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고린도 방문(사도행전 18:1-6)
우리들은 바울이 아덴에서 그렇게 많은 박해를 받은 사실을 발견할 수는 없다. 또한 유대인들이 살고 있거나 그들과 이해 관계가 있던 그러한 장소에서 바울이 당했던 것과 같은 심한 대우를 받고 쫓겨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덴에서의 바울에 대한 태도는 냉랭한 편이었으며 또 거기서 선을 행할 수 있는 어떤 전망도 거의 없었으므로 디오누시오와 함께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의 보살펴 줌을 뒤로 하고 그는 아덴을 출발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고린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바울은 여러 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한 교회를 세우는 도구 역할을 하였다. 고린도는 아가야 지방의 중심 도시였고 당시는 로마 제국의 속령으로써 부유하고 찬란한 곳이였다. 그러므로 Non cuivis homini contingit adire Corinthum - 즉 고린도는 누구나 와서 볼 수 있도록 허용된 곳은 아니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였다. 당시 그 주변의 지역은 펠로포네스라고 불리웠다. 이제 우리는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
Ⅰ. 바울의 자신의 생계를 위한 노동(2, 3절).
1. 바울은 비록 학자로서 자랐지만 또한 그는 수공업 기술자였다. 그는 천막을 만드는 기술자였으며 또한 실내 장식품 제조 기술자이기도 했다. 그는 천이나 피륙 혹은 가죽이나 짐승의 껍질을 가지고 군인들이나 양치기들이 사용할 천막을 만들었다(어떤 이들은 당시는 일반적으로 천막을 가족으로 만들었다고 전해 준다). 즉 천막의 겉 덮개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천막 안에서 사는 것을 sub pellibus - 즉 짐승 가죽 속에서 사는 것이라고 흔히 말하였다. 라이트푸트(Dr. Lightfoot) 박사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자손들에게 학식이나 유산을 물려 주기도 하지만 그들의 자녀들에게 어떤 기술 한 가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 그들의 관습이었음을 말해 준다. 랍비인 유다(Judah)는 "그의 아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사람과 같다"고 말하였다. 또 다른 사람은 "기술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울타리로 잘 보호된 포도원을 지닌 사람과 같다"고 하였다. 인간이 그것에 의해 그의 식량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술은 구 누구도 결코 경멸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비록 바리새파 사람으로서 가말리엘 문하에서 성장했지만 그는 젊어서부터 천막 만드는 기술을 배웠었고 또 그 기술을 오래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기술을 망각해 버리지 않았다.2. 비록 바울은 그가 설립한 교회나 그의 전도를 받은 사람들로부터 생계 문제를 의뢰할 권리가 있었지만 식량을 얻기 위하여 그의 직업을 가지고 일했다. 이러한 점은 더욱 그의 위대한 면모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바울이 얼마나 겸손했는가는 생각해 보자. 사실 바울은 이 겸손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주님으로부터 배웠다. 바울이 얼마나 부지런하였으며 얼마나 기꺼이 고통을 감수하였는가를 생각해 보자. 정신적인 측면에서 뛰어날 만큼 우수한 일을 이루어낼 수 있었던 그였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그가 손으로 노동해야 한다는 것도 천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네 얼굴에 흐르는 땀으로 너는 빵을 먹게 될 것이다"라는 저주로부터 면제된 것은 아닌 것이다. 바울이 가장 부적당하고 터무니없는 정황 속에서도 그의 전도 사업을 잘 추진하였고 또 복음에 대적하는 온갖 편견을 얼마나 주의 깊게 극복하였는가를 생각하도록 하자.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남에게 "짐스러운 것"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 자신이 일을 하여서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였다(고후 11:7; 살후 3:8, 9).
3. 우리는 바울이 그의 기술에 있어 대가였으리라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돌아다니며 삯일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고린도에 왔는데 그들도 바울과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바울은 겨우 생계나 유지할 수 있는 일당에 불과한 돈을 벌었다. 가난한 기능인들은 비록 부유한 상인들같이 그들의 직업으로 재산을 늘릴 스는 없지만 만일 그들의 직업으로 가족과 자신의 생계를 유지할 수만 있으면 감사히 여겨야 한다.
4. 비록 그 자신이 위대한 사도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일하기를 선택한다. 그 이유는 후에 알 수 있듯이(26절) 그들이 하나님의 일들에 대하여 매우 총명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을 "예수 rfltm도 안에서 그의 동역자였었음을" 인정한다(롬 16:3). 이 사실은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들이 사람들의 영혼을 돕기 위한 섬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구하라는 좋은 본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동역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선택하는 것은 현명한 태도이다. 반면 우리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증진시켜 줄 사람들과 동료가 되어 사귄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또한 자신들이 주님을 섬기기로 결심하였듯이 우리들도 그러한 영향 아래 살게 하려는 사람들과 사귀는 것도 유익한 일이다. 이 아굴라에 관해서 본문은 우리에게 다음의 사실을 전해 준다.
(1) 그는 유대 사람이었으나 본도에서 태어났다(2절). 베드로 전서 1장 1절에 나타나 있듯이 흩어진 많은 유대인들이 그 지방에 정착하여 살았다.
(2) 그는 최근에 이달리야로부터 고린도로 온 사람이었다. 그는 자주 그의 거주지를 옮겼던 것처럼 여겨진다. 이 세상이라는 곳은 우리 자신이 스스로 거할 곳을 선택하여 살 수 있는 그러한 자유 세상은 아니다.
(3) 그가 이달리야를 떠나게 된 이유는 모든 유대인들을 로마에서부터 추방한다는 굴라우디우스 황제의 최근의 칙령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미움을 받았고 사건이 있을 때마다 그들에게는 치욕과 곤경이 안기어졌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유산은 "무늬있는 매와 같은 것이어서 주변에 있는 매들이 그를 에워쌌다"(렘 12:9). 아굴라는 기독교도였지만 그는 유대인이였기 때문에 추방을 당했다. 사실 이방인들은 사물에 대한 분별력이 없어서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를 구별할 줄을 몰랐다. 클라우디우스 당시에 생존했던 수에토니우스(Suetonius)는 이칙령이 클라우디우스 통치 7년에 발령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칙령이 내려진 이유는 유대인들은 "소날을 일으키는 사람들"이라는 것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 소요가 impnlsore Christo - 즉 그리스도로 인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즉 어떤 무리는 그리스도에게 열성적이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통렬하게 반대하였다. 이것이 과열되어 로마 당국에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황제까지 분격케 하였다. 이 황제는 소심하고 신경이 과민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는 유대인들을 모두 추방하라고 명령하였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기독교도들을 박해하였다면 이방인들이 기독교도나 유대인을 막론하고 다 박해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는 일이다.
Ⅱ. 바울의 유대인들에 대한 설교. 바울은 유대인들과 또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유대교에 개종하여 유대인들의 집회에 드나드는 희랍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갖게 하려고 했다.
1. 바울은 공개적으로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했다." 우리는 사도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파했는가 주의해야 한다. 그들은 힘이나 폭력으로 하지 않았으며, 불이나 칼로 하지도 않았고 절대 수락할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들은 정정당당한 논리에 의해 복음을 선포했다. 그들은 한 사람씩 복음으로 이끌어 들였고 조리있게 강론했으며 그것에 반대할 자유도 허용했다. 그리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줄 수 있는 준비도 갖추고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로 와서 그와 변론하자고 초청하신다(사 1:18). 그리고 조인들에게 그들의 변명을 해보라고 도전하신다. 그리고 "너희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사 41:21) 고도 전하신다. 바울은 성서에 입각한 설교자였을 뿐만 아니라 합리적인 설교가였다.2. "바울은 그들을 권면했다"(e;peiqe,). 그가 권면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중 한 이유 때문이었다.
(1) 그들이 속히 믿어야 된다는 절박함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은 그들에게 단순히 복음을 논증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열정적으로 권면하였다.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위해 또 그들 자신의 영혼과 그들의 자녀들을 위하여 그들에게 제시된 구원의 제안을 거절하지 말라고 간청했다.
(2) 아니면 그가 복음을 권면한 것은 복음을 지니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한 일이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바울은 그들을 권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그가 그들을 설복시켰다는 말로 이해한다. In sententiam suam adducbat - 즉 그는 그들로 하여금 그의 의견에 따르게 하였다. 그들 중 몇 사람이 그의 조리있는 강론에 의하여 믿게 되어 그리스도에게 굴복한 것이다.
