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다니엘 0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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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잡혀간 다니엘 (다니엘 1:1-7)

Ⅰ.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그의 통치 원년에 즉 유다 왕 여호야김 3년에 처음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공략에 성공하였다(1,2절). 그는 예루살렘을 에워쌌다가 곧 정복하고 왕을 생포했으며 자기 마음대로 데려가고 싶은 자는 데려가고 가져가고 싶은 것을 빼앗았으며 여호야김을 여전히 치리자로 남겨놓아 공물을 바치게 하였다. 여호야김은 약 8년간 조공을 바치다가 반역했는데 그것이 그의 최후가 되었다. 물론 이때 예루살렘이 멸망되지도 않았고 포로도 19년 후까지 계속되지만 거개의 해석자들은 바벨론 포수 칠십년을 이때부터 가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니엘은 이 첫 해에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70년 간을 계속해서 거기에 머물렀다(1:21 참조). 이 기간동안 열방은 느부갓네살과 그 아들과 그 손자까지 삼대를 섬기게 된다(렘 25:11). 그러므로 다니엘 선지 한 사람이 자기 당대에 바벨론 제국의 흥기와 통치와 몰락을 목격한 셈이다. 이야마로 res unius aetatis--즉 단일 시대의 사건이었다. 세상 왕국은 이처럼 단명하다. 그러나 하늘 나라는 영원하다. 의인은 그들의 뿌리 박는 것을 보면서 그들의 망하는 것도 보게 될 것이다(욥 5:3; 잠 29:16). 브루톤(Broughton) 선생은 출애굽 이래 하나님의 통치 기간이 비례 관계에 있음을 주목한다. 즉 출애굽에서 가나안 입주까지가 40년이요, 그때부터 땅 분배 기간이 칠 년이며 거기서 사무엘 원년까지가 일곱 희년(Jubilee)이었다. 그리고 예언은 사무엘에게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이 포로기 초년까지가 490년(열 희년)이요, 포로 귀환까지가 70년이며 그때부터 그리스도의 죽음까지가 또 490년(열 희년) 남짓하고 예루살렘 멸망까지가 40년이라는 것이다.

Ⅱ. 느부갓네살은 이 승전을 활용했다. 그는 성이나 나라를 파괴하지 않고 바벨론에게 화를 당하리라던 첫 번 경고에 부합되는 것만 성취시켰다. 그 재앙의 경고는 히스기야에게 선언되었던 것이다(사 39:6, 7). 그는 바벨론 왕의 사신들에게 자기 보물을 보여 준 때문이다. 그 경고는 보물과 자녀들이 탈취당할 것이며, 그들이 이로써 겸비케 되고 회개하면 바벨론 왕의 권세와 성공도 더 이상 어쩌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보다 작은 심판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보다 큰 심판을 보내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일로도 회개치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풀무를 일곱 배나 더 뜨겁게 가열시키실 것이다.

1. 그들은 성전 기물 중 "얼마"를 옮겨갔다(2절). 유대인들은 불의를 계속 행하면서도 성전이 자기들을 지켜 줄 것으로 기꺼이 신뢰하였다. 그러나 그 신뢰의 헛됨을 보여 주기 위해 먼저 성전이 약탈된다. 하나님 예배에 사용되던 많은 성기명(聖器皿)들이 바벨론 왕에게 탈취되었고 이들은 매우 값진 기구들이었을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이들을 전리품으로 자기 신의 묘에 가져갔고 맹목적 신앙심으로 자기 신에게 승전에 대한 찬미을 드렸을 것이다. 이들 기구들을 전적으로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자기 신에게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 기구들을 자기 신의 보물 창고에 두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주목하자.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른 신들의 형상들(즉 우상)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져 왔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성전 기구들이 다른 신들의 보고로 옮겨지는 것을 묵과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죄로써 성소의 기물을 더럽힐 때 하나님이 심판으로써 그들을 더럽혀 마땅하시다는 것을 명심하자. 이미 예언된 대로 아마 유다 왕궁의 보고도 깡그리 약탈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유독 성전 기구의 탈취만 언급된 것은 나중에 우리가 보게 되듯 이런 모독이 갈데아인의 불의의 양을 채우는 것이기 때문이다(5:3). 그러나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이때 약탈된 것은 성전 기구 중 일부였다. 다른 일부는 시험을 위해 남겨진 것이다. 즉 그들이 나머지 일부의 약탈을 방지하기 위해 정당한 방도를 취하는지 않는지를 보시기 위해 남겨 놓으신 것이다(렘 27:18 참조).

