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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안디옥에서 야기된 논쟁(사도행전 15:1-5)

비록 한 국가에서나 한 교회에서 어떠한 일들이 매우 순조롭고 유쾌하게 잘 되어간다고 하여서 완전하다고 생각하거나 산처럼 굳건히 서있기 때문에 움직여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이나 인간의 힘으로서는 방어할 수 없는 불행 혹은 다른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것에 대하여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워졌다면 그것은 당시의 안디옥 교회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은혜를 받은 바울도 그들 중 한 사람이지만 사실 그 곳에는 많은 사람의 뛰어난 사역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가장 거룩한 신앙의 교회로 그 교회를 이룩했다. 그러나 바로 이곳에서조차 그들의 평화가 파괴되었고 분열이 야기되었다.

Ⅰ. 그들 사이에 새로운 교회가 발생하여 이러한 분열을 초래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방인들로 하여금 강제적으로 할례와 제의법(祭儀法) 아래에서 개종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1절). 유대교로 개종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인으로 개종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 것은 먼저 그들이 유대교인이 되고 나서 그리스도 신앙으로 개종하곤 하였다.

1. 이러한 것을 주장한 사람들은 "유대로부터 내려 온 어떤 사람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이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생각하며(5절), 혹은 "그리스도 신앙에 복종한" 제사장들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행 6:7). 그들은 유대로부터 왔는데 예루살렘의 사도들로부터 보내진 것처럼 또는 적어도 그들에 의해 후원을 받고 있는 것처럼 가장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전파할 것을 계획하고 안디옥으로 내려왔다. 왜냐하면 안디옥이 이방인들에게 전도하는 자들의 총본부요 이방의 개종자들의 중심적 모임처였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들이 여기서 거점을 확보하기만 한다면 그들의 생각과 사상이 모든 이방인 교회에 퍼지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들은 형제로 친숙해지면서 이방인들에게 교묘히 환심을 샀으며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인 것을 매우 기뻐하는 척하였다. 또한 이방인들의 개종을 축하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그들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하면서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잘 교육받아 온 사람들도 그들이 다시 교육받아서는 안 되는 것, 혹은 잘못된 가르침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2. 그들이 주장하는 입장이나 그들의 논제는 기독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고" 그 의식적 율법의 모든 구례들을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점을 알 수가 있다.

(1) 그리스도 신앙으로 전향한 많은 유대인들은 아직도 계속해서 "율법에 대하여 매우 열성적이었다"(행 21:20)는 사실이다. 그들은 율법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그 권위는 거룩한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이 전통있는 것이라는 점 때문에 귀하게 여겼다. 또한 그들은 율법을 준수하는 가운데 자라왔고 또 이러한 율법을 준수하는 것에 대단한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례에 의하여 그리스도 교회 안에 용납되어진 후에도 그러한 것들을 준수했으며 금지된 고기를 먹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제의적으로 규정된 불결을 면하기 위하여 제의가 규정하는 순결의 규례를 지켰다. 또한 그들은 성전 예배에 참석하거나 유대 민족의 절기를 경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행위는 묵인을 받고 있었다. 왜냐하면 교육에 의한 편견은 일시적으로 극복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몇 해 내에 그러한 잘못은 성전의 파멸에 의해서 혹은 유대고의 전체적인 붕괴에 의해서 실질적으로 수정되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성전 파멸에 의하여 모세가 정한 의식적 규례들은 전혀 수행될 수 없도록 되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된 것은 이들 유대의 개종자들이 자신들이 유대 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방 개종자들에게도 같은 의무를 부과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인간들에게는 자신의 의견이나 행위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규례나 법칙이 되게 하려는 경향과 또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우리의 표준에 의하여 판단하고 또한 우리는 잘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것처럼 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결정지으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 이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메시야라고 믿고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율법에 대한 애착을 깨끗이 제거할 수 없었다. 또한 그들은 메시야가 유대 민족을 위하여 지상의 왕국을 세우고 이 나라를 뛰어나고 승리로운 국가로 만드실 것이라는 식으로 메시야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기하고 있던 방법대로 아직 아무 것도 이루워지지 않고 있었기에 그들은 실망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이방인들 사이에 받아들여지고 있음과 그리고 그들 가운데서 그의 왕국이 세워지기 시작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제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들을 설득하여 그들로 모세의 법을 받아들이게 한다면 다른 차원에서 그들이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희망을 가졌다. 즉 그들의 관점에서 그것들이 획득되어질 것이라고 희망함으로써 그들을 납득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다른 방법으로 이루워지더라도 유대 민족이 기들이 소망하는 대로 뛰어난 민족이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스스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형제들을 강제로 설득하여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게 하자. 그러면 우리들의 신앙과 함께 우리의 지배권이 확장될 것이다. 그리하면 머지 않아 로마의 멍에를 떨쳐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또한 우리 이웃 국가들의 목에다 이러한 멍에를 씌울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로써 우리들이 우리 자신에게 약속했던 대로 메시야의 왕국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 왕국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그들이 그 왕국을 임하게 하기 위하여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려 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러한 생각들은 사실 그리스도 왕국을 파괴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3) 이방인 개종자들에 대한 할례 시행 여부에 관한 논쟁은 이보다 오래 전부터 유대인들 가운데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휘트비(Dr. Whitby) 박사가 요세푸스의 글에서 밝혀낸 것이었다(Antiquit lib. XX. Cap. 2).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해 준다. "아디아벤(Adiabene)의 여왕 헬렌(H디두)dml 아들 이자테스(Izates)가 유대인들의 신앙을 받아들였을 때 아나니아(Ananias)는 할례를 받지 않고 그가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엘르아살(Elezar)은 할례를 시행하지 않은 것은 매우 불신앙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저명한 이방인 두 사람이 요세푸스에게로 도망해 왔을 때(이 사실을 그는 자신의 자서전 속에서 전해 주고 있다)의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해 준다. "유대인들 중 열심당원들은 이 두 사람에게 할례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할례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설득하여 단념케 하였다." 그러한 차이는 편협한 부류와 중도적인 부류 사이에 어느 시대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4) 그들이 할례에 대하여 얼마나 강조를 하였는가 하는 사실은 생각할 만한 문제다. 그들은 "여러분들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 여러분이 만일 할례를 받는다면 메시야 왕국을 위하여 진정 값있는 봉사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여러분과 유대 개종자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최선의 도움이 될 것이며, 여러분이 그렇게 하신다면 우리는 그것을 매우 고맙게 여길 것이다. 그리고 전보다 더욱 여러분과 가깝고 친절하게 사귀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 말로 그치지 않고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을 잇는다. "만일 여러분이 할례를 받지 않는다면 결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이 우리들의 방법이나 생각을 따르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며, 따라서 물론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거만한 협잡군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저주의 협박을 가하여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만약 자신들이 그들에게 믿으라고 한 대로 똑같이 믿지 않거나 그들이 시키는 대로 행하지 않으면 그들은 구원받을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경우가 예칙 불가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절망적이었으므로 격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이같이 유대인들은 그들의 형제들에게 그들이 자기들의 교회에 일원이 되고 그들과 사귐을 나누며 또는 그가 비록 선한 사람이거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일지라도 그들과 같은 예배 의식에 순응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즉 구원 자체만으로써는 그들을 구원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경내로 들어와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유리들은 "너 자신이 그와 같이 행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구원이 보증되어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Ⅱ. 바울과 바나바의 분열의 원인이 될 유대인에게만 구원이 있다는 개념에 대한 반대.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가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놓게 되었음을 주장한다(2절). 이로 인하여 "저희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이러한 가르침에 굴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가르침에 반대해서 공공연하게 항의했고 또한 이의를 제기했다.

1. 그리스도의 충실한 종들로서 그들은 그의 진리가 무시되고 있는 것을 좌시할 수만은 없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율법의 멍에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 주신 것을 알았다.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의 간막이 벽을 허물어뜨리셨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서로 결합시켜 주심도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받는 것만으로써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때에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묵과할 수는 없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의식을 일체 준행함으로써만이 그들이 자기들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만약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방인들을 형제로 간주하지도 않으려 했고 특별히 감사할 이유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결합시키려고 계획하신 그러한 방법은 아니었다. 그러기에 그것은 용납되어질 수 없었다.

2. 이방인 개종자들의 영적인 어버이로서 그들은 그들의 자유가 침식되어 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틀림 없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만으로는 구원을 받기에 충분하지 못하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모세의 법을 지켜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는 소리가 한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소리는 이제 갓 출발한 이방인 개종자들을 매우 실망시키는 소리였다. 또한 그것은 그들의 신앙의 생활에 거침돌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요구는 그들로 하여금 다시 에집트로 되돌아 갈까 하는 유혹을 일으키게 하는 견해였다. 그래서 사도들은 이러한 주장을 반대하고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Ⅲ. 이러한 위험스러운 주장에서 발생할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 또 그것에 관여된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복음에 구멍을 뚫으려고 하는 그러한 무리들을 침묵케 하기 위해서 응급조치가 강구되었다. 안디옥 교회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바울과 바나바 및 안디옥 교회 교인 중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자"고(3절) 결정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결정한 것은 안디옥 교회가 그러한 문제에 관하여 동요되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자유롭게 하신 그 자유를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 문제를 위해 사람을 예루살렘에 보냈다.

1. 왜냐하면 이러한 교리를 가르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왔고 그들은 이곳에서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를 받도록 하라고 사도들로부터 지시를 받은 것처럼 가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예수살렘 교회의 사도들로부터 그러한 지시가 있었는지 알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사람들을 파견한다는 사실은 매우 타당한 일이었다. 이로써 그때까지 사도적 권리로 가장해 오던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말게 되었다. 그들이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보내진 것은"(24절)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들에게 결코 그러한 명령을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2. 또 다른 이유는 유대인들로부터 이러한 교리 가르침 받은 사람들이 만약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장로들이9예루살렘 교회는 그 어느 교회들보다 모세의 율법에 대해 강한 애착을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 교회였다) 할례를 그들에게 앵하는 것에 대하여 반대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면 그러한 교리에 반대하는 그들의 입장을 더욱 확실히 할 수 있으며 또한 그러한 교리에 의해 충격을 받거나 혼동을 일으킬 위험이 적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예루살렘 사도들의 입장을 확실히 파악한다면 예루살렘으로부터 이러한 명령을 받아가지고 온 것처럼 가장하는 선동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또 침묵시키는 데 최선의 방책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3. 또 하나의 이유는 예루살렘의 사도에게 아직까지 완전히 결정되지 못한 그러한 사항을 의논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였기 때문이었다. 사도들이 안디옥 교인들에게는 특별한 사람들로, 또 과오가 조금도 없는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들로 간주되었기에 사도들의 결정이 논쟁을 종결시킬 수 있는 것으로 그들은 간주하였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사도들의 결정이 기대한 만큼의 효과를 지닐 수 없었던 것은 교회의 평화를 해치려는 대단한 적수의 간교함과 악랄함 때문이었다(이러한 적에 대하여 바울은 자주 "유대의 교사" "거짓 사도" "속이는 일군들" 혹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적"이라고 비난하였다).

