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된 안전의 위험 (아모스 6:1-7)
본장의 첫 마디는 이 문단의 내용이 된다. 그러나 이 말씀은 매우 이상하게 들리며 세상 사람의 헛된 느낌과 상반된다. "화있을진저, 안일한 자여." 우리라면 냉큼 "안일한 자는 복이 있다" 고 말할 것이다. 아무 곤란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고 부드럽고 따뜻한 데 누워 아무 것도 마음 깊이 새겨 두지 않는 자는 안일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팔자가 좋다고 부러워하며 감각의 즐거움에 젖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상관하지 않는 자를 슬기롭다고 생각한다. 자기 몸에 좋은 것을 하며 몸을 중하게 여기는 자는 제 자신을 위해 잘하는 자로 간주되는 게 통례이다. 그러나 화가 있으리라고 선언되는 대상은 바로 그런 자들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들의 안일과 그들의 화가 무엇인지 보게 된다.
Ⅰ. 여기에는 그들의 교만과 안심과 육욕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회계하려고 하시는 것도 그런 것들에 대해서이다.
1. 그들은 헛되게도 자기들의 존귀를 자만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귀한 지위가 자신을 하나님의 심판에서 안전히 지켜 줄 것으로 믿었고 하나님과 사람의 진노를 다 막아 줄 것으로 생각했다.(1) 시온에 거하는 자들은 그곳이 자기들에게 충분한 명예와 보호를 보장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온에서는 온갖 재앙에 대한 불안을 갖지 않아도 좋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시온은 천연의 요새이자 인위적으로 강화된 견고한 성이었던 때문이다. 또 시온은 왕성이었고 거기에는 다윗가의 보좌가 자리잡고 있었다(시온은 유다의 수도여서 참으로 큰 성읍이었다). 그리고 특히 시온은 거룩한 성이었다. 거기에는 성전이 있었고 이스라엘의 언약궤가 있었다. 시온에 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성소가 자기들의 도피처가 되고 그의 심판으로부터 자기들을 보호해 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들은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렘 7:4)고 거듭 강조하였다. 그들은 성산을 인하여 교만한 자들(습 3:11)이다. 교회의 특권과 시온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기들의 지위를 근거로 세상적 안전감에 젖으며 교만으로 뻐기는 자들이 많다는 것을 명심하자.
(2) 사마리아 산에서 거하는 자들은 마음이 든든하였다. 사마리아의 산은 시온 같은 거룩한 산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마리아는 유력한 왕국의 수도였고 예루살렘을 모방한 이스라엘 종교의 총본산지였으므로 그들은 사마리아 산을 의지하였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세멜의 작은 산은 시온 언덕처럼 명성이 자자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 언덕들과 산에서 구원을 소망하였다.
(3) 남북의 두 왕국은 모두 이스라엘 즉 "하나님과 동행하는 왕자" 의 후손이라는 것을 귀하게 여겼다. 그들은 그 때문에 자기들이 열국 중 우수하고 유명하다고 간주하였다. 그들은 어느 민족보다 오래되고 존귀하다고 자신하였다. 그들은 열국의 첫 열매(원의를 그렇다)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봉헌되어 온 수확물을 성화시키는 맏물이었다. 이스라엘 족속은 그들을 따랐다. 즉 그들은 두 왕국으로 분열되었고 시온과 사마리아는 각기 그 모성이었다. 안일한 자들은 방백들과 치리자들이었고 큰 자들이었다. 그들은 열국 중 우승하여 유명한 자들이었고 두 왕국의 우두머리들이었다. 그들은 시온과 사마리아에 상주했으므로 온 이스라엘 족속은 재판을 청구하러 그들에게로 갔다. 위대하게 되어도 교만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큰 국가와 위인들은 자기를 과대평가 하기 쉬우며 자기들이 이웃보다 조금 더 우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웃을 내려다보기 쉽다. 