2.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과 젊은이들을 끌어갔다. 그들은 특히 와가나 귀족 출신으로 아름답고 유망하고 준수한 젊은이들을 데려갔다. 이와 같이 아비의 죄악은 자손에게 보응됐다. 느부갓네살이 이들을 끌어간 것은 다음과 같은 동기에서이다.

(1) 자기 성공을 과시하기 위한 전리품으로써 그는 이들을 통해 자기의 승리를 증명시키고 칭송받게 하려고 꾀한 것이다.

(2) 유다에 남아 있는 포로들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한 볼모로써 그들의 부모는 자녀들이 보다 잘 대우받도록 하기 위해 잘 처신하려고 할 터였다.

(3) 자기를 섬길 자손으로서. 그는 이들을 데려가서 자기 밑에 등용시킬 인재로 양성하려고 했다. 이것은 위대한 왕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듯 자기 동족보다 이국인(설사 흑인일지라도)의 배종(倍從)을 받고 싶어하는 묘한 허영심에서였거나 아니면 갈데아인들 가운데는 이스라엘 청년만큼 재치있고 씩씩하고 솜씨있는 자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재주는 그렇게 많던 민족이 지혜와 은혜는 그토록 적게 가졌다는 것은 수치였다. 다음을 주목하자.

[1] 바벨론 왕이 이 소년들의 선택에 대해 내린 지침(4절). 그들은 신체적으로 흠이 있는 자를 선발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아름답고 잘 생긴 소년들을 골라야 했다. 용모는 재간과 성품의 지표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이들은 모든 재주를 통달하며 지식을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한 자라야 했다. 기민하고 예리하며 자기 나라와 그때까지 교육받은 학문에 대해 즉시 이지적 대답을 할 수 있는 자라야 했다. 그가 젊은 소년들을 택한 것은 소년이라야 유순하여 길들이기 쉬우며 자기 조국과 동포를 쉽사리 잊어버리고 갈데아인에게 동화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들에게 대한 자기 의도와 구상을 의식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기 왕궁에 모실" 만한 능력을 가진 자라야 했다. 그가 공공 업무에 적합한 후계자들의 양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은 이 신흥 군주가 품은 정책의 한단면도이자 그의 번영에 대한 길조이기도 했다. 그는 아하수에로왕과 달리 정욕의 충족을 위해 젊은 소년들을 선발하라고 명했다. 지혜로운 자를 등용하는 것은 통치자에게 이익이 된다. 그러므로 지혜있는 소년들을 찾아내서 양육하려고 애쓰는 통치자는 현군이다, 공직에 적합한 많은 인물들이 초야에 묻혀서 썩고 있는 반면, 공적에 부적합한 자들이 등용된다는 것은 세상을 위해서 불행한 일이다.

[2] 느부갓네살이 이 소년들에게 쏟은 정성은 교육과 부양 두 가지면에서 나타났다.

첫째, 교육면에서는 갈데아 사람의 학문과 방언을 가르치도록 명하였다. 이들은 지혜롭고 지식있는 소녀들로 간주되었지만 더 교육을 방아야 했다. 지혜있는 자에게 훈계를 하라. 그러면 그는 학식이 더할 것이다(잠 1:3 이하). 커서 좋은 일을 하려는 자들은 어릴 때 배워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젊은 시절은 학습의 시기이다. 이 때를 놓치면 다시 구제받기 어렵다. 느부갓네살은 당시 갈데아에서 유행되던 마술이나 점술 따위의 불법적 기술을 가르치려고 의도한 것 같지는 않다. 만일 그랬다면 다니엘과 그 동반들은 자기 자신을 그런 학문으로 더럽히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는 갈데아 종교를 가르치도록 명령했다는 구절도 나오지 않는다. 이로써 보건데 이때만 해도 그는 완고한 우상 숭배자가 아니었던 것같다. 사람만 재주있고 충실하고 그가 의도하던 일에 적합하다면 그들이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다한들 그것은 별반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에게는 그 나라의 언어, 법, 역사, 철학, 수학, 영온 기술, 전술, 항해술 등 자기 세대 사람들에게 기여할 수 있는 학문을 가르쳐야 했다. 훌륭한 청소년 교육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야 말로 공중에게 대한 진정한 봉사라는 것을 명심하자.

