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계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주신 계시(啓示)라는 말씀이다. "계시"란 말은, 헬라 원어로 아포칼류시스(*  )라고 하는데 감취었던것이 열리어 나타난 것을 의미한다(Lohmeyer). 이 세상 끝에 관한 일을 누가 알리요마는 창조주께서 계시하면 알 수 있는 것이니 알게 하는 권세가 그에게만 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철학이나 과학이 그것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에 대하여 그것들이 월권(越權)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구에게 이 계시가 임하였는가? 그것은 사도 요한에게 임하였다. 계시 받은 이가 사도인 만큼, 그것의 효용(效用)은 모든 신자들에게 공동(共同)으로 미친다.곧, 그것은 선지자나 사도의 사용(私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교회의 공동 유익한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록(啓示錄)을 읽는 자는, 그것이 사도에게와 마찬가지로 그 자신에게 직접 관계를 가지고 임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반드시 속히 될 일.- "반드시"라는 말은, 헬라 원어로 다이(* )라고 하는데,예언적 필연성을 함축(含蓄)한다. 곧 로마여(Lohmeyer)의 말과 같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정하신 대로 성위하실 일의 절대적 확실성을 가리킨다(* bezeichneteine prophetische Notwendigkeit die absolute gewissheit, dass Gottes Plan sicherfllt. off. p.8). 본서에 기록된 예언은, 그대로 성위되지 아니할 수 없는 불가항적(不可抗的)인 실현력(實現力)을 띠고 있으니 그것을 믿는 자는 지자(智者)이다."속히"라는 말은, 헬라 원어로 엔타카이(* )라고 하는데,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그것을 "급히"(成就行步의 속도를 이름이고 그 기간의 짧음을 이름이아님)란 의미로 본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신적(神的) 속도로 모든 일을 성취해 가신다고 생각된다. 그는 이런 간절한 열성으로 이렇게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지만, 좁고 미련한 우리의 심정에는 그것이 더디게 생각된다.
 지시하신 것이라.- "지시하신"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에세마넨(* )이니, 상징(象徵)으로 표시하였다는 의미이다(Greijdanus). 그러므로 계시록은 여자적(如字的)으로 해석하는 것보다 상징적으로 해득(解得)함이 옳다. 그러한 상징이 계시록에 사용된 목적이 무엇인가? (1) 귀 있는 자는 들을 수 있게 하려 함이다(계 2:7;마 13:9). 곧, 성령을 받아서 신령한 귀가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만    그것을    깨닫도록하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미래사(未來事)가 상징으로 표시될 때에 분명히 깨달아지는 방면이 많다. (2) 진주 같이 귀한 진리가 천히 내던지우지 않고(마 7:6), 상징(象徵)의 막(幕)으로 가리움이 된 것은, 간절히 사모하는 자만이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다. 곧, 진리를 애모(愛募)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것이 숨겨지기 위한 것이다(마13:1-15).

