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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1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 이 말씀은 어떤 주석가들이  설명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금까지 드렸던 간구를 하나님께서 못들은 체하셨다는 것, 즉 허사로 돌아갔음을 알게 될 때에 느끼는 놀라움을 가리키는 단순한 하소연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이 시는 저자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현실적인 감정, 아니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위해서 예비하고 계심을 자기가 어떻게 경험했는지를 돌이켜 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저자가 기록하는 것은 자신이 겪었던 크나큰 환난이라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내가 보기에는 저자가 과거와 미래 시제의 동사를 사용해서 계속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 같다. 앞부분에서 저자는 과도하게  닥치는 대로 자신들이 겪고 있는 슬픔을 부르짖는 많은 사람들처럼 허공에다 어리석게 부르짖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으면 안될 절박한 상태에 있을 때에만 부르짖었다. '부르짖는다'는 동사와 연결되어 있는 접속사 '그리고'(칼빈 사역; 한글개역에는  나타나지 않음)는 '시간'을 가리키는 부사적인 것으로 보고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라고 풀이해야 한다. 저자는 또 자기가 되풀이해서 부르짖는 일이 억압받는 경우라 할지라도 계속해서 기도를 중단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가 바로 이어서 말한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라는 말씀은 자신의 믿음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다. 다른 여러 곳에서처럼 접속사 '그리고'(*  :와우)는 이유를  나타내는  부사(for) 대신 사용한 것이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총과 자비를  보여주심이 하나님의 보통 사용하시는 방법이었음을 생각함으로써 자기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용기를 얻었다는 의미이다.

77:2
  나의 환난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 저자는 이 귀절에서 그  당시에  교회가 당하던 슬픔과 모진 압제를 보다 자세히 나타낸다. 그러나 이 말씀 속에는 약간  애매한 점이 있다. 내가 "손"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야드)는 때때로 '상처'를 비유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밤에는 내 상처가 찌르고 그치지를 아니하였으며'라는 의미를 이끌어 내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내 상처가 곪은 상태에서  깨끗이 낫듯이 찌르는 것이 그치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의 일상적인 의미인 '손'을 의미한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저자가 사용한 동사 *        (니게라)가  쓰라린 상처가 쑤시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손을 뻗치는 것, 또는 넓히는 것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자신의 환난 날에 주님을 찾았고, 하나님께 자신의  손을 뻗쳤다고 확언하는 것은 자기가 계속해서 기도드렸음을 가리킨다. 그는 기도드림에 매우 진지하고 지칠 줄 몰랐고 따라서 기도를 단념할 수도 없었다. 하반절에는 부사적인 관사 '.....할지라도'라는 말이 보충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 말씀의  의미는  시편 기자가 자기의 쓰라린 슬픔에 대한 위로와 탕감을 받지 못했다 할지라도 계속해서  하나님께 자기 손을 뻗었다는 뜻이 된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슬픔이 비록  해결될 가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당하는 슬픔이 우리의 입을 막지  못하고 계속해서 하나님께 우리의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절망과 싸워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77:3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 시인은 여기서 다양한 표현으로 자기 환난의 격렬하고 막중함을 말한다. 그는 자기의 슬픔을 가라앉혀 주는 유일한 해결책이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었다고 탄식하고 있다. 사실 진실한  신자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인하여 근심하게 된다는 것은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영감을 받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단순히 자기가 하나님을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성도들의 고뇌와 근심을 더욱 가중시키는 일이 종종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진노하고 계심을 생각하는 경우와 같은 때이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억을 불러일으키실 때마다 자기의 마음이 새로운 근심과 불안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다. 그는 단지  하나님께로부터  자기에게 안식을 줄 만한 위로가 임하지 않은 것을 탄식했을 뿐이다. 이것은 매우 견디기  어려운 시험이다. 악인들이 무서운 정신적인 고통당함을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 될 수  없다. 그들의 주요 관심사와 수고는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기 때문에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배반한 이유로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재난을 완화시키려는  위로를 얻기 원할 때에 하나님을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리의 마음에 아무런 안식이나 평안함을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곧 하나님께서 우리와 장난하고 계신다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리 많은 불안과 슬픔과 근심을 겪는다 할지라도 이  모든 시련 속에서도 계속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함을 분명히 배울 수 있다.

