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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

바울의 로마 여행(4)(사도행전 28:1-10)

그동안 바울은 여러 곳을 지나왔고 또 여러 가지 환경에 처하였었다. 바울은 항성이 아니고 유성(움직이는 별)이었다.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이 아마도 폭풍을 만나지 않았다면 결코 상륙할 수 없었을 섬에 있게된 사실을 보게 된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바울로 하여금 이곳으로 오도록 이끌어 주신 것이리라. 폭풍우까지도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데 이용되는 것이다. 거센 바람은 아무에게도 유익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멜리데 섬에 분 폭풍은 그 섬 주민들에게 유익을 안겨 주었다. 왜냐하면 그 바람이 가는 곳마다 그곳에 축복이 되는 바울을 석달 동안 그곳에 머물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 섬은 멜리데라고 부르는 곳으로 시실리와 아프리카 사이에 위치하여 있으며 길이는 이 십마일이고 폭은 십이 마일의 크기였다. 이 섬은 지중해 안에 있는 어떤 섬보다 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었다. 이 섬은 시실리에서도 육십 마일 떨어진 데 위치해 있었다. 그 섬은 말타의 기사들로 인하여 유명해지게 되었다. 그들은 터어키가 기독교 국가들의 일부를 침략해 왔을 때 그들과 당당히 싸워 터어키군 군대가 전진하는 것을 어느 정도 저지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Ⅰ. 이 섬의 주민들은 자기 섬의 해안에서 파선당하여 곤란에 처한 낯선 사람들을 친절히 영접하였다. 이에 대하여 본문은 "토인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였다"(2절)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승객들 중 어느 한 사람의 목숨도 잃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하나님이 완전하시듯이 그의 하시는 일 또한 완전하시다." 그들이 바다를 벗어났더라도 해안에 도달해서 추위와 굶주림으로 멸절되었다면 바다에서 살아 난 의미가 없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섭리를 통하여 그들을 계속 돌보시었다. 우리가 인간의 손을 통하여 도움을 받았을 때도 우리는 그 도움이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에게 유익을 줄 수 있지만 그가 그것들로 우리의 도움이 되지 않게 하시면 그것은 더 이상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원하신다면 원수들끼리도 화평하게 만드실 수 있으며 낯선 이들을 친구로 만드시되 그것도 꼭 필요하고 진실한 친구로 즉 "역경 가운데" 도움을 줄 친구들로 삼으실 수 있는 것이다. 형제란 역경 가운데 서로 큰 도움이 되는데 낯선 자를 이러한 형제와 같은 친구로 변모시키시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1. 멜리데 섬의 원주민들이 바울과 그의 동료들에게 베풀어 준 친절을 일반적인 관점에서 살펴 보자. 그들은 야만인이라고 불리웠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어나 관습에 있어서 그리스인과 로마인들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 이외의 모든 사람은 야만인으로 취급하였다(이것은 다분히 교만에서 연유된 태도였다). 그러나 실상 그들 이외에도 문화 생활을 하는 민족들은 있었고 어느 의미에서는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보다 더 문명인들도 있었던 것이다. 하여튼 이 토인들은 야만인이라고 불리워졌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애에 가득 찬 사람들이었다. 본문에 그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였다"고 했다. 그들은 난파선의 승객들에게서 약탈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두려웁게도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자들이 이러한 잘못을 많이 범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이 기회를 그르이 자비를 행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상처입은 사람에게는 제사장과 레위인 보다도 더 좋은 이웃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에게서 혹은 그리스도인에게서조차 여기서 설명한 토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인간애보다 더 나은 행동을 발견하게 된다. 이 내용은 우리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기 위하여 여기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즉 본문은 우리로 역경과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게 하기 위해서 또한 우리의 능력이 자라는 한 최대한으로 그들을 구조하고 원조하여 주게 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다. 우리는 "그의 장막 문 앞에 앉아 나그네들을 영접한 아브라함같이"(히 13:2) 나그네를 대접해야 한다. 특히 본문의 토인들과 같이 고난에 처한 나그네들을 영접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사람을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 만약 하나님의 뜻에 이해서 우리가 길을 잃은 사람들을 자주 대하게 되는 곳에 살게 되었다면 그것을 우리의 불운으로 여기지 말고 오히려 기쁨으로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이있기 때문이다."

2. 토인들이 베푼 친절의 특별한 실례들을 살펴 보자. 본문에 보면 "불을 피워 무리를 다 영접하더라"(2절)고 하였다. 즉 "그르이 우리를 위해 모닥불가에 자리를 마련해 주고 우리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어떤 종교를 믿는지는 개의치 않고 우리 모두를 환영 하였다"는 말이다. 해안을 향하여 헤엄치고 또 부서진 배의 파편을 잡고 해안으로 오는 동안 그들은 몹시 젖었을 것을 쉽게 상상하게 된다. 아마 그들의 몸에 지닌 것 중 젖지 않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바다에 빠진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비까지 심하게 내려서 오늘은 밑의 물과 위의 물에 휩싸여 살 속까지 젖는 듯한 그런 형편에 처하였다. 또한 "그 비는 겨울 비였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모닥불이 가장 필요하였다(왜냐하면 식사는 그들이 얼마 전 배 위에서 들었기 때문이다). 토인들은 즉시 그들을 위해 불을 피워 그들로 몸을 녹이고 옷도 말릴 수 있게 해 주었다. 때때로 가난한 가정에 음식이나 송을 주는 것만큼 땔감을 주는 것이 자비를 베푸는 일이 될 때가 있다. 먹는 것 만큼이나 몸을 따스하게 하는 것도 필요한 것이다. 사나운 바깥 날씨 가운데서도 따뜻한 집과 잠자리와 옷에 따스한 불을 쬐면서 혹한을 모르고 지내는 자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비를 맞으며 추위에 떠는 가를 생각하고 그들을 가엾게 여기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도와야만 할 것이다.

Ⅱ. 바울은 독사에게 손을 물림으로써 또 다를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보고 토인들은 바울이 죄를 진 탓이라고 부당한 판결을 내렸다. 바울은 낯선 무리들 사이에 끼어 있었고 또 일행 가운데서 가장 대단치 않고 가장 하찮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를 구별하시어 곧 주목할 만한 인물로 나타내신다.

1. 모닥불이 피어졌을 때 많은 일행이 같이 불의 혜택을 입게 하려고 불을 좀 더 돋구기 위하여 바울은 그들 모두와 마찬가지로 분주히 나뭇가지를 모았다(3절). 바울은 모든 사람들에게서 자유하였으며 그들 아직 누구보다도 위대하였지만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 바울은 부지런하고 능동적인 사람이었다. 또한 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그 일을 하기를 즐겨하였고 결코 자신의 편안만을 도모하지 않았다. 바울은 겸손하고 자기를 돌보지 않는 사람이었다. 바울은 자기가 유용하게 쓰여질 수 있는 일은 어떤 일이고 달려들어 해치우는 사람이었다. 그는 심지어 모닥불을 만다는 데 필요한 나뭇가지를 모으는 일까지 하였다. 죄 이외는 아무 거도 우리를 천박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의 유익을 위해 필요하다면 가장 천한 직업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토인들은 상륙인들을 돕고 있었다. 그럼에도 바울은 자기 몸이 젖고 또 추웠지만 불을 피우는 일을 토인에게만 맡겨 두지 않고 자진하여 그 일을 도왔다. 불을 쬐는 사람은 자기가 얻은 유익을 감사히 여겨 장작이라도 나르는 일을 도와야 할 것이다.

2. 나뭇가지는 오래 되고 마른 덤불이었는데 우연히도 그 속에 독사가 한 마리 있었다. 그 독사는 열을 받기까지는 죽은 듯이 있다가 뱀이 온기를 느끼게 되자 활기를 띠고 무심코 나뭇가지를 불 속에 던지고 있던 바울에게 덤벼들어 그의 손을 물었다(3절). 뱀이나 독이 있는 동물들은 일반적으로 마른 나뭇 가지에 많이 서식한다. 또한 그것들은 헌 담 속에서도 서식한다. 그러므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과도 같도다"(암 5:19)라는 말씀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담을 헐다가 뱀이 튀어 나와 놀라게 되는 경우는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담을 허는 자모든 뱀에게 물리리라"고 하였던 것이다. 또한 뱀인 푸른 풀밭에서도 발견되지만 또한 마른 잎새들 속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이같이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들은 도처에 많이 흩어져 있다. 인간이 하나님께 반역한 이래 많은 동물들이 인간을 해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우리도 언제 그것들로부터 해를 입을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가 해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큰 자비의 은총인지 모른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에게 이익이 될 것으로 기대한 일에서 해로움을 당하는 경우를 당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순수한 동기로 일을 하다가 또는 자기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도중에 해를 입은 경우가 많은 것이다. 바울이 그러하였다.

3. 토인들은 바울이 죄수의 형편인 것을 보고 그가 살인자라고 단정지었다. 그들은 그가 자기 나라의 법을 피하여 로마에 상소한 살인자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 독사는 정의의 신에 의하여 피에 대한 보수자로서 보냄을 받은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만약 그들이 바울이 죄수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면 그들도 바울을 도망자라고 간주하였을 것이다. 그들이 독사가 바울의 손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바울이 그것을 즉시 떨어버리지 못하고 그냥 물린 채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저 사람은 틀림 없이 살인자일 것이다. 그가 무고한 피를 흘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다서 살아 나올 수 있었지만 복수의 신이 추적하여 살아나서 기뻐하고 있는 그를 물었을 것이다. 이제 그는 살지 못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1) 자연 계시의 긍정적인 면. 그 사람들은 토인들이었다. 아마 그 토인들에게는 책은 물론 어떤 교육의 수단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연 계시를 통하여 다음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1] 그들은 자연 계시를 통해 세계를 다스리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모든 역사를 주재하시는 섭리가 있다는 것과 또한 모든 일이 우연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로 행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2] 그들은 죄인들은 형벌을 피할 수 없다는 것과 하나님은 선한 일은 상 주시고 악한 일은 벌을 내리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nimesis - wmr 복수하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서운 죄악에 대해서는 불원간에 그 대가가 치루어 진다는 것을 알았다. 토인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이 하나님께서 복수하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말씀 하셨음을 믿고 있었다.

