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아모스 0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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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이스라엘을 위한 도고 (아모스 7:1-9)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매우 오래도록 참으시지만 패역한 백성에게 대해 언제나 참지는 않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런 양면을 선지자에게 보여 주셨다. "주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1, 4, 7절).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현재의 일을 보이셨고 장차 올 일도 미리 보이셨으며, 그가 행하신 일과 행하려고, 작정하신 일을 다 알려 주셨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 선지자들에게 비밀을 보이시기 때문이다(3:7).

Ⅰ. 여기에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사례가 두 가지 나온다. 하나님은 심판 도중에 긍휼을 기억하셨다. 그것은 살리시는 자비이다. 이 두 가지 자비의 서술은 너무도 흡사하여 함께 생각할 때 가장 낫다. 이들은 매우 괄목할 만하다.

1. 하나님은 여기서 이 죄많은 민족을 치러오신다. 먼저 한가지 심판을 내리시고, 그 다음에 또 다른 심판을 내리신다.

(1) 그는 기근의 심판을 먼저 내리신다. 선지자는 환상으로 보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황충 또는 메뚜기를 지으시고, 그 땅에 올라오게 하셔서 그들로 그 땅의 소산물을 다 먹어 버리게 하시는 것을 보았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그 땅의 아름다움을 벗겨 버리며, 그 땅 거민을 아사시키기 위함이다(1절). 하나님이 이들 황충을 만드신 것은 그것들이 그의 피조물이었을 뿐만 아니라(개미나 코끼리의 구조에서도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많이 나타나지만 미세한 동물의 형성에서도 그에 못지 않게 많이 나타난다), 그의 진노의 도구이기도 한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많은 백성에게 대해 "재앙을 지으신다" 고 한다(원의는 그렇다, 렘 18:11). 하나님은 그 땅의 풀을 먹어 치우도록 하시려는 목적으로 황충을 지으셨다. 따라서 그는 무수한 황충을 준비하셨다. 황충은 왕이 풀을 벤 뒤 풀이 다시 움돋기 시작할 무렵에 보냄을 받았다. 여기서 심판이 그에 선행하는 자비로 말미암아 얼마나 경감되는지 살펴 보라. 하나님께서는 봄철에 풀이 처음 자랄 무렵 즉 풀이 가장 필요하고, 가장 무성하며 좋을 때는 이들 곤충을 보내서 먹어 치우게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풀은 자라게 하시며, 거두어들이게 하셨던 것이다. 왕이 벤 풀은 안전하게 보관된다. 이는 왕도 밭의 소산을 먹기 때문이다(전 5:9). 왕이라도 다른 세입못지 않게 벤 풀이 없으면 곤란을 당했던 것이다. 당시의 유다 왕이었던 웃시야는 농사를 좋아했다(대하 26:10). 황충은 벤 후에 돋아난 풀 즉 나중 자라난 풀만 먹으라는 명령을 받았다(시골에서는 이것을 그루갈이 풀이라고 부른다). 이 나중 돋아난 풀은 처음 돋는 풀에 비교하면 거의 가치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자비 즉 계속 우리에게 내리시는 자비는 그가 우리에게서 걷어가시는 자비보다 훨씬 많고 소중하다. 이것은 우리가 왜 불평하지 않고 감사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이유이다. 과거에 성장하신 자비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나중에 자라난 실망을 맛볼 때에도 하나님의 뜻에 승복할 수 있게 된다. 이들 황충은 그 땅의 풀을 다 먹었다. 풀은 가축의 사료였다. 그러므로 소떼를 거느린 자들이 이로 인해 곤란을 겪었을 것은 물론 이다. 어떤 이는 이것을 비유적으로 이해하여 황폐시키고 멸망시키는 군대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스라엘 왕국은 여로보암 시대에 이전 통치시의 황폐를 복구하기 시작하고 있었다(왕하 14:25). 우리가 열왕기 하 13장 3절 이하에서 읽듯 수리아 왕의 벌초 후 늦게 자라나는 풀이 돋아났다. 그리고 나자 하나님께서는 황충의 군대와 함께 앗수르왕에게 명령을 내려 그들을 습격하고 황폐시키게 하셨다. 이 나라가 곧 6장 14절에 언급된 나라이다. 그 나라는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시내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학대하였다. 이것은 열왕기 하 14장 25절을 가리키는 것 같다. 거기서는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에 이르기까지 회복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것이 꽤나 잘 복구된다고 생각할 때도 모든 것을 파멸시키실 수 있다.

