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1)(사도행전 2:1-4)
이곳에서는 성령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임한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다.
Ⅰ. 이 일이 일어난 시기와 장소. 이 문제는 사건의 확실성을 밝히기 위하여 특별히 명기되고 있다.
1. 그 때는 "오순절 날이 이르러서였다." 이 명절 제도를 살펴보아 그 시기에 대하여 고찰해 보자. 이 날은 아빕월 16일 즉 유월절 다음 날로 요제(搖祭)로 단을 가져온 다음 날 곧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에서 "세어서 7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난 다음 날이었다(레 23:15). 이 날이 이미 이르렀다" 함은 전 날이 지나고 새 날이 이르렀음을 뜻하는 것이다.(1) 성령께서는 큰 명절에 임하셨다. 이 날이야말로 유다 각 지방에서 온 사람들과 또한 세계 각처에서 온 개종자들로 예루살렘은 가득 차게 되고 그러므로 이 일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되어 곧 사방으로 퍼져 모든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어서 전에 유월절 명절 때와 같이 이 유대인의 명절로 복음 사업을 전하고 확장하는 일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2) 이 오순절 명절은 시내산에서의 율법 전수를 기념하기 위해 지켜졌던 것으로 이를 계기로 유대교가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라이트푸트 박사는 이 명절이 1447년만의 명절이라고 생각한다. 때맞추어 성령이 불과 방언으로 오순절 명절에 임함으로 한 국가가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던 것이다.
(3) 이 오순절 명절은 바로 "일요일"이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일요일은 더욱 명예롭게 되었고 그 날을 기독교인의 안식일로써 더욱 공고하게 하였다. "이 날은 주께서 제정하신 날로써" 같은 일요일에 일어난 두 축복된 사건 즉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임재로써 교회에서 기념되며 큰 의의를 지니는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도 이 날을 "주의 날"로 격식을 갖추어 지킴을 정당화시켜 주며 이 날을 거룩하게 함으로 하나님에게 이 두 큰 축복에 대하여 특별히 찬양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나는 매 주일마다 이 두 사건은 우리의 기도와 찬양을 통해 기념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교회에서는 부활절과 성령 강림절을 맞아 1년에 한 번씩만 이 사건을 기념하고 있지 않는가. 아니다! 우리는 깊은 열정을 갖고 이 날들을 기념해야 할 것이다.
2. 그 때는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을 때였다." 그 장소가 성전에서였는지 공중예배에 참석하던 곳에서였는지(눅 24:53) 그들이 주로 함께 있었던 다락방에서였든지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예루살렘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곳이야말로 하나님이 선택한 곳이, 거기에 그의 이름을 두신 곳이요, 예언에 이르기를 주의 말씀이 여기서 모든 민족에게로 전파되리라 기록된 곳이기 때문이다(사 2:3). 또한 이곳은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기도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그들을 만나시며 축복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세상에 제일 큰 축복을 이곳에서 만난 무리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는 상상할 수 없는 치욕을 받으셨지만 하나님은 아직도 이 명예를 예루살렘이 누리게 하셨고 장소 때문에 실망하거나 어떤 장소를 편견을 가지고 생각하지 말 것을 가르치신다. 하나님은 각처에 남은 자를 두시며 예루살렘에도 남은 자를 두신다. 이곳에서 제자들은 그리 넓지도 않은 오직 한 곳에 모여 있었다. 또한 그들은 모두 한마음이었다. 그들이 주님과 함께 있을 때 얼마나 자주 그들은 "누가 위대한가 하는 문제로 다투었었던가!" 그러나 이제 이러한 모든 싸움은 종식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이 다투었다는 기사를 볼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나타나 그들을 향해 숨을 쉬셨을 때 이미 그들이 받았던 성령은 어느 정도, 이러한 경쟁이 자리잡고 있는 잘못을 정하게 되고 거룩한 사랑이 자리잡았던 것이다. 그들은 평상시보다 늦게까지 함께 더욱 기도에 힘썼다(1:14). 그리고 이 기도는 그들로 하여금 더욱 서로 사랑하게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은총을 베풀어 그들에게 성령의 선물을 준비하셨고 이 성령의 비둘기는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곳에 임하시지 않고 수면과 같이 잔잔한 곳에 임하신다. 우리도 성령께서 "높은 곳에서 임해 오심을 경험"할 수 있을까? 한 마음이 되도록 하자. 제자들이 그러했듯이 비록 감정과 취미는 다르더라도 일치하여 서로 사랑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형제들이 연합하여 함께 모인 곳에 주님은 축복하시기 때문이다."
Ⅱ.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신 방법.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주 구름속에서 강림하신다. 첫계약을 맺으실 때도 그랬고 후에 성전에 임하실 때도 그러하였다. 구름이 가리우는 것은 인간 통치의 어두움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구름에 가리워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얼마나 우리가 천상계에 대하여 어두운가 하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성령은 구름 속에서 강림하지는 않으셨다. 오히려 성령은 인간의 마음을 가리우는 구름을 흩으시고 세상에 빛을 주셨던 것이다.
1. 큰 사건에 대한 기대를 불러 일으킨 바람 같은 큰 소리.(1) 그 소리는 여늬 바람처럼 점차 발생하지 않고 "갑자기" 강하게 임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빨리 임하였고 함께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까지 놀라게 했으며 일종의 종교적 활동속에서 일어났다.
(2) 그것은 "하늘로부터 들린 우레와 같은 소리였다"(계 6:1). 하나님께서 "바람을 그 곳간에서 내시도다"(시 135:7). 또는 "바람을 그의 장중에 모았다" 기록되어 있다(잠 30:4). 바로 그분에게서 이 소리는 "너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는 외치는 자의 소리와 같이 임하였다.
(3) 그것은 바람 소리였다. 성령의 역사는 바람과 같은 것이다(요 3:8).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생명의 성령이 마른 뼈에 임하실 때 예언자는 "생기에서 대언하라"는 말씀을 듣게 된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겔 37:9)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임하실 때 바람 가운데 임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바람은 그로 하여금 "세미한 소리" 가운데서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하게 한 준비 과정이었다(왕상 19:11, 12) "여호와의 길은 회리바람과 광풍에 있고(나 1:3) 회리 바람 속에서 그는 욥에게 말씀하셨다.
(4) 그것은 "돌진하는 강한 바람이 온다." 그것은 마치 그 앞의 모든 것을 위압하듯이 아주 강열하였고 큰 소리와 동시에 놀라운 위력으로 임하였다. 이것은 인간들의 마음에, 또한 세상에 미치는 하나님의 성령의 위력있는 작용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 온갖 망상을 몰아내게 되는 것이다."
(5) 그것은 그들의 방에만 충만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에 충만하였다." 어떤 이들이 요나를 사로잡았던 바람이 그가 탄 배만 강습하였다고 생각하듯(욘 1:4), 동방박사의 별이 아기가 누운 집 위에서 멈추었던 것처럼, 이 현상은 특정 집에 한정하여 일어났지만 이 초자연적인 사건은 전 시내를 경악케 하였다. 이 일을 눈으로 본 사람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물으려 하였다. 집을 충만케 한 바람은 제자들에게 두려움을 주었고 그들로 하여금 존경받게 하였으며 성령을 받는 데 필요한 기틀을 마련케 하였다. 이 성령에 대한 확신이 위로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 축복스러운 바람의 거친 일격은 영혼으로 하여금 부드럽고 상냥한 미풍 속에서 임할 성령을 기다리도록 준비시키고 있다.
2. 그들이 받을 선물을 보여 주는 표적. 그들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을 보았으며 성령을 상징하는 이 불이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임하였던 것처럼 그들 각자에게 임하였다. 하몬드 박사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들 모두를 비치는 불꽃 같은 것이 나타났다. 다음 그것은 흩어져 혀의 형태를 이루고 각 사람 머리 위에 머물렀고 그 후 방언이 시작된 것이다." 초의 불꽃을 보면 혀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자연주의자들은 유성(流星)을 가리켜 맹열한 불꽃이 아닌 ignis lambens - 즉 부드러운 불꽃이라고 부른다. 여기 나오는 불꽃이 이러한 형태의 것이었다.
(1) 제자들 자신의 신앙을 확고히 하고 다른 사람을 확신케 한 외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표적이 있었다. 이와 같이 구약의 예언자들도 표적으로 그들의 첫 사명을 확고히 하였고 그러므로 모든 이스라엘 사람은 그들이 예언자로 세워졌음을 알 수 있었다.
(2) 주어진 표적은 불이었다. 이는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한 바 "그가 불과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리라" 하심의 성취였다. 즉 불로 임하는 성령이었다. 그들은 오순절 명절을 맞이하여 시내산에서 율법을 전수받은 일을 기념하고 있었다. 이 율법은 화염 속에서 전수되었으므로 불 같은 말씀(law)이라 불렀고 복음도 이와 같은 것이다. 에스겔은 "타오르는 숯불 속에서 그의 사명을 확고히 했고"(겔 1:13) 이사야도 그의 입술에 닿은 "숯불"로 그의 사명을 새롭게 하였다(사 6:7). 불 같은 성령은 마음을 녹이며 불순물을 분리하여 태우며 심령에 경건과 열렬한 사랑을 일깨워 준다. 이렇게 하여 영적 희생 제물은 제단 불에서와 같이 봉헌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지상에 보내기 위해 오신 것은 바로 이 불이었다(눅 12:40).
