섭리하시는 분이시지만 자연은 하나님의
창조 솜씨와 영광을 내포하고 있다. 만약 인간이 열린 마음으로 자연을 바라본다면 틀
림없이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영광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다윗도 바로 이러한 점에서
자연이 하나님의 계시적 활동이며(1절) 신적(神的) 창조의 결과라고 선포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신상을 표현하고 있는 자연의 계시적 활동은 보편성(普遍性)을 특
징으로 한다. 다윗은 이러한 사시을 입증하기 위해 '해'를 등장시키고 있다. 해는 인
간을 제외한 모든 자연 만물 중 가장 찬란하고 위엄이 있다. 태양은 인류의 생존에 있
어서 필수적인 빛을 제공해 준다. 만약 해의 광채와 온기가 사라진다면 인간은 멸절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은혜
를 베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떠한 사람도 자연의 계시적 활동에서 제외되는
법은 없다(6절). 그러므로 만일 인간이 한나가을 무시하고 만홀히 여긴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연 만물으 통해 모든 인간
에게 그의 능력과 신성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롬 1:20). 또한 이러한 자연 계시의 보
편성은 세계 복음화를 수행해야 하는 근거를 제공해 준다.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 자
신의 영광을 모든 인류에게 알기를 원하셨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도록 노력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마 28:18;롬 10:18).
* 성경적 자연관. 자연 만물의 생성을 우연으로 돌리는 사상은 우주 전체가 하난의
살아있는 유기체요, 그 안의 모든 것도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고 보느 물활론적 자연관
(物活論的 自然觀)에 기초한다. 이들에 따르면, 자연은 저절로 지금과 같이 되어진 것
이요 피조된 것이 아니며 어떤 외부의 작용에 의해 생성 또는 변화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상에서부터 자연스럽게 고대 근동 지방의 이방 종교(다른 지역
의 종교들도 마찬가지임)들이 형성되었다. 이 종교들은 자연의 놀라운 힘자마 숭배하
였으며 그중에서도 자연의 생산력을 가장 중요한 예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구약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고대 근동의 모든 국가들이 자연, 특히 태
양신을 숭배하였던 것과는 달리 단지 그것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피조물로 간
주했을 뿐이다. 이러한 구약의 사상은 창조론에 기초한다. 성경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를 기술함으로써 이방 종교의 사상을 일축시켜 버린다. 자연은 스스로 또
는 우연히 조성된 유기체가 아니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다. 더욱이 자연 만
물은 처음부터 존재했던 어떤 자료를 사용한 것이 아니요 전적으로 무(武)에서 창조되
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자연은 하나님처럼 종교적으로 숭배를 받을 만한 그 어떠한
근거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다만 자연은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또한 자연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다. 하나님은 자연을 창조한 후에 그것
을 내버려두시지 않았고 계속적으로 섭리하신다. 자연은 스스로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
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운행에 의해 좌우된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많은 기적들은
자연이 독자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를 바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좋은 증거이다.
이러한 자연관은 인간의 윤리적인 행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자연이 자율적으
로 생성되고 운행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것이 최고의 선(善)
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따. 그러나 자연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믿는 그리스도
인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 곧 계명을 따른 것이 최고의 선이라고 믿고 행돋하게
된다. 그러므로 올바른 자연관을 확립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인간을
사랑하며 자연을 보호하고 육성하는 태도를 소유하게 된다.
2. 율법의 효력과 다윗의 기도(19:7-14)
율법의 실체와 예배자의 반응이 나타나고 있는 본 대목은 (1) 율법의 효능(7-10절),
(2) 정결을 구하는 다윗의 기도(11-14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윗은 본 대목에서
자연 세계속에서의 태양의 역할과 견주어 인간 생활 속에서의 율법의 효력을 설명한
다. 해가 온 세상을 비추듯이 율법은 인간의 영혼에 신령한 빛을 비추어 준다. 언약
백성은 율법을 통하여 충족한 영혼의 양식을 얻으며 재앙을 필할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된다(7절). 계속해서 다윗은 율법이 바른 교훈을 통해 참된 기쁨을 누리게 하며 신령
한 세계를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고 단언한다(8절).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영
생을 누리며 영원 불변의 진리에 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율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9
절). 온 세상이 해 없이 존재할 수 없듯이 인간은 여호와의 율법없이는 결코 행복을
누릴 수 없다. 해가 모든 길을 밝혀주듯 율법은 행복의 지름길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다윗은 이처럼 율법이 영혼의 유일한 안내자임을 강조한다.