(2) 하나님께서 더 나아가서 불의 심판을 내리신다. 이것은 그가 자기 전통에 많은 화살을 갖고 계시며, 죄많은 민족을 낮추실 수 있는 방법이 여러 가지임을 나타낸다(4절). "주 여호와께서 명하여 불로 징벌하게 하셨다(다투게 하셨다. 흠정역). 그는 다투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다투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심판으로 그들을 고소하신다. 그의 쟁논은 이유나 근거가 없지 아니하다. 그는 불러서 다투게 하셨다(흠정역). 그는 선지자를 통해 그들에게 자기의 다투심을 주목시키셨고, 그 의미를 제시하시면서 선언하셨다. 또는 하나님은 그 일에 종사할 천사들이나 정의의 사자들을 부르셨다. 그는 그들 중에 불을 사르셨다. 이것은 아마 큰 가뭄을 의미할 것이다. 땅을 따뜻하게 해 주어야 할 햇볕이 땅을 태우고 메뚜기가 먹다 남긴 풀뿌리마저 태워 버렸던 것이다. 또는 이것은 무서운 열병이나 벼락을 가리킬 것이다. 열병은 뼈 속까지 태우며 많은 사람을 삼키고 먹기 때문이다. 벼락은 하늘의 불로서 소돔과 고모라처럼 그들의 집을 삼켰다(4:11). 또는 이것은 도시들이 사고나 적군의 방화에 의해 소실되는 것을 가리킬지도 모른다. 불과 칼은 함께 다니기 때문이다. 농촌이 메뚜기로 황폐하듯 도시는 이렇게 하여 폐허로 화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이 불은 가공할 만한 심판을 집행했다. 하늘로부터 엘리야의 제단 위에 내린 불이 제단 주위의 도랑물을 핥았듯이 이 불은 큰 바다를 삼켰다. 이 불을 막고 끄기 위한 물이 큰 바다의 물처럼 많을지라도 이 불은 그 물을 삼킨다. 하나님의 진노로 점화된 불 앞에 능히 무엇이, 누가 서겠는가? 그 불은 육지까지도 먹었다. 그것은 도시들을 살랐다. 또는 그 불은 이스라엘의 진 끝까지 사른 다베라의 불(민 11:1)과 같았다. 일부 사람들이 망할 때 다른 사람들은 불에서 끄집어 낸 그을린 나무(슥 3:2) 같았다. 모두가 삼켜 마땅했지만 불이 그 일부만 먹어버린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노여움을 전부 다 진작시키지 않은 때문이다.

2. 선지자는 심판의 길로 하나님을 마중하러 나가서 기도로 그의 진노하심을 돌이키려고 노력한다(2절). 그는 환상으로 이들 황충의 두려운 파괴 행위를 보았다. 메뚜기들은 그 땅의 풀을 다 먹었다. 그때 그는 "주 여호와여 청컨대 용서하소서, 청컨대 그치소서(5절)" 하고 말했다. 백성에게 설교하는 가운데 심판을 예언했던 그가 이제는 그들을 위해 도고하는 가운데 심판의 중지를 탄원하고 있다. "저는 선지자니 그가 너희를 위해 간구하리라." 자기들이 예언하는 대상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비록 책망하긴 했지만 흉한 날을 사모하진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선지자의 임무였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에게 재앙의 도래를 보여 주셨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경고와 기도로써 백성들을 돕게 하며, 틈바구니에 서서(겔 22:30)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였다. 위대한 선지자 모세는 종종 이처럼 행했던 것이다. 여기서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선지자의 기도. "주 여호와여" 로 시작되는 그의 기도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청컨대 사하소서. 죄악을 제하소서" (2절). 선지자는 환난의 근저에 죄악이 있음을 본다. 그러므로 그의 구원의 밑바닥에는 죄의 용서가 있음에 틀림없다고 결론짓고 무엇보다 먼저 죄의 용서를 간구한다.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우리가 어떤 재난을 당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께 극히 간절히 바라야 할 것은 죄의 용서이다.