그러나 그들의 교만과 안심에 제동을 걸기 위해 선지자는 그들에게 그들의 지식이 방주 내에 있던 성읍들을 주목해 보라고 명한다(2절). 그 도시들은 그 당시에 시온이나 사마리아 못지 않게 이름을 드날리던 성이었으나 멸망을 당했던 것이다. "너희는 갈래에 건너가서(갈래는 니므롯이 건설한 고대 도시였다, 창 10:10) 어떻게 되었는지 보라. 그곳은 이제 폐허가 되어 있다. 또 수리아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대 하맛으로 가 보라. 산헤립은 하맛의 신들을 훼파시켰다고 자랑한다. 마찬가지로 가드도 하사엘에게 파멸을 당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왕하 12:17). 그런데 그곳들은 이 나라들보다 나았느냐? 그렇다. 그들은 너희보다 나았고 그들의 토지는 너희 토지보다 더 넓었다. 그래서 안전에 있어서 너희보다 더 자신할 만한 이유를 가졌다. 그러나 너희가 보듯 그들의 안전은 오유화해 있다. 그런데도 너희는 감히 안심하느냐? 너희는 인구가 많은 노아몬보다 나으냐?(나 3:8)" 다른 자의 멸망은 우리에게 안심하지 말라고 금하는 본보기가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2. 그들은 결코 회계에 호출되지 않으리라는 억측하에 악한 행실을 고수했다(3절). "너희는 흉한 날이 멀다고 한다. 너희는 재앙의 날, 계산 일이 결코 오지 않을 것으로 여기거나 아니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고 간주하여 아무런 느낌을 갖지 않는다. 너희는 흉한 날이 멀다 하며 계속 그 날을 멀리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de dic in diem-즉 날마다 연기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강포한 자리로 가까워지게 된다. 너희는 온갖 부정 행위와 압제를 감행하며 악한 위(재판장)와 교제한다. 이것은 율례를 빙자하고 잔해를 도모하는 것이다(시 94:20). 너희는 실제로 너희 심판을 성숙시키는 것이 마치 너희를 심판에서 보호해 주는 것이 되기라도 하는 듯이 그것을 가까워지게 한다." 사람들은 심판이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를 가까이 있다는 데 주목하자. 그러나 이와 같이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들은 자기를 기만하는 자들이다.
3. 그들은 가지각색의 쾌락과 연락에 빠졌다(4-6절). 이들 이스라엘인들은 완전한 쾌락주의자였고 욕망의 노예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존귀를 생각하고 극기와 금욕을 솔선수범해야 마땅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이 자기들의 육욕 생활을 합리화시켜 준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압제와 강포의 이득물이 이런 비난을 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흉한 날이 멀다 하여 향락에 하등 방해를 받지 않았다. 그들이 여기서 책망받는 것 그 자체는 죄스러운 것이 아니다. 여기에 나열되는 것들은 적당히 그리고 건전하게 사용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적 정욕의 만족에다 자기들의 행복감을 두었다. 그들은 전념해야 할 일이 많은 공직자들이었으나 쾌락에 몰두하며 시간을 욕망의 충족에 허비하고 생각과 염려와 재산을 허탄한 데 쏟아 넣었던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이런 향락에 쏠려 있었다. 이 때는 하나님께서 자기 섭리로 그들의 애곡과 애통을 촉구하시던 때였다(사 22:12, 13). 그러나 그들은 만사를 제쳐놓고 향락에 열중했다. 그들이 죄와 진노 아래 있어서 하나님의 심판이 바야흐로 그들에게 개입하려던 때 그들은 "내일도 오늘 같을 것이며 크게 넘칠것이라" (사 56:12)고 가정하면서 포도주와 독주를 요청했으며 이렇게 하여 하나님과 반대로 행하고 그의 공의를 무시하였다.
(1) 그들의 가구는 매우 사치스러웠다. 그들이 눕거나 먹는 데에는 상아 상 이외에는 아무 것도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실은 굵은 베와 재가 그들에게는 더 잘 어울렸을 것이었다.
