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3:1
"사데"- 는 두아디라 남쪽에 있었는데 부요함과 사치로 이름난 곳이다.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 "일곱 영"에 대하여는 계 1:4에 있는 같은 말 해석 참조. "일곱 영"을 가지심은, 그가 성령님의 일을 주관하신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의 일을 주관하신다 함은, 요한 사도의 사상이다(요 14:16). 성령님의 풍부한 생명력을 떠난, 사데 교회에 대하여 이 칭호로 오시는 주님께서 적절한 해결을 주실 것이다. "일곱 별"에 대하여는 성경 본문(1:20)에 해석되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 이것은 외형(外形)에 있어서 교리와 의식(儀式)으로 빛나지만, 내적(內的)으로 신령한 생명이 빈핍(貧乏)한 것을 가리킨다. 이런 교회는 현대에도 많이 있다. 교회 역사의 각 시대에 7교회를 배정(配定)하는 학파에서는, 여기 사데 교회를 가리켜 종교 개혁한지 얼마 후에, 죽은 정통화(死正統化)한 교회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정당한 견해라고 하기는 어렵다.
계 3:2
일깨워.- 이 말은 헬라 원어로 기누 그레고론(* )이니 일시 동안만 깨는 것이 아니고 계속적 경성(繼續的警醒)을 의미한다.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그 교회에 아직 영적 생명이 남아 있는데 그것을 견고히 보존하는 것은, 그 교회의 급선무(急先務)이다. 생명은 잘 보호하고 배양하기만 하면, 비록 미약한 것이라도 충실한 대로 자라가는 법이다. 그러므로, 사데 교회도 그렇게 해야 된다.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사데 교회가 교회적 행사로서 외부적으로는 적잖게 발휘하였으나, 하나님 앞에는 합격되지 못했다(Greijdanus). "온전함"은 절대성을 띤 완전을 의미하지 않고, 그저 인간으로서 행할 수 있는 한도에서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표준을 의미한다. 이 말은 사도 요한이 즐겨 쓰는 말이다(요 17:23; 요일 1:5; 요이 1:12). 영적 생명은 없이 외모로만 나타내는 것은 허수아비에게 바람이 풍긴 현상과 같다.
계 3:3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살전 1:5, 2:1; 고전 2:1 참조. 과거에 받은 기이한 은혜에 대한 회고(回顧)는, 현재의 답답한 심령으로 하여금 영계(靈界)의 확실성에 대한 새로운 신념을 가지게 하며, 신앙 모험(信仰冒險)의 용기를 분발(奮發)케 한다. 그러므로 과거의 영적 체험은 비록 적은 것이라도, 우리가 기억하여 보수(保守)하면, 그것이 현재의 큰 암흑을 깨뜨리고 하늘 문을 열어 보이는 열쇠가 된다.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이것은 주님께서 깨어 있지 않은 자들에게 임하시는 방법이다(살전 5:1-8). 이것은, 그 아랫 문구가 보이는 바와 같이 그가 뜻 밖에 오실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여기서 주님의 재림이 아니고, 사데 교회를 벌하시는 섭리적 내방(攝理的來訪)일 것이다. 일 개인도 그 죄악의 잠에서 경성하지 아니하면, 뜻밖에 징벌(懲罰)을 받는 일이 현저하다.
계 3:4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모팟트(Moffatt)는, "더럽히지 아니한" "옷"이 단순한 인본주의의 도덕적 순결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소아시아의 이교 사상에서 취한 그릇된 해석이다. 이 말씀은, 받은 구원과 의(사 61:10)에 합당하게 행하여 세상에 물들지 않는 기독교적 성결을 가리킨 것이다(고후 7:1). 물론 그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도덕적 순결이겠으나, 생활의 동기와 그 결과가 신본주의(神本主義)에 속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구원과 의를 오손(汚損)치 않고 보수하는 경건 생활이다.
