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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 21:1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
니라 - 곧,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이라도 그의 임의대로 주장하신다는  뜻이다.  "보의
물"(*               )이란 말은 "시냇물들"을 가리킨다. 시냇물들은 큰 강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이리저리 인수(引水)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그의 뜻대로 주장하신다는 말씀은 우리 신자들에게 큰 힘을 준다. 신자들은, 어떤  무
서운 정권의 압제 밑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주장하심에 있어서 주로 다음 두 가지 방법으로 하신다.
   (1) 특별 간섭으로 주장하심. 이것은 꿈과 같은 계시(啓示)나 신령한 감동에  의하
여 왕들의 마음을 주장하심이니, 예를 들면,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꿈으로  경고하심
(창 20:3-7), 바벧론 왕 느부갓네살을 꿈으로 가르치심(단 2장, 4장), 고레스왕을  신
령한 감동으로 가르치신 것과 같은 것이다(대하 36:22; 스 1:1). 하나님께서 고레스왕
을 이렇게 사용하실 일에 대하여는 벌써 오래 전에 이사야를 통하여 그 이름까지 예언
하신바 있었다(사 44:28, 45:1). 요시야왕의 종교 개혁 사업에 대하여서도 그보다  오
래 전에 선지자가 그의 이름까지 예언한 바 있었다(왕상 13:1-2).
   (2) 섭리적 간섭에 의하여 주장하심. 예를 들면,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에 호적을
명령한 것과 같은 일이다. 그 일로 인하여,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리라는 그
예언(미 5:2)이 성취되었다(눅 2:1-7). 그리고 파사 왕 아하수에로가 어떤 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였던 것도 역시 하나님의 섭리였다(에 6:1-14). 하나님께서는 악한 왕들의
마음도 주장하신다. 시 76:10에 말하기를, "진실로 사람의 노는 장차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는 주께서 금하시리이다"라고 하였다.

 

  잠 21: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
이 말씀에 의하면, 인간은 미련하여 어디까지나 자기의 죄인됨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옳다고 한다.  인간이 자기의 죄를 보지 못하는 원인은, (1) 자기의 과거의 죄악을 잊
어버리기 때문이며, (2) 장차 지을 죄를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3)  사람
에게 대하여 잘못한것은 막연하게라도 느끼지만,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족한 것을  알
지 못하기 때문이며, (4)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제일 큰 죄인 줄 알지 못하는 까닭
이며, (5) 그 마음이 거짓되어 자기의 잘못을 변호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렘
17:9에 말하기를,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
리요"라고 하였다.
   인간은 이와 같이 스스로 옳다고 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렘 2:35). 그러나
그가 솔직하게 자기의 죄를 자백하면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잠 23:13; 요일 1:8-9).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동을
살피실 뿐만 아니라 그의 심령까지도 드려다 보시고 다 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는 인간의 외모보다도 도리어 그의 심령을 중요시 하신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사람
과 다르시다. 인간은 자기 심령의 죄악에 대하여는 문제시하지도 않고 외모만  아름답
게 꾸민다.  그것은 하나님앞에 도리어 가증스럽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사실을 알고,
스스로 자기를 인정하려는 생각은 아주 버리고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한다. 고전 4:3-5
에 말하기를,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
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
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하였다. 계 2:23 참조.

 

  잠 21:3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
구약 시대의 신자들이 하나님께 속죄 제물을 드린 것은, 신약 시대의 신자가 "내가 예
수를 믿나이다."락고 하는 신앙 고백과 같다. 그 이유는, 구약 시대의 속죄 제물은 예
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에 제물 드리는 자가 하나님
앞에 종교 윤리적 순종(의와 공평을 행함)을 그 주요 목적으로 가졌어야 한다. 그  이
유는, 행함이 없는 믿음(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함은 없이 제물만 드림)은 죽은  믿음
이기 때문이다. 약 2:17에 말하기를,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렘 7:22-23에 말하기를,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
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이것
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고 하였다. 여기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란 말씀은 "번제나 희생 때문에"라고 개역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귀
절의 의미는, 사람들의 제사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중점적으로  요구하시는  것이
제물 그것이 아니고 그들의 종교 윤리적 순종이라는 것이다. 이사야는 말하기를, 공의
를 행함이 없는 제사는 도리어 하나님께 무거운 짐이 된다고 하였고(사 1:10-17),  예
레미야는 말하기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을 등한히 여기면서 제사하는 것은 범죄  생
활에 안심을 주려는 것 밖에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렘 7:8-10). 사 58:4-7; 미 6:6-8;
슥7:5-7, 9-12 참조. 그러므로 사무엘은 말하기를,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였다(삼
상 15:22).  

 

  잠 21:4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 여기서는 "교
만"이 얼마나 무서운 죄라는 것을 역설(力說)한다. 사실상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
를 받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약 4:6). 교만은 이렇게 큰 죄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교만하면서 오히려 잘  하는
듯이 착각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교만을 아름다운 장식처럼 생각하며 거기에 대한
죄감이 전혀 없다. 시 73:6에 "교만이 저의 목걸이"라고 하였으니, 그거은 그들이  교
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자랑거리로 안다는 뜻이다.
   "눈이 높은 것"은, 사람이 자기 정도보다 지나치는 것을 얻으려고 바라 보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 자는 마음이 부허(浮虛)하여 자기가 벌써 그런 높은 존재인 듯이 자처
하기까지 한다. 이런 교만은 아주 위험한 죄악이기 때문에 성군 다윗은 말하기를, "여
호와여 내 마음이 아주 위험한 죄악이기 때문에 성군 다윗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치 못할 기이한 일
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
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라고  하였다(시
131:1-2). 사람들이 흔히 다른 사람들보다 높아지려는 마음을 가진다. 그런 심리는 교
만이다.  우리가 각기 자기 분야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최대한 발전하려는  대망(大望)
을 가짐은 좋다. 그러나 남들과 나 자신을 비교하는 입장에서 가져지는  야망(野望)이
라면, 그것은 교만이다.
   "마음이 교만한 것." 이것은 한층 더 무서운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유는, 마음 속
에 있는 교만은 밖에 나타나지 않고 잠재하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  교만은  다스리기
어렵다.  그것은 사람의 속을 부패케 하는 간교한 죄악이다. "악인의 형통"이란  것은
위에 해석된 교만한 자의 형통을 의미 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빌데부얼(Wildeboer)
은 이 귀절을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곧, "악인이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처지에서
형통하면 죄에 빠질 뿐이라"고 하였다(Die Spr che, s. 61). 교만한 자가 형통하게 되
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착취하는 모든 악행으로  되는  것이
다. 그러므로 그 결과는 그로 하여금 더욱 범죄하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잠  16:18
에 말하기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하였
다.

