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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디모데를 택한 바울(사도행전 16:1-5)

바울은 영적인 아버지였다. 그러한 자로서 우리는 여기서 그가 디모데를 택한 사실을 보게 된다. 바울은 그의 전도 사업에 의해 그리스도에게 태어난 많은 다른 사람들을 돌보며 양육하였다. 모든 사람을 바울은 현명하고 친절한 아버지의 입장에서 대하였다.

Ⅰ. 바울이 디모데를 그의 지기로서 또한 제자로서 삼음. 이 사도행전의 목적의 하나는 바울 서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서신 중 둘이 디모데에게 보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울의 역사를 고찰하는 가운데 디모데에 대하여 서로 얼마간 알아 보는 것이 필요한 것이었다. 본문은 우리에게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해 준다.

1. 디모데는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으로서 제자였다. 그리고 그는 루디아의 온 가족이 루디아가 믿게 됨으로 세례를 받았듯이(158절) 그의 어머니가 신자가 되었을 때 아마 그때 그는 어린 아이였겠지만 그도 그때 세례를 받았다. 그리스도의 제자인 그를 바울은 자신의 제자로 삼아서 그리스도의 신앙과 지식에 대하여 더 많이 가르치고 훈련시켰다.

2. 그의 어머니는 본래 유대인이었으나 "그리스도를 믿었다." 그 여자의 이름은 "유니게"이고 그의 할머니의 이름을 "로이스"였다. 바울은 그 두 여인을 탁월한 덕과 경건성을 가진 사람들로서 매우 존경을 가지고 이야기하며 특별히 그들의 진실한 신앙과(딤후 1:5)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그들의 신실을 받아들임과 충실함을 들어 그들을 칭찬한다.

3. 그의 아버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방인이었다. 유대인 여자가 이방인 남편과 결혼한다는 것은 유대인 남자가 이방인 여자와 결혼하는 것과 같이(비록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금지되어 있었다(신 7:3).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이 인용문은 유대인들에게 나쁜 감화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가나안에서 그들과 함께 살고 있는 민족들만 제한한 말씀으로 여겨지기는 한다. 여하간 그의 아버지는 그리스 사람이었기 때문에 디모데는 할례를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국인끼리 결혼할 경우 부친에게 속한 민족적 유산을 일반적으로 물려받듯이 신앙의 문제나 신앙의 인침의 문제에 있어서도 모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부계를 따랐기 때문이었다. 이같이 그의 아버지가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할례의 의무도 없었으며 또 받을 자격도 없었다. 그가 성장하여 자신이 스스로 할례를 받기 원하기 전이는 그것과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디모데의 아버지가 생각이 다르고 습관이 달랐으므로 그의 어머니가 디모데를 어렸을 때 할례를 받도록 할 수 없었지만 그를 하나님의 경외하도록 교육시켰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비록 디모데가 계약의 징표는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가 그 징표를 받을만한 내적인 자격도 못 갖춘 것은 아니었다고 하겠다.

4. 디모데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평판이 좋았다. 본문에 보면 "그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을 받은 자였다"(2절). 디모데는 흠이 없다는 평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모두 추한 소문으로부터도 자유했고 깨끗한 평판을 받았다. 즉 그는 기대가 큰 특별한 청년으로서 여김을 받았다. 그가 태어난 곳에서 뿐만 아니라 이웃 도시들에서도 그를 칭찬했고 좋게 평하였다. 그는 좋은 사람들에게서 좋은 일로 평판이 좋았다.

5. 바울은 앞으로의 여행에 그를 동반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를 수행케 하여 시중을 들고 그의 가르침을 받으며 함께 복음을 위한 일을 하려고 하였다. 즉 경우에 따라서는 그를 설교시키고 그가 세운 교회에 그를 남겨 놓으려고 하였다. 바울은 그를 매우 사랑하였다. 그것은 디모데가 독창적인 젊은이며 중요한 부분을 담당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열심적인 사람이며 헌신적인 애정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언제나 "그의 눈물을 생각하였다"(딤후 1:4).

6.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주었다. 또한 디모데로 하여금 할례를 받도록 명령하였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었다. 바울 자신이 그의 모든 힘을 다하여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번에는 바울이 할례에 반대하는 예루살렘 회의의 교령까지 얻어내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바울은 디모데를 할례받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 교사들처럼 할례를 받게 하여 그를 제의법의 준수에 복종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의 생활과 사역이 인정을 받게끔 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하면 이러한 점을 중히 여기는 유대인들 가운데도 그가 용납될 수 있겠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서 디모데에 대한 나쁜 선입견만 제거한다면 그가 전도를 위하여 놀랄 만한 재질을 갖추었으므로 그들에게 매우 유용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가 할례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사람들이 깨끗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멀리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디모데를 데리고 가서 할례를 주었다. 이같이 바울이 유대인을 얻기 위해서는 유대인이 되고,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사람이 된 것은 그들 중의 얼마를 얻기 위해서였다. 바울은 구원받기 위해서는 할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덕을 함양하기 위해서 필요할 때는 그 자신이 그것을 실시하였다. 그는 할례를 강요하려는 사람들처럼 단호히 그것을 부인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바울은 율법의 문자에 얽매여 이같이 한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의 정신에 의거하여 그렇게 하였다. 그는 유대인들을 향한 사랑의 정신에서 이렇게 하였고 또 이렇게 함으로 그들을 서서히 그들의 편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고 하였다. 바울은 사실 디모데가 할례를 받지 않았다고 해도 그를 데리고 가는 데 그렇게 어려울 것은 없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디모데가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 디모데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하여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였다. 디모데에게 할례를 주면서 바울은 디모데의 머리에 손을 얹고 그에게 성령의 은사를 내려 주실 것을 기원하였을 것이다(딤후 1:6).

Ⅱ. 바울은 그가 세운 교회를 확고하게 하였다(4,5절). 바울은 자신이 의도했던 대로(15:36) 그들의 상황을 알아 보기 위하여 "그가 주님의 말씀을 설교한 여러 성을 다녀갔다."

1. 사도의 일행은 그곳 사람들에게 유대 교사들의 질문 공격에 대한 대답의 근거나 되고 또 이제 그들 스스로를 다스려 나갈 지침서 노릇을 할,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자유롭게 하신" 자유를 따르는 것이 옳음을 증명하는 예루살렘 회의의 교령의 사본을 전달했다. 모든 교인들이 그 교령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 내용을 정확히 안다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비록 바울이 특별한 이유 때문에 디모데에게 베풀었다 하더라도 바울은 그것을 전례(前例)로 만들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신앙적으로 살게 하려고 그 교령을 교회들에 전달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규칙을 지켜야만 했으며 예외의 경우를 본을 삼아 교령을 어겨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2. 이것은 그들에게 매우 유익한 도움이 되었다.

(1) 이로써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졌다"(5절).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부과하려는 데 반대하는 그들의 입장을 더욱 확고하게 하였다. 유대 교사들은 할례의 필요성에 대하여 확고한 말과 열심을 갖고 강조하였고 때로는 그것에 관하여 그럴싸한 논증을 하여 그들에게 충격을 주었었다. 그러기에 그들의 신념이 흔들리기 시작하였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에 반대하는 사도들이나 장로들 뿐만 아니라 그들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증거를 대하였을 때에 그들은 확고해 졌으며 더 이상 그것에 관하여 동요되지 않았다. 진실에 대한 증언은 비록 그것이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교정시킬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진리를 의심하거나 진리대로 살려는 사람들을 확고하게 하는 데는 매우 유용하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뿐만 아니라 이 교령의 의도는 제의법과 그 법에 대한 육적 욕망에 입각한 준행을 파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또한 그들은 전반적으로 이 교령에 의해서 기독교 신앙을 확고히 할 수 있었으며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도 더욱 굳게 확신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복음은 하나님과 인간 양측의 본질에 보다 적절한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영적인 길을 열어 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 편지에서 보여진 자비와 겸손의 정신은 사도들과 장로들이 바로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의 인도 아래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 주었다.

(2) 그들은 "수가 날마다 더 했다." 그들 개종자들에게 율법의 멍에를 씌우려고 하는 기도를 사람들은 경계하게 되었다. 만약 이방인들이 유대인으로 전향할 의도가 있었다면 사도들이 그들에게 오기 이전에 이미 그들은 그 모든 것을 하였을 것이다. 그들이 유대인들의 멍에에 굴종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의 특권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신앙을 갖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율법의 노예 상태로 전락될 위험이 없다고 하는 것을 알았다면 그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교회의 일원이 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교회가 "날이 갈수록 증가했다." 하루에도 몇 사람씩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드렸다. 그리스도의 영예가 높아지고 교회가 번영하고 인간들의 영혼이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교회의 증가를 보는 것은 큰 기쁨이 되었다.

 

16:2 없음.

 

16:3 없음.

 

16:4 없음.

 

16:5 없음.

 

16:6

마게도냐로부터의 바울의 초청(사도행전 16:6-15)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Ⅰ. 복음 전파를 위한 바울의 활발한 종횡 여행 활동.

1. 바울과 그의 동료인 실라노 브루기아는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간다. 그 곳은 복음이 이미 뿌려진 곳으로 보이는데 바울에 의해서였는지 아닌지는 언급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그가 그들에게 처음 복음을 전한 것과" 그들이 그를 열렬히 받아들였음을 말한 것을 보아 그곳에 그가 처음으로 교회를 세운 것처럼 여겨진다(갈 4:13-15). 그리고 갈라디아서에 의해서 유대 교사들이 그 당시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많은 악을 저지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바울에 대하여 그들로 편견을 갖게 하였으며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그들을 끌어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 서신에서 그 거짓 교사들을 격렬하게 비난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마 이러한 사건은 이 방문이 있은 훨씬 뒤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2. 그들은 이때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성령에 의해 금지당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복음을 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든지 혹은 그들이 아직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후에 그러한 준비를 갖춘 것 같다(19:10). 그러므로 한참 후에야 "아시아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이 주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고 기록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라이트푸트(Dr. Lightfoot) 박사가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이번에는 바울에게 새로운 일을 맡기시려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로마의 식민지인 빌립보에서 로마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바울이 복음을 전한 이방인은 희랍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로마 사람들은 유대 사람들에 의해 다른 이방인들보다 특별히 미움을 받았다. 그들의 군대는 "멸망의 가증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므로 다른 여러 곳 가운데서도 이곳으로 특별히 그를 불러 아시아나 다른 장소에서 설교를 하지 못하게 그리하여 것은 그로 하여금 바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게 함으로 이후로 복음의 빛이 동쪽보다도 서쪽을 향하여 확산되리라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었다. 그들의 설교를 금지한 것은 바로 성령이었다. 그것은 그들 각자의 마음 속에서의 성령의 은밀한 속삭임을 통해 전해진 것이리라. 그들이 다음 여행 장소에 대해 야기를 나눌 때 그들은 똑 같은 지시를 받은 것을 알았고 따라서 그 지시가 같은 성령에게서 온 것인 줄을 알았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의 말씀을 전해 들은 예언자들에 의하여 그들이 그러한 지시를 받은 것일 수도 있으리라. 사역자들의 이동이나 그들에 의한 여러 은혜의 분배는 성령의 인도와 지시 아래에서 특별한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들은 한 구약의 사역자가 전혀 설교를 하지 말라는 금지의 명을 받은 사실을 발견한다(겔 3:26). 거기 보면 "내가 너로 벙어리가 되게 하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는 다만 어떤 장소에 대하여 복음 전하는 것이 금지되고 있다. 한편 그들은 그들을 더욱 필요로 하는 다른 장소로 가라는 지시를 받는다.