 계 1:2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여기 세가지 엇구는 동일한 내용을 가리키는 다른 형식(形式)의 표현(表現)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증거되어 나타났고, 그것이 사도 요한에게 보여진 것이다. 계시록(啓示錄)의 내용은, 곧, 주님의 증거에 관한 것이다.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지키는 자들.- 여기에,"읽는 자"(*  )라고 단수로 쓰고, "듣는 자들"(*  ) 또는 "지키는 자들"(*  )이라고 복수로 쓴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의 공석에서 한 사람이 성경을 읽고, 회중은 듣는 장면을 가리키려는 것이다. 즈안(Theodore Zahn)은, 2,3세기 교회가 성경의 어느 다른 부분보다 계시록을 이렇게 읽어서 핍박 가운데서 위로 받은 사실을 지적하였다. 이것을 보면, 성경을 사사로이 독학(獨學)함보다 교회적으로 성경을 공독(公讀)하며 풀어서 설교함을 듣는 것이 원칙이고, 더욱 영감(靈感)에 부요한 일이다.
 때가 가까움이라.- 이 점에 근거하여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계시록을 순전히 역사적(歷史的)으로 보는 학자들의 그릇된 것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그는 계시록을 가리켜 미구(未久)에 발생하기 시작할 일들과 세상 끝의 일들과 및 내세(來世)의 일들을 포함하는 예언(豫言)이라고 하였다(bestijds spoedig aanvangen zoude te gebeuren, en vervorgens in snel verloop plaats grijpen zoude den ganschen loop des tihds df der eeuwen...),이 견해는 문의(文意)에 적합(適合)하고 자연스럽다. 예언을 상고하고 지키는 자들이 복 있음은 예언이 그렇게 연구하는 자에게만 축복을 가져다 주게끔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계 1:4
 일곱 교회.- 왜 "일곱"수를 택하였는가? 아시아에는 이 밖에 다른 교회들(골로새, 히에라폴리스, 막네시아, 드로아 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곱 교회"만을 선발(選拔)하여 말하였으니, 저자 요한의 염두에는 일곱 수의 영적(靈的) 의미를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일곱 수의 영적 의미는 거룩하고 완전한 것으 상징한다(Moffatt, Greijdanus). 그렇다면 일곱 교회는 각 시대의 모든 세계 교회를 대표한다. 카이퍼(A. Kuyper)도 이런 의미로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7 교회에서 일곱 가지 교회 형편을 보신다. 이 일곱 가지 형편은 모든 시대와 모든 지방에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The Revelation of St. John, p.42).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로 말미암아).- 이 말씀은, 헬라 원어로 아포 호 온 카이 호 엔 카이 호 엘 코메노스(*    )라고 한다. 여기 아포(* =말미암아)라는 전치사(前置詞)가, 하나님 성호의 주격 명사(*    ) 위에 놓인 것(아포는 소유격 명사 위에 놓이는 전치사인데도 불구하고)은 파격(破格)이다. 이 파격은, 영원 불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고유 명사에 대하여 침범하지 않으려는 경외(敬畏)의 동기에서 표현된 것이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도 말하기를, "이런 문투는 부주의도 아니며 실수도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불변성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Openbaring, p.14). 이 성호는,구약의 여호와(* =영원 자존자)란 말 뜻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출 3:14 참조).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택한 백성에게 계약하신 대로 어김 없이 구원을 성취하여 주신다는 뜻을 가진다(말 3:6).
 일곱 영.- 이것은 성령님을 가리키는데, "일곱"수로서 말한 이유는, 스가랴 예언서에 벌써 성령님을 여호와의 일곱 눈으로 비유했기 때문이다(슥 3:9; 계 5:6), 일곱 수는 완전과 성결을 상징하는 듯한데 성령님의 위(位)는 단일(單一)하시되, 그의 속성과 권능(權能)은 완전하시다는 의미이다. 반 델 모일렌(Van Der Meulen)은, "일곱 영"이란 뜻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수(完全數)의 은사(恩賜)들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신(神)을 가리킨다고 하였으니(사 11:2), 가장 이연(理然)한 해석이다(De Openbaring in Het Laatste Bijbel-boek, pp.38-39). 이 성령님께서 "보좌 앞에"계시다 함은, 그가 성부신(聖父神)님의 왕적 권위(王的權威)와 능력과 기타 모든 속성들을 그대로 나타내시는 사역자(使役者)라는 의미이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이 점에 있어서 성막(聖幕)의 구조를 연상하였다. 곧, "보좌"는 지성소(至誠所)요, "일곱 신"은 성소(지성소 앞)에 있는 일곱 등(燈)에 해당하며, 다음 절의 그리스도는 속죄자(贖罪者)니 만큼, 제단에 해당하다고 하였다(출 40:1-6 참조)(In het heilige der heili gen was de ark. Daar troonde God, EX. 25:22. Voor dit binnenste heiligdom was het heilige, waarin de kandelaar mit zijne zeven lamen brandde, Ex, 40:24, 25. En voor dit heilige bevond zich het voorhof, waarin de dienst der verzoening uitgericht werd, Ex. 40:25-33-Openbaring, p.16).

