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전 1: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 사도 란 말(* )은 보내을 받은자 란 의미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배경으로 하고 세상에 파견된(마10:16) 복음 전도의 성직이다. 베드로가 이 직명을 여기 내세우는 이유는, 본서가 하난의 사서신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대언하는 권위있는 서신임을 밝히려는 까닭이다.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 등은 소아시아의 땅 이름들이다.
흩어진 나그네 (* )는 천국을 본향으로 바라보고 이 세상에서는 주님을 위하여 생활 안정을 얻지 못하는 일반 그리스고 신자들을 총칭한다. 헬라 원문에는 흩어진 나그네 란 말 위에 택하심을 입은 (* )이란 말이 직속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개역 성경에는 2절에 있음), 이 문구는 유대인 기독신자들만 가리킨 것이 아니고, 영적 나그네, 곧 일반 기독신자들을 의미함 것이 확실하다. 1:4, 18, 2:11, 4:3-4 참조.
벧전 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 이 귀절의 의미를 분해하면, (1) 구원받을 자들의 선택이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근거하였다고 함. 이 미리 아심은 미리 시찰한 지식을 의미하지 않고 그의 오묘한 지혜를 가리킨다. 이 지혜는 장차 이 세상에 태어날 사람들의 선행을 미리 내다보심이 아니고, 그들의 선악 여부를 막론하고 선택학시는 지혜를 말한다. 롬9:11, 20-23 참조. (2)그 선택에 의한 구원 실사가 성령님의 성화 사역으로 말미암아 되어감. 따라서 구원 실시는 어떤 강제수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3) 그 선택에 구원 실시 결과는 피택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신종케 함과 및 그리스도의 속죄에 참여케 함이다. 그러므로 이 귀절에는 삼위 일체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뚜렷이 들어 있으니, 곧 아버지 하나님의 구원 계획, 성령님의 구원 실시, 성자 예수님의 속죄(피뿌림)이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 이란 말씀(* )의 구체적 의미는 그 아랫말들이 밝혀준다. 곧, 순종함 (사람이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중생하여 그리스도를 믿음)과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음 (사람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객관적으로 정의함을 얻고, 또 주관적으로 정결해 가는것-요일1:7-8)이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신자들이 영적으로 자라나지 못하면 타락하기 쉽다. 그들에게 은혜가 더욱 많아져야하며, 평강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사도 베드로의 이와 같은 축복은 진리에 부합한다. 평강 은 여기서 심령의 평안을 가리키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은혜의 열매이다. 신앙과 평강은 일체이다. 빌4:7;벧후1:2 참조.
벧전 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 찬송하리로다 이 말은 헬라 원어로 율로게토스(* )니, 하나님의 복되신 성품에 대한 찬사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은 본질적 의미에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아버지 이시다(요1:18). 그가 인생의 아버지가 되심은 인생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속죄받아 양자 가 된 의미에서 그러하다(롬8:15).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뒤에야 성령님이 오셔서 모든 사람들을 중생시키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곧 인생들의 대표자께서 그들에게 죄를 치워 버리심이고, 그 분의 죽으심은 그들의 죽음을 처분하여 없애 버리심이고, 그 분의 부활은 그들의 생명의 원천이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인류는 참된 생명에 이른다(그들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신자들이 영적으로 자라나지 못하면 타락하기 쉽다. 그들에게 은혜가 더욱 많아져야하며, 평강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사도 베드로의 이와 같은 축복은 진리에 부합한다. 평강 은 여기서 심령의 평안을 가리키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은혜의 열매이다. 신앙과 평강은 일체이다. 빌4:7;벧후1:2 참조.