Ⅳ. 그들의 예루살렘 여행은 이러한 사명을 띠고 있었다(3절). 우리들은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1. 그들이 떠날 때 그들은 우의에 넘치는 전송을 받았다. 그러므로 본문에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았다"(3절)고 하였다. 이러한 전송은 당시 유익한 인물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써 많이 사용되었다. 또한 요한 3서 6절에는 경건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존경어린 전송을 하라고 지시되고 있다. 이같이 교회는 이방인 개종자들의 자유에 대한 이러한 침해에 대항해서 증거하고 또 그러한 사람들과 맞서서 싸우는 이들(바울과 바나바)에게 호의를 표시하였다.

2. 그들은 그들의 여정에서도 선한 일들을 행하였다. 그들은 결코 시간을 헛되어 낭비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도중에 여러 교회를 방문하였다. 그들은 베니게와 사마리아를 지나가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였고" 또한 복음이 그들 사이에서 이룩한 놀라운 성공에 관해 말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였다." 즉 복음의 전파는 커다란 기쁨이 되며 또한 기쁨이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모든 형제들" 곧 그리스도의 가족 안에 있는 믿음이 깊은 형제들은 그들의 가족 안에 식구가 더 많이 탄생했을 때 기뻐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가족이란 그 성원이 늘어난다고 해서 늘어난 사람들의 먹을 것 때문에 걱정해야 하는 그러한 가족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와 하늘 나라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충분한 식량이 있고 또한 거주처가 있는 것이다.

Ⅴ. 예루살렘에서 그들이 받은 진심어린 환영(4절).

1. 그들의 친구들은 그들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그들은 "교회와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았고" 형제로 받아들여졌으며 안디옥 교회의 사신(使信)들로 접견되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모든 사람과 우정의 표시로써 그들을 영접했다.

2. 그들 또한 예루살렘의 그들의 친구들을 기쁨으로 만났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였고" 또한 이방인들 사이에서의 그들의 사역의 성공을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성공을 자신들이 이루었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서 이룩하셨다"고 하였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그들 안에 역사하셨으므로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그들의 청중 가운데 계셔서 그들로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셨으므로 그러한 성과가 있었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가서 씨를 뿌렸고 또 오면 서는 물을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을 자라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라고 여겼다. 하나님을 위해서 쓰여진다는 것 또한 그를 위한 사역자가 된다는 것은 커다란 영광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을 통해 하나님으로 일하실 수 있게 하며 또 그로 하여금 모든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Ⅵ. 예루살렘에 있는 일부 같은 할례주장자들로부터 그들이 직면한 반대(5절). 바나바와 바울이 많은 이방인들의 개종에 대하여 또한 그곳에서의 그리스도 안에서 거둔 커다란 영혼의 결실을 설명하고 그러한 사실에 대하여 그들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축하했을 때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보고를 냉정한 태도로 받아들였다. 이들 바리새인들도 그리스도를 믿었다. 그렇지만 이들 이방인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이들에게 할례를 시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복음에 대하여 많은 이의를 지니고 있는 그러한 사람들은 아직도 복음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복음을 거스려 쌓여진 강한 요새는 하나님을 통해서 무너져야만 한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계실 때 통치자들이나 바리새인들 중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바리새파들 중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다. 그들이 신실한 신앙인들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2. 인간들에게 있어서 갑자기 그들의 편견을 모두 제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이다. 바리새파에 속했던 사마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옛 누룩을 소유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그러하였다고 바울은 증언한다. 그들은 제의법에 대하여 매우 열심이었고 또 이방인들을 잃어하였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는다면 또한 이로써 그들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게 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들의 공동체에 이방인들을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각으로써는 이것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그들의 주장에 굴복하지 않는다면 그들 편에서는 결코 이방인들과 대화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15:2 없음.

 

15:3 없음.

 

15:4 없음.

 

15:5 없음.

 

15:6

예루살렘 회의(사도행전 15:6-21)

본문에서 우리는 회의가 소집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경우는 문서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두로 동의를 얻어서 소집되어졌다. 본문에 보면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였다"(6절)고 전해준다. 사도와 장로들은 각각 별도로 재판을 주재하지 않고 그것을 위해 함께 모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들의 견해를 듣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논의자들의 수가 많으므로 안전하고 또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겠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들은 이 일에 대한 판결을 성급히 내리지 않고 신중하게 검토하였다. 그들은 그 문제에 관하여 이미 입장이 분명히 서 있었지만 그것에 관하여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하였고, 반대하는 무리들이 무엇을 말하는가 듣고자 하였다. 사도들은 그것에 관한 그들의 결정을 지위가 보다 낮은 사역자들이었던 장로들을 제외하고 무슨 일을 결정지으려 하지 않았다. 이같이 그들은 장로들에 대하여 자신을 낮추었고 그러므로 또한 장로들은 사도들을 공경하였다. 은사와 은혜로 아무리 유명하며 또 교회 안에서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라도 그들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들이나 지위가 얕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나타내야만 한다. 왜냐하면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현명하지 않다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욥 32:7, 8). 여기서 우리는 어려운 일이 발생했을 때 교회의 목회자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데 대한 가르침을 얻게 된다. 즉 그들은 회의를 소집하여 서로 조언하고 격려하며 그러므로써 서로의 마음을 알고 상대방을 더욱 굳건하게 하며 또한 일치하여 행동을 취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살펴 볼 수 있다.

Ⅰ. 회의석상에서의 베드로의 연설. 그는 이 회의에서 자신이 어떤 우선권이나 지휘권을 가진 것처럼 조금도 허세를 부리지 않았다. 베드로는 이 경우에 이 집회의 주인공도 아니었으며 의장이나 또한 어떤 중재인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가 회의가 개최되자 처음으로 발언한 사실도 찾아 볼 수 없으며 "많은 논쟁이 진행된 다음에 베드로가 일어섰다." 또한 그가 여러 가지 의견을 수집하여 마지막으로 말한 사실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이 회의의 신실하고 신중하며 열심인 일원일 뿐이었다. 그는 적절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시하였다. 그 의견은 다른 사람의 의견보다 더 우수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첫 번째 사람이었었기 때문이었다. 천성과 반대 두 갈래 사이의 이 문제에 관하여 "많은 변론이 있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의사를 표시할 자유가 주어졌다. 그들 가운데는 바리새파 사람도 참석하고 있었고 그들은 발언권을 얻어 안디옥에서의 그들 자신과 같은 견해를 가진 자기편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였다. 그리고 이들 견해에 대하여 아마도 장로들 중 몇 사람이 답변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사실 그러한 문제들은 결정하기 이전에 충분히 검토되고 토의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찬성과 반대 두 편의 이야기를 들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서" 그 회의에 자신이 직접 이야기를 한다. 그는 후에 야고보가 그렇게 하였듯이(13절) "형제들아"하고 말을 시작하였다.

1. 베드로는 자신이 얼마 전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부르심과 위탁을 받은 사실을 그들에게 상기시켰다. 그는 이미 결정된 지 오랜 문제가 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는데 대하여 이상히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말한다.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이 시작된 그날부터 (a,f h,merw/n avrca,iwn) 오래 전에 하나님이 우리 사도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택하셔서 그로 하여금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는데 내가 바로 그때 택함을 받은 사람이었노라. 이는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그리하신 것이라(7절). 여러분들은 내가 그 문제에 대하여 질문을 받고 모든 사람들이 만족하도록 해명을 하였었다." "그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이 참 생명에로 회개하는 것을 승낙하시는 데 대하여 기뻐하였고 어느 누구도 그러한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고 또 그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도 없었다(11:18 참조). 그렇다면 왜 바울의 입으로 전해진 복음의 말씀을 들은 이방인들은 강제로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말인가? 내 입으로 전해진 복음의 말씀을 들은 이방인들은 강제로 할례를 받아야 뇐다는 말인가? 내 입으로 전해진 복음을 들은 이방인들과 그들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아니면 이방인들의 신앙에의 허입 조건이 먼저 허락된 사람들 보다 어째서 이제 와서 더욱 어려워져야 한다는 말인가?"라고 하였다.

2. 베드로는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베드로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설교하는 데 얼마나 놀랍게 하나님이 그를 붙들어 주셨는가하는 점과 그리고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 들이는 데 얼마나 진지하였는가를 그들에게 상기시켰다(8절). 그러므로 그는 "마음을 아시며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데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 그들에게 성령을 내려 주시므로 그들도 그의 백성임을 증명하셨도다. 그는 우리 사도들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은총과 위안뿐만 아니라 특별한 성령의 기적의 은사까지도 선물로 주신 것이다"라고 그는 말한다(11:15-17 참조). "주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하자." 왜냐하면 그는 인간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신다." 그리고 그것에 의하여 그들이 그의 백성임을 증거하신다. 따라서 우리들은 약속의 성령의 안치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자라고 불리워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그와 교제를 나눌 특권을 얻은 자들로서 환영할 것을 분부하셨다. 그것은 물론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고 율법을 지키라는 요구 없이 받아들이라는 명령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그러한 조건 없이 우리와 결합하도록 허락해야만 하는 것이다"고 그는 말한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저희나 우리를 분간치 아니하셨도다(9절). 그러기에 그들이 비록 이방인일지라도 유대인들과 동등하게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리고 은혜의 보좌에 환영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가 마치 그들보다 더 거룩한 것처럼 그들을 멀리하려고 하는 것인가?"라고 말한다(사 65:5).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받아들이는 데 하나님이 정하신 조건 외에 우리들 자신의 어떤 조건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롬 14:3). 이제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믿음으로 저희의 마음을 깨끗이 하셨으므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데 적합한 자들이 되었다. 이 믿음은 하나님 자신이 그들 가운데서 역사하여 일으키신 것이요 그러므로 그는 말한다. "그들 안에 믿음으로 역사하신 것이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어째서 율법에 의해 우리에게 부과된 의식적 성결에 그들이 순복하지 않는 한 우리와 교제를 나눌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라고 말한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믿음에 의해서만 기억이 깨끗해진다는 사실이다." 믿음에 의해서만 우리는 의롭다함을 얻으며 양심이 깨끗하여지고, 뿐만 아니라 믿음에 의해 성결의 역사로 시작되고 초 추진되는 것이다.

