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은나팔 둘 - 은(銀)나팔 모형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 없다. 그러나 로마에 있는 디도(Titus)의 개선문(triumphal arch)과 고대 이집트의 기념비 등에 새겨진 형상. 그리고 유대 사가(史家)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으로 미루어 볼때 이때의 은나팔은 희년(禧年) 때 사용된 곡선형의 구부러진 뿔나팔(레 25:9 주석 참조)과는 달리 관은 가늘고 기나 주둥이는 넓은, 곧은 모양의 나팔일 것으로 추정된다<Keil & Delitzsch, op.cit., p. 54;Pulpit commentary>. 한편 그리고 이때 제작된 나팔은 단지 '두 개'에 불과했는데 그 이유는 당시 대제사장 아론을 제외한 제사장이 두 명(엘르아살, 이다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3:4). 그러나 솔로몬 시대에는 120명의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었다고 전한다(대하 5:12; Matthew Henry's commentary).
쳐서 만들어서 - 여기서 '쳐서'(* , 미크솨)란 말은 '망치질하여'라는 뜻으로, 얇은 은판을 망치로 두들겨서 은나팔을 만들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결국 이 나팔은 정교하지 않고 투박한 형태인 것으로 추정된다(R. Winterbotham).
그것으로...소집하며...진행케 - 은나팔의 기능에 대해 언급되었다. 이것은 불기둥, 구름 기둥과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뜻을 백성에게 전달하는 도구이자 하나님의 통치의 한 방편으로서 이스라엘 광야 여정을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 즉 하나님께서 성막 위에 머문 구름을 떠오르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행 신호를 보여 주시면 백성들은 곧 떠날 채비를 갖추었으며, 이어 제사장들에 의해 불려진 나팔 소리에 의해 모든 백성은 일제히 이동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은나팔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하여 백성들 혹은 족장들을 소집할 때도 사용되었다. 따라서 은나팔의 두 가지 큰 기능은 소집 신호와 진행 신호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10:3
두 나팔을 불 때 - 즉 '모든 나팔(2개)을 동시에 불 때'를 가리킨다. 이때는 이스라엘 전체 백성이 회막문 앞으로 집결해야 했다. 그리고 이때의 나팔 소리는 급박하지않고 차분했다<7절>.
===10:4
이스라엘 천부장(千夫長)된 족장들 - 여기서 '천부장'(* , 라쉐 알레페)으로 번역된 말은 성경 다른 곳에서는 '천만인'으로 번역되었다(1:16; 수 22:14). 곧 각 지파의 '두령'(leader)들을 가리킨다<1:16>.
===10:5
울려 불 때에는 - '울려 분다;'(* , 테카에템 테루아)는 말은 매우 힘차게 떨리는 소리로 불되 간격을 두고 부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영역 성경 KJV에서는 '경보를 불다'(blow an alarm)로, NIV에서는 '폭발음을 내다'(trumpet blast)로 각각 의역하고 있다. 한편 이렇게 나팔이 울려 펴지면 그것은 곧 출발 신호가 되어 '동편 진들', 즉 유다 지파와 앗사갈 지파 및 스불론 지파가 출발하게 된다<2:34 주석 그림>.
===10:6
제 이차로 울려 불 때에는 - 처음 울려펴지는 나팔 소리에 이어 두번째 소리가 울리면 제 2진영인 남쪽 진들(루우벤, 시므온, 갓)이 출발하게 된다. 그리고 본문에는 언급이 없지만 세번째와 네번째의 나팔이 울리면 계속해서 2장에 배치된 진의 순서대로 서편 진들(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에 이어 북편 진들(단, 아셀, 납달리)이 출발하였음이 분명하다(Keil, LXX). 이처럼 하나님은 나팔 신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질서와 순종 의식을 주입시키셨다. 실로 수많은 백성이 한꺼번에 이동하기 위해서는 질서가 절대 필요했다. 그런데 이 질서는 '나팔 소리' 곧 권위에 찬 하나님의 명령에 순응할 때 비로소 갖춰질 수 있었다. 이처럼 진정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고 그분의 말씀이 최고의 권의를 지니는 공동체에는 결코 어지러움이나 분쟁이 있을 수 없다(고전 14:33).