둘째, 부양면에서 그는 이들에게 삼년 동안 음식을 공급했다. 필수품뿐만 아니라 고량 진미도 하사해서 이들의 학구 활동을 격려했다. 그들은 날마다 와의 진미와 왕의 마시는 포두주를 공급받았다(5절). 이것은 느부갓네살의 관용성과 인간미의 본보기였다. 그는 그들이 비록 자기 포로였지만 그들의 출신과 자질, 정신과 재주를 고려하여 귀하게 대접했고 그들의 포로 생활을 편안하게 해 주려고 노력했다. 좋은 가문에 태어나 잘 양육받은 그들은 재난을 당하더라도 그들에게 합당한 예우를 받고 있다. 후한 교육을 시킬 때는 후한 부양도 수반되어야 한다.

Ⅲ. 다니엘과 그 동무들에 대한 세부적 설명. 그들은 "유다 자손" 이었다. 유다 지파는 유다 왕이 속한 지파였다. 이들은 아마 다윗가의 자손이었을 것이다. 다윗가는 그때 수가 굉장히 많았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에게 그 몸에서 날 자녀 중 일부는 잡혀가서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나 시종장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었다(왕하 20:18). 환관장은 다니엘과 그 동무들의 이름을 고쳤다. 이는 한편으로 그들에게 대한 자기 권세와 자기에게 대한 그들의 복종을 나타내기 위해서였고 또 한편으로는 그들이 할례시에 받았던 히브리명은 하나님과 관계된 부분 곧 Jah란 말이 들어 있었으니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관이시다. "하나냐는 "주의 은혜," 미사엘은 "강하신 하나님," 아사랴는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다" 란 뜻이다. 갈데아인들은 이들로 열조의 하나님과 소시의 인도자를 잊도록 만들기 위해 갈데아의 우상 숭배 냄새가 풍기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벨드사살은 "벨(Bel)의 숨긴 보물을 지키는 자" 란 뜻이고 사드락은 갈데아인이 숭배하던, "태양의 영감" 이란 뜻이다. 메삭은 "삭(Shach) 여신에게 속했다" 는 뜻이다. 그들은 삭 여신의 이름으로 비너스(Venus)여신을 숭배했다. 아벳느고는 "밝은 불의 종" 이었으니 그들은 불도 숭배한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들은 이들에게 강제로 열조의 종교를 버리게 하거나 정복자의 종교로 개종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가급적이면 교묘한 방법으로 부지불식간에 열조의 신앙을 약화시키면서 정복자의 종교를 주입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소년들이 얼마나 안락한 대우를 받았는지 주목하자. 그들은 조사의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긴 했지만 그들 자신의 장점 때문에 후대를 받고 포로된 땅은 그들의 고국보다 더 편안하였던 것이다.

 

1:2 없음.

 

1:3 없음.

 

1:4 없음.

 

1:5 없음.

 

1:6 없음.

 

1:7 없음.

 

1:8

총애받는 다니엘 (다니엘 1:8-16)

우리는 다음 사실을 살펴보면 더욱 많은 만족을 얻게 된다.

Ⅰ. 다니엘은 요셉이 전옥에게 총애를 입은 것처럼(창 39:21 이하)환관장에게 총애를 받았다(9절). 그는 환관장에게 긍휼을 얻었다. 물론 다니엘은 총애받을 만한 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의 재주와 싹싹한 성품은 환관장의 눈에 들었을 것이다. 그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였다(9:23). 그러나 다니엘로 환관자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그의 장점 때문에 호감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낸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신망이 하나님의 은사임을 생각하고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이다. 호감을 얻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그리고 그들이 선한 이해를 얻는 것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이다. 시편 말씀은 여기서 다시 한 번 증명되었다. "저희로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 (시 106:46). 젊은이들은 호감을 얻는 길이 충실함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Ⅱ. 다니엘은 자기 신앙을 계속 견지하였다. 갈대아인들은 그의 이름을 고쳤지만, 그의 본성까지 바꾸지는 못했다. 그들은 자기들 좋은 대로 그를 불렀지만 그는 여전히 참 이스라엘인의 정신을 잃지 않았다. 그는 그들 중 어느 누구보다 갈데아 책에 정신을 쏟고자 했다. 그는 왕의 진미나 왕이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으리라고 굳게 결심했다(8절). 그는 그런 것을 입에 대지도 않으려고 마음먹었다. 다니엘이 자기 의사와 이유를 자기 동무들에게 전달했으므로 그들은 일치해서 꼭 같은 결심을 한 것 같다(11절). 대적의 감정이나 괴팍함, 혹은 심술에서가 아니라, 양심의 원칙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들이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불법적인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1. 그들은 그것이 죄가 될까봐 미심쩍어하였다. 돼지고기처럼 그들의 율법에 명백히 금지된 음식도 때때로 나올 터였다. 아니면 그들은 그 음식이 우상에게 희생 제물로 바쳐진 것이거나 우상의 이름으로 축사된 것일까봐 두려워하였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음식에 의해서 다른 민족들과 구별되었었다(레 11:45, 46). 그리고 이 경건한 젊은이들은 낯선 이방 땅에 있었으므로 특수 민족으로서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들은 비록 귀족으로서의 위엄을 지킬 수는 없었지만, 이스라엘 민족으로서의 긍지는 잃지 않으려고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었던 것이었던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벨론에 있을 때, 그들은 바벨론의 죄에 동참하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주목하자. 그들 앞에 이 음식을 내놓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같이 보였다. 포로이기에 그들은 얻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먹어야 했고 주인의 뜻에 거역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만약 명령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릴 경우, 그들은 섭리를 따라야 했다. 비록 하나님의 섭리가 "잡아 먹으라" 고 할지라도 양심은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니이다" (행 10:14)라고까지 하는 것이다.