(2) 믿음으로 저희의 마음이 깨끗해진 사람들은 마음이 서로 닮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설혹 그들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것이 문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성도들의 신앙은 동일하게 보배로우며 똑같이 귀중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벧후 1:1). 그리고 이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결합된 사람들은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결합된 자로 여겨야 한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별일지라도 신앙 안에서 삼키워져 구별이 없어지는 것이다.

3. 베드로는 이방인들을 모세의 율법의 의무 아래 굴종시키려고 하는 그러한 교사들(사실 그러한 사람 중 몇 사람이 그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을 날카롭게 꾸짖는다(10절). 이 문제는 너무나 분명한 것이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온건한 말로써 참을성있게 얘기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의 백성들로 택하셨는데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제자들 곧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들과 그들의 자녀의 목에 멍에를 메어 두려느냐? 그 멍에는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가 아니냐?"고 말한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말함으로써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려고 한다.

(1) 그들은 하나님께 대적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려고 하였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지시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은 성령의 은혜로운 선물에 의해 하나님께서 이미 결정하신 문제를 야기시킴으로써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다. 너희들은 사실 다음과 같은 것을 하나님께 대하여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가 무엇을 하셨는지 알고 있는가? 그러한 일을 하나님이 진심으로 하신 것인가? 하나님이 제 정신으로 그러한 행위를 하신 것인가?"라고 말이다. "너희들은 하나님께서 다만 유대인만을 위하여 계획한 율법을 이제와서 그 율법의 마지막 때에 이방인들을 율법의 의무 아래 굴복시킴으로 너희들을 기쁘게 하고 이로써 하나님을 시험하려고 하는 것인가?" 하나님이 결코 정하시지 않은 규칙을 마음대로 정하며 그러한 규정을 따르지 않으면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구원이 그들 자신들의 척도에 의하여 규정될 수 있듯이 여기는 자들이다.

(2) 그들은 제자들에게 대하여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한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셨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한 사람들을 다시 노예로 만들려고 하고있는 것이다. 느헤미야 5장 8절을 참조하라. 제의법은 무거운 멍에였다. 그들과 그의 조상들도 그 율법을 견디기에 매우 힘들어 하였다. 그것은 그 제도가 너무 많으며 너무 다양하고 너무 과장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기를 가려서 먹어야 하는 것만 해도 무거운 멍에였다. 그것이 생활을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은 끝없는 의구심으로 양심을 괴롭혔다. 그러한 문제는 피치 못하게 무덤이나 시체를 만져야 하는 경우에도 야기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람을 불결하게 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더러움을 깨끗하게 하는 수많은 규칙들이 또한 무거운 짐이 되었다. 바로 이러한 멍에로부터 우리를 쉬게 하려고 그리스도가 온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러한 멍에 아래에서 근심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부르셔서 그의 가볍고 쉬운 멍에를 메게 한 것이다. 이제 이러한 교사들이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에게서 조차 벗겨 주신 멍에를 이방인들의 목에 씌우려고 한 것은 이방인들에게 가할 수 있는 최대한의 해독을 끼치는 것이었다.

4. 유대 교사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할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데 대하여 베드로는 구원은 전혀 이런 것과 상관이 없는 것으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순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음을 보여 준다(11절). 그는 본문에서 pwt eu,men swqh,nai - 즉 우리가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고 말한다. 또 그는 우리가 저희와 동일한 방법으로 구원받을 것을 믿는다. kaqV on tro,pon ka,kei/uoi - 즉 우리들 할례받은 사람들이 구원을 믿듯이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도 구원을 믿는다. 그리고 우리들이 받은 할례가 우리들에게 어떤 특권이 되지 않듯이 그들의 할례받지 않음 또한 그들에게 어떤 불리한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은혜에만 의지해야 하며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믿음에 의한 은혜만을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는 길이 있고 또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 다른 길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다"(갈 5:6). 그렇다면 어째서 그 사실이 그렇지도 않은데 이방인들에게 그들의 구원에 필요하다고 모세의 법을 짐지워야 하는 것인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우리들의 구원이나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Ⅱ. 바나바와 바울이 이 본문에 회의에서 발언한 사실이 소개됨. 그들의 얘기를 본문에 상술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만 전 장에서 기록된 사실들. 즉 "하나님이 그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를" 상술하였을 뿐이었기 때문이었다(12절). 이것은 그들이 안디옥 교회에서도 말한 것으로(14:27) 예루살렘으로 오는 도중에 그들의 형제들에게도 말하였으며(15:3) 그리고 다시 회의에서도 말하였다. 사실 이 회의에서 그러한 것을 전한 사실은 매우 적절했다. 원래 문제를 일으킨 자들의 의도는 이방인들이 모세의 율법에 복종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이러한 사실에 반대하여 바울과 바나바는 일어났던 일들을 명백하게 말함으로 하나님이 율법 없이 순수한 복음만을 그들에게 설교할 것을 인정하셨다는 것과 그러므로 이제 이방인들을 율법 아래 억압하려는 것은 하나님이 이룩한 일을 파괴시키는 것임을 보여 주려 하였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하여 보자.

1. 그들이 설명한 내용.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더불어 이방인들 사이에서 이룩하신 영광스러운 기적과 기사와 이적"을 그들에게 선포했고 자연계에 기적을 보이심으로 그들의 설교를 하나님께서 확증해 주신 것과 또한 은혜의 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이룩하신 기적적인 사실들에 의하여 그들의 복음전파에 놀라운 성과가 있게 한 사실을 단계적으로 설명하였다. 이같이 하여 유대 교사들이 저주한 사도들을 하나님이 축복하셨고 그들이 비난한 이방인들을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정당한 이유를 변호해 주시는데 또 다른 어떤 옹호가 필요하단 말인가? 전후 사정을 고려해 볼 때 이방인들의 개종은 기적 못지 않은 하나의 놀라운 일이었다. 이제 이방인들이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면 그들이 어찌하여 율법의 행위로 인하여 곤란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인가? (갈 3:2 참조).

2. 회의 참석자들이 그들의 말에 대한 주의 깊은 경청. "온 무리가" (비록 투표권은 없으나 회의의 진행 결과를 들으려고 모였던 모든 사람을 포함하여) "조용히 하고 바울과 바나바의 말을 경청했다." 그들은 그곳에 제출된 모든 쟁점들에 대하여서 보다 바울과 바나바의 말을 더 주의 깊이 들은 것같이 보인다. 자연 과학이나 의학에서 실험이 제일 신빙성 있는 것이며 법률에서는 판례가 가장 신빙성 있는 것이듯이 하나님의 일들 가운데서 가장 은혜롭게 여겨지는 것은 성령의 역사에 대한 설명인 것이다. 이 성령의 역사에 대한 설명을 군중들은 조용히 하고 들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무엇을 행하셨는가를 말해 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경청할 줄 알아야 한다(시 66:16).

Ⅲ. 회의에서 행한 야고보의 연설. 야고보는 전에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으나 바울과 바나바를 저지하지 않고 연설을 하게 하였다. 그것은 그곳에 모인 무리들을 교화시키기 위해서였으며 그러한 것을 일선에서 일하는 훌륭한 사역자들로부터 직접 들어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말을 미치매" 야고보가 일어났다. 그들이 차례로 일어나 말한 것은 "너희가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에 일치하는 것이었다(고전 14:31).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야고보는 바울과 바나바로 하여금 그들이 말해야 할 것들을 말하게 하고 그리고 나서 자신에게 말할 기회를 달라고 신청했다. 여러 사역자들의 말을 듣는 것은 하나의 진실이 배척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다른 진리를 고수하기 위해서도 유용한 것이다.

1. 야고보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연설을 시작한다.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당신들은 인간이다. 그러므로 듣고 이치에 맞는 판단을 내릴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또한 여러분들은 나의 형제들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가식없는 것으로 믿고 들어 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모두 다 형제들로서 이 일로 그리스도를 불명예스럽게 하거나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도록 관심을 가져야 한다."

2. 야고보는 이방인들의 개종에 관하여 행한 베드로의 이야기를 언급한다(14절). "시몬(즉 시몬 베드로)이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고하고 또 너희에게 상세히 말하였도다. 그들은 바로 고넬료와 그의 친구들로서 이방인 가운데 첫 열매이다. 그리고 복음이 처음으로 전파되기 시작했을 때 어떻게 이방인들도 즉시 와서 그 혜택을 나누도록 초대되었는지를 고하였도다." 야고보는 본문에서 다음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1) 그러한 이방인 개종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방인들을 방문한 것은" 하나님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친절이 넘치는 방문이었다. 그들은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면 결코 하나님을 찾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부터 먼저 그들을 깨우치셨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아문하고 속죄하였을 뿐만 아니라" loammi - 즉 그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찾아가서 그들을 속죄해 주셨다.

(2) 하나님의 영광이 그러한 모든 일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를 영광스럽게 하고 그에 의하여 영화롭게 될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 하신 것이었다. 옛날에는 유대인을 택하셨으나 이제는 이방인들을 택하셔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칭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다"(렘 13:11). 그러므로 모든 민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여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존귀하게 되고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서 영화롭게 되시도록 하자.