===10:7
소리를 울려 불지 말 것 - 백성들을 회집할 때는 전쟁 수행시나 진의 이동시처럼 강렬하게 높이 울려 불어서는 안되며 평탄하게 같은 높이의 소리로 불어야 했다. 따라서 여기 '불다'란 의미의 히브리어 '타카'(* )는 본래 순간적이고 예리한 소리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그런 소리를 내지 말라는 것이다. 이처럼 회중 소집시 나팔 소리가 평탄하게 조절된 것은 전체 백성들이 모이는 이유가 대체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거나, 특별한 절기를 지킨다거나, 거룩한 회합을 위해서 이므로 경건함과 평온한 상태를 유지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10:8
제사장들이 불지니 - 나팔은 하나님의 뜻을 백성에게 전하는 도구로서 오직 거룩한 일에만 사용되어야 하는 성물(聖物)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을 관리하고 사용할 수 있는 자는 항상 하나님을 가까이서 모시며 또한 백성의 종교, 도덕적 생활을 개도해가야 할 사명이 있는 제사장들이었다. 물론 그들은 자의(自意)에 의하거나, 계시된 명령에 어긋나게 나팔을 불어서는 안 되었다. 오직 그들은 하나님의 대변자(spokesman)로서 항상 깨어 있어 하나님의 뜻을 백성에게 정확, 신속하게 전달해야 했다. 그러므로 이는 오늘날 복음 전파자들에게도 요구되는 바이다. 즉 오늘날 주(主)의 뜻을 전할 특권과 책임이 있는 복음 전파자들은 자신의 욕망과 견해를 일단 접어두고, 오직 그분의 뜻을 바로 분별하고 그것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거룩한 입술을 지녀야 한다(행 15:7; 엡 6:19).
대대에 영원한 율례니라 -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거룩한 관례와 제도의 영구한 실천을 강조할 때에 자주 사용되는 관용적 표현이다(출 12:24). 여기서는 오직 제사장들만이 나팔을 관리하고 사용하며, 소집과 행진, 전쟁, 절기 등에 정해진 규정에 따라 나팔을 불어야 한다는 나팔 사용 규정 전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제사장들은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에도 나팔을 불어야 했다(그러나 나팔이 언제까지 보관,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오늘날 이 나팔 규정은 실제적으로 중단되었으나 영적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계속되며, 신앙 공동체가 각종 모임을 거듭하고, 교회가 사단과의 영적 교전을 계속하는 한 '대대에 영원한 율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 일획(一點一劃)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는 것이다(마 5:17,18). 한편 제사 제도와 관련된 종교적 행사, 전쟁, 왕의 취임식 등에 나팔이 사용된 예는 성경에 가끔 언급되었다(삼하 2;28; 왕상 1:39).
===10:9
너희 당에서 - 달리 표현하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이다. 이것은 나팔 규정이 광야 여행 중에도 긴요하게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후일 가나안 정착시에도 대비한 규정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압박하는 대적을치러 나갈 때 - 여기서 '압박하다'(* , 차라르)란 원래 '꺾쇠로 죄다'는 의미로써 포위하여 몹시 심한 고통을 주는 상태를 가리킨다. 사실 하나님은 가나안 정복.정착시 가나안 7족속(신 7:1)을 제외하고는 주변국과 평화할 것을 명하셨다(신 20:10,11).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압박 하는' 무리가 아니면 평화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참 왕으로 모신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이방의 우상 문화를 주입시키는 외세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처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들의 거룩한 삶을 보존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대적들을 치러 나갈 때에 그들은 여호와의 명을 좇아 나팔 경보에 의해 행동해야 했다. 이때의 경보는 군대의 사기를 북돋우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굳은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며, 또한 여호와의 도움을 통한 승리를 기원하는 역할도 했다.
여호와가...기억하고...구원하리라 -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나팔을 부는 행위는 곧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을 신실히 의뢰하는 표시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전쟁과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나팔을 불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소리를 들으시고 당신의 약속을 기억하사 그 전쟁에 친히 개입하셔서 그들을 승리케 하실 것이라 약속하셨다(시 98:3). 한편 본문에 나타난 바 나팔을 불 때에 '기억하리라'는 말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평상시 이스라엘을 잊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불러오게 된다. 따라서 혹자는 본절과 시편 44:23,24을 예로 들어 하나님의 신실성을 의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한계나 무관심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당신을 찾고 부르는 자들에게 확신과 소망을 제공하기 위해 사용한 수사학적 표현으로서, 곧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이라는 관점에서 이해 하여야 한다(시 50:15; 렘 33:3). 실로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당신을 의뢰하고 부지런히 찾으며 간절히 기도하는 자들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와 사랑으로 그들을 채워주신다(요 14:13,14).
===10:10
희락의 날 - 특정한 날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단지 기쁜 일로 기념될 만한 모든 날들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법궤 운반시(대상 15:24; 16:6), 성전 봉헌시(대하 5:12), 성전 신축시(스 3:10; 느 12:35,41), 부림절(에 9:17-19)과 같은 민족적, 종교적 기념일(대하 29:27) 또는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등이다(Keil & Kelitzsch, Vol. I-iii. pp. 55,56).
정한 절기 -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율례로 명하신 날들 곧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나팔절 등의 절기이다(28,29장; 레 23:24,25). 자세한 내용은 레위기 서론, '히브리 절기와 축제'에 관한 도표를 참조하라.
월삭 - 매 달이 시작되는 첫날을 가리킨다(28:11,14; 삼상 20:24-34). 번제물...
화목 제물의 위에 나팔을 불라 - 이는 그 제물을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시기 원하는 간절함을 내포한 행동이다. 특히 이처럼 '속죄'와 관련되지 않은 제물 위에만 나팔을 분 것은 이스라엘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바친 제물과 그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것이 될 수 있었다(대하 29:27; 시 81:3).