3. 그들은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썼으나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다. 본문에 보면 이에 대하여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다"(7절)고 전해 준다. 그들은 무시아로 왔다. 그리고 여기서 복음을 전파한 것처럼 보여진다. 왜냐하면 그곳은 속담에 있는 대로(시세로는 이곳 주민을 가리켜 "Mysorum ultimus"라고 칭했는데 그 뜻은 "가장 비열한 인간이라는 뜻이다) 천하고 보잘 것 없는 지방이었지만 사도들은 그곳을 방문하지 않는 것을 떳떳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지혜있는 자에게나 어리석은 자들에게나" 자신들이 빚진 자라고(롬 1:14)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비두니아에 니케아시가 있었다. 이곳에서 아리안주의에 반대하여 첫 공회가 개최되었었다. 그리고 이 지방들에게 베드로는 그의 편지를 보냈다(벧전 1:1). 그리고 그곳에는 교회가 매우 흥왕하였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그곳에 복음이 전파되는 기회가 허용되지 않았으나 오래지 않아서 그들도 복음을 전함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의향과 결심이 비두니아로 가려는 것이었지만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심정을 알게 된 후 그들은 그들의 생각과는 반대되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우리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야만 하며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의 인도에 복종해야 한다. 만일 이것이 우리들이 시도하려고 하는 것을 못하게 한다면, 우리들을 괴롭힌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묵묵히 따라야 하며 그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믿어야 한다. "예수의 영"이 그들로 하여금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많은 고대 사본들이 "예수의 영"이 선조들이라고 전해 준다. 주 예수의 종들은 언제나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시는 "주 예수의 영"의 점검과 지시 아래 있어야 한다.

4. 그들은 "무시아를 지나갔다." 또는 "무시아를 경유하였다." 우리는 그들이 지나가면서 좋은 씨를 뿌렸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다음 그들은 트로이(Troy)의 도시인 드로아에 왔다. 트로이에 대하여는 널리 알려져 있으며 바로 이 트로이라는 이름에서 드로아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 여기에도 교회가 설립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사도행전 20장 6, 7절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 교회는 아마 이번 여행시에 아주 짧은 기간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바로 이 드로아에서 누가가 바울을 알게 되어 그와 동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이때부터 누가가 바울의 전도 여행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대부분 그 자신까지 바울의 수행원의 한 사람으로 간주하여 "우리"라는 호칭으로 바꾸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10절).

Ⅱ. 마게도냐로의 바울에 대한 특별한 부르심. 즉 그는 21절에 나타나는 것처럼 주민들의 대부분이 로마인들인 마게도냐의 주된 성인 빌립보로 부르심을 받는다.

1. 바울이 본 환상(9절). 바울은 많은 환상을 보았다. 그 환상은 때로는 그를 격려하기도 하며 또 어떤 때는 여기에서와 같이 그의 일을 지시하기도 했다.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서 그가 마게도니아로 가야만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뜻이라고 그에게 알려 주었다. 이것은 출발이 재차 제지당하고 이로써 그의 계획이 좌절됨으로써 바울이 실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그가 비록 자신이 가려고 마음 먹었던 곳으로 갈 수 없었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라고 할 장소로 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바울이 본 사람. 그의 곁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바울은 그가 마게도냐 사람인 줄을 그의 습관이나 방언에 의해 알았든지 혹은 그가 자신은 마게도냐 사람이라고 바울에게 말했기 때문에 알았을 것이다. 어떤 이는 천사는 이같이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또는 다른 사람들은 바울의 비몽사몽 간에 그러한 사람의 형상이 그의 환상 속에 나타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그가 그러한 사람을 보았다고 꿈을 꾼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바울을 마게도냐로 가게 하고자 하셨다. 다른 사도들이 다른 경우에 경험한 것처럼 하늘로부터의 사자가 그에게 그곳으로 가라고 지시한 것이 아니라 마게도냐로부터의 사자가 그를 그곳으로 초대하였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이후로는 사역자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로 그들이 직접 사역자들을 초청하게 하는 방법으로 그의 사역자들의 진로를 결정하려는 것이 그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에게 초대를 받는다. 그리고 이 마게도냐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을 대변하여 그에게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람을 마게도냐의 수호 천사로 간주하려고 하는데 이는 각 사람에게 수호 천사가 있듯이 각 장소에도 수호 천사가 있다는 생각에서 기인한 얘기다. 이러한 수호 천사 문제는 다니엘 10장 20절에서 엿볼 수 있다. 거기 보면 "페르샤의 호국신과 그리이스 호국신"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수호 천사들을 말한 것으로 보여진다(역주:공동 번역 인용).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있어서 확실성은 없다. 중요한 것은 마게도냐 사람을 바울이 눈으로 보았건 그의 마음으로 보았건 간에 그가 바울 앞에 나타났다고 하는 사실이다. 천사는 자신이 직접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복음을 설교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바울을 그들에게 데리고 가야만 했다. 또한 그 천사는 자기의 권위로 바울로 하여금 마게도냐로 가라고 명령할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마게도냐 사람으로 바울을 와주도록 초청하게 한 것이다. 그를 초청한 사람은 그 나라의 행정장관도 승려도 아닌(바울은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로부터 초대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곳에 주거하는 평민이요 단순한 사람이었다. 그는 바울을 억지로 끌고 가려거나 업신여기지 않고 청렴결백함과 성실성의 표적을 나타내면서 그의 도움을 간청하였다.

(2) 바울을 초청한 선한 마게도냐 사람은 "그에게 청하여 말한다." 즉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청한다. 이 말은 사실 "와서 우리를 위해 복음을 설교해 달라는 말이며, 당신의 노고에 의해 우리도 복음의 혜택을 받자"는 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바울을 초대한다.

[1] "당신은 많은 사람을 도와 주었다. 우리는 여러 지방에서 당신이 그들에게 유익을 주었다는 소식을 들었소. 우리도 당연히 당신의 도움을 나누어 받아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 와서 우리를 도우시오." 다른 사람들이 복음으로부터 유익함을 얻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우리는 각성하여 우리도 더욱 그것을 간구해야 하겠다.

[2] "불쌍한 영혼을 돕는 것이 당신의 일이고 기쁨이요, 당신은 병든 사람들을 위한 의사요 때문에 모든 환자들의 부름에 응할 의무가 있는 거요, 그러니 우리를 도우시오."

[3]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오. 우리 마케도냐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같이 신앙에 대하여 부주의하고 무지하며, 우상을 섬기고 부도덕하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우리 자신을 파괴시키는 일에는 천재적이며 부지런하다오. 그러므로 속히 오시오. 될 수 있는 대로 가장 빨리 오시오. 할 수 있거들랑 우리를 불쌍히 여겨 도와 주시오."

[4] "우리들 중 몇 사람은 거룩한 것에 대하여 의심하고 있으며 그들 자신의 영혼과 다른 사람의 영혼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이성에 힘에 의하여 행하고 있소. 나도 그러한 사람들 중의 하나이요. 우리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우리들의 이웃들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예배하도록 노력하였소.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위해 별로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소. 그러니 어서 와서 우리를 도와 주시오. 당신들이 설교하는 복음은 우리들이 지금까지 가져 보지 못했던 설득력과 능력이 있소."

[5] "기도로만 우리를 도우려 하지 마시오.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소. 당신들이 직접 와서 우리를 도와 주시오." 사람들은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많은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러기에 그들을 도와 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그를 초청하는 것이 그들의 마땅한 의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2. 그 환상에 대한 해석(10절). 그들은 이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그들을 부르신 줄로 인정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이 지시하는 장소는 어느 곳이라도 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때로는 사람들의 부름을 통해 하나님의 부름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마게도냐 사람이 "와서 도와 달라"고 하자 바울은 가서 그들을 도우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인정했다. 사역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부른다는 사실을 인식하였을 때에는 커다란 즐거움과 용기를 가지고 그들의 일을 수행해야 한다. 복음을 전파하되 그가 부르신 지금 이 시간, 이 장소, 이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이다.

Ⅲ. 이로 인하여 바울의 마게도냐로의 항해. 바울은 "하늘의 환상에 복종하였다." 그는 그 자신의 의향과 계획을 수행하는 것 이상으로 더 즐겁고 만족하게 성령의 지시를 따랐다.

1. 그곳에 향해 바울은 그의 생각을 전향하였다. 이 일에 관한 하나님의 심정을 알게 되었으므로 그는 마음을 정하였다. 이제 바울은 더 이상 아시아나 비두니아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았고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썼다. 바울은 다만 환상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동료들에게 그것을 전했고 모든 사람이 그것을 신뢰하여 마게도냐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따르려 하였듯이 그의 모든 동료들도 바울을 따랐다. 또는 오히려 그들이 바울을 따름으로 그리스도를 따른 것이라고 하겠다. 그들은 지체없이 곧 이 여행을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즉각적으로 응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우리들이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에 논쟁의 여지가 없듯이 그것은 또한 연기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들의 마음이 굳어지지 않은 바로 오늘 그렇게 해야 한다. 그들은 즉시 마게도냐로 갈 수 없었으나 마게도냐로 가기 위해 즉시 노력하였다는 사실을 주의하자. 만일 우리들이 우리 자신의 일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빨리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신경을 쓴다면 우리는 노력한 것이 될 것이며 그 노력은 용납받을 것이다.

2. 이제 바울은 그곳으로 방향을 정하였다. 그들은 드로아를 출발하여 순조로운 항해를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이 다른 곳으로 그들을 부르실 때 그곳에 그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들은 순조로운 항해로 직선 거리를 달려 "사모드라게"에 왔다. 다음날 그들은 토라케(Thrace)와 마게도냐의 경계에 있는 도시인 네압볼리에 도착했고 마침내 빌립보에 착륙했다. 그 도시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마케돈(Macedon)의 빌립왕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불리워 이 도시에 대하여 다음 같은 사실이 전해진다(12절).

(1) 그것은 "마게도냐 지경의 수도였다"(역주:한글 개역과 틀림). 또는 어떤 사본이 전하는 것처럼 그들이 드로아를 떠나 도착한 "첫 성"이었다. 한 지역을 정복하고자 하는 계획으로 진군한 군대가 그들이 당도한 첫 장소를 함락시킴으로 공격을 시작하듯이 바울과 그의 동료들도 그와 같이 착수하였다. 그들이 그 나라의 관문인 첫 성에서부터 시작한 것은 만일 그곳에서 복음이 받아들여진다면 그 나라의 모든 곳으로 복음이 좀 더 쉽게 퍼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2) 그곳은 식민지였다. 로마인 수미대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도시의 주민들은 로마인들이었다. 주민들이 다 로마인이 아니었다면 적어도 행정 장관과 관리들은 로마인이었다. 그 곳에는 각양 각색의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따라서 선한 일을 행하는 데 최선의 지역이었다.

