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일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바라.- 여기 생명의 말씀이란 말(* )은 그 말씀, 곧 그 생명 이란 뜻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생명(혹은 영생) 자체의 놀라운 표현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바움갈덴은 말하기를, 생명의 말씀이란 것은 하나님의 본질의 나타나심으로 그 내용은 생명, 영생, 지갓에 넘치는 충만한 생명이란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가 태초부터 있 다 함은 그의 존재의 시작이 있었다는 말슴인가? 그는 무시 무종하신 분이 아니신가? 이에 대한 답변은 이렇다. 곧, 이 말씀은 그의 존재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피조물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의 계시의 시작을 가리킨다.
들은 이란 말(*)은 과거에 들은 바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는 의미의 현재 완료형이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땅위에 계실 때에 그의 말씀을 친히 육신의 귀로 들었고, 또 본서를 저작할 때에도 그 말씀이 기억에 남아 잇다고 한다. 눈으로 본 바 (* )란 말은 여기서는 영적으로 보았더는 의미가 아니고, 육신의 눈으로 목도하였다는 것이니, 이것은 사도의 자격을 가리킨다. 사도는 주님을 육신의 눈으로 본 자들이다. 행1:21-22;고전9:1참조. 주목함 (* )은
경이감으로 주시함이니,-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것을 보았다는 말씀일 것이다.
손으로 만진 이란 말(* )에 대하여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소경이 어루만져 깨달음을 가리키는 뜻이라고 함. 그렇다면 이것은 유한한 인생인 요한이, 그리스도의 전체를 이해하기 어려우나 참되이 그 얼마를 이해하였다는 의미겠다. (2)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을 만져 보아서 참되이 알게 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을 만져 보아서 알게 된 것을 의미함. 이 둘째 해석이 단순히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성만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우리가 안심하고 받을 만하다. 위의 해석을 미루어 보아 사도들의 자격에 독특한 방면이 있다. 그것은 땅에 계시던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직접 만남이었다(요15:27;행1:21-22). 예수님을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도 구원받는 복된 것이다(요20:29). 그러나 증거운동에 있어서는 사도들이 이 한 가지(예수님을 직접 육신의 감관으로 만남)를 더 갗춤으로 교회의 기초를 이룬 것이다(엡2:20). 고전9:1참조. 사도들이 땅 위에 사신 예수님을 만난 역사적 사실이 인류 역사상에 참된 구원운동의 출발이었다. 기독교의 구원운동은 그리스도 사건에 근거하여 그 사건을 전파하는 것이고 인간의 어떤 자율적 깨달음을 전승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받는 길은 순전히 그리스도 사건(그의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사건)을 받아 믿는 데 있다. 고전 2:2참조. 우리의 추상적 깨달음이나 자율적인 수양 또는 훈련같은 것이 우리에게 구원을 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후10:4-5)라고 하였다.
요일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 너희에게도 전함 이 편지를 받는 자들이 예수님을 육신으로 보지 못하였지만 그들도 구원의 복을 받는데는 마찬가지라는 것을 암시한다.전한다 는 말의 헬라 원어는 광고한다 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천국문을 열어놓고 들어오라 고 선포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설교자에게서 기대할 것은 진실 외에 다른 것이 없다. 성경말씀대로 진실히 말하게 되고(고후4:13), 인간의 지혜에 의한 아름다운 말로 하지 아니한다(고전2:1). 여기 사귐 이란 말의 헬라 원어(* )는 단순히 교제함보다 함께 분깃을 받아 누림을 가리킨다. 이 분깃은 물론 영생인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나 있는 하나미 아버지의 선물이다.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함 사도가 복음을 증거하는 목적은 그들이 직접 보고 받은 큰 구원에 일반 신자들도 동참케 하려는 것이다. 이 구원에 동참하는 길은 사도들의 증거를 받고 믿는 것이다. 현대의 신자들도 사도들의 증거 내용인 성경을 믿음으로만 구원에 동참한다. 우리 신자들은 사도들의 증거를 믿어서(사도들과 사귀어서) 구원(우리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 더불어 사귐)에 이른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교회 설립이 초석이 되는 사역을 한 분들이다(엡2:20;계21:14).
요일 1: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븜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다. - 이 말씀은 위의 1-3절
말슴을 염두에 둔 것이다.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다 - 이 말씀은 앞절 말씀과 같이, 그들이 믿음으로 사도들과 함께 영생의 분깃을 얻게 되면 사도들의 기쁨도 크고 그들(일반신자들)의 기쁨도 클 것이라는 뜻이다.
