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민수기 14장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14:1
부르짖으며...곡하였더라 - 특정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세와 아론 및 두 신앙적인정탐꾼을 제외한 모든 백성이 일제히 소리 높여 울기 시작했다. 불신앙의 바람이 이스라엘 전체를 휘몰아쳤던 것이다. 모세는 이러한 백성들의 비탄에 찬 반응에 대해'소리 높여', '부르짖으며', '곡하였다'고 표현함으로써 그들의 울부짖음이 점차 고조되고 확산되어가고 있음을 시사하였다. 한편 여기서 '소리를 높이다'(* , 타사 에트 코람)는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소리 높혀 외치다' 또는 '불타는심정으로 아우성치다' 등의 뜻이며, '부르짖다'(* , 나탄)란 '가슴을 치며 울다'는 뜻이다. 그리고 '곡하다'(* , 바카)는 '몹시 애통(한탄)하며 울부짖다'란의미이다. 결국 그들은 완전히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밤새도록' 절규하며 점점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갔던 것이다. 그들이 절망 가운데 오히려 하나님을 찾아 간구하기 보다 자기 연민과 회한의 감정에 빠져든 근본적인 이유는 오직 약속에 대한 불신과믿음의 결핍 때문이었다. 실로 믿음이 없이는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다(히 11 : 6).

===14:2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 백성들이 출애굽의 두 지도자를 원망한 것은 배은망덕한일인 동시에 두 지도자를 세우신 여호와의 권위에 도전하는 악행이었다. 이처럼 원망을 일삼는 자는(출 17 : 3) 결국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멸망당하고 만다. 이 사실을교훈삼아 후일 사도바울은 항상 근신할 것을 우리에게 명하였다(고전 10 : 10, 11).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여행 중 상황이 조금만 나빠져도 습관적으로 죽음을 운운했었다(출 14 : 11 ; 16 : 3). 이는 하님의 모든 구원의 은총(유월절 사건, 홍해 사건, 만나 사건 등)을 업신여기는 처사인 동시에, 자유와 생명을 향유할 가치가 없는 자임을 스스로 증거하는 태도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떤 역경에 처할지라도 생명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끝까지 인내해야 한다(약 5 : 7-11).

===14:3
우리를...망하게 하려 하는고 - 패악한 백성들의 억측이다. 하나님은 분명 그 백성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여 당신을 중심한 복된 국가를 만드시려 했다(출 3 : 7, 8).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바로의 추격의 칼로부터, 광야의 죽음의 갈증과 기아로부터 고비 때마다 구원하셨다. 이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던 그들이었지만, 그러나 정탐꾼들의 부정적인 보고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을 적대자요, 살인자로 매도함으로써 씻을 수 없는 죄악을 범하고 말았다. 이처럼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에 관해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엄청난 차이를 나타낸다. 따라서 참 믿음은 지적인데 머무르지 않고 전인격적으로 수납하는데 까지 나아간다.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 백성들의 이러한 불신앙적이고 쓸데없는 걱정은 후일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훗날 그들이 염려했던 자녀들은 생존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오히려 그들 자신은 광야에서 죽음을 맞게 됐던 것이다. 이 얼마나 불신앙의 패러독스(paradox)인가?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처자를 걱정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들의 연약한 믿음을 염려해야 옳았다.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아니하랴 - 죽음을 두려워한 자들의 비겁한 생각이다. 그리고 진정한 자유와 선민(選民)으로서의 특권은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노예 근성의 발로이다. 아울러 애굽이 죄악된 세계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환난을 만난 성도가 옛 죄악된 생활로 되돌아 가고자 하는 어리석음의 전형(典型)을 보여 주고 있다.실로 참 신앙인은 과거 죄악되고 비굴했던 생활에로의 회귀 보다 고난스런 현실을 꿋꿋이 인내하는 가운데 끝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곳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빌 3 : 13, 14).

===14:4
한 장관을 세우고 - 여기서 '장관'(* , 로쉬)이란 '머리'란 뜻으로서 곧 인도자, 우두머리 등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옛 생활로의 복귀를 위해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를 배척하고 자신들의 뜻을 충족시키는 지도자 선출을 운운했다. 이는지금까지의 단순한 불평보다 보다 구체적이고 계획적인 패역으로서, 더이상 하나님의통치를 받지 않겠다는 교만한 발상의 극치요, 배은망덕한 불신의 절정이었다.

===14:5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 모세와 아론은 폭도(暴徒)가 된 백성들에게 대항치 않고그들 앞에서 이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표시로 엎드려 간구하였다(Calvin).그리고 간구의 자세는 배를 땅에 대고 누운 자세를 취하였다.

===14:6
여호수아와...갈렙이 그 옷을 찢고 - 두 지도자 모세와 아론의 행동(5절)에 신앙의 두 정탐꾼이 동조하는 장면이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옷을 찢는 것은 극한 슬픔과 고통과 분노를 표시하는 행위이다(창 44 : 13 ; 스 9 : 5).

===14:7
심히 아름다운 땅(* , 토바 하아레츠 메오드 메오드).여기서 '심히'를 뜻하는 원어 '메오드'는 반복될 경우 보통 최상급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리고 '아름다운'이란 '풍부한', '편한', '잘되는' 등의 의미를 뜻하기도 한다.결국 위의 말은 가나안 땅이 자신들이 보아왔던 그 어떤 땅보다 비옥하며 풍족할 뿐아니라, 영적으로도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축복되고 은혜로운 땅임을 시사한다.

===14: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 가나안 땅 입국은 오직 '여호와의 기쁘신 뜻', 곧그분의 주권적인 은혜에 기인한 것임을 밝혔다. 따라서 가나안 땅 입국은 인간의 행위나 주변의 상황에 구애됨 없이 오직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 여부에 따라 결정될 것이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은혜는 일찍부터 베풀어져 있었다. 백성들은 단지 그 은혜를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되었다. 따라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바로 이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 출 3:8 및 민 13:27, 그리고 신 11:9 주석을 참조하라.