[2] "청컨대 그치소서. 심판을 제거하소서. 불을 그치며(정전의 의미) 논쟁을 그치소서. 우리를 향한 주의 노로 그치게 하소서." 이 말씀은 죄의 용서에 잇달아 나온다. 하나님이 다투시는 자들은 정전을 위해 부르짖을 필요성이 얼마나 큰지 곧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논쟁을 이미 시작하셔서 상당히 진행하셨더라도 정전을 얻을 수 있는 희망은 있는 것이다.

(2) 이 기대롤 성취시키기 위해 선지자는 탄원한다.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2절) 이것은 5절에서도 반복된다. 그러나 그의 반복은 헛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도 고뇌중에 같은 말을 몇 번이고 하시면서 간절히 기도하셨다.

[1] 선지자가 위해서 탄원하는 것은 야곱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신앙을 고백하는 백성이며, 그들은 야곱의 자손이며, 하나님께 택함받고, 그와 언약을 세운 백성이다. 이 기도에서 하나님 앞에 나열하는 것은 바로 야곱의 형편이다.

[2] 야곱은 미약하다. 이스라엘은 이전의 여러 심판으로 이미 너무 미약해지고 약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심판이 임한다면 그들은 완전히 멸망당해 허무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적은 무리가 되었다. 한 때는 티끌과 모래처럼 셀 수 없던 야곱이 이제는 쉽사리 헤아릴 정도로 되었다. 그 소수자들은 미약하다. 그들은 벌레 같은 야곱(사 41:14)이다. 그들은 자신도 남도 도울 능력이 없다. 죄는 큰 백성도 쉽사리 작게 만들며, 많은 자도 줄이며, 부요한 자도 궁핍하게 만들고, 용기있는 자도 겁약하게 만든다.

[3] "야곱이 어떻게 서리이까?" 야곱은 넘어져서 제 혼자서는 일어설 수 없다. 그는 도와 줄 친구도 없고 하나님의 손외에는 일으켜 세워 줄 자도 없다. 일으켜 세워 주어야 할 분이 손을 펴서 친다면 그가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님의 교회가 매우 미약하고 미천한 형편에 놓일 때에는 우리의 기도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마땅하다.

3. 은혜롭게도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자기의 쟁변을 중지하신다. 이것은 거듭 나온다(3, 6절).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켜 가라사대 이것이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는 자기 마음을 바꾸지 않으셨다. 이는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누가 능히 그를 돌이킬 수 있는가? 단지 그는 자기의 방법을 바꾸시며, 다른 방도를 취하셨을 뿐이다. 그는 진노가 아닌 자비로 취급할 결심을 하신 것이다. 그는 "이것이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고 말씀하셨다. 황충은 철회되고 귀환 명령을 받았다. 불의 진행은 정지되었고, 그리해서 집행 유예는 허가되었다. 기도의 능력을 주목하자. 열심있는 기도는 효능이 있다. 기도가 얼마나 유용하며, 얼마나 큰 일들을 이루는가! 심판관에게 간청함으로써 심판을 중단시키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이스라엘을 살려 달라고 빌어서 구원을 얻은 것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 기도하는 백성과 기도하는 선지자는 그 땅에 여간한 축복이 되지 않으며, 따라서 아주 귀중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는 데 주목하자. 그런 자들이 만약 터진 데를 막고 통행을 가능케 하지 않았더라면 파멸은 몇 번이고 발생했을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꺼이, 얼마나 신속히 자비를 베푸시며, 은혜를 베풀기 위해 얼마나 기다리시는지(사 30:18) 주목하자. 아모스는 집행 유예를 동의하여 그 승낙을 얻는다. 이는 하나님은 그것을 승낙하고 싶어하시며, 대신 기도해 줄 자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사방을 두리번 거리시기(사 59:16) 때문이다. 그는 이전의 유예를 들어 자비의 계속을 반대하지도 않으셨다. 오히려 그는 자비를 위해 기도할 것을 권면하신다. 그는 자비를 바라도록 격려하신다. 전번의 일처럼 이 일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용서를 많게 하시며, 일흔 번씩 일곱 번 하는 것보다 더 많이 살려 주시며, 사하신다는 것은 그의 영광이다.

