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22:1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 여기 "명예"란 말(* )은 "이름"이란 뜻이다. 이것은, 인간의 칭찬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이름을 말함이다(롬 2:29). 이렇게 해석되는 이유는, 하반절에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고 한 말씀이 "명예를 택할 것이요"란 말씀을 조금 다른 표현으로 설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명예"란 것은 여기서 "은총"(하나님의 사랑 받음)과 같은 것이라고 해석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사람들 중에 높임 받는 그것을 미워하신다(눅 16:15). 창 11:4,8; 행 12:22-23 참조.
재물(은금 보화)보다 하나님의 은총(명예)이 귀한 이유는, 그것(하나님의 은총)은 영생을 주지만(눅 10:20), 은금은 잠간 후에 없어지기 때문이다. 시 39:6-7; 잠 23:5 참조. 이 세상의 재물보다 하나님의 은총을 택한 모세의 생활에서 그 실례를 볼 수 있다. 히 11:24-26에 말하기를,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도들도 하나님이 합당하게 인정하여 주심을 제일로 알았으니,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때문에 핍박을 받으면서 기뻐한 일이다. 행 5:41, 16:25; 빌 3:1 참조.
잠 22:2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무릇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 곧, 가난한 자들이나 부자들이나 꼭 같이 하나님의 피조물인만큼 부자는 가난한 자를 대할 때에 이 사실을 기억하고 교만하지 말아야 되며, 오히려 그들을 동정해야 된다(D.G. Wildeboer, Auch der Arme ist ein Gesch pf Gottes, vgl. 14:31, 17:5, Hi. 34:19. Wo also der Reiche dem Armen begegnet, musser dies bedenken und nicht hochm tig oder unbarmherzig sein, vgl. noch Hi. 31:15.-Kurzer Hand-Commentar Zum Alten Testament, Spr che, 1897, s.63).
가난한 자와 부자는 서로 공통적 요소들을 많이 지니고 있다. (1) 그들이 꼭 같이 적신(赤身)으로 이 세상에 났으며, (2) 꼭 같이 하나님과 관련되어서 그의 피조물로서 그의 관할 아래 있고, 비애(悲哀)와 질병과 연약과 시험을 당하며, (3) 내세(來世)에 들어갈 때에는 빈부(貧富)의 차별이 전연 없다. 욥 3:19; 시 89:48, 145:9, 15-16; 전 2:16, 3:20; 단 4:35; 히 9:27 참조.
잠 22:3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 여기 이른바 "재앙을 본다"는 것은 초자연적으로 미래의 일을 내다봄이 아니다. 이것은 일반적 식견(識見)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숨어 피한다"는 것은, 신자가 환란 중에 주님을 위한 목적 없이 생명이 희생되거나 무의미한 고난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지혜롭게 환란 가운데서도 찾아 들어갈 경우도 있다(행 20:22-24). 우리 본문은 이런 경우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본문이 신자들에게 대하여는 다음 세 가지를 말해준다. 곧, (1) 악인들을 벌하시기 위한 재앙이 내릴 즈음에 신자는 거기에서 피할 것. 소돔과 고모라에 재앙이 내릴 때에 롯은 거기에 참예하지 않게 되었다(창 19:12-28). (2) 주님을 위하면서도 적당한 시기가 오기 전에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전에는) 지혜 없이 위험한 일을 당하지 말 것. 예수님도 제자들더러 핍박을 피하라고 하셨다(마 10:23). 사도 바울도 핍박하는 무리를 피한 적이 있다(행 9:23-25, 13:50-51, 14:4-6; 고후 11:32). 구약시대에는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숨은 적이 있고(삼상 20:19, 23:19, 26:1). 엘리야는 이세
벧을 피해 숨은 적이 있다(왕상 17:3, 19:3). (3) 주님의 복음을 위하되 무모하게 반대자들의 반발을 일으킴으로 핍박을 초래(招來)하지 말 것.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창조해 주셨으므로 우리가 그것을 헛되이 희생하는 것을 그는 원치 않으신다.