그로 말미암아 기억하리라 -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기쁨과 감사가 깃든 정성스런 헌물과, 그리고 이것이 열납되기를 원하여 부는 백성들의 나팔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기억하실 것이라 약속하셨다<9절>. 특별히 여기서 '기억하다'(* , 자카르)란 말은 '마음에 품다'는 의미로써, 당신의 백성과 교제하시며 아울러 그들의 형편과 처지를 낱낱이 감찰하시고 필요를 따라 채워 주신다는 포괄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다.
===10:11
제 이 년 이월 이십 일 - 이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난 때로부터는 만 1년 1개월 5일이 지난 때였고, 시내 산에 도착한 때로부터는 만 11개월 5일이 지난 때였다. 그런데 바로 이때를 시내 산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아마도 사고자(事故者)들을 위한 제 2차 유월절(9:11) 준수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은 이때 시내산을 출발하여 얼마 후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했으나, 그곳에서 하나님을 반역함으로 말미암아 이후 약 38년 동안을 광야에서 헤매다가 출애굽 제 40년 5월 1일 이후에야 비로소 요단 강 도하 직전의 땅 모압에 도착할 수 있었다(33:38; 신 2:14).
===10:12
자기 길을 행하더니(* , 레마세에헴) - 이는 히브리어 기본 동사 '나사'(* )에서 유래한 말로써, 원뜻은 '장막 말뚝을 뽑아 내다'이다. 결국 위의 말은 '각각 자기가 맡은 소임을 따라 진을 거두고 떠날 채비를 하더니'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성막을 거두어(1:51) 조직적으로 진을 이동하는 모습(2장)을 말한다.
바란 광야에 구름이 머무니라 - 이스라엘은 시내 광야를 출발하여 3일 길을 행하고(33절), 다시 하세롯(11:35)을 거쳐간 후 가데스 바네아가 있는 바란 광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들이 이곳에 도착하기까지는 그 사이에 두 군데의 휴게지(休憩地)를 더 거쳐 온 것 같다(11:34,35; 12:16; 33:16,17). 그러므로 본절은 가데스 바네아까지의 여정을 축약한 것으로써 11절에서 출발을, 12절에서는 도착을 기록하고, 그 사이에 발생한 일은 나중에 12:16까지 자세히 기록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바란 광야 - 시내 반도에 위치한 큰 사막이다. 이 곳은 피신하기 적당한 몇몇 산과 우기(雨期)에 형성되는 많은 시내, 곧 와디(Wady)가 있었다(삼상 25:1).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 지역에서 가나안으로 이르는 지름길로 이곳을 자주 이용하였다. 한편 이곳은 동(東)으로 험준한 아라바 골자기에 접해 있고, 서(西)로는 술 광야에 맞닿아 있으며, 남(南)으로는 호렙산과 연결되었고, 북(北)으로는 남쪽 가나안 경계선에 맞붙어 있다(keil & Delitzsch, Vol. I-iii. p. 57). 결국 이곳은 척박한 사면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죽음의 위협이 늘 도사리고 있는 버려진 땅이었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이 바란 광야에서 머문 것은 시내 산을 출발한 다음 3일 후였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할 때까지 계속적으로 이 광야에서 저 광야로 거처를 옮기는 나그네 생활을 해야 했다. 이는 마치 영원한 천국을 목적하고 광야 같은 이 세상을 하루 하루 전전(轉轉)해야 하는 성도의 현실을 보여 주는 듯하다(히 11:13). 그런데 이러한 나그네 생활에서 가장 요구되는 바는 안내자 되신 하나님의 인도를 날마다 따르는 일이다(고후 1;4).
===10:13
모세로 명하신 것을 좇아 - 즉 2:1-31에 지시된 바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란 뜻이다.
===10:14-16
수두(首頭)로(* , 바리쇼나) - 직역하면, '첫번째'로란 뜻이다. 곧 행군의 제일 선두는 유다 진기에 속한 자들(유다, 잇사갈, 스불론 지파)이었다<1:26-31; 2:3-9>. 그런데 실질적으로 행군 대열에 선봉을 이룬 것은 '여호와의 언약궤'였다(33절). 즉 이스라엘은 인도자 되신 하나님을 앞세우고 미지(未知)의 땅 가나안에로의 행군을 하였던 것이다.
군대...영솔하였고(* , 알 체바) - 직역하면 '군대 위에(있었다)'란 뜻이다. 각 지파의 군대 영솔자, 곧 두령 목록은 1:4 주석 도표를 참조하라. 그리고 각 지파 대표들은 총 지휘관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자기 지파를 통솔하였다.