(3) 이 불은 갈라진 혀의 형태로 나타났다. 성령의 역사는 다양하다. 방언도 성령의 역사의 하나로 성령의 은사를 들어내는 첫 열매로 발탁되었다. 이 표적이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1] 이 불꽃은 혀의 모습이었다. 이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고 이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는 세상에 그의 뜻을 전하시고, 성령을 제자들에게 주시므로 그들에게 지식을 부여할 뿐 아니라 그들이 아는 것을 세상에 공포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하신다는 뜻이다.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 것이 성령의 경륜인 것이다."
[2] 또한 혀 같은 불꽃이 여러 가지로 갈라졌다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천체의 빛을 경륜을 따라 땅 위에 나누어 주셨다고 말씀하신 것처럼(신 4:19) 모든 민족들에게 골고루 그의 은혜를 알게 하신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혀 같은 불꽃이 갈라졌으나 그들은 계속 한 마음으로 뭉쳐있었다. 왜냐하면 표현은 가지각색이라도 참된 사람은 일치를 이루기 때문이다. 라이트푸트 박사는 바벨에서 언어의 분산은 불법자에 대한 추방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오직 하나님만이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던 언어를 망각하였을 때 그들은 완전히 하나님과 신앙에 대한 지식을 잃어버리고 우상 숭배로 전락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약 이 천년 후에 이르러서 다시 언어를 분산하시므로 모든 나라들이 하나님을 알도록 되기를 다시 바라시는 하나님이다.
(4) 이 불꽃이 얼마 동안 그들에게 임하였는데 이는 성령의 상주를 의미한다. 구약의 예언적 은사는 간헐적으로 때때로 수여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표적은 사라진다해도 늘 성령의 은사를 소유하였다. 이 불꽃이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으로 옮겨갔는지 사람 수효대로 불꽃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때가 이미 낮이었으므로 이 불꽃들은 낮에 보일 만큼 강하고 밝은 불꽃이었다는 사실이다.
Ⅲ. 은혜 체험의 직접적인 결과.
1. "그들은 전"보다 더욱 풍성하고 힘있게 "성령으로 충만하였다." 그들은 성령의 은사로 충만하였으며 전보다 더욱 성령의 성별하시는 능력 아래서 이 세상과는 별개로 거룩하고 완전하며 영적인 사람들이 되었고 저 세상과 더욱 가까워졌다. 그들은 무엇보다 성령의 위로로 충만하였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늘 나라에 대한 소망 가운데서 더욱 더 기뻐하였으며 이 소망으로 인해 그들의 슬픔과 두려움은 온전히 사라졌다. 또한 이곳서 명백한 증거를 통하여 특별히 강조하는 사실은 그들이 성령의 은사로 충만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복음을 확장시키기 위하여 기적적인 능력을 입게 되었고 120명의 제자가 동시에 같은 "성령에 충만하였다." 즉 70명의 제자 또한 사도적 인물들이었고 같은 사역에 동참하였으며 나머지 모든 사람도 복음을 전파하였던 것이다. 기록된 바(엡 4:8, 11) "그리스도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이 말씀은 행 2:33 을 뜻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는데 사도들뿐 아니라(12사도) 또한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에게 (70명의 제자와 순회 설교자들) 그리고 후에 생기게 된 직책으로 한 교회에만 머무는 "목사"와 "교사"들에게도 주시었다. 여기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함은 함께 있던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이었다(1절; 1:14, 15).2. 그들은 당시의 상용어 아랍어 외에 다른 나라 말을 배운 적은 없었지만 "여러 나라 말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일상어를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그들을 이끄시는 대로 또는 "말하게 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그의 성호를 찬양하였다. 그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avpofqevggesqa(경귀) 즉 기억해 둘 만한 본질적이고도 무게있는 말을 하였다. 그들은(바벨에서 흩어졌던 여러 부족들처럼) 한 사람이 한 개의 언어만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또한 그들은 바벨탑을 세운 사람들과는 달리(창 11:7) 자신의 경우만을 이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여기 저기서 아무 언어나 마구 구사하거나 의미없는 말을 중얼거린 것이 아니라 마치 모국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유효적절하게 유창하게 말하였다. 왜냐하면 기적으로 생기는 것은 무엇이나 최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전 생각이나 사고를 통해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말하도록 하심에 따라" 말하였고 성령은 그들에게 여러 언어를 주셨을 뿐 아니라 무엇을 말할 것도 알려 주셨다.
(1) 이때의 기적은 굉장한 것이었다(이 기적도 대부분의 복음서의 기적이 그러한 것처럼). 마음에 일어난 기적이었고 마음 안에서 말씀은 세워졌다. 그들은 자기들 언어뿐 아니라 이 일을 촉진케 하였을지도 모르는 어떤 외국어도 배우지 않았다. 아니 나타난대로 뿐이라면 이런 언어를 듣지도 못하였고 생각도 못하였었다. 그들은 학자나 여행가도 아니였고 책이나 회화를 통해 다른 나라 말을 배울 기회조차 없었다. 참으로 베드로까지는 자신의 사용하던 말로 앞에 나와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연설가도 아니었고 특별히 이해가 남달리 빠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말을 더듬는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하게 된다"(사 32:4). 모세가 "나는 말이 둔한 자"라고 불평하였을 때 하나님은 "내가 너의 입을 지키며 아론이 너의 대언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대언자에게 더 큰 힘을 부여하셨고 인간의 입술을 새롭게 지으셨다.
(2) 이 기적은 유효적절하고 봉사적인 기적이었다. 제자들이 사용한 언어는 히브리 말의 방언인 시리아어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약을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에 쓰여진 본래의 히브리어를, 또한 신약을 이해하기 위해서 신약에 쓰여진 본래의 희랍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방언의 은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을" 사명이 부여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곤란한 문제가 생긴다. 즉 어떻게 그들이 모든 민족들이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여러 나라 말을 구사할 수 있었느냐는 문제다. 사람들은 생활하면서 자기들의 언어를 배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각 민족에게 권위있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음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각 각 듣는 사람들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재능을 부여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이보다 위대한 일을 하리라"한 신약 속의 성취인 것처럼 보여진다(요 14:12).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때 이 기적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치유의 기적보다 더 위대한 기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스도 자신은 다른 나라 말을 하시지 않았고 그가 제자들과 함께 계실 동안은 제자들이 말할 수 있게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 일은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첫 결과였다. 틸롯손(Tillotson)대 감독은 이렇게 생각한다. 즉 만일 불신자가 기독교로 개종하는 일이 정직한 마음을 지닌 자들에 의해 진지하고도 과감하게 수립되려면 지금도 하나님께서 최초로 복음이 전파되던 때 역사하셨던 것처럼 모든 적절한 도우심으로 이러한 계획을 비범하게 도우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오순절(2)(사도행전 2:5-13)
본문에서는 제자들에게 갑자기 부여된 이 특별한 은사가 발생된 경위를 공개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Ⅰ. 이제 예루살렘에 있었던 거대한 무리가 모였는데 이는 평소의 오순절 명절의 집회를 훨씬 상회하였던 것 같다. "그 때에 경건한 유다인이 예루살렘에 우거하였는데" 이들은 신앙에 관심이 있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으며 그들 중 얼마는 "개정한 의인들로서" 할례를 받고 유대교인으로 입적하였고 다른 일부는 마음으로만 개종한 자들로서 우상을 버리고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자신을 드린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당시에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의 얼마는 흩어진 유대인이던 개종한 사람이며, "천하 각국으로부터"온 사람들이었다. 천하 각국이란 표현은 과장된 표현으로 당시 알려진 부분적인 세계에서 온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런던이나 또는 당시의 두로와 같은 곳이 각 곳에서 온 무역상인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듯이 당시의 예루살렘은 종교적인 목적으로 각 처에서 사람들이 모였다.