77:4
  주께서 나로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 이 귀절은 앞절과  똑같은  내용을 말한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구원을 허락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밤새도록 뜬눈으로 지새웠다고 말한다. 옛날에는 보통 여러 파수꾼들이 나뉘어 밤을 지켰기  때문에 저자 자기가 계속되는 괴로움으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는 것을 파수꾼과 같은  상징적인 의미로 표현하고 있다. 저자가 조금 전 자기가 큰소리로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말해 놓고 이 귀절에서는 말을 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문제는 이미 시편 32편 3절 해석에서 해결되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진정한 신자들일지라도 괴로움에 압도당하고 있을 때 확고부동한 불변의 상태에 계속 머무르지 못하고  이따금 한숨과 탄식을 터뜨리는가 하면, 한편으로 어떤 때는 저희 입이  닫혀진  것처럼 잠잠한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저자 자신이 괴로움에 압도당하여, 마치 질식이라도 할 것처럼 그 입으로 단 한마디도 말할 수 없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을  본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77:5
  내가 옛날 곧 이전 해를 생각하였사오며 - 저자가 이전에 있었던 즐거운 일을 생각해 내어 자기의 괴로움을 달래려고 애썼던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러나 저자는 구원이 매우 쉽고 빠르게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그는  "옛날"  그리고 "이전 해"라는 말로 자신의 짤막한 생의 과정만을 말함이 아니라 모든 세대를  포괄해서 말하고 있음을 나타내려고 한 것 같다. 백성들은 환난을 당할 때에 자기들이  개인적으로 체험했던 하나님의 축복만이 아니라, 모든 세대를 통하여 그의 교회 위에 베풀어 주신 모든 축복들을 분명하게 자기들의 눈앞에 두고 그것들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저자는 자기 마음에 하나님께서 과거에 베푸신 은총들을 헤아려 보는 것을  자신의 경험에서부터 시작했다는 것을 문맥에서 쉽게 추측할 수 있다.

77:6
밤에 한 나의 노래를 기억하여..... - 시인은 "나의 노래"라는 말로 자기가 형통했을 동안에 행하였던 감사를 가리킨다. 우리가 조금 전에도 살펴보았듯이 우리의  괴로움을 치료하는 데에는 이것보다 더 좋은 치료악이 없다. 그러나 사단은  종종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보다더 깊은 상처를  입히고자 교묘한 수단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저자가 지난날에 껸었던 기쁨과  지금 당하는 환난을 비교해 볼 때에 쓰라린 고통을 느꼈으리라고 보는 것은 매우  타당성이 있다. "밤에"라고 강조해서 말한 이유는 우리가 사회나 사람들 앞을 떠나  혼자  남아 있을 때에는 낮에 겪었던 것보다 더 주의깊고 진지한 생각이 마음에 떠오르게 되기 때문이다. 곧이어서 "마음에 묵상하며"라고 한 말씀도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고독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속을 철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며, 어떠한 피조물도 자기 앞을 가로막지 않을 때는 자신을 적나라하고 매우 진지하게 말할 수 있
도록 해준다.
   "심령이 궁구하기를"이라는 말씀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해석할 수 있다. 즉  "궁구하기를"이라는 뜻의 *        (하파스)란 말은 '부지런히 탐구한다'는 뜻으로  남성이지만, "심령"이란 뜻을 가진 *        (루아흐)란 말은 때때로 여성  형태를  취한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이 말이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킨다고 간주하고  그  의미를 마치 이 저자가 '오 주여! 내 마음에는 주께서 알게 해주신 것이 아니면 같추는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의 심령을  찾아 게으름과 무감각에서 깨우시고 또한 심한 고통으로 시험하신다고 묘사되는 것은  아주 타당하다. 그러므로 모든 감추인 곳들과 명확하지 않았던 피난처가 드러나고 알지  못했던 사랑이 빛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 명사의 성(性)이 모호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보다 자유롭게 '내 심령이 궁구하기를' 이라고 번역한다. 이 번역은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임과 동시에 가장 자연스러운 번역이므로  나는 이 번역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영감을 받은 저자는 이 말씀 속에서 자기가 그토록 지독한 환난을 당하는 이유와 이 환난이 궁극적으로 무슨 목적을  가져다 줄 것인지를 찾았다. 이러한 문제들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매우  유익한  일이요, 또 우리가 어떤 재난에 압도당하고 있을 때 이 생각을 통해서 우리를  깨워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채찍을 맞을 때 마음이 굳어져 버리는 사람의 어리석음보다 더 완악한 것은 없다. 우리가 슬픔에 빠져 버리지 않도록,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철저히 조사하여 그 결과 심판의 심오한 깊이가 우리를 뒤덮어 버리지 않도록 우리는 마땅히 정도를 넘어서는 안된다. 저자가 말하려는 것은 자기가 위로를 얻기 위해
서 온갖 것을 다 쫓아 보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쓰라린 슬픔을 달래줄 만한 것은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 인자하심이 깊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 셨는가 하였나이다.(셀라)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7-10)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내 죽음이요 지극히 높으신 자의 오른손의 해로다 하였도다(칼빈 사역).