벧전 1:4,5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 이 귀절들은 앞절의 산 소망 이 얻더한가를 밝혔으니, (1) 그 소망의 복은 아무런 변동 어밑삥이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하늘에 간직된 것이고, (2) 그 소망의 복을 받을 자들은 위태한 땅 위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를 받아 역시 실패하지 않게 된다. 그 소망은 이처럼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견고하고 안전하다. 이 견고의 양전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경영과 보호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니, 그야말로 사람 편에서 아무런 공작하는 바 없이 실현되는 산 소망 이다. 신자는 그 소망이 그렇게 든든한 줄 알아야 그 믿음이 든든해지고, 그 믿음이 든든해야 건전하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이 계시는 성전이 되기도 한다.
벧전 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 이 귀절의 헬라 원문(* ) 은, 지금 잠간 필요가 있으면 여러 가지 시험에 있어서 근심하게 될지라도 그것(구원)으로 크게 기뻐하도다 라고 개역함이 옳다. 베드로의 의미한 바는, 신자도 하나미의 뜻 안에서 곤란에 빠져 잠간 심령상의 우고를 받는 때가 있으나, 그가 받을 구원때문에 크게 기뻐할 수 있다느는 것이다. 크레다너스는, 여기 필요가 있으면 (* )이란 어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으니, 곧 고난은 신자들에게 우연히 혹은 넘치게 임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정화와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 잠가 이란 것은 신자에게 근심이 잠시 있다가 지나감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환남으로 인한
그리스도 신자의 우고는 언제까지나 계속하니 않는다. 혹시 그 환난이 오래 머물더라도 신자는 근심에서 떠나 희열을 가져야 한며 또 가지게도 된다. 신자가 근심을 과도히 하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시험에 빠지기 쉽다. 늘 기뻐해야 신앙을 보존시키며 활기 있게 한다. 크게 기뻐하도다 란 말의 헬라 원어(* )는 중신에 희열이 넘쳐서 말과 행동에 폭발하는 환락을 가리킨다. 어거스틴은 이 말씀을
명령법으로 보고 크게 기뻐하라 라고 번역하였다.
벧전 1:7
너희 믿음의 시련을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여 함이라. - 이 귀절은 고난 중에서 기뻐할(6절) 이유를 보여준다. 고난중에 기뻐하면서 견디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1) 신자가 고난으로 인한 시험을 당해야 경성하게 되어 그의 믿음의 작용이 일어나서 믿음을 배우게 되며, (2) 그리할 때에 그의 믿음이 연단되어 흔들리지 않게 되며, (3) 그의 심앙 인격에 들어 있던 찌꺼기들(약점들)이 떨어져 나가며, (4) 시련을 잘 통과한 신앙이라야 장차 그리스도 앞에서 잘 하였도다 충성된 종아 (마25:21)라는 칭찬을 받고, 또 영광과 존귀 (내세의 상급)를 받겠기 때문이다. 연단을 받아 굳어진 금도 마침내는 달아아지지만, 고난으로 연단을 받은 신앙은 영원히 존속하여 빛나며 천국의 보배가 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평안한 중에서 잘 믿다가죽겠다는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한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평안히 살면서 주님을 믿었던가? 그는 그곳을 떠났다(창12:1-4). 크게 기뻐하도다 란 말의 헬라 원어(* )는 중신에 희열이 넘펴서 말과 행동에 폭발하는 환락을 가리킨다. 어거스틴은 이 말씀을 명령법으로 보고 크게 기뻐하라 라고 번역하였다.
벧전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 곧, 그들(이 편지를 밑잗을 신자들)이 베드로처럼 땅 위에 계셨던 예수님을 만나 보지는 못했으나, 신앙으로 그를 사항하며 그를 즐거워한다는 의미이다. 요20:29 참조. 버틀러는 말하기를, 보이는 것은그림자요 보이지 않는 것은 실체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감관에 감촉되기를 구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보이지 않으시는 사실을 만족하게 여기고 그를 사랑할 것이다. 역대의 무수한 순교자들이 예수님을 대면해 보지 못하고도 그를 사랑하여 생명까지 바치지 않았던가!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여기 이제 란 말(* )은 예수님의 재림 이후의 내세와 대조시킨 현세를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본서의 독자들의 입장에서 과거가 아닌 현재를 가리킨다.