===14:9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 여호와를 거역하는 것은 곧 (1)여호와의 약속을 믿지 않는 것과 (2)여호와의 뜻을 거부하는 악행을 동시에 의미한다. 일찍이 여호와는 가나안을 그들에게 약속하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가나안에 거룩한 나라를 건설코자 하는 뜻(계획)을 가지고 계셨다(출 3 : 8).
그들은 우리 밥이라 - 이는 손쉽게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찬 말이다.동시에 이 말은 가나안이 이스라엘의 필요를 넉넉히 채우는 보고(寶庫)임을 시사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한편 여호수아와 갈렙이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여호와가 함께 하신다'는 믿음 때문이었다(수 1 : 5, 6). 그러므로 실로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굳센 믿음을 가질 때 인간이 지닌 제문제는 말끔히 해결된다(롬 8:31-39).
그들의 보호자(* , 칠람) - 직역하면 '그들의 그림자'이다. 무서운 사막 지역에서는 큰 산이나 반석이 태양의 열기를 차단하는 보호물이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보호를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으로 '반석', '산성'(시 18 : 2), '그림자'(시 91 :1, 2)등이 자주 사용되었다. 한편 본문에서 가나안 백성을 향한 여호와의 보호(그늘)기능은 '일반 은총적' 측면, 곧 가나안인들에게 구원을 목적한 보호가 아니라 일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배려하신 보호를 의미한다(마 5 : 45). 그러므로 본절은 가나안 원주민에게는 이제 이러한 배려까지 철회된 상태이므로, 그들은 전혀 희망없는 족속들임을 강조한 말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신 바 가나안족속에 대한 심판 유예 기간은 이제 끝났던 것이다(창 15 : 16).

===14:10
온 회중이...돌로 치려하는 - 정곡을 찌르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설득에 오히려 백성들이 완전히 이성을 잃고 설치는 격앙된 모습이다. 이는 마치 스데반의 의로운 설교에 유대인들이 그를 돌로 치는 모습과 같다(행 7 : 57, 58). 실로 회개를 모르는 패역한 백성들의 공통된 모습인 것이다.
여호와의 영광이...나타나시니라 -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이 침해받을 때에 결연히 일어나셔서 영광을 보존하신다(16 : 42 ; 욥 38 : 1).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전격적인 개입은 항상 악인에게는 심판을, 의인에게는 구원과 축복을 동반한다(시 37 : 28 ; 145 : 20). 한편, 여호와의 영광이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셨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카일(Keil)은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상징하는 '빛의 섬광'이 회막의 구름 가운데로부터 터져나왔을 것이라고 추측한다(출 16 : 10).

===14:11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를 대변하는 말인(출 10 : 3 ; 16 : 28 ; 렘 23 : 26)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불평과 반역을 일삼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음을 나타낸다. 실로 하나님은 그들의 해방과, 광야에서의 생존을 위해서 많은 '이적'을 그들의 목전에서 베푸셨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또다른 '이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이었다(마 11 : 20-24).

===14:12
전염병으로...멸하고 - 하나님께서 패역한 백성을 친히 진멸코자 계획하신 것은 이번만이 아니었다(출 32 : 10). 그만큼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멸망당해 마땅한 패역한 백성이었다. 한편 여기서 '전염병'(* , 데베르)이란 '흑사병'과 같은 악성 유행병(plague)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치료불가능한 질병이었다(32, 33절).
너로...크고 강한 나라를 - 이는 금송아지 우상 사건 때에도 언급된 말이다(출 32: 10). 이처럼 거듭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산 백성들은 광야에서 처참한 죽음을 맛보아야 했으며, 이로인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창 12 : 2 ; 17 : 7) 모세를 통해 이루시려던 당신의 나라를 건설코자 하는 계획도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록 패역한 세대는 포기하셨지만, 당신의 나라 건설이라는 원대한 계획은 모세를 통해 계속 추진하고자 하셨다.

===14:13
주의 능력으로 - '능력'(* , 코아흐)이란 '생기', '힘' 등을 의미하는 말로써여기서는 열 가지 재앙 등으로 애굽의 바로와 그 신(神)들을 파멸시키고 가나안 광야여정을 주도하셨던 하나님의 주권적인 힘을 가리킨다. 출 32 : 11에는 '큰 권능과 강한 손'이란 말로 더욱 시각적이고 박진감 넘치게 표현하였다.

===14:14
그들도 들었으니 - 여기서 '그들'은 애굽 백성들을 비롯하여 이스라엘이 광야 여정동안 거쳐 온 주변 족속들 및 가나안 열족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애굽에서 해방되어 가나안으로 향하던 이스라엘 위에 베풀어진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명성을 곧 그들의 신 여호와의 명성으로 간주하였다(15절).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몰락(이유야 어떻게 되었든)은 곧 하나님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라는 것이 모세의 중보 기도의 논지(論旨)였다.
대면하여 보이시며 - 매우 친밀한 관계를 의미한다<12 : 8>.
낮에는 구름 기둥...밤에는 불 기둥 - 출 13 : 21 주석 참조.

===14:15
한 사람 같이 - '단번에'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모든 백성을 정녕 단번에, 한 사람 죽이듯이 매정하고 단호하게 몰살시키실 것이냐는 눈물어린 탄원조의 말이다.

===14:16
여호와가...능이 없는고로...죽였다 - 모세의 간절한 중보 기도는 자신의 체면과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지 않기를 바라는 충정에 근거하고있음이 확연히 밝혀졌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전부 정당한 것은 아니었다. 만일 모세의 주장 대로라면 하나님은 이방 민족들의 비판적인 눈을 의식하여 패역한 이스라엘을 결코 정의롭게 치리(治理)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기도가 호소력을 가지는 이유는, 이유야 어떻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언약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방인들에게는 만약 이스라엘 자신들이 섬기는 신에 의해 그백성이 죽었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한낱 조롱거리 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방인들은 '여호와'란 신(神)이 어떻게 우연히 애굽의 신을격파했는지 몰라도, 막상 가나안 신들과의 싸움을 앞두고 그 패배가 두려워 그러한 우스꽝스러운 일을 벌였다고 한껏 조롱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바로 이러한 점을깊이 염려한 것이다.

