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시편 0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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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여호와여 주의 장막(帳幕)에 유할 자 누구오며...누구오니이까 - 다윗은 본시를 질문으로 시작하고 있다. 여기서는 두 번의 질문이 기록되어 있으나 내용상으로 이 질문들은 하나이다. '주의 장막'이나 '성산'이란 말은 문자적으로 시온의 장막이나 시온의 언덕을 의미하는 말로서 공식적인 경배와 제사를 드리는 장소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계신 영적 상태를 상징하기도 한다(Kidner, Rawlinson). 한편, '유할 자', '거할 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자(61: 4), 하나님의 거룩한 영역 안에서의 시민권을 차지할 수 있는 자(엡 2:19;빌 3:20)를 나타낸다(Kraus).

=====15:1-5
질문과 대답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본시는 내용상 예루살렘 성소에 들어갈때 암송한 예배시였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스라엘의 절기 때에 예루살렘에 도착한 순례자가 1절을 암송하면 기다리던 제사장이 2절 이하의 대답을 한 것으로 보인다.

=====15:2
본절에는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 중 적극적인 측면 세 가지가 제시되어 있다.
정직하게 행하며 - 여기서 '정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밈'(* )은 '흠없는'(blameless), '완전한'이란 뜻으로 이는 물론 절대적인 완전성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하나님의 기준에서 인간이 도달해야 할 도덕적 수준을 의미하는 말이다(Rawlinson, TWOT).
공의(公義)를 일삼으며 - '공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디크'(* )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충실히 지키는 것을,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도덕적인 규범을 준수하는 것을 의미한다(TWOT).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 이는 인간 내면의 생각들, 곧 마음의 묵상에 관한 구절이다. '진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메트'(* )는 '신뢰성'이라는 기본적인 의미를 가진 용어로서 여기서는 '믿을 만한 것', '신뢰할 만한 것'이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Kraus). 따라서 본 구절은 '그 마음의 생각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믿을 만하며'라고 해석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살펴본 세 가지의 적극적인 조건들은 한마디로 표현해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일치하는 성품을 나타낸 것들이다.

=====15:2-5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10가지 조건이 제시되어 있다. 이 10가지 조건은 또다시 적극적인 측면과 소극적인 측면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측면 모두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측면 모두가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조건이 본시 외에 다른 곳에서는 의전적(儀典的)인 요구로 이루어진 반면(출 19:10-15;삼상 21:4), 여기서는 예배자의 마음가짐에 대한 것이다.

=====15:3
본절에는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들 중 세 가지의 소극적 측면들이 제시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2절에 제시된 조건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내용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 문자적으로 본 구절은 '그 혀로 다니지 아니하며'이다. '참소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갈'(* )은 '걸어서 가다', '탐지하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틀림없이 다른 사람을 중상 모략하기 위해 그 혀를 놀려대는 것을 의미한다(Delitzsch, Kraus, Craigie). 그 마음의 생각이 믿을 만한 의인은 결코 남을 비방하거나 중상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음이 분열된 상태에 있는 악인에게서나 볼 수 있는 행위이다. 이에 대해서는 12:2 주석을 참조하라.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 '벗'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아'(* )는 (1) 가까운 사이든 우연히 만난 사이든 친구, 동료를 의미하기도 하며, (2) 종종 '다른 사람'(another person)을 의미하기도 한다. 혹자는 전자의 의미로 보았으나(Rawlinson) 문맥상 이 말은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Kidner).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행악'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으나 혀로써 타인을 해롭게 하는 내용인 앞 구절과 연결되고 있기에 이는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것 같다(Craigie).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 이것은 이웃을 해(害)하기 위해 거짓 증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출 20:16;엡 5:25).

=====15:4
그 눈은...멸시하며 - 이는 일곱 번째 조건으로 사람들에 대한 태도의 내용이다. 여기서 '망령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니메아스'(* )는 '거절하다'는 뜻의 동사 '마아스'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이는 '하나님에 의해 거절당한 자'를 의미한다. 그리고 '멸시하며'라는 표현은 무시한다는 의미를 지니지만 여기서는 악한 자들의 소행을 전혀 본받지 않음을 의미한다. 즉, 본 구절은 의인이 악한 무리들을 멀리 함으로써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아니함을 의미한다(Kraus, Craigie).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 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 이 말은 의인이 헛된 맹세를 하지 않는다는 표현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의인은 한번 맺은 약속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다. 이러한 의인의 속성은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데서(2절) 비롯된다.

