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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앉은뱅이의 고침(사도행전 3:1-11)

구체적인 사례가 기록되지 않았지만 "사도들로 인하여 많은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다"는 내용이 기록되고 있다(2:43). 그러나 본문에는 그 한 예만 기록되고 있다. 사도들이 기적을 행할 때 개개인의 사정에 따라 기적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지시하는 대로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의 목적에 부응하여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행한 모든 기적이 다 기록되지 않고 성령이 합당하게 여기신 것으로 거룩한 구속사의 목적에 알맞는 것만 기록되었다.

Ⅰ. 이 기적을 행한 사람은 사도들 가운데 중심 인물이었던 베드로와 요한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생존해 계신 동안 한 사람은 제자들의 대변자적인 역할을 하였고 다른 한 사람은 주님이 제일 사랑하던 자였다. 지금도 그들은 같은 입장에 있었다. 수천 명이 회개하게 되자 교회는 여러 개의 모임으로 나뉘었고 아마 베드로와 요한은 누가가 가입해 있는 모임에 속한 것 같았다. 그러므로 누가도 그가 바울을 수행할 때 바울이 말하고 행한 것을 자세히 기록할 수 있었던 것처럼 베드로 요한과 함께 있으므로 그들이 말하고 행한 것을 자세히 기록할 수가 있었다. 여러 모임이 있으므로 이 모임들은 서로 다른 사도들이 행한 것을 본받을 수가 있었다.

베드로와 요한은 각기 제자들 가운데 형제가 있었다. 그들이 전도하러 나갈 때 형제들끼리 짝이 되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다른 사도들 간에도 형제간의 사이 이상으로 밀접히 맺어진 것같이 보인다. 때로 "우정이 혈연보다 더 두터울 수가 있다." 형제 이상으로 더 사이가 좋은 친구도 있는 법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시기 전보다 더욱 친근해진 것같이 보인다(요 20:2). (내가 가정하여 말해 보건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보인다. 즉 사랑의 제자였던 요한은 베드로가 뉘우치고 회개하자 또 그의 죄로 인하여 "더욱 슬피우는" 것을 보자 다른 어떤 사도들보다 더욱 정을 느껴 부드럽게 대한 것이리라. 또한 그의 영적인 나약성을 염려함으로 강건케 하기 위하여 더욱 베드로에게 친절을 베푼 것 같다. 그리스도가 가장 좋아하였던 제자가 베드로의 제일 친한 친구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가 회개함으로 베드로를 용납하셨다는 좋은 증거였다. 다윗이 범죄하고 기도하기를 "주를 경외하는 자로 내게 돌아오게 하소서"(시 119:76)라고 하였다.

Ⅱ. 사건이 일어난 시간과 장소가 기록되고 있다.

1. "성전에서" 일어났다. 성전은 모두가 모이는 장소였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도 함께 그곳에 올라갔다." 특히 오순절 명절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이 사람들 가운데 복음의 그물은 쳐졌다. 이 그물에 많은 사람이 낚였을 것을 상상할 수가 있다. 성전으로 가서 예배를 드림은 좋은 일이요 함께 성전으로 올라가는 일은 큰 위안이 됨을 기억하자. "그들이 내게 같이 가자고 말하였을 때 내가 기뻐하였으니" 최상의 사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회임을 기억하자.

2. 때는 "기도하는 시간"이었다. 즉 유대인들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지고 지켜지던 공중 예배 시간이었다. 시간과 장소는 모든 행위를 결정하는 두 필수적 요소이다. 그러므로 모든 시기와 장소는 덕을 세우기에 제일 적합한 것으로 모든 사람이 일치하여 결정되어야 한다. 공중 예배와 함께 또한 기도하는 처소와 시간이 있어야 한다. 제 9시 즉 오늘날 오후 세시는 유대인들에게 기도하는 시간 중 하나였다. 그 외에 아침 9시와 정오 12시도 기도하는 시간이었다. 시편 55편 17절, 다니엘 6장 10절을 참조하라. 모든 기독교인들은 각기 강제성을 띄지는 않지만 마음으로 작정한 기도의 시간을 갖는 것이 유익하다. "시기가 적절할 때 모든 것은 아름다운 결과를 낳는 법이다."

Ⅲ. 이 기적적인 치료를 받은 환자에 대하여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2절). 그는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는 가난한 앉은뱅이 걸인이었다.

1. 그는 사고로 다친 것이 아니라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다." 그는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앉은뱅이였다. 그는 나면서부터 중풍병으로 하체가 마비된 것같이 보여진다. 왜냐하면 "그의 발과 발목이 힘을 얻었다"는 치료 기사를 보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7절). 그 때나 지금이나 이런 가련한 경우는 늘 있다. 이들에게 우리는 사랑을 베풀고 연민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가 나면서부터 영적으로 앉은뱅이인 것을 의식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능력이 임하지 않고서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일할 수도 걸을수도 없음을 알아야 겠다.

2. 그는 걸인이었다. 일하여 생계를 유지할 수 없으므로 그는 동냥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영적인 걸인도 마찬가지다. 그는 친구들에 의해 "매일 성전문 앞"에 억지로 끌려오지만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동냥을 구걸할 뿐 자신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가련한 구경군에 불과한 것이다. 성전에서는 모임이 있었다. 도움을 간청해야 될 만한 선한 사람들의 모임이었고 이렇게 모였을 때야말로 도움을 청할 적절한 때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거기에 누워 있었다. 아무 것도 없으면서도 일할 수 없는 사람이 구걸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가 성전에서 매일 적선을 받지 못하였다면 매일 거기에 누워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동시에 간청해야 함을 기억하자. 고넬료의 기도가 그랬다(10:4). 우리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갈 때 우리가 바라던 것은 특수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성전문을 출입하는 영적인 걸인들의 대부분이 어떤 도움이 없다고 낙심하고 만다는 것은 대단히 가련한 일이다. 그들이 늘 무시되는 것은 아니다. 한 마리의 일벌을 굶기기보다는 여러 마리의 말벌을 굶기듯이 마찬가지로 열 명의 영적인 게으름뱅이에게 은사가 허락되기 보다 받을 만한 가치가 인정받은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그가 누워있는 성전 문의 이름이 기록되었는데 미문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이 문이 외관상의 장엄함과 화려함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라이트푸트 박사(Dr. lightfoot)는 말하기를 이 문은 성전의 이방인의 지역에서 유대인의 지역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한다. 그는 가정하기를 이 앉은뱅이는 이방인에게 구걸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으므로 유대인에게만 구걸하였을 것이라 한다. 그러나 휘트비 박사(Dr. Whitby)는 이 문이 성전의 첫째 입구로 보며 많은 돈을 들여 아름답게 꾸민 것은 그 곳이 엄위로우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의 정면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이 거기 누워 구걸한다고 이 문의 아름다움이 손상되는 것은 아니었다.

