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19:1

에베소에 돌아 온 바울(사도행전 19:1-7)

에베소는 아시아의 대단한 유명한 도시 중의 하나이다. 특히 아데미(Diana) 여신을 위해 거지 세워진 신전으로 유명한데 이 신전은 세계의 불가사의한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본문에 보면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복음을 전하로 왔다"(1절)고 하였다. 아볼로가 거기서 물을 주고 있는 동안 바울은 에베소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있었다. 또한 바울은 아볼로가 그가 복음을 위해 수고한 지역에 들어와 그가 세운 기초 위에 건물을 세우는 것을 시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기뻐하였고 에베소에 그를 위해 마련된 새로운 임무를 더 큰 즐거움과 만족감을 갖고 수행하였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신약 시대의 능력있는 사역자인 아볼로가 지금 고린도에서 선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고린도에는 아볼로를 바울을 반대하는 무리의 우두머리로 삼으려는 자들이었지만(고전 1:12) 그럼에도 바울은 아볼로에 대해 시기하지 않았고 백성들이 아볼로를 사랑하는 사실을 싫어하지도 않았다. 바울은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지방을 돌아 본 후 "윗 지방들인" 북쪽에 위치한 본도와 비두니아를 거쳐 마침내 에베소에 당도하였다. 그런데 이곳은 그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넘겨 두었던 곳이었으므로 바울은 다시 그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 당도하자 곧 몇몇 제자들을 거기서 만났는데 그들은 그리스도를 진정한 메시야로 믿는다고 고백은 하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메시야의 안내자였던 세례 요한이 가르친 정도의 지식 즉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가장 초보적인 상태에 있었다. "그들은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다"(7절). 바울이 에베소에 왔을 때 이들 제자들의 기독교 이해는 아볼로가 기독교를 이해하였던 정도와 비슷한 것이었다(왜냐하면 아볼로는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었기 때문이었다."18:25). 이들 제자들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사귈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아니면 그들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사귈 수 있을 정도로 오래 에베소에서 거주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들이 아볼로를 대한 것처럼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게 교훈을 받기를 즐겨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리라. 만일 그들이 아볼로처럼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게 배우려고 했다면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법도에 대하여 더욱 완전히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Ⅰ. 바울이 제자들에 대한 문답식 교육. 바울은 아마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게로부터 그들이 신자이며 그리스도를 시인하였고 자신들을 그리스도 앞에 드렸다는 사실을 전하여 들었을 것이다. 이제 바울은 이러한 정보에 근거하여 그들의 신앙 상태를 측정한다.

1.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그들이 "성령을 받았는지를" 물어보았다. 즉 예수가 그리스도시라는 가르침을 받은 얼마 후 그들을 확신시키고 회개하게 하고 위로하기 위하여 사랑의 마음에 역사해 오시는 성령을 믿는지 또는 그들이 이러한 성령의 계시를 알고 있고 또 인정하고 있는지를 물어 보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곧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에게 수여된 특별한 성령의 은사에 그들도 참여하였는지를 물어 보았다. 이 성령의 은사는 오순절의 역사 이후 경우에 따라서 자주 반복되던 그러한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믿을 때에 이 성령을 받았느냐? 또 너희들 마음 가운데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진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는가? 지금의 우리는 그때 당시에 그들이 받았던 것과 같은 그러한 특별한 은사는 기대 할 수가 없다. 신약의 정경이 오래 전에 확정되고 완성되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가장 확실한 예언의 말씀으로 의지한다. 그러나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은혜(역주:필자는 특별한 성령의 은사와 보편적 성령의 은혜를 구분하여 전자는 오늘날의 시대는 보기 어려우나 보편적 성령의 은혜는 지금도 꼭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가 있는데 그것은 사실 필요한 것이다(고후 1:22; 5:5; 엡 1:13, 14). 우리가 성령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하는 질문은 그리스도의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 모두에게 사실 심각한 질문이다. 성령이 모든 믿는 자와 구하는 모든 자에게 약속되어 있다(눅 11:13).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잘못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실상 성령을 받지 않았으면서도 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성령의 은사가 있는 체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성령의 은혜와 위로를 받고 있다고 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기에 우리도 엄격하게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아야 한다. 과연 우리는 믿은 후로 성령을 받았는가? 라고 물어야 한다. 그 열매를 맺고 있는가? 또한 성령에 의해 인도되고 있는가? 우리는 성령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가? 진정으로 우리는 성령의 통치 아래 있는가? 를 물어야 한다.

2. 그들은 성령에 대한 그들의 무지를 시인했다. "성령이 있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가 모르고 있던 것이다. 우리는 구약 성서로부터 성령의 약속이 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하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적절한 시기가 오면 성취될 것도 우리는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서는 너무나도 문외한이어서 성령이 과연 예언의 영으로 임하였는지 아닌지 조차 알지 못하노라"고 그들은 답변한다[라이트푸트(Dr. Lightfoot)박사가 고찰하였듯이], 그들은 그들이 민족적 전승에 의거하여 에스라, 학개, 스가랴, 말라기가 죽은 후에는 "성령은 이스라엘에서부터 떠나 하늘로 가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성령이 돌아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듣지 못했음을 고백하였다. 그들은 성령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했고 또 성령이 오신 사실을 그들이 듣지 못했던 것을 놀라와 했고 그러기에 이에 대한소식을 기꺼이 듣고자 하였다. 복음의 빛은 아침 햇빛과 같이 차츰 더욱 더 밝히 세상을 비추었다. 전에는 듣지 못했던 진리가 더욱 분명하게 들어났을 뿐만 아니라, 전에는 그것을 듣지 못했던 사람들에게까지 그것은 널리널리 퍼졌다.

3. 바울은 그들이 성령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었다면 어떻게 하여 세례를 받게 되었는지를 물어보았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어떤 그리스도의 사역자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면 그들은 성령에 관하여 배웠어야 했고 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은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 성령이 주어진 사실을 모르고 있었느냐?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는가? 이것은 이상하고도 이해될 수 없는 일이다. 세례를 받고서도 성령에 대하여는 아무 것도 모르다니! 만일 너희들이 성령에 대하여 전혀 모른다면 너희들의 세례는 아무 효과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례를 받는 것은 곧 성령을 받는 것으로써 그 의미하는 바는 씻김을 받아 새로 낳았다는 것이요 또 그러한 증거가 있어야 세례는 확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에 대한 무지는 그리스도의 존재를 모르고서도 기독교에 대한 진정한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이 모순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우리들에게 적용한다면 본문의 내용은 아무 목적 없이 세례를 받고 이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고 또한 성령을 받지도 않았으며 성령에 복종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가 자주 질문해야만 하는 물음이다. 즉 우리가 누구의 영광을 위하여 태어났으며 또 누구를 섬기기 위하여 우리가 세례를 받았는가를 물어야 하며 또 우리는 우리의 출생과 세례 받음의 목적에 대하여 답변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가끔 우리가 무엇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우리가 그 세례에 근거해서 살아가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4. 그들은 자기들이 Eij to. Gwa,nnou ba,ptismav - 즉 요한의 세례를 받았음을 시인한다. 필자가 생각하기로는 이 말은 세례를 받았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이 요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 말이라고 여겨진다(요한은 후대에 자기의 이름으로 세례가 베풀어지리라고는 생각도 못하였을 것이다). 다만 좀 모자라고 그러나 요한을 위하려는 요한의 제자 중 몇 명이 자기들 일파를 요한의 추종자라고 일컬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지에서 나온 소치였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인기가 더해 가는 것을 질투하고 이에 대하여 요한에게 불평했던(요 3:26) 그의 제자들의 생각과 정신을 지금도 보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무리들은 "죄를 사하는 회개"로써의 요한의 세례에 의해 많은 감화를 받은 것으로 스스로 생각하였고 또 요한이 가까이 이르렀다고 말한 하나님의 나라가 정말 가까이 이르러서 증명될 수 있을 정도까지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는 것은 잊어버리고 그들이 알고 있는 것에 안주해 있으려고 하였다. 또한 그들은 다른 사람들도 자기들과 같이 생각하도록 설득하는 이상의 일은 할 수 없었다. 이같이 그들은 요한의 가르침에 대해 맹목적인 열심을 내어 열정에 닥치는 대로 요한의 이름으로 혹은 본문에 나타난 대로 "요한의 세례"를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그들은 자신을 깊이 성찰하지도 않았고 그들이 세례를 주는 사람들에게 더 좋은 세례를 기다리라고 지시해 주지도 않았다.

5. 바울은 그들에게 요한의 세례의 진정한 의도와 의미는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설명한다. 그리고 또한 요한의 세례를 사람들에게 베풀고 또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이상의 것을 바라보도록 지시하지 않고 더 이상 안주하게 한 자들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불운하게도 교육받을 기회가 없어서 무지 속에 그대로 있거나 또는 잘못을 범하는 사람들을 보다 많이 알고 정통에 입각해서 사는 사람들이 무시한다거나 또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해서는 안 된다. 본문에 바울에 의하여 제자들이 교육을 받은 것처럼 이러한 사람들은 그들을 열심히 교도하고 더욱 가르쳐야 한다.

(1) 바울은 요한의 세례가 다음과 같은 의미 즉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는 의미에서는 매우 가치가 있는 것임을 인정한다. 이 세례를 통하여 요한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를 뉘우치고 고백하고 죄에서 돌아서기를 요구하였다. 사실 어떤 사람을 이끌어 여기까지 오게 한다는 것은 대단한 득이 되는 것이다.

(2) 그러나 바울은 요한의 세례가 그 이상의 뜻을 지시하고 있음을 그들에게 보여 준다. 사실 요한은 그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그것으로 안주하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세례를 받는 사람들에게 자기 뒤에 오시는 분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할 것을 말하였다. 즉 그의 회개의 세례는 다만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이며, 또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받아 영접할 준비를 갖추게 하기 위한 의도에서 주어진 것이었다. 요한은 그들로 그리스도를 대망하도록 하였다. 그는 바로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지시해 주었다. 그러므로 그는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고 말했던 것이다. "요한은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위한 선발자에 지나지 않으며 왕자는 그리스도이다. 그의 세례는 어희들이 지나가는 입구에 불과하며 너희가 쉴 집은 아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요한의 세례로 세례를 받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인 것이다"라고 바울은 말한다.

