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41:1
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하숫가에 섰는데. - "만 이 년 후"라 함은, 요셉이 감옥에서 두 관원장의 꿈을 해몽한 때부터 완전히 두 해가 지났다는 뜻이다. 요셉이 출옥(出獄)하는 관원장더러 자기를 생각하여 달라고 부탁했는데도 불구하고(40:14), 그는 요셉을 잊고 완전히 "이 년" 동안이나 지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고난을 모르시는 바 아니었고, 급속히 요셉을 석방시키려면 하실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성도의 고난 받는 것을 필요하게 여기신다. 그가 성도를 고난에서 풀어 주시는 것은 아무 때나 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의 정하신 특수한 때에만 하신다.
창 41:2-4
여기서 "살진 일곱 암소"는 7년을 상징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는 7년 흉년을 비유한다. 29-32 절 참조. 애굽에서 "암소"는 월신(月神) 이시스(Isis)를 표상하는데, 이시스(Isis)는 농사를 주장하는 신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므로 바로왕의 꿈에관계된 "암소"는 그같은 애굽 사람의 관념을 표시한다고 한다(Von Rad, S. R.Driver). 그러나 그 때에 바로왕의 꿈에 나타났던 "암소"를 확실히 농신(農神)의 상징으로 알았다면, 어찌하여 애굽의 술객들과 박사들이 왕의 꿈을 해석하지 못했을까? 8절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애굽의 미신 사상(迷信思想)을 그대로 채용하시면서 꿈을 주셨다고 하기 어렵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파리한 소가 살진 소를 잡아 먹었을까 하는 것이다. 소는 풀을 먹을 뿐이고 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기이한 현상을 보고 도리어 성경의 역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소가 소를 먹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꿈 가운데서는 그런 되아한 현상이 있을 수 있다. 꿈은 종종 공환적(空幻的)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이 꿈의 성격이다. 성경은 꿈을 꿈대로 기록한 것 뿐이다.
창 41:5,6
여기서는 바로왕의 둘째 꿈을 말해준다. 곧, "충실한 일곱 이삭"에 뒤이어 "마른 일곱 이삭"이 나와서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키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첫째꿈의 내용을 다른 형식으로 중복한 것 뿐이다. 이렇게 같은 꿈을 중복한 것은, 그꿈의 내용이 하나님의 진실성에 의하여 속히 이루어 진다는 뜻이다(32절).
창 41:8
바로가 꿈을 꾸고 "번민한" 이유는, 그 꿈이 너무도 인상 깊게 명백할 뿐 아니라, 두 번씩이나 나타난 것으로 보아 반드시 장차 이루어질 것이 확실한데, 자기로서는 해몽할 수 없었기때문이었다. 그가 술객과 박사를 불러서 해몽하라고 한 것을 보면, 그는 그런 꿈도 인간의 어떠한 지혜에 의하여 해석될 수 있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다. 하나님의 지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달을 수 있다. 16절 참조
창 41:9-12
술 맡은 관원장이 이제야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바로에게 소개한다. 오늘날 나의 허물을 추억하나이다 - 이 말은, 그가 요셉에게 대하여 신의(信義)를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다는 학자도 있으나, 칼빈(Calvin)은, 이것이 전에 그 자신이 왕에게 대하여 잘못하여 옥에 갇혔던 것을 추억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첫째 해석이 옳은 줄로 생각된다.
술 맡은 관원장은, 자기가 요셉의 해몽의 지혜를 체험대로 이제 그를 바로왕에게 소개한다. 그는 이제 와서야 요셉의 부탁(40:14)을 이행한다. 그가 이렇게 요셉의 부탁을 늦게 이행하게 된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되어진 일이었다. 다시 말하면, 바로왕이 하나님의 섭리로 꿈을 꾸게 되고, 그 해몽을 요구하게 될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그에게 요셉을 생각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였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성도를 고난 가운데 늘 버려 두지 않으시고, 마침내 그를 건지시기 위하여 사람들을 기용(起用)하심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졸며 주무시는 이가 아니시다(시 121:4). 그의 일하실 때가 이르면, 그는 반드시 고난 중에 있는 성도를 건져 주신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혹시 그당하는 환난이 길고 지리할지라도 낙심할것 없다.