1. 그러면 이 나그네들이 떠나온 나라들은 어떤 나라들인가(9-11절). 우선은 동쪽 지방에서 온 사람들로 "바대인, 메대인, 엘람인" 그리고 셈의 후예인 "메소포타미아 거민들"이었다. 다음에 유다도 기록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유대 지방의 언어가 제자들이 말하던 언어와 같은 것이지만 전에 지자들은 북방 사투리로 말하였으나 ("너희가 갈릴리인이 아니냐, 너희 언어가 이를 입증하도다.") 그러나 이제 제자들이 말한 것은 유다 본 지방 사람들과 같은 표준어였다. 다음이 가바도기아 본토 그리고 본문에서는 "아시아"라고 칭하여지고 있다. 프로폰티스에서 온 거민들이었다. 이 지방들은 베드로가 편지할 때 흩어진 나그네들이라고 쓴 사람들이 거하는 지방이었다(벧전 1:1). 다음이 서쪽에 있는 야벳의 후예들이 사는 "브리기아 밤빌리아"의 주민들이었고 또한 "로마에서 온 나그네"들도 있었다. 다음에는 서쪽으로 애굽과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아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그레데 섬에서 온 사람, 아라비아 사막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본래 유대인으로 이 지방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거나 또는 그 지방 토착민으로서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들이었다. 휘트비 박사(Dr. Whitby)는 당시의 필로나 조세푸스 같은 유대 학자들의 말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 유대 학자들은 유대인을 가리켜 "세계 도처에 흩어져 살며 세계 어느 국민이건 그 중에 유대인이 살지않는 곳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2. 그러면 당시에 이 모든 유대인들과 개종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이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는가? 그들이 예루살렘에 우거하였다는 말을 볼 때 그들이 오순절 명절을 맞아 일시 방문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들은 이곳에 거주를 정하고 지냈는데 그 이유는 당시에 메시야가 나타나리라는 일반의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니엘이 예언한 마지막 주(역주:세계 역사를 10주로 나누어 7주로 인간의 역사는 끝나고 8주째 메시야 통치가 시작된다고 봄. 당시 이 마지막 7주가 끝났다는 통속적 종말론)가 이제 막 끝났고 유다의 통치권이 상실되었으므로 일반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즉시 나타나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눅 19:11). 이런 이유로 가장 열성있고 경건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우거하며 그들이 메시야 왕국에 제일 먼저 참여하여 그 나라의 축복을 나누어 받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Ⅱ. 제자들이 각국에서 온 나그네들의 말로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의 그들의 놀라움. 제자들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여러 지방의 사람들이 모여들기 전에 이미 여러 언어를 말하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사실이 널리 알려졌으므로 많은 무리들 특히 여러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든 것이고 이들이야말로 예루살렘 주민들보다 더 놀라운 일에 깊은 감동을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1. 그들은 말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본국어밖에 모르는 갈릴리 사람들임을 알았다(7절). 그들은 그들에게서 무슨 학식이나 예의를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천한 인간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약하고 어리석은 것을 택하시어 현명하고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 그리스도도 갈릴리인으로 취급받았고 그의 제자들이야말로 무식하고 무지한 갈릴리인들이었던 것이다.2. 그들은 제자들이 조리있게 그들의 언어로 말하고(이들 나그네들이야 말로 이 일에 가장 적절한 판단자들이었다.) 본국 사람들이라도 그들보다 더 이상 정확하고 유창하게 말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은 어찜이뇨"(3절). 즉 "우리가 그들 중 몇 명이 우리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도다"라는 말이다. 바대인은 그들 중 하나가 바대말로 말하는 것을 들었고 메대인은 메대어로 말하는 것을 들었고 그 밖의 다른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 입장이었다(11절).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그들 자신의 언어는 예루살렘에서 통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아마도 멸시까지 당한 것 같다. 그러므로 낯선 땅에 간 나그네에게는 당연한 일로써 그들이 자기 나라 말을 듣는 것이 놀랍고도 기쁜 사실이었다.
(1) 그들이 들은 사도들의 강론은 "놀라운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였다(megalei/a tou/ qeou/ - Magnalia Dei, 하나님의 큰일). 사도들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리고 그로 말미암는 구원과 은총의 복음에 대하여 말한 것 같다. 그리고 이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큰 일이었고 우리의 눈에 기이한 일이었다."
(2) 그들은 이들이 이 위대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 일들에 관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을 들었다. 이들은 "듣는 사람이 사용하는 말을 따라서" 또는 그들이 요구하는 언어로써 거침없이 말하였다. 물론 이들 나그네들은 예루살렘에 여러 번 왕래하였으므로 상당히 유대어를 습득하였고 그러므로 제자들이 유대어로 말한다 해도 그 뜻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방언을 쓴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이 사건은 상당히 기이한 일이었고 그러므로 이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판단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방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기 때문이다(고전 14:22).
[2] 이 사건은 또한 이방인에 대한 명백한 호의를 표시하는 것으로 이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예배가 더 이상 유대인에게 제한되지 않으며 지방적 방벽은 무너졌다는 표시로 모인 사람들의 호감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사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업적에 대한 거룩한 말씀은 "각 나라 말로" 보존되어야 하고 읽혀져야 하며 본국어로 예배가 집행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을 명백히 가르쳐 주고 있다.
3. 그들은 놀랐고 그 일을 기이한 사건으로 여겼다(12절). "그들이 다 놀랐다"함은 맑은 정신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들은 이 일의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당혹감을 느꼈고 또한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 왕국 실현의 징조일까 의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 묻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ti, avn qe,loi tou/to ei=nai - Quid hoc sibi bult? - 즉 이 어쩐 일이냐. 확실히 이 사건은 보통 사건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이 사마들은 하늘에서 온 사자로 여겨졌고 그러므로 가시덤불 곁에 섰던 모세처럼 그들은 "옆에 서서 이 기이한 광경을 바라보았다."
Ⅲ. 유다와 예루살렘 본토 사람들의 조롱. 아들은 아마도 늘 성령을 거스리던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저들이 새 술 또는 달콤한 술에 취하였다"고 비웃었다. 그들은 명절을 맞아 너무 많이 마셨다고 그들은 말했다(13절). 물론 이를 조롱한 사람들은 그들이 만취하였으므로 배운 적도 없는 언어로 말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실상 본토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그들이 말한 말이 참으로 다른 민족의 말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고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어리석은 자들이나 주정뱅이들이 읊조리는 것 같은 의미없는 넋두리로 여겼다. 그들은 전에 그리스도의 기적 속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를 믿지 않고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엉뚱하게 해석하였다(마 9:34). 마찬가지로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 속에 역사하는 성령의 음성을 믿지 못하고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고 돌려버린다. 그들이 세상의 주인이신 주님을 술주정군이라 불렀다면 그이 청직이인 제자들을 주정군이라 칭한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닌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행한 베드로의 설교(1)(사도행전 2:14-36)
우리는 베드로가 그 자리에서 직접 행한 설교인 본문말씀에서 성령의 첫 열매를 보게 된다. 그는 낯선 말로써 이민족(異民族)을 대상으로 설교하지 않고(우리는 그가 놀라면서 이 "어쩐 일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유대인들에게와 조롱을 하는 자들에게 당시 통용되던 언어로 설교하였다. 그는 그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 후(15절) "유대인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설교를 시작한다(14절). 한편 다른 제자들은 계속해서 각 나라 말로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는(그를 주변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하여 말하였으리라는 것은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다. 하루에 "삼천 명"이나 회개하고 교인 수가 급증한 것은 베드로 혼자 설교해서 얻어진 결과가 아니라 120명의 제자 모두의 노력의 결과였다. 그러나 오직 베드로의 설교만 기재되어 있고 이 설교는 그가 철저히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이 되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겁을 집어먹고 그리스도를 부정하였던 자가 이제는 용감하게 그를 고백하고 있다.
Ⅰ. 그의 서언. 이 서언을 통하여 그는 청중들이 귀를 기울여 주기를 간청한다. 베드로와 "열 한 사도"는 앞으로 그들이 무엇을 전할 것인가를 토의하여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그 후 "베드로는 일어서서" 자기가 취하지 않았음을 입증하므로 얘기를 시작하였으며 열한 사도도 그들 차례가 되자 토의한 내용과 같은 취지의 말씀을 전하였다. 큰 권위를 가지고 열 두 사도들은 서서 비웃는 유대인들을 향해 외쳤고 모욕을 일삼으며 반박하는 무리와 마주쳤다. 그러나 아무런 편견이 없는 다른 나라에게 온 개종자들에게는 70명의 제자가 그들의 나라 말로 전하도록 맡겨졌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그리스도의 사역자들 가운데도 능력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그들을 검과 창으로 핍박하려는 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불리움을 받았고 이보다 못한 재능의 소유자들은 뒤로 물러나서 포도원지기나 하인이 되는 것으로 체념하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에 채택된 것이다. 이제 베드로는 자기가 전하는 것에 대해 확신과 열정을 가지고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그는 "유대지방에 사는 사람들" a;ndrej 'Iou dai/oi - 즉 유대인들만 대상으로 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풀이될 수 있다. "너희들 특히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전에는 너희가 알지 못하여 예수를 죽이는 일에 참여하였으나 이제는 너희들이 알아야할 시기가 이르렀으니 이 일을 너희들로 알게 하리라. 또한 너희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멀리하게 한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아니라 너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 이제 나와 스승은 돌아가시고 너희들이 경솔히 여기던 그이 말씀은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되었도다. 그러나 그가 이제 우리로 하여금 너희들에게 말하게 하시니 우리의 말을 들으라"란 뜻이다.
Ⅱ. 그들의 모욕적인 중상에 대한 그의 답변(15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제 방언으로 전하고 있는 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지각있게 전하고 있으며 그들이 무엇을 말할 것인지 잘 알며 그들이 전함에 따라서 강론을 통해 하나님의 큰 일을 알게 하려는 것이라. 때가 제 삼시니 (우리의 시간으로 아침 아홉시) 너희들 생각처럼 취한 것이 아니라"라는 말이다. 안식일이나 뜻깊은 명절에는 제 삼시 이전에 유대인들은 먹거나 마시지 아니하였다. 일반적으로 "취하는 자는 밤에 취하고" 아침에는 맑은 정신이었다. 아침에 술을 드는 자는 참으로 주정뱅이로서 "깨자마자 즉시 술을 가하는" 지들은 것이다(잠 23:35).