3. 바울은 그의 동역자요 보조자들이 그에게 오자 더욱 열심히 복음 전하는 일을 하였다(5절). 그러므로 본문에 보면 "실리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와서" 그곳에 있는 교회들로부터 좋은 소식을 바울에게 주고 또 즉시 고린도에서 바울을 돕게 되자 바울은 전보다 더욱 "말씀에 붙잡혀" 말씀 전하는 일에 바울의 힘과 능력을 진력하였다. 바울은 그의 동포인 유대인들의 완고한 고집과 불신앙을 비탄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회개를 위하여 어느 때보다도 더욱 열심을 내었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를 강권하여"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고후 5:14). 앞의 인용한 내용이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복음을 증거하였다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그렇게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혔기에 바울은 모든 가능한 권위와 진지함을 가지고 그 자신이 완전하고 확실하게 확신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이며" 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되고 또 그들이 기대하고 있는 메시야라고 하는 사실을 "유대인들에게 밝히 증거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신실한 자세로 그들 모두가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는 이 소식을 그들에게 전하였다.
Ⅲ. 그 후 바울이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단념하고 그가 다른 장소에서 했던 것과 같이 이방인들에게로 돌아서는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된다(6절).
1. 많은 유대인들 아니 그들 대부분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그들의 반대를 고집했고 가장 강력한 논증에도 굴복하려 하지 않았고 결정적인 권면에 대해서도 굴복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적하여 훼방하였다"(본문을 직역한다면). 그들은 복음에 반대하기 위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들은 복음의 전진을 막기 위하여 손을 잡았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하였으며 최선을 다해서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못하게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들은 복음을 조리있는 말로 격퇴시킬 수는 없었다. 그들을 조리있는 말로 전도자들을 대항할 수 없게 되자 폭언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훼방하고 그리스도에 대하여 모독적인 언사를 말하였다. 또한 이로써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모독하였다(계 13:5, 6). 그들의 불신앙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그들은 노골적인 비난을 퍼부은 것이다.2. 그러므로 바울은 그 자신이 그들에게 할 만큼 최선을 다했다고 선언을 하고 그들이 그들의 불신앙 속에서 멸망하도록 방임해 버린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그들에게 증거했었다"(5절). 그러나 그들이 바울의 증언을 반대하고 그들의 반대를 고집하고 그들이 전도자들을 반증하는 악령에 사로잡히자(6절) 바울은 그의 열심을 그는 상징적 행위로 나타냈다. 즉 그는 "그 의복을 흔들어" 그 먼지를 떨어버렸다(전에도 그들은 "발에 묻은 티끌을 털어 버렸었다." 행 13:51). 이같이 바울이 옷의 먼지를 털 것은 그들을 대적하는 증언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같이 바울은 그들과의 관계를 깨끗이 청산하고 그 다음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였다. 빌라도가 그의 손을 씻음으로써 그 상징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죄를 유대인들의 책임으로 전가시켰듯이 바울은 그의 옷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림으로써 만일에 있을 그들의 심판에 자신은 무관하다는 것을 나타냈다.
(1) 바울은 자신의 역할을 다하였으며 그들 영혼의 피에 대하여 그는 깨끗하였다. 비록 그가 그들의 영혼을 구원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충실한 파수군과 같이 그들에게 경고를 하였고 또한 그들을 위하여 자신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믿게 하려고 하였으나 헛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기에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불신앙으로 멸망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피에 대하여 바울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본문과 20장 26절의 내용은 바울이 에스겔 33장 8, 9절을 참조한 것임이 명백하다. 사역자들에게 있어서 죄인들을 경고하는데 자기 책임을 다했노라고 자기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사역자의 마음에는 위로가 되는 것이다.
(2) 만일 그 유대인들이 그들의 불신앙을 고집한다면 그들은 확실히 멸망할 것이고 그들의 저주는 바로 자기들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너희가 자신들의 파괴자가 될 것이며, 이 땅에서 너희 나라가 멸망할 것이요 하늘 나라에 가서는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멸망이 임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책임은 너희가 져야 하리라"고 하였다.
3. 그들을 포기하였다고 해서 바울은 자신의 사명마저 포기해 버리지는 않았다. 비록 이스라엘을 도울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은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도 가리라"고 하였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맨 처음 복음에 대한 초청을 받았고 또 그들에게 응당한 대우가 취해졌기 때문에 이 일에 대하여 불평할 수가 없었다. 처음 초대된 손님들이 응하지 않으려 한다고 해서 준비된 음식을 내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본문은 다음가 같은 뜻의 말씀이다. "우리들은 유대인들을 모아들이려고 하였다(마 23:37). 그리고 그들을 치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몸이 없는 머리가 되실 수 없으며 기초없는 건물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원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유대인들의 복음에 대한 거부와 소수의 회심이 이방인들을 더 풍부하게 하였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그들의 정면에서 이야기하였다. 이것은 자신의 정당성을 밝히 위해서였을 뿐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질투를 일으키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롬 11:12, 14).
고린도에서의 바울(1)(사도행전 18:7-11)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전해지고 있다.
Ⅰ. 바울의 장소 이동.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을 파견할 때 그들에게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고(눅 10:7) 지시하셨다. 그러나 본문의 바울의 경우처럼 장소를 변경해야 할 경우도 있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사악함에 의해 축출당하였으므로 회당을 나갔다. 그리고 바울은 "유스도라고 하는 사람의 집으로 들어갔다"(7절). 바울이 이 사람의 집에 들어간 것은 그곳을 숙소로 이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도를 하기 위해서였던 것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바울로 하여금 평화스럽게 그들의 회당에서 그의 일을 하지 못하게 하자 착한 사람인 유스도는 바울에게 자기 집을 개방하고 그가 자기 집에서 전도하는 것을 환영한다고 말하였다. 바울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나님의 방주가 개인의 집에 정박한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바울이 회당에서 설교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받지 못했을 때 바울은 개인 집에서 전도함으로 그의 가르침에 손실을 보지 아니하였다. 이 사람과 그의 집에 한 본문의 설명을 고찰하여 보자.
1. 그 사람은 유대인들과 이웃하여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다. 그 자신이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는 우상 숭배자가 아니었으며 고넬료와 같이 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다. 바울이 비록 유대인들을 단념하였지만 이 사람의 집에서 모임을 시작하므로 유대인들에게 기회를 주고자 하였다. 비록 바울이 유대인들로부터 이방인들에게로 돌아서야 할 수밖에 없었을 때일지라도 그는 아직도 유대인들을 도울 수 있기를 바랐다.2. 그 집은 회당 바로 옆에 있었다. 그러므로 본문에 "그 집이 회당 옆이라" 하였다. 그 일에 대하여 바울이 회당으로부터 사람들을 그들의 모임으로 끌어들이려는 계획 아래서 이렇게 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바울이 그가 할 수 있는 한 그들 가까이 있으려 한다는 것과 만일 그들이 그의 메시지를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전처럼 그의 메시지를 반박하고 모독하지 않으려 한다면 언제나 그들에게 돌아가겠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사라의 정신에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Ⅱ. 바울이 즉석에서 거둔 그의 수고의 결실. 이러한 결실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가운데서 수확한다.
1. 저명인이요 또난 유대인인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었다"(8절). 교회나 국가의 고관들이나 통치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복음에 매우 영예로운 일이다. 유대인들의 회당의 최고 책임자가 즉 성서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나 그들의 신앙에 대한 열심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능가하는 인물로 여겨지는 그가 복음을 믿었는데도 나머지 유대인들은 복음을 반대하고 모욕을 가했다는 사실은 유대인들로 변명의 여지가 없게 하는 사건이었다. 또한 그만 믿은 것이 아니라 그의 전 가족이 믿게 되었다. 그들은 아마 회당장과 함께 바울에 의해 세례를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고전 1:14).2. 이방인이었던 많은 고린도 사람들이(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고전 6:11 의 "너희 중에 어떤 자들"이라는 말씀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나쁜 성격의 소유자들도 있었다) "듣고 믿어 세례를 받았다." 처음에 그들은 들었다. 왜냐하면 "신앙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이다. 그들 중 혹 어떤 사람들은 아마 그들이 살고 있는 생활이 옳지 않다고 하는 어떤 양심의 확신에 의해서 바울의 말을 들으려 왔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기심 때문에 몰려 온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파되고 있는 것이 새로운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듣고" 그들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믿게 되었다." 또한 그들은 "믿고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마음을 정하고 그리스도교를 신앙 고백하고 그리스도인의 특권을 부여받을 자격을 얻게 되었다.
