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30: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화 있을찐저 패역한 자식들이여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신으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으니 죄에 죄를 더하도다 - "패역한 자식들"이라
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빠님 쏘르림(* )이니, 70인역(LXX)은 이
것을 "타락한 자식들"이라고 하였지만, "반역하는 자식들"이라는 의미를 취함이 더욱
합당하다(Alexander). 이것은, 유다 민족이 하나님의 구원하여 주신 은혜를 배반함을
가리킨다. 1:2,3 해석 참조. 그들은 언제든지 하나님만 신뢰하여야 할 거룩한 백성임
에도 불구하고 이제 앗수르의 위협 때문에 애굽과 동맹하는 것은 하나님을 배반한 행
동이다. 하나님 말씀은, 유대인들이 애굽과 동맹하지 말것을 일찌기 가르쳤다(출
13:17). 그가 유다더러 애굽과 동맹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유다 민족은 하나님만
의지하여야 되기 때문이요, 또한 그들이 애굽과 같은 이방을 의지하는 때에는 이방 민
족의 미신을 수입하기 때문이다(출 23:32,34:15;신 7:2).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은, 그 아래 문구가
설명하여 주는데 곧, 하나님의 신의 지시를 의지하지 않고 애굽으로 더불어 맹약한 사
실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유다 민족이 바로의 세력 곧,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한 것이다. 18:1 해석의 참조.
선지자 이사야는, 여기서 유대 민족의 죄악의 골자를 지적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하나님과 애굽을 앞에 놓고 애굽 측으로 그 신뢰심을 기울인 사실에 대하여 통분히 여
긴다. 그리하여 그는 여기서 하나님과 애굽을 맞세워 놓는 의미에서 하나님에게 대하
여 세 가지 표현으로 관설하고("나로", "나의 신", "나의 입" 곧, 하나님 말씀), 또한
애굽에 대하여서도 몇 가지로 거듭 표현하였다("바로의 세력", "애굽의 그늘", "애
굽"). 이와 같이 하나님과 애굽을 맞세워 놓고 결국 애굽을 피난처로 택한 것이 유다
민족의 심리였다는 것을 이 귀절들이 잘 지적한다.
본래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이 세상 세력을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과 세상 세력을
의식적(意識的)으로 맞세워 놓고 후자(세상 세력)를 택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대
민족은 하나님을 아는 자들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한 것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무시
한 것과 같은 죄를 범한 것이다. 그러므로 2절 끝에, "죄에 죄를 더하도다"라고 한 것
이다. 그것이야말로 패역(반역)한 행동이다.
"애굽으로 내려갔"다는 말은, 구약에 몇 차례 나온다(창 12:10,42:3,43:15;민
20:15;신 10:22). 애굽으로 가는 것을 언제나 내려간다고 한것은 지리적(地理的)으로
생각한 것이라 할 수 있겠으나, 그보다도 유다는 시온의 높은 곳(곧, 하나님 계신곳)
이 있는 것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신자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 세력을 의
지하는 것은, 타락하는 (떨어져 내려가는) 걸음이다. 세상을 의지하는 마음에서 모든
죄악이 발생한다.