Ⅳ.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빌립보에서 받은 냉혹한 대접.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으로 그곳에 갔기 때문에 베드로가 천사의 지시로 고넬료에게 갔을 때에 고넬료의 환영을 받은 것처럼 그들도 그곳에서 즐거운 환영을 받게 되리라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아니 바울에게 그곳으로 될 수 있는 한 빨리 와 달라고 하던 마게도냐 사람은 어디로 가버렸단 말인가? 왜 그는 성 사람들을 충동하여 아니 적어도 몇 사람들만이라도 충동하여 가서 바울을 만나보라고 하지 않았을까? 왜 바울은 엄숙하게 소개되지 않았으며 그 도시의 열쇠가 바울의 손에 넘겨지지 아니했을까? 아니, 그러한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1. 바울 일행이 그곳에 온 것이 알려지게 된 것은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후였다. 본문에 보면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그들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합숙소에 머물렀거나 그들 자비로 그곳에 숙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루디아가 그들을 초대하기 이전까지는 식사에 그들을 초대해 줄 친구도 없었다. 그들은 그곳에 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서 재촉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 보니 그들이 전에 있던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앞길이 막막하였다. 그러나 그곳에 가는 것이 마땅한 행로였음을 생각할 때 그것은 그들이 침묵과 방치된 상태를 견디어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시험해 보기 위한 조치였음을 알게 된다. 그러한 뛰어나고 유능한 사람들이 무시당하고 천시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 이러한 세계에서 그들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 적합하지가 않다. 사역자들이 처음에는 어떤 장소로 와 달라는 간곡한 초청을 받고 그곳에 가나, 가고 나니까 그들을 소홀히 여기는 경우에 종종 직면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2. 그들이 설교할 기호를 얻게 된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비천한 소수의 무리가 모인 곳에서였다(13절). 본문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그곳에는 그들의 자유로운 출입이 가능한 유대인의 회당이 없었다. 심지어 그리고 그들은 이방인의 우상들이 들어 신전에 있는 청중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그곳에 갈 의향 또한 결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복음 전할 곳을 찾고 있을 때 "성전문의 개종자들이었던" 선한 여인들의 작은 집회처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들은 만약 사도의 일행이 복음을 전한다면 고맙게 여길 그러한 무리들이었다. 이 모임의 장소는 도시의 밖이었다. 그러므로 그곳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않는 곳이었고 성 안의 어떤 장소처럼 규제를 받는 곳은 아니었다. 그곳은 기도를 드리기 위해 마련된 장소로써 예배당이나 또는 아주 작은 회당과 같은 "기도의 집"이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바로는 우리가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무슨 건물이 있었기 보다는 기도를 위해 정해진 장소였던 곳으로 생각된다. 우상을 섬기지 않고 진실한 하나님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함께 기도하기 위해 거기 모였다. 그리고 가장 오래 된 공동 기도문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위하여" 모였다. 그들은 헤어져 있을 때도 매일 기도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외에도 그들은 "안식일에는 함께 모였다." 비록 그들은 소수에 불과했고 도시 사람들로부터 언짢은 눈치를 받았으며, 그들의 모이는 곳이 멀리 떨어진 곳이었고 나타난 바에 의하면 부인들밖에는 모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가져야 마땅한 엄숙한 집회가 개최되었다. 우리가 격식을 차려서 집회를 가질 수 없을 때에라도 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우리는 예배를 가져야만 한다. 만일 회당이 없다면 개인집에서라도 예배드려야 하며 그렇게 할 수 있음을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우리들에게 함께 모이는 일을 폐하지 않고 참석해야 한다. 이 장소는 "강가"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곳은 아마 기도나 묵상을 돕기 위하여 선택된 장소일 것이다. 우상 숭배자들에 대하여는 "골짜기 가운데 매끄러운 돌 중에 그들의 소득이 있다"고 말씀되고 있다(사 57:6). 그러나 이들 개종자들은 "그발 강가에서" 이상을 본 선지자(겔 1:1)처럼 또한 "힛데겔 강가에서" 이상을 본 선지자처럼(단 10:4) 환상을 보았을 것이다. 바울과 실라와 누가는 그곳으로 나아가 "앉아서" 그 무리를 가르쳤다. 또한 그들과 하던 가도보다 힘 있는 기도를 하였다. 그들은 "그곳에 오는 여인들에게" 말씀을 전하였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빛으로 그들을 격려했으며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그들에게 더하여 주었다.

Ⅴ. 루디아의 회심. 그녀는 아마도 그리스도를 믿게 된 최초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 사도행전의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어떤 장소에 교회가 있게 되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여러 특정 인물들의 호기심에 대한 이야기를 대하게 된다. 왜냐하면 영혼이란 대단히 귀중한 것이므로 한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은 대단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바울과 같이 기적에 의해서 감화를 받아 회심한 사람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본문의 루디아와 같이 일상적인 은총의 수단에 의해서 회심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이 회심한 사람에 대하여 특별히 고찰해야 할 사실들. 네 가지 사실들이 그녀에 대하여 기록되고 있다.

(1) 그 여자의 이름. 그녀의 이름은 루디아였다. 그 여인의 이름이 이 하나님의 책에 기록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그 여인에게 영예로운 일이다. 이러므로 "성경이 읽혀지는 곳에서는 어느 곳에서나 그 여인에 관한 이 일이 전해지게 되었던 것이다"(마 26:6-13; 막 14:3-9; 요 12:1-6). 성자(聖者)들의 이름은 하나님에게 귀한 것이며 우리들 또한 그것을 귀중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우리들은 우리 자신의 이름을 성경에 기록되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연다면 우리들은 우리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며 그리고 그것이 성경에 이름이 기록된 것보다 더 좋은 것이며 또 더 즐거워해야 할 일이다(눅 10:20).

(2) 그녀가 받은 소명. 그 여자는 "자주 장사였다." 즉 자색 옷감이나 또는 자색 비단을 파는 여인이었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그녀는 직업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순박한 직업으로써 역사가 누가는 이 사실을 특별히 언급하여 그녀를 높이 평가한다. 그 여자는 사도들이 말한 "게으를 뿐만 아니라 게으름을 배우는"(딤전 5:13) 그러한 여인들 가운데 속한 사람이 아니었다.

[2] 그녀의 직업은 초라한 직업이었다. 그녀는 성서에 몇 번 언급된 자주 옷을 입은 그러한 사람이 아닌 "자주 옷 장사였다" 이 사실을 본문에서 특별히 취급한 것은 정직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만일 그 일에 종사하는 데 있어서 정직하기만 한다면 그 직업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음을 말해 주고자 하는 데 있는 것이다.

[3] 그 여자는 신경을 써야 할 직업을 갖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자였고 그녀의 영혼을 위하여 시간을 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직업과 신앙은 서로 잘 조화가 되어야 한다. 직업 때문에 o인적, 가정적 신앙의 임무를 할 수 없다거나 또는 교회 집회에 참석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이유가 될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우리가 "돌보아야 할 가계가 있고 신경을 써야 할 직업이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영혼을 돌볼 수 있는가?"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렇다고 신앙을 위하여 이 세상에서의 직업을 그만두라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 안으로 들어가도록 지시한다. 모든 것은 그때 그때의 정황에 따라 적당히 안배되어야 한다.

(3) 그 여자의 거주처. 그녀는 빌립보에서부터 시작되는 국도상에 위치한 "두아디라 성"이었다. 그 여자는 그곳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빌립보로 출가하였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그녀의 직업 때문에 빌립보에 정착하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곳이 결정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이다. 또한 주거지를 가끔 옮기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이다. 즉 우리의 외적 조건이나 우리의 거주지를 바꾸심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의 은혜의 계획에 놀랍게 우리를 일치시키신다. 하나님의 섭리가 루디아를 바울의 전도를 받게 된 빌립보로 데리고 왔으며 그곳에서 그녀는 복음을 만나게 되었고 복음을 따르게 되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복음 전할 기회를 증진시켜야 하는 것이다.

(4) 하나님에 대한 그 여자의 신앙이 그녀의 마음 문을 열어 주었다.

[1] 그 여자는 그가 전에 알고 있던 방법에 따라 하나님을 예배했다. 그 여자는 경건한 여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때로 하나님의 은혜는 회심 이전에는 매우 사악하거나 비열한 세리나 창녀같은 사람들에게 임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너희 중에 몇 사람이 이러한 사람이었더니"라고 말한다(고전 6:11)(역주: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 그러나 때로 하나님의 은혜는 본래 좋은 성품을 지닌 사람들에게도 임한다. 예를 들어 이디오피아 내시나 고넬료나 루디아 같은 사람들이 그러한 경우에 속한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만 충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중재자로서의 그리스도에 의하지 않고서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에게 나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빛에 따라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가진 자에게 더 많은 것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환영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느낄 것이며 그의 중재가 어째서 필요한지 알 것이기 때문이다.

[2] 그 여자는 사도들의 말을 순종하였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기회가 언제나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을 듣는 것은 신앙적 예배의 일부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이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을 것이라고 어떻게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빛의 인도에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은 더 밝은 빛을 구해야 한다. 우리들은 일상의 매일매일을 선용하고 거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2. 그 여자에게 일어난 본문에 보면 "주께서 그의 마음을 열었다"고 하였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이 일의 주재자. 그것은 주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에게 심판이 위탁되어 있으며 또한 그의 "영"은 성결케 하시는 분이시다. 회심의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의 결과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 안에서 일을 계획하시고 또 그러한 일을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다. 그 말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우리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멸망할 자들을 멸망시키신다고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원받을 자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달린 문제이다.

(2) 이러한 역사가 일어난 장소.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진 곳은 마음이었다. 이러한 축복된 변화가 일어난 것은 루디아의 마음이었다. 회심의 문제는 심적인 문제이다. 그것은 "마음 즉 내적인 인간 또는 심령을 새롭게 하는 일이다."

(3) 이 역사의 본질. 그 여자는 마음에 감동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마음을 열게 되었다. 회개하지 않은 영혼은 닫힌 영으로 그리스도에게 담을 쌓고 산다. 그들은 여리고 성이 여호와를 향하여 그러하였듯이 "굳게 닫혀져 있다"(수 6:1). 영혼을 다루는 그리스도는 그를 향해 닫혀진 문을 두드린다(계 3:20). 그리고 조인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로 설득되고 나면 그는 "마음 문을 열고 영광의 왕을 맞아 들인다." 즉 이해가 열리어 거룩한 빛을 받아들이게 되며, 의지가 열리어 거룩한 법도를 받아들이게 되며, 감정이 열리어 거룩한 사랑을 받아들이게 된다.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해 열려 있을 때는 그의 말씀을 향하여 귀가 열리며 기도하도록 입술이 열리고 자신을 베풀 수 있도록 손이 열리며 복음에 복종하는 모든 생활을 향하여 생활의 폭이 확장된다.

3. 이 일이 마음에 미친 영향.

(1) 그 여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의 마음이 열리어지자 "그녀는 바울의 말을 청종케 되었다"(14절). 그 여자는 바울의 설교를 들으러 참석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주의 깊게 들었다. "그 여자는 바울에 의해 말씀된 내용에 자신을 비추어 보았다." 우리가 말씀에 자신을 적용시킬 때 그 말씀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며 우리에게 영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이제 그 여인이 마음을 연 증거이고 또 마음을 연 결과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이 열렸냐 하는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 참석하고 경청하는 일이 수반되느냐에 의하여 결정된다. 즉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또한 그 말씀에 밀접한 이해 관계가 달려 있는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말씀을 주의깊게 경청하느냐에 의해 우리의 마음이 열렸느냐 하는 문제는 드러난다.

(2) 그 여자는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전존재를 헌신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다. 그 여자는 세례를 받았고 이 신성한 의식에 의하여 그녀는 그리스도 교회의 일원으로 용인되었다. 그 여자와 함께 그 여자의 모든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그 여자에게 속한 사람은 어린이들도 세례를 받았다. 왜냐하면 "뿌리가 거룩하게 되면 가지도 역시 거룩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의 영향과 권위 밑에서 성장한 사람들도 세례를 받았다. 그 여자와 그의 가족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할례를 받은 것과 같은 규칙에 의하여 세례를 받았다. 왜냐하면 계약의 봉인(封印)은 계약자와 그의 자손들에게 속하기 때문이다.

(3) 루디아는 사역자들에게 매우 친절하였고 그들에 의하여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들을" 더 가르침 받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본문에 이르기를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만일 당신이 나를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여긴다면 내 집에 들어와 유함으로 나에 대한 신뢰를 증명하라"(15절)고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 루디아는 다음과 같은 기회를 얻게 되기를 원했다.

[1] 그 여인에게 임한 축복된 변화에 대하여 기록한 은총의 도구인 사역자들에게 그녀의 감사를 증명하고자 했다. 그녀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여 열렸을 때 그의 집 또한 하나님을 위하여 그의 사역자들에게 열리었다. 그리고 루디아는 진정한 마음으로 그들을 환영하였고 그것은 자기가 그들로 인하여 풍성하게 성령을 받은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사역자들은 그녀의 집에서 환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녀는 강권하여 그들을 자기집에 머물게 하였다. 그러므로 본문에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고 하였다. 이것은 사실 바울은 그곳에서 물러 나오려고 했으며 또한 그곳에 있기를 원치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신이 이제 새로 개종한 가정에 부담을 주게 될까봐 염려한 것이며 "보수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고전 9:18; 행 20:34). 그렇게 보수를 바라지 않고 일한다면 복음 전도자들이 의도적으로 자기 이윤을 추구하는 인간이라고 하는 비난을 받게 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세로 일하는 사람은 그들의 신앙에 의한 손실을 불평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루디아는 그러한 바울의 생각을 허용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녀는 사도들이 자기 집에 머물러 달라는 자신의 간청을 들어 주지 않는 한 그들이 자기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라고 믿으려 하였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천사들을 집 안에 초대한 사건과 비슷하다(창 18:3). 그는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데 종을 떠나가지 마옵시고"라고 말하였었다.

