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전 3:1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 여기 이와 같이 란 말은 종이 상전에게 순종함같이 (2:18)란 의미이다. 자기 남편 이란 말은 여기서 불신 남편을 가리킨 것이 분명하다. 불신 남편을 순종하기는 쉬운일이 아니지만 그렇게 함이 아내된 자가 하나님을 섬기는 덕행이고 책임이다. 창3:16참조. 불신 남편이 그 아내의 신덕을 보고서 복음의 진실성을 깨닫게 되어 회심할 수 있다. 그것은 실행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함이다. 우리의 복음 증거가 우리의 선한 생활과 병행하지 않으면 무력하다. 혹시 실행이 부족한 전도자의 말을 듣고도 복음을 믿게 된 자들이 있기는 하다. 그것은 복음 전도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이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이시기 때문이다.
벧전 3: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 여기 두려워 한다 함은, 그리스도를 믿는 그녀의 하나님 경외와 및 거기서 나온 그녀의 지아비 경외를 겸칭함이다. 그리고 정결 이란 것도 그녀가 하나님 앞에서 지키는 성결한 도덕과 및 거기서 나오는 깨끗한 정조를 겸칭한다. 부녀의 도덕에 있어서 남편을 경외함과 정조를 지킴은 그의 생명같이 중요한 일이다. 이 점에 있어서 어거스틴의 모친 모니카는 좋은 모본이다. 그는 순종하는 덕에 의하여 자기의 불신 남편을 회개시켰고, 그 아들 어거스틴도 회개시켰다(어거스킨의 참회록 제9권 제9장).
벧전 3:3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
여인들이 취함이 언제나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금을 차 는 심리, 즉 사치한 심리로 하는 것은 허영심으로 하는 것이다. 사치는 왜 죄가 되는가? (1) 이것은 안목의 정욕을 따르기 때문이며(요일2:17), (2) 영혼보다 몸을 더 중요시하여 지나치게 위하기 때문이다. 본절은 여자의 적당한 의복 단장보다도 사치를 금하는 것뿐이며, 특히 여자로서 외관미보다 심령의 아름다움을 숭상하여야 될 것을 가르친다.
벧전 3: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 마음에 숨은 사람 알포드는 이것이 중생한 자아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온유하고 안저한 심령 온유 (* )는 탄력있고 지구성 있는 유화의 덕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필요하지만, 가정의 희생자인 부인들에게는 그 일생 잠시도 떠날 수 없는 덕이다. 이것이 없는 자는 여자의 자격을 가지지 못한다. 안정 이란 말(* )은 위의 온유 의 덕에서 나는 것인데, 떠들기를 좋아하지 않고 평온을 사랑하는 미덕이다. 말이 많이 하여 떠들기 좋아하는 자들 때문에 가정에는 불화, 교회에는 문란함이 생기게 되는 법이다.
벧전 3: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 헬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 이란 이유 접속사(* )가 있다. 그러므로 본절은 1-4절의 이유문이다. 여기 거룩한 부녀들 이란 말이 헬라 원에에서는 관사를 가지고 있으니 만큼, 그 거룩한 부녀들 이라고 직역함이 옳다. 그렇다면,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거룩한 부녀들을 가리킨다. 안정 이란 말(* )은 위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그들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이 곧바로 자기를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으로 단장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딤전3:4참조.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도 이들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벧전 3: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함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하라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 창18:12참조. 여기 칭하여 (* )란 말이 현재 분사이니만큼, 일시 동안만 아니라 계속하여 그렇게 불렀다는 의미를 가진다. 남편을 이렇게 존대하며 경외(노예적 공포는 아님)하는 것이 성경에서 가르친 부녀의 도덕이다. 선을 행하고 곧, 위의 4절 말씀대로 행함이다.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 이 문구에 대하여 칼빈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곧, 여성은 무슨 어려움을 당할 때에 놀라기를 잘한다. 그것이 그의 결점이다. 그가 신앙문제로 인하여 불신 가족들에게서 핍박을 받는 때에도 두려워하며 놀라기 쉽다. 그 때에 그가 주님만 신뢰하고 신앙으로 안정한 태도를 지켜 나가면, 사라의 딸(사라의 신앙 계통에 속하는 여자)이 된다는 의미라고 하였다.
벧전 3:7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여기 지식 이란 것은 본문에 나와 있는 대로 두 가지로 분석된다.
(1) 남자들은 여자의 신체 구조와 그 기질이 남자의 것보다 연약한 줄 알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남자들은 자기 아내에게, 여성에게 적합하기 않는 혹은 지나친 노역을 시키며, 공동생활에 남성으로나 할 수 있는 솔선적 이해와 포용을 기대하며, 여성의 의사는 무시하고 가부간 자기의 의사만 만족시키려고 한다. 그런 때에 그 가정은 불화가 쉽다.