우리가 여기서 명심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신자들이 어떤 위험한 때에 피신할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사명을 포기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한 곳에서 핍박을 피하였으나 다른 곳에서는 끝까지 사명을 지켜 복음 증거를 계속하였다(행 13:50, 14:1). 신자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도록 되어 있다(딤후 4:2). 그 뿐 아니라, 그들의 피신하는 원리도 하나님 중심한 것이고 이기주의(利己主義)가 아니다. 그러나 동양 철학이 가르치는대로 지도자의 은신(隱身)은 소극적 성격을 가지어 사명을 포기하는 행동이며, 또 인본주의(人本主義)이며, 하나님 중심이 아니다. 예를 들면, 주역(周易)의 돈괘(遯卦 )는 소인들, 곧 악인들이 세력을 잡는 때에 군자 곧, 선한 지도자는 물러가 숨으라는 뜻이다(家日天下有山遯君子以遠小人). 주역의 이런 처세 철학은 개인의 안전을 위한 이기주의 처세가 아닌가? 악이 성한 어지러운 시대에 의리를 지키는 지도자가 더욱 필요한데 은신하라고 함은 옳지 않다.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여기 "어리석은 자들"이란 말(* )은 개방자(開放者)들, 곧 마음에 일정한 입지(立志)가 없는 자들을 의미한다. 그런 자들은 죄악을 분별할 줄 모르고 악인들을 맹종(盲從)하다가 악인들의 받는 재앙에 동참하게 된다.
잠 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 여기 "겸손"이란 말이 먼저 나오는 이유는,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빌데부얼(D.G. Wildeboer)은 이 점에 대하여 주석하기를, "겸손은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어서 첫째로 요구되는 여건(與件)이다."라고 하였다(Demut ist die erste Bedingung f r Gottersfurcht.-Kurzer Hand-Commentar Zum Alten Testament, Spr che, 1897, s.63). 하나님 앞에서 그를 경외하며 사는 참 신자들은 "나는 화를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욥은 스스로 자기를 가증하게 여겨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였으며(욥 42:5-6), 이사야는 말하기를, "화
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하였다(사 6:5).
"재물과 영광과 생명." 이것들은 하나님과 별도로 생각되는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이 아니고 구원 받아 하나님을 소유한 자의 누릴 내세의 기업을 말함이다. 참된 신자들은 영적(靈的)으로는 현세에서부터 벌써 그것들을 누린다. 이 점에 있어서 앞에 있는 8:18-22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참조하여라.
잠 22:5
패역한 자의 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거니와 영혼을 지키는 자는 이를 멀리 하느니라 - "패역한 자란 말은 마음이 구부러진(crooked) 자를 말함이다. 그는 하나님의 진리대로 행하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의곡(歪曲)시켜서 자기의 악을 변명한다. 그는 솔
직하지 않다. 부릿지스(Ch. Bridges)는 이 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주
님을 따르는 길에도 어려움은 있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길에는 그것이 없는가? 이 두
가지 어려움을 공정하게 다루어 보면, 어느 것이 더 어려움인지 알려진다. 그것은 물
론 악을 행하는 길의 어려움이다. 거기서는 양심의 괴로움, 순조롭지 않은 섭리에 의
한 하나님의 책망, 욕구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생기는 실망, 제어할 수 없는 절욕의
횡포(橫暴)등이 그 길을 어렵게 만든다."라고 하였다(A Commentary on Proverbs, The
Banner of Truth Trust, 1968, p.401 意譯).
"영혼을 지키는 자는 이를 멀리 하느니라." 곧, "가시와 올무"와 같은 역경과 난관
은 패역한 자가 그의 악행 때문에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영혼을 구원코자
하는 자는 그런 악행을 멀리 한다. 잠 16:17에 말하기를,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니 그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보전하느니라"고 하였다. 누구든지
죄악을 범한다는 것이 벌써 벌(罰)이요, 덕(德)을 소유한다는 것이 벌써 상급(賞給)이
다.
그러면, 영혼을 지키는 방법은 다음과 같이 행하면 된다. 곧, (1) 영혼을 지켜 주
시는 하나님을 모심, 잠 24:12에 말하기를,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
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고 하였다. (2)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믿음)를 소유함. 잠 8:36에 말하기를, "나(지혜)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
하는 자라"고 하였다. 잠 19:8 참조. (3)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 잠 19:16에 말하기
를, "계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지키거니와"라고 하였다. (4) 남을 불쌍히 여
김(사랑함). 잠 11:17에 말하기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고 하였
다. (6) 입을 지킴. 잠 21:23에 말하기를,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란에
서 보전하느니라"고 하였다. 약 3:2 참조. (7) 영혼을 해롭게 하는 특벽한 죄악을 멀
리 함. 잠 6:32, 18:7, 22:24-25, 29:24 참조.
