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1
여호와여 나는 곤고하고 궁핍하오니..... - 우리는 이 시의 표현이나 내용으로는
다웃이 여기서 탄식하는 위험이 어떤 것인지를 확정지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시는 다
윗이 사울에게 핍박을 당하고 있던 시기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가장 개연성이 있다.
또 다윗이 겉으로 나타나는 화평과 평온의 상태를 회복한 이후, 큰 여유를 누릴 때에
기록된 것일지라도 다윗이 그당시 자기의 생각을 연상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다윗은 이류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자기가 당하고 있는 압제를 하나
님 앞에 기도로써 내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환난을 당하는 자를
구해 주는 것보다 더 잘 어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기도한 것이다. 사람들
은 당하는 환난이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그에게 인간적인 도움이 부족하면 부족할수록
하나님께서 자기를 긍휼히 여기사 도와주시기를 더욱 간절히 바라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아무리 큰 환난 가운데 놓인다 할지라도 절망이 우리의 마음을 넘어뜨리지
못하도록 성령께서 이 기도를 불쌍한 자들과 환난을 당하는 자들을 위해 기록했다는
사실을 생각하여 힘을 얻도록 하자.
86:2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 여기서 시인은 각기 다른 두 개의
논리를 끌어내서 이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자신을 구원해 주시도록 하고 있다. 곧 이
웃을 향한 자신의 온유함과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믿음이다. 그는 먼저 상반절에서 자
신의 개인적인 가치를 자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어떤 공로로 말
미암아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호해 주시지 않을 수 없도록 빗대어 말하는 것보다 자기
의 본래 의도에서 멀어진 것은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거
룩함' 또는 '경건함'을 특별히 밝혀 언급한 것은 매우 부끄러운 생활과 비인간적인 성
품으로 인하여 견실한 평판을 사람들에게 들을 수 없고, 하나님의 최고의 능력으로도
그들을 만족하게 해줄 수 없는 자신의 원수들의 악함을 더욱 가증스러운 빛으로 드러
나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행위와 의를 따르는 자들에게 보호자가 되어
주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에 다윗은 확실한 근거에서 자기가 자비와 인자를 힘써 행하
였음을 증명하고, 이것을 통해서 자기 원수들이 이유없이 자비로운 자들에게 잔인한
대접을 하였을 때 여지없는 보응을 받았다는 것을 나타내려 한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
이 인자와 의로 규정지어지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기에 추가로 다른 특징,
즉 모든 참된 종교의 어머니가 되는 '하나님을 의지', 또는 신뢰하는 것을 덧붙이고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아주 완벽한 찬송을 받을 만한 매우 높은 수준의 순수성
을 인정받고 있음을 알고 있다. 심지어 아리스티데스(Aristides)도 다른 사람에게 슬
픔의 원인을 결코 주지 않는 것을 찬양했다. 그러나 모든 미덕에서 뛰어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야망으로 차 있거나 교만으로 부풀어올라 사람들이 하나님보다는 자신을 신
뢰하도록 하기 때문에 그들이 자기들의 허망함으로 인하여 형벌당하는 것을 본다고 해
서 놀랄 것이 없다. 우리는 세상 역사를 읽어볼 때, 하나님께서 왜 정직하고 용감하며
절제 있는 사람들을 버리사 악한 무리들의 노를 사도록 하시는가 하는 놀라움을 갖게
되지만 우리는 그것에 놀랄 필요가 없다. 그러한 자들은 자신의 능력이나 선행을 신뢰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면서 모든 불경건으로 거드름을 피우고 있음을 우리는 알
아야 한다. 그들은 선행을 우상으로 만들어 눈을 쳐뜨고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다. 그
러므로 우리가 양심의 인정을 받을 만한 증거를 가졌거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무죄함의
최고의 증인이 되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도와 주심을 받기 원한다면 하나님께 우
리의 소망과 염려를 모두 맡기는 것이 필요하다. 문이 이런 식으로 죄인들에게 닫혀
있음을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하나님께서 그 행위에 있어 책망받을 것이 없이
올바르게 행한 자들은 자기에게로 부르셨을 때에, 죄로 인해서 형벌을 받아야 할 모든
자들을 당장에 쫓아내 버리신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만일 지
도와 자기들의 죄에 대한 깨달음으로 자신을 개선해 나아가고자 하는 생각이 있다면
그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부당하게 공격을 당하지 않
았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2중(二重)의 확신의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
고 할 수 있다.