 

  잠 21:5,6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
라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 다니는 안개니라 -
여기서는, 물질적 축복을 받는 방법을 말 해주는 동시에, 파산(破産)하는 원인에 대하
여서도 말해준다. (1) 사람이 물질적으로 부유해지는 길은 근면(勤勉)이다. 근면한 자
는 우선 하나님의 말씀(창 3:19)을 지키는 자이니만큼 하나님 편에 선 자이다. 그러므
로 하나님께서는 으례 그 사람을 축복하실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거스려서는 진정
한 복을 받을 수 없다.  시 127:1에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
사로다"라고 하였다. (2) 사람이 파산하게 되는 이유는, 조급함과 거짓됨이다. 사람이
조급하면 한 가지 일을 오래 계속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직장에서  형통할
수 없다. 옛날에 초(楚)나라의 한 농부가 밭에 곡식을 심어놓고 그 곡식이 속히  자라
기를 성급히 원하던 나머지 곡식을 조금씩 뽑아놓았으므로 모두 다 말라 죽었다고  한
다. 사람들이 파산하는 또 한 가지 원인은 거짓됨이다(6절). 거짓은  마귀의  방법(요
8:44)인만큼 그 방법으로 된 것은 무엇이든지 화(禍)를 가져오게 마련이다.  그  이유
는, 마귀는 인간들에게 화를 주려고만 위주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불려 다니는 안개"(*             )란 말은 불려 다니는 입김이란 뜻이다. 그러므
로 참된 물질적 축복을 원하는 자들은 언제나 사업을 진실되이 하기를 힘쓴다. 미국의
유명한 실업가였던 와나메이커(Wanamaker)는 사업에 성공하는 비결에  대하여  말하기
를, "천천히 조금씩 되어가지만 건실하게 하라."고 하였다.  영국 격언에도 말하기를,
"평생 행복하려면 정직하라."고 하였다.

 

  잠 21:7

  악인의 강포는 자기를 소멸하나니 이는 공의 행하기를 싫어함이니라 -  이  귀절의
히브리어를 개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악인들의 강도 행위는 자기 자신들을  멸망시
키나니, 그 이유는 그들이 공의 행하기를 거절하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은 사상에 대
한 경고(警告)가 성경에 많이 있다. 합 2:10-12에는 말하기를, "네가 여러 민족을  멸
한 것이 네 집에 욕을 부르며 너로 네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담에
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 피로 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
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하였고, 잠 1:18-19에는 말하기를, "그들의 가만히  엎드
림은 자기의 피를 흘릴 뿐이요 숨어 기다림은 자기의 생명을 해할 뿐이니  무릇  이를
탐하는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너무 확실하기 때문에 동양 옛글에도 이런 것을 말하였다.  곧, 명심보감에 말
하기를, "내가 남을 허는 것이 나 자신에게 화가 되고, 남이 나를 헐 때에는 내게  복
이 된다"(我타虧是禍 人虧我是福)라고 하였고(明心寶鑑, 省心篇, 72),  또  말하기를,
"악을 행하는 사람은 마치 칼을 가는 숫돌과 같아서 갈리어 닳아 없어지는 것이  보이
지 않더라도 날이 갈수록 닳아 없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行惡之人 如磨刀之石 不見
基損 日有所虧)라고 하였다(明心寶鑑, 繼善篇, 9). 이 말 뜻은, 악인이 악을 행할  때
마다 그 자신에게 해를 입혀 마침내 멸망한다는 것이다. 남을 해롭게 하는 자는  결국
그것으로 자기 자신을 해한다. 명심보감은 다만 인류의 경험에 의하여 이만한  정도의
교훈을 남겼다. 일제 시대에 있었던 일인데, 북한 순한 지방에서 강도 두 사람이 장에
서 돌아오는 사람의 돈을 빼앗고 그를 죽였다. 그 중 한 사람이 술을 사러 갔는데  그
는 욕심이 생겨 동류 도둑을 죽일 마음을 먹고 술에 독약을 섞어 가지고 돌아왔다. 그
때 남아 있던 한 도둑은 자기 마음 속에 그 돈을 혼자 차지할 욕심이 생겨서 술을  사
가지고 돌아오는 동료를 쳐 죽였다. 그리고 그 술을 혼자서 마셨다. 이렇게 되어 결국
욕심을 부린 그 두 사람은 다 멸망하고 말았다.    

 

  잠 21:8

  죄를 크게 범한 자의 길은 심히 구부러지고 깨끗한 자의 길은 곧으니라 - 이  귀절
의 히브리어를 개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죄를 걸머진 사람의 행위는 구부러지고 또
이상스러우나 깨끗한 자의 행위는 솔직하니라." 여기 이른바 "죄를 걸머진  사람"이란
말(*             )은 거듭나지 않은 자연 인간을 가리킨다. 거듭나지 않은 자연 인간
은 어두움에 속하였기 때문에 거짓되다(렘 17:9). 그러므로 그는 자기 행위를  감추려
는 노력을 한다. 그것이 우리 본문에서 말한 바, "구부러진" 행동이다.  그런  행동은
하나님 보시기에 이상하다. 그와 반면에 "깨끗한 자", 곧 거듭난 자의 행위는 광명 정
대하여 자기의 죄도 자백한다. 그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
고 하나님 앞에서 살기 때문이다.  위의 두 사람의 대조를 요 3:19-21이 잘 보여준다.
거기 말하기를, "그 정죄는 이것이 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
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
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고  하였다.  "깨끗한
자의 행위가 솔직하다" 함은, 그에게는 음흉하게 숨기는 일이 없다는 의미이다.  그는
자기의 잘못한 것도 솔직하게 자복하므로 마음에 평안을 얻는다.  그 이유는, 그는 죄
를 자복하므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잠 28:13에 말하기를, "자기의  죄
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고 하였다.

 

  잠 21:9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리라  -
이 귀절의 히브리어를 개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다투는 여인과 함께 넓은 집에  사
는 것보다 지붕 한 모퉁이에 사는 것이 나으니라." 유대인의 가옥은 지붕이  평평하므
로 사람이 어느 한 모퉁이에 거쳐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엔 사람이 살 수 있는  시설
이 마련되어 있지 않음으로 그곳은 한지와 같아서 불편하다. 그러나 거기서 사는 것이
다투는 아내로 더불어 넓은 집에 사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부부 생활에 있어서  다
툼은 금물이다.  부릿지스(Charles Bridges)가 부부 간의 다툼은 없애는 비결에  대하
여 말하였는데, 그것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곧,(1) 부부 된 자들은 각자가  명심할
것이 있다. 곧, 감정을 내는 것은 해롭고 오래 참는 것이 이익이 많다. (2) 그 두  사
람은 서로 양보할 것이고 서로 버티지 않아야 된다. 서로 버티어 나가다가는 큰  일을
저지르도록 마귀에게 기회를 준다.(엡 4:27). (3) 남편은 아내에게  순종만  요구하면
안된다. 그는 상대방이 아내이고 노예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된다. (4) 아내가 명
심 할 것도 있으니, 그것은 그가 온유와 고요한 덕을 잃었을 때에는 그의 영광을 떠난
것이다. 벧전 3:4 참조.
   다투는 아내는 자기의 천직(天職)을 잊어버린 자이다. 그는 남편을 돕기 위하여 지
음이 되었고(창 2:18), 남편을 주장하려고 세상에 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투는  아
내들 중에 특별히 욥의 아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고난 중에도 신앙을  지키는
남편을 향하여 욕하기를,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
고 죽으라"고 하였다(욥 2:9).

 

  잠 21:10

  악인의 마음은 남의 재앙을 원하나니 그 이웃도 그 앞에서 은혜를 입지 못하느니라
- 이 귀절의 히브리어를 개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악인의 영혼은 남의 악을 원하나
니 그의 이웃도 그의 눈에서 은혜를 입지 못하느니라." 곧, 악인은 남의 범죄나  망하
는 것을 보기 좋아한다. 매캐인(William Mckane)은 말하기를, "자원하여 남들을  도우
려고 나가는 것이 인간의 본연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아 주장에서 탈출하지 못한
자는 감옥에 갇히운 자와 같고, 비인간화(非人間化) 된 자이다."라고 하였다(Humanity
consists in the Willingness to go  out  towards  other  men  and  to  contribute
towards social enrichment; the man who can not transcend his  own  assertiveness
is in a prison and is dehumanized.-Proverbs, 1970, p. 556).