===10:17
성막을 걷으매 - 이는 계속 이동해야 하는 광야 여행에 용이하도록 설계된 성막의 특성을 반영한다. 즉 성막은 고정된 구조물이 아니라 걷고 세울 수 있는 조립식 천막으로 되어 있었다<출 25:1-9>. 한편 또한 이는 이 땅에 영원한 처소를 마련치 않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걷고 세우기에 편리한 임시 처소에서 생활하는(고후 5:1) 우리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성도는 비록 육체적으로는 임시적이고 불완전한 존재이지만(사 2:22),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기에 영원한 처소가 예비되어 있는 것이다(요 14:3; 고후 4:7,16-18).
===10:18-20
본문은 유다 전기에 이어 제 2대로 발행해야 하는 루우벤 진기(루우벤, 시므온, 갓) 및 그 군대 영솔자들에 관한 기록이다. 자세한 내용은 2:10-16 부분의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행군시에는 이들 앞에 게르손과 므라리 자손들이 성막 물품을 메고 진행하였고, 이들 뒤에는 고핫 자손이 성막의 성물들을 메고 뒤따라 왔다.
===10:21
성물을 메고 - 고핫 자손들은 게르손과 므라리 자손들과 달리 자신들이 맡은 물건을 반드시 어깨로 메고 운반해야 했다<4:5-20; 7:6-9). 한편 여기서 '성물'로 번역된 히브리어 '미크다쉬'(* )는 어떤 '물건'을 뜻한다기 보다 '장소' 곧 거룩한 처소(sanctuary,KJV)를 의미한다. 그러나 '성소'(holy place)를 메고 갈 수 없다는 사실로 미뤄볼 때 문맥상 성소에 배치된 '거룩한 물건'(the holy things, NIV)로 이해함이 옳을 것 같다(18:29). 그들이 이르기 전에...
세웠으며 - 이 말은 고핫 자손들의 직무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고핫 자손에 앞서 출발했던<17절> 게르손과 므라리 자손들의 직무를 언급한 것이다.
===10:22-24
제 3대로 발행한 진영은 에브라임 진 기에 소속된 지파(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였다. 광야 행군시 이들 지파의 바로 앞에는 고핫 자손들이 성물을 메고 진행하고 있었고, 뒤에는 단 진 기에 소속된 지파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10:25-27
제 4대로 발행한 진영은 단 진기에 소속된 지파(단, 아셀, 납달리)였다. 광야 행군시 이들은 행렬의 맨 후미에서 뒤따라 갔다. 한편 각 지파의 두령 목록은 1:4 주석 도표를 참조하라.
모든 진의 후진 - 여기서 '후진'(* , 메야세프)이란 원래 '뒤에 남다', '뒤에서 모으다'는 뜻을가진 말로써 이는 '단 자손 진기에 속한 자들'의 고유 임무를 잘 드러내준다. 즉 그들은 행군 순서상 단순히 맨 뒤에 처진 것이 아니라, 맨 나중에 진행하면서 후방을 경계하고 또한 행진 중 뒤처진 무리들을 모아서 건사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회에서 볼 때 '숨은 봉사자들'에 비유될 수 있다. 이처럼 형제들의 평안을 위해 알게 모르게 헌신하는 자들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는 더욱 확장될 것 이며, 공동체는 더욱 풍성한 은혜를 체험케 될 것이다(빌 4:15-19).
===10:28
그 군대를 따라(* , 레치브오탐) - 직역하면 '그들의 군대대로'이다. 이는 각 지파가 질서 정연하게 지체함이나 게으름없이 행진했음을 묘사한 말이다(14,18,22,25절). 특별히 여기서 '군대'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이상 노예 민족이 아니라, 그리고 또한 애굽을 도망쳐 나온 오합지졸(烏合之卒)이 아니라, 애굽의 모든 우상 신들을 당당히 꺾고 가나안 정복을 위해 행진해가는 여호와의 군대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10:29
미디안 사람 르우엘 - 루우엘은 모세의 장인으로서 미디안 출신 족장이다(출 2:26; 3:1). 그런데 사사기에서는 그를 '겐 사람'이라 호칭하였다(삿 1:16; 4:11). 이는 적어도 '미디안' 족속과 '겐' 족석이 상호 친밀한 유대 관계를 이루었거나, 아니면 통폐합되어 한 민족을 이루었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미디안 제사장(출 20:16-18)이었던 '루우엘'은 성경 다른 곳에서 '이드로'(출 3:1; 4:18; 18:1) 혹은 '호밥'(삿 4:11)으로도 표기되었다. 여기서 '이드로'란 이름은 제사장으로 받은 새이름이거나 그의 신분을 지칭하는 특별호칭인 듯하다. 그러나 사사기 4:11에서 모세의 '장인'으로 표기된 '호밥'이란 인물은 본절에서 표기된 대로 루우엘의 아들, 곧 모세의 처남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장인'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호텐'(* )은 결혼으로 인해 생긴 처(妻)쪽의 관계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말인 바, 따라서 '장인'이란 의미 외에 '처남'이란 의미도 동시에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 문맥상 여기서 '호밥'은 루우엘(혹은 이드로)의 아들로서, 곧 '모세의 처남'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Keil, Matthew Henry). 그러나 그가 언제 매형되는 모세에게로 왔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렇지만 그의 아버지 이드로가 모세의 아내 십보라와 그의 두 아들 게르솜과 엘리에셀을 데리고 모세를 방문했을 때(출 18:1-5) 같이 동행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주마하신 곳으로...진행하나니 - 모세의 이 말은 이스라엘이 지금 목적(가나안 땅) 있는 여행을 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즉 그들은 비록 현재 광야를 통과하는 방랑객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또한 반드시 들어가게 하실 가나안을 향해 진행하고 있다는 신앙과 소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도는 이 세상에서 비록 나그네에 지나지 않지만(히 11:13; 벧전 2:11), 달려가야 할 확실한 '푯대'와 (빌 3:14) 들어가야 할 영원한 '처소'(요 14:3)가 있기에 하루 하루를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다.