2. 비록 그 자체로는 죄가 되지 않을지라도, 범죄의 원인이 될까봐 그들은 자신을 경계하였다. 그들은 그런 진미로 식욕에 탐닉함으로써 죄스럽고 욕정적으로 되며 바벨론인의 쾌락을 사랑하게 될까봐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저들의 진미를 먹지 않게 하소서" (시 141:4)라는 다윗의 기도를 배웠고, "그 진찬을 탐하지 말라. 그것은 간사하게 베푼 식물이니라" 라는 솔로몬의 교훈(잠 23:3)을 배웠다. 그들의 결심은 이에 따라 형성된 것이다. 감각의 기쁨을 갈망하거나 즐기는 일에는 죽은 자같이 되고, 거리를 두고 그것을 바라보는 것은 모든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칭찬할 만한 일이다. 지혜와 경건에 뛰어나려는 사람들은 늦기 전에 "몸을 억제하여 복종시키는" 훈련을 배워야 한다.

3. 그들은 고량진미가 예루살렘이 곤란을 겪고 자기들이 포로가 된 이 때에 적합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술잔에 담은 포도주를 마실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요셉의 재난을 이토록 슬퍼하였다. 비록 그들의 현관에는 귀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들이 이처럼 비천하게 된 때에 왕의 진미를 먹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겸손케 하는 섭리 아래에서는 겸손해지는 것이 우리에게 어울린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나를 나오미라고 칭하지 말고 마라라고 칭하라" (룻 1:20). 재난이 주는 은총을 생각해 보자. 이 젊은이들이 포로되어 갔으면서도 왕의 진미로 자신을 더렵히지 않으려고 했던 반면에 예루살렘에 남은 방백과 귀족들은 부패하여 우상에게 제사한 물건으로 몸을 더럽히고 있었음을 예레미야의 설명에서 알 수 있다. 고난의 심연에서 고결함을 보존하는 사람들이 형통의 정점에서 불의를 보존하는 사람들보다 얼마나 더 훌륭한가!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다니엘이 행한 위대한 일은 죄의 오염으로 자기를 더럽히는 일을 피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외면적인 곤란보다 더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그것이다. 이런 결심을 하고 난 다니엘은 "왕의 환관장에게 자기를 더렵히지 않게 하기를 구했다." 그는 몸을 더럽히기를 강요당하지도 않으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유혹당하지도 않으려고 이렇게 사정한 것이다. 또한 미끼가 자기 앞에 놓이지 않게 하려고 했다. 그는 자기 몫으로 정해진 왕의 진미와 붉은 포도주를 보게 하지 말아달라고 구했다. 유혹을 가까이 접근하도록 허용함으로써 목에 칼을 두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보다(잠 23:2) 유혹을 멀리하는 것이 더 안전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는 자들을 이용해서 죄를 짓지 않도록 조처하는 것이 그들의 호의를 최대한 활용하는 길이다.