잠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
여기 이른바 "마땅히 행할 길"이란 말(* )은 "그의 성질에 합당하게"
(in conformity to child's nature)란 뜻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아이들로 하여금
깨달을 수 있도록 가르침을 말함이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깨달을 수 있도록 가르칠
것은 물론 종교 윤리에 관한 교훈이다. 잠언 저자는 이것을 강조한다(잠 13:24,
19:18, 23:13-14). 부모로서 지혜로운 아들(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들)을 소유함은 큰
기쁨이고(잠 23:15, 24), 미련한 아들(하나님을 믿지 않는 아들)을 소유함은 말할 수
없는 슬픔이다(잠 17:21, 25).
"가르치라"란 말(* )은 하나님께 "바침"(dedication)을 의미한다. 신자들이 그
자녀를 가르치는 목적은, 실상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함인 곳
이다(Rolland W. Schloerb). 앞에 있는 19:18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잠 22:7-9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두리니 그 분노의 기세가 쇠하리라 선한 눈물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 이 귀절들은 서로 연결된 문맥을 보여준다. 곧, 부
자는 가난한 사람을 괄시하고 채주는 빚진 자를 괄시하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곧, 돈
이 있다고 남을 괄시하는 자(악을 뿌리는 자-8절)는 재앙을 받고, 돈으로써 가난한 자
를 기쁘게 돕는자는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란 말과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란 말은,
실질에 있어서 서로 같은 내용을 의미한다. 곧, 유산자(有産者)가 무산자(無産者)를
멸시하거나 천대하는 죄악을 말함이다. 이 세상 물질은 하나님의 것인데, 부자는 그것
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눅 12:42 참조."남의 것에
충성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눅 16:12)은, 하나님의 것(비록 자기의 수고로 인하
여 얻은 물질이라도)에 충성하라는 뜻이다. 곧, 부자(하나님의 것을 맡은 자)는 가난
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부자가 가난한 자들
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는 책임은 이행하지 않고 도리어 그들을 괄시하니, 그것은 악한
일이다. 부자의 이같은 악행은 심은대로 거두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갈 6:7-8)대
로 반드시 조만간(早晩間) 보응을 받는다.
8절의 "악을 뿌리는 자"란 말(* )은, "불의를 심는 자"란 뜻이다.
성경이, 어김 없이 심판 받는다는 보응의 법칙을 말할 때에 흔히 종자 심는 비유를 사
용한다(욥 4:8; 갈 6:7-8).
유산자가 무산자를 괄시한 죄악은, 인류 역사상에 어디서나 어느 시대에나 쌓이고
또 쌓여 내려왔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쌓인 죄악을 세계적으로 벌하셨다. 우리는 이
것을 보아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또 한 가지 확실히 아
는 것은, 이스라엘을 벌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 채찍으로 사용하셨던 바벧론도
마침내 꺾이움이 된 사실이다(렘 51:1-4; 슥 1:14-15). 하나님께서 무신론자들의 세력
을 여지없이 꺾어버리실 날도 오고야 만다.
그와 반면에,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하기를 기뻐하는 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
"선한 눈(* )을 가진 자"(9절)는 악한 눈을 가진 자(잠 23:6, 28:22)와 달
라서 즐거운 마음으로 구제하는 자이다. 그는 구제하되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않
고 즐겁게 한다. 잠 11:24-25, 14:21, 19:17, 21:26, 28:27; 사 58:7; 겔 18:7,
16-17; 마 6:3-4 참조.
잠 22:10
거만한 자를 쫘아내면 다툼이 쉬고 싸움과 수욕이 그치느니라 - "거만한 자"가 있
으면 왜 다툼이 일어나는가? 그 이유는, (1) 거만한 자는 늘 소위 자존심(自尊心)을
강하게 가짐(잠 21:4). 거만한 자는 하나님을 업신여길 정도로 자기 자신을 높인다.