 

  잠 21:11

   거만한 자가 벌을 받으면 어리석은 자는 경성하겠고 지혜로운 자가 교훈을  받으면
지식이 더하리라 - 위의 19:25의 같은 말 해석을 참조하여라. "거만한 자"(*     )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정도로 오만한 자이다. 그에게는 충고도 소용 없으니 다만  징벌
만이 필요하다. 잠 29:1에 말하기를,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
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이스라엘의 아합왕은  충성된  선지자
미가야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도리어 그를 가리켜 "흉한 일만"  예언하는  자라고
하였으며(왕상 22:8), 그가 길르앗라못으로 전쟁하러 가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그를
옥에 가두었다(왕상 22:27). 그리고 아합은 길르앗라못으로 올라가서 아람과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다(왕상 22:29-35). 큰 권세를 잡은 왕들도 하나님을 거스리며 교만해지
면 패망하는데, 거만한 평민은 그렇게 되지 않겠느가?
   "어리석은 자는 경성하겠고." 여기 이른바 "어리석은 자"(*      )란, 마음이 개방
된 자를 말함이니, 진리를 잘 알지 못하여 거만한 자를 따르는 자이다.  그런  자들은
바른 지도를 받으면 바로 될 수 있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거만한 자"만 벌하시고 그들은 돌이키신다. 그것이야말로 일벌 백계(一罰百戒)의  징
계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벌은 조금 주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역사상
심판(歷史上審判)을 실감하지 못한다. 롬 2:4 참조.
   "지혜로운 자가 교훈을 받으면 지식이 더하리라."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말씀
을 잘 순종하는 자이다. 그러나 그도 혹시 실수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때
에 그에게는 엄한 벌이 필요 없고 견책 정도로 족하다. 그는 옳은 충고를 진심으로 받
게 된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를 취한 죄 때문에 선지자 나단의 견책을 받았는데, 그
는 그 자리에서 진심으로 회개하였다. 나단의 꾸짖는 말에 (삼하 12:1-12), 그는 서슴
치 않고 즉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하였다(삼하 12:13).  이
렇게 서슴치 않고 죄를 회개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이다. 많은 시편을 저술한 영적  지
식의 사람 다윗은 회개의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그를 더 잘 알 수 있
는 지혜를 주신다.

 

  잠 21:12

  의로우신 자는 악인의 집을 감찰하시고 악인을 환란에 던지시느니라 - 곧,  하나님
께서 악인의 형편을 자세히 살피시다가 마침내 그를 벌하신다는 뜻이다. 그는, 악인을
얼른 처치하시지 않고 오랫동안 그의 회개하기를 기다리신다. 시 11:4 참조. 그의  기
다리심은 오랜 세월을 잡으신다. 그는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에게 주시려고 갈대아  우
르에서 그를 불러내셔서 가나안에 데려다 놓으시고도 다시 400년 동안 가나안  민족들
의 죄악이 차기를 기다리셨다(창 15:12-16). 롬 2:4 참조. 죄악을 극도로 채운 가나안
민족들은 마침내 멸망을 받았다. 그러므로 악인들의 멸망이 과연 하나님의 처사로  되
는 사실을, 단명(短命)하고 또 근시안적(近視眼的)인 인생으로서는 식별하기  어렵다.
만일 악인이 악을 행할 그때마다 즉각 하나님의 벌이 임했다면,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
님의 간섭인 줄 쉽게 깨달았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는  이유
는, (1) 하나님께서는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며 근심하게 하심을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
이며(애 3:33), (2) 인생이 죄 가운데서  죽는  것도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이며(겔
18:32), (3) 그는 인자하신 덕(德)을 소유하셨기 때문이며(롬 2:4), (4) 그는, 사람들
이 그의(하나님의) 행하심을 지식적으로 식별한 뒤에 비로소 믿음에 이르는 것보다 처
음부터 믿음으로 믿음에 이름을 원하시기 때문이다(롬 1:17). 우리가 어느 정도  하나
님의 행하심을 알 수 있고 또 알아야 되지만, 그것을 전적으로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
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다(전 5:2).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하여 우리로서
모를 것이 많아도 믿는 그것이 그를 사랑함이다.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함께  있다
고 하였다(고전 13:13). "믿는가?"의 문제는 동시에 "사랑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
다. 이 문제를 통과하는 자가 성도이다. 악도들은 자기들의 두뇌를 표준하여 하나님을
시험해 보려고만 하고 주님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전 16:22). 그러므로 인간은 그 작은 두뇌로 하나님을 알아보려
고만 하지 말아야 된다. 영적(靈的) 문제에 있어서 인간은 어둡고, 마귀의 궤계는  그
를 속인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계시 지식(啓示知識)을 어느 정도 알았으니, 이제
는 의지적(意志的)으로 결단을 내려 성경 말씀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야(희
생적으로 사랑해야) 된다. 그를 희생적으로 사랑하는 자는 그를 더욱 알게  되며,  또
더욱 믿게도 된다. 요 14:21 참조.

 

  잠 21:13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
을 자가 없으리라 - 마 5:7, 18:24-35; 약 2:13 잠 29:7 참조. 여기 "가난한 자"란 말
(*   )은 불쌍하게 된 자를 가리킨다. 이 귀절에 기록된 범죄자는 여러  종류일  것이
다. (1) 환란 가운데서 불쌍하게 된 자를 건져주지 않는 무정한 사람. 그런 무정한 자
는 자기도 환란을 만날 때가 있을 것을 내다볼 줄 모른다. (2) 남의 압제 아래서 불쌍
하게 된 자를 도와주지 않는 불의한 집권자. 그는 자기에게 부여된  권세가  의(義)를
행하기 위함인 줄 모르니 멀지 않아 그 권세를 빼앗길 것이다. (3)  경제적으로  극히
곤란한 자를 돌보지 않는 무자비한 부자.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면서도 탐심과  사치
와 향락에 사로잡혀서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는 자들은 그 심령이  마비된  자들이다.
그들의 장래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약 5:1-5).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이 말씀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
님의 비례식(比例式) 보응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기묘(奇妙)한 벌칙(罰則)은  하나님
의 전능하신 역사로만 성립된다. 그와 반면에, 불쌍한 자를 도와준 자는 주님께서  자
기 자신을 도와드린 것과 같이 여기시고 갚아 주신다. 마 25:31-40 참조.  영계(靈界)
의 파숫군들도 영적으로 비참해진 자들을 힘써 돌아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
도를 듣지 않으신다. 그들은 사람들의 육적(肉的) 참상만 느낄 뿐 아니라, 더욱  영혼
들의 참상을 볼 줄 알아서 그들을 찾으며, 치료하며,  영적으로  먹여주어야  한다(겔
34:16).