사 30:3-5
그러므로 바로의 세력이 너희의 수치가 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함이 너희의 수욕이
될 것이라 그 방백들이 소안에 있고 그 사신들이 하네스에 이르렀으나 그들이 다 자기
를 유익하게 못하는 민족을 인하여 수치를 당하리니 그 민족이 돕지도 못하며 유익하
게도 못하고 수치가 되게 하며 수욕이 되게 할 뿐임이니라 - 이 귀절들은 애굽의 원조
를 청하던 유다 나라의 실패에 대하여 역설한다. 이 부분에, "수치"(* =보쉐트=
실패) 혹은 "수욕"이란 말이 다섯번 나온다. 곧, 유다의 친애굽(親애굽) 행동이 결국
수치를 당한 것 뿐이라는 것이다. 왜 그것을 수치라고 하는가 하면, 유다가 애굽의 중
요한 도읍지(都邑地), 곧, "소안"과 "하네스"에 고관(高官)들을 보내어 비굴한 태도로
원조를 청할 뿐 아니라, 많은 예물을 가지고 가서(6절) 원조를 청하였으나 애굽이 그
기대에 만족하게 나오지 못할 것이므로(원조하기를 거절하였는지, 혹은 약속하고도 그
대로 실행치 않았는지는 모르나), 유다는 부끄러움을 당할것 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다의 이와 같은 행동은, 애굽의 원조를 얻기 위하여 위험 지대의
먼 거리를 여행하며 또 많은 비용을 쓰고도 결국은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야말로 많은 비용을 내고 멸망을 산 것과 같다. 저희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
었더라면 얼마나 빛나는 일일까 ? 하나님을 믿는데 있어서는 그만한 모험까지 하지 않
았어도 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많은 예물을 드리지 않았어도 될 것이 아니었던가 ? 도
리어 하나님께서 자진하여 그들에게 은혜 주실 것을 약속하시고 초청하였는데도 불구
하고 그들이 하나님을 의뢰하지 아니하니(28:12)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또 수치스러
운 일인가 ? 분명히 도와줄 수 있는 분을 무시하고 무슨 별 수나 있는 듯히 힘껏 애굽
을 따라갔다가 아무 소득도 없게 되었으니 그것이 수치이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더 의지하면 반드시 실패할 것 밖에 없으니
수치인 줄 알아야 된다. 이사야의 이 부분 말씀은, 애굽에 대한 유다의 비굴한 정책
(政策)을 말함인데 미래에 될 일이지만 자기 눈앞에 보는 듯이 확실하게 예언하고 있
다.
사 30:6
남방 짐승에 관한 경고라 사신들이 재물을 그 어린 나귀 등에 싣고 그 보물을 약대
제물 안장에 얹고 암사자와 수사자와 독사와 및 날아다니는 불뱀이 나오는 위험하고
곤고한 땅을 지나 자기에게 무익한 민족에게로 갔으나 - "남방 짐승"은 애굽을 가리킨
다고 하나, 남방으로 가는 짐승 곧, 유다에서 애굽을 향하여 먼 길을 짐 싣고 가는(아
랫말들 참조) 짐승들을 가리킨다.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에 "경고"라는 말은, 다만 무
거운 짐을 가리킨다(Calvin). 여기 "어린 나귀"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아와림(*
)이니 젊고 힘있는 나귀들을 가리킨다. "제물 안장"이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
로 따뻬쉐트(* )이니, 약대 등에 안장과 같이 두드러진 돌기(突起)를 가리킨
다. 우리 번역은 이것이 자연적 안장이라는 의미에서 "제물 안장이"라고 한듯하다. 이
렇게 유대인들은 많은 재물을 싣고 애굽으로 가 아첨하면서 군사 원조를 청하리라고
한다. "암 사자와 수사자와 독사와 및 날아다니는 불뱀이 나오는 위험하고 곤고한
땅". 그들이 생명을 내 걸고 이와 같이 위험한 여행을 하여 애굽으로 찾아 가 청병(請
兵)하리라는 뜻이다. 과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평탄한 길이요 안식의 길인 하
나님 말씀을 버리고(사 28:12), 구태어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 위험한 길을 걸으며 이
세상을 따른다. 과연 이 세상을 깊이 따르는 자들은 날마다 생사를 무릅쓴다. 그들은,
모든 험악한 걸음을 걸어 가다가 매맞으며 욕 먹으며 죽는 일이 보통이다. 감옥에서
사형을 받는 자들 중에서는 의로운 자를 발견하기 어렵다. 왜 죽을 길을 힘있게 가는
지 ?
"날아 다니는 불뱀"은 아라비아 삼림지대(森林地帶)에 있는 뱀으로서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뛰어 옮겨 가는 뱀의 종류를 가리킨다. "무익한 민족"이라는 말은 애굽 민
족을 가리킨다. 3-5절 해석 참조.