[2] 루디아는 좀 더 많은 것을 배울 기회를 원했다. 만일 그들이 그녀의 집에 함께 있게 된다면(잠 8:34) 그녀는 안식일의 모임에서만이 아니라 매일 그들에게서 복음을 듣게 될 것이었다. 그녀의 집에서는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물을 수도 있었고 그들과 함께 매일 기도하며 또한 그들은 그의 가정을 위해 축복해 주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에 관해 무엇인가 아는 사람들은 더욱 알게 되기를 갈망하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해서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을 좀더 증진시킬 기회를 찾게 되는 것이다.

 

16:7 없음.

 

16:8 없음.

 

16:9 없음.

 

16:10 없음.

 

16:11 없음.

 

16:12 없음.

 

16:13 없음.

 

16:14 없음.

 

16:15 없음.

 

16:16

악령의 축출(사도행전 16:16-24)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얼마 동안은 빌립보에 알려지지 않고 지냈으나 이제 알려지기 시작한다.

Ⅰ.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때문에 그들은 알려지게 되었다. 그녀는 바울 일행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외쳤다.

1. 이 여종에 대하여 소개된 내용. 그 여자는 무녀로서 초월적인 능력에 사로잡힌 자였다. 그 여종은 텔포스 신전에서의 아폴로에게서 신탁을 받아 전하는 역할을 하는 그러한 여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 여자는 악령에 사로잡혀 있어서 그녀에게 의견을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애매한 대답을 하여 주곤 하였다. 그녀는 다가오는 내일의 일을 알고자 하는 그들의 헛된 욕망을 만족시켜 주고 있었으며 그녀의 점궤는 자주 틀리기도 하였다. 그러한 무지와 신앙과, 우상 숭배의 시대에는 악령이 신의 허락에 의하여 사람들을 자기의 뜻의 노예로 속박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그들에게 신탁을 줄 수 있는 것처럼 가장하지 않는다면 그는 지금 그가 받고 있는 것과 같은 그러한 숭배를 받을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러한 수단에 의하지 않고는 이 세상의 신으로서의 자신의 월권행사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 여종은 "점으로 그의 주인을 크게 이롭게 하는 자라"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강도들을 찾아 내기 위해서 혹은 잃어버린 물건을 찾기 위해서 이 무녀(巫女)의 의견을 들으러 왔다. 그리고 특별히 그들의 운명을 들어보기 위하여 오기도 했다. 그리고 올 때는 그 사람의 지위나 사건의 중요성에 따라서 신탁에 대한 보수를 지불하였고 아무도 빈 손으로 오지 않았다. 아마 그곳에는 많은 수의 점장이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여종은 그 많은 점장이들 중에서도 명성이 있는 점장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것에 의해 돈을 벌어 들였으나 이 여종은 누구보다 찾아 오는 사람이 않았으므로 "그녀의 주인들을 크게 이롭게 하였다"는 사실을 보아서이다.

2. 이 여종이 바울과 그의 동료들에게 한 증언. 그녀는 그들을 거리에서 만났다. 그들은 기도하러 가고 있었다(16절). 그들은 그곳을 공공연하게 갔다. 그러므로 누구나 그들이 어느 곳으로 가는지 또 무엇을 하러 가는지를 알고 있었다. 만약 그 여자가 행한 일이 그들의 정신을 혼란시켰거나 그들의 일에 방해가 되었다면 대단한 유혹자인 사탄이 우리가 신앙적인 행위를 하려 할 때 우리를 혼란시킬 기회를 포착하는데 얼마나 간교하게도 재빠르며 우리에게 가장 안정이 요할 시기에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거나 우리를 격분하게 하는 기호를 포착하는 데 얼마나 간교한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여자가 그들을 만났을 때 그 여자는 그들을 따르며 외쳤다. "이 사람들은 외모는 비록 초라하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위대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환영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전해 주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복이 될 구원과 그 구원에 이르는 길인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길을 전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그 증언이 진실하였다는 점이다. 그것은 신실한 복음 전도자들을 이해한 데서 온 찬사이며 그들의 행적을 아름답게 나타내는 찬사였다(롬 10:15). 비록 그들이 "우리들과 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들이요" 또한 "흙으로 만든 질그릇들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면이 있었음을 그 여종은 말한다.

[1] "그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이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고용되어 하나님을 봉사하고 종들로서 그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자로서 우리에게 왔으며, 하나님의 사신을 가지고 왔고 하늘 나라의 목적과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이방인들이 숭배하는 신은 그에 비하면 낮은 존재이다. 우리가 섬기는 것은 사실은 신은 아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인 최상의 누멘(영지주의의 용어 최고의 신을 일컫는 말임)에게 속한 사람들이다. 그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다스리며, 모든 신들을 다스리고 우리 모두를 창조한 분이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그를 섬길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의 종들이며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을 존경해야 하고 그들의 주님 때문에 그들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우리가 그들을 적대한다면 그것은 우리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2] "그들은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다." 이방인일지라도 인간적으로 비참하고 애처로운 상태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구원에 대한 필요성도 인식하고 있다. 바로 사도들이 전한 말씀이 그들이 추구해 왔던 것이었다. 그 여자는 "이제 이 사람들은 우리들이 승려와 신탁을 믿고 구한 미신적이고 무익한 신뢰의 헛됨을 보여 줄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명백하게 구원의 길을 보여 주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하나님은 우리들이 죄에 의하여 겪게 될 비참에서 구원을 받기 위하여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그의 아들의 복음에서 명백하게 말씀한다는 사실 또한 기억하자.

(2) 점치는 혼을 가진 사람의 입을 통하여 이러한 증언이 가능한 이유. 사탄이 스스로 분열을 일으켜 자신을 대적한 것인가? 아니면 그를 끌어 내리려는 일을 행할 저희를 보고 사탄이 통곡한 것인가? 그것은 두 가지 이유 중에 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1] 이 귀신들린 여인에게 이러한 고백이 강요된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으로 복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악령이(막 1:24)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 경우라고 하겠다. 진리는 가끔 진리의 적대자의 고백을 통해서 존귀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그러한 증언을 한다. 사도들을 무시하고 박해한 빌립보 사람들을 심판하실 때 이 여종의 증언을 내세워 심판하고자 하실 것이다. 사실 복음은 그러한 증언을 필요로 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보인들이 다른 모든 일에 대한 그녀의 말을 신탁으로 간주하는 여종을 통하여 사도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선포케 함으로 그들을 권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2] 아니면 이것은 복음을 손상시키기 위하여 간교한 뱀인 악령에 의해 계획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어떤 사마들은 그 여자가 이렇게 함으로 자신의 예언의 신망을 높이고 또 그녀가 생각하기로는 앞으로 계속 유명해질 사도들을 돕는 것처럼 가정하여 또는 바울에게 아첨함으로써 바울이 그 여자와 그녀의 고객들을 떼어 놓을 수 없게 함으로 자기 주인의 이익을 증대시키고자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이들은 자신을 빛의 천사로 변신시킬 수 있고 사태를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말이든 할 수 있는 사탄이 이를 통하여 사도들을 망신시키기로 계획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사탄은 자기의 종들을 동원하여 그들에 대하여 증언케 함으로 이들 사도들의 신통력도 결국 자기의 수하들의 신통력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예전에 섬기던 것을 그대로 섬겨도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여기게 하려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가장 잘 받아들인 것 같은 그 사람들도 점치는 자들을 자칫 좋게 생각하므로 그들의 이러한 증언에 의해 복음에 대해 편견을 가지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장이들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악마는 자신의 생각을 그들에게 확신시킬 것이다.

Ⅱ.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이 여종에게서 악마를 추방할 능력을 줌으로써 그들을 알려지게 하셨다. 그 여자는 "여러 날을" 이같이 소란을 부렸다(18절).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그 여자로 당신 자신의 사역자들에 관하여 증거하도록 한 사실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그녀를 모른 척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그는 그 여자의 말이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기 보다는 그들에 대한 왜곡된 생각을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될까 보아 그녀에게서 악마를 쫓아냄으로 그녀를 잠잠케 하였다.

1. 바울은 "괴로와하였다." 바울은 그 여종이 사탄의 도구가 되어 사람들을 속이고 또 그 여자의 점괘에 의해 사람들이 현혹되고 있음을 보고 괴로와하였다. 이렇게 더러운 자를 통하여 거룩한 진리를 듣게 된 것과 또한 이 악한 자의 입에서 악한 의도에 의해 선한 말씀이 나오는 것을 듣는 것은 바울에게 괴로움을 주었다. 아마도 빌립보인들은 그리스도의 박해자들이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외치며 조롱으로 찬양했듯이 사도들의 주장을 비웃고 조롱하며 빈정거린 것처럼 여겨진다. 그때 바울은 선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실이 거리에서 위선적이고 조롱석인 말씨로 외쳐지고 있는 것을 들을 때 괴로워하듯이 그가 괴로워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2. "바울은 악령에게 그 여자에게서부터 나오라고 명령했다." 그는 "더러운 영"의 뒤섞인 감언이설과 비난에 대하여 거룩한 의분과 분노를 가지고 돌아섰다. 그리고는 "돌이켜 그 귀신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고 말하였다. 이것으로 바울은 그 동료들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종들이라는 것"을 보여 주려고 했으며, 그 여자의 증언 없이도 그들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의 종임을 증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고 하였다. 그 여자가 잠잠하고 있는 것이 그 여자가 말하는 것보다 더 그들의 하나님의 종됨을 증명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같이 맘으로 바울은 진정한 "구원의 길"을 보여 준다. 구원의 길은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고 그를 사슬에 묶어 그리하여 세상을 속이지 못하게 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며"(계 20:3) 그리고 이 구원은 다른 이름이 아니고 예수의 이름에 의해서 이제 악마가 축출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만" 얻어지는 것임을 보여 주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그들을 괴롭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게 만드는"(마 8:28) 자들에게서 말씀으로 악마를 쫓아내심은 그 지방에 커다란 축복이 되었다. 그러나 바울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그들로 계속 불신하게 하던 사람에게서 악마를 축출한 것은 그 지방에 더욱 큰 친절이 되었다. 능력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함께 했으며 그 앞에서 사탄은 견딜 수가 없었다. 다만 그의 요새를 떠날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은 더 강한 요새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본문에 "귀신이 즉시 나오리라"고 하였다.

Ⅲ. 그 여종이 무능하게 되지 주인은 사도들의 행위를 이유로 지방장관에게 그들을 끌고 가 고소함으로써 사도들이 더욱 알려지게 하였다. 복음 설교자들은 박해자들이 그들을 악행자로 롬아 공직자들 앞에다 끌어다 세우지 않는다면 이들 공직자들에게 설교할 기회를 결코 갖지 못하였으리라.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주인들을 격노케 한 것은 그 여종이 정상적으로 회복된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본문에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19절)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가 됨을" 주의해야 한다. 복음의 선포가 은장색(銀匠色)의 사업을 망치게 하였고(19:24) 본문에서는 더 나아가서 거짓 예언자의 기능을 소멸시키게 되자 커다란 소동이 일어났다. 이 때마다 사실 사람을 속이는 사탄의 권세는 깨어진 것이다. 승려들도 복음을 미워하게 되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말도 못하는 우상의 맹목적인 봉사로부터 전향하게 함으로 그들의 이익의 소망이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여인의 정신을 정상으로 돌려 주었고 또한 그녀를 사탄의 마수에서 구해내는 큰 일을 행한 그리스도의 능력도 그들에게 이러한 이유로 돈을 잃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였을 때에는 그들에게 아무런 감명도 주지 않았다.

2. 그들이 사도들을 끌고 다닌 과정. 그들은 고위층에게 아부하여 사도들을 처형받아야 할 자들로 몰아 붙였다. 그들은 사도의 일행을 붙잡아 "재판이 집행되는 저자로 끌고 갔다."

(1) 그들은 사도들을 관원들에게 끌고 갔다. 즉 평화의 수호자요 옳게 법을 집행해야 마땅한 자들 앞으로 끌고 갔다.

