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2:1
큰 이적이 보이니 - "이적"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세마이온(* )이니 "표적"을 의미하는 바, 어떤 사리(事理)를 가리키는 상징이란 말과 유사(類似)하다. 여자 - 이것은 주님의 교화를 상징하는데, 구약 교회에 근거하고 나오는 신약 교회를 가리킨다고 한다. 이렇게 신약 교회가 구약 교회에 근거하고 나오는 점에 대하여는 다음 몇 가지 사실들이 확증한다. (1) "열 두 별의 면류관" - 은 이스라엘 민족을 생각케 함(창 37:9). (2)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2절)란 말은, 유대인 역사에 대한 것으로 보여짐. 유대인의 역사(歷史)는, 메시야의 오심을 목표하고 해산의 고통을 하는 역사라고 성경은 말한다(미 5:2 사66:7,8). (3) 천사 미가엘이 천계(天界)에서 사단으로 더불어 싸워 이긴 일은, 역시 유대민족(특히 구약 교회)과 어느 정도 관련된 것임. 미가엘은 유대 민족을 보호하는 천사라고 다니엘서에 말하였다(단 10:10:13, 21). 이렇게 유대 민족중에 있었던 구약 교회를 전신(前身)으로 하고 나오는 신약 교회가, 우리 본문이 말하는 여자로 상징되었다. "여자"를 교회의 상징으로 생각한귀절은, 계 19:7, 21:9 호 2:1 요 3:29 엡 5:31, 32등이다.
후로스트(Henry W.Frost)는, 여기 "여자"란 말이 마리아를 가리키고, 마리아는 유대인이면서 기독 신자였으니 만큼, 세상 끝날에 있을 유대인 기독 교회를 상징한다고 하였다 (Matthew Twenty Four and The Revelation, pp.219-220). 그러나 이 학설은 자연스럽지 않다.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 "해를 입"음은 그리스도의 의를 입은 빛나는 영광이고(계 7:9), "달"을 "발 아래"둠은 승리의 표상이다(창 37:9,10:계 2:10, 4:4, 6:2). "열 두 별의 면류관". 여기 "열 둘"이란 숫자는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케한다. 구약 교회는 열 두 지파를 기본으로 하였고, 신약 교회는 열 두 사도를 기본으로 하였다. 그리고 "별"은 진리를 전파하는 신자들을 상징한다(창 15:5 단 12:3 눅 16:8: 살전 5:5). 시 84:12:사60:20: 말4:2 참조. 그러므로 "열 두별의 면류관"은 교회의 승리를 표상한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이 여인의 이와 같은 단장이, 교회의 천적 유래(天的由來)와 주님의 은혜와 교제에 참여할 것과 및 온 세계 위의 주권 소유를 상징한다"라고 하였다(En Zij wordt geknschetst naar hare hemelsche dfkomst, en voorgesteld, zooals zIj mag deelen in de volle gemeenschap, en gunst, des Heeren,en bezitten deheerschappij over de geheele wereld. -Openbaring, p. 250).
계 12:2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 여기 "아이"는 확실히 예수 그리스도를가리켰다고 한다. 그 이유는, "해산한다"는 동사 테카인(* )이 과거사(過去詞)인 까닭이다. 헬라어에서 과거사(Aorist)는 단번 행위(鄲番行爲)를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 이 문법은, 확실히 단회(單回)의 사건인 예수님의 탄생을 의미한다(Greijdanus).