 

  잠 21:14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품의 뇌물은 맹렬한 분을 그치게 하느니라 - 이것은
뇌물을 주거나 받음이 유익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을 은밀하게 주는 이유도 그 일
이 광명 정대하지 못한 까닭이 아닌가? 그러면 이 귀절의 뜻은, (1) 재물을  좋아하는
부패한 인간의 습성을 지적하는 것이며, (2) 인간은 자기의 맹렬한 분노를 그의  더럽
고 저열한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과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심리적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곧, 사람이 불의한 뇌물을  받고도  분노를
그치는데, 광명 정대하게 천국을 거저 받은 신자들로서는 혈기와 악독과 정욕을  그쳐
야 된다는 것이다. 딛 3:3-7을 자세히 읽기 바란다.
   "뇌물"과 "예물"은 다르다. "뇌물"은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권
력 관계자에게 몰래 주는 재물을 의미한 것이고, "예물"은 사례(謝禮)의 뜻으로, 또는
상대방의 호감을 얻기 위하여 주는 선물이다. 예를 들면, 야곱이 에서에게  준  것(창
32:13-18),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준 것(삼상 25:18, 23), 야곱이 바로에게 보낸 것(창
43:11) 등이다.

 

   잠 21:15

   공의를 행하는 것이 의인에게는 즐거움이요 죄인에게는 패망이니라 - 이 귀절의 히
브리어를 개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공의를 행하는 것이 의인에게는 즐거움이요  불
의를 행하는 자들에게는 패망이니라." 곧, 의인은 의를 행하되 즐거움으로  행하지만,
불의한 자는 의를 행하면  패망을  당할 듯이 그것 행하기를  싫어하고  두려워한다는
뜻이다. 이 점에 있어서 나는 부릿지스(Charles Bridges)의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간
추려 보고자 한다. 곧,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성도들은 주님을 봉사하는 옳은 일에 기
쁘게 충성한다. 그들에게는 주님을 위한 봉사 이상으로 더 큰 기쁨은  없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성결해지는 것만을 가장 행복으로 생각한다. 사실상 신자가  거룩
한 생활을 할수록 하나님은 그에게 기쁨을 공급하신다. 따라서 주님을 위한 충성과 기
쁨은 동반한다. 이는 마치 불과 빛이 서로 동반함과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아버지를
위하여 의를 행하는 것이 기쁨이 된다는 것은 원천적(源泉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
활에서 발견된다(요 4:32-34). 시 40:8 참조. 우리는, 모든 의로운 일들을 행함에  있
어서 다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여주시기 때문에 기쁨과 평안을 맛본다.
   "불의를 행하는 자들에게는 패망이니라." 곧, 불의를 행하는 자들에게는  의(義)를
행하는 것이 마치 멸망으로 빠지는 것 같은 괴로움이란 뜻이다. 그들은  죄를  범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안다(잠 10:23, 26:19). 그런데,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며  남들을
가르친다고 하는 지도자를 가운데도 의를 행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극히 비판적으로 싫
어하는 자들이 많다. 그리스도께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하셨는데
(마 11:30), 그들은 그와 반대로 그것을 무겁게만 생각한다. 사실상 그들은  아직까지
하늘의 즐거움을 맛보지 못한 자들이며, 종교업자(宗敎業者)들임을 면치 못한다.

 

  잠 21:16

  명철의 길을 떠난 사람은 사망의 회중에 거하리라 - 여기 이른바 "명철의 길을  떠
난 사람"이란 말은 하나님의 진리에서 떠난 배교자(背敎者)를 가리킨다. 일단  하나님
의 진리를 믿는다고 하고 또 교회에서 훈련을 받은 자가 타락하면 아주 멸망을 받는다
는 말씀이 성경에 밝히 기록되어 있다. 마 5:13에 말하기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하였고, 히 6:4-6에는 말하기를, "한 번 비췸을 얻
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고 하였다. 벧후 2:20-22 참조.
   "사망의 회중"이란 말(*                 )은 "음령들의 회중"이라고 번역될 수 있
다. 음령(陰靈)들이란, 별세하여 지하 세계(地下世界)에 간 자들을 의미한다.  포레르
(Georg Fohrer)는 이것을, "어두움 세계의 유령들"(Schattenwesen)이라고  번역하였다
(Kommentar Zun Alten Testament, Das Buch  Hiob,  1963,  Gutersloher  Verlagshaus
Gerd Mogn, p.383). 사 14:9; 시 88:11; 잠 2:18, 9:18 참조. 그러면 "사망의 회중"이
란 말은 구원 못한 영들이 모인 곳을 가리킨다. 유 1:12-13; 벧전 3:19-20 참조.

 

  잠 21:17

   연락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
느니라 - 이 귀절의 히브리어를 개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연락을 사랑하는 자는 궁
핍의 사람이 되고, 술과 기름을 사랑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리라."  여기  이른바
"사랑하는 자"(*      )는, 쾌락을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고 그것에게 애착하여 떨어질
줄 모르는 자이다. 사람이 그렇게 되면 결국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깊은  죄
악에 빠진다(딤후 3:4). 그런 자는 실상 살았으나 죽은 자이다(딤전 5:6).  곧,  그런
자는 죽은 자라고 할만큼 사람으로서 가질 아무런 고상한 목적이 없고 따라서 참된 노
력과 활동이 없다. 그는, 쾌락을 위하여 자기의 몸과 인격과 재산과 기타  모든  것을
소멸시킨다. 그러므로 그는 가난해질 수 밖에 없다. 부릿지스(Charles Bridges)는  말
하기를, "이 세상 쾌락은 참으로 헛되다. 그것들이 우리를 떠나기도 하지만 우리가 반
드시 그것들을 떠날 때도 온다. 그것들 위에 우리의 행복의 소망을 두는  것은,  물결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그것들은 물결과 같이 우리를 깊은 절망에 쓸어넣는다."라
고 하였다(A Commentary on Proverbs, The Banner of Truth Trust, 1968, p.380).  만
일 기독 신자들이 쾌락을 사랑하게 되면, 그들은 기도에 무관심하게 되고, 하나님에게
마음을 드리지 않게 되어 우선 영적으로 죽는다(딤전 5:6). 그러므로 그들은 쾌락  사
랑하는 악한 근성을 극복해야 된다. 고대의 경건한 교회 정치가  키프리안(Cyprian)은
말하기를, "쾌락을 정복한 것이 제일 큰 쾌락이다."(The  greatest  pleasure  is  to
have conquered pleasure.)라고 하였다(De bono pudicitiae).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 "술"은 사람을 방탕하게 만
들고, "기름"은 그 시대의 사치품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을 사용하며 일락을 사랑하
는 자는 그 가산(家産)이 부요해질 수 없다. 사람이 자기의 허망한 지혜로 사욕을  위
하여 부자 되려고 애쓰는 것을 성경은 금지한다(잠 23:4).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은혜
로 물질을 옳게 모은 것은 정당하고 또 그에게 복이 된다.