6. 그들이 빠져 있던 잘못을 지적받게 되었을 때 그들은 그 발견을 감사하는 심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8절). 이미 언급한 아볼로의 경우는 이와는 달랐다(18:25). 아볼로는 "다만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지만 아볼로는 세례를 받을 때 그 세례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였다(역주:그것이 회개의 세례요 메시야를 지시하는 세례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말). 그러기에 그가 하나님의 도를 더 완전히 알게 되었을 때 다시 세례를 받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었고 그리스도의 첫 번 제자들도(그들은 눈으로 메시야를 보았고 또 복종했다) 다시 세례를 받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 경우였다. 그러나 요한이 구세주인 것처럼 다만 요한만을 목적하고 그 이상을 내다볼 수 없었던 이들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마치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 치명적이고 결정적인 잘못인 것처럼(고전 1:13) 근본적인 잘못인 동시에 치명적인 잘못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모든 사실을 보다 확실하게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기를 원하였고" 또 그래야 마땅한 것이다. 앞서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자들은 바울 자신이 베푼 것이 아니고 그를 수종하는 자 가운데 어떤 사람이 준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 모든 일을 보건데 요한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세례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고 또 그 두 세례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말도 아니다. 더군다나 한 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이(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세례의 규정된 원형이다) 똑 같은 이름으로 다시 세례를 받아야 된다는 말도 아니다. 다만 여기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전에는 결코 이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Ⅱ. 바울은 그들에게 특별한 성령의 은사를 부여함(6절).

1. 바울은 엄숙하게 그들에게 그러한 은사를 주시도록 하나님에게 기도했다. 그는 "그들에게 안수함으로" 그의 의도를 상징화하였다. 사실 이 행위는 족장들이 축복을 할 때, 특별히 참되고 위대한 약속을 전달할 때 취한 행위였다(창 48:14). 사도들은 신약 성서의 커다란 약속인 성령을 손을 얹음으로써 전달하였다. 여호와께서 그 축복으로 너희를 복 주시되 복 중의 복을 주시기를 바란다"(사 44:3)는 뜻이 여기 내포된 것이다.

2. 하나님은 바울이 그들을 위하여 기도한 것들을 들어 주셨다. 그러므로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였다." 그것은 놀랄 만한 압도적인 방법으로 임하였고 그들은 사도들이나 첫 이방 개종자들이 그리하였듯이(10:44)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였다." 이러한 기적은 에베소에 복음을 소개하기 위해 의도된 것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일깨워 복음으로부터 어떤 위대한 것을 기대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혹자는 이 은사의 수여가 이들 열 두 사람에게 전도의 사역을 감당할 자질을 갖게 하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열 두 사람은 에베소의 장로들이 되었고 바울은 그들에게 교회의 돌봄과 처리를 위임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예언의 영을 받았고 또한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각 민족에게 그 나라 말로 설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사람들에게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갑자기 일어났던 것인가. 지금까지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던" 그들이 이제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성령은 바람과 같아서 그가 불고자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곳으로 임하시기 때문이다.

 

19:2 없음.

 

19:3 없음.

 

19:4 없음.

 

19:5 없음.

 

19:6 없음.

 

19:7 없음.

 

19:8

에베소에서의 바울의 활동(사도행전 19:8-12)

본문에 바울이 에베소에서 선한 일을 하기 위해 매우 분주한 모습이 소개된다.

Ⅰ. 바울은 관례에 따라서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먼저 복음을 전한다. 그것은 이제는 여러 산으로 흩어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

1.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전도한 장소. 그는 그리스도가 했듯이 그들의 회당 안에서 복음을 전했다(8절). 바울은 그들의 회당에 가서 그들과 함께 예배에 참석하였으며 그에 반대하는 그들의 편견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희망이 있는 동안은 그들과 잘 지내고자 노력하였다. 이같이 안식일의 공적 예배에서 바울은 그의 증언을 하곤 하였다. 그는 아직 그리스도인들의 집회가 형성되지 않는 곳에서는 유대인들이 그를 전적으로 배척하지 않는 한 유대인들의 모임에 자주 나갔다. 바울이 회당에 간 것은 거기 그들이 함께 모여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그들이 함께 모여 있기에 그들을 돌이킬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2. 바울이 그들에게 전한 내용. 그는 사람들 가운데 나타난"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들"과 하나님의 인간들에 대한 통치와 그의 그들에 대한 사랑에 관한 사실들과 인간들은 하나님께 속해 있고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들을 전했다. 바울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보여 주었고 또한 그에게서 받을 유업을 그들에게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의무를 다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된다는 것과 그들이 죄를 지으므로 그들의 의무를 불이행하고 그 유업을 인간이 상실하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쇠약해졌음을 말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이 구속자를 통하여 자신들의 의무를 새롭게 하고, 그들의 유업을 다시 회복하면 하나님 나라가 다시 이룩될 것임을 보여 주었다. 또는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더 좁은 의미에 있어서 유대인들이 대망하고 또 약속받은 것으로 믿고 있는 "메시야의 왕국에 대한 것을" 전하였다. 바울은 이 왕국에 관하여 말씀되고 있는 성서를 펴놓고 그들에게 이 왕국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제시했으며, 그것에 관한 그들의 잘못을 밝혀 주었다.

3. 바울이 그들에게 전도한 방법.

(1) 바울은 그들에게 변론을 통해 말씀을 전했다. 그는 그들과 토론하고 그가 설교한 내용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제시했고 그리고 반대에 대해 답변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인간이 심판받는다는 사실과 또 인간의 양심에 근거하여 그들은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또 믿을 이유가 있음을 전하였다. 그는 dialgo,menoj - 즉 변론의 형식으로 말씀을 전하였다. 그가 그들에게 질문하였고 또한 그들의 답변을 들었으며 또 그들도 자기에게 묻도록 하였고 그들에게 답변하였다.

(2) 바울은 열정적으로 설교했다. 그는 그들을 권면하였다. 그는 그가 말한 것의 이해를 돕기 위해 논리적인 논증 방법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말한 내용이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줄 수 있도록 수사학적인 어법을 사용하였다. 그는 이러한 방법들을 동원하여 그가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전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 그들 자신에 관계된 것이라는 것과 그들이 그것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기에 그것에 대하여 그들이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곳에서도 "우리가 사람을 권고하노니"(고후 5:11)라고 말씀하였던 것이다. 바울은 감동적인 설교가였고 설득시키는 힘이 있는 사림이었다.

(3) 바울은 두려움 없이 거룩한 각오로 전도하였다. 바울은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는 추호의 의심도 갖고 있지 않으며 또한 그가 전하는 분에 대하여 조금의 불신도 없이 또한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말하였다.

4. 바울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기간. 본문에 보면 "석 달 동안"이라고 하였다. 그 기간은 유대인들이 바울이 전도한 사실들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 기간 동안 그들 아직 은혜의 선택에 속한 사람들은 부름을 입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변명할 수 없는 처지에 남겨지게 되었다. 이같이 오랫 동안 바울은 "심한 반대에 부딪히면서도"(살전 2:2) 복음을 전하였다. 이럼에도 바울은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았다."

5. 그의 전도가 그들 가운데서 거둔 성공.

(1) 바울의 권면을 받고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이 있었다. 혹자는 "권면"이라는 말은 바울이 그들을 설복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2)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불신을 계속했으며, 그리스도교에 반대하는 그들의 편견에 변함이 없었다. 전에 바울이 그들을 방문하여 그들에게 일반적인 관점에서 설교하였을 때는 그들은 바울이 그들 가운데 머물러 있기를 요구했었다(18:20). 그러나 이제 바울이 그들 가운데 자리를 잡고 그의 말이 그들의 양심에 가까이 침투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곧 바울을 싫어하였다.

[1] 그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꺾어버릴 수 없는 적대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았다." 그들은 비록 진리가 그들 앞에서 확실한 빛과 증거로 비추었지만 단호히 믿지 않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마음이 굳어졌기 때문이었다.

[2] 그들은 다른 사람들도 복음에 대하여 대적하도록 열심을 다하여 선동하였다. 그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까지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였고" 복음에 대항하여 그들로 편견을 갖게 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이 악한 행동을 자행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들은 복음에 대하여 갖은 악한 말을 하였다. 이 죄인들은 죄를 범한 천사가 그러하였듯이 사탄과 적대자와 악마가 되었으며 타락한 거짓 비방자들이 되었다.

Ⅱ. 바울은 할 수 있는 대로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으나 그들의 적대 의식이 점점 완고해져가고 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자 그는 회당을 떠났다. 그것은 그의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었고 다만 그가 안락하고도 성공적으로 그들과 계속해서 교제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바울이 그들의 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고, 그들도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막거나 금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바울의 말들을 비웃음으로써 바울을 그들로부터 몰아냈다. 그들은 개혁을 싫어하였고 가르침을 받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떠났다." 본문에서 우리는 바울이 그들과 헤어지기는 하였으나 그가 유대교와의 분열을 책동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가 그들을 떠난 것은 정당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바울이 유대인들에게서 떠날 때 그는 그와 함께 제자들을 데리고 떠났다. 그리고 그들은 "따로 세웠다." 이것은 "이 패역한 세대로부터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다"(이 말씀은 베드로가 그의 새로운 개종자들에 경고한 말씀이었다. 2:40). 바울은 그들이 그러한 비난자들의 독기어린 혀에 의해 감염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믿는 사람들을 분리시켰다. 또한 그가 그렇게 한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교회의 초석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고 또한 이제 그들은 한 집단을 구성할 만한 충분한 수효가 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로 그들과 함께 복음에 대한 설교를 듣게 하고 그들이 믿는 것을 보고 또 다른 사람들도 믿게 하기 위해서였다. 바울이 그곳을 떠날 때 제자들을 일부러 따로 구분시킬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바울이 어느 곳을 가려고 하든지 그들은 그를 따르기를 원하였기 때문이다.