보지 못하난 란 어귀(* )는 현재사로서 계속적으로 보지 못함을 의미한다. 기독신자들이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을 믿되 그를 육안으로 보기를 사모하지 않아야 된다.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이 복이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요20:29).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 이란 것은 성령님의 감화로 오는 기쁨이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이라고 한 이유는, 그것이 특히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게 하는 역리적인 것이어서, 자연법으로써는 설명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또한 그것을 영광스러운 기쁨이라고 한 이유는, 그것이 영광스러운 내세의 기쁨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크게 기뻐하도다 란 말의 헬라 원어(* )는 중신에 희열이 넘쳐서 말과 행동에 폭발하는 환락을 가리킨다. 어거스틴은 이 말씀을 명령법으로 보고 크게 기뻐하라 라고 번역하였다.
벧전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 이 문구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도 믿고 사랑하게 된 이유를 보여준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을 것을 생각하면 그를 위하여 아낄 것이 무었이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막8:37)라고 하셨으며,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고 (마10:28)라고 하셨으니, 영혼이 얼마나 귀한 줄을 알 수 있다.
벧전 1: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 신약시대에 완전히 계시될 구원에 대해 선지자들은 관심 깊이 연구하였다. 사6:11;렘32:16-44;단7:15,8:13;마13:17;눅10:24;요8:56참조. 여러 세기전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은혜로운 구원을 약속하실 때에 그의 마음 속에 신약시대의 우리들을 생각하셨다. 이 사실을 깨닫는 우리로서야 어떻게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랴!
벧전 1: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신는지 상고하니라. - 그리스도의 영 은 성령님이신데, 오실 그리스도께 대하여 예언의 사역을 하신 고로 그리스도와 관련된 명칭을 가진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이 메시야가 어떤 분이신지에 대하여는(그의 받으실 고난과 영광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시22편,69편;사53장). 그러나 그가 꼭 어느 시대에 오실지에 대하여는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신약시대의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시일을 모름과 같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행1:7)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24:36참조.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이 예수님의 초림 시일을 몰랐으나, 마침내 그는 오셨다. 그와 같이, 우리가 주님의 재림 시일을 모를지라도 그는 반드시 다시 오신다. 이 귀절 말씀으로 보아서, 우리는 성경의 영감된 사실을 한번 더 느낀다. 선지자들이 그 받은 계시에 대하여 연구하고 상고한 행동을 보니, 그 계시받은 것이 자기들
자신에게도 이상한 일이었던 것임이 확실하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사상이 아니었다.
크레다너스는 말하기를, 이 귀절은 성경의 영감에 대하여 특수한 내용을 알려 준다. 이것은 성경의 축자 영감으로 된 사실을 알려준다:고 하였다. 크레다너스는 여기에 이어서 크노프의 이 부분 해석도 첨부하였다. 크느프에 의하면, (1) 성경의 영감은 엄격한 초자연적 사건으로 이해된다는 것, (2) 선지자들이 그 받은 바 말씀을 이해못한 채 기록하도록 또는 기록하케 되도록 하였다는 것, (3) 선지자들에게 그것이 순전한 객관적 사실이면서 외래의 생소한 말씀이었다는 것, (4) 그렇기에 그것은 그들의 탐구의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벧전 1:12
이 섬기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 이 귀절의 요지는 이렇다. 곧, (1) 선지자들은 오실 그리스도를 멀리서 바라보는 처지에서도 뜨거운 사랑으로 그 계시를 연구하는데, 이제 신약시대에 그리스도의 오신 사실을 아는 신자들은 얼마나 더욱 그를 사모해야될까? 그뿐 아니라, (2) 그들의 사역 목적이 자기 자신을 위함이 아니고 신약시대의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계사를 미리 전하려는 것이었다. 이처럼 남들을 위한 계시를 예언하는 사역에 있어서도 그들은 정성을 다하였다. 그렇다면, 신약시대의 신자들은 그 예언이 가리키는 계시의 직접 대상이며(롬15:4), 또 과연 그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을 받은 자들이이, 얼마나 더욱 긴장미 있게 몸과 마음을 그리스도에게 집중해야 될 것인가? 이 섬긴 바 란 말은 선지자들의 예언
사역의 모든 활동을 가리킨다.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여기 살펴 보기 라는말(* )은 더 자세히 살피려고 몸을 구푸림이라고 한다. 이 말씀은 천사들이 성도들의 구원에 대하여 얼마나 열정으로 보기를 사모하는지 알려준다.