(2) 그들은 나태하였고 안일을 탐하였다. 그들은 마땅히 떨쳐 일어나 일에 골몰했어야 할 때 침상에 누울 뿐만 아니라 그 위에서 기지개를 켜기도 했다. 그들은 즐겨 게을렀고 무위도식을 자랑으로 여겼다. 대다수의 가난한 형제들은 생필품이 부족할 때도 그들은 "여분의 것이 풍부하였다" (그렇게 읽는 사본도 있다).
(3) 그들은 식성이 까다롭고 진미를 즐겼다. 그들은 무엇이나 최상품의 음식을 먹으며, 푸짐하게 먹어야 했다. 그들은 양떼에서 어린양을 취하여 먹었고(어린양들을 도매로 사서)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었으며 가장 살찐 놈으로 잡았다. 아마 이들은 자기양떼나 우리에서 취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에게서 강제로 뺐은 것이리라.
(4) 그들은 가무음곡으로 잔치에서 즐거워하며 흥겨워했다. 그들은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하며 합창하였다. 그들은 새로운 악기를 제조하며 다른 어느 부문보다 이 방면에서 자기 조상들을 능가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지혜를 짜내어 어떻게 하면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하였다. 사람들 중에는 호사스런 쾌락 이외에는 재간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그런 자들은 자기의 발명의 재간과 고안술을 그 방면에 모두 쏟는다. 그들은 다윗처럼 악기를 제조한다. 이전에는 왕들만 누리던 것을 이제 그들도 누린다. 또는 이것은 그들의 불경스런 환락을 암시한다. 그들은 성전 음악을 흉내내며 그것을 조롱했다. 왜냐하면 아마 성전 음악은 구식 음악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벨론인들처럼 성전 음악을 놀리는 데 자만심을 느꼈을 것이다. 바벨론인들은 포로들에게 시온의 노래를 들려 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벨사살이 성전의 기명으로 포도주를 부어 마셨을 때 그의 불경함도 그러했고 신적 규례를 조롱하려는 목적에서 시편 곡조로 음탕하고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는 자들의 불경스러움도 그러했다.
(5) 그들은 과음했고 아무리 부어도 모자란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잔이나 컵으로 마신 것이 아니라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셨다(렘 35:5). 그들은 조금씩 따라 주는 것을 싫어했고 한숨에 많이 들여마셔야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몰래 많이 마실 수 있는 대접을 이용한다.
(6) 그들은 극히 강렬한 향수를 좋아했다. 그들은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른다. 이는 냄새를 좋게 하며 자기들의 몸을 더 사랑스럽게 하고 살아 있는 동안에도 항상 따라 다니는 죽음의 냄새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보통 기름으로는 그들의 성미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값싼 기름으로 충분한 데도 그들은 멀리서 값비싸게 주고 산 귀한 기름을 사용해야 직성이 풀렸다.
4. 그들은 쇠미해 가고 몰락해 가는 하나님의 교회와 국가에 대해서는 하등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였다. 유다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이들은 요셉이라 불린다. 시 80:1)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교회는 곤경에 처해 있었고 침략을 당했으며 모욕을 받았으며 훼방을 받았다. 그들은 자기 나라의 통치를 위탁받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국사의 책임자였고 국가 안전의 보존자였다. 그런데 그녀의 나라는 평화와 복지가 크게 침해를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너무나 쾌락에 탐닉하여 그런 일들을 알지도 못했고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그들은 일이면 너무도 싫어서 그런 피해를 복구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나라야 흥하든 망하든 매 한가지였다. 그들은 단지 편안히 누워 쾌락 가운데에서 생활할 수 있으면 그 뿐이었다. 요셉에 속한 개개인들은 환난 중에 있었고 억울함과 곤란과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형편을 인식하지 않았고 그런 자를 구제하거나 시정하려는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들의 성품은 성자 욥의 기질과 상반되었던 것이다. 욥은 번영 중에 있을 때 고생 중에 있는 자와 함께 울었고 빈궁한 자를 위하여 그 마음에 근심하였다(욥 30:25). 어떤 이는 고난받는 교회를 요셉이라고 부르면서 이것은 바로의 술 관원의 기사를 시사한다고 생각한다. 즉 바로의 술 시중 들던 관원의 기사를 시사한다고 생각한다. 즉 바로의 술 시중 들던 관원은 복직되어 다시 그 주인에게 술잔을 올리게 되었어도 옥중의 요셉을 기억하지 않고 그를 잊어 버렸던 것이다(창 40:21, 23). 그와 같이 그들은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셨지만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하지 않았다. 자신의 쾌락에만 열중하는 자들은 흔히 타인의 괴로움에 무심하다는 것을 명심하자. 하나님의 교회가 고난 중에 있을 때 우리가 그 때문에 고민하지 않고 그것을 마음에 새기지도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크게 노엽게 한다.