2. 바울은 회당을 떠나고 나서 독자적인 모임을 시작했다. 그리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였다." 그가 유대인들의 회당을 떠난 것은 더 자유롭게 그의 사명을 계속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와 기독교에 대하여 강론했으며 그들의 반대자들의 어떠한 반대에도 대답할 준비를 갖추었다. 바울은 유대 회당으로부터 떠나므로 이중의 이익을 얻게 되었다.

(1) 이제 그는 더 자주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회당에서는 다만 매 안식일에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13:42). 그러나 이제는 날마다 강론하였고 매일 강좌를 열었고 이렇게 하여 시간을 활용할 수 있었다. 이제 일이 있어서 참석할 수 없었던 사람은 그 다음날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매일 지혜를 기다리며 사모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영접을 받았다.

(2)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개방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의 회당에는 유대인들이나 개종자들 외에는 어느 누구도 오려고 하지 않았고 또 올 수도 없었다. 이방인들은 배척 당했다. 그러나 바울이 두란노 서원에서 그의 집회를 갖자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그의 전도 집회에 자유롭게 참석하였다(10절). 에베소에서의 기회의 문이 넓게 개방된 데 대하여 그는(고전 16:8, 9) 비록 "적대하는 자가 많을지라도"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렸다"고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두란노 서원이 유대인들의 신학교였다고 생각한다. 유대인들은 커다란 도시에는 그들의 회당 곁에 그러한 학교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곳을 "벧스미드라쉬(Bethmidrash)" 즉 "질문의 집" 혹은 "암송의 집"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안식일날 회당의 집회가 끝난 후에 그곳에 갔다. 그들은 그들의 "신앙을 더욱 공고하게 하기 위해" "성전의 예배가 끝난 후 배움의 학교를 찾아 갔다." 만일 이곳이 그러한 학교였다면 이 사실은 바울이 비록 회당을 떠났을지라도 그가 전에 했던 것과 같이(18:7) 갑자기 떠나지 않고 점진적으로 서서히 물러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 두란노 서원은 두란노란 사람에게 속한 이방인들의 철학 학교이거나 혹은 그 도시의 통치자나 행정관이 소유하고 있는 별장이었을 것이라고(왜냐하면 scolh라는 단어는 때로는 그러한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생각한다. 이곳은 대단히 편리한 곳으로 바울과 그의 제자들은 그 사람의 호의로 또는 그에게 사용료를 지불하고 그 장소를 사용하였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3. 이곳에서 바울은 2년 동안이나 힘을 다해 매일 강론을 하고 또 복음을 변호하였다. 이 2년은 바울이 회당에서 보낸 삼개월이(8절) 끝나는 다음부터 계산된 기간이다. 이 2년이 끝난 후에 바울은 얼마 동안 주변의 시골에서 전도를 계속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20장 31절에서 말하였듯이 그 기간을 3년으로 잡은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4. 이제 복음은 멀고 가까운 모든 곳에 퍼지게 되었다. "아시아에 사는 자는 다 주의 말씀을 들었다." 에베소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만 들은 것이 아니라 "아시아"라고 불리우는 광활한 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이 듣게 되었다. 에베소는 아시아에서 으뜸되는 도시였고 그러므로 이 성은 소 아시아라고도 불리웠다. 에베소는 재판이나 여행 혹은 종교나 교육 문제 때문에 각처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이러한 여건은 바울로 하여금 아시아의 모든 지방과 도시에 복음의 소식을 전달할 수 있는 적절한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그들은 모두 "주 예수의 말씀"을 들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에 관계된 말씀이다. 이 사실을 그들은 들었고 직접 듣지 못한 사람들은 제 삼자를 통하여 전해 들었다. 이들 지방이나 도시에서 온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즐거워하였으며, 그들에 의하여 복음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달되었다. 그러므로 그들 모두가 "주 예수의 말씀을 들었으며" 또는 들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바울은 바울 자신이 때로는 복음을 전도하기 위하여 여러 지방을 여행하였던 것 같고 그렇지 않으면 그와 함께 하고 있는 전도자들이나 수행원들을 보내기도 하였던 것 같다. 그리하여 "모든 지방에 골고루" 주님의 말씀이 들려지게 되었다. 이제 "어둠 속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위대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Ⅲ. 하나님은 바울의 교리를 기적에 의해 확증해 주셨다. 기적은 사람들로 복음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사모하게 하고 또한 그들로 복음을 믿게 하였다(11, 12절). 필자는 빌립보에서 처녀에게서 악령이 쫓겨나는 기적이 있은 후 바울에 의해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읽을 수 없는 점을 의아스럽게 생각한다. 왜 바울은 데살로니가, 베뢰아, 그리고 아덴에서 기적을 행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고 만약 그가 기적을 행하였다면 왜 그러한 것이 기록되지 않았을까? 자연계에서의 기적이 없이도 복음의 성공은 가능했던 것인가? 아니면 회개에 대한 말씀과 또한 그 말씀이 하나님에게서 나왔음을 증명하는 놀라운 능력 이외에 또 다른 것이 필요가 없었던 것인가? 그러나 고린도에서는 많은 기적을 바울이 행했을 것임은 확실하다. 비록 누가가 그러한 사례를 기록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그들 가운데서 있었던 그가 사도권이 표적들 즉 "기적과 능력있는 역사에 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고후 12:12). 그러나 이곳 에베소에서는 바울의 신적 사명을 입증해 주는 기적들이 있었음을 개괄적으로 설명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1. 에베소에서 있었던 기적들은 "특별한 기적들"이었다. 희랍어로 본문은 "Duna,meij te ou taj tucou,saj"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일상적인 자연의 섭리를 뒤엎는 능력을 행하시었다. 이번 이루어진 일들은 우연이라거나 또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 사건들은(모든 기적이 그러하듯이) "상식을 벗어나는 그러한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비범한 기적이었다. 이러한 기적들은 어떤 다른 사도들의 손에 의해서는 일어나지 않았었다. 복음의 적대자들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어서 어떠한 기적도 그들의 전향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Virtus non qua slibet - 즉 희한한 능 즉 보통의 기적보다도 뛰어난 기적을 행하시었다.

2. 그러한 기적을 행한 것은 바울이 아니었다(그러므로 바울은 다른 곳에서 "바울이 무엇이냐, 아볼로가 무엇이냐"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바울의 손에 의하여 이러한 일이 있게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었다. 바울은 도구에 지나지 않았고 주된 역사가는 하나님이셨다.

3. 바울은 그에게 데려온 병자들을 고쳤을 뿐만 아니라 그가 그들에게로 가서 고치기도 하였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가져간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통해서도 치료가 이루어졌다. 본문에 그들이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갔다고 말하고 있는데 앞치마는 바울이 작업 도중에 입었던 것이라고 혹자는 말한다. 그러한 물건들을 환자들에게 갖다대면 즉시 그 환자들은 치유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환자의 손수건이나 멜빵, 모자, 혹은 머리 수건 등을 가져다가 바울의 몸에 놓았다가 잠시 후 그것을 가져다가 환자에게 대면 치료가 되었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가 확실성이 많았다. 이로써 그의 제자들에게 하신 "너희는 이것보다 더 큰 일을 행하리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다. 우리들은 그리스도가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의 외투를 만짐으로 치유받은 한 사람에 대한 기사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때 그리스도는 "그의 능력이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아셨다. 그러나 여기서는 바울의 의복을 그들이 가지고 가기만 해도 병자는 치유되었다. 그리스도는 그의 사도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악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마 10:1). 또한 본문에서 우리는 바울이 신임을 하여 그의 소지품을 들려보낸 사람들도 이러한 권세를 행하였음을 보게 된다. 즉 그들이 가져간 것을 병자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갔다." 이러한 사실은 복음의 위대한 목적과 축복의 효능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영적인 질병에 대한 치료와 사탄의 힘과 지배에서부터 인간의 영혼을 자유하게 한다는 의미를 보여 주고 있다.

 

19:9 없음.

 

19:10 없음.

 

19:11 없음.

 

19:12 없음.

 

19:13

마술하는 유대인들이 당한 망신(사도행전 19:13-20)

복음 전도자들은 사탄에 대항하는 싸움을 수행하기 위하여 보내졌다. 그리고 그리스도도 "이기고 또 이기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 귀신들린 사람들의 악한 영혼을 추방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탄에 대한 승리의 한 가지 실례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큰 원수를 물리치고 승리하신 것을 본문의 사탄이 정복된 주목할 만한 두 가지 사실을 통하여 보게 된다. 즉 사탄에게 강제로 사로잡힌 사람들에게와 또한 자진하여 사탄에게 굴종하는 자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승리가 나타남을 보게 된다.

Ⅰ. 사탄의 종들 중 몇 사람 곧 "방랑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이곳에서 겪은 당혹함. 그들은 그들을 악마적인 유혹을 하고자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독적으로 또한 악의로 불렀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경거망동에 대하여는 값비싼 대가를 치루게 되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이러한 경거망동의 죄를 범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특징. 그들은 유대인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떠돌이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유대 민족이고 또 그 종교를 가지고 있었으나 마술에 의해 돈을 벌려고 이 도시 저 도시로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지방마다 다니며 사람들의 운명을 점쳤고 마술과 주문에 의해 병을 치료하는 척하였고 또는 우울증에 사로잡힌 자나 정신 이상자를 치료하는 것처럼 가장하였다. 그들은 자신을 악령 추방자로 불렀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들의 속임수를 행할 때 유명한 자들의 이름을 빌려 자기들의 소원을 이루고자 하였다. 미신적인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마술이 권위있게 생각되게 하기 위해서 악랄하게도 그러한 마술이 솔로몬에 의해 창안된 것이라고 꾸며댔다. 그러므로 요세푸스도(Antiquit. lib. viii. cap 2) 솔로몬이 질병을 치료하고 악마를 추방하여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주문을 만들었다고 전해 준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들이 그의 시대까지 유대인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계속되고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너희 네 사람들은 누구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 낸다는 말이냐"(마 12:27)고 하신 말씀도 이러한 사실을 말하고자 하신 것처럼 보인다.