Ⅱ. 우리는 여기서 드디어 배척받는 자들을 보게 된다. 그들은 자주 유예를 받으면서 잘못을 고치지 않았고 궁핍한 지경에까지 전락했으면서 자기 하나님과 의무에로 돌아서지 않았다. 이것은 환상으로 선지자에게 묘사되는데(7, 8절) 그것은 완전한 멸망을 명백히 예고한다(9절).

1. 그 환상은 다림줄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끝에 추가 달린 줄로 석공이나 벽돌공들이 성벽을 지을 때 사용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 다림줄로 치수에 맞춰 똑바로 축성할 수 있다.

(1) 이스라엘은 성벽이었다. 하나님께서 친히 보루로 세우신 견고한 성벽이었던 것이다. 또는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세우신 성소의 방벽이었다. 유대 교회는 스스로 "내가 성벽이요, 나의 유방은 망대 같다" (아 8:10)고 말한다. 이 성벽은 다림줄로 쌓은 것이어서 정확하고 견고했다. 그 구조는 너무도 훌륭하고 튼튼했다. 모든 것은 모형을 따라 잘 배열되어 있었다. 그것은 놋 성벽처럼 오랫동안 견고히 서 있었다.

(2) 하나님은 이 성벽 위에(또는 곁에)서 계셨다. 이것은 그 성벽을 붙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밟고 서 계시기 위해서거나 아니면, 그 성벽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시기 위해서 였다. 그는 그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성벽 위에서 계시는 데 이는 그 성벽을 측량하여 그 성벽이 꾸불꾸불함을 입증하기 위해서이다. Recti est index sui et obliqui-즉 이 다림줄은 성벽의 구부러진 데를 찾아낼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시험하셔서 그들의 악을 찾아내고자 하셨고 그들의 잘못이 어디에 있는지를 나타내 보이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형평의 규칙을 따라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려고 하셨으며, 그들 가운데 다림줄을 베풀고 그들의 성벽이 얼마나 멀리까지 무너져야 하는지 주목시키고자 하셨다. 다윗은 모압인을 줄로 재어 죽이거나 살렸다(삼하 8:2). 하나님이 한 백성을 멸하려 오실 때에는 공평으로 줄을 삼고 의로 추를 삼으신다고 한다(사 28:17). 왜냐하면 그가 벌하실 때에는 정확하게 하시는 때문이다. 이제 "내가 그들을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라" 는 것이 결정되고 있다. 그들은 이전처럼 용서받거나 유예받지 못할 것이다(1:3). 죄인들이 범죄로 오랫동안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하지만 결국에는 그의 인내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자주 용서를 받던 자들이 더 용서를 믿지 못하게 될 때가 이를 것이다. "나의 신이 항상 사람에게 힘쓰지는 아니하리라" (창 6:3 흠정역). 빈번한 유예 뒤에 집행하는 날이 올 것이다.

2. 완전한 멸망의 예고(9절).

(1) 백성들은 그들을 장식해 주고 방어해 주던 것들과 함께 멸망을 당할 것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이란 호칭과 함께 이삭이란 호칭도 받는다. 그들은 이삭의 집으로도 불리운다(16절). 혹자는 이것이 이삭이란 이름의 뜻을 시사한다고 생각한다. 이삭은 웃음이란 의미이다. 그들은 인근의 모든 열방 중에서 웃음거리가 될 것이며, 그들의 인방은 그들을 조소할 것이다. 그들의 산당과 성소 또 높은 곳에 건축된 성이나 성전은 황폐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 성체를 안전한 곳으로 생각했고, 신전을 신성한 성소로 여겼다. 이러한 것들이 황폐하게 될 것이며, 이는 우상 숭배 때문에 그들을 벌하고 그들의 세상적 신뢰를 부끄러워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두 가지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다투셨다. 이들 산당과 성소들이 황폐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그 징벌 가운데서 자기들의 죄와 어리석음을 감지할 수도 있었다.

(2) 온 나라의 파멸의 표징으로서 왕가가 먼저 몰락하게 될 것이다.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이 여로보암은 당시에 열 지파를 통치하던 여로보암 2세를 가리킨다. 그의 가문은 그 아들 스가랴에 이르러 멸족되었다. 스가랴는 모반한 살룸에 의해 백성 앞에서 칼로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왕하 15:10). 그 도구는 얼마나 불의하든지간에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도구를 통해 일어나셔서 우상 숭배하는 가문을 치셨다. 하나님의 진노의 칼 앞에서는 왕의 집조차 피할 곳을 얻지 못할 것이다.