계 12:3
이적 - 1절에 있는 같은 말 해석 참조. 붉은용 - 여기 "용"은 사단을 상징하는데(계 12:9 창 3:1), 그것의 "붉은" 빛은 피의 빛이니 교회를 해하려는 살기(殺氣)의 표상이다(계 6:4).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 "어린 양"(예수)은 일곱 뿔 일곱 눈(5:6)인데, "붉은 용"(사단)은 일곱 머리와 열 뿔이다. "어린 양"의 "일곱 뿔 일곱 눈"은, 완전 무결(完全無缺)하신 하나님의 권세와 및 성령님을 가리키고(5:6), "붉은 용"의 "일곱 머리와 열 뿔"은, 이 세상의 일곱 적그리스도 나라와 열 왕을 상징한다(계 17:9-12). 사단은, 땅 위의 왕권들을 통하여 교회를 해하려고하나, 그리스도께서는 천계의 권세와 영능(靈綾)으로써 사단의 역사(役事)를 멸하신다. 살후 2:8 참조. 7수는 오직 하나님에게 속한 것인데, 사단은 이것을 도용(盜用)하여 제가 하나님인 듯한 오만(傲慢)한 태도를 취한다. 10수는 이 세상의 속수(屬藪)니 하나님께 대한 이 세상 나라들의 극도의 반역을 상징한다고도 할수있다. 13:1, 17:9-12참조.
일곱면류관 - 사단의 대리자인 짐승은 열 면류관을 썼는데,이것은 일곱을 썼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거짓 모방이며, 자칭 왕(自稱王)이라 하고 자칭 하나님이라 하는 저놈의 참람(僭濫)되 주장을 상징한다.
계 12:4,5
"꼬리" - 는 거짓말을 상징하고(사 9:15), "별" - 은 여기서는 천사들을 상징한다(욥 38:7). 사단은 본래 천사였으나, 하나님께 범죄하고 마귀가 되었다(벧후 2:4 유 6). 그리고 저놈이 많은 다른 천사들을 유혹(誘惑)하여 타락케 하였다. "땅에 던지" - 는 것은 타락시킨다는 의미이다.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 사단이 "여자"를 해하기보다 먼저 "아이"(예수 그리스도)를 해하려 한 것은, 복음의 역사로 보아서 분명하다. 예수님의 일생은, 그 유아 시에 망명 생활로 시작하여 모든 박해를 받으시다가, 나중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의미한다. 싸이스(Seiss)는, 이것이 성도들이 부활하여 공중에 올라감(살전 4:16-17)을 가리킨다고 하나 자연스럽지 않고, 엘리카트(Ellicott)는, 이것이,콘스탄틴 대제의 로마 황제됨을 비유한다고 하나 역시 억해이다.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를멸하지 못하고 말았으니,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 승천하셨다.
계 12:6
그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 이것은, 신약 교회의 세상 생활을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 비하여 말한 것이다. (1)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떠나 광야로 도망하여 거기서 믿음의 연단을 받은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필요한 것이었다. 그와 같이, 교회도 이 세상에서 믿음의 연단을 받는다. (2)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다. 곧,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였다는 것은, 구약 교회 운동의 연속으로 나온 신약 교회 운동이,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받아 이방(광야는 異邦을 상징함)에 가서 장성하게 됨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후로스트(Henry W. Frost)에 의하면, "여자"의 도망한 사건은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진다고 한다. 곧, 신약 시대의 말기(末期)에 유대인 기독 교회가 적그리스도의 핍박을 받아 팔레스틴에서 이방으로 흩어진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Matthew Twenty Four and The Revelation, p.220). 그러나 이 해석은 자연스럽지 않다.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 이 세상은 광야와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교회를 기르시기 위하여 지혜롭게 예비하신 곳이 그곳이다.
일천 이백 육십일 - 이것은, 12:14의 "한때와 두 때와 반때"란 기간에 해당되는 것이다. 칼빈주의 주석가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이것을 가리켜 신약 시대라고 한다(Openbaring, p. 255).