2. 이러한 생활을 하면서 이곳 에베소에 여행 온 자들에 대해 주어진 특별한 설명. 그들은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었다"(14절). 야곱 지파가 더구나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에게 봉헌된 아론 지파가 이같이 타락한 것을 본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 지파 가운데 몇몇이라도 사탄과 결탁하고 있는 것을 본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들의 아버지는 대제사장이었으며 24명의 제사장들의 우두머리였다. 누구나 다 이 대제사장의 아들들이 현재보다 두 배나 더 많았다고 해도 대제사장의 아들들을 성전에서 고용하여 그들을 격려하였으리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협잡군이 되어서 미친 사람들을 고친다고 온 세상을 돌아다니게 된 것은 성전에 일자리가 주어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의 허영되고 방랑적이고 방탕한 기질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3. 그들이 범한 불경죄. 그들은 "시험적으로 악귀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였다." 우리가 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악마를 추방하였으나 그럼에도 예수의 제자들을 따르지 않았던 몇몇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눅 9:49), 그들은 그리스도를 존중하지도 또 그의 이름을 신뢰하지도 않았다. 그리스도는 복음서에 나오는 자들에 대하여는 낙심하시지는 않았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자들은 갖은 수단을 다하여 그들의 악한 의도를 성취시키려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의도는 만일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불러서도 악령이 굴복한다면 그를 믿으려는 사람들에게 그를 믿지 않아도 기적은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하려고 한 것처럼 보인다. 또한 만일 악령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한 주문에 굴복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들이 사용하는 다른 이름보다 능력이 없다고 말하려고 했던 것처럼 여겨진다. 사실 그들이 전에 사용한 이름에 대해서 악마들은 이들 마술하는 자들을 부추겨 주느라고 굴복하는 척하여 왔던 것이다. 그들은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고 말했다. 그들은 "우리가 믿고, 의지하며 그로부터 능력을 받은 예수의 이름으로"라고 말하지 않고,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라고 말했다. 그 말은 마치 "우리가 한 번 그 이름이 무슨 능력이 있는지 시험해 보겠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로마 교회 안에 있는 악마 추방자들은 그들도 이해하지는 못하는 마술과 주문으로 우울증 환자들에게서 악마를 추방하는 것처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증한 것도 아니며 또 신앙적 입장에서는 허용될 수 없는 이러한 주문을 사용하는 자들은 본문이 떠돌아 다니는 유대인들과 같은 무리들인 것이다.

4. 그들의 불경건한 행위로 야기된 소동.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시지도 않으며 또한 예수의 영광된 이름은 이 같이 악한 목적에 이용당하시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겠는가"(고후 6:15)라고 하였던 것이다.

(1) 악령은 그 마술사들에게 날카롭게 반문했다(15절).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나는 예수가 모든 정사와 권세들을 정복한 사람임을 알고, 또 바울은 그의 이름으로 악마를 추방하는 권위를 가졌음을 안다. 그런데 너희들은 그의 이름을 빌어 우리에게 명령할 무슨 권력이 있는가? 누가 너희들에게 그러한 권세를 주었느냐? 너희들이 그의 교훈을 싫어하면서 어떻게 예수의 능력을 선포할 수 있으며 어떻게 너희들의 입술로 그의 언약과 명령을 선포하는 것이냐?"고 악령은 물었다(시 50:16, 17). 이것은 하나님이 그의 능력으로 악령의 입을 통하여 고발하도록 강요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복음의 영예를 획득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악하게 사용하는 무리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였다. 적그리스도의 권능과 도당들은 예수와 바울에 대하여 대단한 열심히 있는 척했으며 그들로부터 권위를 물려받은 척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이 들어나고 보니 그들이 도모하고 있었던 것은 단순히 세속적인 이윤을 위하였던 것임이 드러났다. 그러한 것은 진정한 신앙에는 대립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나?"고 본문에 말씀된 것이다.

(2) "악마가 들린 사람은" 그들에게 얼씨구나 하고 달려 들었다. 그 사람은 그들에게 뛰어 올라 덮쳤다. 그는 몹시 광분된 상태에서 저들과 저들의 마술을 제어하고 그들을 이겼다. 그의 이러한 덤빔을 그들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저희는 상하여 벗을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였다." 그들의 옷은 등에서 벗기어졌고 머리는 상처를 입었다. 이 일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악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로 쓰여진 것이다. 유혹으로 그들을 정복한 악마가 또한 위협으로 그들을 정복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들린 사람을 떠나라고 그들이 악령에게 한 주문을 그들에게 안전을 주지 못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되고 활기있는 신앙으로 악마를 물리치고자 한다면 악마는 우리들에게서 도망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들이 단순히 그리스도의 이름이나 그의 말씀의 일부분을 주문이나 마술로써 사용하여 악마를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악마가 오히려 우리를 눌러 이겨버릴 것이다.

5. 이 일은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게 되었다(17절). 그러므로 본문에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것은 그 성의 얘깃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일은 다음과 같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 백성들이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본문에 "두려움이 그들 모두에게 임했다"고 하였다. 이 일을 통하여 그들은 그들이 섬기고 있는 악마의 악함을 보았고, 그들이 반대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았다. 그리고 이 모두가 그들에게 두려운 생각을 갖게 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이 희롱당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았으며 그리고 그에 대한 신앙이 이방 미신과 혼합될 수 없음을 보았다.

(2) 이로써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다. 또한 "주 예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셨다. 즉 그 이름에 의하여 그의 신실한 종들이 아무런 항거도 받음이 없이 악마를 추방하고 병자를 치유함을 보고 사람들은 하나님과 주 예수를 더욱 높이었다. 왜냐하면 이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Ⅱ. 백성들이 회개함으로 있어지는 증거를 보고 다른 사탄의 종들도 회개한 사실이 본문에 소개된다.

1. 악한 행실의(마술) 죄를 범한 사람들이 와서 자복하였다(18절). 믿고 세례를 받았으나 그들의 죄를 자백할 정도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의 위엄된 실례를 보고, 바울과 혹은 바울과 함께 하던 다른 사역자들에게 와서 그들이 살아 왔던 악한 생활과 세상은 알지 못하나 그들의 양심은 알고 있는 은밀한 많은 죄를 즉 은밀한 거짓과 은밀한 추잡스러운 행위를 고백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행한 일을 자복하였다." 그리고 그들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다른 사람들을 경고했다. 이러한 고백은 강요된 것이 아니었으며 그들이 양심의 괴로움을 들기 위해 자진해서 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근자의 기적들은 그들의 양심에 공포를 안겨 주었기 때문이었다. 죄에 대하여 진정한 뉘우침이 있는 곳에서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순수한 죄의 고백이 따르는 것이며 또한 필요한 경우에는 우리가 피해를 끼친 그 사람에게 죄를 고백할 필요가 따르는 것이다.

2. 마술책들을 애용하던 그들은 그 마술책을 불태웠다(19절). 이들은 "마술 ta perierga" 다른 말로 "당치도 않은 것들"을 행하던 자들이었다. 이들은 라틴어로 말한다면 mula nihil ad se pertinent iasatagentes - 즉 일만 만드는 자들이었다(이러한 표현은 살후 3:11; 딤전 5:13 등에서 사용된다). 이들은 점성술 책을 통하여 마술이나 점술을 행하였다. 즉 출생을 점치는 운수를 보아 주며 영들을 연상하게도 하고 잠잠하게도 하며 꿈을 해석하고 미래의 사건을 예언하는 등의 일을 하였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그것과 함께 그들이 histronica, amatoria saltaoria - 즉 희곡, 연애 소설, 그리고 음란하고 정숙하지 못한 시집 등을 팔고 다녔다고 생각한다(Stres). 이들 마술사들은 그들의 양심에 일깨움을 받게 되자 이 서적들이 그들에게 가르친 행실들이 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러므로 그들은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들 앞에서 불살랐다." 에베소는 이러한 마술을 행하는 곳으로 유명했다. 그러기에 마술과 주문을 "Literoe Ephesine"라고 칭한다. 이곳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마술에 관한 책들을 소장하고 있었고 또한 아마도 그들에게는 그러한 마술을 가르쳐 주는 교사들도 있었던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므로 마술이 이토록 유행하던 장소에서 그러한 마술 행위를 반증하는 이 같은 고귀한 증언이 발생하였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귀중한 영예가 되었다. 그들이 그러한 마술의 악함을 확신하고 더 이상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마술에 관한 책들을 불살라버리지 않고 단순히 결심만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1) 이렇게 해서 그들은 그들이 저지른 죄에 대하여 거룩한 분노를 나타내었다. 우상 숭배자들도 그들이 회개하게 되었을 때 그 우상에 대하여 "나가라"(사 30:32)고 말하고 "사람이 숭배하려고 만들었던 그 은 우상과 금 우상을 그날에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졌다"(사 2:20)고 하였다. 이와 같이 본문에 나오는 그들도 그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했던 도구들에 대하여 거룩한 복수를 행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악하다는 그들의 결심의 강력함을 과시하였다. 또한 그들이 전에는 즐거워했던 그러한 행위들이 이제는 그들에게 혐오스러운 것이 되었음을 선언하였다.

(2) 이와 같이 함으로써 그들은 결코 그러한 마술을 사용하는 행위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그러한 책들은 다시 보지도 않겠다는 그들의 결심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그들이 책을 던져버리지 않으면 악과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확신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결심이 바뀌어 그들을 가까이하게 되지 않도록 미리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러한 책들을 다시 사용하지 않기 위한 확고한 결심으로 그것들을 태워버린 것이었다.