Ⅲ. 놀라운 성령의 역사에 대한 설명. 이 말씀은 그들로 깨우쳐 그리스도의 신앙을 갖게 하기 위하여 또한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기 위하여 전해진 것이다. 그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 즉 이 성령의 역사는 성경의 응함이요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하심의 결과임을 말해 주고 있고 또한 이 두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1. 이 성령의 역사는 메시야 왕국에 대한 구약 예언의 성취요 따라서 그 나라가 임박하였다는 증거이며 또한 다른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것이다. 그는 예언자 요엘의 예언을 상세히 다룬다(요엘 2:28). "베드로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말하였지만" 성서를 무시하거나 자신을 성서 위에 위치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오히려 그는 강론하며 많은 구약 성서를 인용하였고, 성서에 호소하고, 성서를 통해, 그가 말하려 하는 것을 입증하고자 하였다. 신학이 결코 성서 위에 있을 수 없으며 또한 성령이 성서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성령은 성서 이해를 돕고 성서를 입증해 준다.(1) 베드로의 인용문(17-21절). "본문은 마지막 날" 즉 복음의 시대에 대하여 말해 준다. 복음의 시대를 "마지막 날"이라 칭하는 것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사람들 가운데 임하였기 때문이요, 또한 이 복음은 하나님의 마지막 은총의 임재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것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다만 이 은총이 끝날때까지 계속되기만을 바라면 되는 것이다. 또한 "마지막 날에"라 함은 구약 시대의 예언이 끝난 한참 후를 말하기도 하며 또는 20절에 말씀된 대로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임한 백성들의 마지막 날이요, 유대 나라의 멸망 전 날을 뜻하기도 한다. 즉 베드로의 의도는 이러한 것이다. "그 날은 예언되고 약속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너희는 기다려야 했다. 너희는 이 날이 임함을 두려워 말며 그 날을 대망하며 영접하라. 그 날을 경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지 말라"는 뜻이다. 사도 베드로는 전문(全文)을 인용하고 있는데 성서에 의존하는 일은 좋은 일이다. 인용문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예언되고 있다.
[1] 전에 없던 성령의 은사가 하늘로부터 풍성하고 광범위하게 임하리라는 것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였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주의 선한 신을 주사 저희를 가르치신다"(느 9:20)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 유대인 뿐 아니라 "내 영으로 모든 육체" 즉 이방인에게까지 부어 주실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11장 17절에 나타난 대로 아직 이 말씀의 뜻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였다. "모든 육체 위에"라는 말씀은 또는 인간의 여러 계층을 뜻한다고 볼 수도 있다. 유대 학자들은 이 말씀을 가르치기를 성령이 이스라엘 자손 중 현자나 부자에게만 임한다는 뜻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이 규정한 제도에 구속받지 않는다는 뜻으로 가르친다.
[2] 그들 가운데 임하는 영(靈)은 예언의 영일 것이라 한다. 이 영으로 인해 그들은 장차 올 일을 예언할 수 있으며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이다." 이 능력은 성(性)의 구별없이 주어질 것이다. "너희 아들"뿐 아니라 "딸들도 예언할 것이다." 또한 연령의 구분없이 주어진다.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이렇게 전해진 신의 계시는 교회에 전달된다. 또한 신분의 차이도 없다. 즉 "남종과 여종이 성령을 받고 예언할 것이다"(18절). 또는 남종과 여종이란 말은 하나님이 자기의 남종. 여종이라고 남녀를 가리킨 일반적인 말도 된다. 구약에서 예언자 시대가 시작되기 전에 "예언자들의 학교"가 있었고 그 전에는 "예언의 영"이 다스리는 직에 종사하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에게 임하였었다. 그러나 이제 메시야의 왕국은 순전히 영적인 것으로 예언자의 학교에서 육성되지 않은 자들을 포함하여 낮고 천한 사람들에게도 부어질 것이다. "너희 딸과 여종들"(17, 18절)이란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1장 14절에 기록된 "여인"들을 기억하게 되는데 이들은 남자들과 같이 특별한 성령의 은사를 받았던 것이다. 복음 전도자인 빌립은 "예언하는 네 명의 딸"이 있었고(22:9) 고린도 교회 여인들에게 예언과 방언의 은사가 넘침을 보게 된 바울은 공적으로 여인이 이러한 은사를 표현하는 것을 금지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고전 14:26, 34)
[3] 그들이 예언한 가장 중요한 것은 심판이 유대 민족에 임한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눅 19:41) 그가 골고다로 가실 때(눅 23:29) 이 심판에 대한 예언을 그리스도 자신도 중요하게 다루셨다(마 24 :). 이 심판은 입증된 바와 같이 복음을 멸시하고 반대하는 자들을 처형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임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은총의 능력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놀라운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그의 진노의 병에서 쏟아지는 진노 아래 넘어지고 쓰러질 것이다. 굴복하지 않는 자들은 꺾이을 것이다.
첫째, 그리스도 사후 40년만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파멸이 여기서는 "주의 영화롭고 큰 날"이라고 불리워진다. 그 이유는 이 때야말로 모세의 경세가 끝나는 최종 시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레위의 제사장직과 형식적인 율법은 영원히 폐기되었다. 이 같은 황폐가 이전에도 이후에도 어느 곳에서고 있을 일이 없었다. 이 날은 "주의 날"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사역자를 박해한 백성에게 그가 복수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 해(年)는 또한 "보상의 해"이다.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모든 성자와 순교자들의 피에 대해서 보상하는 해인 것이다(마 23:35). 그것은 작은 심판의 날이요 "영화로운 날"이었다. 요엘서에서 이 날은 "무서운 날"이라 칭했다. 이 때는 지상의 인간들의 날이기 때문에 "무서운 날"이었으나 여기서 evpifanh/|(70인역) "영화롭고 빛나는 날"이라 함은 이 날이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 날은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가 나타나시는 주현제이었다(마 24:30). 유대인의 멸망은 그들이 증오하고 박해하였던 기독교인의 해방을 뜻하며 그러므로 당시의 예언자들은 고통받는 기독교인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그 날에 대하여 이르기를 "주께서 가까우셨으니, 주의 재림이 가까웠으니, 심판이 문 밖에 이르렀으니"(약 5:8, 9) 등으로 묘사되고 있다.
둘째, 무서운 파멸의 전조가 예고되고 있다.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조세푸스는 그의 저서 유대 전사에서 전쟁 앞서 일어났던 경이로운 기사들과 무서운 천둥과 번개와 지진에 대하여 전해 주고 있다. 타는 뜻한 혜성이 일년간이나 도시 위에서 불타고있어 화용검이 시가지를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며 밝은 빛이 마치 대낮처럼 한밤중에 성전과 제단 위에서 비치었다고 한다. 라이트 푸트(Dr. Lightfoot)박사는 이 귀절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다. 즉 "하나님의 아들의 피"와 본문에 나타난 성령의 불과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에 나타난 구름과 또 그리스도께서 수난당하실 때 "해가 변하고 달이 피같이 됨은" 불신자들에게 그들에게 임할 심판에 대해 준비하도록 주어진 경고였다고 본다. 또한 이 전조들은 종국적인 파멸을 초래케 한 이전의 여러 심판에 적용될 수도 있다. 19절 하반절의 피는 유다와 이웃 국가들 즉 사마리아인과 시리아인과 희랍인과의 전쟁에서 강 같이 흐른 피를 지적하는 것이요, 또한 끊임없는 내란과 난동으로 무수한 피가 흘렀던 것이다. 나가는 자에게도 들어오는 자에게도 평안은 없었다. 또한 여기서 예언된 "불과 연기"는 문자 그대로 그들의 도시와 마을과 회당과 결국은 성전까지 불타게 됨을 뜻하였다. 마찬가지로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된다"는 말은 그들의 국가와 문화와 종교의 붕괴 즉 모든 빛의 괴멸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셋째, 주의 백성은 특별히 보호될 것이 약속되고 있다(21절). "누구든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되며"(고전 1:2 에서 이 말씀은 참 기독교인에 대한 묘사로 사용된다) 영원한 구원의 징표가 될 심판을 피하게 될 것이다. 갈대아인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할 때 "주의 진노의 날"에 보호함을 받은 남은 자가 있었으며 로마인의 공격으로 인한 예루살렘 파괴 때에도 한 명의 기독교인도 죽지 않았다. 순전한 경건으로 자신을 구별한 사람들은 특별한 보호를 받기 위해 구별될 것이다. 구원받게 될 남은 자는 다음과 같은 사람임을 주목하자. 그들은 기도하는 사람이다. 즉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요" 이 말은 자신의 공로와 의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요 온전히 하나님의 자비로움으로 구원받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이 하나님의 자비는 기도에 의해 간구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들의 강한 성은 그들이 부르는 주의 이름"인 것이다.
(2) 이 예언을 당시 일어난 사건과 연결지음(16절).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나" 이 사건은 바로 이 예언의 완벽한 성취라는 것이다. 이 사건이야말로 성령이 모든 육체에 임하리라는 예언의 성취요 더 이상 다른 어떤 메시야를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메시야는 하늘에 지금도 계시며 땅 위의 그의 교회를 다스리시고 중재하시며 따라서 약속에 의해 주어진 변호자이며 위로자이신 은혜의 성령은 같은 약속에 따라, 끝날 때까지 계속 지상의 교회에 계시며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해서, 또 교인 하나 하나를 위해서, 평범한 수단으로, 또는 특별한 섭리로, 성서와 사역자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것이다.
2. 성령의 임재는 그리스도의 선물로써 그의 부활과 승천의 결과요 그 증거이다. 베드로는 처음 설교를 시작할 때 성령의 은사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전하였다. 그런데 이제 본문에서 그는 다른 서두(序頭)를 꺼낸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22절). 너희가 말씀을 들을 수 있음은 그의 자비하심 때문이요, 그러므로 말씀을 듣는 것은 너희들의 의무라"라고 시작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은 칭송할 만한 말씀이었던 것이다.