 계 1:5
 충성된 증인.- 본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삼직(三職), 곧, 선지(충성된 증인), 제사(죽었던 자), 왕(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을 가리켜 말한다. 그 중에도 이 문구(충성된 증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일생을 통하여 가진 고초를 무릅쓰시고 심지어 죽으시므로 무지 몽매한 인류에게 하나님을 알리는 일을 하신 것을 가리킨다(마 11:27; 요 1:18, 14:6, 18:37; 딤전 6:13). 하나님을 알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그 독일 무이(獨一無二)한 길이다(요 14:6).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그의 계심을 알게 된다. 인간은 자기의 지능(知能)으로 하나님을 아는 자리에 들어갈 수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이 죄로 인하여 어두워진 까닭이다(고전 1:21). 하나님이 인생에 구원(救援)을 주시는 영지(靈智)는 오직 예수를 믿음에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仲保)이시니, 우리는 그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교제(交際)할 수 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여기 이 문구(*    )는, "죽은 자들 중의 그 먼저 난 자"라고 함이 적역(適譯)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모든 죽은 자들의 선봉적 부활자(先鋒的復活者)란 것이다. 그것은, 그가 먼저 그의 백성을 위하여 죽음을 이기시고, 죽음을 소멸하셨기 때문에 그의 백성들은 그의 공덕(功德)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영광에 들어가게 됨을 가리킨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말하기를, "그 먼저 난 자"란 원어 프로-토토고스(*  )는, 시간적 수위(時間的首位)인 동시에 부활권세(자기와 모든 신자들을 위하여 사망을 이기는)의 소유(所有)를 표시한다(*  drukt de gedacht uit van eerste in tijd voor ganger en dan, daarmede samenhangende van machthebber.-Openb.p.16)(1:18 참조). 예수님 이전에 몸으로 다시 산 자들이 없지 않으나, 예수님의 부활(復活)처럼 다시 죽지 않는 부활을 취한 자는 이때까지 예수님 밖에 전연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선봉이라 함은, 그가 사망을 이기시고 몸된 교회를 이끌고 부활에 들어가셨으므로 그에게 연합한 몸되는 교회는, 동일(同一)한 부활에 끌려 들어간다. 그리스도께서 사시므로 우리가 살게 됨이 성경의 부활 교리이다(요 14:19; 엡 2:5,6 참조).
 땅의  임금들의  머리(*    ).- 이것은, "땅의 왕들의 통치자"하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셨다가 다시 살으심은, 그로 하여금 교회의 왕이 되게 함과 온 인류의 왕되심을 성립시켰다(롬 14:9). 사단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범죄케 하여 천하 만국을 받도록 유혹하려 하였으나(마 4:8-), 그리스도는 자기의 죽으심으로 그것(천하 만국)을 얻으셨다(제 19:12,16). 그가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에 신자들의 부활과 구원을 이루신다(요 3:35,36; 빌 3:21). 여기서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으로 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관적(終末觀的) 지위를 바라봄이다. 그의 종말관적 내림(來臨)은, 그 구체적 통치를 특색으로 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될 것이 있으니, 곧, 그것이 그 방식과 형태에 있어서 이 세상에 속한것도 아니거니와 섭리적(攝理的)인 것도 아니고 초자연적인 것이라는 것이다(17:19 참조).
 우리를 사랑하사.- 사랑은 속죄(贖罪)의 기본이다. 사랑이 없는 곳에 희생이 없다.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사랑의 극치(極致)이다. 사랑은 보수적(報酬的) 행위가 아니고 순 희생적 행위인 것이다.  그의 피로.- "피"는 생명과 같은데, 죄 값은 오직 "피" 곧, 생명의 지불로서야 성립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죄 값은 피(생명의 지불, 사망)로써만 물어줄 수 있다(창 9:4; 히 9:22).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니 만큼, 그 많은 택한 백성들의 죄 값을 담당하고도 무한히 남는 귀한 "피"인 것이다. "피"란 말은, 성경에 도합 700번 나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 밖에는, 우리를 구원하실 길이 없음을 이렇게 힘있게 약속하셨다. 우리로서는 그리스도의 피를 그 만큼, 힘있게 믿어야 된다.
 바울은 신자들을 속죄하여 주시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있게 믿는 의미에서 말하기를, "내가 너희중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하였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아들은 나를 사랑하여 자기 자신을 나에게 주셨으니 그것은, 율법과 및 인간의 행위의 의(義)에 대하여 터진 뇌성벽력 같은 반대이다.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을 비교할 수 없는 보화로 여길진대 네 모든 종교 의식과 행위와 공로는 지옥으로 던져라. 그 이유는, 네가 하나님 아들의 죽음 밖에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어 화해시키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해방하시고.- 이것은, 헬라 원어로 뤼산티(* )라고 하는데 이는 알려(* )과 알렉산드리아 사본(寫本)의 사구(寫句)이고, 어떤 사본(R, Q)에는 루-우산티(* )로 되어 있으니, 그 뜻은 "씻으시고"라고 한다. 크레다너스(Greijdanus)와 기타 유명한 주석가들은 첫째를 택하였다. 모팟트(Moffatt)도 그리하였다. 죄는 우리를 멸망의 형벌에 매는 줄인데, 그리스도는 그의 죽으심(피)으로 이 무서운 줄을 끊으시고 멸망의 형벌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다. 기독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이 형벌을 면하게 되었으니 어찌 찬송하지 않으랴!