3. 야고보는 이방 전도의 정당성을 규약에서 인용함으로써 확증한다. 그는 이방인들의 부르심을 베드로처럼 환상에 이하여 증명할 수 없었으며 바울과 바나바가 증언한 것처럼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기적적인 사실로써 증명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규약에 이미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것이 성취되어야만 한다고 증명하고자 하였다(15절).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서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구약 예언자들이 많든 적든 이방인들의 부르심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모세조차도 이것에 대하여 언급하였다(롬 10:19). 또한 메시야는 "이방을 비추는 빛"(눅 2:32)이어야 한다는 것을 경건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기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 사실에 대한 좀 더 분명한 예언을 포기하고 좀 애매하게 보이는 것을 선정한다. 그는 아모스 9장 11, 12에 기록을 인용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메시야 왕국의 건설(16절). 이에 대하여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라고 말해 준다. 그 계약은 다윗과 그의 자손들에게 맺어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윗의 집과 가족들을 그의 장막이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다윗은 처음에는 양치기로 시작하였기에 천막에서 살았으며 이제 나라가 망한 지금 당당한 왕궁이었었던 그의 집은 초라하고 더러운 장막이 되어 그 초기의 시작하던 때의 초라함으로 환원되었던 것이다. 이 장막은 무너지고 "황폐해졌다." 다윗가에서 왕위가 여러 세대 동안 계속된 것은 아니었다. "왕홀은 유대로부터 떠났고" 왕족은 영사의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결국 그 흔적을 찾을 수조차 없게 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돌아와서 그것을 다시 세우시겠다고 한 것이다. 황폐된 그것으로부터, 그 잿더미로부터 불사조로 불러 일으키시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것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즉 주 예수께서 다윗의 가족 가운데서 일어나시고 "그가 영원히 야곱이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다"는 약속에 따라 "그에게 주어진 조상 다윗의 왕좌에 앉으신 것이다"(눅 1:32, 33).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윗의 장막이 다시 일으켜 세워질 때, 오래지 않아 그 나머지 모든 것들은 멸절되고 뿌리 뽑힐 것이다. 유대인들의 나라도 마찬가지이며 그들의 모든 족보도 파괴될 것이다. 이후로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다윗의 장막으로 불리울 것이다. 이 장막(교회)이 때로는 낮아지고 아주 황폐해진 것으로 보일 때도 있겠으나 그것은 다시 세워질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 대해 쇠퇴해진 관심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것은 "내던져진다고 하여도 파괴되지 않을 것이다." 메마른 해골들일지라도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2) 유대의 멸망의 결과로 이방인들이 불리움을 받을 것이다(17절). 그러므로 본문에 "이는 그 남은 사람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다윗의 장막의 독점권을 가지고있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보이는 교회의 경계 밖에 지금까지 남아 있던 그러한 사람들에게도 주를 찾게 하려는 서이다. 그들은 이제 다윗 장막의 재정리에 따라 "주님을 찾을 수 있게 되었고 그리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얻을 수 있는가 물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다윗의 장막이 이룩될 때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할 것이다"(호 3:5; 렘 30:9) 하였다. 아모스서를 보면 "그때 이스라엘로 에돔의 남은 자들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모든 이방인들을 "에돔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70인 역에서는 "에돔"이라는 특별한 언급을 삭제하고 그냥 본문에 나와 있는 대로 "남은 사람들로 찾게 하며"(야고보 기자가 여기서 70인 역에 없는 "주"를 덧붙이었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은 모든 이방인들 혹은 이교도들로 하여금 찾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유대인들이 수많은 세대 동안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어서 그 남은 사람들은 무시되고 있는 것처럼 보여졌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들에게 눈을 돌리시고 이방인들에 의해서도 그의 이름이 불리워지게 하시었다. 그들 가운데 그의 이름이 선포되고 그들이 그의 이름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이다. 이방인들이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컬을 것이며 하나님도 그들을 그렇게 부를 것이다. 양쪽이 모두 일치하여 하나가 되었으므로 "그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은 자들"이라고 본문에 기록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약속이 때가 되면 성취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기대하였다. 그런데 지금 이 약속의 성취가 시작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일을 행하시고 또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사도는 구약 본문과는 달리 "이 일을 알게 하시는"을 덧붙여 "이 일을 알게 하시는 주가 말씀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 뜻은 "그가 그 일을 하시기를 작정하셨기 때문"에 말씀하셨고 또 그가 하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행하시리라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말과 행동이 각각 다르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같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으로 결합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전에 행하여진 모든 것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행하여진 것이었다.

[1] 이 일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임이 말씀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는 여호와의 행하심이라" 하였다(암 9:12). 하나님이 어떠한 도구를 들어 그의 뜻을 이루시든지 그 행하심의 장본인은 도구가 아닌 바로 하나님이신 것이다.

[2] 이방인이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며 매우 즐거워하시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인의 하나님인 것과 같이 이방인의 하나님이며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풍성한 자비를 베푸시는 것"을 명예로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4. 야고보는 당면 문제를 하나님의 목적과 뜻에로 귀착시킨다(18절).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서 이 모든 일은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였다(역주:본문을 역자가 사역한 것임). "하나님은 여러 세대 이전에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방인들을 부르실 것을 예언했을 뿐만 아니라(그러므로 이것이 우리들에게 어떤 놀라운 일이나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의 영원한 계획 속에서 그것을 미리 아시고 정하고 계셨었다. 그 섭리는 물론 현명한 것이며 뒤바뀔 수 없이 확고한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이 "태초부터 그가 정하신 것"이라는 말씀은 육의 세상이나 영적인 나라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의 모든 역사에 대한 우수한 금언이다. 즉 이 말씀은 그가 이 모든 일을 아신 것이 그가 일을 시작하신 처음 또는(다른 성경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땅의 기초를 놓기 전," 그러므로 영원부터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어떠한 일을 하시든 간에 그는 미리 그 일을 계획하시고 하시기로 결정하신 후에 착수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하시는 데 그의 뜻대로 하실 뿐만 아니라 "깊은 생각에 따라" 행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그가 결정한 일을 할 뿐만 아니라(시 135:6) (그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상의 일을 하신다. 인간들의 목적이나 의도는 자주 좌절되며 척도도 또한 파괴된다.) 그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미리 결정하신다. 그가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 무슨 말을 할지라도 "그 자신은 그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를 아신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의 전망을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그때 그때의 형편에 따라" 행하는 것이 대부분이다(삼상 10:7). 우리는 이러 이러한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 일이 완결되기 전까지는 그 일에 대하여 어떻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모든 일을 알고 계신다." 이 모든 사실은("진리의 책"이라 불리우는) 그의 책 속에 차례로 기록되어 있는데 수정되거나 삽입할 것이 없는 완벽한 것이다(시 40:7). 그리고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어떠한 착오나 변경됨도 없이 그의 섭리가 정확히 일치되었음이 입증될 것이다. 우리들은 가련하게도 근시안적인 피조물들이다. 가장 현명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예견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사소한 부분적인 것이며 그것마저도 전혀 확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들이 아무리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있다고 해도 신의 선견 속에는 무모한 확실성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위안이 된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일을 미리 알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자.

5. 야고보는 이방인들과 상관되어서 야기되고 있는 사건에 대하여 어떻게 해결되어야 할지 그의 의견을 말한다(19절). 그는 본문에서 egw nrinw - 즉 나의 판단으로는, 내 견해나 판단으로는 이라고 말한다. 그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어떤 권위를 가진 것으로써가 아니라 조언하는 자의 입장에 서서 말한다.

(1)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나 제의법의 준수가 결코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을 그들에게 권유를 할 필요조차도 없는 것이다. "많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게로 돌아왔다. 그러나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되어지기를 희망한다. 나는 이제 그들을 대함에 있어서 가능한 한 최선의 친절로 할 것이며 그들에게 어떤 어려움을 겪게 하거나 실망하지 않도록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mh,parenoclei/n- 즉 그들에게 어떤 괴로움을 주거나 어려움을 주지 않겠고 또한 그들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게 하거나 거리낌이 되거나 그들을 당황하게 할 아무 것도 제시하지 않겠다. "불확실한 문제에 대한 논쟁 때문에 초심자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거나 그들을 동요시키지 않도록 깊은 배려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수용 태세가 되어 있는 일깨워진 양심에게 신앙의 본질을 깊이 심어 주도록 하자. 이러한 진리는 그들을 만족하게 하고 평안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낯선 것들이나 우연한 것들이 그들에게 어떤 압박을 가하지 못하도록 하자. 그러한 것들은 그들을 괴롭힐 뿐일 것이다. 그곳에 가기 위하여 그들이 훈련을 받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곳도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그들을 괴롭힐 뿐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정의와 평화이며 성령 안에서의 기쁨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나라가 어떠한 사람에게도 괴로움을 주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을 가장 자극시킬 수 있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서는 이방인들이 양보를 하는 것이 좋다고 그는 보았다. 왜냐하면 할례를 받고 모든 율법을 지키라고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요구하지 않는 한 유대인들의 비위를 거슬려서 그들로 하여금 이방인들을 충동하는 행동을 하게 하고 그들을 격분케 할 수단을 강구하도록 만들 필요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일 작는 것을 그들이 양보해서 유대인들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공연히 그것까지 어기어 그들을 자극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야고보는 이방인 개종자들이 다음의 것만을 조심하면 유대인들이 만족스러워할 것이라고 보았다.

[1]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을 이방인 개종자들이 금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두 가지 다 나쁜 행위로 언제나 그것들은 금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특별하고 명백하게 구 두 악행을 금하라고 써보내는 것은 유대인들을 매우 흡족하게 할 것이었다(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이러한 문제 때문에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방인 개종자들이 이러한 죄악을 범하게 되지 않기를 바랐다). 사도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방인들에게 편지로나 설교로써 다음과 같은 것에 대한 경고를 조심스럽게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첫째, "우상의 더러운 것"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그들은 우상 숭배 예식에 참여하여 우상 숭배자들과 사귀지 말 것과 특별히 그들의 희생을 드리는 축제에 참여하여 그들과 교제하지 말 것이 경고되었다(고전 10:14; 고후 6:14).

둘째,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에 대하여 경고하였다(고전 6:9-15; 엡 5:3 참조). 그러나 그들이 좋아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 나쁜 점만 들추어 내려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개종을 한 후에도 그들 사이에 이러한 일들이 자행된다고 지적하였고, 이방인의 사도들이 그것을 묵인하고 있다고 공격하였다. 이제 이러한 제안과 공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또한 그러한 중상모략의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서 야보고는 이들 이방인들이 그들의 사역자들로부터 개별적으로 충고를 받았음을 알면서도 이방인들이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에 대하여" 공적으로 경고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일에 있어서 그들은 신중하여야만 하였고 이 두 가지 악의 모든 모양도 피해야만 하였다. 또한 그것은 특별히 유대인들을 선동시키는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2] "목을 졸라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는 것을" 이방인들이 지키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는 전자와 같이 그 자체로써는 악한 것은 아니고 언제나 금하도록 계획되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 법은 모세의 율법 이전에 노아에게 주어진 계율에 의하여 금해진 것이었었다(창 9:4). 유대인들은 그러한 것들을 굉장히 싫어하였으며 그러한 것들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자들을 모두 싫어하였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을 자극시키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이방인 개종자들로 하여금 그들 스스로 그러한 것들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절제하라고 하였다(고전 8:9, 13). 이같이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6. 야고보는 그의 조언의 이유를 말한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존경을 표시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의무적으로 감당해야만 하는 제의법의 거룩한 명령에 오랫 동안 길들여져 왔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금방 그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었다(21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었기 때문이었다(모세의 율법의 상당량은 제의법에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말한다. 당신들은 그들이 모세의 율법을 매우 존경하고 있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신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1) 모세가 계속해서 그들에게 가르쳐졌고 또한 그들에게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을 기억하라"(말 4:4)는 것이 요청되었다. 우리에게 기록으로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선포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성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 말씀들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데 그들에게 도움을 줄 사역자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2) "모세의 글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그들이 모이는 장소인 회당과 그 시간인 안식일에 엄숙한 신앙적 절차를 따라 읽혀졌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모세의 법을 존경하도록 훈련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 법의 준수는 그들 신앙의 한 부분인 것이다."