(1) 그리스도의 생애를 요약하고 있다. 베드로는 주님을 당시 잘 알려진 명칭인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너희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하여 증거한 분"으로 (이 사실만으로도 그에 대한 비난은 있을 수 없는데) 부당하게 인간들에게 비난과 정죄를 당하셨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께서 증거하신 분임에는 틀림 없는 것이라 한다. 하나님은 그에게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심으로 그의 가르침의 참됨을 입증해 주셨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 구별된 사람이었다." 하몬드 박사(Dr. Hammond)는 본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분은 너희들 가운데 뛰어나신 분이니 그에 관한 나의 말을 들으라. 이분은 너희들 가운데 보냄을 받아 너희들의 나라에 영광된 빛이 되셨나니 바로 너희들이 어떻게 그가 권능과 기사와 표적과 초월적인 역사로 유명해지셨는지 증인이라. 이 모든 행적은 하나님이 그를 통해 하신 일로써 이 분이 받은 신의 능력으로 행하였고 이 행적에 늘 하나님은 함께 하셨도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아무도 이러한 일을 행할 수 없느니라." 그러면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행하신 기적에 대하여 무엇을 강조하는지 알아 보자.
[1] 그들도 그리스도의 기사와 이적을 부인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은 바로 너희들이 아는 대로 너희들 가운데서 즉 여러분의 마을과 도시와 모인 장소에서 행하여진 것이라. 너희들이 그의 기적의 목격자가 아니요? 그 일에 반박할 만한 증거가 있으면 제출하시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행적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것으로 제시한다.
[2] 그리스도의 능력있는 행사로 얻어지는 결론은 반박의 여지가 없는 것임을 말해 준다. 논리정연한 이론은 증거물처럼 강한 호소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말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기적을 행했고 하나님이 확실히 그를 증거하셨다면 그리스도가 자신에 대하여 선포하신 대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의 구세주인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의 하나님은 결코 거짓으로 약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2) 그의 죽음과 고통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불과 수주 전에 일어난 것으로 그들이 증인이었다. 또한 이 일은 그 자체로 가장 큰 기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증거한 분이 스스로를 포기하신 것처럼 여겨졌고 또한 사람들 가운데서 증거되셨음에도 그들은 그리스도를 포기하였던 것이다. 23절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고통의 신비를 설명해 준다.
[1] 그의 죽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 그리고 이 일은 놀라운 은사요 지혜로운 행위이다. "그는 그를 죽음에 넘기우셨을 뿐 아니라" 포기하시고 인간에게 주셨다. 이 사실은 로마서 8장 32절에서 설명되고 있다. "그는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 아들을 내어 주셨으니."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이 증거하신 자로 이 사실을 반박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그의 지혜에 의해서 거룩한 목적을 위해 그는 내어 준바 되었기 때문이다. 이 거룩한 목적에 그리스도 자신이 참여하시어 그들로 이 목적으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공의가 충족되어 죄인이 구원받으며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는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그가 고통받으시고 죽으심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되어졌을 뿐 아니라 변경할 수 없는 영원한 뜻으로써의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그리스도의 결심에 이한" 것이었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화해를 이룩하신 것이다. "아버지여 당신의 뜻대로 되어지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소서." 즉 하나님의 목적 그것을 성취케 하려는 것이 고통과 죽음이 뜻하는 내용이란 말이다.
[2] 그의 죽음은 인간들이 저지른 일이었다. 이 행위는 그들의 엄청난 죄와 어리석음의 소치였다. 하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이 입증된 분을 박해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스려 싸우는 것과 같았다. 또한 지상에서 가장 축복된 자를 박해하는 것은 그들이 받을 자비를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만일 그들의 행위가 그들의 도덕적인 타락에서 비롯된 자발적인 행위였다면 즉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이 일을 계획하시지도 않고 이 일을 통해 어떤 이익을 취하려 하신 것도 아니라면 그들의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너희의 손은 약하여 그것으로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것이다." 아마도 이곳에 있는 자들 가운데는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못박으소서." 외친 사람도 있고 살인에 협조하고 선동한 자도 있다는 것을 베드로는 잘 알았다. 이 일은 공회의 투표로 또한 많은 무리의 동조하는 외침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민족적인 행위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Refertur ad universos quod publice fit per majorem partem - 즉 다수에 의하여 공개적으로 행하여진 일의 책임은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는 말은 틀림 없는 사실인 것이다. 베드로는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도 그들이 방문한 나라의 일부로 취급함으로써 더욱 효과적으로 그들에게 믿음과 회개를 불러 일으키려 했음에 틀림 없다. 이것이야말로 죄악에서 구분되고 죄악을 막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3) 부활의 성취를 증거해 준다. 그의 부활은 죽음의 치욕을 말끔히 일소하였다(24절).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키사" 즉 그를 "죽음"에 넘기우신 하나님이 그를 "죽음에서" 자유케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른 어떤 기적과 이적"보다 더 놀라운 방법으로 그를 뛰어난 자로 시인하신 것이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강조하여 주장하고 있다.
[1] 베드로는 그의 부활에 대하여 묘사한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서 매여 있을 수 있었음이라." 본문에 사용된 w`di/naj(죽음의 고통)는 "해산의 고통"을 나타내는 말로도 쓰이며 따라서 어떤 이는 이를 해석하여 그의 영혼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극에 다다른 "고통과 괴로움"을 뜻한다고 보았다. 예수께서 죽으시며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을 때 하나님은 "영혼의 해산하는 고통과 같은 극한적인 고통에서 그를 풀어 주셨던 것이다." 고드윈박사(Dr. Godwin)는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즉 "시편 88편의 저자 헤만이 자기의 영혼이 살육당한 자들 가운데 누워있을 때의 느낀 두려움에 대하여 노래할 때의(시 88:5, 15) 그 두려움에 그리스도도 사로잡히시었다. 그러나 그는 강한 분이었으므로 이 두려움을 극복하셨는데 이것이 그의 부활이었다(실로 한 영혼을 영적인 고뇌의 깊이에서 건져내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그의 영혼이 지옥에 있을 수 없으시며 곧 말씀하기를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신 그의의 몸의 부활을 말해 주고 있다. 그의 능력있는 부활은 곧 영혼과 몸의 부활이었던 것이다." 또 라이트푸트 박사(Dr. Lightfoot)는 다른 의미로 해석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일으키신 것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과 관련된 것으로 그의 부활로 인하여 모든 죽음의 권세는 깨지고 또한 그의 백성에게 가해진 고통은 사라졌다. 그는 죽음을 소멸하시고 죽음의 본질을 바꾸시었다. 참으로 그는 더 이상 죽음에 사로잡혀 있을 수 없으므로 죽음이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이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에 대한 말씀이라는 데는 대부분 의견이 일치된다(Mr. Boxter가 말한 것처럼). 영혼과 육체의 분리로써의 죽음은 적극적 죄악으로 인해 받는 비참한 처형상태는 아니라도 일종의 금주형인 것이다. 하몬드박사(Dr. Hammond)는 70인역의 시편 18편 4절에서 매임(구속)이란 말을 사용하며 이것을 본문에서 사도들이 인용함으로써 해방과 구속의 은유를 잘 조화시키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채무 때문에 갇히시고 죽음의 속박을 받으셨다. 그러나 신의 공의가 충족되어졌으므로 그는 어느 누구의 권리 주장이나 무력에 의해 죽음의 구속을 받으시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그는 자신 안에 자신의 세력 안에 생명을 지니고 있으시며 그가 죽음의 왕을 정복하셨기 때문이다.
[2]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일을 입증한다(32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즉 우리 사도와 다른 우리의 동료는 그가 죽으시기 전에 그를 친하게 알았고 부활하신 후 친히 그와 대화를 나누었으며 "그와 먹고 마셨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예수의 적들이 그를 훔쳐간 것이 그들이라고 고소를 당하였음에도 이 사건에 대한 재치있고 성실하며 용기있는 증인이 되게 하려는 목적으로 "성령이 그들에게 임재하시므로 권능을 받았던 것이다."
[3] 베드로는 이 일이 성서의 성취임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스도가 썩음을 당하기 전에 다시 부활하리라고 성서가 말하였기 때문에 죽음과 무덤의 "권세가 그를 사로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윗은 이 일에 대하여 증거해 주고 있다"(25절). 베드로가 인용한 성서가 다윗에 대한 말씀으로서(시 16:8-11) 부분적인 뜻으로는 다윗을 성자로 간주하였기 때문이지만 이 말씀은 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고 다윗은 그의 모형이라 하겠다.
첫째, 많은 구약 본문이 인용되고 있다(25-28절). 왜냐하면 이 모든 말씀이 그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며 본문은 이 사실을 우리에게 증거해 주고 있다.
① 우리 주 예수는 그의 모든 사업을 그의 아버지에게 계속하여 귀결시킨다.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였음이여" 예수의 최상의 목적은 그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었다. 그는 그의 고통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대단히 유익함을 알았으므로 이를 자기의 기쁨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가 행하시고 고통받으신 모든 삶을 통하여 늘 그 앞에 이 목적이 뚜렷이 설정되어 있었고 늘 이 사실을 바라보셨으며 이러한 전망을 바라고 그는 참고 모든 일을 수행하셨던 것이다(요 13:31, 32; 17:4, 5).