 계 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의 업적은 물론 제 1착으로 우리에게 미쳤다. 그러나 그것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는 것이다(계 22:3; 엡 1:6).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사 자기를 알고 또 섬기게 하려는 것을 일향(一向) 목적하시는데(엡 1:5,6), 그리스도께서 그 구원 행위로써 이를 이루신 것이다.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나라와 제사장"이라는 말은, 헬라 원어로 바실라이안 히에라이스(*  , )인데 그 뜻은 "나라, 곧 제사장들"이다. 무질서한, 혹은 개인주의의 제사장들의 군중(群衆)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임금으로 모시고 질서 있고 평화로운 단체로서의 제사장들을 가리킨다. 땅 위의 교회는 이렇게 질서와 평화를 생명 같이 지니어야 한다. 이는, 출 19:6의 예언의 궁극적(窮極的)성위인 것이다(5:10, 7:15, 20:6, 21:3). 롬 12:1; 히13:15; 벧전 2:5 참조. 모든 신자들은 다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이니, 그들의 왕(그리스도)의 말씀(선지와 사도들의 증언-성경)을 엄수(嚴守)하여 영적 질서를 세워야 된다. 벡크위드(Beckwith)에 의하면, 여기 이른바, "나라와 제사장"이란 문구는, 신자들이 내세에서 왕됨과 겸하여 제사장됨을 가리킨다고 한다(The kingship of God's people in the Messianic kingdom is another aspect of their priesthood.-The Apocalypse of John, p.430).

 계 1:7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앞의 4절에는 성부(聖父)되신 하나님께 대하여 "오실 자"로 말하고, 여기서는 그리스도에게 대하여 그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활동을 하나님 아버지의 그것과 동일시(同一視)함이 그 특색이다. 이는 물론 위(位)에 대한 동일시가 아니고 신성(神性)에 대한 것이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이 점을 선히 간취(看取)하고 해명하였다(in vs 4heet de vader *  . Hier wordt van Heere Christus gezegt, dat Hij komt voor Johannes is dus Zoon volkomen gelijk aan den Vader. vgl. ook vs.8, wel niet wat persoon aangaat, vgl. vss. 4 en 5,5:1, 6. maar wat wezen betreft. De vader komt in den Zoon).
 "구름"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여자적(如字的)으로 자연계의 구름인가?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이것을 하나님의 영광의 가견적(可見的) 계현(啓現)이라 하였다(deze wolken zijn de zichtbare openbaring van zijn Goddeliike majesteit). 출 13:21, 14:16, 14:19 참조. 그렇다면, 이 "구름"은 보통 구름이 아니고 기이한 구름일 것이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가시덤불에 붙은 불을 보았는데 그 불은 자연계(自然界)의 불이 아니었다. 그 불이 가시덤불에 붙었으나 가시덤불이 타지 않았던 기이한 불이었음과 같이, 여기 "구름"도 그러한 기이한 구름이 아닐까? 행 1:9-11 참조. 그러나 이 구름을 문자적으로 자연계의 것으로 보아서 틀릴 것 없다(Lange). 그가 승천하실 때에는 구름이 그를 가리운 일도 있었고(행 1:9), 그가 다시 오실 때에 그와 같은 모양으로 오실 것이라고 하였다(행 1:10).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이것을 보면, 주님의 종말적(終末的) 내림(來臨)은 조금도 숨김이 없어서 누구나 볼 수 있게 오신다. 그것이 어떻게 그와 같이 되는지에 대하여는 우리가 예측(豫測)하기 어렵다. 그렇게 그것이 초자연적(超自然的) 사리(事理)에 속하는 한, 우리의 자연적 지식으로써 예측하기 어려움이 오히려 마땅한 것이다.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슥12:10; 요19:34,20:25,27 참조. "그를 찌른 자들"은 누구 누구냐? 이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며, 그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자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님을 박해하는 자들에게 대한 통칭(通稱)이다. 그리스도께서 처음 오셨을 때에는 그를 주(主)로 알아 보지 못한 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가 다시 오실 때에는 가장 악한 원수들도 그를 하나님으로 알고 떨게 된다. 모팟트(Moffatt)는, "그를 찌른 자"란 말이 유대 민족을 가리킨다고 하였으나, 적합한 해석이 아니다.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들이 "애곡"(哀哭)하는 이유는, (1) 그렇게 종말이 이르기 전에 회개(悔改)하지 못한 것을 뉘우쳐(회개는 아님-마 27:3) 통분히 여기는 까닭이며, (2) 이제 오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무서운 심판 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까닭이다(마 8:12).
 그러하리라 아멘.- 여기 "그러하리라"란 말은, 헬라 원어로 아니(* )라고 하는데, "예"(참되다는 뜻)라는 뜻이다. 이것이, 그 아래 있는 히브리어 아멘(* )에 해당한 말이다. 이 점에 있어서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말하기를, "요한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종말적(終末的) 내림(來臨)의 확실성에 대하여 두 나라 말로 이중(二重) 확보(確保)를 표시한 것이다. 이렇게 그가 이중 확보한 이유는, 주님의 종말적 내림이 그 약속하신 대로 불변함을 강조하려는 까닭이다"(De Grieksche en de Hebreeuwsche woorden ter bevestiging woor den hier bijeengevoegd om te sterker de stellige zekerheid uit te spreken, dat de Heere alzoo komen zal, gelijk Hij beloofd heeft)라고 하였다.