(3) 이같이 하여 그들은 그들로 하여금 다시 돌아오게 하려는 유혹을 근절시켜 버렸다. 그들이 그러한 책들을 간직하고 있다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셈이었다. 즉 현재 확신하고 있는 그러한 열심히 사라지게 되면 그들은 호기심으로 그러한 책들을 다시 들여다 볼 것이며 다시 그것들을 좋아하고 사랑하게 될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책을 태워버린 것이다. 진실로 죄를 뉘우친 사람들은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서 그러한 기회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4) 이같이 함으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행할 수 있는 그들의 실수를 미연에 방지했다. 만약 유다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는 "그 책들을 팔아서 그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자." 혹은 "그것으로 성경이나 좋은 책들을 사자" 하고 말했을 것이 틀림 없다. 그러나 이 위험한 책들이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그들이 이러한 잘못을 행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므로 그러한 것들을 모두 화염 속에서 집어넣는 것이 가장 안전한 것이었다. 죄에서 돌이킨 사람들은 또한 최선을 다해서 다른 사람들이 그 죄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며 자기가 다른 사람들을 범죄하게 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5) 이렇게 하여 그들은 이 세상의 재화를 무시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왜냐하면 그 책들의 가격이 추산되었는데(아마 그것을 계산한 사람은 그 책들을 불태우지 말도록 설득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 값이 "온 오만이나" 된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은 오늘의 화폐로 계산하여(16세기 초의 영국 화폐:역자 주)천 오백 파운드로 환산하였다. 그것은 아마 진본(珍本)들이었으며, 금지된 서적들이기에 매우 비쌌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기에 그 가격이 그렇게 엄청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비록 어리석게 그 책들을 구입하였지만 그 책들이 악마의 책들이었으므로 그들이 그 책을 다시 판다는 것은 정당화시킬 수 없을 만한 악한 일이라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6) 이같이 함으로 그들은 이러한 사악한 행실로부터의 개종을 그들이 기뻐한다는 사실을 공중 앞에서 증언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마태를 세관에서부터 불렀을 때 그가 커다란 잔치를 함으로써 공중 앞에서 그의 기쁨을 증언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 개종자들은 함께 결합하여 불을 피우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 책들을 불태웠다. 그들은 각자 자기들의 집에서 사적으로 그 책들을 불태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만장일치로 함께 모여서 그 일을 하기로 하였다. 또한 그들은 그 일을 사람의 왕래가 잦은 교차로에서 행함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은총을 더 높이려 하였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교화시키고자 하였다.

Ⅲ. 에베소와 그 주변에서의 복음의 진보와 그것이 걷은 성공에 대하여 간략한 설명이 주어지고 있다(20절). 그러므로 본문에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고 하였다. 이곳에서 이룩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고 세력을 얻는 것을 보는 것은 축복된 광경이다.

1.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게 됨으로써 복음이 광대하게 성장하는 것을 보는 것은 복된 일이다. 복음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복음에 일치한 생활이 이루어질 때 복음은 성장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복음에 복종할 것 같지 않던 사람과 완고하게 복음에 대한 반대를 고집하고 있던 자들이 복음에 사로잡혀 복종하게 될 때 주의 말씀이 "흥왕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의 지식과 은혜가 증진되므로 복음이 널리 세력을 얻게 되는 것을 보는 것은 복된 일이다. 강력한 타락이 억제되고, 부도덕한 행실이 변화되며, 오랫 동안 지속되어 온 악한 습관이 깨져 나가며, 쾌락과 탐욕과 유행을 추구하는 죄들이 포기 되었을 때, 그 때 복음은 힘있는 세력을 얻게 된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일들을 통해 정복하고 또 정복하시는 것이다.

 

19:14 없음.

 

19:15 없음.

 

19:16 없음.

 

19:17 없음.

 

19:18 없음.

 

19:19 없음.

 

19:20 없음.

 

19:21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요(사도행전 19:21-41)

Ⅰ. 바울은 에베소에서 곤란한 사건과 마주치게 된다. 그것은 바울이 다른 곳으로 갈 계획을 세우고 그 자신이 어딘가 딴 곳에서 일하려고 마음먹고 있었을 때였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바울이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한 목적(21, 22절). 바울은 하나님을 위하여 방대한 계획을 세웠고 또 복음을 할 수 있는 한 광대하게 확산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위와 같은 일을 위해 에베소에서 2년을 보낸 바울은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운다.

(1) 이제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교회들을 방문할 계획을 하였다. 특별히 이 지방의 중요한 도시들인 빌립보와 고린도를 방문하고자 하였다(21절). 그곳에 그는 교회를 세웠고 그러기에 그는 이제 그 교회들을 방문할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본문에 보면 그가 이 일을 "성령 안에서 계획하였다"(역주:한글 개역은 "경영하여"로 번역됨). 이 말은 자신의 심정 안에서만 계획하고 아직 말리지 않았다는 뜻의 말씀이든가 또는 그의 모든 행동을 인도하고 또 그가 인도함 받는 성령의 지시에 의해 그러한 계획을 했다는 뜻일 것이다. 바울은 그곳에 가서 하나님의 일이 어떻게 진행되어 가고 있는가 보고자 하였다. 즉 그는 가서 잘못된 일이 있으면 수정하고 잘된 일은 격려하고자 하였다.

(2) 그 후에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곳에 있는 형제들을 방문하고 그들에게 주님께서 그를 통하여 역사하신 많은 사실들을 전하고자 하였다. 그 일이 끝난 후에 바울은 로마로 가서 "로마를 보고자" 하였다. 로마에 가서 로스도 구경하고 그곳 사람들이 지내는 형편을 둘러 보아야겠다는 당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투로 그가 말하였다고 해서 바울의 방문 의도가 유명한 고대의 도시를 관광함으로 그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로마를 방문하고자 한 것은 그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돌아보고 그들에게 유익을 끼치고자 해서였다(롬 1:11). 로마에 있는 선한 사람들은 그 도시의 영광이었고 바울 보기를 원한 것은 바로 그들이었다. 라이트푸트(Dr. Lightfoot) 박사는 그때는 글라우디 황제가 죽었을 때였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황제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체류한 지 2년째가 되던 해에 죽었으며, 그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유대인들이 로마에 들어오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바울은 이때를 이용하여 로마에 가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18:2).

(3) 바울은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마게도냐로 보냈다. 그렇게 한 것은 그들에게 그가 마게도냐를 방문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리고 그리고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모금을 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고린도에 보내는 첫 번째 서신"을 쓴 바로 직후에 바울 자신이 곧 그들의 뒤를 따라가려고 한 것이 "내가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나 만일 주께서 원하신다면 내 자신이 곧 너희들에게 갈 것이라"(고전 4:17, 19)는 말씀에서 나타난다. 당시 바울은 아시아에 있었다. 즉 에베소의 변경에서 교회를 설립하고 있었다.

2. 바울이 에베소에서 직면한 곤경이 그의 목적을 추진시키는 촉진제가 되었다. 바울이 그곳에 그렇게 오랜 동안 있으면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사실 바울은 그곳에서 본서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으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던 것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그의 편지 속에서 이때의 자신의 정경을 술회하면서 그는 "에베소의 맹수로 더불어 싸웠다"(고전 15:32)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씀은 그들이 때로 그리스도인들을 야만적으로 다룰 때 행하던 관습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을 야외 극장에서 짐승들과 싸우게 하였는데 이러한 싸움을 그가 싸웠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리고 바울은 에베소에 근접해 있는 아시아에서 당한 고통을 말하고 있는데 그는 "살 소망까지 끊어진" 때도 있었고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던" 때도 있었다고 했다(고후 1:8, 9).

Ⅱ. 그러나 본문에 언급되고 있는 고난은 그가 상해를 받았다기보다 심한 놀라움을 그가 당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여기서 "적지 않은 소동이 일어났던 것"은 사실이었다(23절). 어떤 역사가는 그리스도와 대적하여 시몬 마구스(Simon Magus)처럼 간주하여 유명인사가 되고자 한 유명한 사기군인 아폴로니우스 티네우스(Apollonius Tyn us)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바울이 그곳에 있는 때쯤 그 유명한 사기군은 에베소에 와 있었다고 전해 준다. 그러나 이 자의 복음에 대한 배척을 누가는 기록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대단치 않게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러므로 누가가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소요 사건은 또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이제 그 사건을 상세히 고찰해 보기로 하자.

1. 바울과 다른 복음 전도자들에 대한 불만의 폭발. 이 사건은 사도와 그 일행이 아데미(Dianai:로마 신화에 나오는 달의 여신으로 처녀성과 사냥의 수호신 그리스 신화에서는 그 신을 Artemis라고 부른다. K.J.V에서는 Diana라고 되어 있으나 한글 개역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데미로 번역하였다. 역자 주) 숭배에서부터 사람들을 끌어내 갔으므로 아데미 신전을 위해 일하는 은세 공업자들의 장사에 큰 손실이 안겨졌기 때문에 야기된 것이었다.

(1) 그 불평을 말한 사람은 데미드리오이다. 그는 은 세공업자로서 그 일에 으뜸가는 기술자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는 그 업계의 다른 어떠한 사람보다 은 세공업에 대하여 조예가 깊었던 인물로 여겨졌던 것 같다. 그가 다른 종류의 판금(판금) 일을 하였는지 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그러나 그의 장사 중에서 가장 이익이 많은 것이 바로 "은으로 아데미의 신당 모형을 만들어 파는 것이었다"(24절) (역주:한글 개역은 은감실로 되어 있음. 그러나 본서에서는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공동 번역의 "신당 모형"이랄 말을 인용했음). 혹자는 이 신당 모형이 아데미의 초상이나 그의 신전 혹은 이 양자가 다 새겨진 메달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은 은으로 만들어진 것으로써 성전이 부각되어 있고 그 안에 아데미신의 형상이 그려진 메달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작았기 때문에 카톨릭 교도들이 십자가를 가지고 다니듯이 그것을 품에 지니고 다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은 에베소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갈 때 이 작은 신당 모형을 사서 집으로 가져 갔다고 한다. 그것은 그들의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또 그들의 마음에 우아한 신전을 늘 간직하기 위해서 사갔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세공인들로서 상위에 속하는 기술자들이 사람들의 미신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고 또 그 기술로 그들의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 써먹고 있는 사실을 주목하여 보자.