몇 명.- 헬라 원어에서 자역(字驛)하면, "몇 이름들"이란 말이니, 그들의 이름이 주님에게 상달된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다.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여기 "흰 옷"은, 성도들이 천계에 들어가서 받는 하나님의 영광과 및 완전한 성결(聖潔)을 가리킨다. 모팟트(Moffatt)는 잘못 말하기를, 여기 "흰 옷"이란 것은, 에녹서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하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에녹서(書)에 흰색은 의(義)를 상징하였으니(85, 90), 여기서도 그러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베드로 계시록이라는 가경(假經)에서, 낙원(樂園)의 거주자들이 빛을 입었다고 하였으며, 지옥에서 죄인들 벌하는 천사들이 검은 옷을 입었다고 함과도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기는, 정경(正經) 계시록이 말하는 "흰 옷"은, 다니엘서(7:9, 12:3)에 기초(基礎)한 사상(思想)이라고 한다. "흰 옷"이라는 말을 사도가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에녹서에서 취하였다고 할 수 없고, 사도 후의 상상(想像) 문학(文學)인 베드로 계시록에 의지 하여 생각될 수도 없다. 그러면, 이 "흰 옷"은 무엇인가? 이것은, 부활(復活)의 몸을 가리키지는 안았으니 그 이유는, 6:11을 보아서 그것은 별세한 성도가 즉시 하늘에서 받는 것이고 그리스도 재림시에 받는 것이아닌 까닭이다. 혹설에, 이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성결과 영광을 가리킨다고 한다. 성도들이 주님과 "함께 다닌다"함은, 그들이 하늘에서 주님과의 밀접한 교제에 참예할 것을 가리킨다(Greijdanus).
그들은 합당한 자.- 이것은, 그들이 유공(有功)하다는 의미가 아니고, 복음에 합당하게 행하여(빌 1:27)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다닐 자격이 있다는(자기의 功義가 있다는 말이 아님)뜻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그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참된 신앙 노선(信仰路線)을 걸어 온 것이다.
계 3:5
내가 그 이름을 생명 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20:12 참조.
계 3: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2:7에 있는 같은 말 해석 참조.
계 3:7
빌라델비아.- 이곳은, 지금 알라솰(Alahschahr)이라고 하는데 오늘날도 거기에 기독 신자들이 산다.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이.- 크레다너스(Greijdanus)의 해석에 의하면, "거룩하다"함은, 소극적으로는 그가 죄악에서 절대적 절연(絶緣)된 상태이고, 적극적으로는 그의 숭엄(崇嚴)하신 신성(神性)과 및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성덕(聖德)을 가리킨다. "진실"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아레디노스(* )니 거짓에 대한 반대를 가리킴보다, 그림자(影像)나 불완전성에 반대되는 실물(實物), 본체(本體)를 가리킨다. 그러면, 이 말은 그리스도의 계시로서의 완전과 극치(極致)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서 완전 무결(完全無缺)하시게 나타나시고, 그의 약속들도 역시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히 성취되었다(고후 1:20). "다윗의 열쇠"는 그리스도의 신국 주권(神國主權)을 가리킨다. "다윗"은 구약 시대에 사용하던 메시야 곧, 그리스도에게 대한 예언상 칭호이다(겔 34:23).
계 3:8
네 앞에 열린 문.-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기회를 비유한 것이다. 핍박하는 유대인들이 아무리 그것을 막으려고 해도(9절) 어찌할 수 없다.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그리스도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는 이유는, 그 교회가 소유한 영적 자원(靈的資源)이 "적은"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다 기울여 신앙 보수(信仰保守)에 진력(盡力)한 까닭이다. 그것은, 그가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보시고 칭찬하신 것과 같다(막 12:41-44). 주님은, 많은 것을 가지고 방종하는 자를 좋아하시지 않고, 적은 것을 가지고 힘쓰는 자를 귀히 보신다.
계 3:9
자칭 유대인.- 2:9 해석 참조. 유대주의자들이 빌라델비아에서 기독 신자들을 많이 핍박한 사실은, 익나디오(Ignatius)도 증거하였다(Philad. 6)
네게 주어...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사 60:14, 45:14, 49:23 참조. 이것은, 유대인들 중에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 교회에 돌아올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러나 혹설(或說)에 이것은, 끝날 심판 때에 불신 유대인들이 성도들 앞에 굴복하고 심판 받을 것을 가리킨다고 하나, 첫째 해석이 옳다(Greijdanus).
계 3:10
네가...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이것은 댓구적(對句的)으로 역설하는 재미 있는 표현이다.