 

7:2 없음.

 

7:3 없음.

 

7:4 없음.

 

7:5 없음.

 

7:6 없음.

 

7:7 없음.

 

7:8 없음.

 

7:9 없음.

 

7:10

아마샤의 무고 (아모스 7:10-17)

독자는 본장 전반부를 읽고 다음과 같은 예상을 했을 것이다.

1. 그 일로 백성이 깨우침을 얻어 회개할 것이라는 기대. 그들은 자기들의 형벌이 유예되었음을 보았고 그 유예는 그들로 회개할 여유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뉘우치지 않으면 용서를 얻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2. 그 일로 그들이 아모스를 사랑스럽게 여기리라는 기대. 아모스 선지는 그들에게 임하는 심판을 저지하기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그들에게 대한 호의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그 심판을 돌이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들이 만약 감사하는 마음만 있었더라면 그 일로 아모스 선지에 대한 애정이 솟아났을 터였다. 그러나 그런 예상은 여기서 전혀 빗나간다. 그들은 불회개를 계속하며, 우리가 아모스에 대해 듣는 다음 소식은 곧 그가 박해를 당한다는 것이다. 원수된 자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 위대한 성도의 찬사가 되듯 자기들을 위해 기도하는 자에게 원수 노릇을 하는 것은 큰 죄인의 수치가 된다는 제 주목하자(35:13, 15; 시 109:4)

Ⅰ. 선지자 아모스에게 대한 악한 정보가 왕에게 제공된다(10, 11절). 밀고자는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였다. 그는 벧엘에서 금송아지를 모시는 제사장 중 우두머리였다. 그는 벧엘의 주재자(그렇게 읽을 수도 있음)였다. 즉 그는 벧엘의 정무도 관장하였다. 그는 아모스가 자기의 허가를 받지 않고 예언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제단도 쳐서 예언했기 때문에 그에게 대해 앙앙불락하였다. 만일 아모스의 교가 대중의 지지를 얻게 되는 날에는 금송아지의 제단도 쉬 버림을 받고 훼파될 것이었던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에베소에서 사당을 만드는 자들도 바울의 전도가 자기들의 생업에 지장을 줄 듯했으므로 그를 미워하였다. 성결을 자처하는 대인물들이 실제로 성결함을 받은 자들의 원수가 되는 예는 흔하다. 제사장들은 왕왕 극히 악랄한 박해자였다. 아마샤는 여로보암에게 아모스를 고소하였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아모스가 위반했다고 고소당한 죄는 반역죄이다.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여 폐위시키고 살해하려 하나이다. 그가 당신의 자리를 노리며, 따라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취해 당신을 약화시키려고 하나이다. 그는 왕의 신실한 백성의 마음에 불평불만의 씨를 뿌려 그들로 왕과 왕의 통치에 반감을 품게 하려하오니 이는 점차로 그들의 충성을 빼앗아 가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땅이 그의 모든 말을 견딜 수 없어 하나이다." 그는 온 나라가 아모스에게 격분하고 있다는 것을 왕에게 넌즈시 시사하며, 그의 설교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인식시킨다. 그의 말은 아무도 화합할 수 없고, 그 시대 사람이 결코 용납할 수도, 하려고도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아모스가 이스라엘 족속 중에서 왕을 모반한다는 고발 속에는 가상된 그 반역이 매우 뻔뻔스럽다는 것과 또 국민에게 매우 악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암시가 들어있다. 형제를 무고하는 자들이 형제들을 통치자와 국가의 원수라고 왜곡하여 묘사하며, 군주에게 반역하며, 그 나라를 분요에 하는 자들이라고 무고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실은 그들은 통치자와 국가의 진정한 친구인 것이다. 모해하려는 자들은 흔히 전혀 거리가 먼 내용을 주장하는 법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백성들이 제사장들과 마찬가지로 선지자의 행위를 용납할 수 없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2. 이 고소를 지지하기 위한 말들(11절). "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 그들은 이런 말에 대한 쉬운 증거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 말로써 아모스가 왕과 나라의 원수이며, 용납받지 못할 자라고 추론한다. 아마샤의 악의를 관찰하자. 그는 아모스의 다른 일면은 왕에게 고하지 않는다. 즉 아모스가 이스라엘을 위해 어떻게 간구했으며, 그 간구로 전후 두 심판을 돌이켰고, 명령이 반포될 때까지는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은 왕에게 알리지 않는다. 아모스는 그들이 만약 회개하고 개심한다면 파멸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언하기를 여러 차례에 걸쳐서 했었다. 아니, 여로보암이 칼에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발언조차 사실이 아니었다. 또 여로보암도 그렇게 죽지는 않았다(왕하 14:28). 그가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과 그의 집을 치리라는 것이었다(9절). 하나님의 선지자와 사역자들은 가끔 다윗처럼 "저희가 종일 내 말을 곡해한다" (시 56:5)고 호소할 일이 생긴다. 그러나 칼이 오는 것을 보고 백성에게 경고하여 안전을 얻도록 해 주는 것이 파숫군의 죄가 되겠는가? 환자에게 병의 위험을 말해 주어서 치료 방법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의사의 죄가 되겠는가? 어리석은 자들은 자기 자신과 자기의 평안과 극히 훌륭한 친구들에게조차 원수가 된다는 데 주목하자. 여로보암이 이 고소를 중시한 것 같지는 않다. 아마 그는 선지자를 존경하며, 아마샤 제사장보다 신적 권위를 더 경회하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Ⅱ. 아마샤는 아모스를 설득하여 그 나라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방법을 사용했다(12, 13절). 아마샤는 왕을 움직여서 아모스를 투옥하거나, 추방하거나 사형시키거나 아니면 적어도 협박하여 침묵시키거나 도주하게 하는 데 실패하자 적당한 방법으로 그를 제거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그는 아모스의 환심을 사서 아는 체하려고 했고, 온갖 감언이설로써 그를 설득시켜, 벧엘이 아닌 유다땅에서 예언 활동을 하게 하려고 했다. 그는 선견자임을 자처하며 아모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듯한 인상을 주지 않고, 그에게 다음과 같은 시사를 한다.