===14:17
이미 말씀하신 대로 - 금송아지 우상 숭배 사건을 종결짓는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의 중보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던 부분(출 34 : 6, 7)을 일컫는다. 여자적(如字的)으로 똑같지는 않으나 그 의미상 동일하다.

===14:18
본절은 모세의 호소가 성숙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보여 준다. 즉 그가 인식한 하나님은 인자가 많아 죄를 용서 하시는 분이시지만, 그렇다고 그 사랑으로 인해 죄악을그대로 방치해 두시지는 않는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이다. 실로 긍휼과 인자가 풍성하신 하나님은 사죄하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나 이 사죄(赦罪)는 죄악을 방치하는것으로써가 아니라, 공의에 기초한 희생 제물로써만 가능하다(히 9 : 22). 이런 사실은 본절의 '사하다'(* , 나사)란 말이 '옮겨버리다'(bearing away), '감당하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는 데서 확실시 된다. 즉 이 말은 희생 제물을 통한 대속적(代贖的)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이같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성품이 가장잘 드러난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사건이다(롬 3 : 25, 26).

===14:19
주의 인자의 공대하심을 따라 - 앞절에는 공의와 사랑이 조화된 하나님의 성품이언급되었는데, 본절은 모세가 그 성품 중 그분의 '인자'(仁慈)에 더욱 매달리고 있는장면이다. 실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죄용서 받을 수 있는 아무런 자격이 없다. 따라서 만약 하나님이 공의로만 인간을 대하신다면, 그 앞에 살아남을 사람은 한명도 없다(룸 3 : 10-18). 그러므로 연약한 인간은 그분의 광대하신 인자에 매달릴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사하신 것 같이 -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과 원망은 실로 그 뿌리가 깊다. 즉 출애굽 직후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 왔을 때(출14 : 10-12), 마라에서 먹을 물이 없었을 때(출 15 : 22-24), 신 광야에서 먹을 것이부족했을 때(출 16 : 1-3), 르비딤에서 마실 물이 없었을 때(출 17 : 1-3), 모세가 시내 산에서 더디 내려온다고 생각했을 때(출 32 : 1), 광야 여행이 좀 힘들다고 생각됐을 때(민 11 : 1), 애굽의 생선과 마늘 등이 먹고 싶었을 때(민 11 : 4-6), 그리고 지금 가나안 땅의 정복이 어렵다고 생각했을 때, 그들은 지체없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또한 그들을 세우신 하나님을 멸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은 진노하시되,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사 그들을 멸하시지는 않으셨다. 그러므로 모세는 다시 한번 그 크신 자비하심에 의뢰하여 죄사함을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14:20
내가...사하노라(* , 살라흐티) - '내가 사했노라'(KJV, RSV-, I havepardoned)로 해석함이 좋다. 즉 하나님의 사죄는 벌써 완결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백성들이 당장 한번에 죽지 않게 되고, 또한 기존의 이스라엘을 폐하고 모세를 통해 새 민족을 세우시겠다는 말씀을 취소하셨다는 뜻이지 그들에게 마땅히 내릴 형벌조차 취소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금송아지 숭배 사건 때 보류되었던 그 형벌(출 32 :3)에 지금의 죄악까지 겹쳐 이제 그 죄악의 한도가 찼기 때문에 더 이상 형벌을 미룰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원망하던 백성들은 하나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가야 했다.

===14:21
진실로...맹세하노니 - 직역하면 '내가 살아 있는 것과 같이, 여호와의 영광이 온땅에 가득하게 될 것처럼'이다.
나의 사는 것 - 보통 사람들이 맹세를 할 때에는 자신보다 탁월하고 불변하는 존재의 권위를 빌어 맹세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존재 위에 거하시는 최고의 권위자이기 때문에 어떤 약속과 맹세를하실 때는 하위(下位)에 있는 어떤 대상을 두고 약속하실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다만 당신 스스로의 권위로 맹세하실 뿐이다(히 6 : 13, 14). 그러므로 이는 유일신 여호와(스스로 있는자, I am who I am)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한편 이처럼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를 두고 한 맹세는 결코 변경되거나 상쇄되지 않고 반드시 성취하신다.
여호와의 영광이...충만할 것 - 백성들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창 12 : 1-3 ; 17 : 5-8) 당신의 나라 건설과 선민(選民)의 번영을 온전히 주도해 가심으로써 온 우주 가운데 당신의 영광이 충만할 것이라는 말씀이다(빌 2 : 9-11). 이는 당신의 영광스런 계획이 결코 수정될 수 없음 같이 22, 23절의 저주 선언 역시 결단코 철회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14:22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 여기서 '10'은 '완전수'이다. 그런 점에서 '열 번'이란 숫자적으로 꼭 '10회'를 가리킨다기 보다는 백성들의 끝없는 반역을 강조한 표현이라 볼 수 있다. 한편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한 사건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홍해 사건(출 14 : 11, 12), 마라 사건(출 15 : 23, 24), 신 광야 사건(출 16 : 2), 만나 사건(출 16 : 20, 27), 르비딤 사건(출 17 ; 1-3), 금송아지 사건(출 32 : 1-6), 다베라 사건(11 : 1), 기브롯 핫다아와 사건(11 : 4-23), 가데스 바네아 사건(14장) 등이다(Keil & Delitzsch, Vol. I- . p. 94).

===14:23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치 않는 자, 그리고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한 자들은 예외없이 약속된 기업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실로 불신앙이 빚어내는 비극적 결과이다.

===14:24
오직 내 종 갈렙은 - 20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중 오직 갈렙만이 가나안 입국을 허락받은 것은 아니다. 여기서 갈렙은 20세 이상으로 그 처벌 대상에서 면제된자들을 대표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갈렙이 일반 백성들의 신앙적 수준에서 가장온전히 여호와를 의뢰한 자로 대표되기에 족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갈렙은여호수아(그는 모세의 뒤를 이어 전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를 비롯하여 아론과 엘르아살(수 14 : 1) 등 레위 지파(이들은 정탐꾼을 파견하지도못했고, 또한 가나안 땅의 분배에서도 제외될 것이었다) 등의 다른 입국자들을 대표해서 언급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아직 가나안 입국 금지 선고가 내려지지 않았던(27 :13, 14) 모세의 경우도 지금은 '갈렙'이란 이름 안에 감추어진 입국자였다고 할 수 있다.