나의 인내의 말씀.- 이것은, (1) 인내(忍耐)를 가지고야 파악하며 나갈 수 있는 복음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고, (2)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참아 견디신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된 복음이라는 뜻이라고도 하며(Greijdanus), (3) 로마여(Lohmeyer)는, "나의 인내"라는 엇구(語句)를, "나를 기다리는 신고"(辛苦:Harren auf mich)로 해석하였다.
시험의 때.- 이것은 환난의 시기를 가리키는데, 언제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면하게 하리니.- 그들이 벌써 유대인의 박해(9절)를 이겼으니 만큼, 앞으로 있을 보다 큰 환난은 주님의 특별한 도우심으로 면하게 된다. 이것은 적은 일에 충성하고 큰 은혜를 입는 원칙에 의한 것이다.
계 3:11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것은, 경기장(競技場)에서 되는 일로 영적 사리(靈的事理)를 비유함인데 상을 잃지 않도록 끝까지 힘쓰라는 말이다. 히 12:1-4 참조.
계 3:12
기둥.- 이것도 작은 일에 충성하여 큰 상급을 받는 원칙(마 25:23)에 의한 보상이다. 위의 10절의 같은 원리를 참조하여라. "기둥"은 든든하여 건축에 가장 힘받이 되는 중역(重役)에 소용되는 것이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이 세상에서 그 적은 힘을 가지고도 충성한 고로 내세(來世)에서 든든한 기둥의 중대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많은 힘을 가졌으나 불충(不忠)하여 영원한 내세에서 미미한 자가 된다면 그것은 유감스럽다. 그러나 이 세상에 적은 힘을 가진 자라도 충성하므로 내세에서는 영광에 부요한 자가 된다면 그것은 놀랄 만한 기쁨이다.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그가 내세의 축복을 받는 지위에서 영원히 변동되지 아니할 것을 가리켜 말한다. 혹설에 의하면 빌라델비아는 지진이 많은 도시이므로 그 시민은 무너지는 집을 너무 자주 수리하는 까닭에 국세(國稅)의 면제를 받았다 한다. 그런 변천과 동요가 많은 지대에 거하는 그들에게 영구 부동(永久不動)의 안전성을 띤 "기둥" 같은 내세적 축복은 목마른 자에게 물같이 귀한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과...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이것은, 그 이기는 자를 하늘의 보물로 여겨서, 그에게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삼중으로 확보하는 말씀이다. 그를, 하나님의 소유, 새 예루살렘의 소유, 그리스도의 소유로 영존케 하려고, 세 가지 거룩한 이름을 그에게 기록하시겠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씀에 있어서 새 이름을 쓴 것은 우리의 주의를 끈다. 그의 새 이름은 그만 아신 것이라고 했으니(19:12), 그것이야 말로 그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다운 가장 살 깊은 내막(內幕)을 표하는 이름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는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의미의 성호(聖號)로써 소유를 확보하심은, 그가 이 소유를 견고히 또는 귀중히 파악 하신다는 의미이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그 적은 힘으로 주님의 복음을 붙잡은 일은(3:8), 주님에게 그렇게도 귀여웠다. 그들이 그 적은 힘으로 애를 쓸 때에 넘어질 듯한 때도 있었겠고, 또 혹은 넘어진 것 같은 적도 있었겠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허물하시지 않고 오히려 귀히 보셨다. 그러므로 그들이 비틀거리는 고생스러운 싸움의 정형(情形)과는 정 반대로,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기둥" 같이 든든하여 나가지 않도록 삼중 서명(三重署名)하여 천적 소유(天的所有)로 확보(確保)하셨다. 이것은 은혜의 "파라독스(Paradox)"니 적은 일에 충성한 자가 큰 상을 받는 복음의 원리이다(마 25:21). 이 말씀을 보고서 우리와 같이 약한 자도 위로와 소망과 용기를 가진다.