사 30:7
애굽의 도움이 헛되고 무익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을 가만히 앉은 라합이라 일
컬었느니라 - "라합"은 애굽의 별명이다(시 87:4). 히브리어 라합(* )은 호언 장
담을 의미하는바 이는 애굽의 교만을 가리킨다. 애굽이 교만하게 자기 세력을 자랑하
며 남들에게 도와 줄 것을 약속하지만 실행은 없이 가만히 앉아 있다. 이것은 교만과
거짓으로 자기를 자랑하는 인간서의 표본이다. 인간은, 겉모양으로 무슨 좋은 것이 될
것 같으며 또 남에게도 무엇을 줄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보이는 것 뿐
이고 실행은 없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은 그 말씀하신대로 다 이루어 나가신다. 롬
3:4에 말하기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라고 하였다.
사람은, 엄밀히 따지면 모두 다 "가만히 앉은 라합"이다.
사 30:8,9
이제 가서 백성 앞에서 서판에 기록하며 책에 써서 후세에 영영히 있게 하라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
하나님께서, 선지자더러 다음과 같은 사실(9절)을 서판에 기록하라 하신 이유는, 그
사실이 너무 확실한 까닭이다. 그렇게 확실한 사실을 그 시대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을
찌라도 후대의 사람들은 인정하겠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하여 남겨 두라고 하신다. 무
엇을 기록에 남겨 두는 것은 그것의 확실성이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 때 사람들을 말씀으로 가르치시다 못하여 이제는 기록하라
고까지 하시니 하나님 말씀은 이렇게 견고한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들은 다 이와
같은 성질의 것이다.
이제 그 기록의 내용은, 그 때 유대 민족이 패역하고(하나님에게 대하여 背恩忘德
함), 거짓말하고(불신앙은 거짓말임), 하나님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사실이다
(28:9,10).
사 30:10,11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너희는 정로를 버리며 첩경
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로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 이 두 귀절의
말씀은, 위의 두 귀절 끝에 있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한다는 말씀에 대한 설명이
다. 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선견자(先見者)의 대언(代言)을 듣기 싫어하였다. 이것
은, 그들의 말에도 어느 정도 나타났겠지만 특별히 그들의 마음의 태도를 지적하는 말
씀이다. 그들이 말로써도 선지자 이사야의 말을 무시하는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더욱 그리하였다. 그들의 마음은 "정직한 것"(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을
뾰죽하다고 하여 싫어하며, "부드러운 말"(히브리 원어로 칼라코드=* 이
니 이는, 미끈한 것을 의미하는데 곧 아첨하는 言辭임)을 원하였다. 부드러운 것이 원
칙상으로 좋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성경은 온유의 덕을 많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때에 유대인들이 원하는 부드러운 것이라는 것은, 비진리와 타협하여 아첨하는 정도의
유약(柔弱)이었다. 이런 것은 거짓 선지자들이 사용한다. 예레미야를 대적하는 거짓
선생들이 그리하였다(렘 6:14,8:11). 거짓된 무리들은, 거짓 선지자를 따르며 참된 선
지자의 말을 괴롭게 여긴다. 왕상 22:8,18:17,18 참조.
"거짓된 것을 보이라 너희는 정로를 버리며 첩경(옳은 길)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
의 거룩하신 자로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그 때 유대인들이 노골적으로 이런 말
을 하지 않았을찌 모르나 그들의 심령상으로는 틀림 없이 이렇게 악하게 움직였다. 렘
17:9에 말하기를,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였으니 저희의
마음이 의식적(意識的)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악하게 움직였을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그것이 말로 발표되지 않는 이유는, 사람은 다 외식하기 때문이다. 그들
이 적나라(赤裸裸)하게 나타난다면 이사야의 이 말과 같이 드러날 것이다. 사람은, 그
마음 속에 거짓을 좋아하며 바른 길을 싫어하며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롬
1:28).