벧전 1: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 마음의 허리를 동 인다 함은 일종의 비유이다. 예날 유대의 여행자가 그 긴 옷을 행보에 거치지 않도록 띠로 동인 것같이, 내세를 본향으로 바라보고 이 세상을 여객처럼 행하는 신자는 방심하지 않아야 된다. 근신하여 란 말(* )은 세속에 물들지 않고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있음을 의미한다. 본래 이 말은 술취하지 않고 깨어 있음에 대하여 사용하는 것인데(살전5:5-8), 신약에서 특히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신자의 태도에 대하여 사용된다.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 란 것은 주님의 재림과 함께 임할 모든 축복을 가리킨다. 여기 가져올 이란 말(* )은 현재 피동사이다. 이것이 (1) 현재사이니만큼, 그 은혜 (내세의 기업)가 장래의 것이면서도 벌써 현재에 이루어간다는 암시를 주고, (2) 피동사이니만큼, 그 은혜 가 신자의 힘으로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의 힘으로 되며, 따라서 그것은 견고하여 실수 없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을 암시한다.
벧전 1: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삼지 말고.
- 순종하는 자식 이란 말은 하나님의 복음을 신종함으로(1:2,22) 그의 자녀가 된
것을 말한다(요1:12). 여기 처럼 (* )이란 말은 그들의 자녀격을 가설함이 아니고, 그 실질적 신분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로서 라고 개역되어야 옳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이니만큼, 그런 자격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야 한다. 그들은 모든 정욕을 버리고 하나님처럼 성결하게 되기를 힘써야 한다. 사욕을 본삼지 말고 여기 사욕 이란 것은 정욕 이라고 번역함이 합당하다. 본삼는다 는 말(* )은 즈안에 의하면, 현세태에 유행하는 관념과 풍습에 순응하는 생활 방식을 의미한다. 그러면, 여기 본삼지 말고 란 말은 순응 혹은 동화되지 말라는 의미로 번역함이 옳다.
벧전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이란 문구는, 신자들의 도덕의 표준도 하나님 자신이며, 또한 그가 친히 그들을 부르심에 합당하도록 하여 주신다는 것을 내포한다. 그들의 도덕 표준은 이 세상의 어떤 성자도 아니다. 누구든지 인간을 표준 삼으면 인간처럼 실수한다. 하나님만이 완전히 거룩하시니, 그가 신자들의 표준이시다. 그뿐 아니라, 그의 부르심은 어두움에서 나와서 빛에서 살도록 부르심이며(벧전2:9),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이다(5:10). 신자는 이 빛과 영광에 합당하게 거룩해져야 한다.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베드로의 이 권면은 원시교회의 경건이 얼마나 강력하였던가를 생각케한다. 궁켈도 말하기를, 원시 기독교와 당시 이교세계와의 도덕 생활상 차이는 매우 컸다. ... 여기서 저자(베드로)는 그 당시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성결에 해당하는 만전의 성결을 요구한다 라고 하였다.
벧전 1:16
거룩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레11:44,19:2,20:7 참조. 이것은 하나님의 성결을 모본으로 생각하여 한 말씀이고, 성결에 있어서 사람이 하나님 순중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신자는 성결에 있어서 하나님을 표준하고 늘 장성해야 한다.