계 3: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 말씀을 보면, 계시록의 말씀은 택함을 받은 성도에게 국한하여 주신 말씀이다. "귀 있는 자"는, 영적(靈的) 청취력(聽取力)이 있는 자니 이는 곧, 택함을 받은 자이다. 누구든지 영리(靈理)를 식별(識別)하는 자는 그 자신이 택함을 받은 자라는 신념(信念)을 가질 수 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란 말을 보니, 이 개체 교회에 보낸 서신이 실상은 모든 교회들을 목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계 3:14
라오디게아.- 이는, 루카강 남쪽 강변에 자리 잡고 있는 부요한 상공업 도시로서 빌라델바아 동남(東南)에 있었는데, 현재 이름은 에스키힛사(Eski-hissar)라는 중요치 않은 도시이다.
아멘.- 계 1:6; 사 65:16 참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들을 다 성취하셨다. 그는 그렇게 하나님의 신실(信實)을 성립시키셨다. 이 의미에서 그는, "아멘"(* =진실함)이시다. 고후 1:20 참조.
충성되고 참된 증인.-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또 하나님의 신실을 증거하시려고, 구약의 예언들을 모두 다 성취하신 업적(業績)을 염두에 둔 말씀이다. 1:5 해석 참조.
창조의 근본.- 이것은 예수님께서 창조자라는 말씀이다. 이와 같은 주님의 칭호는 불신실하고 영적으로 빈핍(貧乏)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갱정(更正)하시기에 적합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주님의 신실은 그 교회의 불신실에의 대조요, 주님의 창조의 부요(富謠)는 그들의 영적 빈궁(靈的貧窮)을 치료할 수 있다.
계 3:15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여기 이른 바 찬 것은 전연 복음과 접촉 없는 불신(不信)의 상태요, 더운 것은 복음을 믿는 자로서 사랑과 열심으로 가득한 것을 의미한다(Greijdanus).
계 3:16
미지근.- 이것은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아는 가증(可憎)한 행위와 태도이다(17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그가 토하시는 이유는 그의 속에 역스러우신 까닭이다.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아는 태도는, 주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두 가지 죄악을 합한 것이니, 곧, 외식과 교만이다. 주님께서 땅 위에서 가장 많이 책하신 죄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주시기를 좋아하시되, 교만한 자만은 물리치신다(약 4:6).
계 3:17
본절은, 그들이 되지 못하고 된 줄 아는 죄를 드러내어 지적하시는 말씀이다.
부요하여.- 곧, 자칭 영적 생명이 부요하다고 말한다는 의미이다.
곤고, 가련.- 이 두 가지는 그들의 영적 빈핍(靈的貧乏)으로 인한 비참한 정형(情形)에 대한 말씀이다. 그 비참한 정형의 원인은,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 세 가지이다. 다음 절이 이 세 가지에 대하여 다시 말한다.
계 3:18
불로 연단한 금.- 이것은 순연 무잡(純然無雜)한 믿음을 가리키고(벧전 1:7),
"흰 옷"- 은,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신자에게 주신 칭의(稱義)요,
"안약"은, 성령님이 밝히 보게 하여 주시는 은혜의 비유이다.
사서.- 이것은 값을 주지 않고 사는 영적 매수(靈的買收)이다(사 55:1).
계 3:19
내가 사랑하는 자.- 여기 "사랑한"다는 말은, 헬라 원어로 필레오* )인데, 벴겔은 이것을 고맙게 돌아보는 애정의 활동으로 여겼다. 잠 3:12; 히 12:6-13 참조. 위에 말한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의 아가페(* =평가적 사랑이니 빌라델비아 교회의 좋은 점을 보시고 귀히 여겨 사랑함)를 받았으나(9절), "라오디게아 교회"는 지금 긍휼로서의 은고의 사랑을 받은 것이다. 삼상 7:3; 대하 7:14; 시 34:18, 51:17, 147:3 참조.
계 3:20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신자들을 회개시키려고, (1) 만반 노력(萬般努力)을 하시며, (2) 간절히 권면하심이다.
더불어 먹고.- 아 5:1,2 참조. 이것은 비유인데 영적 사랑의 교제를 가리킨다(계 19:9, 17; 눅 14:12, 17:8).
계 3:21
이기는 그에게.- 이것은, 죄를 회개하므로 승리하는 자를 가리킨다.
보좌에 함께 앉게.- 이는 이기는 신자가 내세에 들어가 주님과 함께 왕노릇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 딤후 2:12 참조.
계 3: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2:7과 3:13에 있는 같은 말 해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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