② 아버지께서 늘 함께 계시며 그에게 늘 능력이 따른다는 사실을 그리스도는 확신하셨다. "그가 나의 오른 팔을 붙드시사 강건하게 하시며 인도하시며 지지하시므로 내가 어떤 곤경에 부딪친다 할지라도 요동치 않으며 내게 주어진일을 끝까지 지키리라"는 것이 예수의 확신이었다. 이 사실은 전부터 약속된 구원의 계약에 속한 것이었다(시 89:21). "내 손이 저와 함께하여 견고히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있게 하리로다." 이 약속이 있으므로 그는 그의 사업이 실패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오른 손을 지키시면 우리는 요동치 않을 것이다.
③ 그가 겪으신 슬픔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 예수는 기쁨으로 그의 사업을 수행하셨다. "내가 요동치 않으므로 만족함은 주님의 즐거움이 나의 수중에서 더욱 증대됨이라.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로 즐거워하였으며 슬픔에 대한 생각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리라"는 것이 예수의 태도였다. 우리 주 예수님에겐 "그의 사업의 목적"을 바라보시며 이 사업이 영화롭게 성취되리라는 확신은 끊임없는 기쁨이 되었다. 그는 너무나도 그의 사업을 기쁘게 여기셨으므로 계획에 비해 결과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생각하므로 마음이 즐거웠다. "그는 성령으로 기뻐하셨다"(눅 10:21). 본문 말씀에 의하면 "내 입술로 즐거워하였다." 시편 본문을 보면 "내 영광도 즐거워한다." 이 말씀들을 종합하면 이러한 의미이다. 우리의 입술은 우리의 영광이요 말하는 일은 우리에게 명예가 되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찬양함에 이용될 때 이에서 더 큰 영광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입술이 즐거워하였으니" 그가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고통을 받으러 나아가실 때 "찬미하셨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④ 그는 고통과 죽음의 결과가 행복으로 이루어지리라는 낙관적인 견해를 가지셨다. 바로 이러한 생각 때문에 그는 고통을 용기와 기쁨으로 극복하셨던 것이다. 그는 몸을 벗게 되셨으나 "육체는 편안히 쉴 것"을 아셨으며 몸은 무덤에 장사될지라도 거기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다음과 같은 소망과 확신을 주심을 바랐다.
가. 영혼이 육체에서 계속 분리되어 있지 않으리라는 확신이다. 그 이유는 인간 영혼이 육신에 거할 수 없게 된 이유 외에도 사실상 죽음을 정복하신 분에게 계속해서 죽음이 승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실지라"(하데스는 "보이지 않는"곳을 의미한다). "그러나 잠시 고통을 받고 거기서 옮겨지시겠지만 주께서 명하실 때까지 거기 머물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다른 영혼에게 하듯이 그를 음부에 가두실 수는 없는 것임을" 예수는 아셨다.
나. 몸이 무덤에 거하게 되나 잠시 동안일 것이다.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즉 육신이 계속 죽은 상태로 있어 썩어 냄새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은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생명이 돌아왔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성별된 거룩한 자"였다. 그가 죽으신 것은 "그의 피로 세상을 정하게 하"셔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썩음을 당하지 않으실 것인데 그 이유는 그의 죽음이 하나님에게는 "달콤한 향기"였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은 희생에 관한 율법에서 그 유형(類型)이 이루어졌다. "희생에 드린 고기 중 먹을 수 있는 부분은 제3일까지만 보존할지니" 그것이 부패하여 썩을까 함이었다(레 17:15-18).
다. 그의 죽음과 고통은 그 뿐 아니라 모든 그를 믿는 사람에게 영원한 불멸의 시작이 된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나로 하여금 세상이 이 길을 알게하시려 생명의 길을 여셨음이라"는 뜻의 말씀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스스로 생명을 버리고 다시 얻게 할 권세를 주셨으며" 그에게 생명의 길을 보이셨다. "그에게 사망의 문이 나타났고 사망의 그늘진 문을 보았을 뿐 아니라"(욥 38:17) 이 사망의 문을 통과하심은 인간의 구원을 이루려 하심이었다.
라. 그의 모든 슬픔과 고통은 완전하고 영원한 복락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주께서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그를 기다리는 보상은, 이제 완전한 기쁨이었고 하나님 앞에서 그의 사업을 이루고 그리스도와 그로 인하여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웃음으로 아버지는 그를 맞으셨고 "창조하실 때처럼"그가 승천하실 때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셨다. 이것은 또한 우리 "주님의 기쁨"이요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이 맛보게 될 것이요, 그 안에서 그들 모두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둘째, 주로 부활과 관련시켜서 본문을 주석하고 있다. 그는 겸손하게 그들을 "형제"들이라고 칭하고 있다(29절). 즉 이 말은 이러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너희는 사람이므로 이성을 지녔을 서이라. 너희들은 다 같은 형제이므로 너희의 친족이며 그렇기에 진심으로 너희에게 관심이 있으시며 너희가 잘되기를 바라시던 분의 말씀을 선대해야 될 것이다. 자 나로 하여금 자유롭게 우리 조상 다윗에 관하여 말하도록 허용해 달라. 또한 다윗이 스스로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하고 말한 것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라고 말한다 해서 내게 무슨 흑심이 있는 것이 아님을 알라." 여기서 다윗을 조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왕가의 조상이었기 때문이요 당대에 걸출한 인물이었으므로 그의 이름과 추억은 대단히 귀중하게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의 시를 읽을 때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① 베드로는 다윗이 "자신에 대하여"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있고 그 안에 그의 뼈가 누워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무도 그가 부활하였으리라 여긴 사람은 없으므로 "썩음을 당치 않으리라" 하심은 자신에 대한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윗이 부패했으리라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13장 35-37절에서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자였지만" 자신을 가리켜 말한대로 죽음과 장례에 있어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왕상 2:2).
② 그러므로 확실히 그는 한 "예언자로서" 앞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하여 전에 예언자들이 증거한 메시야의 고통과 고통 뒤에 올 "영광"을 말하였던 것이다. 다윗이 시편에서 메시야에 대해 말하였다는 것을 베드로 본문에서 명백히 보여 주고 있다.
가. 다윗은 메시야가 그의 후손에서 나올 것을 알았다(30절).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나님이 그에게 한 자손을 약속하시사 "그의 나라의 보좌가 영원히 견고케 되리라"고 말씀하셨다(삼하 7:12). 또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다"(시 132:11) 하였고 주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겠다" 약속하셨다(눅 1:32).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다윗의 후손 중에서 메시야가 탄생할 것을 알았다. 즉 "육체에 의하면" 그의 인성을 따라 다윗의 후손이 되지만 "영에 의하면" 그의 신성을 따라 그는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 "그의 주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의 조상에게 약속되었던 메시야가 그의 후손이 되며 계승자가 되고 그의 왕좌의 후계자가 되리라 맹세하셨으며 이를 다윗이 시편을 기록할 때 그 가운데 나타내셨던 것이다.
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후손이 되심"(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칠 때 그의 몸 가운데 레위가 씨앗으로써 있었다고 전해지는 것처럼). 다윗이 시편을 기록할 때 그의 몸 가운데 있었다. 한 분은 다윗 자신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그의 몸 안에 있던 거의 후손을 지칭하는 것이었고 이 후손으로 말미암아 그의 가족과 나라가 안전하고 영원하리라는 것을 지시하는 내용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의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있지 않겠고 그의 육체가 썩음을 당치 않으리라"라고 한 말씀은 의심없이 그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31절).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성경에 기록된대로 다시 사셨으니 우리가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는 말씀을 기억하고서 지나가자.
다. 본문은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해서도 잠간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처럼 다윗이 죽었다가 부활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몸으로 "하늘에 승천할" 수도 없다고 한다(34절). 더 나아가 다윗이 부활에 대하여 말한 것은 바른 그리스도의 부활이란 것을 입증하기 위해 베드로는 부활 후 그리스도의 영광을 말해 주는 다른 시편을 인용하고 있다. 이 시편에서 다윗은 분명 다른 사람 즉 그의 주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시 110:1). "주께서 나의 주께 말씀하시기를 그가 죽음에서 그를 일으키실 때 너는 내 우편 곧 가장 높은 위엄에 앉아 거기서 다스리라. 애정과 은총에 의하여 약속된 나라의 통치를 너에게 맡기리니 내가 네 원수로 또는 친구로 너의 발등상되게 하기까지 거기서 왕으로 앉으리라"(35절). 확실히 그리스도는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그러므로 다윗이 시편 16편에서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이지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다윗이 무덤에서 일어났다는 말도 없고 그가 하늘로 승천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4)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적용시킨다.
[1] 본문은 특별한 은사가 나타난 현재의 놀라운 성령의 임재의 뜻을 설명해 준다. 그들 중의 몇 명은 "이 어쩐 일이냐?"(12절)라고 묻고 있다. 베드로는 이런 그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하나님의 우편으로 높임을 받으시고 능력과 권위로 거기에 앉으신 이 예수는 다시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임하시었소. 그가 승천하여 뵈옵는 아버지께 성령의 약속을 받은 그는 자기가 받은 것을 주시고(시 68:18) 이제 이 사실을 보고 듣는 당신들에게 나누어 주실 것이요, 왜냐하면 예수가 영광받으셨을 때 성령이 주어진 것이지 그 전에 성령이 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요(요 7:39). 당신들은 우리가 전혀 배우지도 않은 언어로 말하는 것을 보고 들었소." 군중들은 그들의 음성과 언어가 변한 것처럼 그들의 얼굴 모습도 변하였음을 보았으리라. 이제 이것은 성령으로 주어진 것으로 성령의 임재는 곧 그리스도가 영광받으신 증거였다. 그는 이 성령의 선물을 아버지로부터 받았고 또한 교회에 나누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중재자 또는 하나님과 교회 사이에 중간 역할을 하는 분이라고 명백히 증거할 수 있는 것이다.