벧전 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 이것은 윗절 말씀의 연속으로서 성결해지기 위한 삶의 방법이다.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 범죄할까 두려워해야 한다. 그 이유는, (1) 신자들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 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지공무사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로 사랑하시니, 그가 우리의 죄를 징계하시지 않을 리가 없다.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자녀들을 아주 멸하시지 않으시나, 그들이 범죄하면 귀정시키기 위하여 징벌을 내리신다. 그 분은 우리를 자녀로 사랑하시므로 우리의 죄를 더욱 징벌하신다. 히12:7에 말하기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라고 하였다. (2)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본향에서 처럼 안심할 수 없고, 어디서든지 그들의 믿는 복음과 배치되는 것들을 봉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세상과 타협하거나 순응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된다. 이 세상은 신자들에게 타국이니, 그들은 거기에 영주하지 못할 나그네로 자가하여, 거기에 순응하는 쉬운 길로 흐를까 두려워해야 된다. (3) 신자들은 죄에서 구속하신 속가가 너무 귀한 까닭이다. 우리는 그런 귀한 속가 지불로 안하여 얻은 보배로운 구원을 경홀히 여길 수 없고, 참으로 소중히 여겨야 된다. 누가 귀한 보석을 함부로 간수하리요? 그 속죄의
귀중성에 대하여 이 아래 귀절들이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벧전 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 이 말씀은 역시 문맥상 앞절 말씀의 연속이다. 즉 두려움으로 지내라 (앞절 끝)고한 훈시를 뒷받침한다. 왜 두려움으로 지내면서 거룩되이 행해야 되는가? 그 이유는, 신자들의 받은 구속이 너무 귀한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성립되었기 때문(18-19)이라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일이 이렇게 되도록 하신 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0-21). 그리스도의 피도 온 천하보다 무한히 귀하고 하나님 자신도 그러하시다. 이렇게 절대 안전하고 또 절대 완전한 구속을 믿는 자(받아들이는 자)는 두려움으로 행할 때에(17졸끝) 은혜를 받아서 그 인격이 성화되어 갈 것이다. 망령된 으로 번역된 헬라 원어(* )는 헛되다 는 뜻이고, 망령됨 을 뜻하는 말(* )은 따로 있다. 그러면 헛되다는 것은 무엇인가? 구원에 유익이 없는 악한 행위들을 가리킨다. 베드로는 여기서 구속을 논함에 있어서 원칙대로 사람의 영원한 생명의 구속을 말하지 않고 왜 행실(* )의 구속을 말하는가? 말씀의 방향이 이렇게 된 이유는, 윗절에서 행실의 성화를 촉구해 왔기 때문이다. 윗절 끝의 두려움으로 지내라 는 문구에 있어서 지내라 는 말이 역시 행하라는 뜻이다. 구속 이란 말(* )은 종으로 팔려 있는 사람을 그 주인에게 속전을 주고 해방해 줌이다. 우리가 정죄에거 해방 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보혈을 속가로 지불하신 조건 아래서 성립되었다.
(1) 신자들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 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지공무사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로 사랑하시니, 그가 우리의 죄를 징계하시지 않을 리가 없다.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자녀들을 아주 하시지 않으시나, 그들이 범죄하면 귀정시키기 위하여 징벌을 내리신다. 그 분은 우리를 자녀로 사랑하시므로 우리의 죄를 더욱 징벌하신다. 히12:7에 말하기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라고 하였다. (2)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본향에서 처럼 안심할 수 없고, 어디서든지 그들의 믿는 복음과 배치되는 것들을 봉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세상과 타협하거나 순응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된다. 이 세상은 신자들에게 타국이니, 그들은 거기에 영주하지 못할 나그네로 자가하여, 거기에 순응하는 쉬운 길로 흐를까 두려워해야 된다. (3) 신자들은 죄에서 구속하신 속가가 너무 귀한 까닭이다. 우리는 그런 귀한 속가 지불로 안하여 얻은 보배로운 구원을 경홀히 여길 수 없고, 참으로 소중히 여겨야 된다. 누가 귀한 보석을 함부로 간수하리요? 그 속가의 귀중성에 대하여 이 아래 귀절들이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벧전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 흠
없고 점 없는 것은 하나님께 속죄 제물로 드리는 양의 자격인데, 그것은 예수님의 죄 없으심을 표상하는 것이다. 우리의 죄값으로 바침이 되는 것은죄 있는 자의 생명(피)으로 할 수 없다. 죄인이 어떻게 남들의 죄값을 담당하랴? 죄인은 제 값으로 받아야 할 자신의 멸망도 피하지 못할 자이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이는 무죄하신 그리스도 예수님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속죄하신 그의 보혈은 귀한 것이다.