Ⅱ. 여기서는 그들의 운명이 선고되고 있다(7절). "그러므로 저희가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힐 것이며 포로에게 뒤따르는 온갖 불행에 떨어지게 되리라. 그리고 침상 위에서 기지개켜는 자들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 그들의 풍요는 탈취될 것이며 그들은 풍족을 자기들의 욕망의 음식과 연료로 삼았기 때문에 그 풍족이 그치게 될 것이다."
1. 호화롭게 생활한자들은 자유조차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존엄과 주권을 남용했으므로 종살이의 형벌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2. 자기 땅의 즐거움과 기쁨을 신뢰한 자들은 이방 땅으로 끌려가게 될 것이며 자기들의 자랑과 신뢰를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사로잡힐 것이다.
3. 관능의 즐거움을 행복으로 삼으며 감각적 쾌락에 열중하던 자들은 그 즐거움을 박탈당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잔치 소리는 그치게 되고 고생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4. 기지개켜는 자들은 수축되어 더욱 쪼그라들게 될 것이다.
5. 흉한 날이 멀다 하던 자들은 재앙의 날이 남들보다 자기들에게 더 가깝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환난이 온다 해도 자기들만큼은 맨 마지막에 당하게 될 것이라는 바람으로 든든해 하던 자들은 사로잡힌 자 중 앞서 사로잡힐 것이다. 타인의 환난과 교회의 어려움을 염두에 두지 않는 자들은 자신의 환난을 급속히 재촉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이 애곡을 촉구하실 때 환락에 몰두하고 있는 자들은 그것이 반드시 형벌을 받고 마는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사 22:14).
심판의 위협 (아모스 6:8-14)
본장의 전반부에서 우리는 안일한 이스라엘인들이 아무리 즐거워도 충족을 얻을 수 없다는 듯이 쾌락만 쌓는다는 것을 읽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아무리 불행해도 모자라기라도 하듯 그들에게 형벌을 쌓으시는 것을 읽게 된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Ⅰ. 하나님이 지우시는 이 짐은 얼마나 강하게 결박되어 있는가! 그것은 그들의 허풍이나 안전으로 떨쳐 버리지 못한다. 그것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강한 팔로, 전능하신 손으로 묶으신 짐이기에 아무도 저항할 수가 없다. 그것은 맹세로 부하된 것이어서 그 판결은 취소가 불가능하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맹세하셨으니 그는 후회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실 수가 없으므로 자기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셨다. 그들의 형편은 얼마나 비참하고 얼마나 두려운가!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의 멸망 곧 영원한 파멸을 맹세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목적을 수행하실 수 있고 그것은 변경될 수가 없다.
Ⅱ. 이 짐은 얼마나 무거운가! 세부적으로 살펴보자.