 

  잠 21:18

  악인은 의인의 대속이 되고 궤사한 자는 정직한 자의 대신이 되느니라 -  "대속(代
贖)이 되고"란 말은 여기서 엄격한 의미의 속죄를 가리키지 않는다.  이것은,  악인이
의인을 죽이려다가 도리어 자기가 죽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멸망시키려고 하다가 도리어 자기들이 홍해에서 멸망을  당하였다(출
14:27-28). 이사야는 그 사실을 가리켜 말하기를, "대저 여호와는 네 하나님이요 이스
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고 하였다(사 43:3). 사울도 이스라엘의 임금으로서  다윗을  여러
차례 죽이려고 하였으나 도리어  그  자신이  블레셋과  싸우다가  죽임이  되고(삼하
31:3-4), 다윗은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었다(삼하 5:3).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하다가 도리어 그 자신이 죽임이 되었다(에 6:1-7:10). 의인을 죽이려던 악인들이  이
렇게 뒤바뀌어서 그 자신들이 죽임이 된 것은 역사상에 많이 있다. 악인이 의인을  죽
이려고 각양 모략을 꾸미는 것은 너무 악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거기에
간섭하셔서 심판하신다. 이런 심판을 표현하기 위하여 성경은 말하기를, "저가 웅덩이
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그 잔해는 자기 머리로 돌아오고 그  포학
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하였고(시 7:15-16), 또 말하기를,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라고  하였다(시
9:15-16).

 

  잠 21:19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  "광
야에서 혼자 사는 것"은 아무런 위로도 없고 사회적인  상부상조(相扶相助)의  편이를
아주 떠난 처지이다. 위로와 도움을 위하여 있는 아내가 도리어 남편과 다투기만 한다
면, 그것이 남편에게 그렇게 괴롭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그녀가 가장 가까이 연합되
어 있으면서 그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부부의 다툼에 관하여 잠언 저자는 아내 된 자의 잘못에 대하여서만 말한다.  그러
나 그가 이 점에 있어서, 남편 된 자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생기는 가정 불화에 대해서
는 언급하지 않은 것 뿐이다. 그는, 그것을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추론(推論)하도록
한 것이다. 부부의 분쟁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생기는데 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일반적으로 도덕적 책임을 이행하지 아니함. 부부는 서로 상대방의 단점을 이해하
며 오래 참음으로 용서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지키지  않는
부부는 서로 다투게 된다. (2) 성격상 결함이 있음. 부부 두 사람중 어느 한편이 쉽게
노하는 성질이 있으면 그 가정에 분쟁이 생긴다. 이런 성격상 결함이 있는 자는  자기
자신을 경계하며 쳐 복종시키도록 힘써야 될 뿐 아니라, 특별히 그  성질이  고쳐지기
위하여 간절히 기도해야 된다. 앞에 있는 9절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3) 여성(女性)의
연약에 대한 남자들의 무지. 남성은 솔선적인 반면에 여성은 수종적(隨從的)이고 피동
적이다. 벧전 3:7에 "더 연약한 그릇"이라고 한 말씀이 이 뜻이다. 그러므로 부부  사
이에 충돌이 있을 경우, 남편은 화해(和解)를 위한 아내의 교섭 행위를 기다릴 것  없
이 자신이 솔선적으로 평화의 조성자(造成者)가 되어야 한다. 혹 아내가 그 불화의 원
인자라 할지라도 그는 유쾌히 사과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것이 여성의 자연적 성격
이다. (4) 천직(天職)과 인권(人權)에 대한 여성의 몰이해(沒理解). 인권에  있어서는
남녀가 동등이지만("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벧전 3:7),  천직(天職)에
있어서는 남녀가 다르다. 곧, 남자는 지도적 위치에 있지만 여자는 종속적(從屬的) 위
치에 있다(딤전 2:11-14). 그러므로 아내 된 자들은 항상 자기의 천직대로 수종적  위
치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된다. 아내 된 자들은, 어떤 일에 있어서 자기가 옳
고 남편이 틀린 경우에도 온유하게 그 남편에게 설명하는 것은 좋으나 분노를  발하면
안된다(벧전 3:4).

 

  잠 21:20

   지혜 있는 자의 집에는 귀한 보배와 기름이 있으나 미련한 자는 이것을 다 삼켜 버
리느니라 - 빌데부얼(D.G. Wildeboer)은 이 귀절의 뜻을 도약하여 말하기를, "지혜 있
는 자는  검소하고  미련한  자는  낭비한다."(Der  Weise  ist  sparsam,  der  Thor
verschwenderisch)라고 하였다(Kurzer Hand-Commentar Zun Alten Testament, Spr che,
1897, s.62).
   "지혜있는 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이다.  그는  사욕(私
慾)을 위하지 않고 주님을 위하여 물질을 저축한다. 그가 주님을 위하여는 물질을  아
낌 없이 바치지만 자기 자신을 위하여 그것을 낭비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 점에  있어
서 주님을 본받는다. 주님께서는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5천명  이상
을 먹이신 후 제자들더러 부스러기를 모으라고 하셨다(요 6:12).  우리가  부스러기나
폐물을 이용함이 물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행위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
는 자, 곧 지혜 있는 자의 행위이다.
   "미련한 자는 이것을 다 삼켜 버리느니라."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의
낭비, 또는 사치 행위를 가리킨다. 성경 말씀은 사치를 정죄하고 검소한 생활을  장려
한다(사 3:16-24; 딤전 2:9; 벧전 3:3-4). 낭비와 사치는 하나님을 모르는 도덕가들도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 이유는, 이런 지식 정도는 공동 은혜에 속하기  때문이
다. 옛날 동양의 실존주의 철학자 노자(老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오색의
찬란한 빛은 사람의 눈을 소경으로 만들고, 오음의 아름다운 소리는 사람의 귀를 멀게
만들며, 오미의 좋은 맛은 사람의 입을 버려놓고, 말을 달려 사냥하는 유쾌한 일은 사
람의 마음을 미치게 만들며, 희귀한 물품은 사람으로 하여금 해로운 일을 하게  한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배를 위하고 눈을 위하지 않는다. 그래서 저것(감각적인  쾌락)을
버리고 이것(배부른 것)을 취한다"(五色令人目盲 五音令人耳聾 五味令人 口爽  馳騁田獵令人心 發狂難得之貨令人行妨 是以聖人爲服不爲  目故玄彼取此)라고 하였다(道德篇, 第十二章). 이러한 노자의 교훈은 호화로운 생활을 배척하고 실속 있는 검소한 생활을 택하라는 것이다. 성인은 배를 위한다는 말이 바로 실속 있는 수양을  힘씀을  가리킨다. 우리는, 노자의 신관(神觀)이 진리가 아님을 알기 때문에 그의  철학을  비판해야 된다. 그러나 신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쾌락과 사치를 따르는  자들은,  참 하나님을 몰랐던 노자에게도 부끄러움을 당해야 된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하던 요나는, 이방인(같은 배에 탄 사람들과 선원)에게서도  부끄러움을 당하였다(욘 1:6-7).

 

  잠 21:21

  의와 인자를 따라 구하는 자는 생명과 의와 영광을 얻느니라 - 여기에 이른바  "따
라 구하는 자"란 말(*     )은 계속적으로 추구하는 자를 가리킨다. "의"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올바른 행함을 가리키고, "인자"는 사람을 사랑함이다. 의만  있고  사랑이
없으면 나약과 문란으로 떨어지기 쉽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義와 仁慈)는  하나님을
섬기는 인격에 구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두 가지의 겸전(兼全)은 전심으로 기
도하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을  간절
히 사모하여 따라 구하는 자만이 받게 된다. 신자들이 은혜 받기를 원하면서도 낙심하
지 않고 끝까지 은혜를 기구하는 그 자리에 머물지 못한다. 은혜 받기 위하여  성의있
게 구하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지 않는다. 성의 있게 구하지 않고  받고
자 하는 자는, 심는 수고를 하지 않고 거두기를 원하는 자와 같으니,  그는  하나님을
농락하는 자(만홀히 여기는 자)이다. 갈 6:7-9에 말하기를,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
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
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
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였다.
   "의와 인자를 따라 구하는 자는 생명---을 얻느니라." 이것은  하나님을  소유하게
됨을 말함이다. 생명은 하나님께만 있다. 그리고 "의"를 얻는다는 것은 역시 하나님과
관련된 뜻을 가졌으니, 곧, 하나님의 의(義)를 얻는다는 것이다(롬 1:17). 그것이  구
원이다(롬 10:9-10). 그리고 "영광"이란 것은 내세를 의미한다. 롬 2:7, 10 참조.  이
렇게 신구약 성경은 어디서든지 진실한 신자의 종말이 영광으로 들어가는 것임을 일관
적으로 주장한다. 하나님과 연합한 자는 죽을 때에 오히려 소망이 있다. 잠 14:32  참
조.