1. 벧엘은 아모스가 사역하기에 부적당한 장소라는 것. 왜냐하면 벧엘은 왕의 예배소 또는 성소였기 때문이다. 왕은 거기에 자기 우상과 제단과 제사장을 두었던 것이다. 그곳은 왕의 뜰 또는 왕의 궁이었다. 왕의 가족들은 거기에서 거주하며, 그곳에 판결의 보좌를 베풀었다. 그러므로 그곳에서 예언을 더 이상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이유를 상론하면 다음과 같다.

(1) 아모스는 너무 솔직하고 무뚝뚝한 설교자여서 왕의 예배소와 궁정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단 옷과 아름다운 옷을 걸치고 비단결같이 부드러운 말을 하는 자들이 왕궁에 적합한 자들이다.

(2) 왕과 그 집이 자신의 궁정과 예배소에서 책망과 위협으로 모욕을 당한다는 것은 적합치 못하였기 때문이다. 아모스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왕과 그 집안을 끊임없이 질책하며, 위협하였던 것이다. 아마샤는 절벽에서 거꾸로 치달리고 있을 때 그 위험을 경고받지 않는 것이 마치 제왕의 전권이며, 귀족의 특권 이기라도 하는 듯이 말한다.

(3) 아모스는 거기서 지지나 격려를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는 일부 사람들에게 희롱과 조소를 받으며, 또 다른 이들에게는 위협과 협박을 받을 것을 각오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개심자를 만들거나 어떤 자를 권유하여 우상 숭배를 포기하게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우상 숭배는 왕의 권세와 솔선수범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교훈을 전파한다는 것은 소위 자기 머리를 기둥에 부딪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거기서 더 이상 예언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2. 아마샤는 유다 땅은 아모스가 활동하기에 적합한 곳이라고 설득한다. "너는 아주 화급히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서나 예언하라. 너는 거기가 안전할 것이다. 거기서는 네가 환영을 받을 것이다. 거기서는 왕궁과 성소가 네 편이 된다. 그곳의 선지자들은 너를 지지할 것이며, 제사장과 방백들은 네 말에 주목하고 존귀한 접대를 허락할 것이다." 여기서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악인들은 신실한 책망자들을 아주 기꺼이 제거하려 하며, 선견자들에게 서슴치 않고 "보지 말라. 우리를 위하여 보지 말라" 고 말하려고 한다.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는 두 증인이 고통이었다(계 11:10). 사람들이 때가 되기 전에 고통을 당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은 영원한 고통을 예방하기 위해서 인 것이다.