계 12:7-9
하늘에 전쟁 -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심에 따라 마귀는 천계에서아주 떨어지게 된 사실을 가리킨다(눅 10:18). 저놈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성도를 참소하였던 것이다(욥 1:1-11, 2:4, 5).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부활 승천하심으로, 저놈은 천계(天界)에서 아주 떨어져 쫓겨났다(눅 10:18: 요 12:30 참조).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승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단은 하늘 에서 떨어졌다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사도 바울은 사단이 신약 시대에도 하늘에서 역사한다고 하였는가? 엡 6:12에 말하기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한다. 우리는, 바울의 이 말씀을 모순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렇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인하여 사단이 성도를 하나님께 참소하던 자리에서는 쫓겨났으나 아직도 시험하는 자리 (이곳도 어떤 의미에서는 하늘 곧, 공중임)에는 있다가 신약 시대의 종말에 이르러서 완전히 땅에까지 쫓겨 내려갈 처지에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확실한 일에 대하여 말할때에 그것이 미래에 될 것이지만 벌서 완성된 것처럼 말한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그런 어투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여기 진술된 "하늘의 전쟁"이 미가엘과 용 사이에 벌어 진 것 으로 말했는데,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하여 이것이 그리스도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사건과 관련시키는가? 우리 본문은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전연 관설한바 없고,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 만을 "용"과 싸운 자로관설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것을 문제삼을 것 없다. 그 이유는, (1)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계에서도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복음 전도와 같은 것이다. 이 복음 전도가 표면에서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되어 가지만, 이면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다. 그처럼 "하늘의 전쟁"도 그 이면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으로 실행되었으나, 역시 형식상으로는 미가엘과 그사자들을 통하여 실현된다. (2) 우리는 특별히 이 부분에 관설된 "하늘에 전쟁"을, 10-12절에 진술된 하늘의 음성으로 해석해야한다(R.C.H. Lenski, The Interpretation of St. John,s Revelation, p. 372). 그 이유는, 하늘의 음성이 이 전쟁 내용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곧, 성도들을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다는 말씀(10절)은, 구약
미가엘 - 이것은 히브리 원어(* )의 음역(音譯)인데, "누가 하나님과 같으리요"라는 뜻이다. 이것을 보면, 그 천사는 하나님을 위하여 싸우는 자이다. 이 영전(靈戰)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 승천하심으로 그승리가 결정되었다.
옛 뱀 곧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 - 이 말에 대하여는 본장 설교(마귀를 이기라)를 참조하여라.
10-12 - 이 귀절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심으로 획기적으로 구원 사업이 성취된 사실을 가리킨다.
계 12:10
구원, 능력, 나라, 권세 -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보혈로 속죄하신 것을 가리킨 듯하고(계 7:10), "능력"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심으로 오신 성령님의 영력을 의미하고(계 4:11, 5:12), "나라"는 천국이고, 그리스도의 "권세"는 하늘에 오르신 주님께서 천지의 주재되시는 권세를 말함이다(마 28:18). 이 문구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승천하심으로 사단을 완전히 이기신 결과에 대한 말씀이다.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 이 점에 있어서 문제되는 것은, 여기 이 말을 하는 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1)스웨터(Swete)는이것을 "24장로 중의 하나"라고 하나 이연(犁然)치 않고, (2)크레다너스(Greijdanus)는 "천사들"이라 하고, (3)로마여(Lohmeyer)는 "순교자들"이라 하고, 혹은 (4)이것을 "구약 시대의 성도를"이라고 한다. "참소하던 자"는 사단을 가리키는데, 저놈이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걸어 하나님 앞에서 참소하였다(욥 1, 2장 참조).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 승천하신 사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칭의(稱義)하기 때문에, 이제 사단의 참소하는 일은 끝났다.