86:3-4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 시인도 다시 한번 하나님의 긍휼을 호소하고 있
다. 내가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번역한 * (하난)이란 말은 대체로 '만족시켜
주다', '기쁜일을 하다'는 의미와 같다. 그러므로 시인은 여기서 '나는 공로가 없사오
니 오직 주의 긍휼만을 의지하여 겸손히 구원을 간구하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라는 말씀을 그가 조금 앞에서 말한 것에 대한 자기의 소망
과 확신을 증거하고 있다. "부르짖는다"는 말은 내가 이미 여러 차례 지적한 것처럼
영혼의 열심과 간절함을 가리킨다. 실제적으로 볼 때 성도들은 늘 큰소리로 기도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은밀한 한숨과 탄식도 위를 향해 울리고 메아리쳐서 그들의 마음
으로부터 하늘을 향해 치솟아오른다. 성령으로 영감된 이 간구는 자신이 부르짖는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부르짖는다고 함으로써 자신이 처음 한두 차례에 가졌던
용기를 잃지 않고 계속해서 지칠 줄 모르는 진실함으로 기도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가
르쳐 주고 있다. 다음 귀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 주시라고 간구한
목적이 자신의 슬픔을 제거해 주시는 것임을 분명하게 말한다. 하반절에서는 자신의
부르짖음속에 위선이 들어 있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의 영혼이
우러러 보는 것'은 올바른 기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기 때문이다.
86:5
주는 선하사 사유하기를 즐기시며..... - 우리는 앞서 하나님의 성품에서 이끌어냈
던 모든 교리들에 대한 확증을 여기서 볼 수 있다. 만일 고통당하는 자들이 하나님께
서는 자기를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신실한 보상주가 되신다고 확신하지 않는다면 그들
이 하나님께 호소하고, 소원과 기도를 하늘에까지 드려봐야 소용없는 것이다. 지금 다
윗이 말하는 점은 하나님을 자비하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자이시며, 그의 긍휼은
심히 막대하여 자기의 도움을 간구하는 자들에게 거절하실 수가 없으신 분이라는 것이
다. 다윗은 하나님을 가리켜 '사유하기를 즐기시는 분'이라고 부른다. 또 하나님의 선
하심의 변형인 죄를 용서해 주시는 속성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죄
인들에게 * (쌀라흐)의 의미인 용서하는 긍휼을 베풀지 않으시면 하나님이 일
반적으로 '선하시다'라고 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못하다.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의 풍성
하심을 강조하면서도 곧이어 이 풍성함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성도들에게 국한됨을 밝
힘으로써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 송곳에다가 고집스럽게 몸을 비벼대는 사람들은 환난
가운데서 결단코 망하고 만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동시에 다윗은 모든
자(주께 부르짖는 모든 자-칼빈사역)라는 말을 사용해서, 가장 큰 자에게서부터 가장
낮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예외없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에 믿고 의지
하며 용기를 얻도록 해준다.
86:6-7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 다윗이 이 말씀과 하반절에서 자기
가 앞에서 간구했던 것을 진지하게 다시 반복하고 있음을 볼 때 그는 크나큰 슬픔에
눌려 있었고, 또 극도로 번민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이
실례를 통해서 우리는 한 번 기도를 드린 이후 하나님께서 기도를 즉시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해서 그 기도를 포기해 버리는 자는 그들의 마음이 차갑다는 것과 꾸준하지
못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자임을 배우게 된다. 이처럼 같은 기도를 반복하는 것을 외식
으로 생각해서는 아노딘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이 방법을 통해서 자신의 관심을 하나
님의 품에 조금씩 기울여 나아가며, 이 치근거림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구원의 희
생물이 되기 때문이다. 시인은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라는 귀절로 자기가 방금 말했던 진리, 즉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부
르짖는 모든 사람들에게 긍휼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특별히 자기 자신에
게 적용시키고 있다.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사와 같음도 없나이다
주여 주의 지으신 모든 열방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리이다
대저 주는 광대하사 기사를 행하시오니 주만 하나님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도로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8-11).