[3] 토인들은 살인이 극악무도한 죄이며 이러한 죄는 오래가지 않아 처벌된다는 것과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한 자는 다른 사람에 의해서 그 피가 갚아지지 않는다면(이런 경우는 법에 의해 처리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모든 불의의 보수자이신 하늘과 땅의 공의로우신 심판관이 그 피를 갚으실 것이라고 믿었다. 악을 행하고도 처벌받지 않고 무사히 넘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야만인들을 통해서라도 정조받을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들 야만인들은 학식은 없었으나 "악한 자에게 화가 있을진저! 그들에게 불운이 닥치리라. 왜냐하면 그들의 행위에 대한 보수가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또한 사람들 가운데는 그들이 여러 번 법을 피하여 왔기 때문에 안전할 것이며 "우리가 계속 악을 행한다 해도 별일 없을 것이라고 말하며 또 "그들의 악행에 대한 처벌이 속히 닥치지 않는다고 해서" 더욱 대담하게 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본문의 무지한 사람들을 통하여 범죄자는 바다의 보복은 피할 수 있지만 사람은 신의 공의를 벗어날 수 없고,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하리라"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욥의 시대는 누구보다 "악인에게는 반드시 멸망의 날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2) 자연 계시의 부정적인 면,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은 하나님의 특수 계시에 의하여 교정되어야 할 것들이다. 두 가지 점에서 이 토인들의 서식은 불완전했다.

[1] 모든 악한 자들은 이 세상에서 별을 받는다고 생각한 점이 잘못된 생각이었다. 즉 보수하시는 신은 살인자들과 같이 악명 높은 죄인들을 결코 오래 살려 두시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죄인들이 "함정에서 나오면 올무에 걸린 것이고"(렘 48:43, 44) "사자를 피하면 곰을 만날 것이요"(암 5:9) 익사 직전에 구조되면 독사가 그들을 물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살인자들과 같은 악한자일지라도 "오래 살 수 있으며 또한 권력까지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보복의 날, 격노의 날이 저 세상에서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 몇몇 사람이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섭리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처벌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처벌받지 않고 살아 가는데 이는 심판이 장차 있을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2] 인생의 여정 곳에서 크게 괴로움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인이라고 생각한 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실로암에서 탑에 깔려 죽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한 것같이 뱀에게 물린 사람을 보자. 곧 그를 살인자라고 단정해 버렸다. 욥의 친구들이 욥의 처지를 판단할 때 범한 실수가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의 특수 계시는 이 문제에 대하여 밝은 이해를 제시하여 준다. 즉 모든 일들은 일반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때로는 선한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의 믿음과 인내를 강하게 하고 개량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대단한 고난을 당하기도 하는 것이다.

4. 바울이 손에서 독사를 떨어버렸을 때도 토인들은 하나님의 복수가 자기들의 생각을 증명하리라고 믿었다. 그리고 바울이 독의 힘 때문에 "몸이 부어 올라" 죽는지" 갑자기 엎드러져 죽을 줄로" 알았다. 사람들은 한 번 사람을 나쁘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들의 생각이 아무리 부당한 것일지라도 끝까지 그것을 고집하려고 한다. 또한 자신들의 까다로운 판단을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심으로 확언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들 토인들이 바울이 몸이 부어서 쓰러지지 않는 것을 보고 그들 자신이 그를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덤벼들지 않는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반대로 그들은 신이 섭리하는 데 따라 맡기려 했고 그 섭리의 결과를 다만 주시하고자 하기만 하였다.

Ⅲ. 위험과 사람들의 부당한 판단을 벗어나게 된 바울. 바울의 손에 달라 붙었던 뱀은 그의 믿음에 대한 시험이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칭찬받을 만하고 존경할 만한 영광스러운 것임이 증명되었다. 그 이유는

1. 바울이 그 일로 결코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몸을 움cm리지도 않았고 펄쩍 뛰지도 않았고 우리들이 본능적으로 하는 것같이 두려움과 당황함으로 뱀을 던져 버리지도 않았다. 바울은 사람들이 그가 독사에게 물린 것을 보고 말을 할 때까지였다. 이 같은 그의 태도는 이러한 급박한 일을 당한 어떤 사람도 지닐 수 없는 그러한 것이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의 특별하신 도움에 의하여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막 16:18). "그들이 독사를 보았으리라"고 말씀하신 그 말씀을 믿었으므로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마음을 정하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지녀야 할 태도인 것이다.

2. 바울은 아무 동요도 없이 또한 어려움도 없이 "독사를 불 속에 떨어버렸다." 그는 도움을 요청하거나 또는 독사를 떼어내기 위해 특별한 수단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하여 뱀은 불 속에서 타 죽었으리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총의 능력 안에서 신도들은 사탄의 유혹을 거룩한 결단으로 떨쳐버리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사탄아 내 뒤로 물러서라. 여호와께서 너를 벌하시리라"라고 말하여야 한다. 사탄이 성도들에게 달려들지라도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며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 못하는 것이다"(요일 5:18). 우리가 양심이 떳떳하므로 인간들의 비난과 질책을 무시할 수 있을 때 또한 거룩한 경멸의 태도로 그 비난을 대할 수 있을 때 우리도 바울처럼 "독사를 불 속에 던져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비난과 책망이날 우리가 그것을 무심코 들어 넘길 수 있다면 또는 그 비난으로 우리 의무 수행에 지장이 초래되지 않는다면 또는 그것으로 격분되어 욕을 욕으로 갚지 않는다면 해될 것이 없는 것이다.

3. 바울에게 아무런 나쁜 증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독사에 물렸으니 이제 그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을 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하여 바울로 하여금 토인들에게 훌륭한 인물로 인정받도록 만드시고 또 그들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계기를 삼고자 하셨다. 그 일이 있는 후에 멜리데 섬은 아일랜드 섬 이상으로 독충이 없는 섬이 되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비록 천주교의 필자들은 이 사실이 틀림 없는 이 사실이 틀림 없는 사실인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필자는 그러한 주장의 확실한 증거는 보지 못했다.

4. 토인들은 전에 바울은 비난한 정도 이상으로 이제 그를 높히었다. 토인들은 마음을 돌리고 바울을 죽지 않는 신이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토인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는 그렇게 오래 물고있었는데도 죽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중의 의견이란 얼마나 변덕스러운 것인가. 그것은 바람따라 변모되며 극에서 극으로 흐르는 것이다. 대중들이란 "바울과 바나바에게 희생 제사를 바치려 하다 변하여 그들을 돌로 치려고도 하였고" 본문에서의 대중들은 바울을 살인자라고 정죄하다고 신으로 그를 떠받들었던 것이다.

Ⅳ. 바울에 의해 열병에 걸려 있던 보블리오 부친과 기타 질병을 앓고 있던 사람들이 병고침을 받았다. 이 기적들과 병행하여 복음이 전파되었을 것이고 또 이 기적은 그리스도 가르침을 확증해 주었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

1. "보블리오라는 이 섬의 제일 높은 사람"이 조난당한 사람들을 친절하게 접대함. 보블리오는 멜리데 섬에서 상당한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어떤 이는 그를 그 섬의 통치자였다고 생각한다. 보블리오는 "바울 일행을 영접하고 사울이나 친절히 유숙하게 하였다." 하나님께서 많은 재산을 지닌 자에게 넓은 마음도 주신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제 그들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은 우두머리요, 가장 부유한 사람이요, 선한 일에도 부자인 그런 사람이었다.

2. "보블리오 부친의 질병." 그는 "열병과 이질을 앓고 있었다." 흔히 열병과 이질은 합병증으로 잘 발생하며 그런 경우 그 병은 대단히 치명적인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섭리를 통해 바로 이 때에 그를 앓게 하셨고 바울로 하여금 보블리오가 베푼 친절에 대한 보답으로 그를 치료하게 하셨다. 기적에 의한 그 사람의 치유는 바울에 대한 보블리오의 친절에 대한 특별한 답례가 되었다. 보블리오는 선지자로서 바울을 영접하였고 그로 인하여 선지자의 보상을 받게 된 것이다.

3. 바울이 행한 치료. 바울이 보블리오 부친이 앓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집 사람들은 바울이 병을 고치리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에게 병고쳐 줄 것을 요청하지도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그는 비록 자신이 의술에 의해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는 아니었지만 기적으로 그를 치료랄 수 있는 사도의 신분으로 그에게 들어 갔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그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고 안수하였다. 그러자 즉시 그가 나았던 것이다. 보블리오의 부친은 노인이었으나 곧 건강을 회복하였다. 또한 그가 노인인데도 생명이 연장된 것은 그에게 큰 자비가 베풀어진 것이라고 하겠다.

4. 여러 다른 사람들에 대한 치료. 보블리오는 부친의 치유를 보고 다른 병든 자들이 바울에게 와서 치료받았다. 그가 쉽고도 효과적으로 질병을 치료하였으므로 많은 환자들이 몰려왔다. 바울은 모든 사람을 환영하고 병을 고쳐서 그들을 보냈다. 바울은 자신이 우연히 그 섬에 당도하여 기회만 주어지면 떠날 이방인이니까 그들의 청을 거절해도 관계 없다고 생각지 않았다. 선한 사람은 어느 곳이든지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에서 선을 행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을 빚진 자로 여겼다. 그는 희랍인 뿐만 아니라 야만인들에게도 빚을 지고 있다고 여겼고 또 그들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데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바울은 이 섬 사람들이 자기에게 베풀어 준 적절한 쉴 곳과 음식에 대하여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신세진 것을 갚고자 하였다. 그들이 바울을 영접함으로 오히려 그에게 더 큰 은혜를 입게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로 나그네를 영접하게 하는 좋은 자극제가 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로써 어떤 이는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게도 되며 그리스도의 사도를 대접하게도 되는 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곤경에 빠진 그의 백성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준 사람들을 보답하는 것을 지연시키지 않으신다.

바울은 이 치료를 통하여 복음을 전파했을 것이다. 그리고 멜리데 섬 사람들은 확신과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였다. 이를 통하여 볼 때 어떤 어민(漁民)들도 그들의 해안에 표류한 난파선을 통하여 이 멜리데섬 사람들이 친절을 베풀므로 받은 혜택 만큼 많은 것을 얻은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Ⅴ. 이 토인들은 바울이 그들에게 베푼 친절에 대하여, 특히 그가 기독교를 전해 준 데 대하여 풍성하게 보답하였다. 그들은 바울과 그의 동료 사역자들에게 매우 친절하였다. 아마 바울의 동역자들은 그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통해 바울을 도왔을 것이다(10절).