창 41:14,15
바로가 요셉을 부르게 된 것은, 그가 어려운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난관에 빠뜨려 겸손하게 만드신 다음 하나님의 지혜를 찾아 보도록 하신다.그러므로 난관과 역경이야말로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가장 귀한 길이다. 요셉이 곧 수염을 그 옷을 갈아 입고 - 이것을 보면, 요셉이 옥중에서 얼마나 미천(微賤)하게 생활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 수염도 깍을 수 없는 처지였다고 언제나 험한 옷을 입은 채로 지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때에 성도들이 이렇게 애매히 고난 받는 것을 오히려 필요하게 여기신다.
창 41:16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 요셉은, 여기서 해몽하는 지혜가 자기에게 있지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밝힌다. 그는, 이렇게 어두운 이방인들 중에서도 하나님만을 높였다. 사람이 자기를 낮추는 것이 진리대로 행함이니, 그것이 지혜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사용하신다. "평안한 대답"이란 말은. 바로를 "평안케 해 줄 수 있는 해몽"이라는 것이다.
창 41:17-20
여기서는, 바로가 자기의 꿈을 요셉에게 말하낟. 바로가 요셉에게 자기의 꿈을 말할 때에 특별히 강조한 것은 두 가지이다. 곧, 파리한 소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같이 흉악한 것들은 애굽 땅에서 내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이라" 고 한 것과(19절), 또 흉악한 소가 살진 소를 먹어 버린 것에 대하여 강조하기를, "먹었으나 먹은 듯하지 아니하여 여전히 흉악하더라" 고 한 말들이다(21 절). 이두 가지는, 저작자가 본장 초두(1-7)에 소개한 꿈 이야기에는 없다. 위의 강조점은, 요셉이 해석한대로 애굽 땅에 장차 임할 흉년이 극심할 것을 보여 준다(30-31). 이렇게 흉년이 극심하게 된 것을 강조하게 된 점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곧, 그것은, 흉년의 범위가 각국에 미쳐서 가나안에 살던 요셉의 형제들도 양식을 구하려고 애굽에 찾아 올 것을 암시한다(55-57).
창 41:25-32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몽함에 있어서 특별히 강조한 점은, 하나님이 그 하실 일을 바로에게 꿈을 통하여 보여 주셨다는 것이다. 이 말을 두 번이나 하면서(25,28), "하나님의 하실 일"을 역설한다(25,32). 요셉은, 이렇게 실제 문제를 가지고 이방 임금을 하나님께 인도하려고 한다. 곧, 바로도 하나님의 치하(治下)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동시에, 그도 하나님께 순종해야 될 것을 암시한다. 그는, 아직 바로에게 할례(割禮)나 기타 종교 의식을 지키도록 권고한 바 없다. 다만 그는, 경건한 생활에 의하여 이 방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도록 하려고 하였다. 그는, 실생활과 관계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주권을 그들에게 알려 주므로,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려고 하였다.
창 41:33-36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몽할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애굽 나라의 잘 될 길을 아뢰었다. 이것이 참된 선지자의 특징이다. 거짓 선지자는 사람을 속임으로 패망케하나, 참 선지자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알려 주어 마침내 형통케 한다. "애굽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라는말은,"애굽땅"에서 나는곡식의 "오분의일"을 징수하여 장래의 흉년에 대비케 함이다. 이와 같은 지혜로운 제안은, 요셉 자신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啓示)로 된 것이었다. 이 제안대로 실행한 결과, 가나안에 있는 요셉의 형제들이 양식을 구하려고 애굽으로 찾아 오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되어 마침내 야곱과 온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移住)하게 되고, 하나님의 약속(15:13)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창 41:37-40
바로는 요셉을 애굽 총리대신으로 등용하였다.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40 절). 이것은, 애굽 나라를 다스리라는 뜻이다. "인장 반지"란 말은 권세의 훈장이고(에 3:10,8:2), "세마포 옷"은 애굽의 고관들이 입는 옷이었고, "금사슬"은 나라에 공적 있는 자에게 주는 장식품이었고, "버금 수레"는 바로가 타는 수레 다음 가는 것을 의미한다. "엎드리라"란 말은 요셉에게 순종하라는 뜻이다. 요셉은 극도로 낮은 자리에서 이렇게 갑자기 높아졌다. 사람이 이렇게 낮은 데서 갑자기 높아지는 것은, 흔히 하나님의 역사로 되는 일이다. 극히 낮아진 자를 가장 높은 자리로 올리실 수 있는 이는 하나님 뿐이시다. 삼상 2:6-8 상반에 말하기를,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라고 하였다.