 

  잠 21:22     

  지혜로운 자는 용사의 성에 올라가서 그 성의 견고히 의뢰하는 것을 파하느니라  -
켐제르(B. Gemser)는 이 귀절의 내용에 대하여 말하기를, 지혜는 힘보다 더  유력하다
는  말씀이라고  하였다(Weisheit  vermag  mehr  als  kraft.-Handbuch  Zum   Alten
Testament, Sp che Salomos, 1963, J.C.B. Mohr, T bingen, p.81).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이 힘보다도 지혜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물론이고 세속적인 병법(兵
法)에서도 주장하는 바이다. 우리는,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전쟁하는데 있
어서 지혜를 강조한 사실을 볼 수 있다. 그는 주로 복병(伏兵) 전술을  사용하였고(수
8:12), 또 기습(奇襲) 전략도 사용하였다(수 10:9, 11:7). 그리고  우리는,  기드온의
전술이 힘보다도 모략을 사용한 사실에 대하여 흥미를 가진다.(삿 7:9-23). 여기 기록
된 기드온의 전술은, 두말 할것 없이 온 군대로 하여금, 다윗의 전술에 있어서도 힘보
다도 지혜에 의하여 승리한 사실을 볼 수 있다. 그는 물맷돌 한 개를  가지고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쳐 죽였다. 그것은, 그가 다년간 양을 치면서 곰과 사자를 물맷돌로 쳐
죽이던 그의 연단된 기술에 의하여 승리한 것이다. 연단된 기술은 역시  지혜에  속한
다. 삼상 17:31-49 참조. 그 뿐만 아니라, 다윗의 시글락을 정복한 아말렉 군대를  쳐
이겼는데 그것도 그의 지혜에 의하여 된 것이다. 그는, 그 때 아말렉 군대에서 탈출한
애굽 사람 한 명을 만나서 잘 대접하고 그의 인도를 받아 아말렉 군대를 기습하여  이
겼던 것이다.(삼상 30:1-20). 이것이야말로 정보 전술이다.
   그와 반면에, 삼손은 지혜 없이 힘만 가지고 블레셋 군대와 전쟁하다가 결국  최후
적 승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는 힘보다도 지혜를 사용한 블레셋 군대에게 패배를 당
했던 것이다. 블레셋 군대가 삼손의 애인 들릴라를 통하여 삼손의 힘의 비결을 정탐케
하여 그를 무력하게 했으므로 말미암아 마침내  삼손은  힘을  잃어버리게  되었다(삿
16:4-21).
   우리는 동양의 춘추 시대에 손 무자(孫武子)가 저술한 병법에서 역시 전쟁에  있어
서 지혜가 제일이라는 글들을 보게 된다. 곧, 전쟁하기 전에 먼저 지식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적을 알고 또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
己 百戰不殆)라고 하였고(孫子兵法, 玄岩社, 1969, p.4). 또 말하기를, "대체로  전쟁
하는 방법은 적군을 온전한 채로 두고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요"(凡用兵之法
全國爲上)라고 하였다(같은 책, p.49). 손 무자의 말들은,  무엇보다도  지모(智謀)에
의하여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제일이라는 주장이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서 가르진 지혜란 것과 손 무자의 가르진 지모가 같은  내용
의 말이라고 보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르친대로 지혜란 것은 무엇보다도  하
나님을 믿는 신앙을 전제로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잠  1:7).
모든 힘과 능력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처럼 지혜로운 자는 없다. 하
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물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도 하거니와, 그의 심리는  위험한
일들 앞에서도 평안하고 침착하고 또한 담대해질 것이니, 그는 작전할 때에도  유력해
질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잠 21:30-31에 말하기를, "지혜로
도, 명철로도,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치 못하느니라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
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고 하였다. 이와 반면에 손 무자의 병법은,  여호와
를 알지도 못한 순 인간의 지혜를 말한 것 뿐이다.
   우리 본문운, 이 세상 국가들의 전쟁 비결에 대하여 말하면서, 사실상 신자들의 영
전(靈戰)의 방법을 말하기도 한다. 마 12:29; 눅 11:21-22, 14:31 참조. 영전은  물론
지혜에 의하여 승리를 가져오는 것이고, 신자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마귀를 이기는 것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전신갑주(하나님의  전신갑
주-엡 6:13)를 입음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전신갑주는 그리스도 중심으로 성립된 것이
다. 곧, 그리스도의 진리(허리띠), 그리스오의 의(흉배), 그리스도의 복음(신),  그리
스도를 믿는 믿음(방패), 그리스도의 구원(투구), 그리스도의 말씀(검)등으로  성립되
었다(엡 6:14-17). 신자는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의해서만 마귀의 진(陳)을 파괴시킨다
(고후 10:3-4).