(2) 그 다음 그들은 서둘러서 사도들을 관원들로부터 이번에는 도시의 집정관이요 통치자인 그 성의 감독들에게 데리고 갔다. 그들은 또한 그 성의 strathgoi/j - 즉 군대장관이기도 하였다. 여하간 이 사람들은 최상적인 판사나 최고 관원이었다. 이 사람들에게 그들은 자기들의 불만을 호소하였다(역주:통상 로마의 각 지방에는 두 명의 통치자가 있었다. 그러므로 본문에 "상관들"이라고 복수로 된 것이다).

3. 그들이 사도들을 고발한 내용은 사도들이 그 지역을 소란스럽게 하는 자들이라는 것이었다(20절). 그들은 사도들을 유대인들로 간주하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옛날 에집트 사람들에게 증오를 받았듯이 로마 사람들에게도 미움을 받고 있었다. 사도들이 경건하여 흠잡을 것이 없자 그들이 유대인인 것을 고소의 이유로 삼았다. 그러나 사실 유대인들은 사도들을 가장 무섭게 박해하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1) 사도들을 고발한 일반적인 이유는 그들이 "성을 요란하게" 했다는 것이었다. 즉 불화를 심으며 공고 평화를 해치며 때로는 반란과 폭동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소는 아합이 엘리야를 평한 것 만큼이나 거짓되고 부당한 것이었다(왕상 18:17). 성경에 보면 아합이 엘리야를 보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여"라고 하였었던 것이다. 만일 그들이 그 성을 요란하게 하였다고 해도 그것은 천사들이 벳세다 연못의 물을 요동하게 한 것처럼 치료를 위해서 즉 행복한 안정을 회복하기 위하여 소요를 일으킨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같이 게으른 자들을 일으켜 세우려는 자들은 그들을 괴롭히는 자들이라고 흔히 모함을 받는 법이다.

(2) 이 고소의 증거로는 그들이 로마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 적당하지 않은 풍속을 가르친다는 것이었다(21절). 로마인들은 언제나 그들의 종교가 개혁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것이 옳거나 그르거나, 혹은 아무리 공허할지라도 그들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고수하려고 하였다. 어떠한 이방신이나 갑작스럽게 출현한 신도 의회의 허락 없이는 용인될 수 없었다. 그것이 진실되건 거짓이건 그들 나라의 신들은 그들의 신이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12동판법 조항 중에 한 조항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즉 "한민족은 그들의 신들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점을 이용하여 사도들이 다신(多神)과 우상 숭배를 파괴하는 신앙을 가르치며 그러한 된 것들로부터 돌아서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친다고 고소하였다. 이 점에 대하여 로마인들은 참을 수 없었다. "만일 이것이 우리들에게서 퍼지기 시작하면 오래지 않아 우리들은 우리 자신의 종교를 잃게 될 것이다"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Ⅳ. 행정관들이 이 사건을 심의함으로써 사도들이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1. 그들은 박해를 지지함으로써 군중들로 사도들을 타도하는 시위를 벌리게 하였다(22절). 그러므로 본문에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고"라고 하였다. 사도들에게 가해를 하고자 하였다. 하나님의 사역자들과 백성들을 그들이 헌법을 파괴하고 관습을 바꾸는 것을 기도하는 위험스러운 인물들로 몰아붙임으로(사실 그들에게 이러한 비난을 받을 만한 이유가 없는 데도) 사탄은 그들을 공공이익에 위해로운 자로만 돌리는 것이 그의 술책이다.

2. 집행을 계속 추진하면서 그들은 사도들을 가장 비열한 악한들이라고 주장하였다. 분노와 격분으로 "그들은 사도들의 옷을 찢어 벗겼다." 그들은 너무 격분하여 옷을 가만히 벗길 수 없었다. 그러므로 찢은 것이다. 이는 그들을 채찍질하기 위해서였다. 이 일을 가리켜 바울은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다."는 말로 표현한다(살전 2:2). 행정관들은 집정관의 수행을 들고 있는 형리에게 그들에게 부량배 다루듯이 채찍질을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인들의 관례에 의해 채찍을 맞은 사건 중의 한 사건이었다. 유대법에 규정된 매질은 마흔 번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법에서는 채형자를 동정하여 채찍수를 제한하는 법은 없었다. 본문에 보면 몇대인지 얘기되지 않고 다만 "많이 쳤다"고 말하고 있다(23절). 그들이 사도들에게 이렇게 매질한 것은 사도들을 악한자로 간주하였기 때문이었다(신 25:3). 이만하면 그들의 잔인성도 충족되었을 것이라고 흔히 생각할 것이다. 이제 채찍질을 당한 것으로 그들을 놓아 줄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은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그것은 아마도 사도들을 죽이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한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경계를 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1) 재판관들은 관리들에게 든든히 가두어 두라고 부탁하였다. 본문에 보면 그들은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고 하였다." 그들은 사도들이 마치 위험한 인물들이나 되는 것처럼 감시의 눈을 엄중히 하였다. 그들은 사도들이 감옥을 깨뜨리는 모험을 감행하거나 그들의 동료들이 그들을 구출할까봐 감시를 엄중히 한 것이다. 이같이 그들은 사도들을 악한 자로 몰아 붙이려고 노력하였고 그들을 그렇게 낮은 인간들로 취급함으로써 자신들을 정당화시키려고 하였다.

(2) 간수는 사도들을 든든히 지켰다(24절). 간수는 "이러한 경고를 받고" 사도들을 바깥 감옥에 두고도 안전하게 감시할 수 있었지만 "저희를 갚은 옥에 가두었다." 간수는 행정관이 이 사람들에 대해 매우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들을 심하게 다루는 것을 알고 자기도 자기의 권력이 허용하는 한 그의 권력을 그들에게 행사함으로 사도들을 냉혹하게 대하려고 생각하였다. 상관들이 악할 때 그 아래 하급 관리들도 역시 악하다고 하는 사실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는 "사도들을 깊은 감옥에다 가두었다. 이 지하 감옥은 일반 죄수들은 그곳에 가두지 않고 악질적인 죄수들을 가두는 곳이며 대낮에도 어둠컴컴하고 눅눅하고 춥고 더러우며 모든 것이 불쾌한 그러한 곳이었다. 그것은 예레미야가 갇혔던 감옥과 같은 곳이었다"(렘 38:6). 그리고 그것도 부족하여 간수는 그들의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다." 아마도 그는 "복음 전도자들이 단단히 잠긴 문을 열고 감옥에 빠져 나갔다는"(5:19; 12:9) 소식을 들었으므로 그래서 그는 자신이 다른 간수들보다는 더 현명하게 그들의 발에 착고를 채워 그들을 효과적으로 감시하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사도들이 발에 착고를 찬 하나님의 사자들로서 첫 번째 사람들은 아니었다. 예레미야도 그러한 취급을 받았다. 더구나 그는 "베냐민의 윗문에서" 공공연하게 그러한 고형을 치루었다(행 20:2). 요셉도 종으로 팔릴 때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다"(시 105:18)고 하였다. 이전 시대에나 후대에서나 하나님의 종들은 얼마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가! 순교 집을 보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난을 당하였는가, 특히 메리 여왕 때에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하였다.

 

16:17 없음.

 

16:18 없음.

 

16:19 없음.

 

16:20 없음.

 

16:21 없음.

 

16:22 없음.

 

16:23 없음.

 

16:24 없음.

 

16:25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사도행전 16:25-34)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과 실라에 대한 박해자들의 계획이 좌절되고 깨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Ⅰ. 박해자들은 복음 전파자들을 상심시키고 실망시키려고 하였으며 그들이 복음 전한 것을 후회하고 그들의 일에 싫증을 내게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더 열심을 내고 용기를 내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1.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열심을 내었다. 그들은 불쌍한 죄수들의 모습과는 달리 아주 유쾌한 모습이었고 그들이 받은 심한 학대를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그들의 정황이 어떠했는지를 생각해 보자. 로마인들 중 집정관들은 그들을 매질하였으며 이제는 단두대에다 그들을 참수하려는 참이었다. 그들은 채찍자리가 쑤셔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등은 쟁기질을 하여 길다란 도랑을 만들어 놓은 형국이었다. "그들에게 가해진 매는 매우 쓰라린 것이었다. 그러기에 누구나가 그들이 그들의 어깨와 등에 난 상처에 대해 불평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예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매질이 전부가 아니었다. 다음에 그들은 참수형을 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할 입장에 있었다. 그들의 주님도 처음에 채찍을 당하고 다음에 십자가에 처형되었던 것이다. 그들도 그와 같은 결과를 예상하고 있어야 했다. 지금 그들은 깊은 감옥에서 착고를 차고 있었다. 어떤 이는 그 착고가 그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상처를 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한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하려고 시도해 볼 수 있는 "한밤중에"도 그들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다."

(1) 그들은 함께 기도하였다. 그들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고들을 위로하고 떠받쳐 주도록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요셉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행하셨듯이 그들을 찾아와 그들과 함께 있어 주기를 기원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한 그들의 고난이 풍성하듯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들의 위로도 풍성해지기를 기원했다. 또한 그들의 갇힘과 매 맞음이 복음의 진보를 이루는 계기가 되기를 기도했다. 그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시고 회개하게 해 주실 것을 기도했다. 당시는 정한 기도의 시간이 아니라 "한밤중"이었다. 또한 그곳은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지하 감옥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기도하였고 그 기도는 열납되었다. 어둠 속에서는 물론 깊은 절망 가운데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그들의 심정이 하나님에게까지 들리워진다면 기도하기에 나쁜 장소나 시간이란 없는 것이다. 고통을 함께 받고 있는 자들은 함께 기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고난이 있는가? 기도하도록 하라"고 기록되었다. 아무리 극심한 고난이라도 우리에게서 기도할 마음을 빼앗을 수는 없는 것이다.

(2) "그들은 하나님을 찬미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에게 찬양할 마음만 있으면 찬양할 조건은 얼마든지 있다. 지하 감옥과 두 발에 채여진 착고가 그들이 찬양하는 것을 막지 못하였는데 그 어떤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심정에서 찬양의 의무를 제거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이 값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어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고난을 놀라울 정도로 참고 이겨낼 수 있음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했다. 또한 그들은 성령의 위로를 그들의 영혼에 그렇게 달콤하고 강하게 느낄 수 있음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했을 뿐 아니라 노래로 그를 찬양했다." 그들은 시편이나 찬미가 혹은 영가로 찬양했으며 다윗의 시나 혹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즉흥적으로 찬양했다. 성경의 고난 당하는 자가 있으면 기도하라는 말씀에 따라 그들은 고난에 처해 있기에 기도했다. 또한 성경에 즐거운 일이 있으면 시편을 노래하라는 말씀에 따라(약 5:13) 그들은 고난 중에서도 즐거웠으므로 그들의 경건한 기쁨을 찬미하였다. 이 사실은 시편에 대한 노래가 복음의 규례임을 입증해 준다. 따라서 찬양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행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 사실은 찬양은 그들의 승리의 날에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서만 부를 것이 아니라 고난의 날에 그들의 슬픔을 위무하고 평정하기 위해서 제정된 것임을 입증해 준다. 그들이 시편을 찬송한 것은 한밤중이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시편 찬미자의 본을 따른 것이다(시 119:62). "내가 주의 의로운 규례를 인하여 밤중에 일어나주께 감사하리이다."

(3) 여기서 우리는 주위에 있던 "죄수들이 그것을 들었다"고 하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죄수들은 그들이 기도하는 소리는 듣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그들은 "찬송하그런데 것은 들었다."