Ⅲ. 하나님은 놀랍게도 여기에서 그를 인정하신다. 다니엘이 왕의 진미와 술을 먹지 않게 해 달라고 요구했을 때, 왕의 환관장은 만일 그와 그의 친구들이 지정한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써 동무 소년들만 못하게 될 경우 자기가 왕의 진노로 효수당할 우려가 있다고 하면서 반대하였다(10절). 다니엘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안심시키면서 시험해 주기를 간청한다. 그는 나아가서 부하 감독관에게까지 시정해 본다. "당신의 종들을 열흘동안 시험하소서. 그 동안에 채식을 먹게 하고 술대신 물을 먹게 하여 우리가 얼마나 더 건강해지는가를 보소서(13절)." 사람들은 그들이 시험해 보지 않는 한, 소박한 음식과 식이요법이 몸의 건강에 얼마난 도움이 되는지 믿지 않을 것이다. 이에 따라 그들은 시험대에 올랐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열흘을 채시과 물로써 살았다. 이것은 귀한 집의 젊은이들에게는 조악한 식사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것을 탄원하긴 커녕 반대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열흘이 지난 마지막 날에 그들은 다른 소년들과 비교되었고, 그들은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보다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한 것으로 판명되었다(15절).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절제한 결과라고 하겠지만 결국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축복은 채소를 먹는 것이 살진 소를 먹는 것보다 낫게 할 것이다(잠 15:17). 이것으로 사람은 떡으로만 살지 않는다는 것이 나타난다. 만약 하나님이 말씀만 하신다면 채소와 물도 극상의 영양식이 될 것이다. 우리를 죄의 오염에서 순수하게 지켜 주는 것이 무엇인지 똑바로 보자. 죄스런 쾌락은 뼈를 썩게 하는 반면에(하나님의 말씀은 몸에 양약이 되며)골수로 윤택케 하고(잠 3:8) 만조과 평안을 가져다준다.

Ⅳ. 감독하는 자는 그에게 호의를 보였다. 그는 그들의 양심을 거스리면서까지 먹도록 강요하지 않고 그들이 요구한 채소와 물을 주었다(16절). 그들은 이 음식을 즐겼다.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반소사음수(飯疎事飮水) 한다고 해서 선망의 눈초리로 바라본 자들은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보잘 것 없는 것으로써 자제하고 만족한 위대한 본보기가 있다. 에피큐루스는 이렇게 말했다. 자연에 따라 사는 사람은 결코 가난하지 않다. 그러나 판단에 따라 사는 사람은 결코 가난하지 않다. 그러나 판단에 따라 사는 사람은 결코 부유하지 못할 것이다. 한창때 이렇게 소박한 음식으로 절제한 이 소년들의 극시심은 놀랍다. 다음을 살펴보자,

1. 그들의 절제는 탁월한 봉사를 가능케 하는 데 기여하였다. 절제를 통해서 그들은 그들의 정신을 맑고 분명하게 유지할 수 있었고 명상에 적합하게 되었으며 시간과 사고력을 굉장히 많이 비축하였다가 가장 잘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2. 그들의 절제는 그들을 견인분발의 인물이 되도록 도와주었다. 극기는 그들을 궁핍에 익숙하게 훈련시켰고, 자기부정과 금욕의 삶을 가능케 하였다. 또한 하나님에게 죄를 짓느니 보다 차라리 사자굴과 맹열한 풀무 불에 뛰어들 수 있게 하였다.

 

1:9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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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다니엘 이하 네 소년의 지혜 (다니엘 1:17-21)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Ⅰ. 그들의 학문 성취(17절). 그들은 모두 침착하였고, 근실하였으며 열심히 공부하였다. 우리는 그들의 비상한 능력을 발견하고 노심초사해가며 가르친 선생들을 생각할 수도 있으나 결국 그들의 성취는 오직 하나님 덕분이다. "이들에게 지식을 얻게 하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왜냐하면 각양 좋은 은사와 완전한 선물은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기 때문이다" (약 1:17). 이런 재물 얻을 능력을 인간에게 주시는 분도 오직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다(신 8:18). 정신도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맑아진다. 하나님께서 이 네 소년에게 주신 큰 학식은 다음 두 가지를 위해서다.

1. 그들의 상실을 상쇄하기 위해. 그들은 부조(父祖)의 죄 때문에 자기들의 고귀한 신분에 부수될 명예와 즐거움을 박탈당하였다. 이를 보상하기 위해 하나님은 그들에게 학식을 주심으로써 상실한 명예와 기쁨보다 더 큰 명예와 기쁨을 주셨다.