1. 본문에 보면 섬 사람들이 "후한 예로 그들을 대접하였다"고 하였다. 그들은 최상의 존경심을 그들에게 표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도의 일행들을 영광되게 하신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바울 일행을 존귀히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고 여겼다. 그들은 아무리 사도 일행을 존중한다고 해도 그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다. 아마 이 섬 사람들은 바울 일행을 그들의 섬으로 자유로이 활동하게 하고 그들 일행을 그들의 사회의 일원으로 대우하였던 것 같다. 신실한 복음을 전도하는 자들은 이중의 존경을 받는다. 특히 그들이 그들의 전도에 성공했을 때 그러한 것이다.

2. 본문에 보면 "떠날 때에 그들이 우리 쓸 것을 배에 올리더라"고 하였다. 즉 그들은 생필품들을 배에 실었다. 바울은 여기서는 노동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해야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멜리데 사람들이 베푼 친절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치료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그는 이 능력을 거저 받았으므로 또한 거져 주었다) 자신과 또 함께 있는 자들이 필요로 하는 구제품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였다. 섬 사람들은 영적인 것을 수확하였으므로 저희에게 쓸 것을 공급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전 9:1).

 

28:2 없음.

 

28:3 없음.

 

28:4 없음.

 

28:5 없음.

 

28:6 없음.

 

28:7 없음.

 

28:8 없음.

 

28:9 없음.

 

28:10 없음.

 

28:11

로마에 도착한 바울(1)(사도행전 28:11-16)

위의 구절에는 로마까지의 바울의 여정과 그가 마침내 로마에 도착한 사실이 설명되고 있다. 이제까지 바울은 거칠고 험한 여행을 하였고 이제 겨우 죽음을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폭풍이 가라앉은 후의 그의 여행의 남은 과정은 순탄하였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Ⅰ. 그들은 멜리데 섬을 떠났다. 그들에게 멜리데 섬은 좋은 휴식처였다. 그러나 그 섬이 그들의 목적지는 아니었다. 그들은 원기가 회복되자 다시 바다를 향해 떠나야 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 나가는 동안에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실망을 겪는다고 해서 앞으로 나아 가는 것을 중단할 수는 없다. 그들의 출발에 대해 다음사실이 본문에 기록되고 있다.

1. 그들이 출발한 시기. "석달 후에" 즉 겨울의 3달이 지난 후 그들은 출발했다. 그들에게는 의무가 주어져 있었으나 위험한 철(계절)에 출항하는 것보다 섬에 머물러 있는 것이 더 나은 일이었다. 바울은 선원들에게 겨울 날씨에 항해하는 것이 대단히 위험하다고 경고하였었다. 전에 그들은 바울의 경고를 들으려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들은 몸소 겪은 어려움과 위험을 통하여서 그의 경고가 참됨을 깨달았으므로 새삼스러이 바울이 그것을 경고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들은 값비싼 보상을 치루고 나서야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경험은 어리석은 자들의 여주인이라고 불리운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자는 경험으로 배울 때까지는 결코 깨닫지 못하게 때문이다.

2. 그들이 타게 된 배. 그 배는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출항한 배였다(27:6). 이 배는 "멜리데 섬에서 겨울을 난 배로써" 훌륭한 것이었다.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하는 일의 결과란 얼마나 서로 다른가를 생각해 보자. 여기 알렉산드리아를 출항하여 똑같이 이달리야로 향하는 배가 두 척이 있다. 이 배들은 두 척 다 멜리데 섬에 오게 되었으나 한 척은 난파되고 다른 한 척은 안전하였다. 우리는 종종 이런 경우를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 나가는 동안 어떤 때는 은혜를 베풀어 번영하게 하신다. 이런 때는 무슨 사업이고 시작하면 잘 된다. 그러나 어떤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일이 엇갈리게 만드신다. 이런 때는 무슨 일에 손을 대면 그 일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같이 인생사란 다양한 것이므로 우리는 궁핍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야 한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그 배의 기호에 대하여 전해 준다. 그것은 아마 배의 이름이었던 것 같다. 그 기호는 "디오스구로"라는 것이었다. 디오스구로란 보잘 것 없는 이방의 신의 명칭으로 시인들은 이 신을 바다의 신으로 항해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폭풍을 다스린다고 조작하였다. 이 신의 이름은 배의 앞 부분에 새기워졌다. 따라서 배도 자연 그 이름을 따라 명명되었다. 나는 본서의 저자가 이 배의 이름을 기록한 것도 이 배의 이름이 이달리야와 이집트 사이를 왕래하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졌기 때문에 이 이름을 기록하여 본서의 내용의 진실성을 더욱 확실하게 밝히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라고 각한다. 라이트푸트 박사는 누가가 이런 조건들을 자세히 서술하여 준 이유를 당시 승객들의 미신적인 생각을 나타내려 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그들은 그런 이름을 가진 배를 타는 것이 먼저 번 배보다 훨씬 안전하리라고 거대하였다는 것이다.

Ⅱ. 그들은 이달리야 도착 및 로마로의 육로 여행 계속.

1. 그들은 처음에 시실리 섬의 가장 큰 도시인 수라구사에 도착했었다. 거기서 그 배는 사흘을 머물렀다. 아마 거기서 그들은 교역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 배는 장사를 위해 항해를 하는 배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가 자주 들었고 또 보기를 원하였던 여러 곳들을 보며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특히 대단한 고도(古都)요 유명한 곳인 수라구사를 본 것은 그에게 큰 만족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 곳에 그리스도인은 없었던 것 같다.

2. 그들은 수라구사에서 레기온으로 왔다. 레기온은 이달리야의 도시로서 시실리 섬의 메시나 맞은 편에 위치하여 있었다. 그곳은 칼라브리아 왕국 또는 나폴리 왕국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레기온에서 하루를 보냈다. 로마 교회에서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당시에 설교를 했을 때 물고기들까지 그의 설교를 들으려 해변가로 몰려 들었다고 한다. 또한 그 전설에 의하면 거기서 그는 돌기둥에다 촛불을 점화시켰다고 하며(돌 기둥에 불을 붙였다는 말) 이 기적을 통하여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이 진실된 것임을 믿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그와 함께 여행하던 동료의 한 사람인 스데반을 이곳의 주교를 삼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이 모든 일이 그날 하루 사이에 이루어진 서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으로 보아 그들이 해안에 정박한 것 같지는 않고 단지 항로 중에 닻을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3. 그들은 게리온에서 보디올로 갔다. 보디올은 오늘날 포촐라나라고 불리우는 곳으로 나폴리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이었다. 바울이 탄 알렉산드리아 배는 보디올이 목적지였다. 그러므로 거기서 바울은 로마로 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해안에 상륙하여서 육로로 남은 길을 여행하였다. 바울은 보디올에서 형제들 곧 그리스도인들을 만났다. 이곳에 기독교의 복음을 누가 전하여 주었는지는 전해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도 복음의 감화력은 놀라웁게 역사하였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조차 하지 못한 장소에 까지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하는 그의 백성들을 두시는 것이다.

(1) 보디올에는 적은 수의 형제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그럼에도 바울은 그들을 찾아 냈다. 그 형제들이 바울의 소식을 먼저 들었는지 바울이 그들을 찾아 알아냈든지 하였을 것이다. 여하간 그들은 직관적으로 함께 모일 수 있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형제들은 서로 형제들을 찾아야 하고 이국땅에서 동포들을 만날 것처럼 서로 교제를 가져야 한다.

(2) 그곳의 형제들은 바울과 그의 동료들을 칠 일 동안 머물도록 청하였다. 이 말은 그들이 바울의 일행에게 한 주일(主日)만이라도 함께 있으면서 예배를 주관해 달라고 청한 말씀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언제 다시 보디올에서 바울을 볼 수 있을 것인지 기약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울에게 강요하여 머물게 하므로 그의 설교를 듣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바울도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기꺼이 허락했다. 바울을 호송하던 백부장도 보디올에서 자신의 일을 하고 친구들을 만나 볼겸해서 바울에게 칠일 동안 머무를 것을 허락했던 것 같다.

4. 그들은 보디올에서 로마로 향하였다. 그들이 보도로 여행했는지 혹은(23:24 에서처럼) 말을 타고 여행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여튼 그들은 로마로 가야만 하였으며 이제 그들은 마지막 여정을 앞에 두고 있었다.

Ⅲ.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의 바울에 대한 환영. 바울이 보디올에 도착하였을 때 바울이 그곳에 머무를 기간과 로마로 향한 날짜가 보디올에 있는 형제들에 의하여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졌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저희의 수고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을 영접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

1. 로마에 있는 형제들은 바울에 대하여 대단한 존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그의 명성을 익히 들어 왔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를 유용하게 쓰신다는 것과 또 그가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왕국을 건설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고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여 그들의 영적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로마에 있는 형제들은 그의 고난에 대해서 들었고 또 하나님께서 바울을 어떻게 고난 가운데서 보호하셨는가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울을 만나 보기 원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영광된 수호자인 그에게 가능한 최대의 존경을 표시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바울은 몇 해 전에 그들에게 긴 서신을 써 보냈었다. 이것이 "로마서로써 그의 가장 뛰어난 서신이다. 그 서신에서 바울은 그들에게 세심한 배려를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유익한 많은 교훈을 그들에게 주었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들은 이제 바울에게 본문과 같은 경의를 표하였던 것이다. 본문에 보면 그들은 "그를 맞으러 갔다"고 하였다. 바울이 죄수에 불과하였지만 대사나 재판관이 공식 입성을 하거나 하는 것처럼 예의를 갖추어 그를 영접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로마에서 51마일 떨어진 "압비오 저자"까지 바울을 맞으러 갔으며 어떤 사람은 로마에서 28마일 떨어진(어떤 이들은 33마일 떨어진 곳이라고 본다) 삼관이라는 곳까지 나갔다. 로마의 그리스도인 형제들은 바울이 죄수라고 그를 부끄럽게 여기거나 그를 맞아들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이유 때문에 두 배의 존경을 표하였으며 바울에게 정성스런 존경을 표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2. 그들의 영접을 통하여 바울이 큰 위로를 받았다. 이제 바울은 로마 가까이에 까지 가게 되었다. 아마도 보디올에서 바울은 현재 황제로 있는 네로의 성격이 어떻게 또 그가 점점 난폭한 노릇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 같다. 이로 인하여 그는 자기가 황제에게 상소한 일에 관하여 여러 가지로 우울한 생각을 가졌고 또 상고 결과에 대해서도 염려하였다. 그는 점차 로마에 가까이 가고 있었다. 그곳은 전에 그가 결코 와보지 못한 것이었고 그를 아는 사람이나 또 그가 아는 사람이 몇 명 안 되는 곳이었다. 또한 그는 이곳에서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이런 모든 생각으로 그는 점점 침울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때 그는 로마에서 그를 영접하려고 나온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그들을 만났을 때 다음과 같이 하였다.