 

77:7-8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 이 말씀은 시인이 그 마음속에 궁구하고자 하는 문제들 중의 일부분인 것이 확실하다. 그는 자기가 오랫동안 계속되는 재난으로  말미암아 압도당할 뻔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는 소망을 거의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견뎌 온 후에 비로소 이와 같은 말을 터뜨렸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계속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자신과 논쟁을 벌이고 있는 듯하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품어 주신다고 할 때에 이 말은 그가 우리를 끝까지 계속해서 은혜를 베푸시리라는 원리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하나님께 불평을 털어놓거나 하나님의 잘못을  찾아내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에서 자기에게 합리적인 결론을 찾아내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한때 자신을 아버지로 보여주신 자기 백성들에게 값없는 은총을 계속해서 베풀어 주시지 않음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성도들이 받은 모든 축복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만을 좇아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에 저자는 잠시 후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자신과 그의 성품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같이 보살피시는 사랑의 손길을 깨뜨리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시인이 하나님께서 인자하시다는 사실에서 여러 가지 논증을 이끌어 냄으로써 어떻게 시험의 공격들을 물리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그의 말씀이 폐하여졌는가-칼빈 사역)란 말씀은 자기의 믿음을 붙들어 주고 힘있게 해주는 약속이 없음을 알고 난 이후로  모든  위로가 다 끊어졌음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과 구원이 포함되어 있는 그의  언약을 우리에게서 거두어 가신다면 우리는 실로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질 수밖에 없다. 만일 누가 반론하여 말하기를 당시에도 율법의 약속들이 있었고 이  약속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계시되지 않았던 이전  시대의 불완전으로 인해서 특별한 약속이 필요하게 되었다고 답변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편 74편 9절에서 성도들이 자기들에게 더 이상 승리의 표적들이 보이지 않고 자기들에게 시대를 깨닫게 해줄 선지자도 없다고 탄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만일  다윗이 이 시를 기록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가 의심스럽고 번민스러운 문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물었고 하나님은 그에게 대답해 주시기를 좋아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다윗이 이 시를 기록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가 의심스럽고  번민스러운 몬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물었고 하나님은 그에게 대답해 주시기를 좋아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다윗이 재난을 당했을 때, 이러한 위로의 근원을  빼앗겼다면 그는 자기의 믿음을 유지해 주고 힘있게 해줄 만한 말씀을 찾을 수 없다고  탄식할 만한 이유가 된다. 그러나 이 시가 다른 어떤 영감을 받은 선지자에 의해  기록되었다면 이러한 탄식은 유대인들이 바벧론 포로에서 돌아온 때로부터 그리스도가  오신때까지의 시대에 잘 어울린다. 이 시대에는 예언의 줄이 단절된 상태여서  넘어진  자들의 마음을 일으키거나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줄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받은 자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우리가 스스로 가장  적은 위로조차 받지 못할 만큼 깊은 고통에 빠지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러나  나는 첫번째 해석, 즉 교회가 전에 받았던 것과 같은 특별한 예언이 전파되는 은혜가  지금은 없어지고, 다만 하나님의 섭리의 그림자의 빛에만 항상 의존하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도움이 필요한 상태에 있다는 해걱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유익한 교훈을 생각해 낼 수 있는데, 그것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그의 말씀을 거두어  가실 때라 할지라도 심히 불안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단련시킬 때 그들이 성경 전체가 그 고유 목적에서 떠난 것으로 생각할 만큼 기이한 방법으로 단련시킨다는 점과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갈망한다 할지라도 아직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독특한 경우에 적용시킬 정도는 못된다는 사실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러한 사실은 괴롭고도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이것이 우리가 기도드리는 일을 방해해서는 안된다.