3. 그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적선해 줄 것을 구걸하였다93절). 이것이야말로 그가 그들에게 구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이었다. 이 사람들은 자애로운 사람들로 평판이나 있었고 또한 많은 것은 가지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그들이 가진 것으로 선행을 베풀었다. 성전에서 소경과 절뚝발이가 그리스도에게 나아와 고침을 받은 것이 불과 수주일 전이었다(마 21:14). 그런데 이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이 그리스도의 사역자로 말씀을 전하고 그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였다는 것을 알았다면 왜 동냥하는 것 이상을 요구할 수 없었을까? 이해가 안 된다. 어쨌든 그는 그가 바라지도 않던 것을 얻게 되었다. 그는 적선을 원했지만 그는 병나음을 받았던 것이다.

Ⅳ. 우리는 본문에서 치료 방법을 찾아 볼 수 있다.

1. 그는 기대로 부풀었다. 베드로는 많은 사람들이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하듯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시선을 고정하여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동정어린 눈길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4절). 요한은 같은 행동을 취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한 분, 같은 성령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았기 때문이었고 그러므로 이 기적을 행함에 같이 협력하였다. "우리를 보라"고 그들은 말하였다. 우리의 눈은 언제나 주님을 향해야 한다(우리의 마음의 눈이 말이다). 그리고 그 외적인 표시로 몸의 눈은 그가 은총의 종으로 여기는 분들에게 시선을 집중해야 한다. 이 사람에게 사도를 바라보라고 두 번 명령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벌써 "그들에게서 무언가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가득 찼고 그러기에 곧 "그들을 주시하였다"(5절). 우리가 말씀을 듣고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기대를 가지고 온 마음을 바쳐야 함을 기억하자. 우리는 하늘을 향하여 거기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에 의하여 은총을 입기를 구해야만하며 그리고 기도에 대한 평화의 응답을 바라야 한다. "내가 당신에게 나의 기도를 드리고 당신을 바라나이다."

2. 동냥을 얻으려는 기대는 좌절되었다. "은과 금이 내게 없으므로 은과 금을 당신에게 줄 수는 없소"라고 베드로는 말하였다. 그러나 그가 만약 적선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동이나 은이나 금 같은 것은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그리스도가 귀하게 여기며 친구로 여기는 사람에게 세상의 부도 풍성히 누린다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다. 사도들은 가난하여 겨우 자기들이나 지낼 수 있었지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베드로와 요한의 수중에 많은 돈이 있었다 해도 교회의 가난한 사람들 생계 유지에 쓰여졌고 이 돈을 자기들 마음대로 처리하거나 헌납자의 의도를 떠나서 사용할 수도 없었다. 공적 신용은 엄격하고 성실하게 지켜야 한다.

(2) 남을 돕고 싶어도 도울 능력이 없는 사람이 많은 반면 그럴 능력은 있으면서도 마음이 허락지 않아 못하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다.

3. 그는 기대한 것 이상으로 받았다. 베드로는 그에게 줄 돈은 없었다.

(1) 그러나 그는 돈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것은 하늘에서 유래된 능력으로 그의 질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들도 영적인 선물과 은사와 위로에는 매우 부유할 수도 있음을 기억하자. 확실히 영적 세계에서 우리는 은과 금에 비교될 수 없는 것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사서 얻는 것이 더욱 좋은 것이다(욥 28:12; 잠 3:14).

(2) 그는 그에게 더 좋은 것을 주었다. 즉 그의 병을 고쳐 준 것이다. 아마 병을 고칠 수 있었다면 이를 위하여 많은 금과 은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병 나음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그는 삶을 위해 일할 수 있었고 따라서 더 이상 구걸할 필요가 없었다. 더구나 이제 그는 "필요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게 되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된 것이다." 기적적인 치료는 하나님 사랑의 표시이므로 수천 금은을 드리는 이상의 영예를 그에게 돌려야 한다. 베드로는 은과 금은 줄 것이 없었지만 아직도 "네게 줄 것이 내게 있다"고 그는 말하였음을 생각해 보자. 가난한 사람을 돕고 싶으나 자선할 만한 자금이 없는 사람이 있다. 비록 은과 금은 없다해도 손과 발이 성하고 오관을 지니고 있다면 이것으로 맹인과 절름발이와 병자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도움이 필요할 때 그들이 안 한다면 그들에게 은과 금이 생겨도 남에게 주지 못한다. "누구나 선물을 받으면 그것을 쓸 줄도 알아야 한다. 이제 어떻게 치료되었는가를 알아 보자."

[1]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보내사 저희를 고치시다"라 하였다(시 107:20). 치유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리스도는 스스로 치료하셨으나 사도들은 그의 이름으로 치료하였다. 베드로는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만약 그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재하지 않았다면 희롱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말이다. "내가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지하여 말한다. 이제 그의 권능에 의하여 병이 완치될 것이니 그에게 찬양과 영광을 돌릴지어다"는 뜻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나사렛 예수"라고 부른다. 이 명칭은 경멸을 나타내는 것이나 이를 사용한 이유는 세상에서 그에게 가한 명예 훼손은 지금 하늘에 계신 분의 영광을 더욱 돋보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부르고 싶은 이름으로 부르라. 그를 경멸하는 뜻으로 나사렛 예수라 부르라. 그 이름으로 인하여 기적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되리라. 왜냐하면 그가 자기를 스스로 낮추셨기에 이제 그는 가장 높임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는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 명한다. 그에게 능력이 있어서 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일어나 걸으려 한다면 자기의 무력을 알고 그를 일으킬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한다면 그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어나 걸음으로 그 능력이 그에게 임한 것을 그는 입증하였다. 병 고침을 받은 그에게 남은 일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무력한 우리들의 영혼도 치료함을 받자.

[2] 베드로는 손을 뻗쳐 그를 도왔다(7절). 그는 그가 일어나 걸으라고 명한 바로 그 이름을 믿고 "어른 손을 받아 일으켰다." 만일 명령된 대로 효과가 생긴다면 그의 일으켜 세운 행위가 그의 치료에 도움이 된 것이 아니고 다만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명백히 표시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일어나 계명대로 행하라 명하실 때 우리가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의 능력 아래 우리를 맡기면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사 우리의 손을 받아 일으켜 세워 주신다. 만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하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까지 할 수 없는 은혜를 약속하셨다. 그 약속에 의해 우리의 본성은 새로워지고 은총은 헛되지 않게 된다. "그의 발과 발목이 힘을 얻었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그가 일어나려 하지 않고 또 도움도 받지 않았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그가 할 일을 했고 베드로도 그의 할 일을 했지만 모든 것을 이루신 분은 그리스도이다. 그에게 힘을 주신 분은 바로 그리스도였다. 먹이 나누어질 때 양이 늘고 포도주를 쏟을 때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같이 그가 발목에 힘을 주고 일어나려 할 때 그의 발에 힘이 주어졌던 것이다.