 계 1:8
 본절은 앞절에 말한 주님의 종말적 내림에 대한 확보니, 이는, 하나님의 성호(聖號)로써 표시된다. 하나님의 성호 그것의 의미가 벌써 그의 재림을 함축(含蓄)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본질 성호는 그 본질의 표호이므로 벌써 그의 종말적 내림이 필연적으로 포함된 것이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말하기를, "그의 본질(本質)로 좇아 그의 행사들이 나온다"라고 하였다(uithet zijn of wezen Gods, volgt zijn werkin).
 알파와 오메가.- 이것은, 헬라어 문자의 첫 글자(* )와 끝 글자(* )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시작하신 신(神)이시고 또한 귀정(歸正) 결말(結末)하시는 신이라는 뜻이 여기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창조자이시고 또한 심판자이시다.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이 성호는 4절에도 있는데, 출 3:14의 "영원 자존자"란 말의 히브리어인 여호와(* )의 해설적 번역임에 틀림 없다(Greijdanus). "영원 자존자"의 의미는, 창조를 받지 않고 자존(自存)하사 영원 불변하시고 만사 만물을 그 기쁘신 듯대로 주재(主宰)하시며 또 때가 이르면 그것들을 임의로 심판하사 정리하시는 자라는 뜻을 가진다. 이 해설적 번역에 있어서 "장차 있을 자"라고 하지 않고 "장차 오실 자"라고 의역(意譯)하여 옮긴 것은, 여호와(* )란 성호가 포함한 재림의 뜻을 의식적으로 적발(摘發)함이다.
 전능한 자.- 헬라 원어로 판토크라토-르(*  )이니, 재림하실 자가 가지지 않으면 안될 속성(屬性)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우주(宇宙)의 최종적(最終的) 귀정(歸正)을 하실 주님이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시지 않을 리는 만무하다.

 계 1:9
 나 요한은 너의 형제요...동참하는 자.- 여기 "형제"란 말과 "동참하는 자"란 말이, 헬라 원문에는 한 관사(冠詞)에 함께 속하여(*    )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그것은, "형제"이므로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게 된다는 인과(因果) 관계를 암시한다. 여기서 요한이 자기의 직명(職名=사도 혹은 선지자)을 기입하지 않은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이상히 여길 것 없다. 그는 본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물론 사도의 권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에 전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는, 그 자신이 교회로 더불어 고난과 영광에 동참하는 형제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본서를 기록한 것이다. 마 23:8 참조.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 이 문구에 있어서 "예수의"란 말은 "환난", "나라", "참음"의 세 말을 공통적으로 연결한다(*     ). 그러면 그것은, "예수의 환난", "예수의 나라", "예수의 참음"을 의미한다. "예수의"란 말은, 헬라 원어로 엔 예수(* )이니, "예수 안에"한 말이다. 예수 안에 환난과 나라는, 예수와 연합한 관계로 참예할 환난과 천국이요, 예수 안에 참음은, 예수께서 모본으로 보여 주시고 또 힘 주시어 참게 하시는 참음이다(Moffatt). 환난은 나라에 이르는 길이요,참음은 그 길을 걷게 하는 힘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2절 해석 참조.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위하여 핍박을 받아 밧모섬으로 추방된 것이다.
 밧모.- 이것은 작은 섬 이름인데, 에베소에서 14시간 쯤 항해하여 도착되는 곳이다. 그 때에 이섬에 범죄자들을 많이 정배 보냈다고 한다(Moffatt).