  잠 21:23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란에서 보전하느니라 - 사람의 말은 행실에 지
지 않게 사회 생활에 큰 영향력을 준다. 그러므로 항상 말조심해야 된다. 약 3:2에 말
하기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하였고,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한다고 하였
고(잠 13:3), 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인하여 그물에 걸린다고 하였다(잠 12:13).  다윗
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라고
하였다(시 141:3). 유교의 명심보감(明心寶鑑)에도 말하기를, "입은 사람을 상하게 하
는 곳에 있으며, 말은 혀를 베는 칼이다. 입을 막고 혀를 깊이 감추면 몸은 어느 곳에
있으나 편안한 것이다"라고 하였다(言語篇, 5). 이제 우리는, 우리 사회가 언어에  있
어서 얼마나 부패(腐敗)한것을 바로 알고 이를 고쳐야 한다. 우리 사회에 있어서 부패
한 언어는 여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1)  조급한 말. 사람이 조급하면 범사에 실패한다. 그러므로 위대한 사람  모세는
민중의 난제를 해결하려 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였고(출  14:15,
15:25), 미국의 위대한 정치가 다니엘 웹스터(Daniel Webster)는 어려운 문제  해결을
위하여 찾아온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로 하여금 그 문제를 가지고 하룻밤 잠자게  하
여 주시요."라고 하였다고 한다. 잠 29:20에 말하기를,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고 하였고, 잠 18:13에는 말
하기를,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고 하였으며, 또
잠 21:5에는 말하기를,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고 하였다.
   (2) 한담.  사람들은 남의 신분에 관하여 조심성 없이 폄론함이 보통이다.  이것은
잔인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남의 신분에 대한 폄론(貶論)은 그 인격에  치명상(致
命傷)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문제를 그렇게 쉽사리 거론할 수 있는가? 잠 11:13에
는 말하기를,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과 하였다.
   (3) 아첨하는 말.  옛날부터 아첨하는 행동은 정죄되어 왔다. 그런 무리는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指鹿謂馬) 하는 상관의 말도 응종하며 아첨한다. 그들은 진리와 사실
을 직언(直言)하지 않는다. 이런 무리가 나라를 망쳤고 사회를 망쳤다.  그러므로  잠
26:28은 말하기를, "아첨하는 말은 패망하느니라"고 하였으며, 또한 곧은 말로 사람을
책망해 주는 것이 선하다고 하였으니, 곧,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
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고  하였
다(잠 27:5-6). 선한 임금 다윗은 의인의 책망을 달게 여겼다(시 141:5).  유교에서도
가르지기를, "충성된 말이 귀에는 거스려도 행실에는 유익하다"(忠言述耳利於行)고 하
였다.
   (4) 거짓말.  거짓말을 하는 자는 남을 해롭게 할 뿐만 아니라 우선  자기  자신을
헛된 자로 만든다. 헛된 자는 결국 빈 껍데기가 된다. 그것은 무너진 인격이다.  사람
이 거짓으로 재물을 모르는 것은 자기에게 해롭다. 성경에 말하기를, "속이는 말로 재
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다니는 안개니라"고 하였고(잠 21:6),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도 피치 못하리라"고 하였다(잠
19:5). 잠 19:22 하반에는 말하기를,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나느니라"고 하
였다.
   (5) 말다툼.  한국 사회에는 아주 해로운 말다툼이 많다. 우리가 길을 지나가는 중
에나, 혹은 큰 길에서, 혹은 가정에서 말다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이 점에서
명심할 것은,    말다툼은 흔히 작은 문제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이 많다는 점이다. 잠
17:14에 말하기를,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
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고 하였다. 그 뿐 아니라,    말다툼은 쉽게 노하는  자들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그런데 쉽게 노하는 자는 참으로 어리석다. 그가 노함으로 말미암
아 자기의 짐승 같이 사나운 성질을 드러내며, 상대방으로 하여금 더욱  악한  감정을
가지게 하지 않는가? 잠 12:16에는 말하기를,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
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고 하였고, 잠 19:11에는 말하기를, "노하기를  더
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고 하였다.
   (6) 우직(愚直)한 말.  사람이 정의(正義)를 위하여 곧은 말을 한다고 하면서 과격
하게 하거나 무례하게 하면 이는 우직이다. 잠 15:1에 말하기를,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고 하였다. 우직한 사람은 아직도 자기에게 그만한 정도의 인격의  결함
이 있는 줄 알고 온유를 배워야 한다.
   (7) 음해하는 말.  이것은 남이 모르게  혀로써  남을  해롭게  함이다.  어거스틴
(Augustine)의 생활 표어는, "임석(臨席)하지 않은 자에 대한 말을 하지  말  것"이란
것이었다. 롬 1:29에, "수근수근하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8) 자랑하는 말.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랑하기 좋아한다. 그러나 자기 자랑은  언
제나 자기의 인격을 자기도 모르게 비열하게 만든다. 시 12:3에 말하기를,  "여호와께
서---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자기 자랑을 언제나 계속하
는 자는 마침내 천벌을 받게 된다.
   (9) 담은 입술.  사람들 가운데는 마땅히 할 말을 안하는 자들이 있다. 그것도  죄
악이다. 사 56:10-11에 말하기를, "그 파숫군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이 개들은  탐욕
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라고 하였다.   

 

  잠 21:24

  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라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만으로  행함이
니라 - 이 귀절의 히브리어를 개역(改譯)하면 다음과 같다. 곧, "교만하고 참람(僭濫)
한 자를 가리켜 희롱하는 자니라." 빌데부얼(D.G. Woldeboer)은, 여기 "희롱하는  자"
란  말(*     )을  "자유주의자"라는  의미로  해석하였다(24  gibt   eine   scharfe
Definition des in den Spr chen so oft vorkommenden Terminus *      der  Spotter,
Freigeist.-Kurzer Hand-Commentar Zun Alten Testament, Die Spr che, 1897,  s.62).
여기 이른바 "희롱하는 자"는 계시된 종교나 예언보다 자기를 높여 교회로 하여금  성
경에 대한 파괴적 비평을 따르게 하려는 자이다(Dilitzsch). 잠언의 저자는 이런 자를
"교만하고 참람한 자"(*            )와 동일시(同一視)하였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으로 믿지 않는 파괴적 비평가들은 사실상 이렇게 교만하고 또 참람한 자들이다. 그들
은, 자기들의 이성이 진리 판단의 절대적 표준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이성이 어떻게
절대이겠으며, 전지(全知)이겠는가? 사람이 젓가락으로 태산을 옮길 수 있겠는가?  유
1:10에 말하기를,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도다 또  저
희는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고  하였다.  현대의
많은 교파들이 계시 종교(啓示宗敎)의 진수(眞隨)인 초자연주의(超自然主義)를 버리고
하나의 인도주의(人道主義) 단체와 같이 되어 버렸는데, 이와 같은 타락은 자유주의자
들의 그릇된 신학 사상 때문이다. 그들의 신학은 성경에서  초자연주의를  제거하려고
전력한다. 그들의 이와 같은 노력은 기독교를 없애려는 것이다. 기독교는  초자연주의
로 구성되었는데, 거기서 초자연주의를 제거하면 남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비유컨데
돌집에서 석재(石材)를 모두 뽑아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
신 참 종교(기독교)에는 초자연주의가 있어서 구원을 공급한다. 우선  성경의  첫말씀
(창 1:1)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였으니, 이 말씀이  초자연주
의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 부분(계 22:20)에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라고 한  말씀
도 초자연주의이다. 이 밖에 성경에 있는 많은 말씀들이 초자연주의이다.  그  가운데
이적(異蹟) 기사(奇事)는 물론 그렇고, 심지어 그 윤리 도덕도  인본주의(人本主義)의
것이 아니고 신본주의(神本主義)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도 초자연주의를  근본으
로 하고 나온 윤리 도덕이다.

 

  잠 21:25,26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나니 이는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 어떤 자
는 종일토록 탐하기만 하나 의인은 아끼지 아니하고 시제하느니라 - 이 귀절들의 히브
리어를 개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게으른 자의 간절한 소망이 그를  죽이나니  이는
그의 손이 일하기를 거절함이니라 그는 종일 탐심을 부리나 의인은  아끼지  아니하고
구제하느니라." 게으른 자는 각양 간절한 소원을 가지면서 그것을 성취할 방법인 노동
은 거절한다. 따라서 그는 여러가지 부정(不正)으로 그 소원을 성취하고자 할 것이다.
그 부정은 남을 속임, 남의 것을 도적함, 또 혹은 남을 의뢰함 등이겠다. 엡 4:28  참
조. 이것들은 모두 다 도적 행위니, 이로 인하여 그 자신의 영혼이 망한다. 마귀는 게
으른 자의 마음 속에 깃든다. 탐식과 정욕은 게으른 자의 마음 속에서 더 강하게 움직
인다. 그 이유는, 그는 그의 정신과 정력을 노동에 기울여 붓지 않고 쾌락에만 집중시
키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의인은 구제를 힘쓴다. 물론 그가 검소하게 살면서 노동을 힘써서  재
물을 모았기 때문에(잠  10:4)  구제  행위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빌데부얼(D.G.
Wildeboer)은, 본장 21절과 26절에 근거하여 말하기를, "경건한 자는  물질을  모으기
위하여 검소할 뿐 아니라 역시 물질을 쓰는데 관대하기도 하다."(Der Fromme aber ist
nicht allein sparsam V. 20, sondern auch mildth tig, vgl. 11:24,  14:21,  19:17,
22:9)라고 하였다(Kurzer Hand-Commentar, Die Spr che, 1897, s.62). 경건한 자가 물
질을 모으는 목적은 처음부터 남들을 도와주려는데 있다. 그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
다 복이 있다"는 말씀(행 20:35)대로 행하는 자이다.