===14:25
골짜기 - 이 골짜기는 팔레스틴의 남방 사막 지대(Negeb)를 일부 포함하고 있는 아모리 산지의 접경 지역, 곧 오늘날 '와디무레'(Wady Murreh) 골짜기를 가리킨다(Keil & Delitzsch, op. cit. p. 95).
돌이켜 홍해 길로 하여 광야로 - 약속의 땅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도 입국을 마다하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다. 그들은 가나안을 눈 앞에 두고 '돌이켜' 홍해로 나 있는 길<출 13 : 18>을 통해 다시금 '시내 광야'로 들어가야 했다. 이제 그들은 아무 목표없이 그저 광야를 방황하는 초라한 유랑 민족의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실로 목표없는 삶이 무의미하듯 지향할 곳 없이 방황하며 오직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려야 했던 그들은 이제 지옥의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었다. 이는 불신앙의 결과가 얼마나 처참한 지를 똑똑히 보여 준다. 한편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에 대해서는 여호수아 서론 '가나안의 여러 족속들'을 참조하라.

===14:26-35
이 부분은 이곳 가데스 바네아 사건으로 인해 향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소요될 38년간의 광야 생활 및 그 광야 생활 중 받게 될 징계의 원인과 그 징계의 세부적 사항을 다루고 있다.

===14:27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 아드 마타이) - 직역하면 '내가 언제까지?'이다. 거듭거듭 불평과 원망을 일삼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극에 달했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애틋한 심정이 짧은 말 속에 잘 응축되어 있다.

===14:28
나의 삶을 가리켜 - 직연하면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이다. 21절 주석 참조.
내내 귀에 들린대로...행하리니 -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혈기를 따라 지껄인 2절의말("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대로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광야에서' 그들을죽이시기로 결정하셨다는 뜻이다. 즉 백성들은 자신들의 불신앙과 그로 인한 망발(妄發)을 하나님 앞에서 책임져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진리는 다음과 같다. 인간의 혀는 자신의 생사(生死)를 가늠하는 척도이며(잠 18: 20, 21 ; 약 3 : 5-8),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 징계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해서만 심판하신다(마 25 : 40, 45, 46 ; 고후 5: 10).

===14:29
이십 세 이상으로 - 이는 가데스 거역 사건의 책임자 범위에 관한 내용이다. 즉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한 전쟁을 수행할 만한 나이로 계수된 자 곧 육체적, 정신적으로성숙한 나이인 20세 이상(1 : 3) 된 사람들에게 불신앙의 첵임을 물어 광야에서 죽게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의 군대 구성원으로서 죄악된 이방 세력과 싸워야 했음에도,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분의 약속을 멸시함으로써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였기 때문이다.

===14:30
갈렙과...여호수아 외에는 - 24절 주석 참조.
거하게 하리라 한(* , 나사티 에트 야디 레솨켄) - 원문에가깝게 번역하면 '정착시켜 주겠다고 손들어 맹세한'(공동 번역)이 된다. 이 말을 통해 한 가지 의문시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맹세하신 것을 스스로 파기하시는 변화 무쌍한 존재이신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영원 불변하신분으로서 당신의 계획을 결코 변개(變改)치 않으신다(삼상 15 : 29 ; 약 1 : 17). 그러므로 하나님은 비록 불평하는 자들은 광야에서 죽이실 것이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을 위시한 20세 미만의 새 세대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들이실 것이다. 결국 20세이상 자들이 가나안에 입국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심술 때문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죄악 때문이었다.

===14:31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 여기서 유아(* , 타프)란 원래 '아장아장 걷다'는의미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말이 20세 미만의 사람 모두를 지칭했다. 가데스 바네아의 불평, 불만자들은 이들을 핑계로<3절> 가나안 정복을 반대했으나, 하나님은 바로 이들을 보존하시기로 결정하셨던 것이다. 아마 이들은 아직 육체적, 정신적으로 미숙하여 여호와의 군대 구성원이 될 수 없었고, 따라서 가나안 정복전쟁에 참여해야 할 책임이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에 형벌이 모면된 것 같다. 하지만이들이 생존할 수 있었던 더 큰 이유는, 이들을 통해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신하나님의 은혜로 봄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반드시 만 20세가 되지 않은 자라고 해서모두 불평, 불만을 하지 않은 자라고 보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본질상 죄 아래 놓여 있다(엡 2 : 1).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힘입지 않고는 누구도 생존할 수 없는 것이다.

===14:32
엎드러질 것이요 - '엎드러지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팔'(* )은 '허물어지다'(rall down), '내던져지다'(throw down), '사라지다'(perish)등의 뜻이다. 즉가데스 바네아의 거역자들은 하나님의 형벌로 광야에서 소망없이 하나 둘씩 스러져갈것임을 암시하는 말이다. 참고 또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내와 베풀고 또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만홀히 여기는 자의 종국을 잘 보여 준다(갈 6 : 7). 한편, 전체 200만이스라엘 인구 중 20세 이상 된 남자와 여자의 수효를 대략 120만명으로 산정한다면,38년(13,870일) 기간 동안에 매일 80-90명이 죽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따라서이러한 하나님의 징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순종의 죄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끼도록 하기에 족했을 것이다.

===14:33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지고 - 여기서 '패역한 죄'(* . 누테켐)란 '간음' 또는 '우상 숭배'를 뜻하는 말인 바(출 34 : 16), 본문의 기자(記者)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평하고 자신들의 고집을 내세운 것을 '영적 간음'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죄를 범한 자의 자녀들은 그 부모의 영향을 받아 광야에서 40년동안 영적 고통 뿐 아니라 육체적 고통도 감수해야 했다. 부모가 자녀의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는 없으나, 그 생활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출 20 : 5, 6).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 이흐이우로임) - 직역하면 '목자들이 되리라'이다. 카일(Keil)은 이 해석을 받아들여 '휴식이 전혀 없는(광야의) 목자 생활을 하리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즉 끝없는 방랑으로 피곤한 삶을 살 것이라는 뜻이다.

