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19:1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입술이 패려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 - 이 귀절의
히브리어는 다음과 같이 개역되어야 한다. 곧, "진실되이 행하는 가난한 자는 입술이
사곡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라고. 여기서는 주로 진실(* )과 사곡(* )
이 서로 대조된다. 여기 "진실"이란 말은 표리(表裏)가 일치함을 가리키는데,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생활의 특징이다. 하나님 앞에 사는 생활은 심적 태도와 행위의
일치를 가져온다(Georg Fohrer,Stets bedeutet---die rechte Ganzheit des
Menschen-sowohl die Ganzheit des Gottesverhaltnisses als auch die
bereinstimmung von ausserem rechten Handeln und innerer rechter
Haltung.-Kommentar Zum Alten Testament, Das Buch Hiob, 1963, Gutersloher
Verlagshaus Gerd Mohn, p.73).
그리고 "사곡"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는 구부러진 것(crooked)을 의미하는
데(잠 10:9), 언사에 있어서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의곡(의曲)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22절 참조. 이렇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자는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이다. 따라서 그는 미련한 자이다(시 14:1). 시 139:1-12; 계 2:23 참조.
여기 진술된 두 가지의 비교 표준은 하나님이다. 가난한 자이지만 그가 하나님을
소유하였으면 그는 천하를 소유한 것보다 행복하다. 성경의 말씀은 믿음이 부요한 것
을 무엇보다 행복한 것으로 인정해준다(약 2:5). 그와 반면에 하나님을 소유하지 못한
자는 부자라 할지라도 불행한 자이다(눅 12:16-21).
"진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재물을 얻음보다 자기 영혼(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
에서 합당한 자 됨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것이 사리(事理)에 대한 올바른 평가이
다. 그는, 가난해질지언정 거짓말로 재물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거짓말
로 재물을 얻는 것은 자기 자신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물보다 영혼
이 더 귀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마 10:28 참조, "사곡한 자"는 이 진리를 모르고 행
하니 미련하다.
잠 19:2
지식 없는 소원은 선치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그릇 하느니라 - 이 귀절의 히브
리어를 개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또한 영혼이 지식 없음이 좋지 못하고 발이 급한
자는 범죄하느니라." 여기 첫머리의 "또한"(* )이란 말은 윗절 하반에 있는 "미련
한 자"의 더욱 심각한 화근(禍根)을 지적하기 위한 표현이다(Charles Bridges). 여기
에 관설된 "영혼"(* )이란 말은 사람의 외부, 곧 육신과 대조되는 내부적 존재로
서 "생명"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 대해서 사용될 때에는 보통으로 생
명의 본질과 가치를 염두에 두고 말한다. 그 본질과 가치는 영원한 것이다(마 10:28).
영혼이 가져야 할 지식은 영적 지식, 곧 하나님 중심한 지식이다. 부릿지스(Charles
Bridges)는 영적 지식 없는 영혼의 다섯 가지 불행을 지적하였으니, 그것은 참고할 만
하다. 곧, 영적 지식이 없는 영혼은 (1) 생활의 참된 지침을 모름(Man has no
directory for his ways).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산다.
(2) 그는 죄악 처분의 방법을 모름(He has no remedy for his sins). 다시 말하면 그
는 그리스도의 대속, 신앙, 회개 등의 진리를 모른다. (3) 그는 환란을 당하여 도움
받을 수 있는 사실, 그것으로 인하여 사람이 겸손해지는 사실, 환란 중에 성화(聖火)
의 과정을 밟게 되는 사실 등에 대하여, 그는 모른다. (4) 그는 책임 실행의 힘이 무
엇임을 모름(He has no strength for his duties). 그는 자기의 힘 밖에 모른다. 그러
나 인간의 힘이란 것은 사실상 힘이 아니고 연약이다. 그는 주림 안에서 강하여진다는
사실을 모른다. 빌 4:13 참조. (5) 그는 참된 소망을 모름(He has no hope in his
end). 그에게는 모든 것이 다 불확실할 뿐이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성을 전연
모른다(抄譯 -A Commentary on Proverbs, The Banner of Truth Trust, 1968, p.305).
"발이 급하다"는 것은, 무슨 일이든지 성급하게 경솔히 행함을 가리킨다. 곧, 하나
님의 뜻을 알아보거나 그에게 기도해보는 일 없이 자기 심리의 충동대로만 행함을 의
미한다. 이런 실수는 경건한 사람도 하기 쉬우니, 신자들은 이 점에 있어서 늘 자기를
쳐 복종시켜야 된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된다(고전 10:12). 부
릿지스(Charles Bridges)에 의하면, 성경에 기록된대로 경걱한 사람들의 이런 실수를
대표적으로 간추려 보아도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곧, (1) 여호수아의 실수(수
9:14-15). (2) 유다에서 벧엘에 왔던 하나님의 사람의 실수(왕상 13:18-19). (3) 유
다 왕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 아합과 함께 길르앗 라못을 치기로 성급히 작정한 실수
(대하 18:1-3, 19:2). (4) 사울왕의 실수 등이다. 그는 사무엘을 기다려 보기를 원하
였으나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였다(삼상 13:12). 그렇게 참지 못한 결과로 그는 왕권을
잃게까지 되었다. 신자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할 중요한 일에 있어서 명
확히 알기 전에는 동하지 않아야 된다.
잠 19:3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 이 귀
절의 히브리어를 개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사람의 미련함이 자기 길을 전복시키고
그의 마음은 여호와를 거스려 분풀이 하느니라." 사람들이 일을 저질러 놓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범죄한 조상 아담에게서부터 내려왔다. 그는, 선악과를 먹은 자기의
범죄가 하나님이 주신 여자 때문이었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였다(창 3:12). 가인
도 그의 동생을 죽이는 큰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정당한 심문과 벌을 받게 죄었을 때
에는 도리어 하나님을 원망하였다(창 4:9 하반, 13).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전지 전
능하신 하나님과 다투는 무서운 죄악이다(사 45:9). 그것이야 말로 발뒤꿈치로 송곳을
차는 미련함이다(행 26:14).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중에도 양심을 지키는 자들은, 어느 정도 우리 본문의 교
훈에 가까운 깨달음을 가지고 또 행하기도 한다. 유교의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일이
잘못 되었을 때에 "군자(君子)는 자기 자신을 탓하고 소인은 남들에게서 그 원인을 찾
으려고 한다"(君子求諸小人求諸)라고 하였다(論語, 衛靈公 第十五, 20). 또한 그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적다고 탄식하면서도 하늘을 원망하지도 않고 학문을 힘쓸 따
름이라고 하였으며, 또한 자기를 알아주는 이는 하늘이라고 하였다(不怨天不尤人 下學
而上達知我者天乎.-論語, 憲問 第十四, 37).