(2) 세상적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으로 남을 재기 쉽다. 아마샤는 제사장으로서 오직 자기 지위의 이익만 노리고 있다. 그는 선지자 아모스가 자기와 꼭 같은 견해를 품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떡을 먹을 수 있는 곳에서 예언하도록 조언을 한다. 즉 그에게는 원하는 대로 많은 떡을 틀림없이 확보할 수 있는 곳이 문제였다. 이에 반해 아모스는 하나님이 지정하시는 곳에서 예언을 해야 했다. 그에게는 예언 장소가 돈을 가장 많이 벌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자기를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이었던 것이다. 이익으로 자기 경건을 삼고 부와 출세욕에 지배당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것이 가장 강력한 유인이 된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Ⅲ. 아마샤의 이런 암시에 대한 아모스의 대답이 나온다. 그는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고(갈 6:1) 부자가 되는 것이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의 관심사는 자기의 사역을 충분히 증거하는 데 있었고, 충실한 이행자로 판명되는 데 있었다. 그는 따뜻한 털 담요를 덮고 자는 것보다 선한 양심을 지키는 데 관심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려고 결심했다. 그는 아마샤에게 대한 대답에서 다음과 같은 자기 입장을 밝혔다.

1. 그는 자기 직무와 위치를 변함없이 고수한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했다(14, 15절). 그가 자기를 끝까지 지탱시키며, 그 일에 얽맨다고 확신하는 것은 자기가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권능과 명령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이 직분을 위해 태어나거나 양육을 받은 자가 아니다. 나는 사무엘이나 예레미야와 달리 원래부터 선지자로 지명되지 않았고 다른 많은 선지자처럼 선지 학교에서 교육을 받지도 않았다." "나는 가축을 돌보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다." 뽕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아모스는 가축이나 가계를 위해 이를 길렀다. 그는 평범한 농부였고, 흙 속에서 자라 농업에 종사했고 농촌의 살림에 익숙한 자였다. 그가 소떼와 양떼를 따를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취하여(데려다가) 이르시기를 가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명하시기를 때때로 여호와께로부터 받는 메시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그를 선지자로 만드셨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선지자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할 일과 지위를 지정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모스는 침묵을 지켜서는 안 되었다.

(1) 그는 자기의 일에 대한 하나님의 사명 위탁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는 보냄을 받기 전에는 행하지 않았다. 그는 사도바울처럼 자기가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는 자들을 반박하고 반대하면 위험 부담율이 높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선견자에게 "보지 말라" 고 하며, 하나님이 말하라고 명하신 자들을 침묵시키려는 것은 여간 위험한 일이 아니다. 그런 자는 하나님을 상대로 싸우는 셈이다. 사자에게 대한 모욕을 그를 보내는 군왕에게 대한 모독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명령을 받는 자들은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2) 사명을 받기 전의 초라한 성격은 그의 권위를 약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강화시켰다.

[1] 그는 선지자가 된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그의 예언은 남의 기대나 자신의 상상력에 의한 것으로 돌릴 수가 전혀 없었다. 그의 예언은 순전히 신적 충동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2] 그는 예언 기술을 교육받지도 못했고, 예언의 신비에 대해 교훈을 받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예언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은 것임에 틀림없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께로서 사명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증거이다. 사도들은 원래 교육을 받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자기들의 지식이 예수와 함께한 덕분이라는 것을 확신하였다(행 4:13). 보배가 질그릇에 담길 때 능력의 심히 큰 것은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 나타나게 된다(고후 4:7).

[3] 그는 정당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정직하게 일해서 자신과 가족을 편안히 부양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아마샤가 시사하듯 떡을 위해 예언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예언을 밥줄이 달린 업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을 존귀케 하며, 선을 행하는 책무로 여겼다.

[4] 그는 평생토록 평범하고 질박한 생활 양식에 길이 들어 있었다. 그는 가난한 농부들 틈에서 소박하게만 살았기에 사치하고 질탕한 생활을 좋아하지 않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이 자기를 그리로 부르지 않는다면 왕궁이나 왕의 성소에 갈 마음도 없었다.