 계 1:10
 "주의 날" - 은, 우리들이 지키고 있는 성일(聖日)을 이름인데, 이 날은 사도 시대부터 벌써 성별(聖別)한 날이었다(고전 16:2). 교회가 이 날을 지켜 내려온 증거는 사도 후시대(使徒後時代)에도 많이 있다(Didache 14.Ignatius ad Man. 9).
 성령에 감동하여.- 이는 헬라 원어로 에게노멘 엔 프뉴마티(*   )이다. 그 의미는 "성령 안에 있었다"는 것이니, 로마여(Lohmeyer)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곧, 이것은, 성령 안에 있다는(롬 8:9) 관습적(慣習的) 상태가 아니고 일반적 입신(入神)도 아니라 황홀(恍惚)한 영계(靈界)에 옮겨졌음을 이름이다(계 4:1; 고후 12:1).-Nicht einen dauernden havitus gleich dem *   (Rm. 8:9) auch wohl nicht nur allgemein den eintritt des ekstatischen Zustandes sondern speziell die ekstatische entruckung (S. zu 4:1 und vgl. etwa 2 cor. 12:1 ff). 그러나 이 때에 요한이 잠이 들었던 것도 아니고, 정신을 잃은 혼수 상태에 빠진 것도 아니며 그와 반면에 그 정신이 똑똑하여 자주 의식(自主意識)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Greijdanus).
 나팔 소리 같은.- "나팔 소리 같은"것이고 나팔 소리는 아니다. 옛날에는 민중을 깨워 부를 때에 나팔을 사용했다(민 10:2). 그러므로 이 "소리"는 깨우는 영음(靈音)임에 틀림 없다.

 계 1:11
 본절에 있는 "일곱 교회"에 대하여는, 2, 3장에 나오는 각 교회에 대한 해석을 참조하여라.

 계 1:12
 일곱 금 촛대.- 이것은 20절에 해석되었으니, 곧, 일곱 교회이다. 출 25:31-40 참조.

 계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 이 분은, 단 7:13에 있는 "인자" 곧, 메시야(그리스도)이시다. 이 분이, 교회들 가운데 언제나 계시는 그리스도이신데, 그 분에 대하여 이 아래에 많은 비유의 말씀들이 나온다. 사이스(Seiss)는 이 아래 기록된 모든 표현들을 비유로 보지 않고 여자적(如字的)으로 보았으니 잘못이다(A. Rieters, Studies in The Revelation of St. John. p. 87). 헨드릭센(Wm, Hendricksen)은, 여기 묘사(描寫)된 그리스도는 늘 교회에 계심을 그 특징으로 한다는 의미로 말하고, 따라서 이 부분 말씀과 다음 장들(2,3장=교회론)과의 연락이 밀접하다고 역설(力說)한다(More Than Conquerers, pp. 33-34).
 발에 끌리는 옷.- 이것은 대제사장의 옷이고(출 28:4, 29:5),
 "가슴에 금 띠"- 는 군왕의 옷이다(Greijdanus). 그러면 요한은 여기서 제사장 겸 왕이신(시 110편; 사 6:1-5) 메시야를 본 것이다.

 계 1:14
 그 머리와 털의 흐기가 흰 양털 같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영생(단 7:9)과 성결(사 1:18)을 상징(象徵)하는 것이다.
 그의 눈은 불꽃 같고.- 이것은 그의 전지성(全知性), 곧, 무엇이나 모르심이 없으신 지능(知能)이시다. 단 10:6 참조.