잠 19:4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 - 이 귀절의 히브
리어를 개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부(富)는 많은 친구들을 증가시키거나 빈곤한 자
는 자기 친구에게서 갈리우느니라." 여기 "빈곤한 자"란 말(* )은 경제적으로만 아
니라, 사회적 환경으로도 곤궁한 처지에 빠진 자를 말함이다(Georg Fohrer, Von den
Armen im wortloichen sinn wirderst im Zusammenhang mit den wirtschaftlichen und
socialen Umwalzungen im 9./8. Jahrundert gesprochen.-Kommentar Zun Alten
Testament, Das Buch Hiod,Gutersloher Verlagshaus Gerd Mohn, 1936, p,151). 그러므
로 70인역(LXX)은 이것을 "할 수 없이 된 자"(* )라고 번역하였다.
여기서 진실치 않은 친구의 가치를 논한다. 이런 친구들은 실상 해롭다(잠 18:
24). 재물을 보고 찾아온 친구들은 참된 친구가 아니니, 그들은 무슨 혜택을 받으려고
찾아와 붙는 아부자들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아는 신자는 그들 때문에 기뻐하지 않는
다. 그리고 그가 빈곤해졌을 때에 친구들이 그를 버리고 떠난다고 해서 그는 섭섭해
하거나 걱정하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이때까지 참 친구가 아니었던 사실이
이제 드러난 것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고 다고" 하는 거머리의 두 딸과 같은 자
들이었다(잠30:15). 이제 그들이 떠나가 버리는 것은 도리어 유쾌한 일이다. 그런 친
구들은 헤로운 친구들이다.
신자는 사람들을 의뢰할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아야 된다. 그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하
고 고독을 문제시 하지 않아야 된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는 참 친구가 아닌 자들을 외
면할 것인가? 그는 사람 접촉에 있어서 참 친구를 찾아서만 사귈 것인가? 그럴 수 없
다. 그가 참 친구 아닌 사람들에게 자기의 짐을 지우거나 의뢰하지는 않을지라도 그들
을 사랑하며 도와주어 그들을 친구로 만든다. 그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행해야
된다(눅10:30-35). 이렇게 행함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흩어
질 것을 아시고 말씀하시기를,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라고 하셨다(요16:32). 그는 인간들에게서 도움을 기대하지
도 않으셨고 그들을 의뢰하시지도 않으셨다(요2:24-25). 그러나 그는 죄인들을 사랑하
시어 친구로 삼으셨고(마11:19), 그들을 대신하여 죽기까지 하셨다 (요15:13-14). 롬
5:6-10 참조. 예수님을 본받는 칸태버리 감독 크랜머(Cranmer)는 자기에게 대적하는
자를 친구로 삼는 높은 덕(德)이 있었다고 한다.
잠 19:5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도 피치 못하리라 - 이 귀절
을 개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거짓말들의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들을
내뿜는 자는 구원 받지 못하리라." 이 귀절은 본의 아니게 거짓말 한 자를 염두에 두
고 말함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회개할 수 있는 것인만큼,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신다.
그러나 "거짓말들"(* )의 증인은 거짓(사실 아닌 것)을 성립시키기 위하여
많은 거짓말들을 꾸며낸다. 그러니 만큼 그런 자의 양심은 화인(火印)맞아서 마비되었
고(딤전4:2), 강퍅하여져서 회개할 소망이 없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벌을 면치 못
한다.
"거짓말들(* )을 내뿜는(* )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내뿜는다"
는 것은 아무 기탄 없이 거짓말들을 많이 불어낸다(breathe)는 뜻이다. 그렇게 하는
자도 거짓말 하는데 철면피이다. 그런 사람은 오랫동안 회개할 기회를 놓쳐버려서 (롬
2:4) 이제는 거짓말 하는데 있어서 양심상 가책조차 받지 않는다. 그는, 번번이 자기
양심의 소리를 눌러 버렸으므로 그의 양심의 작용은 마비되어 버린 상태이다. 그에게
는 이제 죄책감도 없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속죄의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그는 구원
받을 수 (* =피할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파렴치하게 거짓말을 하는 자들의 행동 모습이 성경에 기록되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아합왕의 아내 이세벧의 간교한 계획에 매수되어 무죄한 나봇을 정죄한 비
루들의 거짓말(왕상21:1-16),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도록 정죄하기 위하여 거짓 증거를
찾으려고 노력한 그때의 대제사장들과 공의회의 불법 재판(마26:59), 예수님의 말씀
(요 2:19)을 의곡(의曲)하여 아주 다른 뜻으로 변경시켜 그를 반역자로 취급한 두 거
짓 증인의 모습 (마26:60-61), 그리고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하는 스데반을 하나님께
대한 반역자로 뒤집은 거짓 증인들의 행동 모습(행6:12-14)이 모두 다 진리와 사실을
짓밟아 버린 파렴치한 행동들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그대로 전하지
않는 자들도 이런 거짓 증인의 부류에 속한다. 그들이 그 죄를 회개하지 않느 한, 그
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계19:20, 21:8, 27, 22:15). 이점에
있어서 또 한가지 기억할 것은, 일반 교인들도 진리를 모르면 남을 속이기도 하고 자
기도 속는다(딤후 3:6-13). 이런 자들도 일종의 거짓 증인들이다. 이런 자들도 거짓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이렇게 위태한 것이
다. 사람이 처음에 한 그 거짓말을 회개치 않으면 결국 그것을 가리우기 위한 거짓말
을 얼마든지 하게 된다. 이렇게 그의 거짓말은 점점 더 켜져서 멀지 않아 그 양심이
마비되어 거짓말장이가 되어 버린다. 그는 마침내 거짓 증인의 받을 화를 받게 된다.
잠 19:6,7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을 주기를 좋아하는 자게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 가난한 자는 그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 - 이 귀절들
은 인간의 약한 성품을 그대로 묘사한다. 곧, 그들이 남에게서 도움 받기만 원하고 불
쌍하게 된 자를 돕지는 않으려고 피한다는 것이다. 이는,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에
게 맞아 죽어가는 자를 보고 피한 제사장과 레위인의 행동과 같은 것이다(눅
10:31-32). 그들은 왜 불쌍하게 된자를 돕지 않고 피하였던가? 사람이 마귀와 육체의
충동을 따르며 양심의 소리를 억압하곤 하면 마침내 그의 양심은 마비되어 작용하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그는 진리와 반대되는 생각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는 이제부터
속는다(약1:22). (1)그는 스스로 속아서 불쌍한 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며 도리어 그
를 싫어하고(미워함)멀리함. (2)그는 스스로 속아서 남을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계명을 무거운 짐으로 느낌. 계명은 실상 무거운 짐이 아니다(요일 5:3). 계명은 독수
리에게 있어서 날개와 같다. 독수리의 날개는 무거워 보이나 그것이 독수리로 하여금
높이 날게 만든다.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므로 하나님과 가까워 진다(요14:26).