(1)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우리는 바울이 그들이 베푼 예우에 대하여 감사하고 그가 그들의 이 친절을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지를 거듭해서 그들에게 말하였으리라고 짐작 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만일 우리에게 우리 친구들이 친절을 베푼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로 그렇게 하게 하신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즉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이러한 생각을 지니게 하시고 또 그렇게 하도록 그들의 몸을 움직이신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친구들의 친절에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물론 바울은 멜리데 섬 토인들의 예우와 친절에 대하여도 하나님께 감사드렸었다. 그러나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에게 베푼 경건한 보살핌에 대해서는 더욱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바울은 로마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보았을 때 그리스도의 복음이 로마 제국의 수도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우리들이 외국에 나가서 혹은 낯선 곳에 가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으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형제들과 만나게 될 때 우리는 마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또 이 세상에 악한 인간들이 존재하는 반면에 훌륭한 인간들도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할 것이다.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대하기 훨씬 이전에 그들에 대한 소식만을 듣고 그들에 대하여 감사하였었다(롬 1:8). 그는 거기서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그들을 보고서 하나님께 감사드렸다(아마도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교제해 논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세련되고 고상한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어떤 사람들보다 더욱 정중하고 교양있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2) 바울은 "담대한 마음을 얻었다." 그들을 만남으로 인해 그에게는 새로운 원기가 주어졌고 그의 정신이 새로워졌으며 그의 우울증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제 바울은 비록 죄수였으나 전에 예루살렘을 자유의 몸으로 들어갔던 때와 마찬가지로 즐거운 마음으로 로마에 들어갔다. 그는 로마에 자기를 아껴 주고 인정해 주는 사람들이 있으며 또 그가 친구로서 대화하고 의논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바울이 갇혀 있는 동안 지루함을 덜어 주고 네로 황제 앞에 설 때 두려움을 없애 줄 것을 그는 믿었다. 하늘 나라를 향하여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와 또한 그의 고통에 함께 참여할 동료 여행자들을 만난다는 것이 커다란 힘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수많은 훌륭한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드리는 여러 엄숙한 예배를 볼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게 될 뿐 아니라 용기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직자들에게 존경을 표시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성직자들이 모욕을 당하여 고난을 당할 때 그들이 격려해 주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고난과 섬김을 더욱 잘 감당하게 해 주모든 힘이 될 것이다. 본문에 의하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현재로는 바울을 존경하고 또 바울은 그들의 태도를 보고 앞으로도 많은 할 것을 기대하며 위로를 받았으나 바울이 그들을 가장 필요로 할 때 그들이 바울을 실망시켰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 사실은 바울의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도다"(딤후 4:16)라는 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말을 타고 사오십 마일을 달려서 바울을 영접하는 일은 쉽게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여행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을 변호하고 그를 위한 증거를 제시하기 위하여 법정에 출두하여 황제의 노여움과 다른 높은 신분의 사람들의 노여움까지 감수해야 할 입장에 이르게 되자 그들은 발뺌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위기가 막상 닥치자 그들이 바울을 영접하려고 로마를 떠났던 것처럼 후에는 바울을 멀리 하기 위하여 로마를 떠났던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인간에게 위로받으려 하지 말고 우리 주 하나님을 통하여 위로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주께서 주신 약속에서 우리가 얻는 용기는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의 위로 앞에서 우리는 인간의 찬사를 기대한 사실을 부끄러워할 것이다. "하나님은 진실되시나 인간들은 거짓된 자들인 것이다."

Ⅳ. 로마의 감옥에 구금된 바울(16절). 이제 바울의 여행은 끝이 났다.

1. 그러나 바울은 여전히 죄수의 신분이었다. 바울은 로마를 보기 원했었다. 그러나 로마에 도착하자 그는 다른 죄수들과 함께 간수장에게로 인도되었다. 그리하여 바울은 간수장이 허락하지 않는 한 로마를 구경할 수가 없게 되었다. 얼마나 많은 위대한 사람들이 왕관을 쓰고 승리의 기쁨에 취하여 로마로 입성하였던가. 그러나 그들은 진실로 그 세대의 악질 염병과 같은 자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여기 한 선한 사람이 불쌍한 죄수처럼 쇠사슬에 묶여 로마로 입성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진실로 그 세대의 가장 커다란 축복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대한 자만을 벗어버리라는 충분한 교훈이 되고 있다.

2. 그러나 바울은 몇 가지 혜택을 누리었다. 그는 죄수였으나 중범은 아니었고 그리하여 일반 감옥에 수감되지 않았다. 바울은 형제들이 자기를 위해 마련해 준 편한 개인의 숙소에서 혼자 기거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는 군인 한 사람이 바울의 경비로 배정되었다. 아마 그 군인은 바울에게 공손했으며 죄수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자유를 바울에게 허용하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 군인이 본래 나쁜 성품의 사람이었더라도 바울처럼 예의 바르고 정중한 사람에게는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홀로 기거하도록 허락을 받으므로 다른 죄수들과 함께 지내는 것 보다는 자기 시간을 즐길 수 있게 되었고 형제들과 하나님과 더불어 사귀는 일에 더욱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갇힌 자들에게 그를 지키는 자들을 통하여 은총을 베푸신다는 사실은 곧 위로가 된다(시 106:46). 마치 요셉이 간수장에게 잘 보였고(창 39:21) 여호야긴이 바벨론 왕의 눈에 잘 보였듯이(왕하 25:27, 28)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을 속박으로부터 즉시 풀어 주시지는 않더라도 그가 만일 그들을 안심시키고 그 속에서도 편안하게 하신다면 그들은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28:12 없음.

 

28:13 없음.

 

28:14 없음.

 

28:15 없음.

 

28:16 없음.

 

28:17

로마에 도착한 바울(2)(사도행전 28:17-22)

바울은 죄수로서 로마로 호송되었다. 그가 호송되는 데는 많은 경비가 들었고 또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도착하자 아무도 그를 기소하거나 그에게 죄를 물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입장을 해명해야만 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유대인 우두머리에게 자신의 입장을 알렸다. 그때는 글라우디오가 칙령을 내려 모든 유대인을 추방하고 로마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포고한 후 오래 되지 않은 때였다. 그 칙령은 그가 죽을 때까지 시행되었다. 그러나 그 칙령 포고 후 5년이 지나자 많은 유대인들이 장사를 구실로 하여 로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에서 그들의 회당이나 공공예배처를 짓도록 허락받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본문의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은 유대인들 중에서 뛰어난 인물들이었고 또한 유대 교회에서도 두드러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지도자들이 자기를 바르게 이해해 주기를 바라서 또 바울과 그들간에 우호적인 이해 관계 성립되기를 바라서 그들을 "청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알 수 있다.

Ⅰ. 바울이 지도자들에게 말한 내용 및 자신의 사건에 대하여 그들에게 그가 설명한 내용.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정중히 말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여러분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들로부터 한 형제로서 대우받게 되기를 바랐다. 또한 그렇게 그들을 부름으로 자기로 그들의 형제로 여기며 또한 자신이 그들에게 진리만을 말하고자 함을 알리고자 하였다. 그는 자신이 진리를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다 한 동포요 한 형제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1. 바울은 자신이 무죄하며 그가 유대인들이 자기에 대하여 악의를 품도록 만든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였다. "나는 유대 민족에게 아무 것도 잘못을 저지른 일이 없으며 유대 민족의 종교와 자유에 유익하지 않는 어떠한 일을 행하지도 않았으며 현재 유대인의 가련한 상태에 더 큰 아픔을 주지도 않았다. 내가 그러지 아니한 것을 그들은 안다. 나는 신앙을 폐하거나 유대교를 거슬림으로써 우리 조상들의 규모를 배척한 일이 없다"고 말했다.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유대 조상의 유전을 강요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유전들이 그들을 위해 작정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또한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조상의 유전을 배척하라고 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오히려 그는 유대인들과 함께 있을 때는 그들을 따라서 그 유전을 스스로도 지켰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종교의 관습에 따라 행하는 것을 결코 비난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유대인들이 이방인에 대하여 이유없이 품는 적의에 대해서 그들을 비난하였다(갈 2:12). 바울은 유대 민족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다 했다는 것을 양심상 부끄러움 없이 말할 수 있었다.

2. 바울은 정중하게 자신이 당한 유대인들의 부당한 대우에 대하여 불평을 토로하였다. 그는 자기가 유대인들에게 어떠한 해를 가하지 않았으나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서 내어 준 바 되었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는 만일 로마 사람들이 자신을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유대인들은 법이나 재판을 거치지 않고 자기를 죽여 버렸을 것임을 말했다. 어떻든 유대인들은 통치자인 벨릭스 앞에서 바울을 죄인이라고 고소를 했다. 그리고 바울의 유죄 판결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바울을 죄수로서 로마인들의 손에 넘겼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의 법에 의하여 공정한 판결을 받기를 바랄 수밖에 없게 되었노라고 하였다.

3. 바울은 로마의 총독들이 자신에 대하여 판결한 결과를 설명하였다(18절). 그들은 바울을 심문하고 바울의 주장을 듣고 바울의 반대자들의 증언과 또 바울 자신의 변호를 들었다. 천부장이 그를 심문하였고 벨릭스, 베스도, 아그립바가 모두 바울을 심문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에게서 사형을 당할 만한 죄를 찾지 못하였다. 다만 바울이 정직하고 온유하여 양심적이며 선한 사람이라는 것 이외에 어떤 흠도 그에게서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울에게 사형을 선고하므로 유대인을 만족시키는 일을 결코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들은 바울을 석방하여 자신의 일에 계속 종사하게 하려 하였고 그를 저지하고자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가 바울의 얘기를 듣고 바울의 교리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울을 신중하게 심문한 모든 사람들이 바울을 무죄로 선언하였고 바울의 말을 들은 사람은 누구나 그를 정죄하지 않았다는 것은 바울에게 영예로운 일이었다. 그에 대하여 편견을 지닌 사람들은 이에 대한 얘기를 듣지 못한 사람들 뿐이었다. 바울은 이 모든 사실을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말하였다.