(3) "이것은 예전부터 행하여져 오던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 조상들로부터 모세에 대해 존경할 것을 물려 받았다. 그것은 그들에게 역사 깊은 것이었다."

(4) "이것은 유대인들이 있는 곳이면 어느 성에서나 행해져 왔었다. 그러므로 그들 중에 누구나 부과된 율법의 압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따라서 복음이 우리들을 이러한 것들로부터 자유하게 하였지만 그럼에도 아직 그들이 그 의식법을 결별하지 못하고 있더라도 그것을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과 그들 앞서 있었던 그들의 조상들이 이것을 신앙함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아왔었고 또 가르친 것들을 갑자기 그것은 필요없고 중요치 않은 것이라고 설득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그러므로 그들에게 시간적 여유를 주어야 하며 그들에게 절충할 방법을 모색하도록 해야 한다. 그들은 잠시 그러한 의식법을 견디어야 하며 점차 거기서 빠져 나오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유리는 우리들의 복음이 자유를 배반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그들과 조화를 유지해야만 한다." 이같이 야고보는 중재의 정신을 보여 준다. 중재의 전신이란 유대인과 이방인 각자에게 어떤 거스림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하는 것이며 가능한 한 양자를 다 즐겁게 하며 격분하지 않게 노력하는 태도를 말한다. 우리들은 만일 사람들이 그들의 조상들로부터 그들에게 전승되어 왔고 또 그것들을 신성한 것이라고 그들이 교육을 받아 온 관습에 깊이 젖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이상히 여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러한 경우에는 엄격함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너그럽게 이해하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15:7 없음.

 

15:8 없음.

 

15:9 없음.

 

15:10 없음.

 

15:11 없음.

 

15:12 없음.

 

15:13 없음.

 

15:14 없음.

 

15:15 없음.

 

15:16 없음.

 

15:17 없음.

 

15:18 없음.

 

15:19 없음.

 

15:20 없음.

 

15:21 없음.

 

15:22

예루살렘 회의의 결의 내용(사도행전 15:22-35)

우리는 본문에서 이방인들에게 제의법을 부과하는 것에 관하여 예루살렘에서 개최되었던 회의의 결과를 보게된다. 그러나 사실은 여기에 기록된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언급되었음이 틀림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결국 이 문제로 그 회의의 의장격인 야고보가 얘기하게 되었고 야고보는 조언은 널리 받아들여져 "만장일치로"(nemine contradicente) 통과되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결정 사항을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들의 사역자들에 의해 편지가 발송되었다. 이 서신은 이방인 개종자들도 거짓 교사들에게 저항할 수 있는 강력한 근거가 되었다.

Ⅰ. 이 사명을 띠고 파송될 대표자들의 선택.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가기로 결정되었다. 그들이 대포자들 외에 바울과 바나바를 딸려 보낸 것은 이들 대표자들의 신실성을 의심해서거나 이 편지를 맡기기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라거나 그들이 보내는 이들 대표들이 편지의 내용을 바꾸어 놓을까 염려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 성실성을 믿을 수 있는 이 사람들에 관하여 전혀 그러한 생각을 품지 않았다. 그러나,

1. 그들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는 것을 옳다고 생각하였다(22절). 이것은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일치하여 결정한 것이었다. 그들은 여행 비용을 각자 담당한 것으로 보여진다(고전 9:7). 그들이 그 대표들을 보낸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내포한다.

(1) 지매 교회인 안디옥 교회에 대한 그들의 존경을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대표자를 보냄으로 그들은 안디옥 교회를 그들과 같은 위치에 있는 교회로써 취급하고 있음을 표시하였고 또한 안디옥 교회가 처하고 있는 상황을 더 확실히 알기를 그들이 갈망하고 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2) 바울과 바나바에게 이러한 뛰어난 사람들을 그들의 동무로 하여 파송함으로 바울과 바나바를 격려하고 그들의 귀향을 보다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였다(그들은 도보를 여행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격언에 이르기를 amicus pro veniculo - 즉 마차를 타고 가는 것보다 길 동무와 함께 걷는 것이 더욱 좋다고 하였다.

(3) 그들이 가지고 가는 편지에 공신력을 더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위엄있는 사절들처럼 보일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 편지에 대하여 일부의 반대가 있을 것이 예상되었으므로 메시지가 공신력이 있는 것임을 더욱 나타낼 필요가 있었다.

(4) "성도들의 친교"를 유지하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교회와 사역자들 사이의 친교를 이룩하기 위해서였고 또한 "그들의 수효가 많더라도 결국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2. 그들이 보낸 사람들은 편지를 전달하는 일이나 하고 또 사도들에게서 그 편지를 받았다는 것을 입증해야 될 만큼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선택된 사람들이었으며 형제들 가운데 우두머리가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특별한 은총과 은혜를 받는 유익한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회의에서 하는 일은 그 형제들 중 뛰어난 사람을 지명하여 그들에게 교회의 사절단으로서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표는 바로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이다(유다는 아마 행 1:23 에서 사도직을 위해 지명한 바 있는 바사바라 하는 요셉의 형제일 것이다). 이들이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지니고 있는 위치는 유대로부터 온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정도의 위치였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가는 메시지에 경의를 더하게 할 수 있는 그러한 인물들이었다.

Ⅱ. 이방 교회들에게 보내지게 될 서신의 작성. 이것은 희랍 서신으로써 이 문제에 관한 예루살렘 회의의 견해를 통보하는 것이 주 내용을 이루고 있었다.

1. 본문에는 이 교령(敎令)의 머리말이 매우 정중하고 공손하게 표현되고 있다(23절). 여기서 어떤 건방짐이나 주제 넘음을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1) 사도들이 "장로들과 형제들"과 연명으로 서두의 인사를 하였다는 것은 사도들의 겸손을 나타내 준다(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 사도들은 언제나 그들이 조언을 해 주는 평신도들과 연명으로 문안을 하였다. 교회 안에서 그들만치 군주적인 권위와 힘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없다고 하더라도9역주 : 로마 카톨릭의 교황제를 말함) 또한 그들이 받은 그러한 위임을 받은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교령의 서두가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대리자이고 교회의 모든 목자들 중의 목자인 우리 사도들"이요, 모든 신앙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판단자인 "우리"라는 식으로 시작되어서는 안 된다(교황이 스스로 그렇게 칭한다). 다만 본문의 경우처럼 그들의 직위순에 의거하여 "사도와 장로와 형제들"이라고 서두를 꺼내야 하는 것이다. 이로써 그들은 주님이 그들에게 가르친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그런데 교훈을 기억했음을 알 수 있다(마 23:8).

(2) 그들의 머리말은 그들의 서신을 보내는 교회에 대한 그들의 존경심을 나타내 보여 준다. 그들은 "문안을 한다. 그리고 그들의 건강과 행복과 기쁨을 기원한다." 또한 그들은 "이방인 형제들"로 부름으로 그들의 교회 내의 허입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친교의 오른손을 내민다. "여러분이 이방인들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형제들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만났으며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안에 있는 많은 형제들 중 첫 열매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 "이방인은 동료 상속권자들이고 같은 몸의 지체이다." 그들은 호의를 받고 격려를 받았으며, 형제로 불리워진다.

2. 유대교 교사들에 대하여 정당하고 강력한 비난이 퍼부어진다(24절).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아가서 너희를 괴롭게 하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러한 것을 듣고 매우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이 편지를 쓰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을 거짓 교사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즉 우리가 그들에게 그러한 임무를 위탁한 일도 없고 또 그들이 거짓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도 알리려는 것이다."

(1) 그들이 이방인들에게 제의법을 수행하게 하는 것이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의 가르침이었다고 가장하므로 그들은 예루살렘 사도들과 사역자들에게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다. 사도들은 결코 그러한 표식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편지의 내용은 이러한 뜻이다. "그들이 우리들로부터 왔다고 하는데 만일 그들이 우리들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로서 그들이 여행을 하기로 마음을 작정하였다면 우리들은 아마 그들에게 추천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로 당신들에게 모세의 법을 강요하기 위해서 우리가 그들에게 그러한 명령을 내린 것은 결코 없고 또한 그러한 것을 가르치지도 않았으며, 또 그들에게 우리들의 이름을 내세워 그것을 전하라고 한 일도 없다." 사도들이 명하지도 또 추천하지도 않은 가르침과 행위들을 제거하기 위해 사도적인 권위에 호소하는 것은 새로운 사실은 아니었다.

(2) 거짓 교사들은 "너희들은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준수해야만 한다"고 말함으로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커다란 피해를 입혔다.

[1] 그들의 말은 이방인 개종자들을 당혹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로여러분들을 괴롭혔도다. 즉 그들은 여러분에게 불안과 괴로움을 야기시키었다.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당신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자들을 신뢰하여 왔다. 그런데 이제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당신들에게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당황하고 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 말 때문에 스스로 함정에 빠져들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당신들을 말로써 괴롭힌다. 그들은 소리에 불과하고 본체는 없는 단순한 말로 그리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교회는 자신들의 말에 귀 기울이기는 좋아하는 거만한 자들이 뱉는 말에 의하여 얼마나 괴로움을 당하여 왔던가!

[2] 그들의 말은 이방인 개종자들을 위험에 몰아 넣었다. 거짓 교사들은 이방인 개종자들의 영혼을 파괴시켰고 혼돈케 하였으며 그들이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허물어뜨렸다. 그들은 아무 소용도 없는 할례와 모세법의 필요성을 개종자들 머리에 가득 채움으로 이방인 개종자들이 순수한 기독교를 추구하고 그 일에 전념하는 것을 차단하였다.

3. 이 서신을 갖고 가는 전달자들에 대한 영예로운 추천이 주어진다.

(1) 바울과 바나바에 대한 추천. 유대 교사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그들의 일을 어중간하게 만든다고 배척하고 책망하였다. 왜냐하면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 개종자들을 유대교인으로 전향시키지 않고 다만 기독교도만 개종시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울과 바나바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직접 살펴 보자.

[1] "그들은 우리에게 매우 귀중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리의 사랑하는 바울과 바나바이다. 그들은 우리들이 귀히 여기고 호의를 가졌으며 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한다. 때때로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의 동료 또는 하급자들에 대한 위로의 말은 그리스도의 멸시받는 진리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진리를 위해 경멸받는 구 수호자들과 설교자들을 고무시키고 그 진리의 대적자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대단히 유익하다.