사 30:12,13
이러므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이 말을 업신여기고 압박과
허망을 믿어 그것에 의뢰하니 이 죄악이 너희로 마치 무너지게 된 높은 담이 불쑥 나
와 경각간에 홀연히 무너짐 같게 하리라 하셨은즉 -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유대인의 죄
악을 다시 간단히 지적하고 그 패망할 것을 보여주신다. 그들의 죄악은, 하나님 말씀
을 "업신여기고" 자기들들의 사상 곧, 반역 사상과 허망한 사상을 믿고 따름이다. 여
기 "압박"이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오쉐크(* )인데 하나님에게 대한 반역을 의
미한다는 학자가 있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멸시하고 자기의 사상을 따르는 교만의
소유자는 무너져가는 담과 같다. 곧, 담이 기울어지면서 "불쑥 나와" 멀지 않아 무너
질 것과 같다는 것이다. 기울어져 불쑥 나온 담이 오래지 않아 무너질 것은 사실이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본래부터 몰라서 멸시한 것이 아니고 너무도 잘 알 수 있는 처지
에서 그리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업신여긴 것과 같은 교만이다. 이러한 죄
를 범하는 자들은 오래지 않아서 패망한다.
사 30:14
그가 이 나라를 훼파하시되 토기장이가 그릇을 훼파함 같이 아낌이 없이 파쇄하시
리니 그 조각 중에서, 아궁에서 불을 취하거나 물웅덩이에서 물을 뜰 것도 얻지 못하
리라 - 이것은, 하나님께서 유대 나라를 벌하시되 어떻게 심각하게 하실 것을 보여준
다. 곧, "토기장이가 그릇을 훼파"하는 것 같이 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훼파한 결과
로 깨어진 그 조작이 아무 쓸데 없이 되어 "아궁에서 불을 취하거나 물웅덩이에서 물
을 뜰"만한 것도 없게 되리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훼파된 유대 나라는 인간의 힘으
로는 회복할 수 없이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도 그것을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그것이 다시 회복되며 축복을 받
는다는 것이 이사야의 예언 내용이다. 19-26 참조.
사 30:15,16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너희가 원치 아니하고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한고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
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한고로 너희를 쫓는 자가 빠르리니 - "돌이켜"(*
=쉬우바)라 함은, 불신앙의 태도를 버리고 주님께로 돌아옴을 가리킨다. "안연히
처"한다 함은, 그 하반절(下半節)이 말하는, "잠잠하고 신뢰"함과 같은 뜻이니, 위기
(危機)를 당하여 인간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만 믿는 신앙을 가리킨다. 7:4,9
참조. 위기를 당하여서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신자가 원
하고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주시면 될 수 있다. 신앙은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을 열
매로 한다. 신앙한다 하면서 아직 마음에 고통이 있는 것은 확실치 않은 신앙이다. 그
러나 이 평안은 무모한 방심(될대로 되라고 함)이거나 자포자기(自抛自棄)가 아니다.
이 평안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믿어져서 심령이 "안연"해지고 "잠잠"해지는
것이다.
그 때 유대인들은 마땅히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잠잠해야(인간의 수단을 쓰지
않고 든든히 있어야) 앗수르의 침략하는 화를 면할번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반대하여 "아니라"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멸시하는 교만한 불신앙이다. 그들은, 기어코 하나님께서
반대하신 방법을 살 길로 취한다. 하나님은 일찌기 이스라엘 백성더러 애굽의 말(馬)
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셨다(신 17:16;사 31:1,3). 그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때 유
대인들은 앗수르가 침략하여 올 때에 애굽에서 보내 준 말을 타고 도망하겠다고 호언
장담하였다. 이렇게 철면피의 불신앙과 불순종은 당장 보응을 받아 그들로 하여금 아
주 겁약한 자가 되게 하여,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게 될 비참한 지경에 이를 것이
다(레 26:17;신 32:30). 이 사실은,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라는 말씀이 지적하여 준
다.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한고로 너희를 쫓는 자가 빠르리니". 이 말씀 역시 그
들이 보응을 받아 앗수르 군대에게 패배를 당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 그들이 "빠른 짐
승"을 믿었으니 "빠른" 원수에게 쫓기게 된다. 하나님이 주시는 벌은 이와 같이 그 범
죄의 성질에 대하여 비례식(比例式)으로 나타나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일이 많
다.
사 30:17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
희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영 위의 기호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 이
말씀은 하나님을 신앙치 않고 애굽을 믿는 유대 사람이 아주 겁약하여져서 쉽게 도망
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도망하니 그나라 인구(人口)가 희소(稀少)하여
져서 산꼭대기의 깃대 같이 드물고 "영"(嶺)위의 기호(깃대와 같은 종류)와 같이 영성
(零星)하리라고 한다. 앞절 하반절 참조.