4. 비울은 자신이 로마에 상고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한 것은 자신의 안전을 위한 것일 뿐이고 반소(反訴)하거나 원고들을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님을 말하였다(19절). 그는 "유대인들이 반대하므로" 즉 그들이 그를 처형당하게 할 수 없게 되자 최소한 그를 평생 동안 감옥에서 지내게 하기 위하여 소송 정지 신청을 냈으므로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하였노라"고 하였다. 즉 부임한 총독들이 모두 유대인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자신을 석방하여 주지 않고자 함으로 부득이 가이사에게 호소하였던 것이다. 총독들의 이러한 태도가 그로 하여금 더 높은 권력자에게 지지를 호소할 수밖에 없게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그가 상고하게 된 목적의 전부였다. 바울은 자기의 민족을 비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단지 자신의 혐의를 벗기 위하여 상고했을 뿐이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고소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기의 이웃을 비난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고소하는 일 특히 자기의 동포를 고소한다는 일이 결코 즐거운 일일 수는 없었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위하여 중간 입장에 서 있었지 그들을 해하고자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 당시 로마 당국은 유대 민족을 좋게 여기지 않았다. 당국은 유대인들을 파벌심이 강하고 반란을 자주 일으키고 불평이 가득 차 있으며 위험스러운 민족이라고 간주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유창한 언변을 가지고 로마의 시민이었으며 자신이 유대인에게 해를 입은 당사자였던 바울이 로마 황제로 하여금 유대민족에 대하여 격노하도록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그런 행위는 하려 하지 않았다. 바울은 결코 일을 악화시키고자 한 것이 아니었으며 모든 사람에게 가장 유익한 역할을 하고자 하였다.

5. 바울은 자기가 고난을 당한 바른 이유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가 자기의 고난이 이유를 밝힌 것은 로마의 유대인들로 그를 기소한 자들과 합세하여 그를 고소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그들로 그에게 관심을 갖게 하고 그를 위해 그르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줄 것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20절).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하므로 너희를 청한 것은 너희와 쟁론하려 해서가 아니다. 나는 로마 정부를 충동하여 그들로 너희를 박해하게 하려는 의사는 조금도 없다. 다만 나의 동적으로 또 너희를 계속 친교를 맺을 사람들로 알고 만나 이스라엘의 소망에 대하여 더불어 대화하고자 함이라. 왜냐하면 내가 이 소망으로 인하여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바울은 다닐 때 수감자라는 표시를 지니고 다녔으며 또는 그를 지키는 병사의 감시 아래 다녔던 것 같다.

(1) 그가 매인 이유는 그가 이스라엘의 소망이요 또 그들의 소망해 온 메시야가 왔다고 전했기 때문이었다고 그는 설명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메시야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는 사실에는 모든 유대인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그를 대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 메시야를 전하였고 그가 오신 것을 증거하였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메시야가 오실 것으로 소망하고 있으나 그 모든 이미 오셨으므로 그에 대한 기대는 실망으로 끝날 것이다. 나는 메시야에 대한 소망이 이미 성취되었으므로 그 안에서 함께 기뻐하자고 전하노라"라고 하였다.

(2) 그가 매인 이유는 그가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설교하였기 때문이었노라고 설명한다. 이것 또한 이스라엘이 소망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부활이 이스라엘의 소망이라는 사실을 여러 번 말하였다(23:6; 24:15; 26:6, 7).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들은 메시야가 너희로 지금도 로마의 멍에에서 자유하게 해 주고 또 그가 너희를 위대하게 하고 번창하게 하리라고 기대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것이 그들의 마음을 꽉 메우고 있다. 그런데 내가 저희로 하여금 저 세상에서 장차 주어질 것을 바라도록 권고하고 또 그들에게 유업을 보증해 주실 오신 메시야를 받아들이고 메시야가 외적인 권능과 장엄함으로 오시리라는 기대를 가지지 말라고 권고하였다고 내게 화를 내는 것이다. 나는 우리의 조상들이 믿음으로 바라보았던 영적이고 영원한 축복을 너희에게 전하고자 한다. 그런데 저희가 나를 미워하는 것은 바로 그가 그와 같이 한다는 것 때문이다. 즉 내가 너희로 이스라엘 백성이 품고 있는 있는 망상이 베끼려 하고 이 세상적인 메시야 개념이 지닌 잘못을 밝히며 너희를 이스라엘의 참되고 진실한 소망에로 인도하려 하며 조상들에게 하신 모든 약속들의 참뜻 즉 거룩과 사랑의 영적인 왕국은 사람들의 마음에 세워진다는 것과 죽은 자들이 얻을 기쁨의 부활과 내세에서의 생명을 보증하고 또 그것을 위하여 준비하라 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Ⅱ. 로마에 있는 유대인 지도자들의 답변.

1. 로마의 유대인들은 바울의 한 말에 대하여 그들이 이렇다 하게 반박할 내용이 없음을 시인한다. 또한 자기들이 황제 앞에서 바울에 대한 고소인으로 출두하라는 글이나 명령을 예루살렘으로부터 받은 적도 없었음을 시인한다(21절). 그들은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유대에게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즉 너희를 기소하라는 지시를 받은 일이 없고) 최근의 유대에서 로마에 온 "형제 중에"(유대 나라는 로마 제국의 속국이었으므로 유대인들은 여러 가지 문제로 그 곳에 자주 왕래하였다)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고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고 하였다. 바울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좇아 가서 그를 해하려고 했던 유대인들이(그들은 바울에 대하여 잔인하고도 뿌리 깊은 분노를 품고 있었다). 바울을 대적하기 위하여 로마에까지 따라 와 여기서 그를 정죄하려 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다. 어떤 이들은 본문의 유대인 지도자들이 거짓말을 한 것이고 사실은 그를 기소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감히 그것을 시인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황제가 역대 황제들처럼 그들을 로마에서 몰아 내지는 않았으나 그들을 탐탁히 여기지 않고 있던 터에 그들이 공연히 나서서 황제의 분노를 살까보아 나서서 기소하려 하지 않은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나는 유대인 지도자들의 말이 진실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비로소 바울은 자신이 황제에게 호소하므로 유대의 유대인들이 감히 로마까지 따라 오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이 세운 전략이 맞아 떨어진 것을 이제 로마의 유대인들을 통해서 확인하게 된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다윗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취하였던 정책이기도 배우다. 그리고 그 정책이 그를 구하였다. 다윗은 "불레셋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온 이스라엘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니라"(삼상 27:1)고 말했었다. 그리고 그의 계획은 그대로 적중하였다(4절). 즉 이르기를 "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바울 또한 황제에게 상고하므로 그러한 목적을 관철시켰다. 그는 로마로 피하였다. 이 곳은 그들이 손을 뻗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가 로마로 가는 것을 보고 "갈테면 가거라. 오히려 잘 되었다"고 말했던 것이다.

2. 로마의 유대인들은 바울이 전한 가르침과 그가 그토록 많은 반대 세력에 맞서서 힘써 선포하려고 하였던 기독교에 대하여 상세히 알고 싶어하고 있음을 시인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본문에서 "우리가 너의 (22절) afronei/j - 즉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노라. 즉 너의 견해가 어떠한 것이고 또 네가 잘 알고 있는 내용들이 과연 어떠한 것인지, 또 네가 고토록 신뢰하고 위하여 열심인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하노라. 왜냐하면 기독교에 대하여 별로 전해들은 지식은 없지만 우리는 이 종교가 어디서나 반대를 받는 줄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기독교에 대해서 이런 모욕적인 언사를 사용한 자들은 "로마에 있는 유대인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지식을 자랑스럽게 여겼다(롬 2:17). 그러나 그들이 기독교에 관하여 아는 것은 "이 종교가 어디서나 반대를 받는다"는 사실 오직 그것 뿐이었다. 그들은 이같이 기독교를 악평하고 또 헐뜯으려 하였다.

(1)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하나의 종파로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참된 기독교는 전 인류의 공통 관심사 위에 세워진 것이며 이단들이 흔히 유래한 근원인 편협한 이론이나 사적 이익에 대한 관심 위에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는 이단 종파가 하는 것처럼 세속적 이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구하는 것은 영적인 데 있고 영원한 데 있다. 게다가 기독교는 모든 인류를 하나고 묶으려는 속성을 지녔으며 이단 종파들이 하듯이 인류를 분열케 하며 의견이 대립되게 하지 않는다.

(2) 그들은 기독교가 어디서든지 반대 받는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사실이었다. 그들이 친교를 가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나쁘게 말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리라고 결론지었다. 또 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독교를 비난하였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종교는 가는 곳마다 중상모략을 당해 왔으며 또 당하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의 운명이다.

 

28:18 없음.

 

28:19 없음.

 

28:20 없음.

 

28:21 없음.

 

28:22 없음.

 

28:23

로마에 도착한 바울(3)(사도행전 28:23-28)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이 로마에서 유대인들에게 기독교를 해설한 모임에 대해 설명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기독교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이 나쁘게 말하기 때문에 그것을 이단시하는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신앙에 대하여 기꺼이 듣고자 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하였던 이상으로 열성적인 것이었다. 아마 로마의 유대인들은 세계에 대한 견문이 넓고 보다 광범한 교제를 해왔으므로 완고한 예루살렘의 유대인보다는 더 자유로이 그들의 의문점을 털어 놓았고 또 그들이 이 종파에 관하여 듣기 전에 어떤 결론을 내리려 하지 않았다.

Ⅰ. 본문은 바울이 기독교를 변호하기 위한 이 모임을 어떻게 주관하였는가를 우리에게 전해 준다. 유대인들이 이 문제를 충분히 논의하기 위해 모임의 시간과 날짜를 정했다(23절). 그들 중 몇 사람은 믿으려 하는 것 같았으나 모두가 신앙을 지니려 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정하였던 날짜가 되자 다음과 같은 일이 있게 되었다.