선대 하리라(* , 헤타베누) - 이는 '좋게 만들다', '유익을 끼치다', '은총을 입다'는 뜻의 히브리어 '야타브'(* )의 사역형 능동태로써 곧 생활과 지위를 보장하며 각종 혜택을 제공할 것이라는 강한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이는 단지 인간 모세의 약속이 아니라 뒤이어 나오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여호와의 축복에 근거한 약속이었다.
여호와께서...복을 내리리라 - 이를 직역하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대해 친히 말씀하셨다'(KJV, Jehovah has spoken good concerning Israel)이다. 즉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지키시며 복주시고 은혜와 평강주시기를 약속하셨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6:24-26). 따라서 모세는 이 약속을 근거로 호밥에게 동행을 요구했으며 '선대'를 약속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1)하나님의복은 한 개인이나 집단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개방되어 있다(창 12:1-3). (2) 하나님 나라 건설에 동참한 자에게는 풍족한 은혜가 주어진다(마 25:34). (3) 인간의 동역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성취하기도 하신다.
===10:30
나는 가지 아니하고 - 호밥은 불확실한 미래보다는 모든 것이 갖추어진 안락한 현실을 택하였다. 그러나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믿음과 소망으로 확신하는 것이다(히 11:1). 한편 호밥은 한번 거절했으나 , 모세의 강권에 못이겨 끝내 가나안 행에 동행한 것으로 보인다(Knobel). 그것은 후일 사사 시대에 그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에거주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되었기 때문이다(삿 1:16; 4:11; 삼상 15:6; 27:10).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 나라 건설에 유익한 일이라면 전력을 다해 매달릴 수 있어야 하며, 하나님을 모른 자들을 강권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토록 할 수 있어야 한다(눅 14:23).
===10:31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 - 이는 길 안내자로서의 호밥의 필요성을 강변한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구름의 인도로 말미암는 여호와의 절대적인 보호와 인도의 약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인간의 도움이 필요한 것인가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문제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한 일에 인간의 지혜와 재능을 최대로 활용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어릴 적부터 이곳 신 광야 주변에서 자라온 호밥은 그곳 광야의 사정과 변화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터이라 가나안으로 향하는 보도 유리한 행군 노정과 구름이 머무는 근처에서 보다 지형적으로 안전하고 편안하게 진 칠 곳을 익숙히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200만 인구 중에 노약자나 유아 및 병자 그리고 가축까지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꼭 요청되는 도움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을 가나안까지 무사히 이끌 책임이 있는 지도자 모세는 지금 처남에게 강청하고 있는 것이다.
===10:32
복을 내리시는대로...행라리이다 - 즉 여호와 앞에서 대등한 관계를 맺겠다는 약속이다. 29절 주석 참조.
===10:33
여호와의 산 -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출애굽 후 약 11개월 간 머물렀었던 시내산을 가리킨다(출 19:1,2). 자세한 내용은 출 3:1 주석을 참조하라.
여호와의 언약궤 - 이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상징하는 것이며, 그리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언약의 증표인 거룩한 십계명 두 돌판이 보관된 곳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언약의 산 '시내'를 떠날 때 이것을 메고 떠난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계속 지키고, 그분과 친교를 나누며, 그분의 명령에 따라 생활할 것을 나타내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스라엘의 행군 순서상(13-28절)에서는 언급되지 않던 언약궤의 위치가 여기에 비로소 나타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앞서의 언급이 행군의 보편적인 순서를 총괄적으로 언급한 것인 반면에, 여기서는 실제 행군 출발 시점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를 가장 명확히 드러내는 언약궤(법궤)의 위치를 분명히 명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삼일 길에 앞서 행하며 - 이는 언약궤가 도보로 3일 정도의 거리 앞에서 이스라엘의 행군을 주도했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시내산에서 출발하여 도착지 기브롯 핫다아와(11:34)까지의 3일 여정동안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영의 선두에 있었다는 말이다.이와같이 광야 40년동안 언약궤는 계속적으로 이스라엘의 행군을 주도해 갔다<14절>.