[2] "그들은 자발적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가운데 유명하게 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들은 그들을 잘 받들어야 한다. 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것이다(26절). 그러므로 갑절의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으며, 그들 스스로 어떤 세속적인 이권을 추구한다고 혐의를 두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의 모든 것을 희생하였으며 근면한 봉사자로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가장 위험스러운 일에도 참여하였다"고 말한다. 이같은 신실한 고백자들이 불신실한 설교자들이라는 얘기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할례를 강요한 사람들은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였다(갈 6:12, 13). 할례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박해를 받게 될 것을 알았다. 이드 두 부류의 사람들 중 과연 누구를 옳다고 볼 수 있겠는가?

(2) 유다와 실라에 대한 추천. "그들은 택하여진 사람들이다(25절). 그들은 예루살렘 회의에 참여하여 모든 논쟁을 청취한 사람들이며 그 일로 완전 무결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일을 말로도 전할 사람들이다"(27절)라고 말한다. 편지를 보고 또 입으로 직접 전해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유익한 것인가? 즉 그것을 읽으면서 또 듣는 유익이 있는 것이다. 사도들은 그들에게 편지의 전달자들이 사도들 자신의 판결과 근거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전달자들은 그 결정의 확실성을 알리기 위해 사도들의 편지를 내놓을 것이다.

4. 이방인 개종자들이 질문한 사실에 대하여 본문에 그 지시가 주어지고 있다.

(1) 지시의 내용. 이것은 야고보의 제안에 따른 것으로써 유대인들을 자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1] 그들은 그들이 우상에 희생 제물로 바쳐진 것으로 알고 있는 고기는 어떠한 것도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비록 그것이 자체로는 깨끗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더럽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금지령은 후에 부분적으로 폐기된다. 왜냐하면 시장에서 파는 것은 먹도록 그들에게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비록 우상의 제물로 바쳐진 것이라 할지라도 친구의 식탁에서 대접받는 것은 그것에 의해서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될 경우를 제외하고는 즉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이 기독교를 타락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약한 그리스도인들을 낙심시키거나 혹은 악한 이교도들이 이것을 보고 그들의 우상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위험이 있을 때는 예외로 하고는 허용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위와 같은 경우에는 자제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고전 10:25 이하 참조). 이것은 우리에게 교훈적인 선례가 된다.

[2] "그들은 피를 먹어도 안 되고"마셔도 안 되었다. 또한 오랫 동안 계속 유지되어 온 의식 속에 깃들어 있는 악하고 야만적으로 간주되는 것을 멀리 해야만 하였다.

[3] "그들은 목메어 죽인 것은 어느 것이고 먹어서는 안 되었다." 또한 자연사한 것이나 피를 완전히 뽑아내지 않은 것도 먹어서는 안 되었다.

[4] 그들은 음행의 죄를 범한 사람들과 또한 레위기 법으로 정해진 금지된 계율을 어기고 거행하는 결혼을 엄하게 견책하여 다스려야 된다고 하였다. 어떤 이들은 본문의 경고의 핵심적인 의도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고린도 전서 5장 1절을 참조해 보라. 하몬드(Dr. Hammond) 박사는 이것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대 교사들은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그들의 의로운 개종자라고 불렸던 유대교로 개종하는 사람에게 요구되었던 모든 것 즉 할례를 받고 모든 율법을 지키는 것을 강요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도들은 노아의 아들들에게 주어진 일곱 계율만 지키면 되는 개종자(역주:proselyte of gate; 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행할 의무가 없는 유대교 개정자들을 말한다)들에게 요구된 것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하몬드 박사는 노아의 아들들에게 내려진 일곱 계율이 여기에 언급된 것이라고 본다.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였으나 그들의 전통에 대하여 완고한 유대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주어진 이 교령의 남녀에 관한 문제를 제외한 음식 문제에 대한 제재는 이 교령을 제정한 동기가 제거되지 해제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음식 먹는 것이 자유롭게 허용되었다. 더 오랜 후 예루살렘이 멸망되자 그와 같은 의무는 마찬가지로 소멸되고 말았다. 그러나 현재에 회의는 이방개종자들에게 이렇게 통보한다. "이러한 것은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거슬리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아직은 이런 문제로 그들을 노엽게 할 필요가 없다. 이제 오래지 않아서 유대인들도 이방인들과 결합할 것이고 그러면 그때는 위험도 사라질 것이다."

(2) 이러한 권면의 표현 방식.

[1] 그들은 권위있는 자세로 그들의 결의를 전달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서신이 경의로써 받아들여지고 또 그들이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이 성령과 우리들에게 가한 줄 알았다"고 말하는, 즉 성령의 권위로써 말한다. 즉 성령의 인도와 지시에 의하여 그것이 가한 줄 알았다고 한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특별한 성령의 은사를 부여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러한 은사가 끊쳐진 자들이 아는 척하는 이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데서 기인한 그들의 무오류성은 교회(敎誨)에 논쟁할 여지가 없는 권위를 부여했다. 그들은 어떠한 것이 "그들에게 좋게 보이기 때문에"지시한 것이 아니라 먼저 그것이 "성령이 적합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그들이 알기에 지시했다. 위의 뜻이 아니라면 본문은 이 일에 관하여 성령이 이전에 결정한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즉 성령이 사도들에게 내려 왔을 때 성령은 사도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설교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방언의 은사를 부여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방인들을 부르시려는 목적을 명백하게 나타내는 사실이었다. 또한 성령이 베드로의 설교에 의해 고넬료와 그의 친구들에게 임하였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장벽을 허물어뜨리려고 계획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 명백하였다. 사실 유대인들은 그 장벽 안에 성령을 가두어 낳을 수 있다고 상상하였다.

[2] 그들은 그들의 결의를 넘치는 온유함과 부성적(父性的) 관심을 표시함으로 전달한다.

첫째, 그들은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짐을 지우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그들은 "우리는 그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이러한 짐을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지우는 것을 기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이 지운 것은 아닌가, 또 이렇게 함으로 이제 신앙의 삶을 시작한 그들을 낙심하게 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둘째, 그들은 "요긴한 것 이외에는" 그들에게 짐을 부과하지 않는 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입장에서 말한다. "음행을 멀리하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목메어 죽인 것이나 피 또는 우상에 바쳐진 제물을 피하는 것은 현 시대에 여러분과 유대인들 사이에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관계를 유지하고 서로 적대시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한 것은 어떤 목적을 위한 필요에서 행하는 것이지 즐거운 일이기에 제정해서 지키는 것은 아닌 것이다. 교회 지도자들은 다만 필요한 의무만을 부과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의무로 정하신 것, 또한 교회의 덕을 함양하고 본문에서처럼 선한 그리스도인들을 서로 결합시키는 의도가 담겨 있는 의무만을 정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다만 그들 자신의 권위로 나타내기 위해 또는 사람들이 그것에 복종하는가를 시험하기 위해 이러한 의무를 부과한다면 그들은 새로운 율법을 만들 권위가 없고 다만 그리스도의 법이 바르게 실행되나 살피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에 복종하도록 종용하는 것만이 그들의 할 의무라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이다.

셋째, 그들은 그 지시를 위반할 경우에 있을 저주를 말함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을 지킬 경우에 주어질 좋은 결과를 말함으로 그들의 지시를 강조한다. 그들은 "만일 너희들이 이 모든 것들로부터 너희 스스로를 지키지 않으면" 교회 회의의 결의에 의하여 또는 트렌트 회의의 결의로 파문당한 사람이 있듯이 "너희들은 파문당하여 교회에서 쫓겨날 것이고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너희들이 잘 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너희가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너희가 삼가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며, 또한 복음의 신장을 위해서, 너희 형제들의 믿음의 강건을 위하여 그리고 너희들의 신뢰성을 높이며 위로받게 하기 위해서이다"라고 그들은 말하였다. 그들의 말은 온정과 사랑과 좋은 감정으로 차 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그의 멍에를 메게 하셨으므로 그를 따르는 자들이 된 우리에게 그분은 우리가 당신에게서 온유함과 겸손을 배우라고 하신다. 진실한 사도들의 태도는 거짓 교사들의 태도와 매우 현격한 차이가 있다. 제의법을 강요한 거짓 교사들은 적극적이고 전제적(專制的)이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강요한다. "만일 그 법을 준수하지 않으면 너희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1절). 너희는 즉시(ipso facto) 추방될 것이며 사탄에게 넘겨질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필요한 것만을 권하는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온화하고 상냥히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그리고 원하는 대로 이루리라. 너희의 평안함을 원하노라. 우리들은 진심으로 너희들에게 영예와 평화가 주어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Ⅲ. 서신의 전달과 전달자들 자신의 거취 결정 문제.

1. "저희가 작별하고" 즉 회의가 파한 후 "안디옥에 내려갔다." 그들은 사도들과 떠나면서 회견하였다(아마 그들은 기도와 함께 작별하였을 것이며, 주님의 이름으로 엄숙한 축복을 기원받았을 것이며 그들의 임무에 대한 격려와 지시를 받았을 것이다). 그들은 용무가 끝나자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들이 곧장 돌아왔다. 그들은 그들을 여행하게 한 안디옥 교인들의 환영을 받았던 것 같다. 공적인 일을 위해서 수고한 사람들을 환영하고 격려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2. 그들은 안디옥에 도착하자마자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였다"(30, 31절). 이는 그곳에 모인 무리들로 그들에게 금지된 것이 무엇인지 모두 알게 하기 위하여, 또한 이러한 명령을 준수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명령을 그들이 이행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전향하기 이전에 이미 이러한 규례를 실행하고 있었던 "문의 개종자"들이었다(역주:이들은 모세의 율법은 행할 의무가 없고 다만 노아의 자손에게 주어진 일곱 규례만 행하면 되는 자들을 가리킨 말임).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이 돼지고기를 먹는 것이 죄가 된다거나 무덤이나 시체를 만지는 것이 부정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들이 그 교령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다만 유대인들을 거스리지 않기 위해서임을 알아야 된다는 것이다.

3.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훈령에 대하여 매우 기뻐하였다(31절). 그러므로 본문에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고 하였다. 그것은 모든 무리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었다.

(1) 그들은 이로써 제의법의 멍에로부터 자유로와 졌음을 확신하게 되었고 거들먹거리는 교사들이 그들에게 씌우려고 한 것과 같은 그러한 짐을 지지 않게 되었다. 육에 속한 규례가 더 이상 그들에게 부과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들음으로 그들은 위로를 받았다. 또한 이러한 규례가 그들을 순결하게 하거나 평화스럽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듣고 위로를 받았다. 그것은 오로지 그들의 양심에 혼동만 일으켰었다.

(2) 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려는 시도 때문에 마음에 괴로움을 당하던 사람들은 이로써 평정을 얻게 되었고 사도적인 권고라고 자칭하던 자들의 허풍을 들어내고 그들을 궁지에 처하게 할 수 있었다.