1. "바울이 우거하는 집에 많은 사람이 모여 들었다." 바울은 죄수였고 그러므로 유대인들을 찾아 나설 수는 없었으나 유대인들은 바울의 거처로 기꺼이 모였다. 만일 그들이 올바르게 사고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그가 갇힌 상태를 보고 그의 가르침에 대하여 편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지닐 수 있어야만 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갇힘은 바울이 기독교를 확신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믿는 이유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그의 설교를 듣지는 않더라도 바울과 같은 훌륭한 인물을 만나보기를 원하여 그의 감옥으로 찾아 왔다. 바울은 그를 위하여 자기 숙소에 자리를 마련하였다. 그는 이러한 그의 선한 행위가 로마 당국의 비위를 거스릴 수 있다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선을 위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2. 바울이 유대인들과 더불어 나눈 강론은 매우 폭이 넓고 해박한 내용의 것이었다. 바울은 자신을 변명하기 보다는 저희에게 확신을 주는 일에 관심을 두었다.

(1) 바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특징과 그 나라의 영광스러운 목적과 계획을 설명하였다. 또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에 속한 것이며 영적인 것이며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고 외적인 화려함으로가 아니라 마음과 생활의 순수함을 통하여 빛나는 것임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이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게 임한다고 오해하고 있기 때문임을 설명하였다. 그는 이 사실을 그들에게 해석하고 밝히 보여 줌으로 그들이 이 신앙에 복종하게 되기를 소망하였다.

(2)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확실히 증거하였다. 바울은 유대인에게 하나님 나라를 분명히 선언하였다. 그리고 메시야가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으며 이 세상에 건설되어졌다는 사실을 확고한 증거를 들어 확실히 증거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으로 이룩된 것이었다. 그는 은총의 나라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이 특별한 능력을 그들에게 증거해 보여 주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기적에 의해 입증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연계에 나타난 그의 기적들을 증거해 보여 주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즉 나라의 능력에 대한 그의 경험과 그 능력에 대한 감화력 그리고 그를 복음에 굴복케 한 하나님의 방법을 들어 이 모든 사실을 증거하였다.

(3)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고 증거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권면하였다. 또 그는 그들의 양심에 호소하였고 그들에게 하늘 나라를 받아들이고 또 그 나라에 복종하며 완강하게 그 나라에 대한 반대를 고집하지 말 것을 간절하게 권하였다. 또한 그는 듣는 사람들이 알아 듣기 쉽게 또한 생생하게 그의 믿음을 전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설교하는데 가장 적절하고 유익한 방법이다.

(4) 바울은 예수에 관해 그들에게 권면하였다. 바울이 행한 설교의 목적은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오며 그들로 그리스도께서 메시야 되심을 확신케 하고 또 예수를 복음에서 제시된 것과 같이 믿게 하려는 데 있었다. 그는 ta, peri, tou/ Ghsou/ - 즉 예수에 관해서 그들을 설득하였다. 또 그들에게 예수에 대한 예언들을 말하여 주었다. 즉 그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 속에서" 메시야를 저지하는 내용들을 찾아 내어 그들에게 읽어 주었다. 그리고 그는 이 예수에게서 이 예언이 모두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보여 주었다. 그들이 유대인이었던 까닭에 그는 구약 성서를 인용하여 그들에게 말씀을 전했고 또 구약의 내용들이 기독교와 상반되는 내용들이 아니라 기독교의 강력한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우리도 만약 신약의 역사와 구약의 예언을 비교해 본다면 이 예수께서 바로 오시기로 약속된 분이며 우리가 또 다른 분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바울의 설교는 매우 길었다. 그의 강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연속적인 것"이었다. 아마도 칠팔 시간의 강론이었으리라. 그의 설교의 주제는 흥미있는 것이었고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바울은 그가 전하는 내용을 확신하고 있었고 매우 진지하게 복음을 전했으며 그의 마음은 복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또 다시 이런 기회가 오기 힘들다는 생각으로 청중들의 지루함을 고려하지 않고 온종일을 계속하였다. 아마도 그는 그 시간 중 얼마를 할애하여 그들을 위하여 또 그들과 함께 기도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Ⅱ. 이 설교의 효과. 어떤 사람일지라도 기독교와 같이 명분이 뚜렷하며 또 바울과 같이 능숙한 전도자에 의하여 복음을 전하여 들은 사람들은 하루 종일 그의 설교를 듣지 않고도 즉시 복음에 순복하게 될 것이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도 즉시 복음에 순복하게 될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어린 예수는 어떤 이에게 거침돌이요 또 다른 이에게는 머릿돌이 되시며 또한 어떤 이에게는 넘어지게 하시는 분이요 또 어떤 이에게는 그들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신다.

1. "거기 모인 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25절).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바울이 옳다고 주장하며 다른 이들은 설교의 내용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나누이게 하려고 오셨다 했고 또 불을 던지러 왔노라고 하시었다. 바로 본문의 분열과 불화가 그런 것이었다. 바울은 쉽고도 분명하게 설교하였으나 그럼에도 청중들은 그가 전한 말씀의 의미가 증거에 대하여 의견이 서로 같지 않았던 것이다.

2.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었다"(24절). 그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복음의 성과는 언제나 이와 같았다.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향기"이었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냄새"였다. 어떤 사람은 말씀에 의하여 변화를 일으켰고 어떤 사람은 더욱 마음이 굳어졌다. 어떤 사람도 빛을 받아들였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빛을 거부하였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의 기적을 본 사람들 가운데도 이럴 분열은 있었다. 즉 그들 가운데 어떤 이는 믿었으며 어떤 이는 그를 모독하였던 것이다. 만일모두가 믿는다면 의견의 분열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분열의 모든 책임은 믿지 않으려는 자들에게 있는 것이었다.

Ⅲ. 그들이 헤어질 때에 바울이 그들에게 준 경고의 말씀. 바울은 그들의 투덜거리는 소리를 듣고 그들의 투덜거리는 소리를 듣고 그들의 대부분이 완고하여 자기의 설교에 대하여 순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그들은 충분히 설교를 들었다는 듯 돌아가려고 일어섰다. 그들을 향해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돌아가기 전에 한 말씀하리다 여러분이 돌아가서 이 내 말을 충분히 생각해 보시오. 당신들의 완고한 불성실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시오. 또 당신들이 종말에 어떻게 될 것이며 어떻게 할 것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시오. 또 당신들이 종말에 어떻게 될 것이며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 보시오"라고 말한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당신들이 불신을 계속 고집하는 것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입니다. 당신들은 스스로 마음을 굳게 할 것이요, 또 하나님께서도 그가 바로의 마음을 굳게 하신 것처럼 당신들의 심령을 굳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당신들에 관하여 예언된 말씀의 내용입니다. 성경을 펴보십시오(사 6:9, 10). 그리고 그 말씀을 진지하게 읽고서 거기 기록된바가 당신들의 경우가 되지 않게 하십시오"라고 한다. 구약에 모든 믿는 자들에게 성취될 복음의 약속이 있듯이 또한 그 안에는 모든 믿지 않는 자들에게 이루어질 영적 심판에 대한 복음적 경고들이 있다. 그 예로 선지자 아사야는 거쳐질 수 없는 자들을 더욱 악화시키기 위해 보냄을 받았던 것이다. 이것이 그의 임무 가운데 하나였다. 바울은 본문에서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다"라고 말하였다. 본래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내용의 말씀이 본문에서는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전해짐을 볼 수 있다. 이 사실은 성령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증거이다. 또 원래는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말씀하셨다고 된 내용이 본문에는 이사야를 통하여 그들의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 이유는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을 백성들에게 전하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사야에게 말씀된 내용은 백성들에게는 두려움을 주는 말씀이었고 이사야에게는 슬픔을 주는 말씀이었지만 본문에 보면 그 말씀이 지당한 것이라고 하였다. 구약의 히스기야는 이 진노의 메시지에 관하여 "당신의 이른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라고 하였다(사 39:8). 그가 진노의 말씀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믿는 자는 저주받지 아니하리라는 것"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서도 이르기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고 말씀된 것이다(막 16:16). 또는 본문의 말씀은 우리 구세주께서 하신 말씀을 인용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주님은 다음과 같은 뜻의 말씀을 하셨었다. "이사야가 너희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성령께서 이사야를 통해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리라 하신 말씀이 과연 너희에게서 이루어졌도다"(마 15:7)고 그는 말씀했던 것이다. 바울이 본문을 통하여 말하고자 한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하나님께 대해 너희 조상이 행한 큰 죄를 바로 너희도 행하는도다. 그 증거는 바로 너희가 보지 않으려는 사실을 보아서 입증된다. 너희는 너희가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에 대하여 눈을 감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너희가 눈을 감았도다"(27절)라고 그는 말하였다. 이 말씀은 그들의 완고한 무신앙과 자진하여 잘못된 생각의 노예가 되려함을 지적한 말씀이다.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너희의 조상들은 하나님이 그 손을 높이 들어 그들을 심판하시고자 하는 것을 알려 하지 않았도다(사 26:11). 마찬가지로 이제 하나님께서 복음의 은총 가운데서 너희를 향하여 구원의 손을 펼치고 계시는데 너희가 이를 보려하지 않는도다." 이 말씀은 복음에 대한 편견을 지닌 믿지 않으려는 유대인들에게 합당한 말이었다.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지 않으려고 결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려고 하지 않는 맹인들을 구제할 방도는 없다. 그들은 자기들의 믿는 바를 의문시하려 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그들은 새로운 복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영원한 평화에 대한 위대한 사실들과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온전하심과 죄의 흉칙함과 거룩함의 아름다움과 다가옴 생명의 참됨과 이 세사의 덧없음을 보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들은 진리를 받아들임으로 변화되려 하지도 않았고 또 그 진리에 의해 다스림을 받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진리의 증거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듣기를 원하지 않는 것 즉 그들에 대하여 하늘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뜻을 "그들의 귀로 듣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술객의 말을 들으므로 익숙하게 재롱부리는 뱀이 되기를 거부한" 독사처럼 귀를 막고 있었다. 그들의 조상들 또한 그러하였다.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슥 7:11, 12). 그들이 두려워하며 눈과 귀를 닫은 것은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해서였다." 그들은 어둠 속에 있고자 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머물러 있으려 한 것은 그들이 진리를 깊이 숙고하게 되면 그들이 철저히 신앙적인 삶을 살아야 하며 또 진리의 말씀 앞에 중압감을 느끼게 될 것이요 또 그들이 즐기고 있는 악에서 떠나야 되겠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일단계로 보고 듣게 하여서 마음으로 이해랄 수 있도록 하시며, 다음에 그들을 회개시키시고 그들의 뜻을 굽히시고 그 후 그들을 치료하여 주신다. 이것이 합리적인 인간의 마음을 가리고 이해를 어둡게 함으로써 회개하는 길을 막고 있다(고후 4:4). 죄인이 사탄과 연합하여 자기의 눈을 가릴 때 그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그러므로 Vt liberiue peccent libenter ignorant - 즉 그들이 혼미하여져서 더 자유로이 죄를 범하리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병을 사랑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병을 고치심을 두려워하였다. 구약의 바빌론과 같이 우리가 그의 병을 고치고자 하였으나 그 바빌론은 고침을 받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렘 51:9). 이것이 바로 죄인 것이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계속 말한다.