(3) 그는, 남에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알지 못함. 그는 남에게서 받기
만 원하고,가난한 사람을 돌보지 않는다(7절 하반). 그러나 실상은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행20:35). 하나님은 복되신 하나님이신데, 그는 사람들에게 너무 좋은
것들을 보다 귀하다(마16:26).그 뿐 아니라, 우리는 그에게서 몸도 받았다. 우리 몸은
얼마나 귀한가? 땅 위의 모든 동물들에 비할 수 없이 귀하게 지음 받았다. 그 뿐 아니
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寶血)로 속죄(贖罪)함을 받았다. 그 속죄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영생을 받았다. 우리는 이 모든것을 하나님에게서 거저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도 남들에게 좋은 것들을 거저 주기를 힘써야 된다(마10:8). 그리하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게 되고, 그의 복에 참여하게 된다.
잠 19:8
지헤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 - 이
귀절의 히브리어를 개역(改譯)하면 다음과 같다. 곧,"마음을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찾아 만나느니라." 여기 "마음"(* )이란 말은
지혜란 말 대신으로 사용된 것이다. 욥 12:12에도 "지혜"로 번역된 말(* )이 역시
같은 단어이고, 욥11:12에 "지각"(知覺)으로 번역된 말(* )도 그러하다. 이렇게 우
리 본문도 "지혜"란 말을 마음이란 말로 표현하였으니, 그 이유는, 지혜(여호와를 경
외함)는 애정(愛情)의 원천, 곧 마음(heart)과 함께있는 것이고 냉냉한 지식만이 아니
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헤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인데(딤후
3:15), 그것도 두뇌에 속한 냉냉한 것은 아니다. 그것도 우리의 마음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롬10:9에 말하기를,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다. "마음으
로 믿음"은 귀하다. "마음"이란말의 헬라어(* )는, 히브리어의 "마음'이란 말(*
)처럼 정서와 사랑의 근원이 된다. 인격(人格)에 있어서 정서와 사랑은 귀하다.
두뇌는 진리를 분별할 뿐이고 사랑은 못한다. 우리에게 아무리 좋은 은사(恩賜)가 있
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도 무가치하다(고전 13:1-3). 우리의 믿음도 사랑이 없다
면 그것도 무가치하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으로 믿어야 된다. 어린아이는 어머니를
믿을 때에 사랑으로 믿는다. 그는 그렇게 어머니를 믿기 때문에 어머니가 없으면 울고
, 어머니가 나타나면 기뻐한다. 두뇌로 진리를 분별하기만 함은 진리를 붙잡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붙잡기는, 사랑(심령)이 한다. 예수님을 붙잡는 믿음은 사랑과 함께
움직이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하기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였다(고전 16:22).
우리는 사랑할 만한 가치 있는 것을 사랑해야 된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는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다. 우리는 죽음 세상에서 다시 사시고 또
우리 까지 다시 살려주실 그 분을 영원토록 따라가야 된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해야
될 자들이 자녀를 그렇게 위한다. 그것은 우상 숭배이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해야 우
리 자녀도 복 받는다는 것을 기억하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였고(출20:60,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하였고
(마19:29),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
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을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도 하였다(마
10:29-30).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 여기 "명철"이란 말(* ) 은 위의
"지혜"의 내용과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곧, 여호와를 경외함을 그 내용으로 한 것
인데,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를 믿음(그리스도를 경외함을 포함한 것임-엡 5:21)과 같
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고 지킴이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보
다 세상을 더 사랑하기 쉽다. 요일2:15-17 참조. 우리가 그렇게 되는 순간에 믿음(구
약 시대에는 주로 여호와 경외라고 하였음)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바을은 경주장에서
경주하듯이 애쓰며 믿음을 지켰다(딤후4:70. 고전 9:24-2; 히 2:1, 12;1-3참조. 우리
가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려면 전쟁하듯이 분투 노력해야 된다. 히 12:4에는 피 흘
리까지 죄를 대적하라고 하였다.
잠 19:9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 - 이 귀절
은 같은 내용의 말씀이 앞에 5절에 이미 나왔다. 그 주석을 참조하여라. 여기서 그와
같은 사상이 중복된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또 참되시어 거짓과 정반
대이시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말을 극도로 멀리 하게 하려고 이렇게 역설(力
說)한다. 거듭 말하는 것은 그 말씀 내용을 강조하는 문투이다. 거짓말로 일하는 자
는, 거미줄을 짜서 옷을 만드는 자와 같고(사 59:5-6), 바람을 먹는 자와 같다(호
12:1). 그런 행위는 멸망과 직결(直結)되어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사람
의 거짓된 행위를 벌하시기 때문이다. (1) 거짓된 정치가들이 다스리는 나라에는 의리
(義理)가 없으니,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심판하실 때에 그들(거짓된 정치가들)도 함께
망한다. 잠 14:34 참조. (2) 거짓말을 잘 하는 교역자들은 벌써 진실하신 하나님의 원
수가 되었으니, 조만간에 저주를 받는다(렘 23:32,40). 잠 21:28 참조. (3) 거짓된 상
인(商人)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므로 잠간 후에 그의 물건이 팔리지 않으니 실
패하게 된다. 잠 12:19에 말하기를, "거짓혀는 눈감짝일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고 하
였다. 또 이 밖에 무슨 일이든지 사람이 그것을 거짓되이 하면 낭패를 당한다. 그 이
유는, 하나님은 진실을 사랑하시고(시 51:6), 거짓을 미워하시기 때문이다(잠 6:17).
잠 19:10
미련한 자가 사치하는 것이 적당치 못하거든 하물며 종이 방백을 다스림이랴 - 이
귀절의 히브리어를 개역(改譯)하면 다음과 같다. 곧, "미련한 자가 기뻐함이 합당치
않고 종이 군주(君主)들을 다스림은 더욱 마땅치 아니 하니라." 잠언에서 "미련한 자"
란 말(* )은 극도로 패역한 자를 의미한다. 그런자는 회개 하기 까지 채찍
을 맞아야 된다(잠 10:13, 26:3). 그런데도 그런 자들이 이 세상에서는 향락을 누리며
기뻐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의 기뻐함이 합당치 않은 이유는, (1) 미련한 자가 평안하
면 그 때문에 그가 멸망할 터인데(잠 1:32), 왜 그 평안 때문에 기쁨을 누리는가? 잠
3:35참조. (2) 그가 행악으로 낙을 삼으니 그것은 마땅치 않다(잠 10:23, 24:9). (3)
미련한 자 때문에 그 부모는 낙이 없는 데 자기는 도리어 기뻐하니 그것으로 보아서도
마땅하지 않다(잠 17:21). (4)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서 그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
서도 하나님의 먹을 것을 즐거워 하니, 그것은 합당치 않다(시 14:1). (5) 어느순간에
라도 그가 죽을때에는 그의 소유라고 하던 것에서 아주 손을 뗄 터인데, 무엇 때문에
그는 그 소유로 인해 즐거워 하는가? 눅 12:16-21참조.