77:9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 저자는 여전히 똑같은 내용을 계속해서 숙고한다. 그러나 그가 바라는 것은 자기 믿음을 뒤엎으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믿음을 일으키려는 것이다. 그의 물음은 회의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잊으셨는가? 아니면 자기 성품을 변케 만드셨는가?'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자비를  베푸시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저자가 강철 같은 심장을  가진 사람처럼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고는 솔직이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강력히 고통을 당하면 당할수록 하나님은 자기의 본성과 불가분리하게 연결되었기 때문에  자비를 베푸시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더욱 확고하게 신뢰했다. 그러므로 의심이 우리의 마음을 근심케 만들고 괴로움으로 짓누를 때마다 다음의 질문에 대한 만족한  해답에 도달하기 위해서 항상 노력해야 함을 배우도록 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본성을 돌이켜 더 이상 긍휼을 베푸시지 않으시는가? 하반절의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라는 말씀도 같은 의미이다. 거룩한 족장들은 하나님은 오래 참으로시,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쉽게 용서해 주시고, 쉽게 자비를 베푸신다는 말씀을 일반적으로  그리고 존귀하게 받아들였다. 하박국 선지자가 그의 노래에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 3:2)라고 한 것은 족장들에게 취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  귀절에서 결론내리기를 그가 받았던 징벌이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늘 주시던 축복을 주시지 못하도록 막지 못하리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로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다만 잠시뿐인 점을 들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가 버림받은 자들에게 계속해서 임하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들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다른 진실된 신자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그러한 계속되는 진노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일시적인 하나님의 불쾌하심이 자기의 인자와 긍휼의 길을 무너뜨리실 수가 없는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하고 있다.

77:10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약함(사망-칼빈사역)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 이 귀절은 여러가지로 해석된다. 어떤사람들은 "연약함"을 나타내는말 *          (할로티)가 '죽이다'란 뜻이 있는 *        (할라)란 말에서 온 것으로  보고,  선지자가 말하려는 것은 누적된 환난에 짓눌려서 자기는 다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멸망시키려고 내버리신 것으로 결론내릴 수밖에 없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선지자가 하는 말은 자기가 절망에 빠진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다른사람들은 이 말을 '병들다', '연약해지다' 또는 '겁을 내다'라고 번역하는데, 이 번역이 더 잘 어울린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도 그 의미에 대한 견해는 서로 다르다. 어떤 주석가들에 의하면 선지자는  자기  마음의 연약함과 보다 남자답게 시험을 이기지 못하는 자신을 비난하며 꾸짖는다고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보통 시험의 충격을 받으면 잠시 동안 요동을 거친 후  용기를  내게 되는 것이 상례이므로 이 해석에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의미로  해석한다.
이것은 단순히 일시적 괴로움인데, 시인은 이것을 죽음에다 직접적으로 비유한다.  시편 118편 17절은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하리로다"라고 했고, 18절은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붙이지 아니하셨도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내가
확신하기로는 그가 지금은 비록 낙심하지만 그것은 다만 일시적인 것이요, 따라서  이 질병 혹은 괴로움을 참고 견딤으로써 자기가 죽지 않을 것을 분명히 알고  스스로에게서 짐을 풀어내리는 것이다. 뒷부분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도 주석가들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 이 귀절을 앞절과 연결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시편  기자가  처음에는 그런 실망 상태에 떨어져 자신이 완전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으나,  나중에는 어떠한 때에도, 심지어는 계속해서 물이 뒤덮이는 난파선 속에 던져질지라도  자기 머리를 쳐들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이 말을 누군가가 시편 기자에게 용기를 불러일으켜 주기 위해서 한 말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신  일을 체험했던 때를 생각해 보기 바란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보다 적절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곧 '너는 네가 이제 죽게 되었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네가 불치의 질병에 시달리는 것도 아니요, 또한 하나님의 손은 그 손이 치신 자들로  쉽게 다시 온전케 하시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나는 *          (슈노트)란 말을  '변절'이라고 번역한 사람들이 이 말에서 '해'(年)를 가리킬 때 사용한 *          (슈노트)란 말을 취하여 동일한 궤도를 빙글빙글 돌아가는 순환적인 성격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말을 어떤 희미로 해석하든 내가 말하려는 것은 확실하게 남아  있는데, 그것은 시편 기자가 자신이 은혜를 입을 수 있는 상태로 변해질 것을 확신함으로써 자기를 죽을 운명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약간 다르게 해석하여  또 다른 의미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되면 마치 선지자가 말하기를 '어찌하여 너는  하나님께서 그 은혜로 소중히 기르셨던 때에 그의 지엄하시믈 참을성있게 인내하지 않았느
냐?' 욥도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10)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한 것과 같다. 그러나 보다 타당성이 있는 해석은 저자가 앞날을  내다보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총을 다시 베풀어 주신다는 명확하고도 놀란할  여지가 없는 증거가 나타날 때까지 지존자의 오른손의 날 또는 그의 변혁을 기다리고  있음을 말한다고 보는 것이다.