 계 1: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이것은, (1) 단 2:41-43의 "진흙과 무회가 섞인 발"처럼 붕괴(崩壞)되기 쉬운 것이 아니고, 견고무비한 신국(神國) 혹은 심판을 상징한다. 단 2:31-35 참조. (2) 예수님의 초림 시(初臨詩)에는 그의 발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 상함이 되었지만 재림하실 때에는 영광과 권능으로 오시기 때문에 원수를 밟아도 상하지 않는다.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이것은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엇구이다. 겔 43:2을 보면,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와 같다고 하였다. 시편 29:3에서도 역시 그리하였다. 이것은, 힘있는 소리여서 어떤 때는 모든 죄 있는 인간들을 두렵게 하는 회개의 도전(挑戰)이기도 하지만 세상 끝날에는 심판 선고의 무서운 말씀이다.

 계 1:16
 그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고.- "오른 손"은 힘있는 손이니, 일하는 손이며(Greijdanus), 보호의 역할을 하는 손이다. 그러므로 "일곱 별"을 "오른 손"에 잡았다함은 교회의 사역자들(20절)을 통하여 능력 있게 일하신다는 뜻이다.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이것은 사람의 심혼 골수(心魂骨髓)를 쪼개며 또한 죄악을 날카롭게 판단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이 말씀이, 영적 병자 곧, 죄인을 해부아여 구원하며(히 4:12), 또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정죄하며 심판한다(계 19:20; 요 12:48).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하늘 나라의 영광을 얻으신 이의 광채는 이렇게 빛난다. 그가 변화산(變化山)에서 영광을 나타내신 때에도 역시 그렇게 보이신 것이다(막 9:3). 천국에 참예한 의인(義人)들의 모습도 역시 해와 같이 빛난다고 하였다(마 13:43).

 계 1:17
 죽은 자 같이 되매.- 겔 1:28; 단 8:17 참조. 그가 이렇게 된것은 두려움에 붙잡힌 까닭이다. 왜 그에게 그런 두려움이 임하였는가? 그것은 그가 인간이니 만큼, 연약하고 죄도 있는 까닭이었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말하기를, "그가 그렇게 된 것은, 그의 연약성 때문이라기보다 오히려 죄 때문이었겠다"(사 6:5 참조)라고 하였다(De verklaring dezer overweldiging ligt niet zoozeer in's menschen broosheid als wel in zijne zondigheid,vgl Jes, 6:5).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이 문구의 헬라 원어(*     )를, 즈안(Theodore Zahn)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곧, "두려워 말라. 이는 나로다. 나는 처음과 나중이니"라고 하였다. "처음"과 "나중"에 대한 해석은 8절에 있으니 참조하여라.

 계 1:18
 산 자라.- 헬라 원어로 호 존(* )이라고 하는데 불사성(不死性)을 가지시고 늘 살아계신 분이라는 뜻이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열쇠"는 주권(主權)을 의미하는데(Greijdanus), "사망과 음부"(陰府=죽은 자가 있는 곳)의 주권을 "가졌"다는 것은, 그가 친히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으니 만큼, 이제부터는 사망의 지배(支配) 아래 있는 자들을 그의 권세로 석방(釋放)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음부"는 무엇인가? 그것은 헬라 원어로 하데스(* )니, 구약성경의 스올(* )에 해당한다. 신약에서는 이것이, 회개하지 않은 자들이 죽은 후에 가는 흉한 곳을 의미한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스올이란 말이, 육신의 죽음 상태와 무덤을 의미하기도 하나, 별세한 영혼들이 가는 곳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특별히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 다 갈 수 있는 곳인 듯이 가리킨다(왕상 2:2,9; 욥 3:13, 30:23; 시 89:48; 사 14:9; 겔 32:28). 거기 간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사 14:9). 델리취(Delitzsch)는 이 장절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여기 음부에 대한 견해가 비록 신화적인 성격을 가지나 두 가지 진리에 근거하고 있다. 그것은, (1) 인간이 무덤 이편에서 어떻게 생활한 것이 무덤 저편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2) 하나님이 주신 환경에서 인간의 비물질적인 형태가, 그 자결정(自決定)으로 이루어진 내용이 거울에 드러나는 것과 같이 드러남을 보여 준다"고 하였다. 헬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말하기를, "구약에서 '음부'에 대하여 말할 때에 죽은 자들이 거기 가서 존재하며 산다 하고, 또한 그들은, 땅에서처럼 서로끼리 알며 서로 만남으로 정서(情緖)도 움직여진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구약의 "스올"이란 말에서 결론할 수 있으니, (1) 스올은 무덤과 언제나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것, (2) 스올이란 말로써 악인이 가는 곳을 의미하는 동시에, 의인이 가는 곳을 의미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창 37:35). 그렇다면 문제가 생긴다. 어떻게 악인과 선인이, 사후에 같은 곳에 갈 수 있을까? 그것은, 신약 사상에는 물론 안맞거니와 구약 사상에도 맞지 않는다(시 16:11, 17:15; 마 8:11,12).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구약에서 "스올"이란 말이, 어떤 때는 단지 육신의 무덤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사후의 세계를 가리키기는 하나, 그 세계의 성격에 대하여는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아직 포함시키지 않은 중세적(中世的)인 것으로서 그저 내세를 가리킨다(창 37:35). 로레인