이 밖에도 그의 기뻐함이 마땅치 않은 이유가 무수하다. 그 이유는 , 그는 평생
심판 받을 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기뻐한다는 그것은 합당치 않다. 잠 19:29
에 말하기를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고 하였다.
"종이 군주들을 다스림은 더욱 마땅치 아니하니라." 종이 군주들을 다스린다는 것은
그로서 감당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일이 이렇게 되는 것은 비정상적이고 하나님의 벌이
다(사 3:4-5). 주역(周易)의 비괘(비卦)는 이와 비슷한 원리를 보여준다. 곧, 비괘의
원리로 말하면 조정(朝庭)에 소인들이 주장하고 군자들은 밀려나간 것을 보여준다(비
之??人不利君子貞大往小來, 象日天地不交비子以儉德피難不可榮以祿).
그러나 이것은, 음양 이기론(陰陽理氣論)에 의한 관찰로써 운명의 변증법적 순환
(辨證法的循還)을 말함이다. 그러나 잠 19:10 하반절의 교훈은, 인간의 죄값으로 임하
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섭리적 심판(攝理的審判)을 말함이다. 종으로서 군주들을 다스
림 같은 일이 하나님의 허락으로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종으로서 그렇게 함은 합당치
않은 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각기 자기의 사명을 지켜야 할 것
과(고전 7:24), 월권(越權)하지 말 것을 강조하신다(렘 45;5). 시 131: 1-3 참조.
잠 19:11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 영광이니라 -
이 귀절의 히브리어를 개역(改譯)하면 다음과 같다. 곧, 여기 "사람의 슬기가 그의 노
를 지연시키고 그의 영화는 허물을 용서함이니라." 여기 "슬기"(* ) 말은 신중히
분변함을 가리킨다. 그리고 "노를 지연시킨다'는 것은 후일에 분풀이 하려고 노(怒)를
은밀히 간직해 둔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단기적(短期的)으로 뜨겁게 올라오는
노(혈기)를 눌러 오래 참아 이기는 것을 말함이다. 신중히 분변하는 슬기 있는 자만이
이렇게 행할수 있다. 우리가 노에 대하여 부주의하면 무의식 중에 그것이 얼른 터져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우리는, 단기적으로 노를 발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다는 것을
미리부터 명심해야 된다.
사람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않고 자기 중심으로 살면 원망하기도 하고, 시게 노
를 발하게도 된다. 그 이유는, 이세상의 모든 일들이 자기 한 사람에게 좋도록 되어가
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쉽게 노하는 것은 미련함이고 슬기가 아니다. 어떻
게 이 세상 모든 일들이 자기에게 좋게만 되어갈 수 있는가? 그는 마땅히 하나님 중심
하는 슬기로 모든 것을 해석해야 된다. 요나는 하나님을 중심하지 않고 자기 중심으로
니느웨성에 대한 하나님의 처사를 보았기 때문에 자주 원망과 분노를 발하였다(욘
4:1,8-9).
"그의 영화는 허물을 용서함이니라" 이것은, 사람이 남의 허물을 용서하므로 자기
자신은 인격상 광채를 소유하게 된다는 뜻이다, 물론 이 광채는 (1) 그가 먼저 하나님
의 보시기에 아름다워 보인다는 의미겠다. 그러나 그 때에 그는 사람들의 보기에도 아
름답다.(2) 하나님이 죄인들을 오래 참으시며 용서하심은 그의 주요한 덕(德)이다(출
34:6; 민 14:18;시 86:15, 130:4; 렘 15:15; 욘 4:2; 미 7:18-20; 마 9:13; 딤전
2:4). 그러므로 남의 허물을 용서하는 자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인만큼 하나님의 사랑
을 받으며 축복을 받는다. 이 사실이 그에게는 무엇보다 큰 영화(영광)이다. 마 6:15
참조.
잠 19:12
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과 같고 그의 은택은 풀위에 이슬 같으니라 - 이것은,
폭군을 염두에 두고 말함이 아니고, 도리어 이상적 군주(理想的君主)의 행정을 가리킨
다. 잠언의 저자는 군주에 대하여 말할 때에 원칙적으로 이상적 군주에 대하여 말한
다. 잠 16:10-15, 21:1 참조.
이 말씀은 왕의 통치에 필요한 두 가지 곧, 공의와 사랑을 보여준다. 여기서 "왕의
노함"이란 말은 부릿지스(Charles Bridges)가 잘못 말한대로 폭군의 노를 가리킴이 아
니다. 이것은, 의로운 왕이 그 나라의 죄악을 마워하여 노함을 의미한다(잠 16:12).
모든 통치자에게는 죄를 벌하는 위엄(威嚴)이 있어야 된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임금
다윗에게는 그것이 있었다(시 101:1-8). 하나님에게도 죄를 벌하시는 위엄이 있으시기
때문에 심판 받을 악도들이 그의 진노 앞에 설 수 없다(계 6:15-16).
그리고 통치자에게는 아랫사람들에게 대한 사랑과 자비가 있어야 된다. 그것은 우
리 본문의 "풀 위에 이슬 같다"는 말이 그 뜻이다. 풀은 일반 백성을 비유하는데, 매
우 약하고 이름도 없는 것 같다. 그러니만큼 왕은 위엄으로 임하지 않고 이슬 같이 고
요하고 부드러은 체휼(體恤)의 사랑으로 그들에게 임한다. 그는 그의 백성의 봉사를
받기만 위주하지 않고 그 들을 사랑하며 또 존중히 대한다. 그것이 그의 의리(義理
)이다. 백성에게서 세금을 받아 호화로이 살며 명령만 내리는 자들은 통치자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들이다. 참된 통치자는 그 백성과 신하들을 사랑하며 의리를 지킨다.
이런 의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만이 지킬 수 있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선한 임금 다윗의 행적을 그 표본으로 생각해 보자. 그것은
삼하 23:13-17에 기록되었는데, 그가 자기를 위해 수고한 세용사의 의리를 보답한 사
실이다. 그 세 용사의 의리는 어떤 것이었던가? 그것은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이 블레
셀과 싸우던 때에 아둘람 부근에는 음료수가 없었던 고로 갈증을 만난 다윗왕은 물을
원하였다. 이때에 세용사가 다윗왕에게 음료수를 공급하기 위하여 블레셋 군대로 더불
어 충돌하면서까지 베들레헴 부근에 가서 음료수를 길어왔다(삼하 23:13-16). 그들은
다윗을 참된 지도자로 알고(삼하 21:17), 또 이스라엘 나라가 다윗에게 속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도 믿었다(대상 12:23). 그러므로 그들의 모험적 행위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다윗의 의리는 어떠하였던가? 그는, 세 용사가 생명
을 내어놓고 길어온 그 물을 마시지 않고 , 하나님께 드리는 뜻으로 땅에 쏟았다. 그
것은 극기(克己)하는 의리이다. 그는 목이 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물을 마시지 않
았다. 언제든지 내 욕구를 거절하고 남들을 존중히 하는 그 행위는 의리에 속한다. 또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의리이다. 그 물은 그들의 피, 곧 그들
의 생명과 같으므로 그는 그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고 방
식이 역시 신앙적인 의리에 속한 것이다. 이렇게 의리를 지니는 임금은 그 나라 백성
에게 이슬과 같이 감화를 주며 또 혜택을 입혀준다. 그가 그렇게 의리를 지키게 됨은,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를 입으며 은혜를 받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슬과 같고 가는 비와 같다(신 32:1-2).