    곧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하리이다
    또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큰 신이 누구오니이까      
    주는 기사를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11-14)
 


77:11-12
 곧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 시인은 이제 새로운 힘에 감동되어 자기의 믿음을 거의 넘어뜨릴 정도로 다가왔던 시험들을 강력하게 물리친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행사에 대한 기억은 자기가 앞에서 말했던 기억과 다른 것이다. 앞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이 멀리 떨어져 있음을 탄식했던 그가 이제는 그 탄식이 자기의 슬픔을 달래 주거나 덜어 주기에 적합하지 못함을 깨달았다. 따라서 그는 이 귀절에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은총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말하고 이것을 보다  진지하게  표현하기 위해 같은 내용의 문장을 반복하여 강조한다. 여기서 *      (키;곧)는  단순히  보다 더 확실하게 또는 과장해서 말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그가 얻은 승리는 하나님께서 시초부터 그에게 보여주셨던 것과 똑같이 계속해서 나타날 것으로 확실하게 믿었던 하나님의 기사들을 기억함으로 얻은 것이다. 뒷부분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기 종들을 지키기 위해서 행사하셨던 권능을 크게 찬미한다.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하리이다." 저자는 '주의 기사' 또는 '주의  놀라우신  행적'이란 말을 단수로 사용했다. 그러나 나는 이말을 복수로 고쳐 그 뜻을 분명히 하려고 한다. 우리는 선지자가 곧이어 단수를 사용하여 여러 가지 이저 등을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요컨대 선지자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종들을 지키시고, 구원하기 위해서 항상 베풀어 주시는 놀라운 능력이 우리들을 모든 슬픔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기에 충분함을 우리들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귀절을 통해서 때로는 하나님의 기사(記事)를 기억하는 것이 우리들이 바라고 우리의 처지가 요구하는 만큼의 위로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괴로움이 가져다 주는 것이 이기지 못해 용기를  잃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배우도록 하자. 이 점은 우리가 가장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할  문제이다. 우리는 괴로움에 처하게 되면 항상 그 괴로움을 덜어 줄 어떤 치료약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께로  집중시키는 것 뿐이다. 그렇지만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수록 외부적인  모습은 그가 우리에게 그만큼 더 괴로움을 가중시켜 주는 것으로 나타날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방법을 통해서 유익을 얻지 못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 최상의 해결책인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고 그  말씀을 듣게 되면 자기들의 괴로움이 감소되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가중되며 더 나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자기들의 괴로움을 더하게 하고 부채질하시는 분으로 알아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나아가고자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묻어 버리고 세상 일에만 전적으로 몰두해 버린다. 이러한 것은 시편  기자가  말하는
것과 매우 거리가 멀다. 그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려는 은총을 즉시 체험하지는  못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계속 바라보면서,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이나 본성을  변절시키는 분이 아니며, 따라서 조만간 자기 종들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믿음을 크게 유지해 나아간다. 우리는 또 우리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기사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도 배우도록 하자. 우리의 눈이 점점 멀어져 가고, 또 하나님의 역사 하심에 대한 우리들의 개념이 왜곡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역사의 탁월함이 우리들의 생각에서 점점 사라져 간다. 그러나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우리는 찬사를 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시인은 12절에도 반복해서 이러한  행사를  생각하되 그 적당한 시기, 곧 이러한 생각이 가져다 주는 모든 유익을 받게 될 때까지 계속하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수없이 많은 실례들이 우리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 가도 못하고 또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해주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들을 묵상의 대상으로 삼은 지 얼마 안되어 다른 어떤 것으로 곧 그 대상을 바꾸어  버림으로써 바로 그때부터 우리의 마음이 그 실례들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77:14