86:8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 여기서 시인은 자기가 바라던 것을
얻은 이후에 감사를 터뜨린다고 볼 수 있고, 아니면 용기를 얻어 새로운 힘으로 기도
를 드린다고도 볼 수 있다. 후자의 견해가 더 받아들일 만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
지만 이 말씀은 두 해석 모두를 내포 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 (엘로힘;신들)이라는 말이 '천사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마치
다윗이 지존자 하나님과 천사들을 서로 비교하여 '주여 천사들 가운데는 주와 같은 자
가 없나이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 해석은 이 귀절과 잘 어울린다고 볼 수
없다. 다윗은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할 수도 있는 천사들을 하등의 신(神)으로 표현해
서 그 지위를 하락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윗은 이방 사람들이 어떤 도움을
찾을까 하여 만들어낸 헛된 모든 신들을 구분지어 마음에서부터 멸시하고 있는 것이
다. 다윗이 이렇게 한 이유는 이방 신들은 자기들의 사역을 통해서 자신들의 신(神)됨
을 증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다윗이 헛된 신들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능력의
차이를 정도의 차이로 보았다면, 즉 전자는 좀 덜하고 후자는 전자 배타적인 것들을
하나님께만 돌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아무 조건 없이 헛된 신들에게
서는 어떠한 하나님의 특성도 찾아볼 수가 없고 그들은 아무런 일도 이루어 놓을 수가
없다고 분명히 밤히고 있다. 다윗은 분명하게 밝히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을 고찰
할 때에 하나님의 오묘하고도 은밀하신 본체에 관해서 교묘한 생각에 빠져들어 하나님
의 오묘하고도 은밀하신 본체에 관해서 교묘한 생각에 빠져들어 하나님의 사역에서 밝
히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엄위의 분명한 흔적을 넘어서는 자들은 단지 헛되고 의미없
는 일에 시간만 낭비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본성은 우리의 이해력의 판단을 무
한히 초월해 있기 때문에 다윗은 현명하게 자기의 관심을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증거
에 국한시키고 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신들은 헛되고 거짓된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하나님과 인간의 어리석은 생각이 고안해 낸 신 사이에 비교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그 대답은 분명한데, 여기에 사용된 말씀은 보편적인 무지(無
知)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사용했다는 것이다. 위선자들이 자기들의 머리에서 나온
그럴듯한 거짓들을 하늘보다도 더 높이는 뻔뻔스러움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
져 있다. 다윗은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자기의 신으로 위장하고 있는 그들의
정신나간 행위를 매우 정당하게 조롱하고 있다.
86:9
주여 주의 지으신 모든 열방이..... - 여기에 언급된 말씀은 다윗 당시에만 국한시
킨다면 이 견해는 이의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다윗은
자신의 경험했던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장엄한 선율과 같은 것을 통해서 자주 찬양했
다. 그런데 이 말씀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능력을 적절하게 확대시키고 있다. 다윗이
말하는 것이 자기가 받았던 은혜든지, 혹은 일반적인 하나님의 사역이든지간에 우리는
다른 곳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다윗은 이방인들 가운데서 참된 경건의 우월성을 찬양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미리 그의 영광을 첫 단계, 또는 시작 단계의 계시로만 주셨다가
복음의 전파로 마침내 온 세상에 퍼지게 될 그리스도의 나라에 주의하고 있었다는 사
실을 명심해야 한다. 다윗은 장차 이방인들이 부름받을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은 유대인들의 귀에 익숙지 못한 교리이기 때문에 그 백성들은 이방인
들이 장차 아브라함의 자녀들과 차별이 없이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요, 모든 구별이
제거됨으로 그들도 하늘 나라의 진리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말씀을 모순된 말씀으로 느
꼈을 것이다. 다윗은 말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이방인들도 '주께서 지으셨기' 때문
에 그들도 조명을 받아 자기들을 창조하시고 빚어주신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음을 이
상하게 여겨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86:10
대저 주는 광대하사 기사를 행하시오니 주만 하나님이시니이다 - 이 절에서는 모든
민족들이 주님 앞에 경배를 드리게 될 것, 즉 '하나님의 사역의 위대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사실이 또다시 반복되고 있다. 하나님의 행사 속
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해 내는 것은 참된 경건을 얻는 바른 길이다. 육체의 교만
은 항상 하늘을 향해 날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이해력은 그만한 생각에 이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가장 유익한 길은 우리의 연약한 능력의 낮은 수준에
맞추어 하나님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행사 속에서 하나님을 찾아내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이 자신이 만들어 낸 복잡한 미로(迷路)에서 헤매다가
마침내는 자신을 구해 낼 수조차 없는 구렁텅이 속에 영원히 빠져 버리지 않도록 하
자. 우리의 마음이 이러한 절제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 다윗은 하나님의 행사를 '기사
(奇事)'라고 부르면서 그 행사를 찬양하고 있다. 물론 하나님의 행사는 소경들이나 그