그는 언제나 자기를 높여주는 자를 만나기 원한다. 그러나 그는 그의 이같은 소원이
성취되지 않는다고 늘 불만을 느끼며 싸우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런 자가 있는 사회에
는 분쟁이 계속된다. (2) 거만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패역함.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자행 자지(自行自止)하는 자니,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충돌할
수 밖에 없다. 잠 16:28에 말하기를, "패려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라고 하였다. (3)
거만한 자는 자기 혼자 모든 일을 다 하려고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하는 일에 간
참하며 말을 많이 함. 누구든지 자기에게 상관 없는 일에 대하여 시비를 말하면 그 당
사자들과 충돌된다. 잠 26:20에 말하기를,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가 없어
지면 다툼이 쉬느니라"고 하였다. 잠 26:17 참조. (4) 거만한 자는 세상의 모든 것을
탐함.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자 한다. 그 이유는 그는 자기 만족 밖에 모르
기 때문이다. 잠 28:25에 말하기를, "마음이 탐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고 하였다.
잠 22:11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
라 - 여기 있는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 )란 말은, 70인역
(LXX)과 페쉬토역과 탈굼역대로 여호와(* )란 말을 넣어서 "마음이 정결한 자는
여호와의 사랑을 받는데"라고 번역될 수 있다. 학자들은 위의 70인역(LXX)대로 가상
(假想)되는 사귀(寫句)가 원본적일 것이라고 한다(D.G. Wildeboer, H lt man das von
den Versionen vorausgesetzte * f r urspr nglich.-Kurzer Hand-Commentar
Zun Alten Testament, Die Spr che, 1897, s.64). 어쨌든 이 귀절에서 요점으로 취급
될 만한 말은, "정결"이란 말이다. 마음이 정결한 자만이 왕에게 곧은 말을 하므로 그
가 왕에게 참 친구이다. 그러므로 그는 왕을 사랑하는 자(친구)이다. 아부자들은 사실
상 왕의 친구가 아니다. 예컨대, 400명의 거짓 선지자들은 길르앗 라못을 빼앗기 위하
여 아람을 치고자 하는 아합왕의 비위를 맞추어 거짓말로 예언하였다(왕상 22:1-36).
왕은 아람과 싸우기 원하였는데, 그대로 하라고 그들은 말하였다(왕상 22:5-6). 남에
게 듣기 좋아하는 말만하는 자들은 남을 죽도로 만든다. 그러므로 남들의 말로 도움을
받으려는 자는 칭찬보다 충고를 원해야 된다. 성경을 보면, 사람의 칭찬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미워하심을 받는다고 하였다(눅 16:15). 잠 25:27에 말하기를,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고 하였다.
스펄죤(Spurgeon)은 말하기를, 사람에게 죄를 알려주지 않는 설교는 곧은 낚시질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 앞에서 아부하는 생활에 너무 익숙해
졌다. 다른 사람을 높이는 것은 좋으나 지나치게 그의 면전에서 아부하는 것은 죄악이
다.
구약 시대의 많은 선지자들이 다 순결하여서 곧은 말을 용감스럽게 잘하였으므로
왕들의 친구가 될 만하였다. 그러나 아합은 미가야의 옳은 말을 듣지 않고 도리어 그
를 핍박하였으며(왕상 22:19-27), 사울왕이나(삼상 15장), 여호야김왕(렘 36장)도 선
지자의 말을 순종치 않았다. 그러나 다윗과 같은 성군(聖君)은 순결한 자, 곧 나단 선
지자의 말을 감심으로 받았다(삼하 12:1-14). 세상 역사를 보아도, 선한 왕들은 곧은
말을 해주는 신하(탐심 없이 순결한 자)를 친구로 여겨 그들의 말을 잘 들었다. 예를
드면, 옛날 중국 전한(前漢)의 고조(高祖) 황제(주전 202년)는 장량(張良)의 충고를
잘 듣고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가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할 때에 장량의 말을 듣
고 자기를 미워하는 옹치(擁齒)란 사람에게 큰 벼슬을 주고 또 특대를 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불평하던 자들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역시 옛날 중국 촉한(蜀漢)의 유 현덕
(劉玄德-주전 220-265)은, 어진 사람 제갈 량(諸葛亮)을 등용하기 위하여 그의 초막에
찾아 갔으나 거절을 당하고, 또 두 번째 찾아 갔으나 다시 그렇게 되었고, 세 번째 가
서 기어이 그를 등용시키고 그의 말을 들었으므로 유왕은 그의 정치에 성공하였다고
한다.