(2) 데메드리오가 호소한 사람들은 행정관들이 아니라 군중이였다. 그는 "직공들과 이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함께 불러모았다(직공의 집단은 그들의 세속적인 이익 이외에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이지적 힘이 부족하고 광분하기 쉬워서 그가 원하는 대로 충동하기 용이한 이 사람들을 바울에 대하여 대적하도록 충동하였다.

(3) 그의 비난과 주장은 매우 완벽한 것이었다.

[1] 그는 아데미 신의 숭배자들을 위하여 신당 모형을 만드는 기술과 그 비밀은 유지되고 보존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원칙으로 제시하였다(25절).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가 이 기술에 의지하여 생계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또한 유족한 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는 부자가 되었고 재산을 늘리었다. 우리는 호화롭게 살고 있으며 그 재산으로 우리의 쾌락을 유지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어떠한 일이 발생하더라도 우리는 이 기술이 쓸모가 없게 될 때까지 묵과하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어떤 일이 옳든 그르든 간에 그것에 의해 사람들이 그들의 재화를 얻는 직업을 위하여 투쟁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고 단순히 이러한 이유 하나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적하는 자리에 서곤 하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복음은 불법적인 그러한 직업을 끊어버리도록 사람들에게 요청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런 직업에 의해 아무리 많은 부(富)가 획득되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2] 그는 바울이 사람들을 타일러 우상 숭배를 단념하게 한다고 비난한다. 고소하는 형식으로 제기된 그의 말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고(26절) 바울이 주장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말보다 더 명백하고 충분한 근거를 지닌 진리는 없으리라. 그리고 예언자들의 "공인(工人)이 만든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보다 더 유력하고 확실한 논리가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으뜸가는 가장 순수한 개념은 그는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며 아무 것도 의지하지 않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물은 그로부터 그들의 존재를 부여 받았고 그것들은 그를 의지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물건이나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 신일 수 없다는 사실이 필연적으로 귀결된다. 그럼에도 이러한 진리가 여기서는 이교적이고 무신론적인 생각들로 간주되었고 바울은 이러한 생각을 고집하는 범법자로서 간주되었다. 데메드리오가 이 가르침 자체에 대해서 반박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 가르침의 결과를 그는 문제 삼았다. 중심 도시인 에베소뿐만 아니라 전 아시아에 걸쳐 있는 지방 사람들까지 바울이 "그들을 권면하여" 아데미 숭배로부터 "돌아서도록 한다"고 그는 말하였다. 이들 지방 사람들은 사실 그들의 최고의 고객들로서 그들은 틀림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전과 같이 그렇게 신당 모형에 대한 수요도 없고 또 판매율도 부진해졌다는 것이었다. 본문에 인간의 생각에 따라서 "손으로 만든 신들"이 그러한 것처럼 대단히 어리석고 비합리적이며 그것을 행할수록 그것이 거짓되다는 것만을 확신시키는 것들일지라도 세속적인 이득과 권리만 안겨진다면 그것을 고수하려는 자들이 있는 법이다.

[3] 데메드리오는 그들의 장사가 몰락해 가고 있다고 그들에게 경고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이 가르침이 신망을 얻게 된다면 우리들은 파멸이고 가계도 닫게 될 것이다. 또한 이 우리의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고 또 미신적이고 세상을 현혹시키는 것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정죄될 것이며 모든 사람이 이것을 업신여길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의 운명이다"라고 말한다. 즉"상업과 장사에 의한 우리들의 이익금과 배당금은" kinduneu,ei h,mi/n to meroj - 즉 상실될 위험에 처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은 결국 우리를 위험 속에 몰아 넣을 것이고 우리를 거지 아니면 악인으로 만들게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4] 데메드리오는 아데미 신을 위하여 강한 애정을 갖고 있으며 또 그 여신의 명예를 위해 대단히 열심인 척 가장한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이 영업만 위험할 뿐 아니라"고 말한다. 즉 그의 말뜻은 이렇다. 사실 그것만이 전부라면 그가 그들에게 그렇게 열심히 말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지금 이토록 걱정하는 것은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이 경홀히 여김이 되고 그의 위엄이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여신의 명예가 손상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라고 부르짖었다. 그러면 아데미 신에 대한 숭배가 무엇 때문에 인기가 있고 또 가장 열광적으로 그 신을 위하는 고집쟁이들이 그것을 위하여 주장하는 최상의 근거가 무엇인지 알아 보기로 하자.

첫째, 그 신전이 화려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 신전의 위엄이 그들을 매혹하였고 그 위엄이 그들을 꼼짝 못하도록 잡아 두고 있었다. 그들은 그 신전을 경시하는 의도를 지닌 어떠한 것들도 참을 수 없었고, 더구나 그것을 훼파시키려는 시도는 도대체 묵과할 수 없었다.

둘째, 그것을 섬기는 자들의 수효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 아시아와 천하가 그 여신을 숭배했다"고 본문에 기록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것을 반대하여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 신을 예배하는 기강을 확립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온 땅이 이상히 여겨 그 짐승을 따랐기 때문에 그러므로 용이요, 이 세상의 신인 악마가 이 짐승에게 자기의 힘과 권좌와 권세를 주었다"(계 13:2, 3)하였던 것이다(역주:본문은 필자의 의역인 것으로 여겨짐).

2. 이러한 호소에 의해 야기된 군중들의 분노. 그 고소는 공예가가 행한 것으로 일반 민중들을 선동하기 위해 계획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원했던 것만큼의 효과를 나타냈다. 이 사실은 그들이 보여 준 행동에 의해서 잘 나타난다.

(1) 이로 인해 복음과 그 전도자들에 대한 커다란 불만이 일어났다. 그러므로 본문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분이 가득하여"(28절)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미칠 듯이 성을 냈다"는 뜻이다. 그 공예가들은 그들의 사업과 우상이 모두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자 완전히 미친 듯이 날뛰었다.

(2) 이로 인해 그들 여신의 명예를 위한 격렬한 경계심이 일어났다. 그러므로 그들은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이제 우리는 당신 곁에 서서 당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살고 죽겠다. 누가 감히 우리의 신을 경멸하고 혹은 파멸하겠다고 위협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그들을 상대해 주리라. 바울로 하여금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 신이 아니라는 그의 주장에 대하여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증명을 말할 수 있다면 하라고 하라. 우리는 누가 무어라고 해도 에베소의 위대한 아데미 신을 섬길 것이다. 우리는 우리 지방의 종교를 지킬 것이고 또 지켜야만 한다. 그것은 우리들의 조상으로부터 우리가 물려받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같이 세상 사람들도 "자기 신의 명예를 귀히 여기고" 그들의 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참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은 더욱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3) 그들 가운데 일어난 대단한 혼란(29절). 그러므로 "온 성이 요란하여"라고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거짓종교를 위한 무절제한 열정의 자연적이고도 공통적인 결과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혼란의 와중 속에다 던지며, 이성을 마비시키고 감정을 폭발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모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날뛰게 만든다.

3. 이러한 분노로 인한 군중의 소요의 경과 과정.

(1) 그들은 바울의 동료 몇 사람을 잡아 가지고 급히 극장으로 끌고 갔다(29절). 혹자는 그들이 바울이 때때로 경험하였던 것처럼 그들로 하여금 "짐승들과 싸우게 하려는" 의도를 그렇게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다만 그들을 조롱하고 군중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려고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붙잡은 사람들은 "가이오와 아리스다고"였다. 그 두 사람에 관해서 우리는 다른 곳에서도 읽을 수 있다. "가이오는 더베 사람이었고"(20:4), 아리스다고도 역시 사도행전 20장 4절에서 언급되고 있으며 골로새서 4장 1절에서도 말하여지고 있다. 그들은 바울과 함께 마게도냐로부터 왔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주를 섬기는 일과 그를 위해 고난을 받는 데 있어서 바울의 동료가 되었고 그와 함께 여행하였다는 점뿐이다.

(2) 그들로부터 도피하였던 바울은 그를 대신하여 그의 친구들이 고난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백성들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였다." 그리고 만일 어떤 다른 구출 방법이 없다면 자신 때문에 그의 친구가 고난을 하기 보다는 자신이 희생되고자 하였다. 이것은 사실 바울의 간대한 정신의 증거였고 그가 자기 자신과 같이 그의 이웃을 사랑했다는 증거였다.

(3) 그러한 바울을 동료들이 만류하였다. 그들은 그를 강제로 만류하였다.

[1] "제자들이 말리었다." 왜냐하면 바울을 군중들에게 내어 주는 것보다는 그들이 군중들에게 고난을 당하는 것이 더 나은 일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다윗이 여러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이 싸움터에 나가려 하였을 때 다윗의 종들이 그에게 "황은 우리 만명보다 중하십니다"(삼하 18:3)라고 말하였듯이 그들은 바울에게 그러한 자세로 만류하였다.