===10:34
행진할 때에...구름이...덮였었더라 -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의 표인 구름은 진이 머무를 때에만(9:16) 이스라엘 곁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 구름은 작열하는 정오의 태양을 내내 막음으로써(시 105:39), 이스라엘의 걸음을 인도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아마 법궤 위에 높이 떠 있는 거대한 구름 덩어리의 그늘이 이스라엘의 행군 대열 위에 드리워진 것 같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감격과 평온을 늘 맛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큰 감격과 기쁨은 대대로 전해져 후일 시인과 선자자의 입을 통해 다시금 고백되어졌던 것이다(시 91:1; 사 25:4).
===10:35
여호와여 일어나사 - 여기서 사용된 '일어나다'(* , 쿰)는 말은 신인동형동성론(Anthropomorphism)적 표현으로, 단순히 앉았던(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나는 상태가 아니라 다음 동작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모세가 여호와로 하여금 일어나시도록 간구한 목적은 (1) 대적들을 진멸하도록 하기 위함이며(시 33:10; 사 14:20), (2) 그로 인해 이스라엘을 돕고(시 35:2; 44:26) 구원토록 하기 위함이다(렘 2:27).
주의 대적...주를 미워하는 자 - 하나님의 선민(選民)인 이스라엘을 적대시 하고 증오하는 자는 곧 하나님을 대적하고 미워하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보여준다.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나타낸다. 사실 고대 근동 지방에는 각 나라에 국가신(國家神)이 있었는데, 전쟁의 승리는 곧 승리국의 국가신이 패전국의 신을 누른 것으로 간주하였다(삼상 5:1; 왕하 24:13; 25:14,15). 이런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이스라엘과 하나님과는 존망(存亡)을 같이하는 운명 공동체임을 확신했다.
흩으시고...도망하게(* ... , 야푸츠 야누스) - 여기서 '흩다'는 말은 원래 '산산히 깨뜨리다'는 의미로써 흔적도 없이 무너뜨림을, 그리고 '도망하다'는 말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짐을 뜻한다. 결국 이말은 대적에 대한 완벽한 승리를 의미한다.
===10:36
여호와여...돌아오소서 - 여기서 '돌아오소서'(* , 슈바)란 말은 그 해석상 다양한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이 말은 '구원하소서', '회복하소서', '새롭게 하소소', '축복하소서' 등으로도 번역된다. 이곳에서는 어느 한가지 해석을 취하기보다 그 모두를 취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임재해 계시지(돌아오지) 않으시면, 구원과 회복은 물론이요 변화 및 축복도 불가능하지만, 그분이 함께 하실 때는 그 모든 것이 확보될 수 있기 때문이다(사 63:11-14).
이스라엘 천만인 -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뜻이다<1;16>. 사실 이들이 군대 편제상으로 조직은 되었지만, 모세가 보기에 무기도, 변변찮고 전투 경험도 없을 뿐 아니라 수많은 노약자 및 유아와 여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들이 막강한 토착 세력인 가나안 족을 정복하러가는 것은 전적으로 여호와의 도우심을 믿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모세는 이스라엘 진영이 쉴 때에 일단 떠나가 있었던 구름이 다시 돌아오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히 원하고 원했던 것이다.
유월절 규정 및 불과 구름 기둥의 역할을 상술했던 전장(9장)에 이어 본장에는 마침
내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광야를 떠나 가나안으로의 행군을 재개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한 지 3개월째 되는 때 시내 산에 도착하여(출 19:1) 약 1년
동안 이곳에 머무르면서 성막을 세우고 각종 율법과 제사법 등을 계시받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군대 조직을 위한 인구 조사를(1장) 마친 후 출애굽 제 2년 2월 20일 바로
본장 부분에 이르러 비로서 시내 산 언저리를 떠나게 되었다.
한편 이러한 본장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행군을 효율적이고 질서있
게 진행시킬 목적으로 제시된 은 나팔을 이용한 여러 가지 신호 규정(1-10절) 시내
산에서 바란 광야에로 이동한 사실(11,12절) 성막 운반을 맡은 레위인들을 중심하
여 각 진영의 순서대로 출발한 이스라엘의 행군 모습(12-28절) 모세가 광야 환경과
지리에 밝은 처남 호밥에게 길 안내를 부탁한 사실(29-32절) 법궤의 이동과 정지에
있어서 모세가 올린 기도문(33-36절) 등이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스라엘은 시내 산 율법 전수 후부터, 성막 위에 구름이 떠
오르면 곧바로 제사장이나 나팔을 울리는 것을 신호로 행군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러한 그들의 행군 대열 최선봉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위치하였
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광야 여행의 주도권을 가지신 여호와의 권위 아래서 질서있고
순조로운 행진을 계속해 갈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
가 믿음의 주(主)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나아갈 때(히 12:2) 우
리는 필연적으로 저지를 수 밖에 없는 오류와 실수를 최소화할 수 있다.
1. 은 나팔 신호 규정(10:1-10)
전장(前章)의 후반부(9:15-23)에는 구름을 통한 행군과 정지 신호 규정 및 그것을
실행한 사실이 다뤄져 있다. 그런데 이제 본문에는 그것의 좀더 구체적인 규정으로 이
해될 수 있는 은 나팔을 이용한 각종 신호 규정이 언급되어 있다.