Ⅴ. 본문은 환자 자신이 치료받은 후의 모습을 보여 준다. 우리가 그의 입장이 되어 보면 그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1. 그는 일어나라는 명령에 복종하여 뛰어 일어났다. 그는 그의 발과 발목에 강련한 힘이 주어지는 것을 느꼈고, 그래 흔히 치료받고 점차 회복되어 가는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으로 슬며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힘있고 경쾌하게 또 그의 힘이 아니라 다른 힘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힘이 생겼으므로 그도 자신의 일에 깜짝 놀랐다. 오랫 동안 불구로 누웠던 사람이 기쁘게 자리를 거두고 떠난 것처럼 그도 이리저리 뛰었다.

2. 그는 서서 걸었다. 그는 어디 기대거나 떨거나 하지 않고 곧바로 서서 지팡이도 없이 걸었다. 그는 발을 굳게 디뎠고 확실하게 움직였다. 치료된 것이 나타났다. 더구나 완전한 치료였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은 경험한 것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을 주시지 않았는가? 우리는 그의 앞에서 감사의 예배를 드리자. 신앙적인 대화를 나누며 그의 앞에서 바로 행하자. 단호히 그의 편에 서서 그에게 받은 힘을 가지고 기쁨으로 그와 동행하자.

3. 그는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다"(11절). 그가 왜 그들을 붙잡았는지 물을 필요도 없다. 내가 믿기로는 그가 제 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너무나도 기뻐서 여지껏 만난 최대의 은인으로써 그들을 포옹하였고, 광포할 정도로 매달렸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그에게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알리는 동안 그들을 잠시도 그냥 놔두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그들에게 그의 애정을 표했다. 그는 그들을 붙잡고 못가게 하였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그를 떠나면 다시 앉은뱅이가 될까보아 그들에게 매달렸다고 말한다. 여하튼 하나님에게 고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고치실 때 도구로써 이용한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 후에도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음을 안다.

4. 그는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들에 대한 그의 강한 사랑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가 그들을 성전 밖에 붙들어 둠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러 가지 못하게 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의무 수행함에 있어서 우리 친구의 열정어린 친절에 의해 지장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들이 그와 함께 머물지 않는다면 그는 그들을 따라 가기로 결심하였다. 또한 그는 거동할 수 없었고 또 구걸을 해야 했으므로 오랫 동안 들어갈 수 없었던 성전으로 그들이 들어갔기 때문에 더욱 다행한 일이었다. 그리스도가 고치신 혈기마른 자와 같이 그는 곧 성전에서 발견되었다(요 5:14). 그가 성전으로 들어간 것은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기 위한 것뿐 아니라, 그의 이름으로 그가 병 고침을 받았던 예수에 대해 사도들로부터 자세히 듣고 싶어서였다.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은 더욱 그리스도와 친숙하여지기를 간절히 바라야 한다.

5. 그는 거기서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과 마음에 주신 힘은 그를 찬양하는데 쓰여져야 하며 우리는 그것으로 어떻게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 연구해야 함을 기억하자. 그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은 사람들은 그의 이름과 그가 주시는 힘으로 생활하여야 한다(슥 10:12). 그가 뛸 수 있게 되자 그는 곧 하나님 안에서 기뻐 뛰었고 그를 찬양하였다. 본문에서 성경이 응한 것을 볼 수 있다(사 35: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제 이 사람이 치유되어 새롭게 되자 그는 기쁨과 감사함으로 넘쳤다. 참으로 회개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를 찬양해야 한다. 그러나 회개한 젊은이들은 더욱 뛰며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Ⅵ. 이 기적의 목격자였던 사람들이 이 일로 받은 느낌이 어떠했는가 다음에 기록되고 있다.

1. 그들은 기적의 참됨을 알고 아주 만족해 했고 아무런 논박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았다"(10절). 그는 오랜 월 거기 앉아 있었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알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은총을 입을 사람으로 택함을 받았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께서 고치신 장님에 대해 의심한 것처럼 그가 정말 그 사람일까 의심할 만큼 악하지는 않았다(요 9:9, 18). 그들은 지금 그가 "걸으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았고(9절), 또한 그의 심중에 일어난 변화도 짐작하였다. 그는 전에 마음 놓고 구걸할 때처럼 힘껏 소리쳐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병이 완치되었다는 명백한 증거는 그가 병 고침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성별될 때만이 자비는 완전히 성취된다.

2. 그들은 그것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랐고"(1절), "크게 놀랐다"(11절). 그들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성령이 임재하시므로 사도들이 행한 기적에 대하여 적어도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자신이 행하신 같은 종류의 기적에서 받은 이상의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이 사실이야말로 기적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임을 잘 보여 준다.

3.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모든 사람이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였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봄으로 그들의 호기심을 채우려 했고 또 다른 이들은 그들의 설교야말로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신 설교라 인정하고 그들에게 설교를 들으려고 모였다. 무리들은 솔로몬이 성전 외곽의 행각을 세웠던 것이며 이방인들의 집회처인 솔로몬의 행각에 그들을 중심으로 모였다. 무리들은 또 헤롯이 제 이의 솔로몬이 되려는 야망을 가지고 솔로몬이 행각을 견고하게 세우고 자기의 이름으로 명명한 그 기초 위에 몇 개의 골방과 회랑을 세운 곳에 모였다. 여기서 무리들은 모여 이 놀라운 공경을 보려 하였다.

 

3:2 없음.

 

3:3 없음.

 

3:4 없음.

 

3:5 없음.

 

3:6 없음.

 

3:7 없음.

 

3:8 없음.

 

3:9 없음.

 

3:10 없음.

 

3:11 없음.

 

3:12

앉은뱅이를 고친 후 베드로가 행한 설교(사도행전 3:12-26)

본문에는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친 후 행한 설교가 있다. "베드로가 무리를 보았을 때" 무엇을 하였나 고찰해 보자.

1. 그는 무리가 몰려드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의 모임 장소인 성전의 솔로몬의 행각에서 그들에게 재빨리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그들로 와서 솔로몬의 지혜보다 더 큰 지혜를 듣게 하자. 여기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분에 대하여 증거되고 있으니 말이다.

2. 그는 사람들이 기적에 놀라 경탄에 가득찬 것을 보았을 때 이제 부드러워져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마음 밭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3. 그는 무리들이 자신과 요한을 추앙하는 것을 보자, 즉시 나서서 그들이 품은 숭배심은 자신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만 돌려져야 한다고 하였다.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그랬듯이 그는 즉시 이 문제를 처리하였다(14:14, 15). 설교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그는 겸손히 기적에 대한 명예를 그리스도에게 돌리고 그들은 다만 그리스도의 사역자요 그의 손에 들리워진 연장에 불과하다고 선언하였다. 그들이 전하는 가르침은 자신들의 창의에서 나온 것이거나 그들만의 소유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전해 받은 것이었다. 그는 그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그 뜻은 그들이 율법과 약속을 지녔을 뿐 아니라 복음과 약속의 성취를 받기도 하였으나 이제는 오직 현실적인 통치에만 관심을 쏟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두 가지를 그는 그들에게 질문했다.