잠 22:12
여호와께서는 지식 있는 자를 그 눈으로 지키시나 궤사한 자의 말은 패하게 하시느
니라 - 이 귀절의 히브리어를 개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여호와의 눈은 지식을 보존
시키시나 궤사한 자의 말은 패하게 하시느니라." 여개 이른바 "지식"이란 말은 참된
지식 곧 진리를 말함이다. 이렇게 해석되어야 할 이유는, 여기 "지식"이란 것이 그 아
래 나오는 문맥으로 보아 "궤사한 자의 말"과 대조(對照)되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문구는, 하나님께서 진리 지식 곧 그의 말씀을 특수 섭리에 의하여 보존시
키신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대대토록 보존시키며, 전달시키
심에 있어서 특수하게 섭리하신다. 예를 들면, 성경에 기록된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고고학자들의 발굴한 고적(古蹟)으로 말미암아 확증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
께서는 성도들을 통하여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신다. 곧, 많은 전도자들
에게 영감(靈感)을 주셔서 성경을 깨닫게 하시며, 또 힘있게 그것을 가르치게 하신다.
인도에 가서 전도한 위대한 선교사 알렉산더 더프(Alexander Duff)는, 레이디 홀란드
(Lady Holland)란 배를 타고 인도로 가는 도중 인도 근해(近海)에 이르러 파선을 당하
였는데, 그의 모든 소유물을 다 바다에 던졌다. 그가 적신으로 상륙하여 바닷물을 바
라보는 가운데 자기의 성경 한 권만이 물에 떠서 해변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그는 그
것을 건져 가지고 하나님의 선물로 여겨 새로운 힘을 얻어서 그 말씀을 인도사람들에
게 가르쳤다로 한다. 그 결과로 그는 그곳에 큰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비루
마어로 번역된 성경은 초대 선교사로 비루마에 갔던 저드슨(A. Judson)이 옥에 갇혔을
때에 자기 베개 속에 보관하여 가지고 다니던 원고였다고 한다.
"궤사한 자의 말을 패하게 하느니라." 잠 12:19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거기 말하기
를,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눈 깜작일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
고 하였다.
잠 22:13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
라 - 이 귀절에 대하여 빌데부얼(wildenoer)은 말하기를, "이 말씀이 게으른 자를 조
소(嘲笑)하는 의미도 가진다."라고 하였다(Die Entschuldigung des Faulen ist also
lacherlich.-Die Spr che, 1897, s.64) 물론 이 말씀이 비유적으로 표현되기도 하였으
나, 게으른 자는 언제나 일할 책임 앞에서는 겁을 내며 핑계한다는 뜻이다. 잠 26:13
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그는 왜 그렇게 일에 대하여 겁을 내는가? 그것은, 옳은 일(비
록 어려운 조건이 있을지라도)을 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여주시고 축복하여 주
신다는 약속(시 23:3; 창 3:19)을 그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Ch. Bridges).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주시고 축복하여 주신다는 말씀은, 그것을 믿는 자에게 큰 용기와 기쁨을 준
다. 그것을 믿지 않는 자는 일하기를 싫어하고 핑계하게 된다. 가나안 땅에 정탐하러
갔던 열 두 사람 가운데 열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겁약하여져서
거기에 들어가지 말자는 악한 선동만 하였다. 그들은 사자가 거리에 있다고 거짓말하
는 자와 같다. 민 13:31-33 참조.
복음을 전하는 자들 중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어렵다고 핑
계하는 자들이 많다(Charles Bridges). 이들도 게으른 자임을 면치 못한다.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여 주시겠다고 하신 그 약속을 그들은 왜 믿지 않는가? 마
28:19-20 참조. 앞에 있는 19:15에 대한 해석을 자세히 읽기 바란다.