Ⅲ. 바울은 환상을 통하여 고린도에서 그의 일을 계속하라는 격려를 받았다(9절). 그러므로 본문에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라고 하였다. 바울이 그의 일에 관하여 깊이 생각하고 있을 때 즉 침상에 누워서 골똘히 그가 여기에서 계속해서 전도 일을 할 것인가, 혹은 이곳에서는 어떤 방법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좋은 성과를 이룩할 가능성이 있는가 등에 관해서 심사숙고하고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적절한 시기에 바울에게 나타난 것이었다. 즉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에 골똘하고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위로로 기쁨을 맛보고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것이다.
1. 바울은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위임과 책임을 새롭게 인식한다. 주님은 그에게 "유대인들을 두려워 말라. 비록 그들이 난폭하고 더욱이 그들 회당의 총관리자가 전향을 하였으므로 더욱 광분할 지라도 두려워 말라. 또한 그 도시의 행정장관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에게 위에서 주어진 것 이외에는 너에 대하여 반대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네가 외치는 것을 하늘을 위해서이다. 그러기에 담대히 행동하라.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들의 주시함에 대하여 당황하지 말라.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그들에게 말할 수 있는 어떠한 기회도 놓치지 말라. 아끼지 말고 크게 외치라. 그들이 두려워서 말하는 것을 중단하지도 말고 숨어서 말할 필요도 없다. 소심하게 또한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지 말고 분명하게 확신을 갖고 그리고 용기있게 말하다. 크게 외치라. 그리스도를 위한 대사답게 자유롭게 행하라"고 하신다.2. 바울은 주님이 그와 맘께 하심을 확신했다. 이 사건은 바울에게 생기를 불어 넣고 활기를 주었다. 주님은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너를 보호하고 네가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내게 하고 너의 모든 두려움에서부터 너를 이끌어낼 것이다.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네가 무슨 말을 해도 그 말을 내가 인정할 것이며 너와 함께 일할 것이며 기적을 통하여 너의 말을 확증하리라"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 20)는 제자들에 대한 위임시에 주어진 약속이 여기서도 반복되고 있다.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사람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움추려들어도 안 되는 것이다.
3. 주님은 바울에게 그를 아무런 해를 받지 않도록 보호하겠다는 보증을 하신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다. 네가 악하고 분별 없는 자들의 손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며 다른 곳에서 박해를 받고 쫓겨다녔듯이 쫓겨나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어떠한 사람도 바울에게 대적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지는 않았다[사실 우리는 다음의 본문에서 바울이 대적함을 받아 "재판하는 자리에 끌려 왔다는"(12절)소식을 듣게 된다]. 그러나 "아무 사람도 너를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다. 그들의 분노가 절제될 것이다. 또한 너는 빌립보에서 당했던 것과 같이 여기서도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한다. 바울은 그의 전도 사업 후기에서 보다 처음에 혹심한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가 고난을 당하던 곳에서 위로를 받았다. 시련은 언제나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시 66:10-12). 또는 본문을 다음과 같이 내적인 의미의 말로도 받아들일 수 있겠다. "어느 누구도 너를 대적하여 (tou kkw/sai se) 영혼에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너에게 어떠한 괴로움을 주더라도 그것이 네 영혼을 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들이 너를 죽이더라도 그들이 참으로 너를 해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시 23:4; 사 41:10).
4. 주님은 바울에게 성공의 전망을 보여 주셨다. 주님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으로 너의 일을 방해하려는 어느 누구도 그 계획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또한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의 일을 보살필 것이다. 그러기에 너는 그 일을 즐거움을 가지고 원기있게 행하라. 이 성중에는 너의 전도에 의해 실제적으로 따라 나설 사람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 안에서 너의 영혼이 산고의 결실을 보게 될 것이다." la,oj epimoi polmj - 즉 이곳에는 나를 위한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주님은 그의 백성들과 또 앞으로 그의 백성이 될 사람들을 아신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의 백성이 도는 것은 그가 그들에게 역사하심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며, 또한 그는 그의 하실 모든 일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들이 비록 나를 아직 모르고 지금까지 그의 의지대로 사탄에 붙잡혀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들을 내 백성으로 삼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그들을 나에게 주셨으며 나를 섬기는 자손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기록된 것을 알고 있다. 내가 그들의 이름들을 기억하고 나에게 주어진 자들을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내 백성으로 삼기로 내가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르기를 "그가 예정한 자를 또한 부르셨다"고 하였다. 비록 "이 성에 매우 불경스러운 악한 성이고 불순한 것으로 가득 찼으며 그곳에 비너스의 신전이 있어 사람들이 그곳을 자주 찾아 갔지만 이같이 쭉정이만 쌓인 것 같은 무더기 가운데도 알곡이 있었던 것이다. 쓸모 없는 것만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광석 속에도 금(金)은 있었다. 고린도 같은 곳에서까지 그리스도께서 많은 그의 백성들을 소유하고 계셨다면 우리는 어떠한 장소에 대하여서도 절망해서는 안 된다.
Ⅳ. 이러한 격려에 힘입어 바울은 이곳에 오래 머물러 있게 된다(11절). 그는 "고린도에서 일년 육개월을 유하였다." 그렇다고 그곳에서 편안히 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일을 계속 수행하기 위해서 즉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또한 그 도시는 각처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었으므로 바울은 그곳에서 낯선 이국 사람들에게 설교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그들을 통해 복음을 여러 다른 지방까지 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바울이 오래 머물러 있었던 것은 다음의 이유 때문이었다.
1. 복음 밖에 있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오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는 그곳에 많은 사람들을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는 그의 은혜의 능력에 의해 그가 처음 복음을 선포했을 때 한 번 그물을 던져 수 천의 사람들을 이끌어 들일 수 있었던 것과 같이 한 달 혹은 한 주일만에 그들 모두를 회개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 가지로 일하신다. 그리스도께서 고린도에서 예정한 사람들은 점진적으로 복음에 귀의하였다. 어떤 자는 이러한 설교로 또 다른 자는 저런 설교로 그들은 복음에로 하나씩 나아왔다. "우리는 아직까지 만물이 그리스도 아래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그들의 일이 한꺼번에 이루워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혹은 그것이 이루어지더라도 짧은 기간 안에 이룩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의 의무를 계속해야 한다.2. 복음 안에 있는 사람들을 성숙하게 성장시키기 위해서였다. 개종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특별히 고린도 사람들은 바울 자신에 의해 가르침을 받는 것을 필요로 하였다. 그것은 바울이 그 곳에 좋은 씨를 뿌리자마자 적들이 와서 가라지를 뿌리지 못하게 위해서였다. 즉 이들 적들은 거짓 사도들이나 속임수를 쓰려는 일군들로서 바울은 고린도에 보낸 그의 서신에서 이들에 대하여 많은 비난을 하였다. 복음에 대한 자타가 인정하는 적인 유대인 박해자들의 손이 묶여지자 바울과 그 교회는 그리스도인을 가장한 기독교를 유대화시키려는 전도자들의 기독교의 기초를 흔들어 버리려는 수작에 의해 바울은 많은 고통을 겪었고 또 교회도 많은 불명예스러운 피해를 당했다.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하자마자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첫 편지를 쓴 것이 보인다. 그것은 영감에 의하여 그가 쓴 여러 서신 중 첫 번째 편지였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서 같은 교회에 두 번째 편지가 씌여졌다. 사역자들은 좋은 설교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좋은 편지를 씀으로써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리고 그들 사역의 위대한 목적을 추진해야 한다.
고린도에서의 바울(2)(사도행전 18:12-17)
우리는 여기서 바울과 고린도에 있는 그의 동료들이 당한 약간의 고난에 대한 기사를 읽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심한 해를 당한 것은 아니었으며 그곳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업에는 많은 방해가 주어진 것도 아니었다.