잠 19:13
미련한 아들을 그 아비의 재앙이요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 -
이 귀절의 히브리어를 개역(改譯)하면 다음과 같다. 곧, "미련한 아들은 그 아버지에
게 재앙이요 아내의 다툼들은 연거퍼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 여기 "미련한 아들"이
란 말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부모를 순종치 않을 뿐더러 늘 악을 행하는 자를 말
함이다. 그는 물론 회개하지 않는 자이다. "아비에게 재앙"이 된다는 것은 다음과 같
이 해설된다. 곧, "재앙"이란 히브리어(* )는 비애(悲哀)의 원인이 되는 불행
(misforturne)을 말함이다(E. Dhorme, A Commentary on The Book of Job, 1967
Leiden, p.75).
미련한 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앙이 되는 이유는, (1) 부모 된 자가 그 아들로 말미
암아 당하는 고통을 인력으로는 면할 길이 없고 별 수 없이 당하게 되기 때문이며,
(2) 명예상으로든지 재산상으로든지 손해를 보게 되기 때문이며, (3) 이런 괴로운 일
은 선한 사람들도 만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재앙이란 것은 인류가 공통적으로 당하
는 것이다. 아담의 가정게 가인이 있었고 (창 49:3-4), 아론의 가정에는 나답과 아비
후(레 10:1-2), 엘리의 가정에는 두 불량자 홉니와 비느하스(삼상2;12-36), 사무엘의
가정에는 불의한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삼상 8:1-30), 다윗의 가정에는 암논과 압살
롬이 있었다(삼하 13:1-14, 18:1-15,33).
그러므로 의롭고 무흠한 자녀들을 가진 부모들도 두려워할 것 밖에 없으니, 그들
의 자녀들 중에서 미련한 자손이 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새의 아들들 중 미련한 자
가 없었으나 그 가장 의로은 아들 다윗에게서 미련한 손자들이 났던 것이다. 사람들이
가정의 평안과 쾌락을 즐기노라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 일이 너무 많다. 그러므로 거
기에 뜻밖에 재앙이 임하도록 하심이 또한 하나님의 경륜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가
족보다 하나님을 더 믿고 더 사랑해야 된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을 위하
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
생을 상속하리라"고 하셨다(마 19:29 ). 마 10:37-38; 눅 14:25-26, 33 참조.
"아내의 다툼들은 연거퍼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 "다툼들"(* )이라고
복수 명사(復數名詞)가 사용된 것은 많은 다툼들을 가리키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여기
서 남편과 다투는 습성(習性)이 있는 아내에 대하여 말함이 분명하다. 남편과 다투는
습성이 있는 악처(惡妻)는 평안한 날이 별로 없을만큼 자주 남편과 다투고, 또 다툼
이 시작되면 그녀는 연거퍼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말을 끊지 않는다. 따라서 그 싸움은
몇날이라도 계속되기 쉽다. 그와 같이 부부가 늘 다투는 가정에서는 그 자신들 뿐 아
니라 그 자녀들도 의탁할 데 없는 자 같은 슬픔을 당한다. 그들은 비가 끊임 없이 새
는 집에서 사는 것 같은 불안한 가운데서 살게 된다. 잠 21:9,19, 25:24, 27:15 참조.
잠 19:14
집과 재물은 조상게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 이 말씀은, 가산(家産)도 조상 때부터 하나님에게서 받은 사실을 무시함이 아니다.
고전 4:7; 약 1:17 참조. 조상의 기업이 그대로 상실되지 않고 보존되어 자자손손에게
물려 내려가게 됨도 보통으로는 (혹시 특수한 이유로 예외는 있지만) 조상들의 선(善)
에 대한 하나님의 상급이다. 잠 13:21-23 참조. 이것을 보면, 사람의 행위상 선악 문
제가 그 자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시 37:25에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 부터 늙기
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라고 하였다. 의
로운 조상이 가난한 자들에게 재물을 흩어준 그 의(義)를 하나님께서는 그 자손들에게
갚아주신다(전 11:1). 위의 이론은, 악인들도 혹시 하나님의 공동 은혜에 의하여 어느
정도 자손들에게 재산 상속 하는 일이 있음을 부인함이 아니다(시 17:14). 다만 사람
의 의를 상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 자손에게도 풍성하다는 것 뿐이다. 출 20: 6 참
조.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곧, 누구든지 슬기로운 아내를 맞
이하게 됨은 조상의 기업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그 개인이 하나님에게서 받는 분복이
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는 자로서는 마땅히 할 일이 있다.
(1) 슬기로운 아내를 맞이하려 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하나님의 말
씀에 부합하도록 아내를 택해야 된다. 그는 이 일에 있어서 자기 단독으로만 할 것은
아니다. 자기 부모나 친척이나 친구를 통하여 상대자의 인격과 내력을 잘 알아봄이 절
대로 필요하다. 그는 상대방의 인격에 대한 지식을 무엇보다도 성경에 비추어 판단해
야 된다. 성경 말씀중에도 특별히 잠 31:10-31의 말씀은 이점에 있어서 중요하다. 거
기에 여성이 소유해야 할 주요한 미덕(美德)에 대하여 말하였으니, 곧, 근면의 덕
(13-27). 경건의 덕 (30절) (딤전 2:9-15; 벧전 3:1-6 참조)이다. 여성에게 있어서
육체적 미는 그리 주요한 조건으로 장려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육체적 미를 거짓되다
고 하였다(30절). 그 이유는, 우선 한가지만 예를 들면, 그것만 소유한 여성의 행실이
부족할 경우 도리어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잠 11:22).
(2) 슬기로운 아내를 구하려는 자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된다. 신자들이 중요한 일
에 있어서 하나님께 기도는 하지 않고 조급히 행동하면 실수한다(잠 19:2). 이삭의 아
내를 택하러 가던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은 여행 도중에도 하나님께 기도하였다(창
24:12-14).