1. 그들이 어째서 기적 자체에 놀라느냐는 것이었다.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참으로 그것은 경이로운 일이었기에 그들이 보고 놀라는 것은 당연한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무수히 행하신 것인데 그들이 그 때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아무 느낌도 없었던 것이다. 바로 얼마 전에 그리스도께서 "즉은 자들 가운데서 나사로를 일으키셨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 이 사건이 이상하게 보이는가? 라고 묻는다.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것을 이상한 것으로 취급하고는 마치 자기들의 잘못은 없는 것처럼 생각함을 기억하자. 불과 며칠 전에 그리스도 자신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왜 그들은 이 사실로 인해 놀라지 않는가? 왜 믿지 않는 것일까?

2. 어째서 그들은 다만 기적의 도구에 불과한 자기들을 그토록 찬양하는가 묻는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 그들이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은 확실하였다. 이로 인하여 사도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들일 뿐 아니라 세상을 축복하고 인류를 유익하게 하며 병자와 영혼의 병자 즉 영적으로 앉은뱅이요 중풍병자인 자들을 고치고 상한 뼈를 고치고 그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다는 것이 나타났다.

(2)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의 권능이나 경건으로" 이를 행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힘이나 또는 그들이 맞고 있는 의술이나 그들의 말의 힘으로 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그것을 행한 능력은 오로지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경건함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약하고 어리석은 자에 불과하였기에 그리스도께서 선택하셨다. 베드로는 죄인이었다. 유다에게 무슨 경건이 있었는가? 그렇지만 그는 그리스도도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였었다. 그들에게 무슨 경건함이 있었다 해도 그들이 그것을 가치있는 양 가장할 수는 없었다.

(3) 무리들이 이 일을 그들의 권능과 경건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기고 그렇게 바라본 것은 무리들의 과오였다. 하나님의 사랑으로써 사역자로 선택된 사람은 존경을 받을 수 있지만 우상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는 도구에 불과하고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우리가 한 것으로 여기게 되지 않도록 조심하자.

(4) 베드로와 요한에게 훌륭한 것은 이 기적의 영광을 자신들에게 돌린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렸다는 것이다. 올바로 된 사람이라면 그들이 이 일을 대할 때 대단히 겸손하였음을 볼 수 있으리라. "우리가 아니라. 오1 주님 우리가 아니라 당신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소서." 모든 면류관은 주의 발 아래 드려야 한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나와 함께 하소서."

Ⅱ. 그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조상들에게 약속된 참 메시야라고 소개한다(13절). 그 이유는



(1) 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그들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하여 불경자로 그리스도를 정죄하였지만 베드로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하나님에게는 귀중한 아들이며 그는 우리에게 구세주이시라고 하였다.

(2) 하나님은 그를 그의 교회의 왕과 제사장과 예언자로 세움으로 영화롭게 하셨다. 그는 예수를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그의 삶과 죽음에서도 영화롭게 하셨다.

(3) 그는 하나님을 "우리 조상의 하나님"으로 영광을 돌리고 경의를 가지고 조상의 이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부른다(이들은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위대한 사람들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그들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 즉 "그들의 자손으로 말미암아 땅 위의 만민의 축복을 받으리라"는 말씀과 또 그들과 맺은 계약, "하나님께서 그들과 그들의 자손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말씀을 따라 보내신 것이었다. 사도들은 족장들을 그들의 조상이며 하나님을 그들로부터 혈통을 이어 받은 유대인의 족장들의 하나님이라 부른다. 이렇게 함으로 사도들은 그들이 유대 민족에게 악의가 없으며(유대인들이 그들을 질투어린 눈초리로 쳐다보므로) 오히려 관심을 가지고 귀하게 여기며 그 나라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한다. 더구나 그들이 가르치는 복음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뜻의 계시였다. 26장 7, 22절, 누가복음 1장 72, 73절을 보라.

2. 그는 전과 같이 그들을 명백하고도 단호하게 예수의 살인자로 규정한다.

(1) "너희가 저를 민족의 대표자격인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넘겨 주었고 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들에게 선동되어 마치 그가 많은 사람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취급하였도다"라고 말한다.

(2) "그가 외적인 허세와 권능으로 오지 않았기 때문에 너희가 그를 부인하고 그를 넘겨 주었으며 그를 너희 왕으로 여기지도 아니하였고 메시야로 받들지도 않았도다. 너희가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그를 부인하고 너희 민족의 메시야 대망을 스스로 부인하여 총독으로 하여금 너희를 비웃게 하였느니라(Dr. Hammonddml 말처럼). 너희가 너희에 대한 그의 변명을 무시하고서 빌라도 앞에서 부인하였도다" (빌라도가 그를 내보내려 하였으나' 사람들이 이를 반대하고 그를 제거하였던 것이다). "너희가 빌라도보다 악하도다. 만일 너희가 빌라도가 그의 뜻대로 심판하게 하였다면 그가 예수를 놓아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스스로 자신에 대해 증거자가 되었고 그를 박해한 악의를 품은 자들도 반박할 수 없었던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였도다"라고 반박한다. 주 예수는 무흠하신 것 이상으로 거룩하고 공의로우심으로 그를 죽인 자들의 죄는 더욱 무거운 것이다.

(3) "너희는 살인자가 놓이기를 원하고 그리스도는 처형하였도다. 마치 바라바가 주 예수보다 선대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처럼 더 큰 모욕을 가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 것처럼 행하였도다"라고 말한다.

(4) "너희가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라 말한다. 다음과 같은 뜻이다. "너희가 생명의 파괴자인 살인자는 놓아 주고 생명의 주인이신 구주를 죽였도다. 그를 버렸을 뿐 아니라 너희의 은총을 저버린 것이다. 너희에게 생명을 주신 그의 생명을 저버리므로 너희는 못할 짓을 하였도다. 너희가 생명의 주를 정복하였다고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데 그것은 그는 그 안에 생명이 있으시고 그가 내주신 생명을 곧 회복하시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3. 그는 전처럼 그의 부활을 입증한다(2:32). 다음 같이 이론을 전개한다. "너희가 다른 임금들에게서 지위와 영토를 빼앗을 수 있는 것처럼 생명의 주에게서도 그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너희가 스스로 잘못됨을 알았도다. 곧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신 것이라. 너희가 그를 죽이므로 하나님을 거스려 싸우고 실패하였도다. 하나님께서 그를 죽음에서 살리시고 그의 요구를 들으시사 그의 가르침을 굳게 하시고 그의 고통으로 인한 온갖 비난을 물리치셨으니 그의 부활의 사실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증인이라"고 말한다.