  주는 기사를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 시인은 하나님의 행하신  신비한  성격을 근거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증명함으로써 앞에서 말한 것을 확증한다. 시인은 하늘과 땅에 충만한 하나님의 은밀하고도 신비로운 본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방대하여 우리들의 제한된 이해력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분명하게 나타났던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인자하심과 의로우심에 대해서 말한다. 문자 그대로  보면 '주는 한 가지 기사를 행하신 하나님이시라'이지만, 여기의 단수는 앞에서 본  것처럼 복수적인 의미를가리킴이 분명하다. 우리는 이 귀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에게 매우 가까이 있고, 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매우 공개적이고도 분명하게 계시하기  때문에 우리는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실로 놀라우신 방법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이방 민족들일지라도 자기들이 보지 못했다고  핑계할 수가 없다.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란 말씀은 이러한  이유를  말한다. 이 말씀은 직접적으로 교회의 구원을 가리키지만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열방들 중에서도 분명하고 능력있게 나타내셨던 그의 영광이 멸시를 당할 때는 그  행위가 심각한 불경건의 죄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구속하셨나이다(셀라)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여 깊음도 진동하였고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발하며 주의 살도 날아 나갔나이다
        회리 바람 중에 주의 우뢰의 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취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첩경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종적을 알 수 없었나이다
        주의 백성을 무이양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15-20).

77:15
 주의 팔로 주의 백성.....자손을 구속하셨나이다(셀라). - 시인은 이 귀절에서  하나님의 다른 모든 기사들 중에 가장 뛰어난 것, 즉 택한 백성의 구속을 노래한다.  성령께서는 참된 신자들에게 구원의 소망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참된 신자들에게 주의할 것을 성경 어느 곳에서나 요구한다. 하나님의 권능이 그 당시 이방 민족들에게도 나타났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사단의 계교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진리가 많은  겁장이들에게서 타락해지고 거짓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그러한  기사들을 보기만 할 뿐 그 참된 지식을 가지려 하지 않고 오히려 눈을 가리고  자기  존재의 진리를 위장하려는 사람들의 사악함 속에도 들어있다. 모세를 나도 알 수 없는 일종의 마술사나 요술장이로 만들고 또한 요세푸스가 아피온(Apion)을 반대해서 쓴  글  속에 모아 놓은 수많은 이상스럽고 기괴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낸 자들이 근본적으로 바라는 원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망각 속에 묻으려 함인데, 이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나 선지자가 말하려는 것은 감사할 줄 모르는 죄를 범하는  이방 민족들을 정죄하려고 하는 데 있다기 보다 자기 자신과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들이 처한 환경에서 소망을 갖도록 해주는 데 있다. 이것을 말씀하던 당시 하나님은 자기의 택한 백성들을 향한 자신의 사랑에 대한 증거를 장차 올 모든  세대의  축복을 위해서 공개적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팔"이란 말씀은 특별한 성격을 지니는 능력을 비유한 것으로 기억해 둘 가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옛  백성들을 은밀하게 또는 보통 방법으로 구원하시지 않고 공개적으로 다시 말해서 자기 팖을  뻗쳐 구원하셨다. 선지자가 택함을 받은 민족을 가리켜 "야곱과 요셉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여기신 이유를 말해 주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거룩한 조상들과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이다. 요셉의 두  아들에게서 내려온 두 지파는 나머지 지파들과 같이 야곱에게 그 근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요셉의 이름을 존귀하게 나타낸 것은 그를 통해서 모든 아브라함의 족속들이 안전하게  보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77:16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 하나님께서 그의 팔의 권능으로 행하셨던 이적 중에 몇 가지가 이 귀절에서 간략하게 언급되고 있다.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는 말씀은 비유적인 말씀으로 물들이 움직인것, 다시 말해서 택한 백성들이 통과하도록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해서 그 바닥을 드러낸 것을 의미한다. 바다도 요단강도 자기들의 본래 모습을 바꿀 수 가 없었다. 물들이 뒤로 물러간 것은 어떤 판단력이나 이해력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뒤로 물러섬으로써 무생물까지라도 하나님께  복종할 준비를 갖추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 말씀 속에는 애굽으로부터의  이스라엘의 구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손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어리석음을 물들이라 할지라도 볼 수 있었던 사실에 비추어 책망하고자 하는 간접적인  대조가 있다. "깊음"에 관한 말씀은, 물들의 표면이 하나님 앞에서 뛰놀았다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이 그 가장 깊은 밑창에까지 미쳤음을 가리킨다.