===14:34
사십 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 하나님께서 형벌로 내린 40년 광야 유랑 생활의 산술적 근거가 제시되었다. 특별히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유랑기간을 친히 정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정확히 계산하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본격적으로 유랑한 기간은 시내 산의 인구 계수 시기(출애굽 제 2년 2월 1일)로부터 아론의 죽음(출애굽 제 40년 5월 1일) 후 새 인구 조사 시기까지 대략 38년이다. 그러나이러한 차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출애굽 직후부터 하나님을 거역하기 시작하여 시내 산의 인구조사가 있기까지 이미 1년 이상을 거역과 불평의세월로 보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미상 그 기간도 방랑의 기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Pulpit Commentary). 그리고 여기서 하나님께서그들을 일시에 죽이시지 않고 40년 간의 기간에 걸쳐 그들을 징계하신 이유는 다음과같다. 즉 (1)백성들에게 스스로를 반성하며 죄악의 비참한 결과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고 (2)또한 20세 미만의 새세대가 구세대를 이어 하나님의 거룩한 임무를 맡을 수있는 성숙함에 이를 때까지의 기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격렬한 심판의 와중에서도 당신의 백성을 향한 긍휼과 사랑을 잊지 않으신다(합 3 : 2).
나의 싫어버림 - 여기서 '싫어버림'(* , 테누아티)이란 '거절하다', '낙담시키다'는 의미로서, 계속적인 이스라엘의 거역과 불평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실망하시고 더이상 은혜 베푸시기를 거절하시고자 하심을 가리킨다. 이처럼 인간의 죄는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장애물인 것이다.

===14:35
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 - 뒤이어 언급되는 말들이 신적 권위를 지님을 나타내 준다. 실로 하나님의 권위로 말해지는 것은 그 자체가 곧 완전한 성취를 의미한다.

===14:36
그 땅을 악평하여...원망케 한 사람 - 곧 13 : 4-15절에 언급된 바 12명의 각 지파정탐꾼 중에서 유다 지파 갈렙과 에브라임 지파 호세아(여호수아)를 제외한 나머지 10명의 정탐꾼들을 가리킨다<이들의 목록에 대하여는 13 : 4-15 주석 도표를 참조하라>.

===14:37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 백성을 충동질하여 온 이스라엘에 불신과 불평을 조성한 10정탐꾼들은 '여호와 앞에서', 곧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분명히 보아 확인할 수 있는 어떤 공개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징벌을 받아 처참한 죽음을 맛보아야 했다. 이는 거룩한 공동체에 범죄를 유포시키는 죄가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똑똑히 보여 주는 한 예이다(고전 10 : 10).

===14:38
여호수아와...갈렙 - 이 두 믿음의 용사는 후일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도 지대한 공헌을 세운다. 즉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가되어 가나안 정복 전쟁을 총지휘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고, 갈렙은 가나안 족속중 가장 강력한 족속인 아낙 자손을 물리치는 용맹무쌍한 업적을 이룩했다. 실로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 앞에서 가나안 족속은 그들의 밥이었던 것이다(9절).

===14:39
모세가 이 말로 - '이 말'이란 26-35절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 내용을 가리킨다.
백성이 크게 슬퍼하여 - 백성들의 때 늦은 한탄이다. 이 때 늦은 후회는 여호와의극렬한 분노를 어찌할 수 없었으며, 비록 죄용서<20절>는 받았으나 쓰디쓴 죄의 열매(32, 33절)는 스스로 거둬들여야 했다. 그러므로 회개에는 그 때와 기한이 있는 법이다(고후 6 : 1, 2 ; 히 12 : 17).

===14:40
산 꼭대기로 올라가며 - 이 산은 가데스 근처의 호르 산이다. 이 산은 가나안 남쪽 경계선을 이룬다. 그리고 이 산지에는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거하고 있었다(25절).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이곳을 오른 것은 그 원주민을 정복하기 위함이었다. 즉이스라엘은 이곳을 점령함으로써 그들이 '산의 하나님'의 백성이되며(왕상 20 : 28), 그 하나님께 순종하겠다는 결의를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결행은 광야로 나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25절)을 또다시 정면 거부한 것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더욱 크게 살 뿐이었다. 실로 범죄자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과실을 보상하기 위한 인간적인 노력이나 변명보다 진실된 참회와 순종이다.
여호와의 허락하신 곳 - 아브라함 때로부터 거듭 약속되어져 온 가나안 땅을 가리킨다(창 15 : 16-21).

===14:41
명령을 범하느냐...형통치 못하리라 - 순종이 없는 열심은 결코 복된 결과를 기대할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더할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삼상 15 : 22, 23).

===14:42
패할까 하노라(* , 로틴나기푸) - 직역하면 '패하지 않도록'이다. 전쟁의 주관자(삼상 17 : 47)이신 여호와께서 함께하시지 않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패배를 자초하는 일이다. 한편 하나님께서 그들과 동행치 않은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를 배반하였기'(43절) 때문이다. 즉 그들은 여호와를따르는 일을 거부하고, 자신의 추악한 감정의 노예가 됨으로써, 그들의 왕이신 하나님을 그들의 삶 속에서 몰아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당시 이스라엘에게 시급한 것은 전쟁 수행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회복하는 일이었다.

===14:43
이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 아말렉 족속은 에돔 족속으로부터 갈라져 나와(창 36 : 12), 시내 반도를 중심으로 그 세력을 뻗치며 유랑하던 강력한 유목민들이었다. 그리고 모세 당시에는 이 족속이 가나안 족속과 동맹 관계를 맺은 상태에서 가나안 남방 지경에 거주하고 있었다.