[1] 이 사실은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하나님께 찬송하였느냐 하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비록 그들은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모든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힘차게 불렀다. 사실 그렇게 힘차게 불렀기 때문에 그들은 죄수들을 깨우고 말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밤중이었으므로 그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으리라는 것은 능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심정을 다해 찬송해야 한다. 구약의 성도들에게 침상에서도 크게 노래할 것이 요청되고 있다(시 149:5). 그러나 복음의 은총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감옥에서 착고에 메어서도 힘차게 찬송한 사람들의 본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2] 비록 시도들은 다른 죄수들이 그들의 노래를 들으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들은 크게 찬양했다. 그들은 그들의 주님과 또 그를 섬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들의 가정에서 시편을 노래해야 할 자들이 그들의 이웃이 찬송 소리를 들을 것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의무를 생략하겠다고 한다면 그러한 변명이 있을 수 있는 일일까? 더러운 노래를 부르는 자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누가 듣든지 개의치 않는데 말이다.

[3] 죄수들은 바울과 실라가 옥중에서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 그들은 바울과 실라를 인하여 "감옥 문이 열리게 되는" 기적적인 은총을 볼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받은 이 특별한 위로에 의하여 그들이 전한 그 분이 바로 "이스라엘의 위로자"이심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분을 적대하던 죄수들은 그 위로자 앞에서 떨었을 것이고 그를 신뢰한 사람들은 그의 승리를 기뻐하고 죄수들에게 말씀된 소망의 위로를 받았다(슥 9:12).

2. 하나님은 사도들에게 징표를 보여 줌으로써 그들을 놀랍게 격려하셨다(26절).

(1) 갑자기 대 지진이 일어났다. 지진이 어느 정도였는지 우리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옥터가 움직일 정도로" 그곳에 강한 충격을 주었다. 죄수들은 바울과 실라가 한밤중에 예배 드리는 것을 듣고는 아마도 비웃고 비꼬면서 야유했을지 모르지만 이 지진은 그들을 공포에 사로잡히게 하였으며 사도들은 하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며 하나님이 인정한 그러한 사람들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들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그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용납하신다는 징표로써 "모인 곳이 진동한" 사실에 대한 말씀을 알고 있다(4:31). 이곳에서는 "감옥이 흔들렸다." 이 지진을 일으킨 것은 주님이었다. 그것은 그의 종들에게 행한 무뢰함에 대한 분노의 표시이며, 그들이 신뢰하고 있는 것이 이 땅에 있고 약하고 불완전한 이 땅의 것들을 신뢰하는 사람들을 시험하기 위해서이며, 교인들에게 "비록 땅이 흔들릴지라도 그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2) 감옥 문이 열리고 죄수들의 착고가 풀어졌다. 그러므로 본문에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고 하였다. 아마 어떤 죄수들은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는 것을 들었을 때 그들을 칭하하고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라고 말했으며 여종이 그들에 대해 말했듯이 "이 사람들을 확실히 살아 있는 하나님의 종들이다"고 말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사도들에 대한 그들의 좋은 생각을 보상하고 또 확신시키기 위하여 그들도 그 기적에 참여하여 "그들의 매인 것이 다 풀리었다." 후에도 하나님은 바울에게 "그와 함께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을 그에게 허락하신 것이 있었다"(행 27:24). 그러나 지금 하나님은 바울에게 감옥에 있는 모든 사람을 허락하셨다. 그로티우스(Grotius)가 지적한 대로 이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은 사도들이 복음을 전함으로 그들이 인류에게 공통된 축복이 되었음을 알게 하신다. 즉 그들이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였음"을 알게 하신다(사 61:1). 그러나 Et per eos solvi animorum vincula - 즉 그렇다고 그들의 영혼의 속박까지 풀린 것은 아니었다."

Ⅱ. 박해자들은 더 이상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복음의 진보를 정지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강가에서의 모임을 파괴하기를 희망하였으며 더 이상 그들의 마음이 거기서 열리어지지 못하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에서 감옥 안에서도 개종하는 일이 생기고 그 감옥이 모임의 장소가 되며, 복음의 승리의 트로피가 바로 이 곳에 세워지며, 간수와 그의 종들이 그리스도의 종이 된 사실을 목격하게 된다. 아마 전부 모든 아니었을지라도 약간의 죄수들도 개종하였을 것이다. 그들을 붙들어 맨 사슬을 끊음으로써 육신에서 일어난 기적은 그들의 영혼에도 역시 일어났다(욥 36:8-10; 시 107:14, 15 을 참조). 그러나 여기서는 다만 간수의 회개 사건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1. 간수는 이 일로 인하여 그의 생명을 잃을까 두려워하나 바울이 이 일에 대해서 그를 안심시킨다(27, 28절).

(1) "간수가 자다가 깨었다." 그는 지진의 충격과 감옥문의 열림, 어둠 속에서 착고가 풀린 것을 본 죄수들의 기쁨과 놀라움의 표현, 이 사실에 대해 그들은 서로 그들이 느낀 것을 이야기 하는 소리가 아마도 간수를 깨웠던 것 같다. 이 일은 잠을 깨우기에 별로 어렵지 않는 곳에 있었던 그를 놀라 깨어나게 하는 데 충분했다. 간수가 잠에서 깨어남을 그의 양심이 영적인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의 부름은 요나에게 들린 소리와 같이(요 1:16) "잠자는 자여 깨어서 일어나라"(엡 5:15)는 것이다.

(2) 간수는 감옥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 사실 그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죄수들이 도망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에게 어떠한 일이 닥치겠는가? 그는 이러한 경우에 적용되는 로마의 법을 잘 알고 있었다. 베드로를 놓친 그 간수는 오래지 않아서 처형되었던 것이다(행 12:9). 이것은 "이 사람을 지키라. 만일 저를 잃어버리면 네 생명으로 저의 생명을 대신하리라"는 예언과도 일치하는 조치였다(왕상 20:39, 42). 이 일이 발생한 후 로마의 법률가들은 범죄자들의 감금에 대한 법(이 법에서는 만일 간수가 죄수를 놓치면 간수가 대신 그 죄수가 받을 벌을 똑같이 받으라고 규정하고 있다)에서 기적에 의한 탈출로 간수를 처벌하는 것은 예외로 하기로 하였다.

(3) 그는 놀라서 "검을 빼어 자결하려고 하였다." 그것은 그가 각오해야 할 처참한 죽음, 대단히 굴욕적인 죽음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의 죄수들을 도망하게 하고 그들을 잘 살피지 못한 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행정 장관들이 바울과 실라에 대하여 특별히 엄하게 지키라고 하였는데 이제 만일 그들을 놓쳤다면 행정 장관들이 자기에게 대단히 가혹하게 하리라고 결론을 내렸다. 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자살을 인정한다. 세네카(Seneca)는 자살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치료라고 말한다. 이같이 스토아주의자들은 정욕을 극복한 것처럼 하면서도 그것들에게 사실은 굴복했다. 그리고 감각적인 희열에 탐닉하는 쾌락주의자들은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차라리 죽음을 선택함으로 쾌락에 종지부를 찍는다. 이 간수는 자살하면 아무런 징벌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에게 속하였음을 이 죽음에 의해 증명한다. 기독교는 우리가 창조의 법을 지킬 것을 바란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생명에 충실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우리에게 생명을 은혜에 기꺼이 맡기되 우리들의 스러져감에 대향하여 용기있게 생명을 지킬 것을 가르쳐 준다.

(4) 바울은 자살하려는 그의 행위를 멈추게 하였다(28절). 본문에 보면 그는 "크게 소리 질러 가로되 즉 그가 듣고 놀라 멈칫 할 정도로 말하기를 네 몸을 상하지 말라. 네 몸에 스스로 악을 행하지 말라"고 하였다. 죄와 죄의 모양과 죄에 접근하는 모든 일들에 대한 하나님 말씀에 의한 모든 경고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뜻한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남자나 여자나 자신을 해치거나 멸망시킬 수 없고 자신을 상처내서는 안 되며 어느 누구도 자신을 해칠 수는 없다. 죄를 짓지 마라. 그리하면 어느 것도 너희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의 육신에 대해서도 그것을 해치는 죄를 짓지 말라는 경고가 주어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귀히 여기고 소중히 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그 간수는 그의 죄수들이 도망친 것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하여 소환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감옥 문이 열리고 그들의 착고가 풀이었는데도 그들 중 어떤 사람들도 도망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놀라움이 그들을 꼼짝 못하게 하였고 또 그들이 풀려난 것이 바울과 실라의 기도에 의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사도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들도 움직이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은 그들의 발을 풀어 주었으나, 그의 능력으로 그들의 영혼을 사로잡으신 사실을 보여 주었다.

2. 그 간수는 그의 영혼을 잃을까 봐 두려워한다. 그러자 바울은 이 염려에 대해서도 그를 안심하게 하였다. 한 가지 관심이 그를 다른 관심에로 이끌었고 더 큰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였다. 간수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죽으려는 시도가 방해당하자 그는 만약 죽음이 그에게 닥친다면 죽음적 편에서 그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것은 "불 속에서 끄집어낸 타다 만 장작과 같이" 죽음의 경각에 처해 있었던 그로서는 적절한 생각이었다. 아마 그가 달려가던 죄의 가증스러움이 그에게 경고가 되었으리라.

(1) 이유야 어떻든 간에 그는 대단히 당황하였다. 확신시키기 위하여 보내진 하나님의 성령이 그로 자기가 위로자이심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그를 놀라게 했고 공포에 몰아 넣었다. 그가 다시 감옥 문을 닫아 걸었는지는 본문은 우리에게 전해 주지 않는다. 그는 아마 사마리아 여인이 그리스도에게서 자신의 양심을 확신시키는 감명을 받았을 때 우물에 온 자신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물동이를 놓고 가버렸듯이 문닫는 것을 잊어버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최고의 속력으로 등불을 달라고 하여 깊은 감옥으로 뛰어 들어와 무서워 "떨면서 바울과 실라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 죄를 진 사람들이 자신을 발견하고 그들이 저지른 추행을 알게 될 때 그들의 비참과 위험을 이해하게 되었으므로 두려워 떨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간수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자 자신의 사정을 호소할 사람은 바울밖에 없음을 알았다. 그 이유는 바울 자신이 간수와 같은 경험을 하였었고 선한 사람들의 박해자였으며 그는 이 간수와 같이 그들을 감옥에 집어 넣고 감시했으며 간수와 같이 그가 자신을 깨달았을 때 "놀람과 두려움으로" 떨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 간수에 대하여 더 친밀하게 말할 수가 있었다.

(2) 이 당혹함 속에서 그는 바울과 실라에게 구원을 청했다.

[1] 간수의 그들에 대한 공손하고 존경한 어조. "그는 등불을 달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어둠 속에 있기 때문이었고 또한 그들에게 자기가 얼마나 놀란 상태에 있는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였다."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깨닫고 그것으로 인한 짐스러운 공포 때문에 팀으로 가라 앉으려고 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엎드렸다. 그는 그의 영혼에 그들에 대한 경외를 품고 또한 그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또한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위탁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그들 앞에 꿇어 엎드렸다. 그는 아마 귀신들린 여종이 그들에 대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종이며 구원의 길을 그들에게 보여 줄 사람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에게 그의 존경을 표시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그가 범한 무뢰에 대하여 회개하는 사람으로서 그들의 용서를 빌기 위하여 무릎을 꿇어 엎드렸으며,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간청하는 자로서 그들의 충고를 구하기 위해 부복했다. 그는 사도들에게 존경하는 호칭인 "선생님" 또는 "주님"(kurioi)이라고 불렀다. 지금까지 사도들은 부랑자요 악한으로 취급되었다. 그리고 간수가 그들의 주인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선생님"이나 "주님"이 되었고 그들이 그 간수의 주인이 되었다. 회개의 은총은 사람들의 말투를 바꾸게 하며 좋은 사람, 좋은 사역자들로 변화시킨다. 또한 회개의 은총은 죄를 확실히 깨닫게 해 주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을 아름답게 하는 요인이 된다. 그들이 비록 불명예스러운 착고를 차고 있을지라도 그들의 발은 복음전하는 자의 아름다운 발인 것이다.

[2] 그의 물음의 진지함. 그는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다.

첫째, 그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이제 자신의 구원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전에는 그의 생각 속에서 가장 먼 곳에 있었으나 이제는 그의 마음 가장 가까운 곳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내가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좀더 나은 사람이 되며 혹은 부자가 되며 어떻게 하면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를 물은 것이 아니다. 다만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둘째, 그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물을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즉 자신에 관하여 물었다.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자신의 귀중한 영혼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방법 대로 살라고 하지요. 그러나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나는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지 말해 주시요"라고 요청한다.