 계 1:19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 여기 "네 본 것"은 다음 귀절이 해명(解明)하였고, "이제 있는 일"은 2,3장에 기록된 교회 현상인 듯하고, "장차 될 일"은 6장 이하에 기록된 계시의 내용인 듯하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공지 박윤선 주석을 읽을 때에 내용이 없는 장
1190 요한게시록 박윤선 주석, 요한계시록 22장
1189 요한게시록 박윤선 주석, 요한계시록 21장
1188 요한게시록 박윤선 주석, 요한계시록 20장
1187 요한게시록 박윤선 주석, 요한계시록 19장
1186 요한게시록 박윤선 주석, 요한계시록 18장
1185 요한게시록 박윤선 주석, 요한계시록 17장
1184 요한게시록 박윤선 주석, 요한계시록 16장
1183 요한게시록 박윤선 주석, 요한계시록 15장
1182 요한게시록 박윤선 주석, 요한계시록 14장
1181 요한게시록 박윤선 주석, 요한계시록 13장
1180 요한게시록 박윤선 주석, 요한계시록 12장
1179 요한게시록 박윤선 주석, 요한계시록 11장
1178 요한게시록 박윤선 주석, 요한계시록 10장
1177 요한게시록 박윤선 주석, 요한계시록 09장
1176 요한게시록 박윤선 주석, 요한계시록 08장
1175 요한게시록 박윤선 주석, 요한계시록 07장
1174 요한게시록 박윤선 주석, 요한계시록 06장
1173 요한게시록 박윤선 주석, 요한계시록 05장
1172 요한게시록 박윤선 주석, 요한계시록 04장
1171 요한게시록 박윤선 주석, 요한계시록 03장
1170 요한게시록 박윤선 주석, 요한계시록 02장
» 요한게시록 박윤선 주석, 요한계시록 01장
1168 유다서 박윤선 주석, 유다서 01장
1167 요한삼서 박윤선 주석, 요한삼서 01장
1166 요한이서 박윤선 주석, 요한이서 01장
1165 요한일서 박윤선 주석, 요한일서 05장
1164 요한일서 박윤선 주석, 요한일서 04장
1163 요한일서 박윤선 주석, 요한일서 03장
1162 요한일서 박윤선 주석, 요한일서 02장
1161 요한일서 박윤선 주석, 요한일서 01장
1160 베드로후서 박윤선 주석, 베드로후서 03장
1159 베드로후서 박윤선 주석, 베드로후서 02장
1158 베드로후서 박윤선 주석, 베드로후서 01장
1157 베드로전서 박윤선 주석, 베드로전서 05장
1156 베드로전서 박윤선 주석, 베드로전서 04장
1155 베드로전서 박윤선 주석, 베드로전서 03장
1154 베드로전서 박윤선 주석, 베드로전서 02장
1153 베드로전서 박윤선 주석, 베드로전서 01장
1152 야고보서 박윤선 주석, 야고보서 05장
1151 야고보서 박윤선 주석, 야고보서 04장
1150 야고보서 박윤선 주석, 야고보서 03장
1149 야고보서 박윤선 주석, 야고보서 02장
1148 야고보서 박윤선 주석, 야고보서 01장
1147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13장
1146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12장
1145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11장
1144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10장
1143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09장
1142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08장
1141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07장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24 Next
/ 24

All the Bibles, Commentaries and Dictionaries here have their own rights.
All rights are reserved for them, not for us. Thanks! Praise our great God, Christ Jesus!

HANGL Lingua Franca 한글 링구아 프랑카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