즉 본문에는 은 나팔 둘을 만들라는 여호와의 지시(1, 2절)와 각종 신호 규정, 곧
회막에서 백성 전체를 소집할 때(3절), 족장들을 회집할 때(4절), 진들의 이동시(5,6
절), 대적과의 전쟁시(9절), 거룩한 절기 때(10절) 등에 필요한 나팔 신호가 제시되었
다.
이처럼 다양한 나팔 신호 규정을 적절히 활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팔을 부는 제사
장이 분명하고 정확한 소리를 명확하게 전달해야 했다. 더불어 그 소리를 듣는 백성들
도 주의를 기울여 경청함으로써 혼란에 빠지지 말아야 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
은 하나님의 음성으로 상징되는 나팔 소리를 중심으로 광야 여행을 계속함으로써 질서
있고 안전한 행진을 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주의 백성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고 말씀 중심의 삶을 통하여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온전하게 통과할 수 있어
야 한다.
* 하나님의 명령을 상징하는 나팔 소리. 나팔은 각종 신호를 위해 제작된 것으로서
이스라엘 군대의 질서 유지에 필요한 정보 전달의 한 수단이었다. 그런데 나팔을 불
때는 반드시 거룩한 일을 수행할 목적으로 하나님의 대변자인 제사장들만이 불 수 있
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기억하시고 돌보아 주시기를 바라는 이
스라엘의 경건한 외침인 동시에 무엇보다 하나님의 권위에 찬 명령으로 상징되었기 때
문이다. 즉 이 나팔 소리는 크게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행동을 통괄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호령으로 간주되었으며, 작게는 백성 개개인의 삶에 깊이 관여하신 하나의
자상한 음성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나팔 소리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선민의 귀에 매
우 익숙했고 그 소리를 들을 백성들은 한결같이 정해진 규정에 따라 즉각적으로 행동
함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자신들의 신앙과 순종을 나타낼 수 있었다. 즉 백성들이 아무
리 번잡스러운 일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일단 나팔 소리가 나면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
하여 그분의 명령을 들음으로써 그분과의 내밀(內密)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엇다. 만
약 이 나팔 소리에 귀를 닫고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는 곧 하나님과의 교제를
원치 않는 자이자 하나님의 명령을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자로 간주될 수 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복음의 나팔 소리를 매일 듣는 우리가 전의지적(全意志的)으로 그 소리
를 경청하지 않고 그 명령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주권을 멸시
하는 처사이며, 그분과의 교제를 원치 않는 행동이 된다. 복음의 나팔 소리 곧 하나님
의 말씀은 들어도 되고 듣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깨어서 듣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할 신앙인의 삶의 준거이자, 생의 원동력이다(시 119:105;딤후 3:5-17;히
4:12,13).
2. 진영에 따른 행군 순서(10:11-28)
가나안 대장정(大長征)에 앞서 행군에 필수적인 나팔 신호 약속이 제정된 전반부
(1-10절)에 이어 본문에는 장장 1년여 동안 머무르던 시내 산 언저리를 떠나 가나안으
로 진군해 가는 이스라엘의 행군 출발 모습이 그 진영의 순서에 따라 묘사되어 있다.
즉 본문에는 출애굽 제 2년 2월 20일 시내 산을 출발하여 바란 광야까지 행군한
사실(12:16)의 대략적인 서술(11,12절)과 배치된 진의 순서에 다라 출발하는 모습
을 묘사하고 있다(13-28절). 그 순서에 따라 열거하면 맨 먼저 유다의 진기에 속한 자
들이 출발하였고(13-16절), 바로 이어서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이 성막을 걷어 각
각 그들에게 분담된 성막 기구들을 메고 출발하였다(17절). 그리고 르무벤 진기에 속
한 자들이 출발한 후(18-20절) 고핫 자손이 성물을 메고 그 뒤를 따랐다(21절). 다음
으로 에브라임 진기에 속한 자(22-24)와, 맨 마지막으로 단의 진기 아래 속한 자들이
출발하였다(25-28절).
이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모든 진영은 구름 기둥의 안내를 받으며 질서있게 약속의
땅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은 하
나님의 임재 처소로 상징되는 법궤가 실제적으로 행군의 제일 선두에 있었다는 점이다
(33절).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광야 행진의 주도권(initiative)은 이스라엘의 대
장되시는 하나님께서 지니고 계셨다는 점과 하나님을 자신의 삶의 선두에 두는 자에게
가나안 입국의 영광이 주어진다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 광야에서 또 다른 광야로. 이스라엘 백성은 1년여 기나긴 기다림 동안 황량한 광
야 '시내'에 머물렀었고, 그 광야를 출발한 지 며칠 만에 또다시 메마른 광야 '바란'
에서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이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요 행인과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의 전형을 제시하는 듯하다(히 11:13;벧전 2:11).