2. 그들의 고결함에 대한 보상으로써 그들은 극히 대수롭지 않은 일로써도 자기들의 신앙을 지켰다. 그들은 왕의 진미나 포도주로써도 자기를 더럽히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사실상 나실인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혁혁한 학업으로써 그것을 보상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 지혜와 지식과 회락을 주시기 때문이다" (전 2:26). 다니엘에게는 하나님께서 두 배의 몫을 주셨다. 그는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 수 있었다. 그는 요셉처럼 꿈을 해석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해몽가들에 의해서 주장하는 기술법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신적인 지혜와 총명으로 해몽을 할 수 있었다. 아니, 그는 예언의 영을 부여받았고 이로써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었으며 꿈과 환상으로 신적 일에 대한 고지를 받을 수 있었다(민 12:6) 우리는 다니엘이 하나님께로서 받은 은사를 따라 이 책에서 줄곧 꿈과 환상을 해석하고 그런 환상과 봉사를 얻게 됨을 보게 된다. 그는 본서에서 계속 꿈과 환상에 결부되어 있다. 각자가 은사를 받았듯이 말은 그 은혜대로 봉사할 기회와 의욕도 가지게 될 것이다(벧전 4:10).

Ⅱ. 왕이 이들을 크게 기뻐함. 3년 동안의 교육을 마친 후(그들이 왔을 때 그들은 아마도 20세였으리라고 추측된다) 그들은 다른 동료들과 함께 환관장 앞에 나아갔다(18절). 그리고 왕은 그들을 시험하고 그들과 말하였다(19절). 그는 학식과 재능을 갖춘 인물이었기에 그들과 담소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렇게 위대한 왕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직접 이렇게 시험하는 것은 등용할 인물을 직접 보고 판단하는 것이 남의 말만 신용하여 선발하는 것보다 현명한 처사이기 때문이다. 왕은 많은 말로써 즉 웅변이나 시문학으로 시험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지혜와 총명의 모든 일로 시험했다. 그것은 곧 슬기의 시험과 진정한 정치 철학의 시험법이 었다. 그는 인생의 올바른 태도와 공공 업무에 대한 그들의 판단력을 조사하였다. 즉 "그들은 재줏군인가?" 를 시험하지 않고 "그들은 현인인가?" 를 조사한 것이다. 그는 그들의 동류의 젊은 후보자들을 능가할 뿐만 아니라, 모든 스승과 노인보다 명철하다는 것도 발견했다(시 119:99, 100 참조). 왕은 자기 나라에서 종교와 학식으로 쟁쟁한 자들에게 편파적이기는커녕 시험 결과 이 불쌍한 유대인 포로 소년들이 "온 나라의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더 나은 줄을 알겠다" (20절)고 스스럼없이 인정하였다. 그는 이 젊은이들에게서 곧 비범한 점을 발견하고 놀라움과 민족감을 느꼈다. 그는 그들이 조금 보여 준 참 신의 위력이 자기가 그때까지 익히 봐 오던 아주 많은 점성술보다 더 낫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렘 23:28). 술객의 지팡이와 아론의 지팡이를 어찌 비교하겠는가? 이들에게 비교될 자는 없었다. 이 네 젊은 학도들은 모든 늙은 술객이나 박수보다 나았다. 십 배나 나았다. 온 나라에 있는 점쟁이를 다 합쳐야 이들보다 못했다. 우리는 그 나라에 적지 않은 술객과 박수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은 교만한 갈데아인들을 이처럼 수치스럽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들 네 사람 뿐만 아니라 나머지 유대인들도 이 소년들을 인하여 포로된 땅에서 더욱 존중받게 하셨다.

끝으로, 그들에게 대한 판단을 이렇게 내린 왕은 그들로 자기 앞에 모시게 했다(19절). 그들은 왕의 알현실 아니 집무실에서 왕을 시종하였다. 왜냐하면 용안을 본다는 것은 대신의 완곡한 표현이기 때문이다(에 1:14). 이것은 솔로몬의 관찰을 확실하게 해 준다.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잠 22:29). 근면은 출세의 지름길이다. 나머지 세 사람이 언제까지 궁정에 있다는 말은 없다. 그러나 다니엘은 명성과 총애가 항상 동일하진 않았지만 "고레스의 원년까지 계속 있었다" (21절). 그는 고레스의 원년 이후까지 살았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고레스 원년만 언급된 것은 그가 자기 동포의 바벨론 해방과 고국 귀환의 증인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때때로 하나님은 근심 중에 시온과 같이 슬퍼하는 자기 종들로 하여금 처음보다 더 나은 교회의 처지를 보기까지 살면서 교회의 기쁨을 함께 나누도록 은총을 베푸신다는 데 주목하자.

 

1:18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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