요일 1: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곧,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신지에 대하여 사도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들었다는 말씀이다. 전하는 이란 말(* )은 어떤 소식을 그 목표한 인물들에게 전달함이다. 사도들은 이 소식을 전달하는 사자요, 신자들은 그 소식의 목표 인물들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하나님을 빛 으로 비유함은 의미심장하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만물 중에 빛을 첫날에 창조하셨다(창1:3). 이 사실은 만물 중에는 빛이 근본이란 것을 의미한다. 성경을 모르는 과학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곧, 빛의 속도은 일초 동안에 지구를 7.1/2회 돌 수 있다고 하며, 빛이 없다면 어떠한 존재도 성립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과학자들의 주장보다도 성경말씀대로 만물의 존재는 물질적 측면에서 가장 적합한 방면을 갗추고 있다. 빛은 밝혀줌(진리, 요11:9), 깨끗케 함(성결, 요3:19-20;엡5:9-14), 살려줌(사랑, 요일2:9-11)등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와 반면에 어두움은 비진리와 죄악과 사망으로 비유된다.
요일 1: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 본절과 다음 절은 반율법주의의 오류를 교정한다. 하나님과 사귐(예수를 믿음)이 있다 고 하면서 선행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은 반율법주의이다.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이란 문구에 있어서 행하면 (* )이란 말이 현재사이니만큼 상습적으로 행함을 의미한다(헬라어 문법대로). 그리스도 신자도 어두운 가운데 행하게 되는 실수가 없지 않다. 그러나 상습적으로 기탄 없이
그런 행실을 일삼지는 않는다.
요일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이란 것은, 우리 인셍들이 하나님처럼 완전히 성결할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니다. 성결의 수준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과 같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본절에 말하기를,하나님은 빛 가운데 계시다(* )고 하였다. 이 말씀이 하나님께 한해서는, 빛이 그의 본성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사람은 빛 가운데 행한다 (* )고 하였다. 이것은 자기의 본성 아닌 성결의 규범을 따른다는 의미이다. 성결의 정도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은 천양지차로 다르다.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곧, 우리의 성결한 행실을 보아서, 신자들끼리 영적 연합이 있다는 것이다. 그 배후에 이미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귄사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결한 행실은 우리가 하나님과 사귄(예수를 믿은)결과이고 또 증거이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이 말씀을 보면, 위에 나온 사귐(* )이란 것이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화해(영생)의 결과로 알려진다. 우리의 인격이 그리스도의 피로 정화되기까지 과정을 알기 위하여 5-7절의 말씀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1) 사도적 복음의
전달(5절), (2) 그 복음을 신종함에 진실해야 됨(6절), (3) 그 진실 여부는 빛다운
행실이 증명함(7절 상반), (4) 진실히 신종한 자가 예수님의 피로 정화됨(7절하반)
이다. 예수의 피 가 신자들을 깨끗하게 하심은 그의 속죄의 죽음이 그들의 죄값을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본서의 저자 요한은 여기서 왜 죽음 이란 말보다 피 란 말을 택했을까? 이것은 계시사적 연속성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구약시대에 제사 의식에 있어서는 생축의 피를 그 제물의 요점으로 삼았으니, 피 는 희생된 생명을 가리켰기 때문이다(레17:11,14). 그러므로 요한은 이 사상의 연속으로서 피 를 역설한 것이다. 요6:53-56;계1:5,5:9,12:11참조.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란 말씀(* )은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라는 현재사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것은 사죄와 성화를 의미하는데, (1) 신자가 거듭나서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할 때에 벌써 그를 칭의하여 주심이고, (2) 그 후에도 그가 불행하게 범하는 죄를 그의 회게에 따라서 사죄하여 주심이다. 그러므로 이 성화는 신자가 주님을 믿은 이후 계속된다.
요일 1:8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
이요. -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이 말씀(* )은 신자가 도무지 죄를 범치 않는다는 의미이다. 스스로 속이고 곧, 자기 자신도 잘못인 줄 모르고 잘못 생각함이다.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곧, 완전주의의 주장은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자의 말이라는 의미이다.
요일 1:9
만일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 우리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않을 수는 없으되, 혹 죄를 범했으면 즉시 처분해 버려야 한다. 자백 한다(* )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함이다. 이 고백은 진실해야 되는데(시51:6), 고백에 앞서 상한 심령이 필요하다(시51:17). 하나님 앞에 고백하면서 겸하여 사람 앞에까지 고백해야 할 죄도 있다. 그런 죄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 경우의 것이다. 죄의 용서는 하나님에게서만 받는다.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하나님은 사죄하시기로 약속하신 말씀을 신실히 지키신다(사1:18;렘31:31-34;미7:18-21;히3:25-26)참조. 우리를 깨끗케 하실 거시요 곧, 그 죄벌에서 놓아주심과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그 죄에서 떠나게 해주심을 가리킨다. 신자로 하여금 어떤 죄에서 떠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점차적으로 되어가도록 하시는 것도 있다.
요일 1: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 본절은 8절 말씀에 대한 속론이다. 누구든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죄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제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이미 말씀하였다(8절). 그 뿐 아니라, 여기서는 그런 주장이 (1)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망동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이라고 하시고(롬3:10), 또한 그들로 하여금 구원받게 하려고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다(요3:16). (2)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속에 두지 않는 불신앙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복음은 인생이 무죄하므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별세할 때까지 아직 죄가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은혜로 구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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