4. 그는 이 무기력한 사람의 치료를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한다(16절). 그가 자신을 나타내신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다." 그는 다시 반복하기를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고 말한다.

(1) 그는 기적의 진실성에 관하여는 그들 자신이 증인이라고 호소한다. 기적이 임한 그 사람은 "너희가 보았고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 병자가 전에 베드로와 요한을 안 일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 사이에 어떤 묵계가 있으리라고 의심할 수는 없다.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는 그가 어릴 적부터 앉은뱅이인 것을 알도다. 이 기적은 너희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임하였으니 즉 성전 모퉁이에서가 아니라 성전 문 앞에서 이루어졌도다. 너희가 어떻게 이 일이 이루어졌는가를 보았으므로 무슨 속임수가 있으리라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 즉시 그 사실을 시험해 볼 자유가 있느니라. 치료는 완전한 것이었도다. 보라, 완전히 낫지 않았는가! 그가 전혀 앓던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걷고 뛰는 것은 너희가 보도다"라는 의미의 말이다.

(2) 그는 그들에게 이 사건을 통해 임한 능력을 알려 준다.

[1] 이 일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형식적으로 또는 장식을 위해 불리워진 것이 아니라 그의 이름의 전문가이며 교사인 우리에 의하여 또한 우리가 그로부터 받은 위임과 교훈에 의하여 그가 우리에게 주신 능력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그리스도라는 이름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한다. 어명(御命)이 비록 집행하는 사람은 보잘 것 없는 관리이지만 왕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것처럼 이 일은 그리스도의 권위와 능력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2] 그리스도의 능력은 "그의 이름을 믿으므로" 그를 신뢰하고 그를 의지하며 오로지 그만 믿고 바람으로 임하게 된다. 그런데 이 믿음까지도 di avuto/u - 즉 그를 통하여 즉 그의 역사하심의 결과이다. "그것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선물이다." 그가 우리에게 주신 믿음으로 그가 영광을 받으셨으니 이는 그가 곧 "우리의 믿음의 시작이자 완성자"이시기 때문이다. 라이트푸트 박사(Dr. Lightfoot)는 본문에서(16절) 믿음이 두 번 언급됨을 지적한다. 이 기적을 행한 것은 사도의 믿음이요 이 기적을 받은 것은 앉은뱅이의 믿음 때문이었던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나는 이 일이 주로 사도들의 믿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믿음으로 이 기적이 임하게 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 능력을 받아 이 일을 했고 모든 영광을 그에게 돌렸던 것이다. 베드로는 이 기적을 설명하면서 그들이 세상에 가르친 복음의 진리 즉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능력과 은사의 초석이시며 능한 치유자이시며 구세주이심을 확신하였고 그에게 은혜를 입는 유일한 방법으로써 복음서에서 말하는 믿음의 의무를 권하였다. 이것은 또한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의 구원의 복음의 신비를 우리에게 설명해 준다. 우리를 의롭게 하는 이름은 그의 영광스런 이름 우리의 "의로우신 주님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특별히 그의 이름에 의하여 그 이름을 믿음으로, 바로 그 이름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임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베드로는 그들에게 못박히신 예수를 전하고, 이 신랑의 참된 친구로서 그는 그를 섬기고 받들기 위해 그의 모든 관심을 헌신하였던 것이다.

Ⅲ. 그는 비록 그들이 그리스도를 죽인 죄를 저질렀지만 그들이 자비하심을 얻도록 그들에게 소망을 준다.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그들에게 확신을 주었고 반면 그들이 낙심하지 않도록 조심하였다. 그들의 죄는 컸으나 그는 그들의 죄를 경감시켜 준다.

1. 그들의 범죄가 무지의 탓이라고 솔직히 비난함으로 그들의 죄를 가볍게 해 준다. 그는 그들이 "생명의 주를 죽였다"고 한 그의 말을 듣고 그들이 공포에 사로잡혀서 낙심해 버리거나 도망가려는 듯한 기색을 청중들의 안색에서 읽고 그들을 형제라 칭함으로 엄한 문책을 완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또한 그가 그들을 형제라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자신도 이 죄악에 그들과 함께 공범자였기 때문이다. 그도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부인하였고 그를 알지 못한다고 맹세하였다. 그는 이렇게 하고 스스로 놀랐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너희에 대해서는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한 줄 내가 아노라"(17절). 이 말을 통해 우리는 베드로의 깊은 사랑을 발견하게 되며 우리가 바라던 것 이상의 최상의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상처를 샅샅이 헤쳐논 후 그 치료에 대하여 생각함으로써 그들에게 그들의 의사이신 예수에 대하여 바른 인식을 갖게 해 준다. 이 보다 더 승리로운 방법이 있을까? 그가 이같이 그들을 변호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그를 못박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고 그들이 행한 바를 알지 못함이라고 그들을 대신하여 간구하신 본을 따랐기 때문이다. 관헌들에 대하여는 기록되기를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 한다. 고린도 전서 2장 8절을 보라. 혹 관헌들과 백성들 중의 일부는 그들의 양심에서 비쳐오고 확신되는 바를 거스려 악의를 가지고 이 일을 저질렀으리라. 그러나 대부분은 대세에 따랐을 뿐이요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저질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교회를 박해한 것은 "알지 못하고 불신으로" 하였던 것이다(딤전 1:13).

2. 그는 그들의 범죄 즉 "생명의 주"를 죽게 한 죄의 결과를 가볍게 해 준다. 이 일은 끔찍한 잘못하였으나 "성경의 응한 것"으로 예언된 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이 꼭 범죄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리스도의 고통은 그들에게 필요하였고 따라서 그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마땅히 고통을 당해야 했던 것이며 너희는 알지 못하고 이 일을 행하였도다"라고 말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였던 것이다. "너희가 성경을 이루었으나 알지 못하였도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너희의 손으로 그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보여 주신바 그리스도가 고통을 당하시리란 것을 성취하셨느니라. 그를 너희에게 넘겨 준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그러나 너희는 자신의 독선으로 이 계획을 전혀 알지 못하였도다. 너희가 그런 뜻을 지녔던 것이 아니요 너희 마음에도 그런 생각은 없었도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너희 자신의 정열을 합리화함을 이용하여 성서를 응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밀한 뜻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 그의 사업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고통을 당하시리란 예언자들의" 입과 글을 통하여 여러 세대 전서부터 선포하셨던 것이다. 그들을 통하여 이 사실을 나타내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었고 그는 그의 말씀이 좋은 결과를 이루기를 바라신다. 그는 그가 나타내신 것을 이루셨고 그가 이루심으로 정확히 변함없이 나타내셨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박해하여 죽게 한 그들의 모든 죄는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그들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길이 있고 그들의 회개를 통해 자비를 바랄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바로 이 회개에 의하여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는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이 말씀은 요셉이 그의 형제들이 그에게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했을 때 그들을 격려한 말씀과 일치한다. "두려워 마소서.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었소." 창 50:15, 20) 특별한 뜻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고통은 "죄사유"를 위하심이요, 그 자비의 출현에 근거하여 그는 그들에게 소망을 바라라고 격려하였던 것이다.