===14:44
그들이 그래도...올라갔고 - 모세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출전 금지 명령을 끝내청종치 않고, 자신들의 그릇된 열심이 마치 하나님을 섬기는 최선의 방법이라도 되는 양 이스라엘은 막무가내로 서둘러 금지된 땅으로 올라갔다. 특히 '그래도'란 말은 백성들의 의지적인 불순종과 불신앙이 최고조에 달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하나님을 제외시켜버린 종묘적 열심은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온다(사 1 : 10-17).
언약궤와 모세는 진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 이는 모든 백성이 산에 오른 것이 아니며 일부분은 산 아래 머물러 있었음을 시사한다. 더욱이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산 아래 있었던 사실은 여호와께서 산에 오르는 자 가운데 함께 계시지 않았음을 시각적(視覺的)으로 보여 준다. 하나님(언약궤)을 앞세우지 않고(10 : 33), 자신의 고집과 주장을 하나님의 권위 위에 둔 자에게는 늘상 실패만 따를 뿐이다.

===14:45
내려와 쳐서 파하고 - 이스라엘의 어리석은 고집은 그들의 치욕적이고도 철저한 패배로 끝이 났다(신 1 : 44). 이 패배는 출애굽 후 이스라엘이 최초로 겪은 것이다. 한편 이때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징계코자 사용하신 심판의 도구라 할 수 있다<수 서론, 가나안의 여러 족속들>.
호르마까지 이르렀더라 - '저주'라는 뜻의 '호르마'는 가데스 부근의 한 장소이다. 비록 이곳은 훗날 이스라엘이 재탈환하여(21 : 3 ; 수 12 : 14 ; 삿 1 : 17) 시므온 지파에게 분배하였지만(수 19 ; 4), 가나안 정복의 첫 교전이라 할 수 있는 이곳에서의 패배로 가나안 주변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깔보고 무시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하나님의 명령과 인도를 거부한 자는 세상으로 부터 치욕과 멸시를 당하게 된다(마 5 : 13, 14).

 

 

 

  가나안 땅을 상세히 정탐하고 돌아왔던 사람들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
의 정탐꾼들이 비극적인 보고를 했던 전장(13장)에 이어 계속되는 본장에는 그 보고에
기가 질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탄과 원망 및 그에 따른 하나님의 징벌  등이  엮어져
있다.
  즉 본서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상황을 다루고 있는 본장 내용은    10정탐꾼들의 불
신앙적인 보고를 들은 백성들의 원망(1-3절)    분노한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돌로
치려 한 사실(4-10절)    이에 진노하신 여호와의 진노를 돌이키기 위한 모세의  중보
기도(11-19절)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자와 광
야에서 죽을 자들을 가리신 내용과 40년간 가나안 입국 유보(20-35절)    그리고 부정
적인 보고를 했던 10정탐꾼을 재앙으로 죽이신 사실(36-38절)     하나님의  명령없이
아말렉과 가나안 족속을 치러 나섰던 이스라엘의 패퇴(敗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 정탐꾼들의 비극적인 보고는 방금 애굽의 노예 생활을 청산하였고 무기도 제대
로 갖추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절망적인 공포만을 안겨다 줄 수 밖에  없었
다. 따라서 자신들의 힘으로는 가나안 정복이 전혀 역부족임을 알게 된 백성들은 밤새
껏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울부짖었다. 불신앙과 부정적 사고는 이처럼 그  전염성이
강했다. 이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그분의 통치를  인정하
는 믿음을 저버렸던 그들에게 남은 것은 끝없는 절망과 허무한 죽음 밖에 없었다.  그
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목적하고 모인 신앙 공동체 내에서는 전염성과  파괴성이  강한
불신앙과 원망을 일소(一掃)하는 데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어떤 역경을  만날
지라도 절망치 않을 믿음을 소유하여야 한다.

   1. 불신앙적 보고에 접한 백성들의 원망(14:1-10)
  전장의 마지막 부분(13:31-33)에서 보았듯이 가나안  정탐을 마친 10명의  족장들은
가나안 땅과 그 거민의 강성함으로 인해 자신들은 결코 그곳을 정복할 수 없노라고 하
는 비보(悲報)를 전하였다. 본문은 바로 그 비보를 접수한 백성들의 자포 자기적인 울
부짖음과 원망을 다루고 잇다.
  즉 본문은 불신앙적인 보고를 들은 백성 전체가 밤새도록 애곡한 사실(1절)과  자신
들을 인도한 모세와 아론(2절) 및 더 나아가서 하나님에게(3절)까지 원망을 서슴지 않
았던 장면, 그리고 그들이 애굽으로의 귀환을 도모한 사실(4절) 등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백성들의 불신앙적 행위를 자제시키기 위한 지도자들의 정성어린  노력(5-9절)과
이에 분노한 백성들이 돌로 치려고까지 한 사실(10절)을 다루고 있다.
  이와 같이 10정탐꾼의 불신앙적  보고는 백성에게 실망과 두려움을 안겨 주었고  그
두려움은 발전하여 하나님과 그 종들을 원망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끝내
행진해 왔던 길을 되돌아 애굽으로 가고자 하는 패역한 계획을 세우고 말았다. 이처럼
불신앙은 인간에게서 용기와 감사를 송두리째 빼앗아 가며, 그를 불만과 절망의  노예
로 전락시킬 뿐 아니라 마침내는 옛 죄악의 길로 되돌리고야 만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는  말처럼  항상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을 인식하며 불신앙의 유혹에서 떨쳐 일어나야 할 것이다.

  * 옷을 찢는 열정. 여호수아와 갈렙은 불신앙적  보고로 백성을 절망의 나라로 떨어
뜨린 10명의 정탐꾼들과 함께 가나안 땅을 탐지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원망과  폭동에
대해 깊은 책임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더욱이 그들은 백성들의 패역에 그대로 방관만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옷을 찢음으로 신앙의 결의와 극한  분노(의
분)를 나타냈고 죽음을 각오하고 백성들에게 신앙으로 굳게 설 것을 외쳤다.
  이처럼 진리를 파수(把守)하기 위해 생명을 내건 그들의 신앙적 결단과  의분에  찬
열정은 오늘을 사는 모든 성도들에게 큰 교훈을 준다. 이 세대의 엄청난 비리(非里)와
죄악상을 바라보는 성도들에게는 자신의 옷을 찢듯이 마음을 찢고 통회하는 열심과(욜
2:13) 진리되신 그리스도의 복음에 입각해 타락한 세상을 향해 외치는 결연함이  필요
하다. 불의(不義)를 보고 회피한다든지 용기없이 침묵해 버리는 것은 곧 그에 대한 간
접적인 동조일 뿐 아니라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망각하는 처사이다.