벧전 1: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산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 본절은 계속하여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값이 얼마나 귀중한 사실인가에 대하여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 전 에 속죄 제물로 예정되셨고, 말세에 그렇게 나타내신 바 되셨다. 다시 말하면, 그 나타나심은 돌연적 또는 우연적이니만큼, 우리에게 신앙을 일으켜 준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이같이 근기 깊은 구속 설계에서된 줄 아는 우리로서는 요동함이 없이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벧전 1: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 그리스도의 부활은 자연법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이다. 이런 하나님을 믿는 자는 소망을 하나님께 둔다. 고후1:8-9 참조. 그리고 사람이 이런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도 자기의 지혜로 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으로만 성립된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 이라고 하였다(엡2:8).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 이라고 인정하는 그 마음도 믿음의 시작이다. 고전12:3참조. 저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 셨다 함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켜 승천케 하신 것을 의미한다. 그는 승쳔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다(행2:33). 이렇게 되어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으니,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
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여기 이른 바 소망 이란 것은 영생의 소망 이니(1:21,3:15), 이 소망은 하나님께서 성립시키셨고 또 그가 이루신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이 하나님께 있다고 한다. 이 소망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립되었다는 사상은 1:3-5에도 있다.
벧전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하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 여기 영혼을 깨끗하게 한다 함은 전혀 무죄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데오도레 즈안은 말하기를, 이것은 간악한 흉계가 없고, 불순항 음모가 없는 순전하고 진실한 심사를 가리킨다 라고 하였다. 뜨겁게 란 말(* )은 장구하게 유지해 나가느 사랑의 성질을 의미한다. 그들의 사랑이 이처럼 장구할 수 있도록 하는 가능성은 그들에게 내주한 복음의 말씀이 썩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있는 사실에도 의거한다. 그것은 이 아래23-25절의 말씀이 가르친다.
벧전 1:23
너희가 진리를 순종하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 여기 영혼을 깨끗하게 한다 함은 전혀 무죄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데오도레 즈안은 말하기를, 이것은 간악한 흉계가 없고, 불순항 음모가 없는 순전하고 진실한 심사를 가리킨다 라고 하였다.
뜨겁게 란 말(* )은 장구하게 유지해 나가느 사랑의 성질을 의미한다. 그들의 사랑이 이처럼 장구할 수 있도록 하는 가능성은 그들에게 내주한 복음의 말씀이 썩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있는 사실에도 의거한다. 그것은 이 아래 23-25절의 말씀이 가르친다.
벧전 1:24,25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 여기 포함된 인용 귀절은 사40:6-8에서 나온 것이다. 이 말씀은 인간을 풀 에 비유하여 인간의 무상함과 약함과 그 육심의 생명도 길지 못한 사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겸하여 그의 영광도 믿을 수 없는 것을 탄식하여 꽃과 같다고 한다.
그러나 병자가 있는 동시에 의사도 있는 것처럼, 그런 볼 것 없는 인생을 치료하는 하나님의 영생하는 말씀도 있다고 한다. 본서의 저자는 이렇게 말하여 인생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게 한다. 인생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을 가졌는데(전3:11),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이제 사람에게 있는 이 마음의 소원을 하나님의 말씀이 채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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