Ⅰ. 바울은 유대인들에 의해 로마의 통치자 앞에 고소를 당한다(12, 13절). 그곳 통치자는 고린도 성이 있는 "아가야 지방의 총독 갈리오였다." 아가야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서 갈리오는 식민지의 총독이었다. 이 갈리오는 유명한 철학자 세네카(Seneca)의 형이였다. 그가 어렸을 때는 노바투스(Novatus)라고 불리웠는데 그가 쥴리우스 갈리오의 집안에 양자가 되었으므로 갈리오란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이었다. 그는 그의 동생인 세네카에 의해서 매우 독창적이며 청렴결백하고 온화한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좋은 성품 때문에 그는 Dulcis Galliol - 즉 선량한 갈리오라고 불리워지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일반적으로 모두에게 사랑을 받았다고 세네카는 전하고 있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바울이 난폭하게 체포되어 갈리오 앞에 끌려온 사실을 생각해 보자. 본문에 보면 "유대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였다"고 하였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당한 모든 곤경을 주도한 주모자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바울에게 해를 입히려고 결속하였다. 그들은 그 일에 대하여는 만장일치였다. 그들은 바울에 대하여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그들은 이 악한 일에 손과 손을 마주 잡았다. 그들은 그것을 분노와 폭력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공고 평화를 어지럽히기 위해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서둘러서 바울을 "재판 자리로" 끌고 갔다. 본문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그들은 바울에게 그의 재판을 위해 준비할 틈을 주지 않는다.2. 바울이 갈리오 앞에서 거짓 고소를 당한 사실을 고찰해 보자(13절). 그들은 그에 대하여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고 고소하였다. 그들은 바울이 하나님을 전혀 공경하지 말라고 권하였다거나 또는 다른 신을 공경하라고 한다고(신 13:2) 고소할 수는 없었다. 다만 율법에 반대되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한다고 고소하였다. 로마의 통치자들은 그들의 식민지에서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율법을 준수하도록 허용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율법을 허용했다고 해서 그들과 같은 식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을 범죄자로 기소할 권한까지 그들에게 준 것은 아니었다. 또한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고 해서 그들에게 거짓 증언을 할 권한까지 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고소는 그들의 율법의 측면에서 볼 때도 정당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율법에는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세우실 한 선지자에 대한 약속이 포함되어 있고 또 그들은 그 선지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 안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바울은 그로 하여금 이 선지자를 믿고 또 그의 말을 들으라고 권면했다. 그것은 율법에 근거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율법을 폐하려 온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왔기 때문이다." 고린도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예배하라는 율법을 지킬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 자신이 이미 이렇게 율법을 어기고 있었다. 그렇다고 바울이 그들의 회당에서 예배를 일부라도 어긴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가 백성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성령으로 그를 예배하라고 가르친 것뿐인데 마치 그가 율법에 저촉되게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백성들을 가르친 것처럼 모함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의 가르침은 율법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었다.
Ⅱ. 갈리오는 그들의 고소를 듣자마자 아니면 처음부터 전혀 듣지 않고 있다가 그 기소를 기각하고 그 문제를 심리(審理)하려고 하지도 않았다(14, 15절). 저들에 대해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여 자신이 율법에 반대하여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재판관은 이 소송은 재판으로 다룰 문제가 못된다고 결론을 내리고 이 문제를 심의하는 번거로움에 자신이 끼어들고자 하지 않았다.
1. 갈리오는 그가 심리해야 할 사건이라고 판단되는 사건에 대해서는 재판을 집행할 태세가 갖추어졌음을 보여 준다. 갈리오는 고소자인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무슨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행동이 있으면, 즉 너희들이 도둑질이나 사기, 혹은 살인이나 약탈 혹은 부도덕한 어떤 행위로 사람을 고소하였으면 너희가 소란을 부린다고 하더라도 너희의 불평을 들어야 마땅하다고 내가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청원자들이 무례하더라도 그들의 소송이 정당한 것이라면 그들의 소송을 정당하게 처리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곧 피해자의 권리를 옹호하고 가해자에 대하여는 책망을 하는 것이 행정관들이 의무이다. 그리고 만일 고소자들이 갖추어야할 모든 예절을 갖추지 않는다 해도 그들은 그들의 고소를 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2. 갈리오는 그들이 그의 사법권 밖의 문제에 대하여 자신에게 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15절). 그러므로 그는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라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너희들이 할 수 있는 한 너희 가운데서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이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너희들은 내가 그것을 인내하고 들어야 하는 짐을 지우지도 말고 그것에 관해 재판함으로써 내 양심에 부담을 주지도 말도록 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청원을 들어 주도록 간청하고 압력을 가하자 그는 "저희를 재판자리에서 쫓아 내어 버렸다"(16절). 그리고 다른 소송건을 처리하게 가져 오라고 명령했다.
(1) 갈리오의 행동에는 정당한 면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재판하려 하지 않은 태도는 칭송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는 그들 자신의 종교에 관한 일에 대하여는 유대인 스스로 그 일을 처리하도록 버려 두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러한 허위 주장을 가지고 그들이 바울을 비방하고 능욕하게 버려두고자 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는 자기가 바울에게 불리한 심판을 내림으로 그들의 악의의 도구가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갈리오는 그 일이 그의 사법권 안에 있는 일이 아니라고 간주했고 그러기에 그 일에 간섭하려 하지 않았다.
(2) 그러나 그에게 그가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또 그것으로 그가 자신을 아는데 이용해야 할 율법과 신앙을 그렇게 가볍게 말하였다는 것은 확실히 잘못이었다. 어떠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예배되어져야 하며 예수는 메시야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 혹은 복음이 과연 신의 계시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자신이 비웃고 경멸하여 칭했듯이 단순한 "언어와 명칭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써 만일 그러한 질문들을 그가 올바르게 이해하였다면 그도 그 일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갈리오는 마치 성서에 대한 그의 무지를 자랑하는 것처럼 말하였고 그것을 잘하는 것으로 여겼다. 마치 하나님의 율법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또는 그것에 관해서 탐구를 하는 것은 그를 천박하게 만드는 일인 것처럼 그는 생각하였다.
Ⅲ. 소스테네에게 가해진 능욕과 그 문제에 대한 갈리오의 무관심(17절).
1. 희랍인들이 소스테네를 잡아다가 재판 자리 앞에서 때린 것은 사실 재판정을 모욕하는 행위였다(역주:흠정판에는 희랍인들로 되어 있음). 이 일에 관하여는 많은 가정들이 제기되고 있다. 왜냐하면 본문의 소스테네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으며, 그를 능욕한 희랍 사람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가장 타당성이 있는 가설로는 소스테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바울의 특별한 친구로서 갈리오가 그 소송을 기각시켜 버리자 바울을 위해 앞장 서서 그의 안전을 도모하여 그를 피신시켰으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바울을 찾을 수 없게 되자 그를 보호한 소스데네에게 덤벼들었던 것 같다. 고린도의 저명 인사로 바울의 친구인 소스데네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는 사역자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그의 첫 번째 편지에서 그를 그의 형제라고 불었으며 또한 그와 연명으로 편지를 띠우고 있기 때문이다(고전 1:1). 바울은 고린도 후서에서 디모데를 취급하였던 것과 같이 소스데네를 취급하였다. 그리고 본문의 소스데네가 고린도 전서의 소스데네와 동일 인물인 것이 사실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회당장이였다고" 말해지고 있는데 그리스도보와 공동 회당장이라는 말이든가 아니면 그리스보의 관할 회당이 아닌 다른 회당의 회당장이라는 말일 것이다. 희랍인들이 소스데네를 학대하였다고 하였는데 (역주:한글 개역에는 그냥 모든 사람들이라고만 되어 있음) 그들은 복음을 반대하는 일에 유대인들과 합세한 그리스계 유대인들이거나 유대교로 개종한 희랍인들임에 틀림 없는 것 같다(4, 6절). 그리고 본토 유대인들은 이들로 폭행을 가하게 함으로 자기들이 받을 비난을 다소나마 모면하려고 하였다. 그들이 소스데네를 때린 것은 바울에 대하여 매우 격분했기 때문이다. 또한 갈리오에 대해서도 격분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갈리오가 그들의 고소를 고려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재판 자리 앞에서 스소테네를 때린 것은 그것을 통하여 사실 그들이 갈리오를 무시한다는 것을 갈리오에게 알리기 위한 시위였다. 만일 갈리오가 그들의 기소를 집행자이기를 원치 않으면 그들이 스스로 재판관이 되려고 한다는 것을 과시한 것이다.2. 법정만 그 일로 인하여 모욕을 당한 것이 아니라 재판관도 역시 모욕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도 "갈리오는 이 일을 상관치 아니하였다." 만일 이러한 그의 태도가 악한들의 도전을 무시한다는 의미였다면 그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법률과 통치의 공정성을 착실하게 견지하면서 그러한 그의 태도에 대한 악인들의 모욕은 무시한 폭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내가 생각한 바 대로) 만일 그가 선량한 사람이 치욕을 겪고 있는데도 자신이 개입하기를 꺼린 것을 의미한다면 그가 대범하다기 보다는 그가 나쁜 인물이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본문에 보면 "재판정에서 악한 일이 자행되고 있었다"고 하였다(솔로몬은 이러한 사태를 개탄하였다; 전 3:16). 그런데 그러한 일을 제지하거나 제압하는 아무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갈리오는 재판관으로서 소스데네를 보호해야만 했으며, 그를 폭행한 희랍인들을 제어하고 처벌해야만 옳았었다. 사실 누가 거리에서나 시장에서 폭행을 당한다면 쉽게 도움을 베풀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나 그러나 재판하는 곳 즉 바로 법정에서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데도 재판관이 앉아서 방관만 하고 있다면서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들어가지 못하는도다. 성실이 없어지므로 악을 떠나는 자가 탈취를 당하는도다"라고 개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사 59:14, 15).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고 듣고도 그들에게 아무런 동정도 베풀지 않으며 관심도 갖지 않으며 동정도 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도 않는 자들은 그들이 신앙이 있거나 없거나를 막론하고 그들은 선한 사람이 그의 면전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도 "이 일에 관계치 아니한" 본문의 갈리오와 같은 성격의 소유자들인 것이다. 이러한 자들은"시온에 편히 앉아서"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들"과 같으며(암 6:6) "수산 성은 어지러운데도 앉아서 술만 마시는 아하수에로 왕과 하만"과 같은 자들인 것이다(에 3:15).