  * 죽었더라면 좋았겠다는 망언(妄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여정동안 조그마한 고통을 만날 때마다 '차라리  죽었더라
면 좋았을 것을  '이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하곤 했다(출 14:11;16:3). 즉 그들은 죽더
라도 신앙을 지키며,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떳떳이 살겠다는 용기와는 전혀 거리
가 먼 부정적이고 비굴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이 악하고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거세고  교묘
한 악의 세력에 부딪쳐 희망이 무너질 때마다 '죽었으면 좋겠다'는 비탄조의 말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는 본문
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교훈 삼아 죽음을 논(論)하는 비관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왜냐
하면 이러한 비관은 궁극적으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존재를 불신하는 죄
악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생명을 얻은 우리들의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
이시다(갈 2:20). 따라서 비록 고난에 직면하더라도 우리 자신에게는  절대  절망이란
있을 수 없다. 더욱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과  역경은
우리를 더욱 아름답고 성숙한 존재로 가꿔 가시려는 하나님의 연단으로 이해할 수  있
다(히 12:7-13;약 1:2-4). 그러므로 우리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도 영원히 살  수  있
는' 영생의 비밀(요 11:25,26)을 깨달은 자로서 '죽었으면 좋겠다'는 비신앙적인 넋두
리를 철저히 삼가하여야 한다. 그리고 다만 신앙의 용기와 절대 희망을 품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2. 여호와의 진노와 모세의 중보 기도(14:11-19)
  본문에는 불신앙적인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은 백성들이 온 밤을 지새우며 절규하고,
출애굽의 참뜻을 망각한 채 하나님과 지도자를 원망한 데(1-10절) 대한 하나님의 지엄
하신 분노(11,12절)와 그 분노를 쉬게 하려는 모세의 진지한 중보 기도가 열거되어 있
다(13-19절).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진노하시며 그들을  멸하시고자한  것은
백성들의 누적된 불순종과 당신의 권위와 베푸신 구원마저 부정하려는 그들의 패역 때
문이엇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죽어 마땅한 존재였던 것이다. 이에 민족의  미
도자 모세는 필사적이고도 집요하게 백성의 죄 용서를 호소했는데 그  기도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과 그 언약을 이루실 수 잇는 능력에 근거한
(출 19:5,6;20:2) 기도였다(13,14절). 사실 기도는 하나님께의 백성만이 드릴 수 있는
특권이다(요 14:12-14).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한 기도였다(15,16절). 즉 그의 기도
는 결코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이타적(利他的)인 기도였으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
이 침해당하지 않기를 바란 철두 철미한 하나님 중심적인 기도였던 것이다.      또한
이는 하나님의 공의롭고도 자비로우신 성품에 근거한 기도였는데 그 가운데도  특별히
자비로우심에 호소한 기도였다(18,19절). 사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공의로  다스리기만
하신다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롬 3:10-18). 죄악된 인간이 계속적으로  생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성품  때문이다(요  3:16;요일
4:10).
  이상과 같이 모세는 먼저 하나님의 영광과 그 백성의 죄 용서를 위해 기도했으며 자
기가 모욕받고, 죽을 위기에 처한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음으로써 중
보 기도의 아름다운 모범을 보였다. 이처럼 타인의 영혼 구원과 안녕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드리는 기도야말로 능력이 있고, 그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하겠다(약 5:14-16).

  * 이적(異蹟)의 궁극적 목적.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고 가데스 바네아까지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신 수많은 이적들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데 백성들은 이처럼 끊임없는 이적을 직접 체험하고서도 여전히 불신과 불평을 일
삼음으로써 하나님을 섭섭하게 해드렸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적을 베푸신 가장 큰  목
적은 그들로 하여금 살아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도록  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하여 용기있게 광야 행진을 하게 하는 데도 그 목적이 있
었다. 즉 이적의 참 목적과 의미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적으로 입증된 하나
님의 능력과 구원에 대하여 사람들이 믿고 받아들이도록 하는 믿음의 결단 촉진에  있
었다<출 7:8-13 강해, 표징과 이적>.
  그러나 대부분의 백성들은 이 겉으로 드러난 이적만을 추구했으며 그  이적의  유무
(有無)에 따라 그들의 감정도 좌우되었다(11,30-36절). 이렇게 이적의 참 근원이신 하
나님을 믿지도, 그분의 주권을 인정치도 않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
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즉 그들은 이적이 부족해서 원망하며 죽음을 자초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적에 대한 믿음의 결여로 인해 불만을 터뜨리며 죽음을 자초했던 것
이다.
  한편 과학 만능의 세대, 불신(不信)의 세대라 일컬어지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믿
음 이전에 이적을 요구하지만 막상 그 앞에 이적이 주어질 때면 오히려 그것을 비웃고
하나님을 신앙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이적의 능력과 표적
만 구하는  자들과  그  이적을  보고도  믿지않았던  자들에게  크게  책망하셨다(마
11:20-24). 이적은 확실히 하나님의 초월적인 존재를 소개하는 기능을 하는데  하나님
은 그 이적을 보고 그것을 통해 당신을 믿는 자를 기뻐하신다. 물론 이적을 보지 않고
도 믿는 자를 더욱 인정하시며 축복하시긴 하지만(요 20:29;고전 1:22,23)!