잠 19:15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 이 귀절의
히브리어를 개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게으름이 깊은 잠에 떨어지게"한다는 말씀은,
(1) 게으른 자가 그의 방탕한 생활 때문에 그 육신이 피로하여 낮잠까지 자게 됨을 가
리키기도 한다.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방탕한 데로 떨어지는 경항이 많다. 그리고 (2)
이것은, 사람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려 자기의 재능과 힘과 기회를 적당히 활용하지
않고 내버려둠을 비유하기도 한다. 삶이 자기 재능과 힘과 기회를 활용하지 않을 때에
그것들은 결국 잠자는 것같이 되고 만다. 그의 사업은 늘 적자가 날 수 밖에 없을 것
이다. 더욱이 영적 방면에 있어서 이렇게 됨은 너무도 가석한 일이다. 곧, 신자들이
깨어 기도하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고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진실히 믿으려고 힘쓰지
도 않는다면, 그들은 깊이 잠든 것과 같아서 각성이 없는 자들이다. 롬 13:11-14; 고
전 16:13-14; 엡 5:8-14; 살전 5:5-8 참조.
"게으른 영혼은 주릴 것이니라." 여기 "영혼"(* )이란 말을 우리 한역과 같이
"사람"이란 뜻으로 번역할 수도 있으나, 여기서는 사람을 그의 내부적 생명 본위로 가리킨 말인 것만큼, 나는 이것을 "영혼"이라고 개역한다. "주릴 것이니라." 그가 주리게 됨에 대하여는 이 아래의 간단한 설교로 해석을 대신한다.
잠 19:16
계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지키거니와 그 행실을 삼가지 아니하는 자는 죽으리라 - 이 귀절의 히브리어를 개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계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지키는 자요 자기의 길들을 멸시하는 자는 죽으리라." 여기 "계명"(* )이란 말은 물론 하나님의 계명을 말함이다. 그런데 이것이 행위의 법칙인 율법만을 가리키는가? 혹은 이것이 율법과 약속(복음)을 다 포함하는가? 모세는 이 말을 후자(後者)의 내용(율법과 약속)으로 사용한 적도 있다(신 30:11-14; 롬 10:6-11). 예수님은 사람들더러 자기(예수님 자신)를 믿으라고 하신 것이(요 12:44-48) 곧바로 하나님의 명령(계명)이며, 그것이 바로 영생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바로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요일 3:23에도 말하기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고 하였다. 위의 말씀들을 보면, "계명"이 구원을 준다는 의미로 사용될 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는 복음적인 명령을 포함한 것이 분명하다. 롬 4:13-16 참조.
"자기의 영혼을 지키는 자요." 여기서 잠언 저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이 얼마나 중요함을 지적한다. 그것은 바로 영혼을 지킴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계명이 곧바로 구원의 길이기 때문이다. 위의 상반절 해석을 참조하여라.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억지로 지키지 말고 기쁨과 사랑으로 지켜야 된다. 욥은 말하기를,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
씀을 귀히 여겼구나"라고 하였다(욤 23:12). 시 119:16, 24, 97, 136, 162 참조.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그의 명령과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요일 3:23)을 지키므로 그의 자녀가 되며, 영생을 얻는다. 그리고 그의 자녀로서 그의 계명에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특권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순종은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특별히 예수님에게서 실현되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순종하시므로 아버지의 것이 모두 그 자신에게
계승되는 사랑을 받으셨다. 요 10:17 참조. 그러므로 그의 순종의 처지는 곧바로 그렇
게 귀한 것이기 때문에 그는 고난을 통하여 그것을 배우셨다고, 성경은 말한다. 곧,
히 5:8-9에 말하기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순종을 약자의 도덕으로 본다. 그러나 하나님을 순종함은 진리를 순
종함이요, 능력에 순종하는 것인만큼 그것은 세력이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순
종은 이적보다 낫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계명(죽으라는 계명
과 부할하라는 계명)을 순종하시므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셨다(요 10:17). 아들이 아
버지에게서 받는 사랑은 순종 때문이다. 그리고 아들에게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그와
아들과의 연합을 성립시킨다. 이 연합은 아들에게 있어서 권세이다. 요 3:35에 "아버
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라고 하였다.
"자기의 길들을 멸시하는 자는 죽으리라." 곧, 사람이 자기의 행위를 조심하지 않
으면 멸망을 당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상반절의 말씀과 반대로 행하는 자의 멸망을
경고함이다.
잠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 이 귀절의 히브리어를 개역(改譯)하면 다음과 같다. 곧,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
는 자는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의 준 것을 그가(하나님께서) 갚아주시리라." 여기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중요하다. 참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자는 구제하는
구체적 행동을 취하기도 한다. 그의 긍휼의 심리는 그로 하여금 불쌍한 자를 돕기 위
하여 수고하게 하며(살전 1:3), 또 희생하게 한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맞은
자를 구조함에 있어서 그를 불쌍히 여김이 그 첫 순서였다(욱 10:33). 이와 반대로 사
랑 없는 구제 행위는 생명 없는 외식적 행위이며, 또 기계적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생명 없는 봉사를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에게 대한 신
자의 긍휼의 행위를 높이 평가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을 직접 자기(하나님)에게
대한 대접으로 간주하여 주신다.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란 말씀이 그 뜻이다. 마
25:34-40 참조.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갚아주시겠다고 하신다. 그의 갚으심
은 확실하며(잠 11:24-25, 28:27), 또 더 좋은 것으로 주신다(마 6:3-4). 그것은 이
세상 것으로 갚으심이 아니고 내세의 것으로 갚으심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신
자들의 긍휼 행위가 기어코 이 세상 것으로 갚음이 되지 않고 내세의 것으로 갚음이
되기를 원하셨다(눅 14:12-14). 마 6:1 참조.
잠 19:18
네가 네 아들에게 소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고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 - 이
귀절의 히브리어를 개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네 아들을 징계하되 소망이 있을 동안
에 하라 그러나 그를 죽게 함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 자녀들이 잘못할 때에 부모로
서 그들을 벌하라는 말씀은 잠언에 많이 있다. 그런데 여기 "소망이 있다"는 말은 중
요하다. 그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그런데 자녀를 징계함에 있어서 부모는 하
나님의 뜻대로 사랑과 의리를 가지고 그들을 징계해야 된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악독한 행동으로 흐르게 되므로 상대방에게 반항심을 일으키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금하는 바이다(엡 6:4).