=====15:5
본절은 재물에 관한 의인의 태도에 대한 진술이다.
변리로 대금(貸金)치 아니하며 -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은 구약 시대에 완전히 금지되지 않았다. 외국인에게 이자를 받는 것은 허용되었기 때문이다(레 25:36f. ;신 23:20). 그러나 가난한 형제나 동족에게 이자를 취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었다(레 25:35-38;신 23:19). 왜냐하면 이 경우에 이자를 받는 것은 착취의 행위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터무니없이 높은 이자율로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였다. 바벨론에서는 33.3%가 요구되었고 앗수르에서는 심지어 50%까지 요구되었다(B. Meissner, Babylonien und Assyrien). 구약 시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있었기에 안식년이나 회년 제도가 생겼다. 따라서 본 구절은 돈 빌려주는 것 자체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자에 대해 고리 대금하는 행위에 대한 진술이다.
뇌물을 받고 무죄한 죄를 해치 아니하는 자 - 구약 시대에 뇌물을 받는 행위는 엄격히 금지된 사항이다(출 23:8;신 16:19;27:25). 왜냐하면 뇌물에 의해 공의가 시행되지 못하면 결국 그 사회가 병들어 죽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 '이런 일'이란 위에서 언급한 열 가지 조건을 의미한다. 이 열 가지 조건은 단순히 예배에 참석하는 등의 의식적인 행동(Ritual conduct)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이것은 삶 전체로 여호와를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대로 사는 매일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들에게 '영원히 요동치 아니하리라'는 약속을 베푸신다. 그렇다면 이 약속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히 일반적인 의미로 복을 받는다거나 재앙을 당할 때에 도움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약속의 의미를 본시 전체 문맥 안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1절에서 '주의 장막에서...누구오며...누구오니이까?'라는 질문이 주어졌고, 이질문에 대해 2-5절의 대답이 주어졌다. 따라서 본 구절은 이 질문에 대한 최종적인 결론이자 답변이다. 이렇게 볼 때 본 구절의 약속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리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리고 '요동치 아니하리이다'라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을 '영원한 반석'으로 비유한 데서 비롯된 표현으로 짐작된다(31:3;42:9;사 26:2-4). 그렇다면 의인들은 주의 장막에 들어가 반석되시는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세상이 완전히 멸망할 지라도 이들은 결코 요동하지 않는다(26:12;61:2-4).

 

 

 

  주의 성소에서 예배하기에 합당한 자의 영적, 도덕저 특성이 예시되고 있는  본시는 개인적 행동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전반부(1-3절)와, 사회적 관계의 덕목을    제시하는 후반부(4, 5절)로 구성되어 있다.
  본시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그러나 1절에  나타난  '주의 장막', '주의 성산'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볼 때, 언약궤가 이미 오벧에돔의 집으로부터 옮겨져 있었으나 아직 성전이 건축되지 않았던 시기에 저술    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본시에는 다윗이 법궤를 옮겨 오면서 경험했던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피조물로서의 겸손이 교훈의 형태로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다.
  한편 본시는 고대 근동 지방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전형적인 입당송(入黨頌)  형식으로 되어 있다. 입당송은 백성들이 성전 예배에 참석하기 위하여 성소에 들어갈 때 사용하던 노래로서 예배자가 성소에 들어가기 전 제사장에게 입당 자격을 묻고 대답을 듣는 형태로 전개되어 있다. 그런데 본시는 성전 예배 참여의  조건으로  의전적(儀典的) 요구를 전혀 배제하고 예배자의 내적 자세와 도덕적 행동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독특성을 지니다. 다윗은 성소에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는 자격으로 외부적 의식에  대한 언급을 자세하게 주로 성도의 윤리와 관련하여 설명한다. 이러한 사실은 종교와  도덕이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본시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종교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고 일상 생활의 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함을 자각할 수 있다.
  이제 주의 장막에 거할 자의 조건이 10가지로 제시되고 있는 본시의 내용을 좀더 심층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첫째, 성소에 들어갈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해 묻는다(1절). 여기서 다윗은 주위  장막에 거할 수 있는 대상의 자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 질믄은 어떠한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교제하기에 적당한가를 숙고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며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에서 예배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다윗은 종교의 외부적 의식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예배의식을 거행하는 자체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행위라고 볼 수는 없다. 다윗은 오히려 예배하는 자의 내적 마음 가짐에 대해 묻는 것이다. 이러한 물음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삼상 16:7).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때 과연 진실된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사실 거룩한 사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일수록 이러한 내적 질문을  통해서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인간은 반복되는 의식을 통해 타성에 젖기 쉬위며,  본질을 잃어버리고 형식을 준수하는 데 만족할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자로서 합당한 자질을 구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윗은 주님의 성막에서 드리는 제사 의식에 형식적으로 출입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성전 예식에 담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 하나님과 갚은 영적 교제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성전 출입의 자격 요건을  물었던  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신약 시대에 오면 성전으로서의 자신의 몸을 얼마나 성결하게 다듬느냐로 이어진다(고전 6:19). 우리는 다윗이 제기했던 질문을 상기하면서 늘 자신의  상태가 하나님의 성소로서 합당한지를 점검해야 한다.
  둘째,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 요건을 말해주고 있다(2-5절). 1절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되어있는 본 대목은 (1)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일치된 삶(2-5절f.), (2)일치된 삶을 사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5절ff.)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다윗은 성소에 거할 수 있는 자의 자격을 모두 열 가지로 제시한다.  이  열가지 조건을 열거하면 (1) 정직하게 행함 (2) 공의를 행함 (3) 마음의 진실(2절)  (4)
비방하지 아니함 (5) 이욱에게 행악지 아니함 (6) 이웃을 훼방하지 아니함(3절) (7)망령된 자를 멀리하고 경건한 자를 가까이 함 (8) 헛된 맹세를 아니함(4절), (9) 무거운 이자율로 가난한 자를 착취하지 아니함 (10) 뇌물을 받지 아니함(5절) 등이다. 이상의 조건을 고찰해 볼 때 우리는 여호와의 장막에 유할 수 있는 조건은 결코 어떠한  이론이나 의식(儀式)이 아니라 삶의 총체적인 진실함임을 알 수 있다.
  이 열 가지의 조건을 좀더 자세히 분석해 보면, 적극적인 기준과 소극적인 기준으로 나눌 수 있다. 적극적인 기준이란 어떤 것을 행하라는 명령을 말하며, 소극적인  기준이란 어떤 것을 행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명령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이론이나 의식에 그치지 아니하고 순종하는 삶, 실천하는 행위에까지  이른다는 분명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살아가는 자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의를 행하고 소극적으로 악을 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도덕적 행위는 자연인의 노력에 의한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연인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결코 위에서 언급한 열 가지 조건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단은 본질적으로 타락한    존재이므로  그는 하나님의 뜻에일치하는 아무런 행위도 행할 수 없을 만큼 전적으로 부패되었다(시 10:2-11). 따라서 본구절에 언급된 구체적인 행위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 만이 행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위의 조건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윤리와 도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다윗은 마지막으로 이러한 규례를 지키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않는다는 약속을 첨가한다(5절ff.). 이 약속은 당연한 결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는 자는 주의 장막에 거할 수 있는데, 그곳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반석이시다(31:3;42:9; 사 26:2-4). 따라서    하나님과 동거하는 자는 영원한 축복과 안전을 보장받는다.