사 30: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
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여기서부터는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에게 장차 있을
소망을 기억시킨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여지 없이 패배를 당하도록 버려두시고 대
망(待望)하시는 목적은, 그들을 장차 구원하기 위함이다. 그들이 산산히 패배를 당하
였음(14절)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사랑과 능력으로 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 예수님
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그 계신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심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믿게 하려 하심이었다(요 11:6,30,42). 하나님께서 그 택한 백성의
곤난을 보시고도 화급히 구원하여 주시지 않고 기다리심은, 그의 하실 일을 하시고 그
백성의 구원을 완성하시려는 것이다. 그 하실 일은 무엇인가 ? (1)그 백성으로 하여금
고난을 당하리만큼 당하여 겸손케 하심이요, (2)그 백성이 죄 값으로 당하여야 할 고
난을 당하게 하시므로 그의 공의를 만족시키심이다. 이와 같은 일은, 오직 그가 그 백
성의 고난을 보시고도 급히 건져주지 않으시고 기다리시므로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일을 이루시는 단계가 없이 그 백성을 구원하시면, 그런 구원은 참되지 못한 것이다.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일어나신"다 함은, 일설에
하나님께서 높아지심 곧, 높이 계시어 얼른 그 백성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지 아니
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보다도 때가 이르매 그가 구원의 행위를 시작하신다
는 의미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 공의를 위하여 그 백성을 고난 가운데 오래
두시는 경륜도 있지만 필경은 그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행동을 개시하신다. 하나
님께서는 범죄한 백성이 고난을 받아 낮아져서 회개의 열매를 맺을 때에 그들을 불쌍
히여기시나니 그것도 공의에 속하는 일이다. 회개하면 이미 지었던 죄를 도말하여 주
시나니 그 때에 구원 행위가 적극적으로 나타난다.
사 30:19
시온에 거하며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않을 것이라 그가 너
희 부르짖는 소리를 인하여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회개하며 부르짖는 유대 민족에게 구원 소망이 있을 것을 보여
준다. "다시 통곡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그들이 앗수르 침략 아래서(혹은 바벧론
침략 아래서) 당하던 비극이 해제될 것을 가리킨다. "부르짖는 소리"는 회개하며 부르
짖는 기도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며 부르짖는 죄인의 기도를 들으신다. 특
별히 "부르짖는"다는 말(* =자아크)은 간절한 기도를 의미하는데 그런 기도를 하
나님께서 들으신다. 시 50:15에 말하기를,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하였고, 사 55:6,7에는 말하기를, "너희는 여호와를 만
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
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고 하였다. 눅 11:8 참조.
사 30:20,21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
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 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며 - 이것은, 하나님께서 유대 백성에게 환난을 주시므로 곤고를 당할 것이지만
영적 양식은 빈핍하여지지 않고 도리어 풍부하여질 것을 가리킨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큰 축복이다. 여기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신령한
지도가 그 백성 가운데 풍부할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고난을 당할 때에 영적으로
는 좋아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신령한 지도가 고난 받는 민족 가운데 풍부할 것은
21절이 더욱 명백히 한다. 곧, 그들이 잘못 갈 때에도 그 뒤에서 말 소리가 들려 오듯
이 참된 지도자들의 교훈이 각근하게 따를 것을 보여준다. 선지자들은, 이와 같이 고
난 중에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영적 지도가 가까와질 일에 대하여 많이 말한다. 시
119:71에 말하기를,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
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축복의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
미암아 최후적 성취를 보았다(Ridderbos, Anderzijds vindt echter de hier gegevene
belofte evenals die van Deut, 18:15-18 hare volle vervulling slechts in Hem, die
de hoogste Profeet en Leeraar van zijn volk is, -Jesaja, p.166).
그러나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도 고난 받는 유대인들이 신령한 말씀의 축복을 풍부
히 받으리라는 것이 이 부분 교훈이다. 사람에게는 물질의 축복보다 하나님 말씀이 풍
부한 것이 더 귀하다. 그러므로 암 8:11,12은 하나님 말씀의 기근에 대하여 탄식하였
다. 거기 말하기를,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라고 하였다.