   3. 40년 유보된 가나안 입국(14:20-38)
  본문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햇던 모세의 간구에(11-19절) 대한 하나
님의 응답을 기록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거역한 자들은 모두 가나안에 입국하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될 것이라 하셨다(23,29절). 그리고 지금까지의 가나안행 여정에서 광야로  돌이
키게 되고(25절) 이후부터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다(33절).
또한 하나님은 특별히 백성을 불신앙의 늪에 빠뜨린 10정탐꾼들을 당신 앞에서 죽이심
으로 불신앙의 결국이 어떠함을 보이셨다(37절). 결국 하나님을 신뢰한 여호수아와 갈
렙 및 아직 성인으로 인정되지 않은 20세 미만자들만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24,29-31,38절).
  이상에서처럼 가나안(영적으로 천국)을 목적하고 이 세상을 순례하는 자들에게 요구
되는 것은 불신앙의 죄를 떨쳐버리고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다(히 11:6).

  * 제한 연령 20세. 하나님은 가데스 반역 사건의 징벌 대상을 20세 이상된 자로  규
정하시고 광야 40년 방랑 기간 동안 그들 모두를 죽이시기로 작정하셨다. 여기서 제한
연령을 20세 이상으로 못박으신 것은 그 나이가 되면 육체적으로 성숙하여 스스로  책
임질 수 있는 상태이며(1:3), 영적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아는 나이였기  때
문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자에게 그 책임을 물으신 것이다.
  한편 이것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절된 것은 아니었다. 즉 20세 이상의 구세
대를 그 허물로 인해 멸망시키셨으나 20세 미만의 새세대를 통하여  일찍부터  계획해
오셨던 가나안에서의 신국(神國) 건설을 계속 추진하실 것이었다.
  결국 20세로 그 제한 연령을 삼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가운데 있는 죄악을 철저히
도말하여 그들로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민족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게 하기  위해서였
다 하겠다(레 11:45).    또한 백성들의 불신앙과 패역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아브라함
과 맺으셨던 언약(창 12:1-3;17:4-8)을 성실히 이행하고 계심을 나타내기 위해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당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목적은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목적을 온전히 성취하시려 함임을 알 수 있다.

  * 신뢰자에게 주어진 보상. 10:2의 열세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신
뢰하며 가나안 정복을 주창(主唱)했던 여호수아와 갈렙에게는 가나안  입국의  영광이
주어졌다. 반면에 그들을 반대했던 10정탐꾼과 20세 이상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신뢰치
못함으로써 광야에서 그 최후들을 맞아야 했다(시 121편;마 6:25-33;골 3:1-4).
  여기서 특별히 하나님께 대한 여호수아와 갈렙의 신뢰와 그들의 철저한 신앙은 죽음
을 초월한 것으로서 어떤 위경에서도 비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아름답고도  절대적
인 신앙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생명을 보호하셨을 뿐 아니라(01절) 20세 이상된
자로서는 유일하게 가나안 입국을 허락하시는 등의 풍성한 보상을  하셨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비록 구원이 행위에 따른 보상은 아니지만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가 믿음
으로 기쁘시게 해드렸을 때(히 11:6)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이
다.
  결국 그 두 사람은 자신들의 믿음대로 응답받은 것이다(마 9:22,29). 우리는 이  두
사람의 믿음을 통한 구원과 영광을 보면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롬 1:17)는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4. 아말렉과 가나안에 퇴패(退敗)한 이스라엘(14:39-45)
  출애굽 제 2년에 시내 광야에서 계수된 20세 이상의 남자들이 하나님을 원망한 죄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여호수아, 갈렙 제외) 죽게 되며, 가나안 입
국이 40년 뒤로 미뤄질 것이라는 심판 예고(26-35절)를 들었던 이스라엘은 본문에  이
르러 자신들의 죄를 참회하기는 커녕 자력(自力)으로 가나안 입국을 쟁취하려다가  이
방인들에게 대패하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을 약술하면 곧 다음과 같다.    모세가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전하자, 백성들은 크게 슬퍼했다(39절).    곧이어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가나안을
정복해 보갰다는 교만에 찬 계획을 수립했으며, 이에 모세는 하나님이 허락치 않은 그
계획이 무모함을 들어 만류했다(40-43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향해 진격함으로써 불순종의 죄를 하나 더 첨가시켰으며, 끝내 아말렉과 가나안인에게
참패하고 말았다(44,45절).
  사실 하나님의 심판 예고를 받은 이스라엘에게 필요했던 것은 가나안으로의  진격이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철저히 통회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슬퍼하며 후회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일순간의 감정에 불
과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과 심판을 무시하고 순전히 인간의  힘만으로써  목적한
가나안 정복을 감행하려 하다가 그들의 범죄와 그 형벌을 더 심화시켰으며 끝내  치욕
적인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처럼 하나님 없이 결행한 모든 일들은  일순  번영하는
것 같으나 결국에는 실패와 허무로 끝이 나기 마련이다(잠 11:18).

  * 여호와의 동행 거부.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뜻을 무시하는 자들과는  상관도  하지
않으시며, 더욱이 그들이 추구하는 일에 동행 동사(同行同事)하지 않으신다. 이런  사
실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심판 고지(告知)를 받았음에도  무
모하게 가나안에의 진군을 추진했던 이스라엘과 더 이상 함께 하지않으실 것이라는 모
세의 말(42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 동행을 거부하심은 눈에 보이는  일시
적 징벌보다도 무서운 가장 치명적인 심판을 의미한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시므로 그들은 모든 희망을 잃게 되었으며 특별히 하나
님의 보호권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게 하실 때의 고마움과 행복
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원망과 불평으로 하나님께 도전했던 그들은 하나님이 떠나시
고 참패를 당한 후에야 비로소 그 사실을 발견했을 것이다.
  한편 하나님께서 그들과의 동행을 거부하신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치 않음으로써 원망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기적을 베푸시며 특별한 사랑으로 함께  해주신 측량할 수 없는 은혜에 대해 오히려 원망하며 하나님을 대적한 것은 분명한 반역 행위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지 않았어야 했을 일을 한 것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대하여 큰 불충(不忠)이 된다. 종교 개혁자 칼빈(Calvin)의 말대로 '하나님께서  가라는
곳까지 가고 멈추라는 곳에서 멈추는 것'이 참신자의 도리이다.


Articles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