첫째, "성령의 은사"는 신성한 약속의 수행이었다. 본문에서는 "약속된 성령"이라 칭하고 있다. 신성한 능력자는 우리에게 많은, 대단히 귀중한 "약속"을 주셨다. 그러나 성령을 주시마한 약속은 메시야를 보내 주신다는 약속처럼 가장 뛰어난 약속인 것이다. 그리고 이 약속은 모든 약속을 포함하는 약속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구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하심은(눅 11:13) 그가 온갖 좋은 것들을 그들에게 주신다는 뜻이다(마 7:11). 그리스도께서는 "약속된 성령" 즉 약속하신 성령의 은사를 받으셨고 또한 이 성령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다. "모든 사람에게 이 약속은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이요 믿음에의 응답인 것이다."
둘째, 성령의 선물은 앞으로 주시게 될 온갖 신성한 아름다운 축복을 약속하는 보증이 된다.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은 더 위대한 일의 전조에 불과한 것이었다.
[2] 이 말씀을 통하여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메시야시요 세상의 구주임을 모든 사람들이 믿어야 한다는 것을 입증하려 한다. 베드로는 그의 설교를 이렇게 끝낸다. 즉 그는 모든 문제의 결론으로써 "모든 사람으로 진리를 깨닫도록 선동한다"(quod erat demonstrandum)(36절). 그러므로 이 진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전히 확증되었음을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아야 하며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음을" 선포할 책임을 우리는 위임받은 것이다. 사도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실 때까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경고하심을 받았었다(마 16:20; 17:9). 그러나 이제 이 사실은 모든 이스라엘에게 지붕 꼭대기에서 선포되어야만 하며 들을 귀 있는 자에게 듣도록 저희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불확실한 일이 아니라 확고부동한 진리이다. 그들은 이 사실을 확신있게 알아야 하며 그것이 신실한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다.
첫째, "그들이 못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영광되게 하시려 계획하신 분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신성한 사명에 대하여 많은 증거를 제시한 분을 사기군으로 몰아 죽게 한 것은 그들의 어리석음을 들어내주는 사실인 것이다. 그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이 사실은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확대케 하였으며 그들이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오명을 가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영화롭게 하셨고 그들이 그에게 가한 무례는 오히려 그의 영광을 빛나게 하였다.
둘째,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를 영화롭게 하시되 그를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시기까지 하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말씀은 그가 "만유의 주"시며 찬탈자가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임"을 의미한다. 그는 다른 많은 주를 모신 "이방인에게도 같은 주님이시며 유대인에게는" 그는 모든 직능을 포함한 "메시야이시다." 갈대아역(譯) 성서에서는 그를 왕 "메시야"라 불렀고 또 천사가 다니엘에게 그를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라 부른다(단 9:25). 우리가 믿는 예수,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바로 그 분은" 우리가 충성해야 할 분이며 주와 그리스도로서 그에게 보호를 기대할 수 있는 분이란 사실이 복음서의 위대한 진리인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행한 베드로의 설교(2)(사도행전 2:37-41)
우리는 성령이 임재하므로 복음 전파자들에게 끼쳐진 놀라운 효과를 보아왔다. 베드로는 그의 모든 생애 중에 지금 행한 것처럼 온전하고 명쾌하고 능력있게 설교한 적은 없었다. 이제 우리는 성령이 임재하므로 복음을 듣는 사람들에게 파급된 다른 복된 결실을 고찰해 보도록 하자. 이 신성한 메시지의 첫 전파 결과 그 말씀 속에는 신성한 능력이 같이 하고 있고 하나님을 통하여 기적이 이루어졌음이 나타났다. 즉시 수천 명이 믿음을 갖게 되었으니 그것은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셨기 때문이었다"(시 110:2). 우리는 처음전도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오게 됨을 본문에서 보게 된다. 본문 말은 "이기고 또 이기는" 구원의 병거를 탄 높임을 받으신 구세주를 와서 보라고 권한다(계 6:2).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처음 설교를 시작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되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역사하는 은총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주님의 성령"을 통해 이루어짐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성령이 역사하시는 방법을 고찰해 보자.
Ⅰ. 그들은 놀라며 증거의 타당성을 믿고 진지하게 묻는다(37절). 그들은 참을성있게 베드로가 말한 것을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파하실 때처럼 중간에서 방해하지 않고 끝까지 "들은 후(그들이 말씀에 귀를 귀울이게 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유익한 일이었다) 마음이 찔려" 당황하기도 하고 호기심도 생기어 전도자들에게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묻는다. 마음이 완고한 자들에게 이같이 갑자기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그들은 유대인들로서 그들이 믿는 종교가 그들을 충분히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성장하였고 더구나 이 예수가 무력하게도 치욕 속에서 처형당하는 것을 최근에 보았고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그는 사기군이라고 얘기를 들은 바도 있었다. 베드로는 그의 죽음에 한 몫 끼여 그들에게 도전하였고 이것은 마치 그들을 격분케하는 것과 같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명백히 성서에 근거한 이 설교를 들었을 때 그들의 마음이 움직였던 것이다.
1. 이 설교는 그들로 하여금 고통스럽게 하였다. "저희는 마음에 찔림을 느꼈다." 우리는 순교자 스데반을 향해 분노로 그들의 "마음이 찔려"(cut to the heart) 이를 가는 자들에 대하여 알고 있다(7:54). 그러나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한 자신들에 대한 분노로 "마음의 찔림"을 받았다(prick to the heart). 그들을 반박한 베드로는 이제 그들의 양심을 일깨웠고 골수까지 그들을 찔렀다. 그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은 후 그 말씀은 "뼈까지 파고 드는 칼날이 있어" 그들이 그리스도를 찔렀던 것처럼 그들을 관통하였다. 죄인의 눈이 열릴 때 죄로 말미암아 그의 "마음이 찔림을 받아" 내적인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것이야말로 "마음을 찢는 것이요"(요엘 2:13),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인 것이다(시 51:17). 진정으로 죄를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이를 부끄러워하며 그 결과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슴을 찔리우는 일은 치명적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하기를 이 고통으로 인한 마음의 동요로, 나는 죽었다고 하였다(롬 7:9). 즉 "자신에 대한 자랑과 신뢰가 나를 실패케 하였도다"란 말이다.2. 이 설교는 그들에게 의문을 던져 주었다. 마음이 찔림을 받자 마음에 가득찬 것이 말로 표현된 것이리라.
(1) 그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털어논 사람은 누구였는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그리고 서로 서로 r들의 입장을 고백하였다. 사도들로 말미암아 그들은 깨달았기에 또한 그들은 그들과 상의함으로 위로받기를 바랐다. 그들은 사도들의 비난에 찬 말에 대하여 그들을 정당화시기 위하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호소하지 않고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사도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른다(29절). 그것은 명예로운 호칭이라기 보다는 우정과 사랑의 표현이었다. "당신들도 같은 사람 아니요, 인도적 정신으로 대해 주시오. 당신들도 같은 형제들이니 우리들 형제애를 가지고 대해 주시오." 목회자는 영적인 의사임을 기억하자. 그들은 양심에 상처를 입은 자들에 관하여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평신도들에게 같은 인간으로서 형제로서 그들의 영혼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처럼 다루어 주는 교역자들과 자유롭게 사귐을 가진다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2) 그들이 한 말.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탄식이었다.
[1] 그들은 난처한 입장에 직면하여 무엇을 해야할지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말하였다. 그들은 깜짝 놀라서 "우리가 못 박은 바로 그 예수가 주 그리스도시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 우리 모두가 범죄하였구나!"라고 말하였다. 우리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먼저 깨닫지 않고 우리는 행복해질 수 없음을 기억하자. 우리가 자신이 파멸될 위기에 처해 있음을 발견할 때 우리의 존재가 영원을 얻을 희망이 생겨나는 것이다.
[2] 그들은 막다른 골목에 직면한 사람처럼 말하였다. 그들은 즉시 무엇을 지시받든지 그것을 행하리라고 결심하였다. 그들에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고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기 위해 그들의 확신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연기할 수도 없었다. 다만 지금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비참함을 면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될 것인지 알고 싶어하였다. 죄를 깨달은 사람은 평화와 사죄의 방법으로 기꺼이 알려고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9:6; 16:30).
Ⅱ.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그들의 행할 것과 그렇게 함으로 그들이 무엇을 얻게 되는가를 요약 지시해 준다(38,39절). 깨달은 죄인에 대하여 우리는 용기를 넣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상처를 싸매 주어야 하는 것이다(겔 34:16). 그들에게 그들의 정황이 비극적일지라도 절망적인 것은 아니며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만 한다.
1. 베드로는 그들이 행해야 할 과정을 알려 준다.(1) "회개하라"고 지시하였다. 회개는 파선 후에 만난 널빤지와 같은 것이다. "너희들이 그리스도를 죽임으로 저지른 이 무서운 죄를 깨달으시요(한 채권자가 빛갚을 것을 요구하므로 다른 모든 빚까지 밝혀진 가련한 파산자처럼). 이 큰 죄를 회개함으로써 다른 모든 죄까지 깨닫고 죄로 인한 통회의 눈물을 흘리시오." 이것이야말로 세례 요한이나 그리스도가 설교한 것과 같은 권고였다. 성령이 임재한 지금도 "회개하라 회개하라. 너희 마음과 길을 돌이키고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라"는 말씀는 계속 외쳐진다.