사 30:22
여기서는 회개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하나님 백성이 우상을 멀리 치워 버리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누구이심을 분명히 알게 된 그들에게는, 우상은 더러운 것으
로만 여겨질 것이다. 선지자 스가랴도 은혜를 받은 하나님 백성이 얼마나 거짓된 예언
자들을 멀리하는 사실에 대하여 가르친다. 슥 13:1-6 참조. 이것은 특별히 신약 시대
의 참된 신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참된 신자는, 하나님 말씀대로, 무엇이든
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죄를 범치 않는다. 골 3:5;요일 5:21 참조.
사 30:23-25
이 부분에서는 회개한 유대 민족에게, (1)곡식이 풍성할 것, (2)가축도 잘 살게 되
고, (3)산천(山川)이 아름다워질 것에 대하여 예언한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의 은총이
자연계에 많아질 것을 가리키는데, 그것이 신령한 은혜의 풍성함에 뒤따라 온다. 곧,
선지자는, 20,21절에서 신령한 은혜의 풍족함을 말하고 여기서는 자연계의 은총을 말
한다. 우리는 여기서도 신령한 것이 육적인 것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예
수님도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물질)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다(마 6:33). 우리가 여기서 또 한 가지 기억
할 것은, 신령한 은혜가 많은 곳에 물질의 은혜도 많게 될 수 있으나 언제나 그런 것
은 아니라는 것이다. 위의 20절을 보면, 그들이 한 동안 환난의 떡을 먹으며 고생의
물을 마시면서 신령한 은혜를 많이 받았다. 그들이 그 때에는 자연계를 통한 하나님의
물질적 축복을 받지 못한것만은 확실하다.
"육지창"이라는 것은, 쇠스랑과 같은 것인데 그것으로 가축(家畜)의 사료(飼料)를
키질하여 정미롭게 하는 도구이다. "크게 살륙 하는 날"은 앗수르의 내침하는 때를 의
미하고, "망대"는 적병을 공격하기 위하여 쌓은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고산", "준
령"에 시냇물이 잘 흐른다는 것은, 수원(水源)이 풍부한 것을 가리킨다. 그런 곳은 흔
히 메마른 곳인데, 시냇물이 흐른다고 하니 이는 자연계가 하나님의 축복하심으로 윤
택하여짐을 보여준다.
위의 말씀은, 자연계에 관한 것이지만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모든 축복을 비유한다. 인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어느 방면에서든지 축복을 받
도록 되어 있다. 다만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은 현상이
제한되어 있다.
사 30:26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
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칠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 이 말씀은, 하나님께
서 앗수르의 침략으로(혹은 바벧론 침략으로) 상처 받은 유다를 돌아보시고 축복하여
주실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장치 유대인에게서 일어날 그리스도의 구원
운동을 멀리 내어다 본다. "달빛은 햇빛같겠고 햇빛은 칠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
겠고"라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적 광명을 비유하는 것이다.
사 30:27,28
보라 여호와의 이름이 원방에서부터 오되 그의 진노가 불붙듯하며 빽빽한 연기가
일어나듯하며 그 입술에는 분노가 찼으며 그 혀는 맹렬한 불 같으며 그 호흡은 마치
창일하여 목에까지 미치는 하수 같은즉 그가 멸하는 키로 열방을 까부르며 미혹되게
하는 자갈을 여러 민족의 입에 먹이시리니 - 여기 이른바, "여호와의 이름이 원방에서
부터 온"다는 것은, 여호와의 권위를 드러내는 능력있는 사건이 하늘에서부터 생기게
될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유대를 침략한 앗수르를 패배(敗北)시키는 초자연적인 사건
을 가리킨다. "그의 진노가 불붙듯하며 빽빽한 연기가 일어"난다 함은, 앗수르를 심판
하시는 하나님의 위엄을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이다. 이와 비슷한 말씀은 시 18:11-14
에도 나온다. 그리고 "그 입술에는 분노가 찼으며 그 혀는 맹렬한 불같"다고 하였으
니, 이는 그의 꾸짖는 말씀을 가리킨다. 시 18:8-15 참조. 택한 백성의 원수에 대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진노는 용서 없는 불과 같이 나타날 것이다.