행사에 맛을 느끼지 못한 자들에게는 아무런 매력도 없다. 동시에 우리가 주의 깊게
관심을 기울여야 할 진리는 하나님의 영광은 전적으로 참 하나님에게만 속헤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존재에서는 지혜나 혹은 능력이나 의 또는 기사에서 나
타나는 신성의 수많은 표징들을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볼 때 교황주
의자들은 수많은 거짓말들로 하나님에게서 그의 속성들을 빼앗아 버리고 그에게는 단
지 벌거벗은 이름만을 남겨 놓음으로써 참 하나님에게 그의 이름이 아무 소용없게 만
든 책임이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86:11
여호와여 주의 도로 내게 가르치소서..... - 여기서 다윗은 자기의 생활이 거룩한
삶이 되기 위해서 자신이 건전한 사고 방식에 지배를 받아 아내로써 계속 용기를 얻을
수 있도록 해주실 것을 한층 더 간구하고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도'를 육신의 판단
에서 얻어질 수 있는 모든 생각들과 은근히 대조하고 있다. 다윗은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시키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도자가 되어 주실 것을 간구함에 있어서 우리로 하여
금 거룩하고 올바른 생활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우리들
앞에 나아가시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서 결과적으로 자신의 머리로 만들어 낸 교만한
생각으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벗어나 옳은 길에서 떠나 방황하게 되지 않도록 하는 것
임을 고백하고 있다. 다윗은 이 사실을 보다 충분하게 밝히기 위해서 곧이어 "내가 주
의 진리에 행하오리니"라고 말한다. 그는 이 진리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모든 사람들
을 가리켜 허탄하고 거짓된 죄를 범하는 자라고 한다. 한편 그의 기도는 이전에 자기
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가 많은 어두
움에, 즉 자신이 많은 향상을 가져온 이후에도 여전히 많은 무지의 구름에 갇혀 있다
는 것을 알았음을 뜻한다. 또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다윗은 단지 외적인 가르침
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그가 자기 손에 율법을
쥐고서 단지 문자를 배우는 것에만 헛된 노력을 기울이지 않도록 성령께서 내적인 조
명을 달라고 기도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도를 그는 다른 곳에서 "내 눈을 열어서 주
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라고 했다. 그토록 훌륭했덩고, 그토록
성령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렸던 선지자가 자신의 무지에 대해서 이토록 솔직하고도 진
심에서 우러나는 고백을 했다면 우리들이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고, 또는 자신
의 연약함을 깨달아 보다더 우아한 자기 발전을 꾀하려 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
은 일이겠는가. 진실로 참 종교에 대한 지식으로 보다더 가까이 가려는 사람일수록 자
신이 별다른 존재가 아님을 더욱 심각하게 느낄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성령으
로 우리에게 내적인 조명을 비춰 주시지 않으신다면 읽는 것이나 듣는 것만으로는 만
족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서 시인은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붚붙어서 확고하게
설 수 있게를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판단력이 조명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우
리의 의지의 올바름도 조명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내가 "일심으로"라고 번역한 히
브리 원어를 어떤 사람들은 '내 마음이 기뻐서'라고 번역하는데 동사가* (하
다;즐거워하다)에서 온 것이라면 그렇게 번역하는데, 동사가 * (야하드;결합하
다)에서 왔다고 보는 것이 본문의 내용과 더 잘 어울린다. 이 말은 사람의 마음이 성
령의 인도하심 밑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어서 요동하지 않지만 자신의
생각으로 동요를 일으키는 경우에는 미혹과 혼란으로 평안을 얻을 수 없음을 은근히
대조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는 무엇이 옳은가를 배운 후에는 그것을 확고하
고도 진지하게 붙드는 일과, 거룩하지 못한 욕망에 의해서 그 마음이 악한 정욕에 빠
지지 말아야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따라서 '결합한다'는 말은 매우 아름다
운 비유로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자신에게로 불러 모아 확고하고도 지속적인
순종의 상태에 머물게 해주시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은 격정으로 가득차게 되고 갈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 다시 말해서 산산조각으로 흩어져 버린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두 가지 능력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다윗은 이 두 가지가 모두 자기에게
는 없다고 고백한다. 즉 자신의 마음의 무분별과 대립하여 성령의 빛을 바라는 것과
마음의 정직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확증하는 것이다.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영토록 주의
이름에 영활를 돌리오리니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가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음부에서 건지
셨음이니이다
하나님이여 교만한 자가 일어나 나를 치고 강포한 자의 무리가 내
혼을 찾았사오며 자기 앞에 주를 두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내게로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은총의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저희가 보고
부끄러워 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심이니이다(12-17).