[5] 그는 너무나 미천하게 자랐으므로 만일 보다 큰 영에 의해 자극되지 않았더라면 왕이나 권세자들에게 말할 용기도 없었을 것이다. 특히 그토록 대담하고 귀에 거슬리는 일들을 말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를 보내신 하나님이 그를 굳세게 하지 않으셨다면 그가 이처럼 자기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사 50:7). 하나님께서는 왕왕 세상의 약하고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롭고 강한 자들을 당황하게 하신다는 데 주목하자. 하나님께로부터 대행할 권세와 능력을 받을 때에는 드고아의 목자도 벧엘의 제사장을 수치스럽게 한다는 것을 주목하자.

2. 아모스는 아마샤가 자기를 대항한 데 대해 그를 정죄하며 그에게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다. 이는 개인적 감정이나 복수심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과 권세로 행하는 것이다(16, 17절). 아마샤는 아모스의 전파를 전혀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모스는 그를 쳐서 선언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제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그의 말씀을 듣고 떨지어다." 전체적인 애곡을 용납할 수 없는 자들은 그 자신의 비애를 각오해야 한다. 그가 책망받고 있는 죄는 아모스의 예언을 금지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가 아모스를 때리거나 차꼬에 채워 가두었다는 기사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는 다만 아모스에게 침묵을 강요했을 뿐이다. 그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하지 말며 이삭의 집을 향하여 경계하지 말라" 고 했다. 이 명령에 따르자면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고해서도 안 되었고, 한 마디의 말씀을 전해서도 안 되었다. 극히 온화한 말씀의 비를 한 방울이라도 흘려서는 안 되었다. 그러므로 아마샤는 제 운명을 선고받아야 한다.

(1) 그가 아모스를 반대한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와 그의 가족에게 파멸을 내리실 것이다. 이 죄는 아마샤의 불의의 양을 채웠던 것이다.

[1] 그는 자기 혈족에게서 아무런 위안도 얻지 못할 것이다. 아니, 그는 극히 가까운 자들로 말미암아 괴로움을 느낄 것이다. "네 아내는 성읍 중에서 창기가 될 것이다." 그의 아내는 레위인의 첩이 기브아 사람들에게 겁탈 당했듯 적군에게 강제로 능욕을 당하거나(대적이 부녀들을 시온에서 욕보였나이다, 애 5:11) 아니면 그녀가 음란하여 스스로 음녀 노릇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일은 비록 그녀의 죄가 크다 해도 그를 크게 괴롭힐 것이며, 그를 크게 수치스럽게 하고, 그의 영적 음행에 대한 마땅한 벌이 될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우리 가족의 죄 때문이라고 간주해야 한다. 그의 자녀들은 비록 정직을 지키더라도 제 생명을 지키지는 못하게 될 것이다. 그의 자녀들은 전쟁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며, 그는 살아서 그 일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자녀들을 죄악 중에 양육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죄악 중에 그들을 끊으실 것이다.

[2] 그는 자기의 모든 재산도 빼앗기게 될 것이다. 그의 재산은 대적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며, 제비와 줄로 병사들 사이에 분할될 것이다. 부정하게 번 것은 오래 간수되지 못할 것이다.

[3] 그는 이방 땅에서 멸망할 것이다. 그가 죽을 장소는 여호와께 성결한 곳이었던 이스라엘 땅이 아니라 더러운 땅 곳 이방 나라가 될 것이다. 더러운 이방 땅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미워하고 말못하게 하며, 자기 나라를 우상 숭배로 그토록 오염시키는 데 공헌했던 자가 종신하기에 안성마춤이었다.

(2) 아마샤가 선지자를 반대한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땅과 그 나라에 파멸을 내리실 것이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고 말했기 때문에 소고를 당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주장을 철회하지 않고, 되풀이한다. 이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엄중하신 말씀과 다툴 수는 있지만 흔들 수는 없다는 데 주목하자. 아마샤가 그의 말에 아무리 노하고 안달하며, 반대로 말하더라도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본토에서 떠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다투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데 주목하자. 왜냐하면 그가 심판하실 때에는 이기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역자의 입은 막아도 그의 말씀의 진행은 막지 못할 것이니 그의 말씀은 헛되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7:11 없음.

 

7:12 없음.

 

7:13 없음.

 

7:14 없음.

 

7:15 없음.

 

7:16 없음.

 

7:17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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