또한 다윗은 실제적으로 율법을 접하면서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었음을 고백하나.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장본인은 바로 죄이다. 죄는 은밀한 것이든 고의적인 것이든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시키며 행복을 빼앗아 간다. 그런데 율법은 이렇듯 무서운 죄
의 참상을 자각하게 만들며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실상을 발견하도록 만들어 준다
(11-13절). 다우시은 바로 이 율법의 도움으로 자신의 모든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자
비를 간구하게 되었다. 다윗은 이제 더 이상 죄의 동반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통하여 죄와 상관없는 자가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 율법이 인간의 죄를
씻어줄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인도할 수는 있음을 알 수 있다. 율법은 우리 영
혼의 안내자요, 몽학 선생이다(갈 3:24).
이제 마지막으로 본시에 나타난 율법의 다양한 명칭을 통하여 율법의 특성과 다양한
기능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 명칭 | 특성 | 기능 |
+------------+-------------------+---------------------------------------------+
| 율법 | 완전함(충족성) | 인간의 영혼을 충분히 채워주는 양식이 됨 |
+------------+-------------------+---------------------------------------------+
| 증거 | 확실함 | 행복의 지혜를 가르쳐 줌 |
+------------+-------------------+---------------------------------------------+
| 교훈 | 정직함 | 참된 기쁨을 줌 |
+------------+-------------------+---------------------------------------------+
| 계명 | 순결함(또는 밝음)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있도록 조명해 줌|
+------------+-------------------+---------------------------------------------+
| 경외하는 도| 정결함 | 영혼이 영원토록 보존 되도록 함 |
+------------+-------------------+---------------------------------------------+
| 규례 | 확실함 | 진리에 거하게 함 |
+------------+-------------------+---------------------------------------------+
* 그리스도인과 찬양. 찬양은 성경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로서 피조물들자;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본시에서 다윗은 하나님게
서 만드신 우주의 광대함과 오묘함에 대해 감격적으로 찬미하고 있다(1절). 이제 본
주제 강해에서는 성도의 의문이자 특권으로 여겨지고 있는 찬양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찬양의 의미: 찬양이라는 말은 예배, 경배, 감사 등의 개념을 포괄한다. 히브리
어 '스바'는 '찬양하는 것', '찬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단순히 언어나 노래를
말하지 않고 행동까지를 포함한다. 또 다른 단어인 '테힐라'는 주로 찬양한느 시를 지
시할 때 쓰였다. 신약에 와서 찬양은 '아이네오'로 번역되었는데 어원적으로 '가치'라
는 뜻을 지니고 있는 단어이다. 이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찬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
는 대상에게 찬양을 드리는 것을 지시하기 위해서이다. 결론적으로 찬양은 노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및 생활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께 경배함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2) 찬양을 하는 이유: (까)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활동을 허락하셨고, 온 우주를 섭리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은 물론 하늘에 있는
천군 천사들돠(103:20, 21;148:2) 하늘(89:5), 땅(98:4), 눈, 안개, 광풍, 불(148:8)
등 모든 자연계가 하나님을 찬양한다. (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원래 죄로 인하여 영원히 멸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께
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베풀어 주셨으므로 당연히 찬양해야 한다(계19:5). 또한
그리스도 자신께서도 하나님께 찬미를 드리셨다(막 14:26).
(3) 찬양의 생활: 하나님께서는 무수한 제물보다 인간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
정한 찬양을 기뻐하신다(69:30, 31). 의식을 통해서 혹은 물질에 의해서 표현되는 경
배 행위도 중요하지만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한 찬양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 입에서 나오는 몇 마디 말과 물질적인 풍성, 안락에서 비롯된 자기 만족적이고 일시적인 찬송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찬양이 아니다. 찬양은 오히려 환난과 고통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함으로써 빛을 발하게 된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40:10)과 위대하심(계 15:3, 4)에 대해 분명히 인식하게 된다면 우리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찬양하는 생활을 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그리스도인의 마음에는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되고 신앙은 더욱 성장하며 생활에는 즐거움이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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