바울의 에베소와 예루살렘 방문(사도행전 18:18-23)
본문에서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얼마간 휴식을 취한 후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을 매우 분주히 활동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가 조용히 앉아 있거나 바쁘게 움직이거나 간에 그것은 선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찰하여 보도록 하자.
Ⅰ. 바울의 고린도 작별(18절).
1. 바울은 그곳에서 어려움을 당한 후 얼마간 기간이 지나기까지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소에서는 폭풍(박해)이 일어나면 즉시 떠났었다. 그러나 고린도에서는 그러지 아니하였다. 왜냐하면 고린도에서는 폭풍이 일어나다 곧 가라앉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는 우리에게 이때 갈리오는 사적으로 바울과 면대하였고 또 그에게 호의를 베풀었다고 전해 준다. 또 몇몇 고대 교부들은 이러한 교제가 계기가 되어 바울과 갈리오의 형제인 세네카 사이의 서신 왕래가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본문에 보면 "이 일 후에"즉 소송 사건이 있은 후에는 "바울이 더 여러 날을 유하였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 체류를 앞서 언급한 "일년 육개월"을 초과한 여러 날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11절). 이제 바울은 그의 노고가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알고 더욱 계속해서 노력하였다.2. 바울이 떠날 때, 그는 그의 형제들과 진지하고도 많은 사랑과 적절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나누면서 작별을 하였다. 또한 작별 기도를 하고 좋은 것은 권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권계하면서 또한 거짓 사도들의 간계에 대하여 필요한 주의 사항을 그들에게 전하면서 그는 작별을 고하였다. 그리고 그의 고별 설교는 그들에게 깊은 감동을 남겼을 것이다.
3.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함께" 데리고 갔다. 그것은 그들이 바울과 동행할 의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다른 곳으로 가고 한 곳에 오래 머물기를 꺼려한 것은 그들의 선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을 다른 불순한 동기가 있는 것처럼 나쁘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과 바울 사이에는 아름다운 우정이 맺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이 떠나갈 때 그들은 바울과 함께 동행하기를 간청했다.
4. 고린도에서 배를 타고 떠난 자들이 기항하는 항구인 겐그레아에서 바울 또는 아굴라 둘 중의 한 사람이(한글 개역에는 바울로 되어 있지만 희랍어 사본대로 하면 누구인지 구분이 되어져 있지 않다) 머리를 깎았다. 이것은 나실인의 서원을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본문에 보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고 하였다. 이는 유대 땅이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경우에 그 일을 성전 안에서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른 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장소에서도 그 일을 이행할 수가 있었다. 나실인의 머리는 그의 구별됨이 우연히 더럽혀졌을 때 그러한 경우에 그는 다시 시작해야만 하므로 머리를 깎아야 했다(민 6:9). 또는 "자기 몸을 구별한 날이 차면" 즉 그 기간이 만료 됐을 때도 그의 머리를 밀었다(민 6:13-18). 우리는 본문에서 머리를 깎은 것이 바로 후자의 이유 때문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어떤 사람은 머리를 깎은 것이 아굴라였다고 주장한다. 그는 유대인으로서(2절) 유대교를 쉽게 떠나는 것아 아쉬워서 관례보다 특별히 그러한 형식을 취한 것이라고 본다(역주:즉 유대교인으로서의 아굴라의 서운이 그 때 끝난 것으로 본다). 그러나 필자는 그것이 바울에 관계된 일로 받아들이는 데 어떤 하자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우가 또 한번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21:24, 26). "그것은 유대인을 얻기 위하여는 유대인이 된다"(고전 9:20)고 하는 바울 자신의 방침에 따라 그가 유대인들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나실인의 서원이 비록 제의적인 것이고 또 폐하여질 것이라고 할지라도 아직 도덕적이며 경건한 의미를 지속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가 머리를 깎은 것은(나실인의 기간이 끝나면 머리를 밀었듯이) 유대의 모든 제의적인 율법이 종식되었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나실인들은 선지자들과 관계가 밀접하였다(암 2:11). 그들은 곧 "이스라엘의 영광"이었다(애 4:7). 그러므로 바울이 잠시 동안 나실인의 서원을 하여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고 또 머리를 깎으므로 유대인들에게도 자신이 호감을 얻으려 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동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이 서원을 이행하였던 것이다.
Ⅱ. 바울의 에베소 방문.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대도시요 항구였다.
1.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거기 머물러 두었다." 그것은 그들이 그의 여행에 단순히 짐스러운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에베소에서 복음의 이익을 위하여 그들로 하여금 봉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바울은 그곳에 잠시 동안만 체류해 있기로 즉시 작정하였다. 그리고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그가 없는 동안 그곳에 남겨 두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어느 곳이나 그가 가고자 하는 곳에 사도를 파견하여 그의 길을 예비시킨 것과 같은 목적을 위해서였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사적인 생활을 영위함에 있어서 매우 분별력이 있고 현명한 그리스도인들이었으므로 바울이 그들에게 돌아올 때 그곳에 있는 많은 사람들로 바울을 친절히 영접하고 그의 설교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마음을 움직여 놓을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의 동역자"라고 부른 것이다(롬 16:3).2. 에베소에서 그는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그들에게" 전도하였다. 비록 바울이 여행 도중 그곳을 잠시 들린 것이었으나 그들에게 아무런 설교도 없이 지나쳐 버리고자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청중으로서가 아니라 설교자로서 "회당에 들어서 유대인들과 변론하였다"(19절). 비록 바울이 그를 반대하고 모욕하던 고린도의 유대인들은 포기해 버렸으나 그들 때문에 다른 곳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을 회피하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아직도 그들을 복음선포의 첫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우리들은 어떤 단체의 일부 사람들이 악을 행하고 있다고 해서 그 전체 집단이나 한 종파를 다 비난해서는 안 된다.
3. 에베소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그렇게 몰아내지 않고 그에게 그들과 함께 머물러 있기를 간청했다(20절). 본문에 의하면 "여러 사람이 그에게 더 오래 있으면서"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쳐 주기를 청했다. 그곳 유대인들은 고린도나 다른 곳의 유대인들과는 달리 기품이 있었고 잘 양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완전히 포기해버린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남은 자들을 두었다는 증거인 것이다.