(3) 이방인 개종자들은 용기를 내어 복음을 받게 되었고 보았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그것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되었다.

(4) 교회의 평화가 다시 회복되었고 분열의 위험이 제거되었다. 이러한 모든 것이 그들이 즐거워한 위로의 이유였고 또 그들은 이로써 하나님께 감사했다.

4. 그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생소한 사역자들로부터 설교와 다른 말씀을 전하여 들었다(32절).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였다." 그들도 성령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일에 부름을 받았고, 이러한 일들에 관하여 전할 수 있는 사역자로서 사도들의 신임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사도들에게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할" 수 있는 자로 신임을 받은 자들이었다. 바울과 바나바의 계속적인 설교를 듣던 사람들도 유다와 실라의 도움을 즐거워하였다. 사역자들의 은사의 다양성은 교회에 유익하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에 대한 사역자들의 임무가 무엇인지 알아 보자.

(1) 그들을 확신하게 하는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신앙하고 그에게 복종해야 할 근거를 더 많이 보여 주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다. 또한 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선택과 그리스도를 위한 결의를 확고하게 해 주는 것이다.

(2) 그들로 하여금 인내하게 권고하며, 특별한 의무를 그들에게 권하는 것이다. 그들을 깨우쳐 선한 일을 하게 하며 선한 일을 하며 살게 하는 것이다. 그들의 형제들을 위로하였다. 이것이 아마 그들로 확신을 갖게 하는 데 공헌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기쁨이 우리들의 힘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많은 말로 그들을 권고하였다. 그리고 풍부한 내용과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말은 이런 부류의 사람에게, 저런 말은 또 다른 부류의 사람에게 감화를 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하였던 것을 다만 몇 마디로 요약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교회의 덕을 함양하기 위해서 "많은 말"을 하였다. 본문의 "여러 말로"는 희랍어 사본에 dia lo,gou pollou로써 이는 "여러 번 연설을 하므로" 또는 "많은 증거를 말하고"라는 뜻이다. 이는 "경계에 경계를 더하였다"는 말씀과 일치되는 말씀이다.

5. 예루살렘 사역자들이 안디옥 교회에서 떠나가다(33절). 그들은 "안디옥에 얼마 동안 머물러 있다가" poih,sauteh cro,non - 즉 얼마 있으면서 그들의 목적을 훌륭하게 수행한 후 시간을 낭비하지 아니하고 안디옥 형제들로부터 친절과 경애어린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로 돌아간다. 그들은 사역자들에게 그들이 와 준 것과 노고를 치하하였으며 그들이 베푼 봉사를 감사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건강과 편안한 귀로 여행을 기원했다. 또한 하나님의 평화로운 보호가 그들과 함께 하기를 기원했다.

6.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라는 안디옥에 머물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있었다.

(1) 실라는 떠나야 할 때가 되었을 때 유다와 같이 예루살렘에 돌아가려고 하지 않고 유다로 하여금 혼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고 자신은 오히려 "안디옥에 머물러 있기를" 선택한다(34절). 우리는 그가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 결정을 하였는가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러한 처사에 관하여 실라를 비난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나는 사실 안디옥 교회의 교인 수가 예루살렘보다도 많고 생동력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러기에 실라가 그곳에 머물게 되었는지 모르는 일이며 그것은 사실 실라로서는 매우 잘한 일이었다. 아마 유다도 그렇게 하고 싶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예루살렘의 자기 위치로 돌아갈 것을 결단했다.

(2) 바울과 바나바는 비록 그들이 주로 이방인들 사이에서 역사하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안디옥에 잠시 더 머물러 있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곳의 사역자들과 교인들과 즐거움을 함께 하였다. 여러 구절의 내용을 보건데 그들의 방문을 일반적인 방문 이상의 것이었던 것처럼 여겨진다. 그들은 즐거움이나 얻고자 그곳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며"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안디옥은 시리아의 가장 중심 도시였으므로 그래서 아마 안디옥은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곳에서 이방인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었던 것 같다. 그곳은 유대인들에게는 마치 예루살렘과 같은 그러한 곳이었다. 그러기에 안디옥에서 주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많은 나라를 찾아다니며 전파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이 설교한 내용을 여러 나라로 전달할 사람들에게 전도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사도들이 그들 각자의 나라로 직접 가서 그들에게 전도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입장에 있을 수 있었다. 이같이 그들은 안디옥에서 허송세월을 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주된 의도를 관철시키는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3) 그곳에는 같은 일을 위하여 수고하는 "다수한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스도의 포도원에서 일하는 그 많은 일군들을 볼 때 우리들도 마음 편하게 쉴 수는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열심과 유익을 끼치는 활동은 우리를 흔들어 깨우며 잠자고 있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15:23 없음.

 

15:24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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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6

바울과 바나바의 불화(사도행전 15:36-41)

우리들은 형제들 사이에서 발생한 한 가지 불행한 분쟁을 본다. 그것은 공적인 문제로 의논하다가 야기된 문제였다. 우리는 여기서 두 사역자들 그곳도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사도가 이 문제 때문에 사적인 다툼이 있게 된 사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이 문제에 서로 합의하지는 못했지만 결과는 잘 마무리되었다.

Ⅰ. 바울은 바나바에게 형제들에게 가서 이방인 가운데서 행한 그들의 사역을 정비하고 새로운 자극을 주자는 좋은 제안을 한다. 그리고 그들이 개척한 교회를 순회하고 그들 가운데서 복음이 어떻게 진전되고 있는가 보자고 제의한다. 이제 안디옥은 그들에게는 안전하고 조용한 항구와 같이 되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적수로 인하여 또는 악한 사고의 발생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바울은 안디옥 교회가 스스로 잘 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기에 그는 다시 바다로 여행을 떠나야 하겠다고 생각한다. 겨울 동안 충분히 휴식하였으니 다시 일터를 찾아가서 사탄의 왕국을 무찌르는 거룩한 전쟁을 힘차게 수행해야 하겠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그에게 지정된 임무는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가서 행해야 하는 것임을 기억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들 가운데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기 위해 2차 전도 여행을 떠나기로 계획한다. 그가 비록 똑 같은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그는 이 일을 수행하려 했다. 본문에 보면 "수 일 후에"라고 하였다. 이 말은 그의 활동적인 정신은 자기 임무를 떠나서 한 가지 오래 있을 수 없음을 나타내 준다. 또한 그의 담대하고 두려움 없는 정신이 그러한 위험에서 벗어나 오랫 동안 쉬는 것을 원하지 않음을 말하여 준다.

1. 바울은 그의 오랜 친구이고 동료 일군인 바나바에게 이것을 제안한다. 바울은 이 일에 그가 동행하여 도와 주기를 요청한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솔선하여 남을 도우려고 해야 한다. 두 사람은 한 사람보다 낫다. 병사는 홀로 출전하지는 못하는 법이다.

2. 방문이 계획된 대상.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자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기반을 개척하자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씨뿌린 들판을 가서 보자는 것이다.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보자는 것이다(아 7:12).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36절)"고 말한다. 우리는 바울이 사역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른 사실을 명심하자.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한 아버지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모든 것"에 있는 형제들의 일이 궁금하였다. 그 형제들이 비록 소수인 곳이라 할지라도 또한 그들이 아주 가난하다고 할지라도 혹은 그들이 가장 심한 박해를 받거나 무시당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방문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전파한 곳이면" 어느 곳이나 찾아가서 뿌려진 씨앗에 물을 주어야 한다. 복음을 전파한 사람들은 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방문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들이 기도를 한 후 하나님이 그 기도에 대하여 어떠한 대답을 주시는가 주의해야 하는 것과 같이 또한 우리는 우리들의 선포한 곳을 살펴 보아서 그 복음을 전파가 어떠한 성과가 있는지를 주시해야 한다. 신실한 사역자들은 그들이 복음을 전파한 사람들에게 특별히 세심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그들의 노고가 헛수고되게 하지 않기 위하여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전 3:5, 6 을 참조).

3. 이 방문의 목적. 이에 대하여 본문은 pw/j e[cousi - 즉 형제들이 어떠한가 살펴 보자고 전해 준다. 즉 복음이 그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나 보자는 말이다. 바울이 계획한 것은 가서 그들에게 의례적인 경의를 표시함이 아니었고 또한 단순히 안부 정도를 묻기 위해 그와 같은 여행을 하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바울이 그들을 방문하고자 한 것은 그들의 사정을 바울 스스로가 잘 알고자 해서였고 또한 그들의 형편에 합당한 성령의 은사를 그들에게 수여하기 위해서였다. 의사가 회복 단계에 있는 환자를 방문하여 병이 완치되는데 합당한 지시를 하고 또한 재발을 막기 위한 지시를 하듯이 그도 그러한 목적으로 여행하고자 하였다. 그들이 어떠한가 보기 위하여 방문하자 했는데 그들은 가서 무엇을 보려고 하였는지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1) 그들이 어떤 정신 상태로 살고 있으며 그들이 어떠한 영향을 받고 있으며 그들 스스로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가를 알고자 하였다. 그들은 아마 자주 이방 교회들로부터 소식을 전해 들은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으므로 바울은 "우리가 가서 그들을 직접 보자. 우리가 가서 그들에게 전파한 것을 얼마나 굳게 붙잡고 있으며 그것에 근거하여 사는지 보자. 만일 그들이 방황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들이 원상태로 환원되도록 하며 그리고 주저하고 있다면 그들을 확신하게 하고 두려워하고 있다면 그들을 위로하자"고 말한다.

(2) 그들이 처한 상황이 어떠한가를 알고자 하였다. "교회들은 평온하고 자유로운가, 혹은 그들이 괴로움에 처하고 슬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일 그들이 기뻐하고 있다면 우리도 그들과 함께 기뻐하며, 너무 안일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며, 만일 그들이 울고 있다면 그들과 함께 울면서 그들의 당하는 고통을 위로해야 할 것이다. 그리함으로써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어떻게 기도를 할 수 있을지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Ⅱ. 조력자 문제에 대한 바울과 바나바의 논쟁. 그들이 자기들을 수행하며 같이 전도한 젊은 사람을 데라고 가서 그들로 그들의 "가르침과 생활 태도와 인내"의 증인을 삼으며 때때로 현재의 봉사에 그들을 참여시킴으로써 이후의 봉사에 적합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1.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그의 조카인 요한을 그들과 함께 데리고 가려 하였다(37절). 바나바가 요한을 데리고 가기로 결정한 것은 요한이 그의 친척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마가는 그의 밑에서 양육을 받은 것 같다. 바나바는 그에게 호의를 갖고 있었고 또 그의 앞날에 대해 매우 관심이 있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편파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지 않는가 반성해야 하며 우리의 친척을 더 좋아하는 것 같은 태도를 갖지 않고자 경계해야 한다.