Ⅳ. 그는 그들에게 모두 기독교인으로 개종할 것을 권고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에게 말할 수 없이 유익함을 확신시켜 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영원히 굳게 서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설교의 목적이었다.

1. 그는 그들이 무엇을 믿어야만 하는가를 가르친다.

(1)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약속된 후손으로 그에 대하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신(25절) 바로 그 씨임을 믿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으로(창 12:3) 이 약속은 오래지 않아 그에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제 이 약속은 자신이 바로 육체에 따라 "아브라함의 씨"였던 예수 안에서 결국 완성되었고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뿐 아니라 "땅 위의 만민이"복을 받았으니 어떤 이는 그를 통해 약간의 도움을, 어떤 이는 전폭적인 구원을 이루었던 것이다.

(2) 그들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예언자임은 믿어야 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형제 가운데서" 일으키시겠다고 약속하신 "모세와 같은 예언자"이다(22절). 이 말씀은 그 약속에 대하여 언급한다(신 18:18).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예언자이다. 그 안에서 모든 하나님의 계시는 집약되고 그를 통해 우리에게 넘겨진다. 그는 하늘이 선택한 "모세와 같은 예언자"이다. 그는 다른 예언자들보다 더 친밀하게 신의 뜻을 알고 하나님과 가깝게 말씀을 나누었다. 그는 모세와 같이 그의 백성의 멍에를 풀어주셨고 광야에서 그들을 안도하셨다. 그는 모세와 같이 왕자이며 율법 수여자이며 모세가 전형적이었던 것처럼 참 예약의 수립자이시다. 모세는 "종으로" 그리스도는 "아들로 성실하셨다." 그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살인하였고 바로에게 맞섰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자기 것으로 삼으시고 그에게 사명을 맡기셨던 것이다. 모세가 온유와 인내의 전형적 인물이듯이 그리스도도 그러하였다. 모세가 주의 말씀에 의하여 죽었듯이 그리스도도 그러하였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으나"(신 34:10; 민 12:6, 7) 여기 모세보다 큰 분이 있으니 그가 곧 그리스도시다. 그는 하나님이 세우신 예언자이니 그 이유는 예수가 이 명예를 자기가 취할 것으로 생각지 않고 하나님에게 돌렸기 때문이다. 그는 이스라엘에 제일 높은 분으로 세움을 받았다. 그는 그들 가운데서만 그의 인격 속에 숨겨 있는 직책을 수행하셨다. 그들은 그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사를 처음으로 제공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 가운데 세움을 받으사 육체에 관하여는 그들에게서 그리스도는 나시었다." 이것은 그들에게 큰 명예인 것으로 그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의 의무이며 위로가 되는 것이다. 흔히 생각하기를 그가 자기 백성에게 오셨으므로 그들이 그를 받아들일 것이라 한다. 실상 구약의 교회는 여러 세대를 걸쳐 끊임없이 계속된 선자자들과 선자자 학파를 통하여 축복을 받았다(본문에서는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 24절이라고 기록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사무엘 때부터 예언자 시대가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종들은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그의 품에 품으셨던 그의 아들을 보내기까지 조롱을 당하였던 것이다.

(3) 그들은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올 것이며(19절)" 그 때는 "모든 것이 회복되는 시기"임을 믿어야 한다(21절). 이 세상 뒤에는 장래의 나라, 즉 다른 생이 있을 것이다. 이 때는 주 앞으로부터 즉 그 날에 그의 영광이 나타나시므로 마지막 날에 그의 오심으로써 도래할 것이다. 주께서 나타나지 않으셨으므로 많은 죄인들의 안전의 원인이 되었고 성자들에 대한 불신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나타나심이 임박하였으니 이 모든 죄는 잠잠케 될 것이다. "보라. 재판장이 문 앞에 섰으니" 그러면 주의 나타나심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1] "만물이 회복된다"(21절). "새 하늘과 새 땅이"나타날 것인데 이는 만물이 사라진 후에 나타날 것이며(계 21:1), 모든 피조물이 회복될 것이다. 이 피조물은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지금은 탄식하며 슬퍼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이 말씀을 종말의 한 측면으로서 이해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유사 이래 그의 모든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 만물의 마지막"을 뜻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아담의 7대 손 에녹이 예언하였고"(유다서14) 다른 예언자들이 예언한 일시적인 심판도 사도가 "영원한 심판"이라고 부른 그 심판의 전형적인 것이다. 이것이 신약에 이르러서는 전보다 더 명백하게 나타났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은 그것을 바랄 수 있게 되었다.



[2] 이와 함께 "유쾌하게 하는 날"이 임할 것이다. 이 날은 "염복에 무거운 짐을 진 자"들에게 시원한 그늘과 같이 주의 백성에게 위로가 될 것이다. 모든 기독교인은 현재의 괴로움과 수고가 끝난 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준비될 휴식"을 바란다. 이 소망을 바라고 그들은 오늘의 고통을 참으며 봉사를 계속한다. "주 앞으로부터 오는" 유쾌함은 주의 앞에서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2. 그는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말해 준다.

(1) "회개해야 한다." 그들은 실수로 저지른 일을 잘 생각해 보고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와 돌이켜 생각하고 새로이 주어진 확신에 복종하고 새롭게 시작해야만 한다.

(2) "개종해야" 한다. 주어진 사실에 숨김없이 마주 서서 과거에 그들이 걸었던 것과는 정반대로 발걸음을 돌이켜야 한다. 그들은 그들이 반항하였던 "주 하나님에게 돌아와야만" 한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다. 개종하고서 다시는 돌아서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유대교 신앙을 기독교 신앙으로 바꿀 뿐 아니라 육적이요 세상적이요 감각적인 세력의 지배에서 벗어나 거룩하고 천상적이고 신적인 원칙과 정열로 돌아와야만 한다.