잠 22:14
음녀의 입은 깊은 함정이라 여호와의 노를 당한 자는 거기 빠지리라 - "깊은 함
정"이란 말은 사람을 멸망시키는 것을 비유한다. 그런데 "음녀"의 말에 홀리워서 거기
빠지게 된 자를 가리켜, "여호와의 노를 당한 자"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1) 하나님을 알 만한 사실들이 이 세상에 많이 있음에도 불구
하고(롬 1:19-23) 그가 끝까지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내
버리셨다. 그래서 그는 위험한 자리(음녀의 호리는 자리)에 빠지게 된 것이다(롬
1:24-26). 롬 1:18 참조. (2) 음녀에게 빠짐은 이렇게 위험한 길이다. 앞에 있는 5장
과 7장에 대한 해석을 참조하여라. 하나님의 진노를 당한 자는 이처럼 구원의 자리에
나오기 어렵다.
잠 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
"징계하는 채찍"이란 말은, 하필 채찍으로 때리는 것만을 말함이 아니라 모든 합법적
인 벌칙에 의하여 다스림을 비유하기도 한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더러 말하기를,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
로 나아가랴 "라고 했는데(고전 4:21), 여기서 "매"란 말이 역시 채찍을 의미한다. 그
러면서도 그것은 사실상 채찍으로 구타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잠언의 문
체(文體)는 시문학(詩文學)으로 되었으니, 이 말은 문자적 의미로 풀지 않아도 된다.
순종하지 않는 아이에게 채찍질한다는 것은 합법적으로 구타함을 제외시키는 것은 아
니다. 그러나 그밖에 여러가지 방법으로 그를 벌함을 제외시키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것이 징계를 위한 벌인만큼 그것을 실시하는 방법에 혈기나 악독이나 기타 무질서한
것을 금물(禁物)로 한다.
사람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서 성령의 감화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러
니만큼 그가 인류를 회개시키기 위하여 그의 독생자를 희생시키셨다. 그와 동시에 그
는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환란과 질병과 역경과 여러가지 고통을 통하여 일하신
다. 이런 것들이 역시 채찍으로 비유된다. 이런 의미에서는 장성한 사람들도 채찍으로
다스림이 되고 있다.
특별히 열살 미만의 아이들이 순종하지 않을 때에는 합리적으로 사용되는 벌(혹은
채찍)에 의하여 그들이 고쳐질 수 있다. 이 점에 대하여 앞에 있는 19:18의 해석을 참
조하여라.
잠 22:16
이를 얻으려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와 부자에게 주는 자는 가난하여질 뿐이니
라 - 여기 기록된대로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것과 부자에게 주는 것은, 보통 죄악이
아니고 극히 악독한 행동이다. 가난한 자에 대하여는 구제해야 될 터인데 도리어 그를
학대하니, 이는 진리에 대한 극단적 반역이다. 그러므로 잠 14:31에 말하기를, "가난
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라고 하였다.
"부자에게 주는"것은, (1) 부자의 교만한 탐심을 길러주는 아부 행위이고, (2) 하
나님이 주신 물질을 낭비하는 행동이고, (3) 의로운 목적으로 물질을 맡기신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자격을 상실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물질을 빼앗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의 선물을 바로 쓰지 않을 때에 그것을 거두어 가신다. 사
3:1; 겔 4:16-17 참조.
잠 22:17-21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이것
을 네 속에 보존하며 네 입술에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 내가 너로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 이것을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 내가 모략과 지식의 아름다운 것을
기록하여 너로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
으로 회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 - 빌데부얼(D.G. Wildeboer)은 말하기를, "이 부분은
뒤에 나올 잠언들에 대한 서론인데, 17절은 경계이고, 18절은 경계의 근거이고, 19절
은 경계의 목적이고, 20절 이하는 일찌기 기록된 교훈들을 지적함이다."라고 하였다
(17-21 Einleitung : 17 Ermahnung, 18 der Grund f r die Ermahnung, 19deren Zweck,
20 f. Verweisung auf fr hern Schriftlichen Unterricht.-Kurzer Hand-Commentar Zum
Alten Testament, Die Spr che, 1897, s. 65).
여기(22:17)서부터는 잠언 저자의 문두가 전보다 다소 달라진다. 전에는 일반적 성
격을 띤 교훈이었으나, 이제부터는 비교적 개인 상대로 변한다. 그 뿐만 아니라, 이때
까지는 모든 귀절들이 서로 연락이 없었으나 이제부터는 비교적 어떤 정도의 연락을
가진다(Charles Bridges).