(2) "하나님께서 이 죄에 대하여 너희 조상들을 심판하셨듯이 너희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의 마음의 눈이 장님이 될 것이다. 즉 하나님은 너희에게 혼미함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듣기는 듣겠으나(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수없이 여러 번 들었다) 도무지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너희가 그것을 이해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요 또한 하나님께서 그 말을 이해할 힘과 은총을 너희에게 베풀지 않으셨기 때문인 것이다. 또한 너희가 보기는 보아도(너희는 많은 표적과 기사를 눈으로 직접 목격하였다) 그 확실한 증거를 도무지 알지 못할 것이다. 모세가 너희 조상에게 준 말씀이 너희에게 적용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즉 모세는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다고 말하셨던 것이다(신 29:4). 또한 이사야가 그의 시대의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다고 외쳤는데 그 말씀이 너희에게도 이루어지지 않게 하라" 하였다. 그들의 조상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빛에 대하여 도전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그의 은총과 빛을 거두어 버리셨다. 또한 그들의 조상들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강한 미혹의 힘에서 내맡겨 두시었다. 또한 그들의 조상들은 간교하였고 완고하였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그들의 조상들에게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는다"고 하셨던 것이다. 그들은 어리석고 둔감하여 무슨 말을 하여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들을 수술할 수 있는 의사는 아무도 없었다. 또 그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의사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병은 불치의 병으로 선고되었고 그리하여 그들에게 남은 것은 절망 뿐이었다. 자기를 비참하게 만드는 병을 치료받지 않으려는 자들은 행복하게 될 수가없는 것이다. 또한 치료 방법을 취하고자 마음을 돌려 먹지 않는 자들은 치료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자기의 병도 모르고 또 그 치료에 대한 확신도 없는 사람들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눈을 감고 귀를 막아버린 자들에게 확신을 심어 줄 수도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는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을 경청하지 않으며 또 자기들의 운명에 대해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한 번 마음이 강퍅해져 놓으면 그들은 이미 지옥의 문 앞에 와있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들을 고치시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그들을 고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또한 계속 말한다.

2. "너희 불신앙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보내실 것이다. 너희가 이에 대하여 시기하고 있도다. 거르나 너희 스스로 하나님이 은총을 멀리하고 거룩한 진리와 사랑의 능력에 순종하지 않은 까닭에 또한 너희가 하나님이 지혜로써 정하신 방법을 통하여 회개했지 않으려 하였고 치료받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임하신 줄 알라. 이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난 것이었다(요 4:22). 그러나 너희가 거부하므로 그 구원이 이방인에게 제공되었고 그들은 그 구원에 관한 말씀을 들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너희보다 더욱 정당하게 행동한 것이다.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전하여지고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여 복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바울이 이러한 말씀을 한 의도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유대인들에게 구원에 대한 그들의 모순된 태도를 지적함으로 그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그들이 불평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유대인들은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진 것을 분노하였으며 그것은 그들에게 지나치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받기에는 구원이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면 그것이 이방인들에게 주어지는데 대하여 불평하지 말아야 했으며 또 시기하지도 말아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 세상에 임하였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먼저 그 구원은 제공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거절하였다. 그들은 그들에게 베풀어진 잔치에의 첫 번째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 대신 다른 손님들이 초대되었다면 오히려 잘 된 것으로 여겼어야 했다. 자기가 맺지 않은 계약을 다른 사람이 맺는다고 하여 또 자기가 사지 않은 물건을 다른 사람이 산다고 하여 그 상대방에게 화를 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아들이는 데 대하여 유대인들이 불평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이미 그 구원을 사양했기 때문이다. 아니 유대인들은 구원을 사양 했다기 보다 걷어 차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었다. 그러므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른 것은 유대인들의 실족으로 인함이라" (롬 11:11)고 다른 곳에서 말씀하였던 것이다.

(2) 바울의 또 다를 의도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방인에게 내린 은총에 대하여 시기하게 하여 그들로 그들의 잘못된 태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그가 로마서에서 똑 같은 내용에 대하여 말랄 때 그는 유대인들의 불신앙과 복음에 대한 거절로 인하여 이방인들이 받게 된 유익을 그가 로마의 유대인들에게 말하는 것은 사랑하는 자기의 동포들로 거룩한 시기를 하게 하여 그들 가운에 얼마라도 구원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했기 때문이다(롬 11:14).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고 그것을 이방인들에게로 넘겨 주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들이 잘못을 회개하고 그들이 멸시하였던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는 있었다. 그들은 포도원에 가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가지 않겠다고 한 맏아들이 후회하고 다시 일하러 간 것처럼(마 21:29) 그들도 복음을 거절하였지만 아직 받아들일 여유는 있었던 것이다.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보내졌는가? 그렇다면 늦기 전에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하자. 너무나 오랜 동안 우상을 숭배하고 귀는 있으되 듣지 못하였던 이방인들이 복음을 들었는데 하나님과 가까이 있어서 언제나 그를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우리들이 그것을 듣지 않을 것인가! 바울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사실을 보고 유대인들로 시기나게 하고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씀을 하였다. 만일 이러한 그의 말로도 유대인들이 감동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저주를 더욱 재촉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창기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는 것을 보고도 자기들의 어리석음을 뉘우치지 않고 그를 믿지 않으려 하므로 화를 더욱 자초하였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마 21:32).

Ⅳ. 집회의 해산. 이 집회은 약간의 소요 속에서 끝난 것으로 보인다.

1. 유대인들은 바울을 떠나갔다. 그들 중 믿지 않는 자들은 바울이 마지막으로 그리하여 말 즉 하나님의 진노에 의하여 그들의 마음의 눈이 멀게 될 것이며 복음의 빛이 어둠 속에 앉은 자들 가운데 비칠 것이라는 말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 말을 하자" 즉 그들이 충분히 알아 듣도록 그가 말을 한 다음에 "그들은 떠났다." 이 같은 경우에 하였던 것 그들이 바울의 말을 불쾌하게 여긴 것은 사실이나 다른 곳의 유대인들처럼 그들이 격분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들은 바울이 설교의 뒷부분에서 강조한 무서운 말씀에 대하여 둔감하고 또 무관심하였으며 그가 강론 앞의 부분에서 하였던 모든 위로의 말씀에 대하여 목석처럼 무감각하였다. 그들 중의 여러 명은 결코 바울의 설교를 듣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떠나갔고 또한 그 문제에 대하여 더 이상 관심을 가지므로 스스로 괴로움을 자초하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하며 떠나갔다.

2. 그들은 서로 외면을 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서로 논쟁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모자라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 간에 논쟁이 있었을 뿐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있었다. 바울의 말을 수긍할 수 없다는 데는 합의를 보았으나 그들은 그들이 그를 떠나야 하는 이유에 관하여서는 서로 의견이 엇갈렸으며 커다란 격론이 있었다. 바른 논리가 결여된 사람들 사이에서도 격론이 있을 수 있다. 또 그들도 상대방의 견해의 잘못된 점을 찾아 낼 줄 안다. 그럼에도 그들은 진리를 따르려 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이 은총을 내리사 그들의 이해의 문을 열어 주시지 않는 한 사람들끼리 아무리 격론을 벌여도 확고한 진리의 결론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28:24 없음.

 

28:25 없음.

 

28:26 없음.

 

28:27 없음.

 

28:28 없음.

 

28:29 없음.

 

28:30

바울의 로마에서의 복음 전도(사도행전 28:30, 31)

우리는 본문의 내용을 마지막으로 복된 바울이 역사에 대한 고찰을 종결짓게 된다. 우리가 바울에 대하여 더 깊이 아는 것을 하나님은 합당한 것으로 여기시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마지막으로 그에 대해 전해 주는 본문을 통하여 그의 마지막 모습을 자세히 상고해 보도록 해야 하겠다.

Ⅰ.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울이 갇혀 있으며 그에게 자유가 주어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채로 그에 대한 내용이 종결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실망을 안겨 준다. 이 선한 사람은 이년 동안 감옥 속에서 지냈다. 그동안 바울은 그를 가둔 자들에 의하여 한 번도 심문을 당하지 아니하였다. 바울은 속히 석방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었다. 사실 죄수들을 재판할 수 있는 전권을 위임받은 총독들은 바울에게 "죽이거나 구속할 만한 죄가 없음을" 인정하였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 죄수로 있었던 것이다. 이를 보건대 인간이란 신뢰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특히 경멸받는 죄수의 입장에 처해 있으며 높은 지위자들의 선처를 바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요셉의 경우에는 "술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치 않고 있었더라"(창 40:23)고 하였던 것이다. 바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여러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이는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바울이 갇혀 지내던 첫 해가 시작될 때 네로 앞에 불려 갔었고 그가 말한 바 대로 그가 그리스도를 위해 갇힌 사실이 가이사의 법정에서 확실히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처음재판정에 그가 나갔을 때 "한 사람도 그를 도와 주지 않고 모두 버리고 갔다"고 생각한다(딤후 4:16). 그러나 이 재판에서 그가 기대하던 대로 자유롭게 된 것이 아니라 황제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만을 간신히 면하였다고 본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 사자의 입에서 도망친 것이라고 말하였다(딤후 4:17). 그리고 그가 디모데 후서에서 첫 번째 재판정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가 두번째 재판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이 재판 때는 그의 입장이 조금 유리하였으나 석방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여하나 그는 이 2년 간의 구속되어 있는 동안 갈라디아서와 디모데 후서와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인에게 보내는 사신들과 빌레몬에게 보내는 서신을 썼다. 그 서신들 가운데서 바울은 자신의 구속에 관하여 틈틈이 여러 가지 사실을 언급하였다. 그 후 그는 석방되면서 마지막으로 히브리서를 썼다. 아마 디모데도 옥중 생활을 하다가 바울이 석방될 때 같이 석방된 것 같다. 그는 아마도 바울과 떨어져서 죄수 생활을 한 것 같고 그러기에 바울에게 오기로 약속한 것 같다(히 13:23). 이 사실은 히브리서에서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고 한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2년 간 죄수 생활을 하였다는 사실 이외에 그가 어떻게 석방되었는가 하는 사실은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지 않다. 전승에 의하면 바울이 석방된 후에 이달리야에서 스페인으로 거기서 다시 크레타로 그 후에 디모데와 함께 유대로 갔으며 그 후에 아시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을 방문하고 마지막에는 다시 로마를 방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네로의 통치 말년에 참형을 당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바로니우스는 바울의 체포와 석방 그리고 순교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네로가 폭정을 시작하면서 기독교도들을 적대하여 박해하게 되었고(터툴리안이 전해 주는 바에 의하면 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법령을 제정한 첫 황제였다) 또 로마의 교회는 이 박해로 말미암아 약화되었고 그래서 바울이 두 번째로 로마로 돌아와서 그곳의 교회를 다시 굳게 하고 아직 살아있는 교인들을 위로하다가 네로의 손에 두 번째로 체포되었다고 생각한다. 크리소스톰은 네로의 부인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젊은 부인이 바울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여서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고 전해 준다. 또 그는 그녀가 자기가 살아왔던 타락한 생활 방식을 버리고 돌아섰고 이 때문에 네로는 바울에게 몹시 격노하여 그래서 바울의 체포를 명령하고 그 후 다시 사형을 지시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은 그에 대하여 간단하게 기록함으로 결론을 맺고 있다. 다음의 사실을 생각하여 보자.