86;12-13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 다윗은 모든 면에서 하나
님이 은혜로우신 아버지가 되어 주심을 경험하고 감사의 찬송을 돌리고 있다. 그는 앞
절에서 자기의 마음이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음을
말했는데, 지금은 입이나 혀로만이 아니라 신실한 마음의 사랑으로 한결같이 어느 때
나 찬송을 드리는 것이 자신의 결심이 되었다고 한다.
다윗은 13절에서 이 소원의 이유를 밝히기를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실 때에 그
의 긍휼에 대한 유일하고도 현저한 증거를 주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은혜의 위대함
에 더욱 밝은 빛이 비칠 수 있도록 다윗은 자기가 구원받았을 당시의 위험을 "깊은 음
부"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그가 단지 죽음 한 가지만 당한 것
이 아니라 가장 깊은 무덤 속에까지 떨어지는 처지가 되었으므로 이적적인 방법으로
그를 구원해 주실 하나님의 손이 임하기를 필요로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도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사망의 깊은 구렁텅이에서 구원함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
러한 처지에 있는 우리들은 제각기 자기의 전력을 다해서 이 구원을 찬송하지 않는다
면 우리가 배은망덕한 자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
명을 잠시 동안 연장시켜 주신 것만으로도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에 큰 영광을 돌렸다
고 한다면, 깊은 음부에서부터 하늘에까지 올려 주심을 받은 우리들은 이 엄청난 구속
에 대하여 무엇으로 다 찬송을 드릴 수가 있겠는가? 교황주의자들은 이 귀절에서 자기
들의 주장하는 연옥 교리의 근거를 찾으려고 한다. 낮은 음부가 있으면 이와 반면에
높은 음부도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논리는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어서
논박할 필요조차도 없다.
86:14
하나님이여 교만한 자가 일어나 나를 치고..... - * (제딤;교만한자)이라는
말 대신 어떤 사람들은 * (자림;이방인들)이라고 번역한다. 성경이 종종 이 말
을 사용해서 야만적인 잔인성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이 말은 '잔인
한 자'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번역을 택하는 것이 더
좋을 것으로 본다. 히브리어의 * (제딤;교만한 자)과 * (제림;이방인
들)이란 말 사이에는 글자 하나의 차이밖에 없다. 하나는 * (달렛)을 취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 (레쉬)를 취하고 있다. 이 두 문자는 서로 비슷해서 앞의 것이 뒤의
것으로 변하기 쉬운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교만한 자"라는 말이 문맥과 더 잘 어
울린다. 왜냐하면 시인은 곧이어 자기를 망하게 하기 위해서 맹렬하고 사나웁게 앞뒤
를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자들을 가리켜 "강포한 자"라는 형용사를 사용하기 때문이
다. 교만이 다스리고 있는 곳에서는 절제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다윗이 바로 지금 말하고 있는 음부는 비유가 아니다. 이리 가운데 있는 한 마리의 어
린 양과 같이 그는 하나님께서 이적적인 방법으로 사망의 사슬에서 구해 주시지 않는
다면 곧 삼킴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있는 자기의 원수들을 가리
켜 다윗은 그들이 잔인함을 극도로 발휘하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욕망의 맹렬
함이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감정으로 제약을 받지 않을 때
에는 감히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을 만큼 커져서 극에 달하게 된다. 다윗이 앞절에서
와 같이 하나님의 긍휼로 구해 주시기를 간구하였던 것이 바로 이러한 환난이다.