즉 이 세상에 참된 소망을 두지 않고 하늘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성도에게 있어서
이 땅의 생(生)은 곧 광야에서 또 다른 광야로 옮아가는 것에 불과하다. 비록 이 땅에
서 더 나은 미래와 참신한 변화를 기대하지만 항상 얻어지는 결론은 암울한 것들뿐이
다. 따라서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이 세상에 대해서 지나친 신뢰와 기대를 하지 말 것
과,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비극적인 현실에 대한 바른 인식이다. 그리고 하
늘 가나안에 이를 때까지 참 기쁨과 진정한 만족, 평안한 쉼 등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야 한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이 기나긴 광야 생활 동안 여러모로 훈련을 받은 후에 비로소 가
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들도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훈련받고 연단받
은 후에 비로소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광야 생활을 청산할 수 있게 될 것
이다(롬 5:3,4;딤전 6:14). 그러므로 우리는 광야 같은 현실에 안주하거나, 아니면 단
지 비판과 냉소로만 허송 세월을 보낼 것이 아니라 주님이 부르시는 날가지 믿음과 인
내로 일관하여 온전하고 성숙한 인격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엡 4:13;빌 3:7-16).
3. 호밥에게 동행을 권고함(10:29-32)
법궤를 앞세우고 각 진기에 따라 가나안을 향해 출발하는 이스라엘에게는(11-28절)
생소한 광야 여행에 있어서 길 안내자가 필요했다. 본문은 백성을 지도하던 모세가 길
안내자로서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의 아들이자 그의 처남인 호밥을 선정하고 그에게 도
움을 청하는 내용이다.
즉 본문에는 모세가 호밥에게 길 안내를 부탁하는 간절한 장면(29절)과 호밥
의 거절(30절) 및 모세가 길 안내자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길 안내에 상응하는 축
복을 말하는 장면(31,32절) 등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본문에는 호밥의 동행 여부에
관해서는 더 이상 언급이 없다. 하지만 삿 1:16;4:11;삼상 15:6 등의 내용으로 보아
그가 모세의 강청에 동의하고 광야 여행 길의 안내자로 봉사한 것이 분명하다.
한편 하나님께서 구름으로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을 인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길 안내자를 구한 것은 일면 불신앙적 처사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은 불신앙적 행동이 아니라 수백만 명의 선민(選民)을 효율적이고
안전하게 인도하려고 최선을 차하는 모세의 인격과 사랑을 대변한 행동이다. 즉 하나
님께서 그들을 인도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모세의 인격과 사랑을 대변한 행동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 보호해 주시는 은총을 무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돌발적인 사
고와 경험 미숙으로 생겨날 생소한 광야 여행 동안의 위험을 최대한 막아보려는 지도
자의 애타는 마음을 반영한 조처였다. 이처럼 참 신앙의 소유자는 이적(異蹟)만을 바
라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신 은사와 기회들을 활용할 줄 안다. 하나님은 자연
법칙의 질서와 인간의 진지한 노력을 존중하시는 분이시다.
4. 이동과 정지시의 기도문(10-33-36)
가나안에로의 행진이 재개된 사실(11-28절)과 광야 여정 동안의 길 안내자로 호밥을
선임한 내용(29-32절)을 다룬 데 이어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구름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진행하는 일과 나아갈 방향을 지시한 내용(33,34절) 및 하나님의 궤가 이동
할 때와 정지할 때 각각 드렸던 모세의 기도문(35,36절)이 열거되어 있다.
이와 같이 낮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도 백성들이 지치지 않고 계속 광야의 기나긴
행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구름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현존이 그들과 늘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동행과 보호하심만이 이스라엘의 안전을 절대적으로 확
보할 수 있음을 깨달았던 지도자 모세는 보호와 축복과 임재를 그 내용을 한 간절한
기도를 잊지 않음으로써 백성의 평안한 여정에 일익을 담당했다. 사실 하나님의 임재
(Immanuel)야말로 인간이 고통받고 있는 두려움과 죽음 등의 문제들을 해소하는 유일
한 해답이다(마 1:23눅 2:14;요 1:14).
* 백성을 이끈 언약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백성들의 진영 한가운데 계
셔서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선 이스라엘의 광
야 여정 동안 그들의 행군 선두에 서셔서 그들을 친히 인도하시며 쉴만한 곳을 찾아
그들을 편히 쉬게 하시는 자상함을 나타내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표시이며 그들의 목자가 되신 증거이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
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신앙 고백하였다.
이와 같이 믿음으로 사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주께서 친히 다정하신 목자가 되어주신
다(요 10:11). 이것은 가장 큰 은혜요 축복이다. 암탉이 자기 병아리를 고이 품듯이,
독수리가 그 새끼를 날개 위에 업듯이 여호와께서는 친히 그의 백성을 보호, 인도하신
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이처럼 주께서 친히 인도자가 되어 주시기 때문
에 거친 세파에도 굴하지 않고 담대히 생활할 수 있다(요 16:33). 세상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아직도 우리가 목자되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도, 사랑하지도 못한 증거이다(요일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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