1.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싫어하시며 포기하신다. 이것은 여간한 불행을 암시하는 게 아니다. 이것은 온갖 불행을 가리킨다. "내가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노라." 이것은 그들이 자랑하고 웅시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자기를 열국 중 우수하여 유명한 자라고 칭하며 간주하는 것도 그런 모든 것 때문이다.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갖는 가시적 모든 특권, 성전, 제단, 제사장직등은 어떤 것에도 견줄 수 없는 야곱의 영광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죄로 모독되고 오염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아주 싫어하셨다. 하나님은 그것들을 싫어하며 멸시하셨다(5:21). 하나님께서는 위선자들이 경건의 능력은 싫어하면서 경건의 모양만 내세우고 있는 것을 싫어하신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리고 그가 만일 그들의 악을 인하여 성을 싫어하신다면 그들의 궁궐들을 미워하실 것은 뻔한 이치다. 이는 거기서 발견되는 부정과 압제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상대자로 삼을 만큼 만족하고 신뢰하는 피조물은 그 때문에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 된다는 것을 주목하자.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궁궐을 미워하시는데 이는 그 안에 거하는 자들의 악을 인함이다. 여호와의 저주가 악인의 집에 있다(잠 3:33). 하나님이 미워하실 때에는 "이 성읍과 거기 가득 그것을 황폐시킬 것이며 그 모든 재물을 약탈할 것이다. 하나님께 미움받고 버리움을 당하는 자들은 모든 의도와 목적이 전혀 제 구실을 못하게 된다.2. 그들 중에는 전반적인 대살륙이 있을 것이다(9절). "대적의 칼날을 피한 한 집에 열 사람이 남는다 해도 그들은 또 다른 방법으로 심판을 당하게 된다. 그들은 기근이나 역병으로 다 죽을 것이다. 극히 흉한 때에라도 우리는 둘이 한 침상에 있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는 비율에 따라 한 집에 열 사람이 있다면 최소한 반수는 죽음을 모면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열 명 중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한다고 한다. 이 살륙의 혹심함을 나타내는 또 다른 사례는 죽은 자의 최근친이 거들어 줄 자가 없으므로 손수 시체를 염습하며 매장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10절). 그것은 이행권이 있는 근친이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며 그들은 이 일을 마지못해 행할 것이다. 이것은 청년들이 가장 먼저 죽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보통 살아남는 유가족 중에서는 숙부(흠정역에는 '죽은 사람의 숙부'로 되어 있음)가 연장자인 때문이다. "숙부가 그 시체를 불사를 자와 함께 그 뼈를 집 밖으로 가져가려고 올 때에 그 집 바로 곁에 있는 이에게 묻기를 '아직 너와 함께 한 자가 있느냐? 살아 남은 자가 있느냐' 할 것이며 그는 '이게 마지막이다. 전 가족이 몰사하여 가지도 뿌리도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 심판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그런 경황 중에도 더욱 완악한 것으로 보이는 까닭이다. "집 곁에 있던 자가 시체를 운반하는 자들과 담화하기 시작할 때에는 '잠잠하라. 이 재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우리에게 설교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을 일컫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 노하셔서 그에게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너무도 지독하게 우리의 잘못을 주목하시므로 우리는 감히 그의 이름조차 운위하지 못한다?' "라고 말할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은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며 자신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으며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한다(잠 19:3). 그런 때에는 그들 자신도 하나님의 손길을 주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도 그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아마 여호와의 이름을 운위하는 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일부 왕들에 의해 금지되었을 것이다. 이에 반해 모세 율법에는 이방신들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손이 펼쳐져 치시고 질병과 죽음이 가정에 임하고 있는데도 하나님의 이름을 일컬으려 하지 않고 그를 예배하려 하지 않는 자들은 참으로 비참하게 완악한 자들이다. 하나님이 "묶는 데도 부르짖지 않는 자들은" 진노를 쌓는 자들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3. 그들의 집들은 훼파될 것이다(11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큰 집을 쳐서 갈라지게 하며 작은 집을 쳐서 터지게 하실 것이다. 그들의 집은 갈라져서 아름다움과 견고함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속히 무너져 내리게 된다. 제왕의 궁궐이라 해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책망을 면하지 못하며 가난한 사람의 오두막집이라 해서 예외로 취급되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떤 집도 이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죄가 그들을 파멸의 대상으로 주목할 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방법을 찾아 그들의 파멸을 이루실 것이다. 이와 같은 균열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데 주목하자.