이 부분(22:17-21)에서는 먼저 저자가 독자들의 주의(注意)를 환기시킨다. 그것을
분해하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생각될 수 있다.
(1) 저자의 교훈에 대하여 독자들의 취할 필요한 태도. 그것은, 그 말씀에 "귀
를 기울임"(17절 상반). 사람들 중에는 옳은 말에 대하여 주의하지 않는 자들도 많다.
그런 자들은 참으로 강퍅한 자들이다. 그 말씀을 "마음에 둠"(17절 하반). 어떤 사
람들은 와은 말을 귀로만 듣고 마음에는 간직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은 길가
의 밭과 같다(마 13:4). 그 들은 말씀을 "속에 보존함"(18절 상반). 어떤 사람은,
그 들은 옳은 말씀을 일시 동안 마음에 간직하나 오랫동안 보존시키지는 않는다. 그의
마음은 흙이 얇은 돌밭과 같다(마 13:5). 그 들은 말씀을 "입술에 있게 함"(18절
하반). 이것은 진리를 증거함에 대하여 말한다. 진리의 말씀을 마음 가운데 지니고 있
으면서도 입술로 그것을 전파하지 않는 것은 나약한 자의 생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의 말씀을 입으로 증거하는 것은 신앙의 본질에 속한다. 롬 10:9-10 참조.
(2) 저자가 진리를 가르치는 목적. 첫째로 여호와를 의뢰하게 함(19절). 잠언에 기
록된 수다한 말씀들이 모두 다 독자들로 하여금 여호와를 믿게 하려는 것이다. 그 모
든 말씀들 중에는, 이 세상 육신의 생활에 대한 지도 원리들도 있다. 그것들도 인본주
의 윤리 도덕과 달라서 하나님 중심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바로 깨닫고 지킬
때에도 신앙의 분위기가 조성된다. 둘째로 확신을 가지게 함(20-21). 하나님이 주신
진리(모략과 지식)는 아름답기 때문에 그 독자들에게 확신을 준다. 아름답다는 것(20
절 상반)은, 그것이 신자들의 마음 속에 깨달음과 위로와 생명과 기쁨을 주기 때문에
감미(甘味) 있음을 말함이다. 시 19:10 참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그들에게 확신을
준다(21절). 물론 하나님의 진리를 받은 신자들에게도 모를 문제들이 거기 있기는 하
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에 속한 자들에겐 없는 아름다운 깨달음(20상반)을 많이 소유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런 깨달음이 사람의 지혜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서 온 것임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된다. 그들은, 그들의 깨달음이 이렇게 귀한 줄 알고
파수해야 되며, 그들의 모르는 문제들로 말미암아 동요되지 않아야 한다. 그들이 이렇
게 확신을 가지기 때문에 그들은 그 만나는 사람들의 질문에 언제나 대답할 말이 있
다. 벧전 3:15.
잠 22:22,23
약한 자를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곤고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하지 말라 대저 여호
와께서 신원하여 주시고 또 그를 노략하는 자의 생명을 빼앗으시리라 - 여기서는, 사
람이 공의를 거스리는데 있어서 극단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의 보응을 반드시 받는다고
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특별히 극단적 죄악을 찾아오는 것이다. 동양 옛글에도 말하기
를, "악이 그릇에 차면 하늘이 반드시 베일 것이다"(惡??若滿天必誅之)라고 하였다(明
心寶鑑, 天命篇, 4). 이와 같은 말이 성경처럼 영감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세상 일
을 많이 겪어본 자의 양심 고백이다. 여기 이른바 "하늘"이란 개념이 성경의 "하나님"
과는 물론 다르나, 이 문구가 일반 은총(하나님에게 대한 막연한 지식) 정도의 깨달음
은 전하고 있다.
우리 본문이 말한대로 "약한 자"라고 하여 그의 물건을 탈취하는 것은 공의를 거스
림에 있어서 너무도 극단이다. 사람으로서 약한 자를 도와주는 것이 원칙인데, 도리어
그를 압제하거나 탈취하는 것은 목석(木石)이라도 노를 발할 만한 일이다. "곤고한 자
를 성문에서 압제하지 말라." 이것은, 억울함을 당하여 곤고하게 된 자를 재판정에서
재판장이 다시 압제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옛날 근동 지방에서는 재판이 성문(城門)에
서 실행되었다.