"그 호흡"이라는 히브리 말(* )은 하나님의 성령을 가리키는 말과 같다. 그러
므로 일설에 의하면, 이 부분의 의미가 성령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심판이 창일한 하
수와 같아서 목에까지(원수가 거의 빠져 죽을 정도로 위태함) 미칠 것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호흡"이라는 말을 성령으로 해석하지 않고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할 수 있다(시 18:15). "멸하는 키로 열방을 까부르며". "키"는 겨와 같은 것을
흩어 버리는 것인데 하나님의 심판이 앗수르 군대(여러 족속들로 混成된 고로 이를
"열방"이라함)를 흩어 버릴 것을 가리킨다. "미혹되게 하는 자갈을 여러 민족의 입에
먹이시리니". 이것은, 여러 민족으로 혼성(混成)된 앗수르의 군대가 벌을 받아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하고 도리어 실패의 길을 가게 됨을 이름이다. 하나님의 축복
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그의 진노 아래 있는 자들은 그 계획하는 일에 있어서 형통하
지 못한다. 시 127:1 참조.
사 30:29
너희가 거룩한 절기를 지키는 밤에와 같이 노래할 것이며 저를 불며 여호와의 산으
로 가서 이스라엘의 반석에게로 나아가는 자 같이 마음에 즐거워할 것이라 - 유다를
침략하던 앗수르 군대가 여호와의 징계로 말미암아 패배할 때에 유다 백성은 기뻐하게
되나니, 이는 마치 명절을 당하여 즐거워하는 심리와 같으리라고 한다. 명절을 당하여
"여호와의 산" 곧, 성전산으로 올라가며 "이스라엘의 반석"(여호와 하나님)으로 찾아
가는 것은, 말할 수 없이 기쁜 일이다. 이것은 물론 신령한 기쁨인데 선지자를 위시하
여 모든 경건한 자들에게는 지극히 큰 기쁨으로 생각된다. 불신자들은 육체에 속한 것
을 즐거워하지만 신자들은 하나님을 가장 즐거워한다.
사 30:30-32
이 말씀은, 28절로 돌아가서 앗수르에 대한 여호와의 진노를 비유적으로 표시하는
데 곧,
(1)"장엄한 목소리", "혁혁한 진노(심한 진노)로 그 팔의 치심". 이것은 하나님을
용사(勇士)에 비유하는 말씀이다(합 3:8,9,15). 사 42:13에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용
사 같이 나가시며 전사 같이 분발하여 외쳐 크게 부르시며 그 대적을 크게 치시리로
다"라고 하였다.
(2)"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나님의 진노 행위(震怒行爲)를 맹
렬한 기후(氣候)에 비유하는 것은, 성경에 많이 있다("화염"은 번개와 같은 것이다).
시 18:9-15;나 1:3 참조.
(3)"여호와의 목소리". 이는 진노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가리키는데, 시 29:3-9에도
있다.
(4)"막대기", "몽둥이". 이것들도 역시 하나님의 진노 행위를 비유한다. 위의 말씀
과 같이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벌하실 때에 유다 민족은, "소고를 치며 수금을 타"며 기뻐할 일이다.
사 30:33
여기서는 선지자가 앗수르의 패망을 비유로 진술한다. 곧, 앗수르 왕을 위하여 "도벱"을 예비하였다고 하니("깊고 넓게" 예비하였고 또는 거기 "불과 나무"도 두었음), 도벱은 산 사람을 태우는 흉한 장소였다(왕하 23:10). 앗수르 왕은 도벱에 불태우듯이 패망하리라고, 선지자는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그 왕이 망할 것을 비유한다. 그러므로 하반절에, "여호와의 호흡(진노)이 유황 개천" 곧, 힘 있게 끊임 없이 붙는 불과 같으리라고 말씀한다. 이와 같이 불 가운데 멸함이 되는 것은 지옥 형벌과 방불한 현상이다(계 14:10,19:20,21:8). "이를 사르시리라"는 말은, 도벱을 불태우시리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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