셋째, 그는 그의 구원을 위하여 어떠한 조치가 취해져야 하고 자신도 무언가 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그 일은 그렇게 되게끔 되어 있는 일이 아니고 그것을 위하여 우리가 싸워야 하고 씨름해야 하며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그는 "나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해 줄 것인가?"라고 묻지 않고 "내가 무슨 일을 해야만 하는가? 지금 나는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다. 나는 나의 구원을 이루어야 할 것이 아닌가?"하고 룰은 것이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그의 편지에서 이 간수에 대해 바로 그가 본문에서 떨면서 질문한 사실을 기억하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처럼 여겨진다. 사도는 그가 "구원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거룩한 떨림으로 그의 구원을 이루었음"을 말한다(빌 2:12).

넷째, 그는 기꺼이 무슨 일이든지 하려고 한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나에게 말해 주십시오. 내가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선생님 그것이 옳은 길이고 확실한 길이기만 하면 나를 어느 길로든지 들어서게 하십시오. 그 길이 비록 좁고 가시밭 길이고 언덕 길일지라도 나는 그 안에서 걸어갈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자신들의 죄를 온전히 확신하고 진정 그들의 구원을 염려하는 사람들은 선택의 자유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기며, 그가 기뻐하는 것을 쓰시도록 빈종이를 내밀 것이며, 그리스도가 어떠한 요구를 하던 간에 그리스도의 요구를 기뻐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다섯째, 그는 그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알고 싶어하고 열렬히 알기를 원했으며 그리고 그에게 말해 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네가 물으려거든 물으라"(사 21:12)고 하였다. 그들의 얼굴을 시온으로 향하여 두는 사람들은 또한 그곳으로 가는 길을 물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그 길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으로 그 길을 우리에게 알게 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그의 사역자들을 명하여 성경을 강론하여 우리를 돕게 하시며 또한 그에게 구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성령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며 구원의 길에서 그들의 인도자가 되어주시겠다고 하신다.

여섯째, 그는 "사도들을 데라고 나가서" 그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한다. 그렇게 그리하여 것은 그들의 대답이 협박이나 강제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비록 그가 그들을 감시하는 사람이지만 그들이 다른 사람을 대하였을 때와 같이 같은 자유로움으로 그에게 대답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을 지하 감옥에서 데리고 나오면서 그는 사도들이 그를 더 나쁜 곳에서 끌어내 주기를 희망하였다.



(3) 그들은 곧바로 그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가르쳤다(31절). 그들은 언제나 그러한 물음에 대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비록 춥고, 아프고, 잠이 왔지만 이러한 문제를 좀 더 편리한 시간이나 장소가 있을 때까지 연기하지 않는다. 또한 다음 안식일날 그들이 모이는 장소인 강가에서 그에게 말해 줄 터이니 그리로 나오라고 그를 명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쇠가 달았을 때 두들기듯이 그가 좋은 마음을 가진 지금 그의 확신이 스러지지 않도록 즉시 말씀을 전한다. 이제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셨으므로 "하나님의 동역자"인 그들 또한 일을 시작할 때인 것이다. 그들은 그가 자신에게 행한 난폭하고 악한 태도와 그가 권력을 남용했던 점을 꾸짖지 않는다. 이러한 모든 것이 용서되었고 잊혀졌다. 그들은 그가 그들의 절친한 친구인 것처럼 그에게 하늘로 가는 길을 기꺼이 보여 준다. 그들은 그가 떨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에 대하여 의기양양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에게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한 것과 같이 "주 예수를 믿으라"는 같은 지시를 한다. 이런 경우에 우리들은 사도들이 먼저 "우리들을 학대했던 것을 사죄하라"고 말해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한다면 용서를 비는 문제는 간과해 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사실은 사역자들에게 회개하는 자들을 격려하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손을 받으며 그들에게 불친절한 행동을 하여 부담을 주지 말며 자신의 영예보다 그리스도의 영예를 추구해야 한다는 좋은 본이 된다. 본문에 은혜의 계약인 모든 복음의 내용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몇 마디 말로 요약되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 보자.

[1] 행복이 약속되었다. "네가 구원을 얻으리라. 영원한 파멸에서 구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축복에로 인도되었다. 네가 비록 불행한 사람으로 지하 감옥의 간수요 이 세상에서 천하고 낮은 지위에 속하여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너의 구원을 가로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네가 큰 죄인이고 박해자였지만 너의 추악한 범죄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모두 용서될 것이다. 그리고 너의 강퍅하고 쓰디쓴 마음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드럽고 달콤하게 될 것이며 너는 너의 죄나 질병 때문에 죽게 되지 않을 것이다."

[2] 한 가지 조건이 요구된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복음 안에서 하나님이 그의 아들에 관하여 기록하신 기록을 받아들여야 하고 또 그 복음을 신실한 것이요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것으로 수긍해야 한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중재자에 의하여 이 세상과 자신을 화해시키려는 방법을 승인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우리들을 위하여 보내진 자로 받아들여야 하며 그에 의하여 우리가 통치되고 가르침을 받고 구원될 수 있도록 자신을 포기해야 한다. 이것이 구원을 받기 위한 단 하나이고 확실한 길이다. 그리스도에 의하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으며 그를 믿지 않고서는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의 길을 택하면 아무런 위험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길은 하나님이 약속한 길이고 그는 그의 약속에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은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되어야 할 복음이다.

[3] 구원이 그의 가족에게까지 확정된다. 그러므로 본문에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다. 이 말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었던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와 네 자손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믿으라. 그러면 구원이 네 집에 임하리라(눅 19:9). 네 집의 어린 아이들까지도 너와 함께 보이는 교회에 받아들어질 것이며 이로써 구원의 정로를 걷게 될 것이다. 성인들은 그들에게 임한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될 것이며 그들의 수효가 아무리 많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들 모두 같은 조건에 의하여 그리스도에게 환영을 받을 것이다"라는 의미다.

(4) 사도들은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더 많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해 주었다(32절). 그러므로 본문에 그들이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고 기록되었다. 그는 본문에 나타나는 바대로 그리스도에 관해서는 전혀 낯선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이 예수가 누구인지 또 이 여수가 과연 믿을 만한 분인지를 전해 들어야 그리하여 다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었다(요 9:36). 그리고 복음의 본질이란 사실 단순한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그 내용을 곧 그에게 전해 줌으로 세려를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게 하였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준비하고있되 늘 말씀에 풍부해 있어야 하며, 그러므로 그들로부터 말씀을 받거나 듣고자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즉석에서 그들이 구원받는 방법에 대하여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그에게만 말씀을 전한 것이 아니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한 가족의 가정은 자기 가족의 주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얻고 은혜받게 되는 길에 참여하도록 보살피고 주님의 말씀이 그들에게도 전해질 수 있도록 돌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영혼은 가장 천한 종들의 영혼도 그들 주인의 영혼도 마찬가지로 고귀한 것이며 똑같은 값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5) 간수와 그의 가족들은 즉시 세례를 받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백을 하였으며 그 법도에 복종했고 에디오피아 내시가 했던 것과 같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노라"고 엄숙히 선언함으로 기독교의 특권에 참여하게 되었다. 본문에 보면 "그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자기가 세례의 속박 아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바울과 실라도 그들의 신실성을 시험해 보고, 그 가족들에게 세례를 베풀 것인가, 베풀지 말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은혜의 성령이 갑작스럽게 그들 속에서 그렇게 강한 신앙으로 역사하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의 논의가 필요 없었다. 바울과 실라는 성령에 의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임한 것을 알았다. 그러기에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일상적인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급격한 조치라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6) 간수는 이제 바울과 실라를 매우 존경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그들에게 상해를 입혔는데 오히려 그들로부터 친절한 대접을 받고 그것을 어떻게 보상해야 할지를 몰라 당황하였다. 간수는 "그들을 바로 그날 밤 즉시 데리고 나왔다." 그는 단 일 분도 그들을 지하 감옥에 있게 하려 하지 않았다.

[1] 간수는 "그들의 맞은 자리를 씻겼다." 그는 그들의 상처를 냉수로 찜질하여 고통을 덜하게 하였다. 또한 채찍 자국에서 흐른 피를 깨끗이 닦아 내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상처입은 사람을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치료했듯이 그의 효력이 있는 액체로 그들의 전신에 발라 주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2] 그는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갔다." 그리고 식구들에게 그들을 가장 좋은 방으로 안내하고 제일 좋은 침구를 내오라고 시켰다. 전에 사도들에게 악랄하게 대했던 그로서는 이제 어떠한 대접도 그들에게 충족하게 대접한 것이라고 생각지 아니하였다.

[3] 그는 "그들에게 음식을 차려 주었다." 그것은 그의 가장 최선을 다해서 한 준비였다. 그들은 식탁에 초대되었다. 이 식탁에 의해 그는 그의 영혼에게 복음을 전해 준 답례를 하였다. 그들은 그에게 주의 말씀을 전하고 그와 그의 가족에게 생명의 빵을 나누어 주었다. 그는 그들에게서 영적인 것들을 풍부하게 하였으므로 그들이 그에게서 육적인 것들을 공급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다(고전 9:11). 우리가 어떠한 집에서 어떠한 식탁을 대하던 간에 그것을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에게 봉사할 기회로 삼아야 됨을 명심하자.

(7) 구원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목소리가 그 간수의 집을 가득 채웠다. 그들은 결코 그와 같이 즐거운 저녁을 맞이한 적이 없었다.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기뻐하였다." 그의 집에서 세례 받기를 거부함으로 부조화를 조성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일하여 복음을 받아들였고 이로써 그들의 즐거움은 더욱 컸다. 또는 본문은 다음과 같이 읽을 수도 있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온 집으로 즐거움이 넘치게 하였다." 즉 그가 그의 집안을 다 돌면서 그의 기쁨을 표현하였다는 말이라고 하겠다.

[1] 그가 그리스도를 믿은 사실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불리워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복음의 의도는(경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을 섬기러 하자"는 말씀과 같이, 신 13:2)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은 우리를 하나님에게로 나아가게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2] 그의 신앙이 기쁨을 낳았다는 사실이다. 신앙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에게 자기 자신을 포기한 사람들은 기뻐할 만한 커다란 이유들을 발견하게 된다. 에디오피아 내시가 개종하였을 때 "즐거워하며 그의 길을 계속 갔다"고 하였다. 그런데 본문에는 간수가 기뻐한다. 구약 성서에는 열방들이 회개하고 그들의 회개에 대해 스스로 기뻐하리라고 말씀되고 있다(시 67:4; 96:11).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기쁨의 조건이요, 굉장한 영예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3] 그가 그의 즐거움을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냈다는 사실이다. 그의 가슴이 기쁨으로 차고 넘침으로 그의 입술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했으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격려했다. 신앙의 위로를 스스로 맛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위로를 맛볼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기쁨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많은 사람을 기쁨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16:26 없음.

 

16:27 없음.

 

16:28 없음.

 

16:29 없음.

 

16:30 없음.

 

16:31 없음.

 

16:32 없음.

 

16:33 없음.

 

16:34 없음.

 

16:35

바울과 실라의 석방(사도행전 16:35-40)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바울과 실라를 석방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35, 36절)

1. 전날 사도들을 마구 취급하였던 행정장관이 이러한 명령을 내렸다. 그들은 날이 새자마자 즉시 그 일을 하였다는 사실은 그들이 한밤중에 경험하였던 무서운 지진을 그들의 죄수들의 무죄를 입증해 주는 소리로 들었기 때문이든지 또는 그들이 사도들에게 행한 일 때문에 양심에 가책을 받아 매우 불안하기 때문이었든지 일 것이다. 박해를 받은 사람들은 착고에 매어 있으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반면 박해자들은 그들의 침상에서 뒤척이고 있었다. 그들은 죄수들이 등허리에 채찍질을 맞은 것 이상으로 더 심하게 그들은 양심에 채찍을 맞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사도들이 방면을 탄원하기도 전에 서둘러 그들을 석방하였다. 이제 하나님은 그의 증인들로 "저희로 사로잡아간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다"(시 106:46). 행정 장관들은 매질을 했던 rabdou,couj - 즉 아전들을 보냈다. 즉 사도들을 매질하는 데 고용되었던 자들인 말단 관리, 경비병 등을 보내어 사도들에게 그들이 했던 일에 대하여 용서를 청하게 하였다. 그 명령은 "이 사람들을 놓으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들은 사도들을 더 괴롭힐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심정을 변화시킨 것으로 보여진다. 하나님은 간수의 분노를 변화시켜 그와 그의 가족들로 그를 찬양하도록 변화시키셨고 또한 그 남은 노를 그가 금하시었다(시 76:10).