위에 말한 두 가지 극단적인 죄악은 하나님께서 벌하신다(23절). 한 두가지 예를
들면, 아합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악한 수단으로 빼앗았다. 그 결과로 그는 하나님의
벌을 받았다(왕상 21:18-24). 사 33:1 합 2:8 참조. 근대에 이르러 우리는 역사상에
이루어진대로 이런 죄악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결과를 보았다. 곧, 독일의 실패는
이것을 증명해 준다. 독일 황제 카이제르(Kaiser)는, 니췌(Nietzsche)의 초인 철학(超
人哲學)을 믿고 독일 민족이야말로 세계의 어느 민족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하였다. 그
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을 정당한 일로 생각하고 다른 민족들을 압제하려고 하였다. 제
1 차 세계 대전이 그런 사상 때문에 일어났으며, 결국은 독일에 패망을 가져오고 말았
다.
잠 22:24-27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 행위를 본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칠까 두려움이니라 너는 사람으로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 만일 갚을 것이 없으면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 네가 어찌 그
리하겠느냐 - 여기서는, 남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자타(自他)에게 손해될 동
조(同調) 행위는 취하지 말라고 한다. 그 첫째는, 분노의 사람, 곧 호전자(好戰者)와
사귀지 말라는 것이고(24절), 둘째는, 경제적 실력 없이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
는 것이다(26절). 사람이 분노의 사람, 곧 호전자와 사귄다는 것은, 자타에게 손해를
가져온다. 그 이유는, 그 분노의 사람의 혈기를 조장시킬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그
사람의 원수들을 미워하므로 손해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제적 실력 없이 남
의 빚에 보증의 된다는 것도 그 빚진 자의 마음에 헛된 위로를 주는 것 뿐이며, 또한
자기 자신에게도 파산을 가져오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위의 두 가지를
금하신다. 잠 6:1-5에 대한 해석 참조.
잠 22:28
네 선조의 세운 옛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이것은, 물론 남의 소유를 침해하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뿐만 아니라 이것은 남의 나라 영토를 침략하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국가들의 영토는 하나님께서 분배하신 것이다(신 32:8). 행 17:26에
말하기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한하셨으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한 민
족은 다른 민족의 영토를 침략하지 말아야 된다. 하나님께서 각 만족에게 배당해 주신
영토가 혹시 변천되는 것은,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에 속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악
이 관영한 어떤 민족의 영토를 취하여 다른 민족에게 주시는 일도 있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가나안 민족의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고(창 15:18-21). 엠 민족의 땅을
모압 민족에게 주셨으며(신 2:10-12), 삼숨밈 민족의 땅을 암몬 민족에게 주셨다(신
2:20-21). 이런 일들은 예외이고 사람들의 취할 행동 원리는, 남의 소유를 존중히 함
을 원칙으로 삼아야 된다. 남의 소유를 침해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 큰 죄요 저주를 받
도록 되어 있다. 신 19:14, 27:17; 잠 23:10 참조.
잠 22:29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 여기서는 "근실", 곧 근면이 얼마나 중요한 덕(德)임을 보
여준다. 하나님을 잘 공경하는 사람일수록 근면하므로 먹도록 되어 있다. 신앙은 사람
들로 하여금 더욱 부지런하게 만든다. 그 이유는, 신앙은 사람으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시도록 하며 소망을 가지고 만물을 정복하도록 세워주기 때문이다(창
1:28). 그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시 128:1-2에 말하기를, "여호
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
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라고 하였다. 잠 31:27에 의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현숙한 여자는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잠 31:10, 30 참조.
근실한 자만이 자기 자신의 일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일까지 도와줄 수 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을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해야 된다(롬 12:8 하반). 우리 본문은 근실한 자가 왕 앞에 설 수 있다고 한다. 곧, 그는 왕을 보필하여 민중을 위한 많은 일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동양 옛글에도 말하기를, "부지런함은 값없는 보배요"(勤爲無價之寶)라고 하였다(明心寶鑑, 正己篇). 이글이 영감(靈感)된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지만 인류가 일반 은총에 의하여 깨달은바 경험상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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