"그를 죽게 함에 마음을 두지 말라." 이것은 부모가 그 잘못한 어린이를 징계할
때에 그에게 혈기를 내어 그를 미워하지 말라는 것과 같은 말씀이다. 엡 6:4 참조. 미
워하는 마음은 살인의 심리이다(요일 3:15). 그리고 이런 악독한 심리는 지나친 분노
와 악담과 저주로 표현된다. 동양에서 유교의 가정 교육은 극히 엄하였다. 옛글에 말
하기를, "엄한 아버지는 효자를 길러내고 엄한 어머니는 효녀를 길러내는 법이라"(嚴
父出孝子嚴母出孝女)고 하였고(明心寶鑑, 訓子篇 8), 또 말하기를, "귀여운 아이에게
는 매를 주고, 미운 아이에게는 밥을 준다"(憐兒多與棒憎兒多與食)고 하였다(明心寶
鑑, 訓子篇, 9). 이런 말들이 옳기는 하다. 그러나 유교는 하나님 제일주의가 아니고
부모 지상주의(至上主義)이며, 부모로 하여금 자녀들의 인권(人權)을 무시할 정도까지
엄한 지위를 차지하게 한 것은 잘못이다. 예를 들면, 자녀들이 부모가 있을 때에는 몸
이 가려워도 긁지 아니함(痒不散搔)이 예의였다(原本小學集註, 卷民社, 32). 그러나
기독교 성경에는 가르치기를, 부모가 어린 자녀의 잘못을 징계하기는 하여도 합리적
(合理的)으로 하여 그들의 자유 의지를 파괴시키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한 말
씀(엡 6:4)이 여기 해당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린 아이가 잘못하였을 때에 그 부
모는 먼저 그로 하여금 그 잘못을 깨닫게 하여주고, 다음에 또 다시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지를 경우에는 징계할 것이라고 경고한 다음 그 약속대로 실행하면 된다. 이렇게 할
때에 그 어린 아이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게 되어 그 아이로 하여금 자의지(自意志)로
자기의 과오를 시정하게 하며, 또 그 아이의 인권도 존중시 함이 된다. 이렇게 함이
하나님의 뜻이다.
잠 19:19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는 벌을 받을 것이라 네가 그를 건져주면 다시 건져주게
되리라 - 곧, 맹렬히 노하는 고질이 있는 사람은 만류함이 되어도(건짐이 되어도) 고
쳐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마침내 징계를 받게 된다는 뜻이겠다. 그러나 나는 이
귀절을 다음과 같이 개역한다. 곧, "맹렬한 분노는 벌을 받느니라 네가 그것(분노)을
피하지 않으면 네가 더욱 그것을 증가시키느니라." 이것은 웠절 말씀과도 문맥을 통한
다. 곧, "너는 아들을 징계하되 죽일 마음(지나친 분노)은 두지 말아야 한다. 지나친
분노는 벌을 받는다. 네가 너의 분노를 피하지 않으면 너의 분노는 점점 더해질 것인
데 그것은 위험하다."라고 하게 된다.
19절 말씀은 분노의 위험성을 보여준다. 사람이 분노를 얼른 피하지 않고 그것을
품고 있으면 거기에 마귀가 틈을 타서 천추(千秋)에 유감스러운 큰 일을 저지르게 되
기도 한다. 그러므로 엡 4:26-27에 말하기를, "분을 내어고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
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 사소한 일로 시작된 분
노가 비극을 초래하게 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을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명심할 것은, 하나님께서 분노를 벌하신다는 우리 본문 상반절의 말씀이다. 유교의 교
훈에도 "분을 징계하기를 불 끄듯이 하라"(懲忿如救火)고 하였다(明心寶鑑, 正己篇,
13).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동기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분노가 사람
에게 해롭다는 견지에서 가르친 것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냄을 심히 하면 기운을
상한다"(怒甚偏傷氣)란 말도 있다(明心寶鑑, 正己篇, 10).
잠 19:20,21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 - 이 귀절들의 히브
리어를 개역(改譯)하면 다음과 같다. 곧, "너는 계획을 들으며 징계를 받으라 너의 종
말에 네가 지혜롭게 되리라 사람의 마음 속에 많은 정책들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계
획 그것이 영원히 서리라." 우리는 여기서 "종말"(* )이란 말을 주목해야 된
다. 이것은 "최후의 끝"이란 뜻인데 인생의 종말(終末)을 가리킨다. 인생의 종말이라
고 하면, 그것은 그의 노년기와 및 사망을 의미한다. 인생은 마땅히 그 종말을 위하여
그 초기에 예비해야 된다고 한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계획과 징계를
감수하는 훈련이다. 인생은, 현재의 생활로 만족하지 말고 그 종말을 우려(憂慮)하여
대비해야 한다. 현재의 생계만 세우고 족한 줄 아는 부자(눅 12:16-19)를 가리켜서 하
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라고 하신다(눅 12:20). 그러므로 전 12:1에 말하기를,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하였고, 또 전 12:7에는 말하기를, "흙은 여전히 땅으
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하였다.
사람이 그 종말을 위하여 미리 준비함은 무엇보다 중요하다(암 4:12). 그 이유는,
이 세상은 잠간이고 또 헛되며 여호와만이 우리의 소망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준비는 다른 것으로는 전연 할 수 없고, 다만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계획과 징계로만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생각은 아무리 많아도 헛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이 참되고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21절).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계획과 징계)을
꿀과 같이 달게 받아 순종해야 된다. 그러므로 다윗은 말하기를, "의인이 나를 칠지라
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치 아니
할지라"고 하였다(시 141:3).
잠 19:22
사람은 그 인자함으로 남에게 사모함을 받느니라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 이 귀절의 히브리어를 개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사람의 소원이 그의 친
절이니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이 말씀의 뜻은, 사람이 선(인자)
을 행할 소원이 마음 속에 간절하다면, 그런 소원을 가진 가난한 자가 마음 없이 선을
행한다는 부자보다 낫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중심의 진실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평가이다(시 51:6). 하나님은 외식자의 많은 연보보다 정성껏 바치는 가난한 자의 적
은 물질을 더 기뻐하신다(막 12:41-44).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이 말씀에 대하여는 자세히 생각할 필
요가 있다. 물론 여기 "가나한 자"는 물질이 궁핍하여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 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본문이 그를 "거짓말하는 자"와 대조시킨다. 우리는 몇 가지로 가
난한 자가 거짓말하는 자보다 낫다고 할 수 있다. (1) 여기 진술된 가나한 자는 진실
하니만큼 하나님 편에 있고(롬 3:4), "거짓말하는 자"는 마귀 편에 섰음(요 8:44).
(2) 성실한 "가나한 자"는 그 양심이 평안한 반면에, 거짓말하는 자는 그 양심이 불안
함. (3) 가난한 자는 믿음에 부요할 수 있으나(약 2:5), 거짓말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부인함(요일 2:22). (4) 성실한 가난한 자는 겸손을 위시하여 모든 덕을 행하려고 하
나, 거짓말하는 자는 늘 남을 해롭게 하는 죄를 쌓음. (5) 성실한 가나한 자는 노동을
힘쓰는 행복에 처하나(전 5:12), 거짓말하는 자는 재물을 얻고자 함. "속이는 말로 재
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다(잠 21:6).