계 12:11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 여기 이겼다는 말씀은, 실상 앞절의 사단의 참소의 종식에 따라서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귀절 말씀은 앞절과 서로 통한다. 여기 "인하여"란 말은, 헬라 원어로 디아(* )니 "때문에"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이 말이 여기서 목적격 명사(目的格名詞)앞세 놓인 고로, 승리의 도구로서의 방편(方便)을 의미하지 않고, 승리자로 여겨 주도록 한 은공(恩功)으로서의 원인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승리는 그들 자신이 잘하여 얻은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보혈(寶血)이 그들에게 그것을 은혜로 주었고, 또 그 증거하는 말씀이 그들로 하여금 그 승리에 참여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뒤에 있는 설교(마귀를 이기라)를 참조하여라.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 계시록이 말하는 기독교 신자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일률적(一律的)으로 순교자들이다. 그러면 이것은, 구원 얻을 자격이 순교란 말인가? 그것은 그렇지 않다. 계시록에서는 기독 신자를, "어린 양"(죽임을 당하셨던 예수)에게서 분리하여 보지 않는다(계 14:1, 17:14, 19:11,14).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순교하지 않은 기독신자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限), 그리스도의 공로(功勞)로 인하여 "이긴 자"의 자격을 누리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세상과 원수된 자요, 세상에게서 수난한 자요, 세상을 이긴 자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그들은, 벌써 은혜의 복음을 믿음으로 영생을 받았으니만큼, 아무래도 죽을 육체의 생명(롬 8:10)을 아낄 필요 없다(11 절). 생명을 자력(自力)으로 구원하려 하지 않고 그것을 그리스도에게 "의탁"(*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 생활의 요점이다. 신자는 자신을 의지하는 마음을 포기하였다. 한 손으로는 자기를 붙잡고 의지하며, 다른 한 손으로는 주님을 의지하는 방식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대로 그리스도께 맡겨서 그리스도의 것이 되어져야 한다. 우리는 어떤 다른 사람을 의지해도 안된다. 베드로를 의지해도 안된다. 베드로도, 내가 의지한 주님을 의지하여 구원을 받았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나를 위하여 죽으셨던 분으로 하여금 내 영혼을 간수하게 하여라" 하였다(Let him that died for my soul, see to the salvstion of it). 이미 말한 것과 같이, 신자는 그의 생명을 벌써 그리스도께 맡겨 놓았으므로 자기 생명을 잃을까 하여 두려워하지 않는다.
계 12:12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 - 이들은 주님을 믿는 자로서 벌써 별세하여 천국에 간 자들이다.
"땅과 바다" - 는 땅 위의 생존자들을 통칭(通稱)한다.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그리스도께서 장차 다시 오실 시기(시기)에, 마귀는 불못에 던지움이 된다. 저놈은 땅으로 쫓겨 내려오면서 그 비운(悲運)을 알고 더욱 발악한다.
계 12:13
이 귀절들은 위의 제6절을 다시 해설한 것이다. 거기 있는 해석을 참조하여라.
큰 독수리의 두 날개 -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말하기를 , 여기 "두 날개"는 신앙과 계명인데, 신자와 교회의 힘은 이 두 가지를 소유함에 있다고 하였다(De sterkte ven geloovige en gemeente ligt in deze twee). 그러나 이 해석은 추측(推測)에 불과하다. "독수리의 두 날개"는, 하나님께서 그 택한 백성을 시련(詩鍊)의 방식으로 양육하심을 상징한다(신 32:11-12; 시 103:; 사 40:31). "독수리는 그 새끼를 시련하기 위하여 그것을 그 둥지에서 떨어뜨려서 날기를 가르치다가, 그것이 땅에 떨어질 위기를 당하면 곧 그 날개로 그것을 업는다. 하나님께서 그 택한 백성을 이 방식으로 시련시키시는 일이 많다(출 19:4).