(2)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권고한다. 즉 다음과 같은 말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굳게 믿고 그의 은총과 섭리에 순종하며 또한 공개적으로 믿음을 고백한 후 세례를 받음으로 신앙 안에 거할 것을 약속하고 불신을 버리고 그리스도와 그의 거룩한 종교로 돌아오라"는 말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받아야만 한다. 그들은 예언자들에 의하여 전해진 아버지와 성령을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예수의 이름을 믿어야 하며 그가 그리스도이심과 선조들에게 약속된 메시야이심을 믿어야 한다. 이러한 말씀이다. "예수를 왕으로 섬기시오 세례를 받아서 그에게 충성을 서약하시오, 그를 예언자로 받아들여서 그의 말을 들으시오. 그를 제사장으로 받들어 속죄함을 받으시오." 이같은 내용이 이 말씀을 통해 강조되고 있다. 그들은 그의 의를 힘입어 사죄하심을 받기 위하여 "그의 이름으로" 세례받아야 했던 것이다.
(3) 이 사실은 각 사람 하나 하나에게 강조되었다. "너희 각자가," 즉 다음과 같은 말씀이다. - 여러분 가운데 더 큰 죄를 지은 사람일지라도 회개하고 믿기만 하면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것이요, 또한 여러분 가운데 그들이 훌륭한 성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회개하고 믿고 세례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요, 여러분의 수가 아무리 많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은총은 충만하며 이 은사는 각 사람에게 합당한 것이요, 모세 시대의 옛 이스라엘은 당시 회개는 민족적인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이스라엘 족속 전체가 "구름과 바다를 통과할 때"(고전 10:1, 2) 모세에게 세례를 받았던 것이요, 그러나 이제는 "각자 하나 하나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이 큰 일의 참여해야 하는 것이요"(골 1:28)라는 말씀으로 볼 수 있다.
2. 베드로는 그들에게 결단할 용기를 준다.
(1) "죄 사유함"을 얻기 위하여 해야 될 것이라 한다. 다음과 같은 말이다. "죄를 회개하고 파멸을 피하시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세례를 받으면 여러분들이 모세의 율법이 이룰 수 없는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될 것이요, 이것을 목적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면 이를 여러분은 얻게 될 것이요. 주의 성만찬에서 포도주가 죄 사유를 위한 그리스도의 보혈의 새로운 계약인 것처럼, 세례는 죄 사유를 위한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계약인 것이요. 성결케됨을 받으시오. 그러면 정하게 되리이다"라는 말씀이다.
(2) 그들도 사도들처럼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해 준다. 왜냐하면 이 축복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의 말씀이다. "여러분 중 얼마는 우리와 같이 특수한 은사를 받을 것이며 만약 여러분 모두가 믿음과 회개에 성실하면 내적인 은사와 위로를 체험하게 될 것이며 약속된 성령으로 인침을 받을 것이요"라고 말한다. 죄 사유하심을 받은 자는 누구나 "성령의 은사를 받는다"는 것을 기억하자. 의롭다 여김을 받은 자는 모두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3) 그들과 같이 그들의 자손도 옛 계약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계약을 표면적으로만 보장해 주는 명칭을 지니려고 노력할 것이라 난다. 그러나 그들에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에게 와서 측량할 수 없는 축복을 받으시오. 죄사유와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는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요"(39절)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의 말씀,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내리며"(사 44:3) 또한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사 59:21)는 말씀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그는 "내가 너와 네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창 17:7). 그러므로 모든 이스라엘 자손은 난지 팔일만에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베풀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 한 사람에게만 약속이 수여된다면 자손들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묻는 것이 당연하다. "자녀들은 버림을 받는 것인가, 아니면 그의 부모에 따라서 구원받는가? 베드로는 약속에 의해서 결단코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각 사람 하나 하나에게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위대한 약속은 지금부터 영원히 여러분과 자손에게 주는 약속이요"라고 설명한다.
(4) 그 약속이 지금은 전과 같이 그들 자손들에게만 국한되지만 앞으로는 그 축복은 세계 만민을 위해서 계획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브라함의 축복은 이방인에게도 주어지므로 모든 사람의 자손에게도 미친다 말할 수 있다(갈 3:14). 이 약속은 오랫 동안 이스라엘에게만 속한 것이었다(롬 9:4). 그러나 이제 그것은 "먼 데 사람" 곧 멀리 있는 이방 나라들에게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한 가지 제약이 있다면은 그리스도의 사귐의 공동체 안에서 "주 우리 하나님을 부르는 자에게"만 이 축복은 해당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름은 먼 데 사람에게까지 다만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도 주어짐을 기억하자.
Ⅲ. 위와 같이 지시한 후 필요한 주의를 줌(40절). "여러 말로" 복음의 진리를 확증한다. 그리고 복음이 주는 의무를 훈계한다. 베드로의 말씀이 역사하기 시작하자 다만 그를 따랐다. 그는 많은 내용을 간결하게 말했고(38,39절)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대로 그 말에는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에 유익한 이러한 말씀들을 들을 때 우리는 더욱 말씀을 간절하게 사모하게 된다. 그가 말한 것들 가운데(특히 강조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 패역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하라. 이 세대에서 자유롭게 되어라"는 말씀인 것 같다. 불실 유대인들이야말로 편벽되고 거만한 패역한 세대였다.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을 거스려 행하고(살전 2:15) 죄와 결합하여 파멸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과 같이 교훈하고 있다.
1. 자신을 파멸에서 구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힘쓰고 이러한 일에 관계하지 말며(기독교인들이 하듯이) "이런 모든 것들을 피하라"고 권고한다. 이러한 말씀이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시오. 그리하면 여러분도 같이 죄를 행하였던 자들이 멸망할 때 멸망을 면하게 될 것이요"라고 권한다. "오! 나의 영혼을 죄인들과 같이 하지 말게 하시며"라는 뜻의 말씀이다.2. 그들과 함께 계속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그들처럼 불신앙 가운데 머물러 있지 말라고 한다. "자신을 구하라"는 말씀은 "이 패역한 세대에서" 자기를 구별하라는 말이며 완고한 이 민족처럼 마음을 강퍅하게 말라는 말씀이다. 그들과 같이 재앙을 받지 않기 위해 죄에도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 악인으로부터 우리를 구별하는 길은 그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밖에 없다. 이 결과 그들이 우리를 적개심을 가지고 대할지 모르지만 그 길만이 우리를 그들로부터 구하는 방법이다. 그들이 우리를 괴롭힌다고 하여도 탁류에 휩쓸려 내려가며 위험을 당하는 것보다 탁류를 역류하여 헤엄치는 고통이 나은 것이다. 죄를 회개하고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린 사람은 악인들과의 모든 사회적인 친분관계를 끊어버리므로 성실성을 입증해야 한다. "악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날지어다"라는 말씀이야말로 우리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결단케하는 두려운 말씀의 하나이다(시 119:115). 우리는 그들로부터 자신을 구해야 한다. 이것은 거룩한 두려움을 품고 이것들을 피하는 것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파멸시키려고 계획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며 전염병에 감염된 집을 멀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Ⅳ. 성공적인 결과(41절). 성령은 말씀으로 임하여 놀라운 일을 이룩하였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일어난 경이로운 일의 목격자였으나 자신의 힘으로 회개할 수 없었던 이들의 가르침을 받고 변하였다. 이것이야말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다.
1. 그들은 말씀을 받아들였다. 다만 우리가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면 말씀은 우리에게 유익하다. 그들은 그 증거를 확신하였고 제공된 증거를 받아들였다.2. 그들은 기쁘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해롯은 말로 기쁘게 듣기만 하였으나 이 사람들은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비록 그 말씀이 그들로 겸손한 생으로 변화를 준 것뿐이었고 동족들의 적대감만 불러 일으켰을 뿐이지만 그들은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3. 그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들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였으며 그리스도께서 설립하신 거룩한 예식에 참여하므로 제자들 가운데 들게 되었다(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당장 나타난 진리였기 때문에). 베드로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말했지만 그들이 세례받음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세례의 격식인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실상 세례를 베푼 것이라고 생각할 만한 근거가 있는 것이다. 교인으로서의 계약을 받은 사람은 교인에게 주어지는 세례로 받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4. 그러므로 "그 날에" 제자의 수가 "삼 천이나" 더하였다. 성령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방언으로 전파하였고 그들의 손으로는 세례를 주었다. 왜냐하면 곡식을 거두어 드릴 분주한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말씀으로 삼천 명이나 회개시킨 일은 떠 몇 조각으로 사 오천 명을 먹인 사건보다 더 "놀라운 것"이었다. 요셉 사후 이스라엘 자손이 증대하기 시작하였었던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삼천 명"이라고 그랬는데(이 말씀은 창 4:21 에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는 말씀과 창 46:27 에 70명과 같이 여자와 어린이가 포함된 수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세례받은 사람들이 남자들만이라는 뜻이 아니라 어린이들과 종까지 포함해서 세례받은 인원이 "삼천이나 되었더라"는 뜻이다. 이렇게 제자들의 수가 "더하여졌다." 그리스도에서 연합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제자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때 그의 백성도 우리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