Ⅲ. 그들이 이와 같이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우리가 사태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여호와는 의로우시다고 말할 것이다.
1. 그들을 개심시키기 위해 사용된 방법은 죄다 아무런 효과가 없고 무익하였다(12절).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소가 어찌 거기에서 밭을 갈겠는가? 그렇게 해 봐야 수고만 할 뿐 아무런 이득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묵은 땅을 기경(氣莖)하기 위해 선지자들을 보내셨지만 그 선지자들은 그들이 바위처럼 단단하고 경화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바위처럼 거칠고 울퉁불퉁해서 선지자들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고 그 어떤 수단도 그들에게는 작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그런 시도를 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은 길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책망도 듣지 않을 것이며 완전히 포기될 것이다. 밭이나 포도원처럼 기경되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은 볼모의 바위나 사막처럼 배척을 받을 것이다(히 6:7, 8).2. 그들은 권력을 남용하여 많은 사람을 학대하고 압제하였다. 그러므로 최고의 재판관께서는 그들의 억울한 사정을 시정하려고 하시며 복수하려고 하신다. "너희는 공법을 욕지기 나는 쓸개로 변하며 정의의 열매를 유독한 인진으로 변하였다." 공법을 위탁받은 자들이 자기 권력으로써 마땅히 수호하고 옹호해야 할 공평을 도리어 짓누르며 침해하는 것을 보면 누구나 욕지기가 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범죄로 변질시킬 때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에게 쓸개같이 되어 마땅할 것이다.
3.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했다. 그들은 제 힘만 믿고 자기들이 전능자의 적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13절). 그들은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신뢰할 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 데도 재앙이 자기들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즐거워했다. 그들은 신뢰할 것이 전혀 없는 데도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뿔은 우리 힘으로 취하지 않았느냐? 우리는 큰 존귀와 주권에 이르렀고 우리 원수들을 분쇄하여 승리를 쟁취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힘 즉 우리의 기술과 용기, 우리의 재물과 군사력으로 취한게 아니냐? 그렇다면 우리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오? 우리가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나님이라도 두려워하고, 도움을 청할 필요가 없다." 번영과 성공은 흔히 사람들을 안심하게 만들고 교만하게 만든다는 점에 유의하자. 많은 일을 이룩한 자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고 하나님 없이도 그 일을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조차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제 힘을 신뢰하는 자는 허무한 것을 기뻐할 것이며 또 그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마 그들은 입으로 그렇게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비록 totidem verbis-즉 많은 말로 그렇게 표현하진 않았지만 그들의 마음이 행동은 그런 말을 나타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간파하신 것이다.
Ⅳ. 이 짐은 그들의 어깨에 매우 용이하게 심히 효과적으로 지워졌다(14절). 그들에게 이런 짐을 지우는 이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다. 그는 자기가 기뻐하시는 일을 마음대로 행하실 수 있고 또 행하신다. 그는 모든 피조물을 마음대로 부리시고 지배하신다. 그는 하실 일이 있을 때 어떤 도구로 그 일을 행해야 할지 당황하는 법이 없다. 그들은 비록 이스라엘 족속이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나라를 일으켜 그들을 치게 하실 것이다. 그들은 그 나라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여러 번 희망의 대상으로 삼았던 앗수르 민족이었다. 그러나 이 나라는 "북으로 하맛 어귀에서 남으로 아라바 시내(또는 광야의 시내) 즉 시홀이나 나일의 애굽 시내까지" 그들을 학대하며 곤경에 빠뜨리며 고통을 당하게 할 것이다. 온나라가 불의에 가담했으므로 재난에도 동참할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모습으로든지 사람이 우리에게 고난의 도구가 될 때는 그들을 일으켜 우리를 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데 주목하자.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수중에 들어 있으며 그 손의 채찍이요 칼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는 시므이로 다윗을 저주하도록 명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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