(2) 여성의 인권은 남성의 인권과 같은 줄 알 것.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란 말씀이 그 뜻이다. 하나님에게서 유업을 받는 자들은 그의 똑같은 자녀들이다.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누구든지 지식을 따라 그 아내와 동거하지 아니할 때에 그 부부는 화목하지 못하게 되어 서로 합석 기도를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칼빈은 말하기를, 우리의 마음이 평화롭지 못하면 우리가 진정한 기도를 할 수 없다. 분쟁 석상에서는 기도가 이루어지지 못한다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화목하고 그 후에 서로 모여 기도할 수 있다.
벧전 3: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 마음을 같이하여 란 것은 동일한 신앙 사상르 가지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교회의 단합생활에 있어서 초석이요 열쇠이다. 그 이유는, 신앙 사상이 서로 다른 자들이 고동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마찰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교회를 섬김에 있어서 그 회중(특히 인도자들)이 동일한 교히체제에 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되어야 그 교회의 공동생활이 진정한 사랑과 단합으로써 장성하며 발전한다. 체휼하며 (* )란 말은 동고동락하는 정적 연락과 융통을 의미한다. 형제를 사랑하며 (* )라는 말은 그리스도 신자들이 동일한 중생을 인하여 형제가 되었음으로 서로 영적 친화력에 끌려서 우애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위의 체휼보다 좀더 진보한 애정이다. 체휼 은 그리스도 신자가 그 책임 관념으로 가지는 행동이지만, 형제를 사랑 함은 신자들의 그 정적 연락이 연단되고 친근해진 정도의 교제인 것이다.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이 두가지는 사랑의 진로에 있어서 장애물을 치워버리는 데 사용되는 능력이다. 사랑이 진행되려 하다가도, (1) 때로는 상대자의 결함으로 인하여 더 나아가지 못하고 교착 상태에 빠진다. 그러나 그 때에 그 상대자의 부족을 보고 도리어 불쌍히 여길 때에 그 사랑은 계속 진행된다. (2) 그 뿐 아니라, 그 믿는 형제들 가운데 교만이 있는 때에도 사랑은 진행되지 못한다. 그 믿는 형제들 가운데 교만이 있는 때에도 사랑은 진행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때에도 그들이 회개하고 겸손해진기만 하면, 그 사랑은 다시 진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불쌍히 여김과 겸손함 은 사랑의 생활에 고장이 생겼을 때에 필요한 치료제이다.
벧전 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 이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의미의 말씀이니 사라의 기본정신이다. 이 정신이 옵이는 사랑은 출발도 못한다. 그 이유는, 사랑은 보상 행위(나를 사랑한 자에게 고마운 생각으로 사랑을 행함)가 아니고 그저 사랑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은 나와 상관이 없는 사람, 나의 원수, 오늘은 나의 친구지만 내일은 원수될 가능성이 있는 그 사람까지 사랑하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걸음을 걷지 않는자는 아직 사랑의 문을 열지도 못한 자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사랑을 발생시키고, 사랑을 유지하고, 사랑을 보관해 준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사랑의 교훈에 있어서 이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끝에 부언하고 길게 설명한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하려 하심이라. - 곧 신자들은 대적하는 자를 축복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 그들이 대적하는 자를 축복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게 행함으로 내세에 가서 영원히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눅6:35참조. 복을 유업으로 받는다는 말은, 복을 영구한 소유로 받는다는 것이다.
벧전 3: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 여기 그러므로 라고 번역된 말(* )
은 왜 그런고 하면 이라고 개역해야 된다. 생명을 사랑 한다 함은, 불행과 고통에서 떠나서 희열과 평안의 생활을 얻으려고 사모함을 의미한다. 이 말은 그 아랫말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이란 어귀와 같은 내용을 가진 것이다. 좋은 날 이란 말에 대하여 크레다너스는 말하기를, 이것은 박해, 곤고, 역경에서 떠나서 참된 희락과 거룩한 평화에 충만한 시기를 가리킨다 라고 하였다. 이런 귀한 시기를 금생 혹은 내세에 만나려고 하는 자는 할 일이 있으니, 곧 언행으로 남을 해하지않고 도리어 남에게 대하여 좋게 함이다.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이것은 같은 내용을 가리키는 이조의 어귀인데, 남을 해하는 간사한 말( 궤휼은 간사의 의미)을 입에 담지 말라는 의미이다.
벧전 3:11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긴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 양은 길을 잘 잃는다. 그 짐승은 목자 없이는 살 수 없다.
그와 같이 어두워진 인간은 그리스도 없이는 살 수 없다(사53:6). 그리스도는 길 잃은 양과 같이 위태한 자리에 있던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이제 그의 목양과 감시를 받는 우리 양 떼(평신도들과 교역자들)로서는 핍박과 고난중에서도 걱정할 것 없다(겔34:23).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혼을 맡으셨으니, 우리가 육체에 해를 당한들 무슨 염려가 있으랴(4:19)!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