(3) 대 선지자이신 그리스도에게 순종해야 한다. "그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나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그의 지시에 귀를 기울이라. 그의 가르침을 받으며 그의 다스림에 복종하라. 거룩한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라. 그러면 예언자들에게 들리어진 것같이 거룩한 사명이 부여되리라. 너희는 그를 들을지라. 절대적인 믿음과 복종만을 그에게 돌리도록 하라. 더욱 모든 일에 있어서 그를 들으라. 그의 법이 너의 모든 행위를 다스리게 하라. 그리고 그의 뜻이 결정되는 대로 따르라. 그가 말씀하실 때는 언제나 너희는 듣도록 하고 그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나 혈과 육으로는 불쾌하더라도 환영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주여 말씀하소서. 당신의 종이 듣겠나이다"하는 태도이다. 본문에는 왜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행하고 복종해야 하는지 그 훌륭한 근거를 보여 주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그의 부름에 귀를 막고 그의 멍에를 안 메려고 목을 곧게 하면 멸망받을 것이기 때문이다(23절).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와 그가 말하는 대로 행치 않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받으리라 하였다." 전쟁과 기근으로 말미암아 도시가 멸망할 위기에 놓이는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이며 영원한 파멸인 영혼의 파멸은 대 예언자이신 그리스도를 경홀히 여기었기 때문에 받는 위협이다. 구세주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파멸자의 수중에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3. 그는 그들이 무엇을 구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1) 죄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 이것은 언제나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의 특권으로 말씀되고 있다(19절). "회개하고 돌이켜 죄없이 함을 받으라."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1] 죄 사유는 한 줄기의 햇빛으로 구름이 사라지듯이(사 44:22) 빚을 탕감받을 때 줄을 그어 없애듯이 죄없이 함을 받으라는 말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실 때 그는 더 이상 죄인을 나쁘게 여기시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없었던 것처럼 그것은 용서된다. 죄인을 거스려 쓰여진 모든 가혹한 처벌이(욥 13:26) 해면으로 씻어내듯이 깨끗이 없어진다. 이는 속박에 대한 사면이요 심판의 최소이다.

[2]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돌아오지 않는 한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바랄 수는 없다. 그리스도께서 죄 사유의 대가로 죽으셨지만 이 죄 사유의 은혜를 받으려면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는 것이다. 회개없이 사유함도 없다.

[3]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고자 하는 희망은 우리를 회개하게 하는 강한 동기가 되어야 한다. "회개하라. 그러면 죄사함을 받을 것이요" 이 회개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이해와 죄 사유의 희망으로부터 넘쳐오는 복음적인 것이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은 제일 중대한 선포이다.

[4] 우리의 죄 사유가 위로의 결실을 맺을 때는 "유쾌하게 되는 날이 이를 때이다." 만약 우리가 죄사유함을 받는다면 이것만으로 우리는 기뻐할 수 있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용서함을 받고 우리의 의롭다 하심이 천사와 사람들 앞에서 발표될 때 이 위로는 완성되는 것이다. 즉 로마서의 말씀대로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신다"(롬 8:30).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요일 3:2) 우리의 죄가 없어졌으나 그러나 "유쾌하게 하는 때가 오기까지는" 그 축복된 결과가 무엇인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싸움과 수고가 있는 동안에(안으로는 의심과 두려움이요 밖으로는 고통과 위험인데) 죄 사유를 만족하게 성취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유쾌한 때가 오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2) 그리스도의 재림의 위로를 구해야 한다(20,21절).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다른 재림이나 다른 복음을 바라지 말고 이 복음을 완성하고 그를 바랄지어다. 너희는 모세가 너희에게 그와 같은 다른 사람을 기다리라고 명했다 해서 예수와 같은 다른 예언자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만물이 회복할 때까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두겠지만 만약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키면 너희가 결코 그를 놓치지 아니하리니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가 너희에게 보이시리라"고 말한다.

[1] 그렇다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몸을 지니시고 임재하실 것을 바라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그를 받은 하늘이 종말까지 그를 보유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육체적인 임재는 이 축복된 자리에만 국한되며 종말에 만물이 성취될 것이며 따라서 성만찬에서 몸으로 그가 현실에 임하리라는 꿈을 꾸는 자는 그에게 모욕을 주는 것이요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그가 시련을 받으실 때 영광받으신 구세주는 사람들 시야에 보이지 않았으리라는 것에 의견이 일치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 그에 대한 신앙으로 살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가 "이 세상에서 믿어져야" 하겠기 때문에 그는 영광 중에 올리우신 것이다. 하몬드 박사(Dr. Hammond)는 이렇게 해석한다. "하늘 뜻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해석하여 하늘 나라의 영광과 권세를 받아들이는 자는 만물이 그 발 아래 복종할 때까지 왕노릇하시리라(고전 15:25; 시 75:2).

[2] 그렇지만 그를 보내사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돌이키게 할 것이 약속되고 있다(20절).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리니 그는 너희에게 그의 부활을 전 후하여 제자들에 의해 전파되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되실 것이라"고 말한다.

첫째, 그의 영적인 임재를 구하라고 한다. "세상에 보냄을 받은 그는 바로 너희에게 보냄을 받은 것이 너희는 그가 오심으로 위로를 받으라. 그는 그의 계약이시며 병기가 되는 복음 가운데서 너희에게 나타나신 것이다"라고 말한다.

둘째, "그는 그리스도와 기독교에 원수이며 그리스도의 사역자들과 백성들을 그들에게서 넘겨 준 불신의 유대 민족과 예루살렘을 멸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믿으므로 평안을 주실 것인데 그것은 새롭게 할 때에 이루어질 것이요 그 때 너희도 참여하리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에야 "교회가 안식을 누린다"고 하몬드 박사(Dr. Hammond)는 말하고 있다.

셋째, "종말에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는 것은 너희에게 축복이 될 것이다. 그 때에 너희는 너희의 구속이 가까이 옴을 알고 기쁨으로 머리를 들 것이라" 한다. 본문의 그리스도의 내림은 그 때를 뜻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 때까지 "하늘이 그를 받아 둘" 것이기 때문이다(21절).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이 서 있는 것같이 태초에 시작된 그의 예언도 마지막 날의 계약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 마지막 날에 "그가 그의 종들인 예언자들에게 선포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신비가 이루어질 것이다"(계 10:7). 교회 안의 모든 제도는 종말에 만물의 회복을 예고해 주고 있는 것이다.

4. 그는 그들이 만일 돌이키면 무슨 근거 위에 이 일들을 기다릴 것인가를 말해 준다. 즉 그들이 그를 부인하였고 죽으시게 하였지만 그들이 이스라엘 족속인 이유로 그에게 자비를 입기를 바랄 수 있을 것이라 한다.

(1) 이스라엘 족속으로 그들은 구약의 은총을 독점하였다. 다른 어떤 민족보다 그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라였고 하나님의 은총이 그들에게 수여되었으므로 메시야와 그의 나라에 관계가 있는 것이다. "너희는 예언자들의 자손이요 언약의 자손이니"란 말씀과 같다.