77:17-18
구름이 물을 쏟고..... - *        (마임)이란 명사는 연계형으로 취해 쓰일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이 귀절의 동사가 타동사적인 용법으로 쓰였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 견해를 따르든, 아니면 *        (마임)인 연계형으로 쓰였고 동사가 수동형인 것처럼 해석하든, 즉 "구름이 물을 쏟고"(The clouds poured out waters)라고 풀이하든,  "구름의 물이 쏟아졌고"(The waters of the clouds were poured out)라고 보든, 의미상으로는 거의 차이가 없다. 이 귀절이 뜻하는 바는 바다와 요단강 뿐만 아니라 구름 속에 떠 있는 물까지도 천둥의 격동에 의하여 허공을 뚫고 풍요로운  비를  쏟아내림으로써 마땅히 받으시기에 족한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린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 말씀은  아마 출애굽기 9장 23절에 기록된 사실을 말하는 것 같다. 출애굽기는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해일이 애굽 사람들에게 내렸던 무서운 형벌중의 하나였음을 말한다.  "주의  살도 날아 나갔나이다"란 말씀은 번개를 비유하여 말한 것으로 "회리 바람 중에 주의  우뢰의 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취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라는 다음  귀절과 연결된다. 요컨대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떠나던 당시에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풍부한 증거가 사람들의 눈과 귀에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천둥 소리를 하늘 사면에서 들을 수 있었고 온 하늘이 번갯불로 빛나게 되자 그 순간 땅은 두려워 떨었다는 것이다.

77:19-20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 홍해를 마르게 했던 이적이 여기서  다른  문체로 다시 한 번 언급되고 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이 귀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를 받아 홍해 가운데를 마른 땅으로 지나갈 수 있었던 사실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앞에 매우 진기하고 신기한 방법으로 길이 열렸던 사실이 언급된 것이다. 바다란 사람의 기술로는 그 흐르는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없는 것이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 가운데로 걸어갔다. 그 길은 다름아닌 바다와 그  군대가 삼키움을 당했던 곳이다. "주의 종적을 알 수 없었나이다"란 말씀은 바로 이  이유를 가리킨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길을 건너자마자 다시  평상시의 상태로 돌아가게 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일어났던 목적이 20절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 목적은  교회의  구원이었다. "주의 백성을 무리양 같이.....인도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이 구원을 모든 성도들은 자신들을 구원하고 보호해 주심에 대한 소망을 불러 일으켜 주는 최고의 능력을 제공해 주는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이스라엘 백성을 "양"에다 비유한  것은 그들이 전적으로 지혜와 능력과 용기를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과 이 모든 것들이  부족했던 불쌍한 무리들을 하나님께서는 크신 인자와 자비로써 인도하는 자가 되어 바다와 광야와 다른 모든 장애물을 지나서 약속한 기업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해주실 수 있었다는 사실을 무언 중에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진술은 모세와 아론이 백성을 이끄는  일을 담당하기 위해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더욱 확실해 진다. 분명히 이 두사람의 공헌은 너무도 뚜렷한 것이고 길이 기억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  미미학도도 멸시당하던 두 인간을 택하셔서 역사상의 왕들 중에서도 가장 도도한 왕이  내뿜는 격렬한 진노와 그 크고 강한 군대를 대적케 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그 크신  권능을 유감없이 보여주셨던 것이다. 저 무시무시한 폭군과 전쟁을 즐기는 민족을  대적하여 버림받고 도망다니던 사람의 지팡이와 불쌍한 한 노예의 음성이 그들만의 능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은 당신이 택하신 지상의 그릇들 안에서 역사하실 때 더욱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와 함께 나는 이 귀절이 하나님께서 그토록 영광스러운 소임을 맡겨 주셨던 이들이 하나님의 종들에게 찬양을 돌리려 의도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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