2. 바울은 그것에 반대하였다(38절). "바울은 그를 데리고 가는 것을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바울은 요한이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없고 또한 일을 위해서 적합하지도 않다고 생각하였다. 마가는 아마 바울과 바나바에게 알리지도 않고 몰래 또는 의도적으로 그들의 승낙도 없이 밤빌리아를 떠났다(8:13).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일하고자 하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그가 게으르고 받아야 할 고통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든지, 또는 비겁하여 곤경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든지일 것이다. 그는 그들이 일을 착수하려 할 때 자신의 태도를 바꾸었다. 그는 아마 이제는 다시 그러한 일을 행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명예를 중히 여기지 않는 이러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영예로운 일을 맡기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였고 뿐만 아니라 배반했던 사람을 채용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적어도 그가 좀 더 수련을 받기 전까지에는 말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를 한 번 속인다면 그것은 그의 잘못이다. 그러나 두 번이나 그러한 일이 발생한다면 그를 믿은 나의 잘못이다.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환란날에 진실치 못한 자를 의뢰하는 의뢰는 부러진 이와 위골된 발 같으니라"(잠 25:19). 이러한자를 다시 기용한다는 것은 대단히 많이 생각할 문제이다.

Ⅲ. 이 불화의 결과. 결국 그들은 서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 분쟁, 혹은 그들이 모두 빠져들어간 돌발적인 흥분은 너무나 강렬하여 "피차 갈라서게"되었다. 바나바는 한사코 그들과 함께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가지 않는다면 가지 않겠다고 하고 바울도 단호하게 요한을 그들과 함께 데리고 간다면 못 가겠다고 한다. 한편도 지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헤어지는 도리밖에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한심하고 개탄스러운 모습을 대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것은 매우 교훈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1.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역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이 훌륭한 두 사람들 자신이 인정을 하였듯이(14:15) "그들도 우리와 같은 심정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이제 그것이 옳았다고 하는 사실이 판명된다. 나는 그 논쟁에는(이러한 경우 흔히 그런 것처럼) 양쪽 다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그 젊은 사람에게 너무 가혹하였던 것 같다. 바울은 그의 잘못에 대해 있을 수 있는 정상을 참작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어머니가 얼마나 덕이 있는 여인인가도 생각하지 않았다(12:12). 또한 바나바의 인간적인 애정도 전혀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심각한 상태까지 끌고 간 것은 바나바의 잘못이었다. 그리스도 왕국의 이해가 관련된 문제에 대하여 그는 너무 사적인 정에 이끌려 있었다. 그리고 논쟁이 그렇게 날카롭게 되게끔 방치한 것도 서로의 잘못이었다(그들은 서로에게 심한 말을 하지나 않을까 해서 조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또한 완고하게 자기의 의견만을 고집하든가 서로 굽히지 않으려 한 것도 양쪽의 잘못이었다. 그들이 제삼자에게 이 문제를 말하여 그 친구로 하여금 그들의 문제가 과열되어 남에게까지 알려지지 않도록 중재하게 하지 않은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들 가운데도 이 문제에 개입하여 그 일을 해결할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가나안 족속과 선민이 "같은 땅"에 거주한다는 사실, 즉 다른 말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뿐만 아니라 그들 가운데는 거짓 형제들도 있어서 바울과 바나바의 불화를 보고 좋아할 것이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했었다. 우리는 그것이 그들의 결점이었고 또한 본문은 우리를 훈계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이 사실을 우리들 자신의 절제할 줄 모르는 혈기나 열정을 변명하는 근거로 사용하거나 이러한 잘못을 저지른 데 대한 슬픔과 수치를 무디게 하는 핑계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내가 만일 화를 냈다고 하자 하지만 바울과 바나바도 화가 나서 다투지 않았던가?"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사실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들의 비난을 자제하는 것과 그 문제를 중재하는 자세를 배워야만 한다. 만일 선한 사람들이 순식간에 그러한 열정에 빠지게 된다면 우리는 이를 저지하고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 있었던 최상의 두 사람도 저질렀던 실수였었다. 회개는 우리에게 자신에 대한 반성에는 엄격할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공정할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친다. 이 모는 일에 흠없는 분은 그리스도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본을 따라야 한다.

2. 선량하고 현명한 그러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불화가 생긴다고 하여 우리는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앞에서 그러한 범죄가 인간에게는 있을 수 있음을 보았었다. 이것은 그 한 실례인 것이다. 설혹 같은 예수 안에서 결합되고 한 분 같은 성령 안에서 성결된 사람들도 이해가 다르고, 의견이 다르며, 관점이 다르고 그들 생각에 따라 감정도 각각 다른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이 아직 불완전하고 어둠 속에 있는 동안에는 늘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빛과 사랑이 완전한 하늘 나라가 올 때까지 우리는 결코 모두 한 마음을 지니게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은 결코 폐기되지 않는다.

3. 이러한 의견 충돌이 가끔 분열 근거로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박해에 의해서나 믿는 유대인들의 속임수에 의해서도 결코 헤어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 사이의 불행한 의견 충돌로 그들은 헤어지게 되었다.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훌륭한 사람들에게 아주 빈약하고 나약하게 남아있었던 교만과 열정이 세상에서 또는 교회에서 빚어내는 비극스러운 결과를 얼마나 많이 찾아 볼 수 있는가? 교만과 열정이 지배하는 곳에 치명적 결과가 초래된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못되는 당연한 일이다.

Ⅳ. 이러한 악으로부터도 좋은 결과가 이루어진다. 먹는 자(육식 동물을 말함)에게서 고기가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꿀이 나온다는 삼손의 수수께끼처럼 말이다. 사도들이 당한 고난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욱 촉진시켰다는 사실은 기이한 일이다(빌 1:12 참조).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기이한 것은 사도들의 분쟁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욱 촉진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사실이다. 본문에서 그러한 사실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비록 자신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그들이 어떻게 봉사하도록 해야 할까 모른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일들이 복음에 해로운 결과를 초래하도록은 허락하시지 않는다. 분쟁으로 인한 좋은 결과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이제 그들은 더 많은 장소를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바나바는 다른 곳으로 갔다. 그는 구브로로 항해하였다(39절). 그곳은 그들이 그들의 사업을 시작한 유명한 섬이며(8:4), 그 자신의 나라이기도 하였다(행 4:36). 바울은 다른 방향을 택하여 길리기아 (cilicia)로 갔다. 그곳은 바울 자신의 고향이었다(행 21:39). 그들은 인간 모두에게 그러하듯이 고향에 대한 애정을 느꼈던 것 같고 그러한 그들의 취향에 따라 행로를 정하였다(Nescio qua' natale solumdelcedine cunotos ducit - 즉 우리의 고향의 흙에는 우리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숨겨 있다는 속담과 같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러한 사건을 복음의 빛을 확산시키시려는 자신의 목적에 이용하셨다.

2. 이로써 이방인들 가운데서의 복음 전도를 위하여 더 많은 일손들이 동원될 수 있었다.

(1) 마가라 하는 요한도 비록 신실하지 못한 일군이었으나 거절되지 않고 바울의 의도와는 달랐어도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잘 알 수 없지만 아마 그는 매우 유능하고 성공적인 일군으로 일하였으리라. 비록 많은 사람들이 이 요한 마가가 마가 복음을 기록하고,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교회를 세웠으며 베드로가 그의 아들이라고 부른(벧전 5:13) 마가는 아니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난 동일 인물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2) 이로써 실라가 새로운 일군으로 고용되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는 결코 이 일에 채용되지도 않았을 것이요, 그러한 마음을 갖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바꾸시지 않았다면 그는 예루살렘 교회를 섬기러 돌아갔을 것이다(33, 34절). 그러나 이로써 그는 이 고귀한 사업에 참여하고 수고하게 되었다.

Ⅴ. 기타의 문제에 대한 고찰.

1. 안디옥 교회는 바울이 취했던 행동을 지지한 것 같다. 바나바는 그의 조카와 함께 구브로로 항해하였는데 그에 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에게는 바울의 경우처럼 형제들의 "축복의 인사"도 없었다. 교회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 사적인 정과 존경에 의해 좌우되는 사람들은 공적인 영예와 존경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러나 바울은 떠날 때 "주님의 은총을 비는 형제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들은 바울이 요한을 기용하기를 거부한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기에 비록 그들이 바울을 알기 전에 바나바를 알았고 또 그가 교회의 존경을 받아 온 사람이었기는 하였지만(11:12) 그가 그러한 사실을 고집하는 데 대하여는 그를 비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울과 그의 전도의 성공을 위하여만 공적으로 기원하고 또 그로 계속 역사하도록 바울을 격려하였다. 비록 그들 스스로는 그를 위하여 더 좋은 일을 할 수가 없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에 모든 것을 의탁하고 그가 하는 일 위에, 그리고 그가 함께 하는 일을 그의 은총에 의탁하였다. 훌륭한 성도들의 사랑과 기도 가운데 늘 기억될 수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또한 특별히 분쟁과 다툼이 있을 때 지지를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 바울은 후에 마가에 대하여 이때 생각했던 것보다도 좋은 견해를 가지게 돈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마가가 더 많은 단련을 통해 성숙했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올.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11)고 편지를 쓴 사실을 통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골로새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나바의 생질 마가에 관해서 기록했는데 이르기를 만일 그가 그들에게 오면 그를 영접하고 받아들이라고 한 사실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골 4:10). 이 사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1) 마땅히 꾸중을 들어야 할 사람이라 할지라도 충분한 참을성을 가지고 정도껏 책해야 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후에 우리가 그를 좋게 생각해야 할 경우가 있을지 모르며 또한 그들의 덕을 입거나 그들과 우정을 맺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후에 그러한 입장에 처하여 정말 우리가 그들을 꾸중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우리는 우리의 적개심을 규제해야만 한다.

(2) 우리들이 마땅한 이유가 있어 책망한 사람들일지라도 만일 후에 그들의 신실함이 증명된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들을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그들의 과오를 잊어버리고 그들을 신뢰하며 또 그들을 추천할 경우가 생길 때 그들을 좋게 평해야 한다.

3. 바울은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와 인내에 동참하였던 오랜 친구와 동료를 잊어버렸지만 그의 일을 기쁨으로 계속하였다는 점이다(41절). 그는 안디옥 근처에 있는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였다." 비록 우리의 동료들이 바뀐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주님을 바꿀 수는 없다. 사역자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개종시킬 뿐 아니라 믿는 사람들을 더욱 굳건히 하는 일에 수고할 때 자기들이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과 자부심을 가져야 하며 만족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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