86:15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들을 찬양함으로써 곧이어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과 신실하심으로 악한 자들의 교만과 격렬함을 대항하기에 적절한 힘과 방패
를 소유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또 다윗은 악인들이 하나님의 손에 채찍을
맞는다는 자신의 느낌을 통해서 자신을 감싸고 있는 막중한 공포를 가라앉히시는 하나
님의 인자와 긍휼을 말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채찍을 가하실 때
에도 그의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것은 진실하고 유일한 위로의 근원자이시기 때문이
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이 귀절은 하나님의 성중에 대해서 가장 두드러진 묘사를
하고 있는 출애굽기 34장 6절에서 취해 온 것이다. 첫째로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시는
분'으로 불려졌고, 두 번째로는 '노하기를 더디하시사' 우리의 고난을 긍휼로써 보살
펴 주시는 분으로 불려졌다. 세 번째로는 '오래 참으시는 분'으로 불려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그를 대적할 때마다 노하지 않으시고, 그의 위대하신 사랑과 인자하
심으로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은 '인자와 진심이
풍성하신 분'이라고 언급되는데, 나는 이 말씀을 하나님은 은혜를 계속해서 베푸시고
항상 진실하심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실로 하나님은 그의 인자하심 때문이
라기보다는 그의 준엄하심 때문에 더 큰 찬송을 받으실 만하다. 그러나 하나님을 준엄
하신 분으로 만들어 우리에게 형벌을 내리시는 분이 되게 하는 것은 다만 우리의 자행
자지하는 오만함이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을 묘사할 때에 본질상 인자하시고 쉽게
용서해 주시는 분이라고 함으로써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만, 즉 우발적인 경우에만 준
엄하신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나는 이러한 표현을 대중적인 용어를 사용한 것 뿐이
요, 엄밀하고 정확하게 말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렇지만 이 귀절은 여전히 하나니
므이 성품을 효과적으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그 본성적으로 자비
하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묵과하시는 것처럼 형벌을 지
연시키고, 우리가 완악한 죄악에 빠져들지만 않는다면 결코 보응하시지 않는다는 것이
다. 왜 하나님의 "진실"과 "인자"가 결합되어 있는가는 이미 다른 곳에서 설명되었다.
가장 관대하다는 사람들도 때로는 지기들이 너무 쉽게 약속한 것을 후회하며, 그 약속
을 취소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잘못 판단하기 일쑤인 우리들은 하나님의 약속
을 신뢰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마치 값없이 언약을 맺어 주심으로 다른
존재들과 구별됨과 같이, 자신이 맺으신 언약을 무엇이든지 틀림없이 성취하는 것이
자신의 뜻임을 분명히 해주셨기 때문에 사람과 같지 않다고 선포하셨다.
86:16-17
내게로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 여기서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하심에 관해서 말했던 것을 자신에게 보다더 정확하게 적용시키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겨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는 자기의 축복이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내가 '긍휼히 여기사'라고 번역한 이 귀절의 두 번째 동사 * (하난)은 '기쁘게 해주다', '-에게 기쁜 일을 하다'라는 뜻이 있다. 따라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은 그의 값없이 거저 주시는 인자(仁慈)에서 나온 것임을 나타내려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시인이 내리는 결론은 자기가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가 기도로써 간구하는 바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에게는 어떠한 능력도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다윗이 자신을 "주의 종" 또는 "주의 여종"의 아들이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고자 함에서가 아니라, 자기 조상 때부터 계속해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손에서 보다 큰 은총을 얻어 계속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길을 걸어가기 위하여 기도로서 드리는 말이다. 다윗의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대를 이른 종, 다시 말해서 그의 집에서 하나님의 종들 중의 하나로 태어난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곳에서 언급한 점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셨던 방법을 추가해서 말하고 있다. 만약 그가 사면으로 절망에 휩싸이지 않았더라면, 다윗은 하나님의 은총의 표적으로
기뻐하고자 하는 소망이 없었을 것이다. 이 유혹과 더불어 한결같은 싸움을 벌여서 마침내는 성공적으로 어두움 가운데서 빛을 찾는 일을 그치지 않음은 비상한 불굴의 신념에 대한 증거였다 .다윗은 '자기 원수들이 수치를 당하는 것'을 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기를 마치 어리석은 일을 하는 사람인 것처럼 조롱하고 비난함으로써 자기의 진실함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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