4. 바울은 지금은 그들과 함께 있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본문에 "바울은 허락하지 아니하고 작별하였다"(19, 20절)고 하였다. 그는 갈 길이 멀었다. 그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번 절기를 예루살렘에서 지키기 위해서였다"(한글 개역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음:역자 주). 그것은 바울이 그 절기를 지켜야 하는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바울은 절기를 규정하는 율법이 더 이상 그를 결박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해야 할 일이 (그것이 어떤 일이었든지 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일은 각처에서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그 절기에 수행되어야 최선의 득이 있었다. 그 절기가 어떤 절기인지는 전해지고 있지 않으나 가장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5. 바울은 이 여행이 끝날 후에 다시 에베소에 와서 얼마간 머물겠다는 그의 의도를 말하였다. 그것은 바울이 그들의 친절한 초청에 격려를 받아 그들에게 좋은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 선한 사업을 끝낸 후 다른 일을 모색함에 있어서 미리 비축시켜 놓은 기회가 있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는 "너희에게 돌아오리라"고 하였다. 그는 "만일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라는 필수적인 단서를 삽입한다. 우리들의 시기는 하나님의 손 안에 놓여 있다. 계획하는 것은 인간이고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허락한다는 전제 아래서 약속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만일 주님이 허락하시면 우리가 살겠고 또 이것 저것고 하리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만일 영이 허락한다면"(행 16:7) "내가 다시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하였다. 만일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 나에게 다른 곳으로 가라는 지시를 하지 않는다면 오리라는 것이 바울이 취한 입장이었다.
Ⅲ.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그것은 매우 짧은 방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모(母) 교회에 대한 존경을 나타내는 데 기여하였다.
1. 바울은 바다를 건너서 예루살렘 곁에 있는 항구에 당도하였다. 그러므로 본문에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21절) "가이사랴에서 상륙하였다"(22절)고 하였다. 바울은 바다 여행을 선택했다. 그것은 안전과 신속을 위해서였고 "주님의 역사와 깊은 곳에서의 그의 행하시는 기사를 보기 위해서였다." 본래는 욥바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항구였다. 그러나 헤롯은 욥바 항구가 사용하는 데 위험스러웠으므로 가이사랴 향을 개설하였고 그 후 이곳이 일반적으로 이용되었다.2. 그는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었다." 필자가 생각하기로는 여기 언급된 교회는 분명히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교회라고 강조하여 부른 것은 예루살렘에 그리스도 교회가 시작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행 15:4).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을 보여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가 이방인들 가운데서 이룩한 성공을 계기로 그가 그들보다 뛰어난 것으로 생각한다거나 그들과는 독립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하나님이 그에게 영예를 안겨 주었으므로 그가 예루살렘 교회에 진 신세를 무시한다는 생각을 그들이 갖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예루살렘 교회에 경의를 표하고자 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암시한다.
(1) 바울이 그들을 방문한 것은 매우 우호적인 것으로 순수한 심정으로 그들의 안부를 묻고 그들을 향한 그의 진심어린 선의를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새로운 친구들이 늘어간다고 하여 옛날 친구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이전에 맺은 우의를 다시 상기시켜 다짐한다. 그것은 선한 사람들이나 훌륭한 사람들을 사역자들이 기쁨으로 여겨야 할 일이다. 예루살렘의 사역자들은 한 곳에 계속 머물러 있었고 바울은 끊임없이 지방을 순회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과 좋은 유대관계를 유지하도록 노력했다. 그러므로 그가 떠나 있을 때도 그들이 그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또 그가 그들과 합류할 때 그들을 반갑게 대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그들이 서로 상대방의 평안과 성공을 축하하고 또 잘 되기를 기원하기 위해서였다.
(2) 그것은 잠시 동안의 방문에 불과하였다. 그는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었다." 아마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하였을 것이고 그리고 곧 그들을 떠났다. 그것이 일시적인 방문에 불과한 것이었으나 바울은 그럼에도 이것을 위하여 기나긴 여행을 하였다. 이 세상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서 살 수 있는 그러한 곳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흩어지고 분산된 "세상의 소금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때때로 서로를 만나서 본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것이 비록 잠간 만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로써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으며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서로의 영적 교제를 더 잘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영원히 함께 있게 되기를 바라는 하늘의 예루살렘을 더 열심히 갈망하게 되는 것이다.
Ⅳ. 바울은 먼저 그가 복음을 전파했던 여러 지방들을 거쳐서 돌아 온다.
1. "바울은 안디옥으로 내려가 얼마간 머물렀다"(23절). 바울은 그곳에서 그의 옛 친구들을 만나 보았다. 그곳으로 바울은 낸 처음 이방인들 가운데 복음을 전하도록 보냄을 받았었다(행 13:1). 바울은 안디옥으로 내려가 그곳에 있는 사역자들을 보고 그들과 대화함으로써 자신이 새로운 힘을 얻고자 하였다. 신실한 사역자가 그의 친구들과 휩싸여 얼마 동안 같이 있는다고 하는 것은 기분전환에 더없이 유익한 일이다. 왜냐하면 "쇠는 쇠붙이에 의해서 날카롭게 되듯이 사람은 그의 친구들을 대함으로 새 힘을 얻기 때문이다." 바울의 안디옥 방문은 지난 날을 회고하게 하였으며 그것은 바울에게 새로운 감사의 조건이 되었다.2.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녔다." 그곳에서도 그는 복음을 전파하였고 교회를 설립하였었다. 이곳들에 대해서는 매우 짧게 언급되어 있지만(행 16:6) 갈라디아서 4장 14, 15절에서 나타난 대로 그곳에서는 놀라운 역사가 있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그가 처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과 그리고 그들이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처럼 받아들였음을 말한다. 바울은 이들 시골 교회들(이 교회들이 시골 교회들이었으리라는 것은 어느 곳에서도 갈라디아 지방의 어느 도시에 교회가 있다는 말을 성경에서 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을 바울은 "차례대로' 방문하면서 그가 심기 위해 수고를 하였던 교회들에 물을 주고 "모든 제자들을 굳게 하였다." 바울이 그들에게 왔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을 바울이 인정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과 그들의 사역자들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바울의 그들과의 접견은 그들에게는 큰 격려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였다. 바울은 그들을 강건하게 할 수 있는 설교를 또한 그들에게 하였다. 이 설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들의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하였으며 그리스도를 위한 그들의 각오와 그를 향한 그들의 경건한 애정을 더 풍부하게 하였다. 제자들은 허약한 약점들로 둘러 싸여 있기 때문에 힘을 공급받을 필요가 있다. 사역자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회중 모두를 강건하게 해야 한다. 즉 그들로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지시하고 그를 의지하며 살도록 그들을 이끌므로 그들을 강건케 해야 한다. 그들의 허약함 속에서 그들의 힘이 온전하여지고 또한 사역자 자신이 그들의 힘이요 노래가 되어야 한다.
전도자 아볼로(사도행전 18:24-28)
거룩한 역사서인 본서는 여행 중에 있는 바울의 문제를 감간 떠나 본문에서는 에베소에 있는 아볼로에 대하여 몇 가지 언급하고 있다. 본문은 바울 서신의 몇몇 구절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Ⅰ. 에베소에 당도한 아볼로의 특성이 소개되고 있다.
1. 그는 에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그의 양친 모두 유대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흩어진 이래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시 애굽으로 끌어가실 것이리라"고 전해 예언되었던 그대로(신 28:68) 그 도시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방신의 이름의 하나인 아폴로(Apollos)고 아니라 아볼로스(Apollos)였다. 어떤 사람들은 아볼로가 로마서 16장 10절에 나오는 아벨레와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한다.2. 그는 재간이 뛰어난 사람이었고 공적인 봉사 활동을 위하여 매우 적합한 사람이었다. 본문에 그는 "학문이 많고 (구약)성경에 능한 자라"고 하였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구약 성경을 늘 접촉하며 성장하였다.