창 41:44,45
바로는 요셉에게 권세를 주고 또 그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로 고쳐 주었으며, 결혼을 시켰다. "사브낫바네아"(* )란 말은 "생명의 풍성함"을 의미한다고 하나, 그보다도 "신(神)께서 말씀하시고 또 사신다"는 뜻이라고 한다. 물론 여기서말한 "신"은 애굽 여신(女神) 네이드(Neith)를 가리킨다. 이것은 다신론(多神論) 사상과 관계된 이름이다. "온"(* )이란 땅은 애굽 카이로의 동북쪽으로 7 마일 가서 있는 히에로폴리스(Hieoropolis)인데, 라(Ra)라는 태양신(太陽神)을 공경하는 중심지였다.
"보디베라"(* )는 "라(Ra), 곧, 태양신이 준 사람"이란 뜻이다. 그리고 "아스낫"(* )은 "태양신에 속한 자"란 뜻이다. 요셉 자신이 다신론과 관련된 애굽식 이름(사브낫바네아)을 받았고, 또 다신론과 관련된 이름을 가진 이교(異敎)제사장의 딸 "아스낫"을 아내로 취하였다. 그 아내도 역시 다신론과 관련되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우리에게는 의문이 생긴다. 그것은,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만 공경하는 요셉이 다신론에서 유래된 이름을 받았으며, 또한 다신론과 관계된 아내를 취하였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이런 일들이 그에게 문제될 것 없었겠다. 그 이유는, 요셉이 받은 애굽식 이름이 어원적(語源的)으로 다신론과 관련되었으나 그가 그 이름의 어원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원이란 것은, 흔히 우리의 일용 생활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도 신자들의 이름을 가지고 어원 풀이를 한다면 진리에 합당치 않은 이름도 많은 것이다. 또한 요셉이 이교(異敎) 제사장의 딸을 취한 일에 대해서도, 우리는 크게 문제 삼을 것 없다. 그 이유는, 그 제사장의 딸이 요셉의 섬기는 하나님께로 개종(改宗)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 때에 바로 자신이 요셉의 하나님을 찬송하였으니(38-39), 모든 고관들까지도 그의 종교적 지도를 받을 만큼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창 41:46-49
바로의 꿈에 대한 요셉의 해몽과 같이, 오래지 않아 애굽에 7 년 동안 풍년이 들게 되었다. 이렇게 됨에 따라, 요셉의 권위는 더욱 높아졌다. 따라서 그의 행정력(行政力)은 더욱 능률을 발휘하여 곡식을 국가의 창고에 무수히 저장하게 되었다.
창 41:50-52
이 부분에 요셉의 가정 형편의 행복한 것이 진술된다. 이것이 여기 기록된 목적은, 하나님께서 여러 방면으로 고난 당한 요셉을 위로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요셉은, 어려서 부모를 떠나 멀리 외국에 팔려 가서 종살이 하는 오랜 세월 동안 가정의 위안을 도무지 누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정까지 이루어 주셔서 위로를 받게 하시므로, 그는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던 생각과 과거의 쓰라렸던 모든 고난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첫 아들 이름을 "므낫세"(* )라고 하였다. "므낫세"란 말 뜻은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그뿐 아니라, 그는, 외국에서 종살이와 감옥살이를 하면서 극히 외로웠었는데, 이제 아들을 둘이나 보게되었으므로 왕성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둘째 아들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하였다. "에브라임"은 "창성함"이란 뜻이다.
창 41:53-56
여기서는, 바로의 꿈을 해몽한 요셉의 말대로 성취되어, 온 땅에 흉년이 들게 된 것을 말한다. 이렇게 되었으므로 그는 과거에 저장하였던 곡식을 백성에게 방출(放出)하기 시작하였다. 이 소문이 각국에 퍼지므로 가나안에 살던 요셉의 형제들이 애굽으로 찾아 오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므로 하나님의 약속(15:13)이 이루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