2. 간수가 그 소식을 그들에게 가져 왔다(36절). 그는 사도들에게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가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간수가 일찍이 그 밤에 그의 집에서 일어난 사건을 행정 장관에게 보고 했고 또한 죄수들을 석방시키라는 명령을 받아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문에 보면 "이제 평안히 가라"고 그는 말한다. 이 말은 간수가 사도들을 그의 손님으로서 떠나기를 바라서 한 말이 아니라 그의 죄수로서 그를 떠나라는 말이라고 여겨진다. 사도들은 그의 집에서 환영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이 그들의 착고로부터 자유하게 된 것을 그는 기뻐했다. 하나님은 그의 은총에 의해서 간수를 회개시키듯이 쉽게 행정 장관을 회개시켜 그들로 신앙을 갖고 세례를 받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들을 택하시는 것이다"(약 2:5).

Ⅱ. 바울은 행정 장관이 자신의 특권을 침해하는 죄를 범하였다고 항의한다(37절). 바울이 아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로마 사람인 우리를 법률과 정의에 거스려 죄도 정치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 가만히 우리를 내어 보내고자 하느냐.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에게 가한 상해를 보상한 것이라고 우기가 믿기를 바라는가? 아니다 저희가 친히 와서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그리고 그들이 우리에게 잘못을 저질렀음을 시인하라고 하라." 행정 장관은 그들이 로마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서처럼 여겨진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의 가해가 법이 허용하는 범위를 훨씬 벗어났다는 사실을 인지한 것 같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행정 장관들이 사도들을 석방시키라고 명하였다.

1. 바울은 매를 맞기 이전에는 그 사실을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혹시 채찍을 피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설교한 진리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하여 그가 그렇게 한 것처럼 보인다. 툴리(Tully)는 그의 한 연설에서 베레스(Verres)에 반박하면서 베레스의 명령에 의해서 시실리에게 매를 맞은 가니우스(Ganius) 사람 하나가 채찍을 맞는 동안 계속 civis Ramanus Sum - 즉 나는 로마의 사람이다라고 계속 부르짖었는데도 불구하고 매를 쳤음을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 사람처럼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의 고난 속에서도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그 사람보다 고귀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2. 바울은 모든 모욕을 당한 후에 항변하였다. 그것은 그가 받은 고난과 그 고난의 이유를 떳떳이 밝히기 위해서였다. 세상으로 하여금 복음을 설교하는 사람들이 그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이 그렇게 비열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으며 그들이 세상에게 취급을 받는 이상의 가치를 지닌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바울이 그렇게 그리하여 것은 행정 장관들로 하여금 빌립보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부드럽게 대하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이 모 더 나은 대우를 받고 또한 그곳 사람들이 바울이 그들의 행정 장관들에 대항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그들에게 항거할 수 있었고 그들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해명을 요구할 수 있는 대도 그가 부름을 받은 존귀한 이름의 명예를 위하여 그러한 특권을 내세우지 않았음을 그들이 보고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갖게 하기 위해서였다.

(1) 바울은 그들로 하여금 얼마나 많은 방법으로 그들이 자신에게 불법 행위를 하였는가를 알게 하려고 했고 또한 바울 자신도 그것을 분별할 만큼의 법률에 대한 지식이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1] 그들은 로마인들을 매질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실라도 바울과 같이 로마의 시민이었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바울이 그렇다고 해서 실라도 그런 것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울은 로마의 시민이었고 실라는 그의 동료였다. 로마법은 liberum carpus Romani civis, virgis, aut aliis verberibus cuedi - 즉 자유인인 로마의 시민은 채찍이나 기타 다른 것으로 구타당하는 것을 금하였다. 로마의 역사가는 한 시(市)가 로마의 명예를 손상시켰으므로 로마시민으로써의 권리를 박탈당한 여러 가지 경우를 보여 준다. 우리는 바울이 후에 이 법에 의거하여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 사실을 살펴 보게 될 것이다(22:25, 26). 그리스도의 사신들이요 하늘의 은총을 입은 자들은 그들이 때렸다고 그들에게 말하였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들이 로마의 시민들을 학대했다고 말하자 그들은 놀랐다. 사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분노보다 가이사의 분노를 더 두려워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추세이다. 그가 잘 몰랐다고 하지만 신사이며 고귀한 사람이며 로마인인 한 사람을 모욕한 사람은 "내가 큰 잘못을 저질렀구나"라고 외치면서 굽신거린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인을 박해한 자는 그것을 당연한 일로, 또 후환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세상의 물정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해하는 자들은 곧 나의 눈동자를 해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또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우리가 작은 소자에게 범한 죄"의 위험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그러므로 로마인이었기 보다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이었기에 행정 장관들은 그들을 마구 대한 것을 후회했어야 했을 것이다.

[2] 그들은 사도들을 "죄도 정치 아니하고" 때렸다. 그들은 죄수에게 indicta causa - 즉 발언권도 주지 않았다. 즉 그들은 사도들을 고소하는 자들의 말의 내용을 주의 깊게 살펴보지도 않았고 자신에 대하여 사도들이 무슨 할 말이 있는가를 조사하지도 않았다. Caus cognit possunt multi obsolvi, incognit nemo condem nari potest - 즉 피고에게 발언권은 주어져야 하고 그들의 말이 옳다면 그들은 석방되어야 한다. 그러나 발언권을 주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은 일반적인 정의의 법칙이다. 그리스도의 종들이 그들과 그들의 주장에 대한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었다면 그들이 겪은 것처럼 박해를 받는 경우는 없었으리라.

[3] 그들이 사도들을 공개적으로 처벌한 것은 더욱 잘못된 일이었다. 그것은 피해자에게는 더욱 불명예스러운 일이었고 한편 그것은 정의와 법률에 대한 더욱 대담한 도전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4] 그들은 처벌 이유에 대한 설명도 없이 죄목을 조작하여 구두로 사도들을 "감옥에 집어 넣었다."

[5] 그들은 이제 "사도들을 가만히 내어 보내려고 했다." 그들은 사실 그들이 행한 일에 대해서 떳떳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또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할 만한 솔직함도 없었던 것이다.

(2) 바울은 그들이 자신들의 실수를 자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바울은 자신들을 더욱 비참하게 느끼도록 그들이 공적으로 처벌한 것같이 이제는 공적인 석방을 하여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줄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저희가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그리고 우리가 무고하다는 것과 매 맞고 사슬에 매일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언하라" 요구했다. 바울이 이토록 수호하고자 한 것은 자신의 영예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를 회복시키기 위해서였고 자신보다는 자신이 위하여 사우고 있는 복음을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로 하여금 와서 우리들이 성을 소란케 한 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시인하여 사람들의 소요를 멈추게 하라"고 말한다.

Ⅲ. 행정 장관들의 굴복과 바울과 신라에 대한 판결의 번복(38, 39절).

1. 행정 장관들은 바울이 로마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비록 그들이 이전에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깜짝 놀랐다. 그들은 그들이 로마인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였다. 즉 바울의 몇몇 친구들이 그들이 저지른 일을 정부에 보고하여 그들이 행한 잘못에 대해 처벌받게 될까 두려워했다. 박해자들의 소송은 흔히 그 나라의 법에 비추어 볼 때도 불법적인 절차에 의해 처리되곤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법에 비추어 볼 때도 흔히 비인간적으로 처리되었고 하나님의 법에 대하여서는 언제나 죄악되고 반역적인 것이었다.

2. 그들은 "와서" 그들을 고소하지 말 것을 "간청하였고" 그들이 행한 위법 행위를 눈감아 주고 더 이상 그것에 대하여 언급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잘못해서 사도들을 감옥에 넣은 것을 인정하고 그들을 옥에서 데리고 나와 사도들이 조용하고 평화롭게 "성에서 떠나가" 주기를 원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모세에게 항거하였던 바로와 그의 신하들도 모세에게 와서 "절하며 이르기를 너와 너를 좇는 온 백성은 나가라"고 하였다(출 11:8).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적들로 자기들의 시기와 증오를 부끄럽게 여기게 하실 수 있다(사 26:11). 예루살렘은 가끔 그것을 쳐부수어 기쁨을 얻으려는 자들에게 무거운 돌이 되곤 하였다(슥 12:3). 만일 이 행정 장관들이 진심으로 회개하였다면 그들은 사도들이 그 도시를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고(거라사 사람들이 이들처럼 그리스도에게 떠나기를 구하였었다) 사도들로 하여금 머물러 있도록 간구했을 것이며 그들의 도시며 체류하면서 구원의 길을 r들에게 가르쳐 주도록 간청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를 박해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신하면서도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려고는 하지 않는다. 또 그것을 받아들이라는 설득에 응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지 못해 그리스도와 그의 종들을 존경하며 "그리스도와 그 발 앞에 절하고 그리스도가 그들을 사랑하는 줄 아는 것"(계 3:9) 같지만 그리스도에게 은총을 받고 그에게 나아가 그의 사랑을 나누어 받는 것과는 관계가 없는 삶을 사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Ⅳ.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를 떠난다(40절). 그들은 이미 비합법적으로 방면되어 있었지만 법적으로 석방되고 나서야 감옥을 나왔다. 그 다음 그들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1. 사도들은 그들의 친구들을 하직하였다. 그들은 "루디아의 집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아마 제자들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형제들을 만나 보았고" 또 각자의 집으로 그들을 방문했다(그들은 수효가 적었으므로 그 방문은 곧 끝났을 것이다). 그리고 (한 고대의 희랍 주석가가 해석하였듯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이나 하나님께서 감옥에서 그들을 어떻게 붙잡아 주셨는가를 이야기하여 그들을 "위로했다." 사도들은 그들을 그리스도 가까이 머물러 있도록 격려했고 어떠한 어려움에 직면하더라도 그들의 신앙 고백을 굳게 붙들 것을 권하고 종내에는 모든 것이 잘 되어지고 영원한 평화가 있을 것을 확신시켜 주었다. 새로 개종한 사람들에게는 많은 위안의 말을 하여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에게서 오는 기쁨이 그들의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들은 그 성을 떠났다. 본문에 "그들이 가니라"고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왜 사도들이 곧 그 도시를 떠났는지 이상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명예롭게 감옥에서 석방되었으므로 적어도 얼마 동안은 아무 위험없이 그들의 일을 계속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사도들이 주님의 말씀의 원칙에 따라 떠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는 말씀에 의거하여 그렇게 하였으리라(막 1:38). 바울과 실라는 특별히 빌립보로 부름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곳에 와서 그들의 노력에 비해 작은 열매밖에 거둘 수 없었으며 곧 그 곳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헛되이 온 것은 아니었다. 비록 이곳에서의 시작은 빈약했지만 후에는 많은 결실을 거두게 된 것이다. 이제 그들은 빌립보에 교회의 기초를 놓게 되었으며, 그것이 매우 뛰어난 교회가 되었다. 후에 그 교회는 매우 유명한 교회가 되었고 빌립보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곳 장로와 집사 그리고 교인들은 다른 어느 교회보다 바울에 대하여 후하였던 것이다(빌 1:1; 4:25). 그들의 노력의 결실을 당장 볼 수 없다고 할지라도 사역자들은 실망해서는 안 된다. 심겨진 씨앗이 흙덩이 속에서 없어져 버린 것같이 보일지라도 때가 되면 싹이 나서 많은 수확을 거두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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