[2] 또 다른 친구들은 바울이 자신을 위험의 구덩이에다가 던지려 하는 것을 제지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이의를 제기했다. 그들은 바울은 폭동을 일으키는 무리들의 주모자로 간주하고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보다 그를 더 심하게 다루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자신이 그 폭풍우 속으로 감히 뛰어들어가기 보다 그들이 폭풍의 공격의 예봉을 감수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31절). 그렇게 충고한 사람들은 lsiarcai - 즉 아시아의 관원 즉 아시아의 방백들이었다. 비평 학자들은 우리들에게 그 사람들은 그들 제사장들의 우두머리였다고 말하여 준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의 말대로 그들은 연극인들의 우두머리였을 것이다. 그들이 기독교 신앙에로 개종했었는지(그들의 사제나 통치자들 가운데도 개종한 몇 사람이 있었다), 혹은 그들이 바울을 진실하고 선한 사람으로서 여겨 단순히 그의 안위를 염려한 것인지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다만 그들이 "바울의 친구들이었다"는 것만 말씀되고 있다. 라이트푸트(Dr. Lightfoot) 박사는 그들은 바울이 그들의 주장에서 짐승들과 싸운 이후부터 바울에 대한 존경과 친절을 가지게 되었고 이제 그들은 바울이 다시 그러한 학대를 당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사실을 두려워하였다고 말한다. 선한 사람들의 생명과 안락은 그 선한 사람들 자신에 의해서 보다는 우호적인 무리들에 의해서 더 많은 돌봄을 받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만일 바울이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면 그것은 바울의 생명이 위태한 모험이 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친구들은 바울에게 자신을 보존하는 길을 택하라고 강권하였다. 우리에게 우리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는 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위험을 피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내놓으라는 요청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가볍게 던져버려서는 안 된다. 바울에게는 위험을 무릅쓰고 극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말씀을 위해 회당으로 들어가는 일이 더 바람직한 일이었던 것이다.

(4) 그 폭도들은 완전히 혼란에 빠져버렸다(32절). "사람들은 외쳐 혹은 이 말을 혹은 저 말을 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공상이나 기분에 따라서 제멋대로 지꺼렸으며, 혹은 그들이 들은 풍월에 따라서 마구 날뛰었다. 어떤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타도하라"고 외쳤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타도하라"고 외쳤다. 그러나 집회가 난장판이었으므로 서로가 서로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반박하였고, 서로 상대방과 맞붙어 싸우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도대체 자기 자신이 왜 이렇게 하고 있는지 조차 이해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슨 이유로 그들이 함께 모였는지 조차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무엇이 폭동의 원인인지 누가 탄핵의 대상인지를 몰랐고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곳에 지금 지가들이 무슨 용건으로 왔는지조차 몰랐다. 사실 이러한 경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만 무슨 일인가 하는 호기심에서 모여드는 것이다. 그들은 남이 외치니까 따라 외치고 남들이 가니까 뒤따라 가서 결국 눈덩이가 불어나듯이 불어났을 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일수록 이러한 동기가 더욱 강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5) 유대인들이 이 폭동에 개입하려고 했다(그들은 다른 장소에서는 그러한 폭동을 맨 처음 일으키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다시 에베소에 있는 유대인들은 폭동을 주동할 필요까지 느끼지도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러한 폭동이 야기되면 그 폭동 속에 개입할 만큼의 악의는 품고 있었다(33절). 그러므로 그들은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냈다." 그들은 유대인들을 대표하여 바울과 그의 동료들을 대적하는 발언을 하도록 그에게 요청하였다. 그들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데미드리오와 은 세공업자들이 그들의 종교의 적으로서 바울의 일행을 공격하는 발언을 하는 것을 아나니 이제 우리대신 당신이 나가서 바울은 우리들의 종교의 적이라는 사실도 말하라"고 하였다. "유대인들이 알렉산더를 앞으로 밀어내었다." 그들은 그를 격려하고 그에게 자신들이 곁에서 그를 보조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일은 그들 자신들이 곁에서 그를 보조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일은 그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그렇게 하려 한 것은 아데미신의 숭배자들이 바울을 그들의 적으로 간주하듯이 자기들도 그들의 적으로 여기게 될까 두려워서였다. 그러므로 알렉산더가 말하려 한 것은 자신의 문제를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전 유대인을 위해 변호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제 유대인들은 그들이 바울의 적이듯이 유대인 자신들도 바울의 적이었다는 사실을 알리려 하였다. 이같이 그들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종들과 주의깊게 분리시키려 하고 또 군중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 간주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바로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 최후의 심판날에 그들의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이제 "알렉산더가 손짓하여" 군중들로 바울에 대한 자기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려고 하였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행하여지고 있는데 이런 목적으로든 저런 목적이로든 여기 유대인들이 끼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만일 그들이 그러한 악행에 선봉이 될 수 없었다면 그들은 솔선하여 박해를 도우려 하였고 그러므로 그들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죄에 함께 참여자가 되고자 하였다. 혹자는 이 알렉산더라고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었으나 배교하여 유대교인이 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바울을 비난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사람으로 앞장 세워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바로 바울에게 많은 악을 행한 구리 장색 알셀산더이며(딤후 4:14) 바울이 "사탄에게 내어 준" 사람(딤전 1:20)이라고 생각한 바로 그였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6) 유대인들이 나서고자 한 것이 계기가 되어 기소자들은 바울의 동료들에 대한 기소를 내버려 두고 이제 그들 여신을 찬양하는 함성을 질러댔다. "저희는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또 마찬가지로 아데미 숭배를 반대하는 적인 줄 알고9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우상과 우상 숭배를 무자비하게 미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가 바울을 위해서 말하든 또는 그를 쳐서 말하든 그의 말을 듣지 않기로 결심했고 그리하여 그가 말할 수 없도록 "에베소의 여신 아데미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어느 누가 우리의 여신을 모독하려는가! 그가 그리스도인이건 유대인이건 물러가거라. 우리는 우리의 여신을 찬양하리라. 그녀는 에베소인들의 아데미요, 바로 우리의 다이아나다(아데미이다). 그 여신의 신전을 우리가 지닌 것은 명예요 행복이다. 그녀는 위대하며 유명한 여신이고 누구나 경모하는 신이다. 다른 아데미 신들도 있으리라. 그러나 에베소에 있는 아데미 여신이 가장 위대하다. 왜냐하면 에베소에 있는 여신의 신전이 다른 아데미 신전들보다 더 호화롭고 장엄하기 때문이다"라고 외쳤다. 그들은 이렇게 "두 시간 동안" 함께 외쳤다. 그리고 이로써 바울의 가르침 즉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그러한 것들은 이미 신이 아니라"는 교훈을 충분히 논박했다고 생각하였다. 이같이 가장 신성한 진리들이 가끔 소음이나 아우성 또는 일반적인 분노 같은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것들에 의하여 비방되곤 한다. 그들이 "자신들의 우상을 만들어 세웠다"는 우상 숭배자들에 관한 말씀이 구약에서도 말씀되고 있었다. 그리고 본문에도 그러한 사례가 등장한다. 아데미신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큰 유익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 도시는 이곳의 아데미 신전에 참여하려고 몰려드는 각처의 수많은 사람들로 인하여 번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능한 한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에베소의 위대한 아데미 신"의 명성이 침체되는 것을 방어하고자 하였다.

4. 폭도들이 진압되고 해산됨. 그것은 "서기장"의 사려 깊고 경계를 게을리 않는 태도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grammateuu,j - 즉 서기, 비서 혹은 기록자라는 명칭으로 호칭되었다. 또는 그는 "도시의 행정관"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어떤 이는 그를 올림픽 경기(혹은 다른 경기의)의 기록관이라고 생각한다. 이 경기 기록관의 임무는 승리자의 이름이나 또는 그들이 탄 상의 목록을 작성하여 보존하는 일이였다. 그는 많은 노력을 하여 마침내 이야기가 들여질 수 있을 정도로 소란이 진정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무마시키는 연설을 하였다. 또한 그는 솔로몬이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이 우매자인 어른의 호령보다 나으니라"(전 9:17)고 한 말을 그대로 실행으로 옮겼다. 이에 비하여 디메드리오는 우매자요 소란자의 예를 보였던 것이다.

(1) 그는 아데미 신은 에베소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여신이라는 사실을 용하면서 그들의 비위를 맞춘다(35절). 그들이 아무도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며 또 무시될 수도 없는 진리를 고집하기 위하여 그렇게 소리를 지르거나 분투할 필요는 없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이 에베소 시가 위대한 여신 아데미를 신당을 숭배하는 도시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역주:공동 번역 인용). 본문의 신을 숭배하는 자는 "newko,roj"로 되어 있다. 이 말은 그곳 주민들이 여신의 예배자일 뿐만 아니라 그곳 주민들은 법으로 아데미 숭배를 위탁받고 있었고 그 신전을 돌보고 여신에게 경배하러 오는 사람들의 편의를 돌보아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뜻의 말이었다. 에베소 성은 "aeditua" 즉 위대한 여신 아데미의 신전지기의 임무를 지니고 있었다(그들은 이러한 명칭을 좋아하였다). 이같이 아데미가 에베소의 후원자요 보호자 역할을 했다기 보다 에베소가 여신의 후원자요 보호자의 역할을 하였다. 이 같은 대단한 배려를 우상 숭배자들은 그들의 손으로 만든 신을 숭배하는 것을 지키기 위하여 투입했다. 그러나 진실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무시되었다. 오직 몇몇 극소수의 나라나 도시가 하나님 예배를 후원하고 보호함으로 그를 영화롭게 하였다. 에베소에 있는 아데미 신전은 매우 호화롭고 화려한 건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전 안에 있는 아데미 신상을 신전보다 더 귀중히 여긴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신상이 신전을 거룩하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이 신상은 "쓰스"(제우스)가 보낸 또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상으로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선전하였다. 미신적인 사람들은 모사군들의 거짓말에 의하여 얼마나 쉽사리 속아 넘어가는 가를 주시하자. 사실 아데미 신의 형상은 사람들이 기억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전에 형성되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누가 그것을 만들었다고 말할 사람도 없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사람들에게 이 신상은 쓰스가 하사한 것이라고 믿게 하였다. 서기장은 정중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그가 진지하게 말했느냐 않했느냐와는 관계없이 서기장 자신이 그 신을 믿었는가가 의문시된다). "이것은(그 도시가 아데미를 숭배한다는 사실)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즉 이 사실은 자타가 다 수긍하는 일이니 여러분이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아데미 신상을 제우스가 하사한 사실을 우리 모두가 믿고 있다. 그러니 손으로 만든 신들에 대하여 저희가 어떻게 말하던 우리야 상관할 것이 없는 일이다"라고 해석한다.