(1) 그는 언변이 좋았다. 그는 "구변이 좋은"사람이었다(역주:한글 개역은 "학문이 많은 사람"이라 하였으나 흠정판은 구변이 좋은 사람으로 나옴. 공동 변역 성경 또한 흠정판 영어 성경과 동일함). 희랍어 본문은 avnhb lo,gioj - 즉 사려깊은 사람이라는 뜻도 있다. 어떤 이들은 이 말을 "학문이 많은 사람"이라고 또 다른 이들은 historiarum peritus - 즉 훌륭한 역사가라고도 생각한다. 여하간 이러한 자질은 전도에 유익한 자질이었다. 그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본문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는 어떠한 주제에 대해서도 적절하고 상세하고 또 충분하며 유창하게 말하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2) 그는 또한 성경에 능한 자였다. 이것은 특히 그에게 있어서 뛰어난 점이었다. 그러므로 본문에 "그가 에베소에 이르렀는데 이 사람은 성경에 능한 자라"고 하였다. 그는 성서 해석의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영광과 또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하여 널리 알려진 장소인 에베소에 와서 자기의 재능을 발휘하려고 하였다. 그는 성경에 정통해 있어서 본문을 찾아 보지 않고서도 즉석에서 인용하거나 그것들을 암송하고 또 그런 말씀은 어느 곳에 있다고 말해 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많은 육에 속한 유대인들이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을 가리켜 "지식의 형태"나 "율법의 문자"에나 정통한 자들이라고 일컬어졌었다) "성경에 깊은 깨달음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성경의 뜻과 의미를 이해하였고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알고 있었으며 그리고 성경을 근거로 하여 강력하게 변론을 전개할 수도 있었다. 그의 성서 주석과 응용에는 확신시키고 복종하게 하며 진리를 수호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므로 아마도 그는 많은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그의 성경에 대한 지식을 입증하고 성경에 대한 그의 능력을 입증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3. 그는 "일찍 주의 도를 배웠다." 즉 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며, 복음에 대한 상식적인 개념과 기독교의 근본 원리, 즉 "예수는 그리스도이고 이 세상에 오신 선지자이다"는 것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이 근본 개념은 아볼로와 같이 성경에 능한 자들은 쉽게 용납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때의 징조"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부모나 또는 사역자들에 의해서 복음에 대하여 "배웠다." 또는 "kathchmeoj"라는 원어의 뜻대로 한다면 "교리 문답식으로" 복음을 배웠다고 하겠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에 의한 구원의 길에 대하여 얼마간 가르침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게 될 사람들은 먼저 자신들이 주의 말씀에 대해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에 배워서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행해야 한다. 우리의 입으로 주의 말씀을 외치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그의 가던 길을 따라 우리의 발걸음을 옮겨야만 하는 것이다.
4. 그럼에도 그는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요한의 사역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한 정도밖에는 알지 못하였다. 즉 그는 주의 길 자체보다도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를 통하여 "주의 길에 대한 준비 단계"밖에는 몰랐다. 우리는 그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그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에 참여하지 못하였고 또한 성령이 강림한 이후 어떤 사도들과도 대화를 나누는 기회를 마련하지 못하였었다. 또한 그는 "요한의 세례"만을 받았을 뿐이고 제자들이 오순절에 받은 것처럼 성령으로 세례받지는 못하였다.
Ⅱ. 우리는 본문에서 그의 재능이 에베소에서 받아들여지고 또 증진된 사실을 볼 수 있다. 그는 선을 행하고 또 선한 것을 얻을 기회를 찾기 위해 이곳에 왔었고 그는 이 두 가지를 다 발견하였다.
1. 아볼로는 그곳에서 그의 재능을 공개적으로 잘 활용하였다. 그는 아마 유대인의 회당의 교사로서 적임자라는 추천을 받은 것 같고 또 그는 그가 받은 재능과 "주어진 은사의 분량에 따라서" 일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25절). 그리하여 그는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말하며 가르쳤다." 비록 그는 사도들이 가졌던 것과 같은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는 갖지 못했어도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은사를 사용하였다. 왜냐하면 그 분량은 각각 다르더라도 "성령의 은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맞게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구세주는 비유로써 그의 사역자들에게 비록 한 달란트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땅에 묻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다. 우리는 아볼로가 지식과 언변에 뛰어난 재질을 갖고 있음을 살펴 보았다. 그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고 성경에 능한 자였다." 아볼로는 유용한 지식을 많이 지니고 있었고 또 그것을 전달할 수 있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 다음에 우리는 그가 어떻게 하여 설교자로서의 더 많은 자질을 갖추게 되는가 보기로 하자. 그의 본은 모든 설교자들이 본받을 만한 것이다.(1) 그는 생기발랄한 열정적인 설교자였다. 그는 머리도 좋았고 또한 성품도 훌륭했다. 그는 아주 "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신의 광채뿐만 아니라 신의 빛을 열(熱)도 가진 사람으로 빛을 발할 뿐만 아니라 태우기까지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귀중한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열심히 충만하였다. 그의 이러한 점은 그가 "회당의 지도자들에게 부름을 받았을 때 서슴없이 말씀을 전하였고 또 열정적으로 설교한 사실에서 나타난다. 그는 전심전력을 다하여 설교하였으며, 그의 마음은 그의 일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성품인가! 열심히 많은 사마들은 지식에는 약하다. 그들은 성서의 지식이 모자라 적당한 말씀을 찾아 내지도 못하며 또 부적당한 인용문으로 설교를 가득 채운다. 반면에 말을 잘하고 성경에 능통하며, 많이 배웠고 현명한 사람들은 생명력과 열심이 없다. 그러나 아볼로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그의 일을 위하여 완전무결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말솜씨나 열심을 다 갖추었으며 신에 대한지식과 신에 대한 사랑도 충만하였다.
(2) 그는 근면하게 노력하는 전도자였다. "그는 부지런히 말하고 가르쳤다." 그는 전도에서 오는 고통을 감수했다. 또한 그는 상세하게 말씀을 전했다. 그는 노력이 들어가지 않은 것 또는 그의 희생이 깃들지 않은 것은 회당이나 하나님에게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먼저 그가 전할 말씀을 자신이 음미해 보고 그리고는 그의 전도를 받을 사람들에게 힘을 기울여 그들의 인상에 남도록 말씀을 전했다. "그는 근면하게 가르쳤다." 또한 a,kribwj"라는 어의대로 하면 "정확하게, 엄밀하게 가르쳤다. 그는 말씀을 전하기 전이네 꼭 그 내용을 면밀히 검토하였다.
(3) 그는 복음적인 설교자였다. 비록 그가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복음의 시초였고 또한 그는 복음에 근접해 있었다. 왜냐하면 아볼로는 주에 관한 것 즉 주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을 가르쳤고 주를 위한 길을 예비하는, 또한 주를 높이게 할 그런 경향의 말씀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가 주장한 주제는 메시야의 왕국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비록 그가 제의적 율법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의 유대 청중들을 즐겁게 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또한 그가 이방 철학에 관한 것을 주제로 매우 잘 얘기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그는 오직 주에 대한 것들만을 가르쳤다.
(4) 그는 용기있는 전도자였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처럼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였다"(26절). 그는 그가 말한 진리를 알고 또 그것에 대하여 아무런 의심도 없는 사람처럼 말하였다. 그리고 그가 말한 내용의 가치를 알고 또 그것 때문에 고난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처럼 말하였다.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권력자들도 있었던 "회당에서" 아볼로는 하나님에 관하여 설교하였다. 그는 그들이 그가 전하는 내용에 대하여 편견을 지닌 것도 알고 있었다.
2. 아볼로는 그곳에서 사사로이 그의 은사(지식)을 더 많이 증가시켰다. 그는 연구를 통해서 보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의 대화를 통해서 더욱 많은 것을 배웠다. 만일 에베소에 바울이나 혹은 다른 사도나 설교자가 있었다면 그가 아볼로를 가르쳤을 것이다. 그러나 더 좋은 조력자가 없었기 때문에 "천막 만다는 사람들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가르쳤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아볼로의 회당에서의 설교를 들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아볼로는 그들보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적었지만 공적인 섬김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그가 뛰어난 재능을 가졌기에 그 모임에 근면하고 충실하게 참석함으로써 그들은 아볼로의 사역을 격려하였다. 이같이 장래가 있는 젊은 사역자들을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격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로써 그들이 의(義)로 충만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들은 아볼로의 기독교에 관한 지식에 결함이 있음을 발견하고 아볼로를 "데려다가" 그들과 같은 집에 유숙시키고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일렀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길을 "더욱 완전히" 가르쳤다. 그들은 그에게서 발견한 결함을 아볼로를 비난하는 데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를 헐뜯는 데 이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볼로를 강단에 서기에 적당치 않은 애숭이 전도자라 칭하지 않았고 그가 다만 요한의 세례에 대한 지식만 지녔다고 하여 그가 일하기에는 부적당한 자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바울과의 오랫 동안의 친밀한 대화에 의해 복음의 진리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으므로 그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그에게 전하고 그가 전에는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사실들을 분명하고 명백하게 제시하고 방법론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1]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가진 자에게 더 많은 것을 주실 것이라"고 하신 약속의 실례를 보게 된다. 가진 자 또 가진 것을 활용하는 자는 더 많이 갖게 될 것이다. 그가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성실하게 장사한 사람은 곧 그것을 두 배로 늘렸던 것이다.