1. 바울과 같이 유능한 사람이 오랜 동안 구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는 벨릭스의 밑에서 이 년이나 갇혀 있었고(24:27) 그가 로마로 이송되는 동안에 결린 시간들 이외에도 네로의 밑에서 이년 이상을 죄수로 지냈던 것이다. 만약 바울이 자유로왔다면 이 오년여 동안에 얼마나 많은 교회를 세우고 얼마나 많은 도시와 나라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지혜로우시므로 바울의 고난받는 것을 통해서도 다 그의 뜻 하시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의 신실한 사역자들의 고난을 통해서도 그의 뜻을 이루실 수 있고 또 이루실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체포마저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하였던 것이다(빌 1:12-14).

2. 사실 어느 면에서는 바울의 감옥에서의 생활도 그에 대한 하나의 친절로 여길 수 있다. "2년 동안 바울은 자기의 셋집에서 유하면서" 그가 이제까지 해 온 것보다 더욱 열심히 일하였던 것이다. 여태까지 바울은 항상 다른 사람의 집을 전전하였었으나 이제는 자기의 집에서 기거하게 된 것이다. 즉 그가 집세를 지불하는 동안은 그의 집과 마찬가지인 집에서 거하였다. 이와 같이 조용히 지내는 것은 항상 이곳저곳을 순회하며 지내던 사람에게 새로운 힘을 주었다. 바울은 항상 이동하는 데에 익숙하여 있으므로 한 곳에서 오래 머무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이년 동안을 한 집에서 머물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감옥으로 바울을 오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한적한 곳으로 부르시고 잠시 쉬게 하신 것과 같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막 6:31). 바울이 자유로왔을 때는 유대인의 간계로 인하여 항상 고통을 당하였으나(20:19), 그러나 이제 바울은 감옥이라도 마치 아무 거리낌이 없는 성에 거하는 성주처럼 그는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다"고 한 것이리라.

Ⅱ.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감옥에 갇힌 사실에서 본서가 끝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본서를 작별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그가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도 기쁨을 주었으리라고 우리는 확신한다). 그리고 바울은 비록 매여 있으나 하나님을 섬기고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그들이 그에게 허락하였으므로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옥중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감옥은 성전이요 교회요 궁전이었다. 그의 손은 매여 있었으나 그의 입은 제약을 받지 않았다. 충실하고 열심있는 사역자들은 복음을 전하지 않고 편히 사는 것 보다 복음을 전하며 고통을 당하는 길을 택하게 마련인 것이다. 바울은 죄수였으나 그러나 여전히 설교자였다. 바울은 갇혔으나 주의 말씀은 갇히지 않았다. 로마인에게 보내는 서신을 썼을 때 바울은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려 함이니라"(롬 1:11)고 하였다. 바울은 앞서(15절) 그들 중 몇 사람을 만나보고 기뻐하였었다. 그러나 그들을 만나 신령한 은사를 그들에게 나누어 줄 수 없었다면 그의 기쁨은 절반으로 감퇴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본문에 보면 바울은 그 기회를 얻었고 그러므로 바울은 갇혀 있음에 대하여 불평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을 유의하라.

1. 바울은 누구에게 설교하였는가.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그의 말을 듣고자 하는 이에게는 모두 설교하였다. 바울이 다른 집에 가서 설교할 수 있었는지 어쩐지는 본문에 나타나 있지 않다. 아마도 그렇지는 못하였을 것 같다. 그러나 누구든지 바울의 집으로 와서 설교를 들를 수 있는 자유는 허락되어 있었으며 바울은 누구든지 환영하였다. "바울은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였다." 사역자 집에 대문은 자기의 가르침을 받고자 희망하는 사람에게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들은 또한 자신의 심령에 대하여 근심하고 있는 자들에게 조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 는 것을 즐거워하여야 할 것이다. 바울이 회당이나 또는 호화롭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공공집회에서 설교할 수는 없었다. 다만 자기의 초라한 셋집에서 전도하였던 것이다. 우리ㅏ 하나님께 봉사하고자 할 때 우리가 바라는 바 대로는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것을 하여야만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조그만 셋집을 가지고 있는 사역자들일지라도 기회가 허용된다면 침묵하는 것 보다는 거기서라도 전도하는 것이 나은 것이다. "바울은 자기에게로 오는 모든 사람을 영접하였다." 또 그에게 오는 권력있는 자들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미천한 자를 멸시하지도 않았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한주일의 첫날에 설교하였고 유대인에게는 일곱째 날에 설교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올 때는 어느 날이고 복음을 전하였다.

2. 바울이 전한 내용. 바울은 교묘한 말로 그들의 머리를 가득 채우거나 국가나 정치적인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다만 자기의 본분을 지키고 사도로서의 본분을 다하고자 힘썼다.

(1) 바울은 하나님의 사자였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전파하였다." 그는 하늘 나라의 유익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바울은 인간의 왕국의 사건들에 관하여 이것 저것 참견하지 않았다. 인간의 일은 인간에게 맡겨 두었던 것이다. 바울은 인간들 가운데 실현된 하나님 나라와 그 하늘 나라의 말씀을 전하였다. 또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하여" 그의 말을 꺾으려는 자들의 주장을 반박하였다(23절). 바울은 그의 공적 설교에 주력을 다 쏟았다. 그의 말씀은 옳게만 받아들인다면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유익함과 지혜를 안겨주는 것이었다. 바로 그것이 그의 설교의 목적이었다.

(2)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리인이었으며 또한 신랑의 친구였다. 그러므로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가르쳤다." 즉 그리스도의 전 역사 곧 그의 성육과 교훈, 생애, 기적, 죽음. 부활, 승천을 가르쳤다. 그는 신성의 신비의 온갖 것을 전하였다. 바울은 그때까지 그의 원칙 즉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이외에는 알거나 가르치지 않겠다고 한 말에 충실하였다. 사역자들이 설교할 때 자기들의 주된 임무인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으로부터 떠나도록 유혹을 받게 될 때에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주께로 인도하는가 그리하여 은 주 안에서 걷도록 하여 주는가? 그 이유는 자신에 관하여 설교하지 말고 주께 관한 것을 설교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3. 무슨 자유를 가지고 바울이 설교하였는가?

(1) 거룩한 은혜가 바울에게 심령의 자유를 주었다. 바울은 "담대히" 가르쳤다. 그는 자기가 설교하는 바의 진리를 확신하는 사람들으로서의 태도로 복음을 전했다. 그는 이 진리에 굳게 서 있었다. 또한 그는 그가 전하는 복음의 가치를 확신하는 사람으로서 태도를 가지고 설교하였다. 이것이 그처럼 그에게 가치있는 것이었으므로 그것을 위하여 담대히 고난까지 받으려 했던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2) 하나님의 섭리가 바울에게 설교의 자유를 주셨다. 본문에 보면 "아무도 금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다. 바울이 무엇을 하던 그를 제지하거나 감시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방인에게 설교하는 것을 늘 방해하던 유대인들도 이곳에서는 그럴 권위가 없었다. 또한 로마의 정부는 아직도 기독교의 전파가 죄가 된다고 규정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야 한다.

[1] 그의 갇힘을 통해 하나님은 박해자들의 분노를 잠잠케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반대하는 자들이 마음을 돌리지 않으실 때는 그들의 손을 묶고 혀에 재갈을 물리신다. 네로는 잔인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로마에는 기독교를 미워하는 많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바울이 죄수로 있으면서 복음을 설교하는 것이 묵인되었다. 또한 그의 설교가 질서를 문란케 하는 행위라는 평을 받지도 않았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의 분노를 통해 당신의 영광을 더하시며 또 인가들의 못다 발한 분노는 억제해 버리시는 것이다"(시 76:10). 바울의 설교를 방해할 수 있는 많은 권력이 있었으나(하다 못해 그를 지키는 병사도 그의 설교를 금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아직도 그를 금하지 못하도록 섭리하시었다.

[2] 그의 갇힘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고난받는 자로 쉼을 얻게 하셨다. 비록 바울이 기거하는 곳은 그가 전에 거하는 곳들보다 매우 낮고 비좁은 장소였으나 바울은 그 안에서 기거하는 것을 괴로워하지도 않았고 또 거기서 타인의 간섭도 받지 않았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그에게 문이 활짝 열려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 복음 전할 문(기회)은 언제나 열려 있었고 누구도 그에게 오지 못하도록 문이 갇히는 법이 없었다. 복음을 전할 기회는 어디든지 있는 것이다. 심지어 가이사의 집에도 성도들 몇이 있었다(빌 4:22). 우리가 마음 놓고 예배드릴 수 있는데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러면서 또한 끊임없이 결코 슬픔의 가시가 없으며 찌르는 독소가 없는 거룩한 산에 이를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이 영광된 변화를 위하여 준비해야 할 것이다. 아멘

 

28:31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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