(2) 그는 모든 폭력과 소요가 진행되는 데 대하여 그들에게 경고한다. 그는 그들의 종교가 그러한 것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렇게 한다고 큰 이익도 없는 것을 행하지 말라고 한다(36절). 그러므로 그는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홀히 아니하여야 하리라"고 말한다. 사적인 일이나 공적인 일에 있어서든 언제나 일의 진행을 침착하게 숙고하는 것은 지혜로운 처사다. 조급하고 경솔하게 행동을 취하지 말고 여유를 두고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하며 자기 자신이나 또는 다른 사람을 동요시키는 것이 아니라 진정시키고 수습하는 것이 좋은 태도이다. 그리고 언제나 이성을 잃지 말고 감정을 늘 자제해야 한다. 우리들이나 혹은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 의해 혼돈이 심화될 때 평정을 되찾기 위해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는 말은 늘 기억할 만한 말이다. 아무 일도 서둘러서 결정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생각할 여유가 있을 때 후회하게 될 것이다.

(3) 그는 바울과 그의 동조자들에게 가해졌던 오명을 씻어버린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도의 일행이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사람들은 아니라고 말한다(37절). "이 사람들을 너희가 잡아다가 그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범죄가 무엇이며 그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너희들은 생각해 보았는가? 너희들이 그들의 범죄를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신전의 도둑들이 아니다. 그러기에 너희들은 그들은 신성 모독이나 혹은 봉헌할 어떤 물건들을 훔쳤다고 고소할 수는 없다. 그들은 아데미 신전이나 그곳의 기물을 파손하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너희들의 여신을 훼방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아데미 신 숭배자들에게 어떤 모욕적인 말도 하지 않았으며, 여신과 신전에 대하여도 모독적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너희들은 비록 너희들의 마음에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렇다고 너희들에게 지독한 욕설을 퍼붓지도 않은 그러한 사람들을 이러한 폭력을 써서 학대하려 하는 것인가? 그들은 침착한데 왜 너희들은 열이 나서 그러는 것인가?" 복음 전도자들이 그들의 모든 힘을 다한 변론과 논증으로 겨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 마음 속에 있는 우상이었다. 만일 그들이 그 마음 속의 우상을 부셔버릴 수만 있다면 신전 안에 있는 우상은 자연 파멸되고 말 것이었다. 우상 숭배자들에 대하여 전도하는 사람들은 그들 편에 진리가 있으므로 강력하게 그 진리를 고수해야 하며 그 진리를 사람들의 양심에다 강하게 호소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들의 신전의 기물을 훔치거나("노획품에는 그들의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 것처럼, 에 9:15, 16) 그러한 숭배에 모독을 해서도 안 된다. 성을 내고 난폭한 언어를 쓰는 것이 아니라 온순하게 가르치면 그들 스스로 돌이킬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리는 그것을 위한 인간들의 거짓도 필요로 하지 않지만 또한 인간들의 무절제한 열심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인간의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하였다.

(4) 서기장은 그들로 하여금 법률에 의한 정식적인 절차를 이용하라고 말한다. 여러 사람들이 일으키는 소요는 법률에 의거하여 진압되어야 한다. 문명이 발달하고 잘 통치되는 나라에서는 그렇게 되어져야 할 것이다. 공안이 잘 유지되고 공의가 실행되며 모든 잘못이 시정될 수 있는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1] 만일 사적인 가해를 당한 경우라면 그들은 그 문제를 재판관들과 정해진 시간에 공개적으로 시행되는 정의의 법정에 호소해야 한다. 만일 이러한 모든 소동을 불러 일으킨 데미드리오나 그의 은 세공업자 동료들이 피해를 입었다던가 그들이 법적인 절차를 밟아서 그 문제를 공정하게 심판에 붙이므로 정의가 지켜지도록 해야 했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에게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총독이나 그의 대리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임무는 양편에 얘기를 듣고 공평하게 결판을 내 주는 것이었다. 양쪽은 모두 이 결정을 따라야 하고 스스로 내린 결정대로 행동하려 하거나 대중에게 호소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법은 사람들이 그것을 정당하게 사용한다면 유익한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것은 정당한 권리를 수호하고 박탈된 권리를 회복시키는 최후의 수단이다.

[2] 만일 그 불만이 공적인 것으로 법 자체가 문제된다면 폭동을 일으켜 혼란된 방법으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국가의 대표자 회의에 의해 시정되어야 한다(39절). 그러므로 본문에서 공동 관심사로서 "만일 그 외의 무엇을 원하거든" 민회를 소집할 권한을 가진 사람이 정식으로 소집한 시의원들과 평의원들로 구성된 "민회에서 정식으로 결단할지라"고 그는 말하였다. 개개인이 공적인 문제를 침해하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러한 일이 있을 때 그들은 이러한 문제를 심의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인 자들의 논의에 맡겨야 한다. 그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5) 그는 그들에게 그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과 그들이 폭동을 일으킴으로 자신들을 곤경에 몰아 넣었다는 것을 인식시킨다(40절). "만일 우리들이 오늘 일어난 소문에 대하여 책망을 당하지 않는다면 또한 만일 우리의 도시가 치안이 문란하고 반동적인 성이라고 황제의 궁정에 고소되지 않는다면 다행일 것이다. 그리고 만일 quu warranot - 즉 심문 영장(옛날 직권 특권 남용자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영장:역자 주)이 우리들에게 전달되지 않고 또 우리들의 자치권이 박탈되지 않으면 다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재료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일에 대하여 다만 변명밖에 할 수 없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이 먼저 그 일을 일으켰다고 말함으로써 평화를 깨드린 우리 자신들을 정당화시킬 수 없다. 우리는 불리한 입장에 있다. 우리가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더 이상 진전시키지 말도록 하자. 왜냐하면 이 사건은 이미 정도를 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보다도 인간들의 심판을 더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만일 우리가 잠시 후면 하늘과 땅의 주재자이신 재판관에게 우리의 무질서한 삶에 대하여 해명할 것을 생각하고 우리들의 무질서한 기호와 열정에 의해 야기되는 소요를 가라앉히고 폭력 사태를 방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들은 우리들의 양심과 우리들의 가정 안에서 일어난 이 세상에서의 소요에 대하여 하늘 나라에서 책망받을 위험에 처해 있다. 그리고 만일 우리에게 정당한 사유나 그럴 만한 이유가 없다면 우리가 그 책망에 무엇이라고 답변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불법적인 모임이나 그 과열된 분위기 또는 폭력 사태에 대하여 하늘의 재판관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터무니 없는 욕망을 억눌러야 하듯이 이것과 함께 우리들의 성질도 그렇게 억눌러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우리를 심판할 것이기 때문이다"(전 11:9). 그러기에 우리는 사려 깊게 자신을 다스려 "답변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6) 서기장은 그들에게 그들의 폭동적인 집회의 어리석음과 그러한 사건에 필수적으로 뒤따라 일어날 나쁜 결과들을 보여 주고 나서, 그들에게 최대한 빨리 해산하라고 충고한다(41절). 그러므로 본문에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고 하였다. 아마 그는 떠들고 야단하는 사람들을 진정시켜 해산하여 평화롭게 돌아가 그들의 본연의 업무에 종사하라고 종용한 것 같고 또 그들은 그와 같이 행동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1] 하나님이 공공 질서를 보존하기 위해 강압적으로 섭리하시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인간의 심령들을 헤아릴 수 없는 힘으로 지배하신다. 이러므로 이 세상의 질서가 유지되고 마치 바다의 고기들이 강한 놈이 약한 놈을 잡아 검듯이 인간도 그렇게 되지 않도록 조절되는 것이다. 폭동이 일어나면 폭도가 격렬한, 제어할 수 없는 것으로, 또한 길들일 수 없는 야생 동물처럼 변모되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들이 그러한 폭동의 위압 속에서 살지 않을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수긍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당신은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과 만민의 훤화까지 진정하시나이다"라고 기록된 것이다(이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능력의 한가지 예에 불과하다. 시 65:7).

[2] 우리는 얼마나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보호하시는가를 알게 된다. 아마 이 서기장은 바울과는 전혀 친분도 없었으며, 바울이 전한 복음도 전혀 몰랐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그의 사려깊은 인간됨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쓰여졌다. "의로운 자들에게 많은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모든 어려움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신다."

 

19:22 없음.

 

19:23 없음.

 

19:24 없음.

 

19:25 없음.

 

19:26 없음.

 

19:27 없음.

 

19:28 없음.

 

19:29 없음.

 

19:30 없음.

 

19:31 없음.

 

19:32 없음.

 

19:33 없음.

 

19:34 없음.

 

19:35 없음.

 

19:36 없음.

 

19:37 없음.

 

19:38 없음.

 

19:39 없음.

 

19:40 없음.

 

19:41 없음.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28 사도행전 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01장
27 사도행전 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02장
26 사도행전 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03장
25 사도행전 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04장
24 사도행전 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05장
23 사도행전 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06장
22 사도행전 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07장
21 사도행전 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08장
20 사도행전 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09장
19 사도행전 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10장
18 사도행전 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11장
17 사도행전 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12장
16 사도행전 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13장
15 사도행전 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14장
14 사도행전 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15장
13 사도행전 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16장
12 사도행전 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17장
11 사도행전 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18장
» 사도행전 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19장
9 사도행전 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20장
8 사도행전 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21장
7 사도행전 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22장
6 사도행전 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23장
5 사도행전 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24장
4 사도행전 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25장
3 사도행전 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26장
2 사도행전 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27장
1 사도행전 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28장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

All the Bibles, Commentaries and Dictionaries here have their own rights.
All rights are reserved for them, not for us. Thanks! Praise our great God, Christ Jesus!

HANGL Lingua Franca 한글 링구아 프랑카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