[2] 진실된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실례를 우리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게서 보게 된다. 그들은 그들이 능력에 따라서 선한 일을 하였다. 아굴라는 사실 많은 지식을 갖춘 사람이었지만 회당에서 이야기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볼로가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공적인 일을 위한 그러한 재능을 그는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볼로에게 지식을 제공하였고 그 지식을 그의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전하도록 하였다. 사적인 대화에 의해 젊은 그리스도인들과 신진 사역자들을 가르침으로써 그들이 복음으로 잘 성장하고 또 그 사역을 잘 수행한다면 그것은 그들에게나 교회에 다같이 유익한 것이다.
[3] 아볼로의 진실된 겸손의 실례를 우리는 보게 된다. 그는 여러 가지 재능이 많고 학식이 있는 매우 총명한 젊은이였다. 그는 이제 막 대학 과정을 마치고 새로 사회에 배출되었고 또 인기있는 설교자였으며 또 능력있게 외침으로 사람들을 따르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현명하고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임을 발견하고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경험적으로나 거시적으로 많은 것을 그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을 알고는 비록 그들이 기술자로 가난한 천막 제조업자들이었지만 그는 그들에게서 기꺼이 가르침을 받았고 그의 결점과 잘못에 대한 그들의 지적을 받아들였으며 또 그들에 의해 그것을 수정하고 그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다. 젊은 학생들이 원숙한 실천가들에 의하여 정통하게 되듯이 신입 교인들은 오래 믿은 그리스도인들과 대화함으로써 많은 것을 얻도록 해야 한다. 아볼로는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웠지만" 그가 전에 획득했던 지식에 머물러 있으려 하거나 그가 누구 못지 않게 기독교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이러한 결점은 교만하고 속기 쉬운 젊은 사람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것이다). 오히려 그는 도에 대해 가르침을 받으므로 완전하게 되기를 기꺼이 원했었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더 많이 알기를 갈망해야 한다. 또한 그들은 그들이 아는 것을 더 잘 알고자 노력하여 완전에 이르기까지 전진해야 하는 것이다.
[4] 본문에서 우리는 비록 회당이나 교회에서 말할 수 있도록 허락받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사적인 대화를 통해 하나님이 그에게 준 지식을 가지고 좋은 일을 한 훌륭한 부인의 실례를 보게 된다. 바울은 "늙은 여자는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라"고 하였다(딛 2:3, 4).
Ⅲ. 이제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를 섬기는 일에 승진 발탁된다. 그곳은 당시의 에베소보다 그가 더 유용하게 일할 수 있는 장소였다. 바울은 복음의 수래를 특별히 아가야의 시청 소재지인 고린도에서 활발히 움직이게 하였다(역주:복음의 수래는 아볼로를 말함). 고린도에서 많은 사람들은 바울의 설교에 의해 마음이 감동되고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들을 더욱 확신시키는 일이 필요하였다. 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 때문에 괴롭힘을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을 설파시킬 필요도 있었다. 바울은 다른 일로 부름을 받아 그곳에 가고 거기 있을 수 없었다. 그러기에 이제 아볼로로 이 공백을 메꾼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었다. 그는 심는 것보다 물을 주는 데 적합한 사람이었으며 아무 것도 없는 곳에 교회를 일으키는 것보다는 설립되어 있는 교회들을 튼튼히 하는 데 적합한 인물이었다. 본문에서 다음 사실을 더 살펴 보자.
1. 그가 이 일에로 부름을 받은 것은 바울이 마게도냐에로 부름을 받을 때와 같이 환상에 의해서도 아니고 그가 가려고 작정한 곳 사람들의 초청에 의해서도 아니었다.(1) 아볼로는 자신이 가기를 원하였다. 그러므로 본문에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라고 하였다. 그는 그곳 교회의 상황을 듣고 그가 그들 가운데서 할 수 있는 좋은 일을 할 결심이 그에게 생겼다. 비록 그곳에는 영적인 은사로 뛰어난 사람들이 있다고 하지만 아볼로는 그 자신이 해야 할 어떤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 하나님이 그렇게 그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2) 그의 친구들이 그곳에로 가고자 하는 아볼로를 격려했고 그의 목적을 찬성하였다. 아볼로는 그곳 아가야에 대해서는 전혀 낯선 사람이었으므로 그들은 아가야에 있는 제자들에게 아볼로를 받아들이고 그를 채용하기를 권하는 추천서를 그에게 지참시키었다. 사역자들이 본문의 아볼로의 경우처럼 교회를 옮길 의향이 있을 때는 교인들과 사역자들이 그를 서로 추천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해야 하고 이렇게 함으로 교회 간의 교제가 잘 유지되어야 한다. 비록 에베소 사람들이 아볼로가 일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많은 것을 잃게 되었지만 그들은 아가야 사람들이 받게 될 이익을 시샘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고린도 교회를 잘 안다는 이점을 활용하여 그를 그들에게 소개하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교회는 비록 그 수가 많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사실 하나이기 때문이다.
2. 아볼로는 그의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그의 의도와 기대는 다음 두 가지 방법으로 충족되었다.
(1) 신자들은 대단히 교화되었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믿음이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본문에 "저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다"(27절)고 하였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억하자.
[1]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은 그들이 믿게 된 것이 온전히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들 스스로 믿게 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내려 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것은 그들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서이다.
[2] 은혜로 말미암아 믿게 된 사람들도 계속해서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여기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그들 안에 불신의 요소는 남아 있게 마련이며 또한 온전케 되어야 할 그들의 신앙에 있어서의 결함이 있으며 성취되어야 하는 신앙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3] 신실한 사역자들은 은혜를 통하여 믿게 된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도움이 될 수 있으며 또 그들을 많이 돕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이 그들과 함께 할 때 비로소 그들은 신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2) 불신자들은 패배를 맛보게 되었다. 그들의 반대 의견은 충분히 답변되었고 그들 주장의 어리석음과 괴변성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복음을 반대하는 자기들의 입장을 수호할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입은 닫혔고 그들의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가득 찼다(28절). "그는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셨다." 그는 euvtonwj - 즉 열심히 또는 대단한 열정으로 그 일을 하였다. 그는 고통을 무릅쓰고 그 일을 수행하였다. 그의 심정은 그리스도를 위해 봉사하고 또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를 참으로 열망하는 사람답게 오직 이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그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었다. 그는 그 일을 levi neqptio - 즉 능수능란하게 하였다. 그리스도를 지지하는 그의 입장이 분명했고 또 그를 위한 논거가 확고했으므로 유대인들이 복음에 반대하여 말하는 모든 것을 좌절시키는 것은 쉬웠다. 비록 그들이 사나왔다 하더라도 그들의 입장이 떳떳하지 못하였으므로 그는 거리낌없이 그들의 반대를 무찔러 버렸다. 이제 그가 그들을 확신시키려고 한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또한 그들의 조상들에게 오리라고 약속된 메시야이다"는 것과 그러므로 그들은 이 다른 사람을 기대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만일 유대인들이 "예수가 그리스도이라는 사실을 믿으려고만 한다면 그들 자신의 율법까지도 그들에게 그의 말을 들으라고 가르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사역자들의 사명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우리들은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라는 사실을 전해야 한다." 아볼로가 그들을 확신시킨 방법은 "성경에 의해서"였다. 그러므로 그는 논쟁이 있어서 기선을 잡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성경을 거룩한 권위를 가진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기에 성경에 능한 그가 성경으로부터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사역자들은 다만 진리를 설교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증명하고 방어할 수 있어야 하며 온순함으로 그러나 능력있게 반대자들을 확신시키고 그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이것이 바로 교회에 대한 진정한 섬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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