광야 - 이것은 이 세상을 비유하나니, (1)광야가 쓸쓸함 같이, 이세상도 쓸쓸함(잠 21:19). (2)광야에서는 의식주(依食住)가 곤난함과 같이, 이 세상도 그러함(시 78:19). (3)그 밖에 이 세상 모든 조건들은 우리에게 고난을 줌. 고난이 우리에게 괴로운 것 같으나, 실상은 우리를 하나님께 바로 나가도록 하여 준다. 어떤 아이가 장난감 배를 가지고 강물에 띄우며 놀았다. 조금 후에 배가 강 복판으로 들어가므로 아이는 배를 잃을까 겁냈다. 그 때에 그의 옆에 있던 사람이 큰 돌을 배 건너편에 던졌더니, 그 아이는 배가 부서진 줄 알고 울었다. 그러나 배는 그 던진 돌 때문에 생긴 물결을 다라 점점 강 가로 밀려 나왔으므로, 그 아이는 배를 붙잡았다. 그와 같이, 우리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주님과 더욱 가까와진다.
한때와 두때와 반때 - 이것은 단 9:24에 있는 "칠십 이레" 중 마지막 "한 이레"의반부(半部)곧 삼년 반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삼년 반이란 기간을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고 했을까? 이와 같은 표현법에는 반드시 상징적 의미도 내포한다. 영 박사(E.J. Young)에 의하면, 이것은 핍박자의 활동의 세 가지 단계를 가리키나니, 곧, 그 핍박 행위가 점점 강해지다가 끝나는 것을 보여준다. "한 때"는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 가운데 끝을 가지고 있는 기간이고, "두 때"는 그 때("한 때")의 계속을 의미한다(Calvin). 저렇게 핍박자가 한 때 권세를 얻고 그것이 점차 강화된다는 의미에세 "두 때"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한 때"는 그 핍박 행위의 시작을 의미하고, "두 때"는 그 핍박 행위가 절단(絶斷)되고 말 것을 상징한다. 환난에 대한 주님의 말씀도 이와 같은 해석을 암시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끝은 아직 아니니라...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라고 하신 다음에(마 24:6-8), 많은 재앙을 말씀하시고,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라고 하셨다(마 24:22). 마 24:6; 막 13:7; 눅 21:9참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날들을 감하시리라"란 것은, 계속되는 환난의 날들을 감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란 말이 시간적으로 어떤 기간을 말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1)칼빈주의 학자들에 의하면, 그 기간이 신약 시대인데 상징적 표현인 "마흔 두달", 혹은 "일천 이백 육십일"(11:3)에 해당되는 기간일 것이다. (2)세대주의 학자 후로스트(Henry W. Frost)의 해석에 의하면, 이 기간은 신약의 말기에 일어날 유대인 기독교회가 핍박 받는 "후 삼년 반" 기간이라고 한다(Matthew Twenty Four and The Revelation, pp. 219-224).그러나 이 해석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계 12:15
물을 강 같이 토하여 - 강수(江水)는 여기서 무수한 환난의 상징인 듯하다(사 43:2). 그러나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모든 이 세상주의 (世上主義 )의 생활인데 곧,염려, 탐심, 기타 여러가지 육체적 생활을 가리킨다(마 13:22)고 하였다(Openbaring, p. 263). 또 혹설에, 이 토한 물은 침략군(侵略軍)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계 12:16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 이것은, 사단의 모든 악한 계교가 하나님의 섭리적 행사로 인하여 실패되는 것을 가리킨다. 예컨데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고 열중하던 때에, 블레셋 군이 침입(侵入)하므로 다윗은 도망할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계 12:17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 이것은, 마귀가 신자들을 개인 개인 시혹(試惑)함이다. 사단은 단체인 교회를 없앨 수 없었다. 그러므로 저놈이 이제부터는 신자들을 개별적으로 유혹하여서 멸망시키려고 한다.
"섰더라" - 는 말은 헬라 원어로 에스타데(* )라고 하는데, "그가(용이) 섰더라"는 뜻이다. 어떤 사본에는 에스타덴(* )이라고 하였으니, 곧, "내가 섰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이것을 채택하는 경우에 있어서, 17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곧,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돌아갔다. 그리고 나(요한)는 바다 모래 위에 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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