 

  잠 21:27

 악인의 제물은 본래 가증하거든 하물며 악한 뜻으로 드리는 것이랴 - 여기  "악인"
이란 말은 회개 하지 않는 악인을 가리킨다. 그가 회개하지 않았으니만큼 하나님의 미
워하시는 악을 마음 속에 그대로 품고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다. 그것은, 표리 부동(表
裏不同)한 의식적 제사(儀式的祭祀)에 불과하다. 그것은, 겉으로  하나님을  순종하는
체 하면서 속으로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행동이니, 일종 아첨이다. 잠 15:8 해석 참조.
   "하물며 악한 뜻으로 드리는 것이랴." 곧, 악인이 계획적으로 자기의 악을  성취하
기 위하여 제사 행위를 취한다는 뜻이다. 이 점에 대하여 부릿지스(Charles  Bridges)
는 말하기를,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허락을  받으려고
제사를 드렸고(민 23:1-3, 14-15), 압살롬은 반역의 목적으로 헤브론에 가면서 그것을
가리우기 위하여 하나님께 제사하러 간다고 하였다(삼하 15:7-12)."라고 하였다. 바리
새인들은 자기들의 생계와 출세를 위하여 하나님을 섬긴다는 형식을 갖추었다. 그것은
종교 업자(宗敎業者)들의 악행이다. 그들은, 자기들 자신의 사리사복을 위하여 제사를
이용한 셈이다. 이런 종교 업자들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많이 있다. 이들은 모두 미
련한 자들이다. 누구든지 사리사복을 취하려면 애당초 자기 취미대로  자유업을  택할
것이지, 무엇 때문에 가면(假面)을 쓰고 평생 하나님의 것을 도적해 먹을 것인가?  그
것이 멸망을 자취하는 큰 죄악인 줄 모르는가? 마 23:1-36 참조.

 

  잠 21:28

 거짓 증인은 패망하려니와 확실한 증인의 말은 힘이 있느니라 - 이 귀절의  히브리
어를 개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거짓 증인은 패망하려니와 듣는 사람은 영구히 강하
게 일하느니라." "거짓 증인은 거짓말을 꾸며서 증거하는 것이 자기의 영업이다. 그는
이렇게 양심에 화인 맞은 것 같이(딤전 4:2) 자기의 거짓말에 대하여 가책을 못  느낀
다. 그는 거짓말 하는 데 즐거움을 느끼는 셈이다. 그것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고전
13:6) 참된 성도와 정반대 되는 생활이다(Charles Bridges).
"듣는 사람"(*              )이란 말은, 남의 말을 유심히 듣는 사람(Wildeboer, Ein
Man, der genau h rt), 곧, 증거가 확실한 진리만 받아들이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확실한 근거를 잡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참 증인의 자격이다. 특별히 복음의  증
인은 성경을 깊이 상고하므로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딤후 3:14) 늘 힘있게  말
한다. 그는 그 진리를 위하여 생명까지 바친다(눅 1:1-4, 10:40-42; 요일 1:1-4).  이
런 증인의 말은 영구히 변치 않는 참인 것만큼 그것은 영구히  강하게  전파된다.  히
11:4 참조. 고후 4:13에 말하기를, "우리도 믿는고로 또한  말하노라"고  하였다.  잠
12:19 참조.
      
  잠 21:29

  악인은 그 얼굴을 굳게 하나 정직한 자는 그 행위를 삼가느니라 - "악인은  얼굴을
굳게 한다"는 것은, 그가 악을 행함에 있어서 아무런 기탄도 없을 뿐 아니라 동요함이
없다는 뜻이다. 그는 악을 행하는데 철면피이다. 그와 반면에 "정직한 자"(*      )는
늘 조심한다. 그는 영적으로 늘 깨어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그는  무엇
보다도 자기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지 않았는가 하고 자아 반성을 힘쓰며, 하나님  앞
에 진실히 회개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위험을 예민하게 느끼고 경계한다. 곧, (1) 일
을 힘쓰다가 기도에 게으르기 쉽다는 것. (2) 쉰다고 하다가 게을러지기  쉽다는  것.
(3) 사랑을 주장하다가 의를 잊어버리기 쉽다는 것. (4) 의를 주장하다가 온유의 덕을
잃기 쉽다는 것. (5) 겸손을 힘쓰는 것이 좋으나 나약해지면 안된다는 것. (6) 그리스
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전적으로 믿지 않는 자로서 허송 세월 하기 쉽다는  것.  (7)
남을 가르치기는 하면서 자기 자신을 가르치지 않는 것. (8) 남의 허물을  교정시키기
위하여 충고함은 필요하나, 그러다가 자신은 자기도 모르게 교만해지기 쉽다는 것  등
이다. 스펄죤(Spurgeon)은, 한번 런던 거리를 걸어가다가 도중에서 걸음을 멈추고  발
을 옮기지 않은 적이 있었다. 그 때에 동행자들이 그 이유를 물으니,  그느  대답하기
를, "하나님과 나 사이에 구름이 가리운 느낌이 있어서 염려된다."라고  하였다고  한
다.

 

  잠 21:30,31

  지혜로도, 명철로도,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치 못하느니라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
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 여기서는 "지혜"나 "명철"이나 "모략"이
란 말들이 하나님 경외(敬畏)와 관계된 것이 아니고 순 인간적인 지모(智謀)를 의미한
다. 사람들이 종종 인간의 지모를 가지고 성도를 해하려 한다. 그러나 성도가  하나님
편에 있는 동안 그들의 계획은 성사되지 못한다. 그는 여호와께 피한 것 같이  전적으
로 의지하였으니 만큼 여호와는 그를 보호하신다. 여호와는 전적으로  그를  의지하는
자를 실패케 하시는 법이 없으시다(롬 10:11). 시 11:1, 27:1-5 참조.
   사람들이 심지어 병력(兵力)을 가지고도 여호와를 전적으로 의지한 자를  패망하게
할 수 없다(31절).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병력 앞에서는 떤다.
   그러나 그것을 의지함보다 여호와를 의지함이 낫다. 우리는, 내가 여호와를 의지하게 된 것이 벌써 기적이요 은혜요 행복인 줄 알아야 된다. 그를 의지한다는 것은 물론 전적으로 의지함을 말함이고, 단지 관념론적인 것도 아니며 이론적인 것도 아니다. 오늘날 교계에는 단지 관념론적으로 믿는다는 지도자들이 많다. 그런  자들이  지식층에 더욱 많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인도하지 못하고 도리어 교회로 하여금  죽음의 골짜기에서 시간만 허송하도록 만든다. 왜 그들은 자신이 진실하게 신앙으로  살지 않으면서 남들을 지도해준다고 붙잡고 놓지 않는가? 마 23:1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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