[1] 그들이 자손이라 했다. 이 말은 그들이 학교의 학생처럼 예언자의 제자들이란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구약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사무엘서부터 그의 후예들에게 "예언의 영을 물려받도록" 훈련하는 의미에서 "예언자의 자손이란 뜻은 아니다." 다만 그들 가운데서 예언자들이 일어나고 또 예언자로 세움을 받은 백성이란 뜻에서이다. "하나님께서 너희 자손들 가운데서 선지자를 일으키지 않았는가?" 하는 말은 이스라엘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뜻으로 얘기되고 있다(암 2:11). 구약과 신약을 망라하여 모든 영감을 받은 저자들은 "아브라함 자손"중에서 나왔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김으로 그들의 명예요, 이익인 것이다(롬 3:2). 그들의 정치제도는 예언, 즉 거룩한 계시에 따라 조직되었고 이 계시에 의하여 여러 세대를 걸쳐 그들의 정치적 문제들은 해결을 보았던 것이다. 호세아 12장 13절을 보라. "여호와께서는 선지자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선지자로 저를 보호하셨도다." 이제 예언이 끝난 마지막 때의 교회도 "예언자의 자손"이라 부르는 것은 합당하다. 그것은 그들이 알지는 못하였지만 매 안식일마다 "그들의 회당에서 읽혀지는 예언자의 외침을" 들었기 때문이다(13:27).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속히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지닌 자격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라고 예언되고 있기 때문이다(벧전 1:13). 그러므로 그들은 아무에게 무시를 당할 수도 없고 아무도 그들을 부인할 수도 없는 것이다(성서에 나타난대로). 예언자들과 그의 예언에 의해 축복을 받은 그들은 하나님의 은사를 헛되이 받지 않도록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특히 이 말씀을 교역자의 자녀들에게 적용시킬 수 있다. 그들이 만일 그들의 부친의 직책을 물려 받기를 원한다면 이를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것이며 "하나님의 종들의 후손이 지속될 것"을 바라야 한다.

[2] 그들은 자손들이었다. 즉 가족에서 자녀들에게 유산이 상속되는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과 맺으신 계약의 상속자"이다. 하나님의 계약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이루어졌고 그들은 바로 그 계약이 성립된 자손이요 그러기에 그들에게 "계약의 축복이 부과되는" 것이다. 즉 다음과 같은 말씀이다. "메시야의 약속이 너희에게 주어졌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너희에게 주어진 긍휼을 버리지 않고 고집스러운 불신으로 마음의 문을 닫지 않으면 너희에게 좋은 결과가 오리라 바랄 수 있도다." 본문에서 이 약속은 계약의 첫째 조항으로 언급되고 있다.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희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니" 본문에서 "씨"는 주로 그리스도를 가르키고 있지만(갈 3:16), 또한 그의 몸인 교회와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인 모는 믿는 자로 포함된다. "땅 위의 모든 족속"이 그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지므로 축복을 받게 된다. 그리고 "육체에 따라 아브라함의 자손"인 그들도 이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땅 위의 모든 족속인 그리스도 안에서 축복받는다면 그들보다 더 가까운 "육에 따른 친척은" 더 축복을 받는 것이다.

(2) 이스라엘 족속으로 그들은 최초로 신약의 은사를 접하게 되었다. "그들이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언약의 자손"이므로 그들에게 구속자가 처음 보내졌고 이 사실은 그들에게 용기를 부여하는 것으로, 만약 회개하고 돌이키면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는 오실 것이다(20절).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리니 너희에게 먼저 그를 보내시리라"(26절). 너희에게만 그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너희 유대인들에게 먼저 보내셨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를 세우시사 그를 임금과 구세주"로 지명하시고 권위를 부여하셨으며 이 사실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그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사 그들을 축복하시려고 그를 보내셨으니"이는 특히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불신에서 돌이키사 축복하시려는 부드러운 뜻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그는 너희가 축복받고 "불신에서 돌이켜" 희망을 지니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다.

[1] 본문은 그리스도가 어떻게 그의 사명을 받게 되었는지를 말해 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를 세우사 그를 보내셨도다"라 기록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를 예언자로 세우셨고 하늘로부터 들린 음성으로 자기의 자녀임을 선언하셨고 그의 성령으로 그를 충만하게 하사 보내셨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그를 보내신 것은 진리에 대해 증언하게 하기 위함이요 잃은 영혼을 찾아 구원하기 위한 것이며 그의 적들을 정복하기 위하여 보내신 것이다. 어떤 이는 그를 "부활케 하신 일"이 그를 높이시려는 첫 번째 조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부활의 목적은 그 사명을 새롭게 하시는 데 있는 것이다. 그를 부활케 하심으로 그가 우리는 떠난 것같이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의 복음과 성령을 통하여 그를 우리에게 새롭게 보내신 것이라고 한다.

[2] 그는 누구에게 보냄을 받았는가? "먼저 너희에게, 즉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예언자들의 자손이요, 언약의 자손인 너희에게 복음의 은총이 주어졌도다"라고 말한다. 예언자들이 그리하였던 것처럼 예수의 지상 공생에도 유대인에게 국한되었었다. 그는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을 찾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고"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다른 지방으로 가지 말라고 명하셨던 것이다. 부활 후에 그는 만국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처음 시작되었던 것이다"(눅 24:47). 또한 그들이 다른 민족들에게 보냄을 받았을 때에도 그들은 먼저 그들이 발견한 유대인들에게 전파하였다. 그들은 맏아들이므로 첫 번째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죽으시게 하여 멀리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부활하시자 그들에게 먼저 가셨는데 이것은 그들이 그의 죽음으로 인한 은혜를 처음으로 누리게 작정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3] 무슨 임무를 띠고 그는 보냄을 받았나. "그가 먼저 너희에게 보냄을 받은 것은 너희를 축복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마땅히 너희가 받아야 할 정죄를 하시고자 오신 것이 아니라 축복하는 것이 첫째 임무이다. 복음에 기록된 대로 너희에게 수여된 의롭다하심을 받아들인다면 그가 너희를 의롭다하실 것이라. 그러나 그가 너희를 축복하려 먼저 너희에게 오셨는데 너희가 그 축복을 거절하고 부인하면 그것은 오히려 너희에게 저주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말 4:6). 다음 사실을 기억해 두자.

첫째,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사명은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겠다. 즉 "의인의 해가 떠올라 그의 날개 안에 품어 치료하리라"는 말씀과 같다. 그가 세상을 떠나신 후에도 그는 축복을 남겨 놓으셨다. 그가 제자들을 떠나실 때 "제자들에게 축복하시고 승천하셨던 것이다"(눅 24:51) 즉 그가 성령을 보내신 것은 가장 큰 축복이요 축복 중의 축복인 것이다(사 44:3).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심은 그리스도로 인해서요, 그를 통해서만이 우리는 축복을 바랄 수 있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가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하여 오신 그 큰 축복은 우리가 다른 모든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하여 불신에서 우리를 떠나게 하시며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사(마 1:21) 죄에서 돌이키게 하고자 하시는 데 있다. 죄는 우리가 나면서부터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의 섭리는 우리가 죄에서 돌이킬 뿐 아니라, 죄에 항거하며 죄를 버릴 뿐 아니라 미워하게 하시는 데 있다.

복음은 우리에게 이 방향을 제시한다. 그것은 우리 각자에게 불신에서 돌이키라고 요구할 뿐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시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킬지어다.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를 불신으로부터 구하사 축복하시려 작정하고 계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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