  *. 참된 예배의 기초. 본시는 성전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에 대해 논의함으로
써 우리에게 참된 예배의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다.
  (1) 참된 예배는 반드시 하나님 중심으로 드려야 한다(1절). 순례자들은 시온의  보좌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께로 나아와 경배하기를 열망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거하기를 원하며, 자신이 그러한 자격이 있는지에 관심을 가진다. 이같이 참된 예배는 모든 생각이 하나님께 집중되어야 한다.
  (2) 참된 예배는 거룩한 생활을 통해서 가능해진다(2-5절). 성전 예배에    참석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경배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삶이 경건한가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으로 열광적인 의식(儀式)을 생각하지 않았고, 일상 생활의 거룩성을 염두에 두었다. 다윗은 매일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태도를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실제적인 조건으로 제시하였다. 사실 '주여 주여'라고 열광적으로 외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순종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권리들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된다.
  우리는 이상에서 이상적(理想的)인 예배는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경배하는    태도임과 동시에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행위임을 알 수  있다.  생활 예배와 의식적 예배가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는 바리새적 위선이나    이원론적  도피에 경도(傾倒)될 우려가 있다. 우리는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려 참된 영적 예배에 도달해야 할 것이다(롬 12:1)

  *. 성산(聖山)의 의미와 의(義)의 원형.  본시는 성산에 들어갈 자의 의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제 본 강해에서는 그 내용을 신약적 관점에서  재조명하여 본질적 의미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먼저 성산의 의미를 살펴보면 본시에 언급된 성산은 시온을 의미하는데, 신약적  의미로 시온은 지상의 모든 삶을 초월한 궁극적인 세계를 의미한다(사 2:2). 따라서  성산(聖山)에 거한다는 말은 이 세상의 모순을 극복한 상태에서 경험하는 궁극적인 기쁨과 평안을 의미한다. 시온은 종말론적인(eschatdlogically) 하늘의 예루살렘이며,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가 있는 곳이다(히 12:22, 23). 특히 계시록에 언급된 '하늘의  예루살렘'은 거룩한 무리들의 최종적인 목적지이자 안식처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주의 성산 곧 시온은 신약 교회가 바라볼 종말론적 실체이며 궁극적인 소망이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구약 시대의 순례자들이 시온 성에 거하기를 갈망했던  것처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열망하며, 하나님을 합당하게 예빼할 수 잇는 신앙 인격을 형성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음으로 성산에 들어갈 조건으로 제시되고 있는 열 가지 덕목에 대해 알아보자. 본시에 언급된 열 가지 조건들은 '의'(*      , 체데크)의 증표이자  원형(prototype)으로서 사실상 인간의 능력으로는 수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조건들은 단순히 인간의 도덕적 생활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의(義)의 원형이시자 의(義) 자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성품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고전 1:30).  이렇게  볼때 이 열 가지 조건들을 구비한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 날마다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을 의미한다(롬 13:14). 거룩한 성품이란 인간 자시의 능력으로 창조할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교제 안에서만 가능하다.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하나님의 은혜를 바도 새 사람이 되는 신령한 축복을 얻을 수 있다(엡 2:1-10). '은혜에 들어감' 이외에는 다른 어떤 방버으로도 결코 이 조건들을 완비할 수 없고 결국 하나님의 궁극적인 세계이자 성도의 최종적인 안식처인 하나님  나라에도 들어갈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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