우리 본문의 말씀은, 가난한 자면 모두 다 행복하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가난해도
진실한 자가 행복하다는 것 뿐이다. 유교 사상에도 가난을 평안으로 취하고 도(道)를
즐거워하는(安貧樂道) 사상이 있다.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가난하여도 즐겁다" 하
였고, "불의(不義)하게 부귀(富貴)를 누림은 자기에게는 뜬 구름과 같다"(飯??食飮水
曲肱而枕之樂亦在基中矣不義而當且貴於我如浮雲)고 하였다(論語, 述而 第七, 15). 그
는 도(道)를 즐거워하기 때문에 이렇게 가난을 문제시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이른
바 "도"는 다만 인본주의 윤리 철학(人本主義倫理哲學)인 것이다. 그는 이렇게 부족한
깨달음을 가지고라도 족하게 여기어 말하기를, "아침에 도를 들엇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問道夕死可矣)라고 하였다(論語, 里仁 第四, 8). 그렇다면 참된 하나님을 아
는 우리 신자들은 얼마나 만족한 처지에 있는가!
잠 19:2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
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 이 말씀에서 부릿지스(Charles Bridges)는 하
나님 경외(敬畏)의 세 가지 열매를 지적하였으니, 곧, 생명과 만족과 안전 보장이다
(Threefold fruit is here set before us life-satisfaetion-security.-A Commentary
on Proverbs, The Banner of Truth Trust, 1968, p.327).
(1) 사는 문제(내세의 복딘 생과 부활까지도)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이면 그만이
다(상반절). 그러므로 구약에는 내세란 말 대신 하나님이란 말이 많이 나타나 있다.
이런 표현이 도리어 구약 계시의 진리 성격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외에 다른
데서 복된 생명을 찾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 기록(구약의 기록)도 하나님 중심주의
로 되어 있다. 현세에서 하나님을 모시기만 하면, 영생(세상을 떠나서 영원히 사는 것
과 및 내세의 부활)은 그 가운데 완전히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 중심주의의 영
생론은 이교(異敎) 철학자들의 영혼 불멸론과 다르다. 소크라테스(Socrates)는 그의
임종시에 깊이 생각하며 영혼의 영생을 네 가지로 논증하였다. 그 중의 하나는, 영혼
의 단순성(분해되지 않으며 용해되지 않는 성질)으로 미루어 보아서 영혼의 영생를 논
증한 것이다. 플라톤(Platon)도 이렇게 논증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사상은 인간의 자
율적(自律的) 영생을 논한 것이니, 잘못이다. 그들은 인간의 죽음이 징벌(懲罰)인 사
실을 몰랐던 것이다. 더욱이 이들은 인간의 참된 생명이 하나님에게만 있음을 몰랐다.
성경은 어디까지나 죽지 아니함이 하나님께만 있다고 한다(딤전 6:16).
(2) 하나님은 우리에게 만족을 주신다(하반절). 이 세상 것들은 다 지나가므로 그
것들을 소망으로 취한 자는 마침내 실망하게 된다. 요일 2:15-17 참조. 그러나 하나님
은 변치 않으셔서 신자에게 영원한 만족을 주신다. 시 23:1-6에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게
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
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
하리로다"라고 하였다.
(3) 하나님은 참 신자에게 안전 보장을 주신다(하반절 끝). 심지어 환란도 성도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께 가까이 가도록 만들 뿐이다(롬
8:35-39). 시 91:1-16, 121:1-8 참조. 그러므로 우리 본문에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
니라"란 말씀이 나와 있다. 곧, 참 신자에게는 재앙도 결국은 유익이 될지언정 해로운
것으로 결론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롬 8:28 참조.
잠 19:24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와 하느니라 - 이 말씀은
게으른 자의 행위에 대하여 비유로 진술한다. 이것이 비유라고 할 이유는, 게으른 자
가 식탁에서 먹을 때에는 도리어 부지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비유가 가르치는 요
지는 두 가지이다. (1) 게으른 자는 자기에게 방금 절실한 일도 하기 싫어한다는 것.
식탁에 앉은 자가 음식물을 가져다가 입에 넣는 것이 자기에게 얼마나 요구되고 또 필
요한 일인가? 그렇게 필요한 일도 게으른 자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
에게 필요한 구원을 위하여서도 힘쓰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게으름이다. (2) 게으른
자는, 그를 위하여 남이 준비해 놓은 것을 받는 노력도 하기 싫어함. 영적으로 게으른
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위하여 무한한 구원의 은혜를 예비하시
고 주시려고 하지만, 인류들 중에는 이것을 받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자들이 많다.
그들은, 곡식이 가득한 창고 속에서 굶어 죽는 자와 같이 어리석다. 우리의 받을 구원
이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성립되었으나 우리로서는 그것을 받는 노력을 해야만 그
은혜를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노력하도록 만들어 줄 뿐이고
게으르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빙자하여 게으름을 위주하는 자는 하
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자이다. 부릿지스(Charles Bridges)는 말하기를, "희생과 노력
의 진리를 가지지 못한 종교는 천국문을 열지 못한다."라고 하였다(A Commentary on
Proverbs, The Banner of Truth Trust, 1968, p.328).
기독교 성경은 구원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제일로 주장한다. 그것이 주권
적 은혜(sovereign grace)이다. 그러나 주권적 은혜는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엡 2:1)
를 살려서 노력하는 자가 되게 한다. 천국은 힘쓰는 자가 빼앗는다(마 11:12; 빌
2:12; 고전 15:58).
잠 19:25
거만한 자를 때리라 그리하면 어리석은 자도 경성하리라 명철한 자를 견책하라 그
리하면 그가 지식을 얻으리라 - 여기 이른바 "때리라"는 말은, 법률상으로는 권력으로
단속함을 가리키고, 종교적으로는 징계를 비유할 것이다. 이런 징계는, 사람들이 실시
하지 못할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신다. 거만한 자를 이렇게 처치하시는 목적은 우
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곧, 어리석은 자들(마음이 개방되어 시비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들)이 그런 징계를 보고 정신을 차려 옳은 편으로 서게 된다(딤전 5:20). 치
리자들은 명철한 자에 대하여는 특수 취급해야 된다. 명철한 자는 부득이 하여 실수했
을 때에 견책만 받고도 곧 깨닫고 돌이킨다. 그 이유는 명철한 자는 겸손하기 때문이
다.
잠 19:26-29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쫓아내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며 능욕을 부르는 자식이니다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 망령된 증인은 공의를 업신여기고 악인의 입은 죄악을 삼키느니라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 - 여기서는 세 가지 악인들의 행사에 대하여 진술한다. 곧, 악질적인 불효자의 행동(26절), 거짓 스승의 교훈(27절), 거짓 증인의 행위(28절) 등이다. 이들은 극도의 악인들인만큼 심판(하나님의 심판)과 채찍(법률에 의한 폭력적 단속이거나 하나님의 징계)을 받게 된다고 한다(29절). 불효자는 배은망덕하는 큰 죄인이니 심판 받아 마땅하고, 거짓 스승은 양의 옷을 입고 속으로는 노략질하려는 이리니(마 7:15), 심판의 대상이고, 거짓 증인은 죄악(거짓말)을 음식 먹듯이 달게 여기니(28절 하반), 역시 심판 받아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