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경고 (아모스 1:1,2)
Ⅰ. 본 예언서의 전체적 성격. 이 예언서는 선지자가 묵시받은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다. 말씀이 눈에 보이는가?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보인다. 사도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자기들이 들은 바요,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바라고 말했다(요일 1:1). 하나님의 말씀은 그와 같이 실질적이고 본체적이다. 선지자는 이 말씀들을 보았다.
1. 그 말씀들은 사도 요한이 자기에게 말하는 음성을 보았다고 하듯이(계 1:12) 환상으로 아모스에게 계시되었다.2. 아모스에게 있어서는 묵시받은 예언의 말씀이 육안으로 본 것과 다름없이 확실했다. 이것은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가 되는 (히 11:1), 아모스의 믿음이 매우 강력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Ⅱ. 이 예언을 받은 사람. 그는 드고아의 목자 중에 있던 아모스였다. 그는 그 목자 중 하나였다. 혹자는 그가 부유한 가축상이었다고 생각한다. 목자라는 이 단어는 모압 왕에 대해서도 사용되고 있다(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왕하 3:4). 아모스가 목양 사업으로 치부했다는 것도 가능한 이야기다. 어쨌던 그는 선지자로서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 목자 노릇을 그만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편 아모스가 가난한 양치기였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다. 왜냐하면 그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흠정역:들무화과를 채집하는 자)라고 스스로 말하는 때문이다(7:14, 15). 이것은 보잘 것 없는 직업이었다. 노력은 그가 이렇게 연명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양떼를 따라다니던 다윗과 쟁기질하던 엘리사를 택하신 것처럼 목자 아모스를 취하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보다 큰 사업을 위해 목자라는 평온하고 순결하고 명상적 직업에서 연단받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서 자기 백성을 책망하고 경고하려 하실 때는 목자나 양치기를 발탁하여 그 일을 시키셨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었기 때문이다(시 32:9). 아니, 그들은 자기 임자를 아는 소보다 더 악했기 때문이다(사 1:3).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전 1:27). 우리는 하나님이 봉사의 능력을 부여하신 자들을 그들의 미천한 출신과 미미한 시작을 이유로 멸시하거나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아모스는 자기가 목자였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시인했다. 그러므로 세력사람들은 그를 비난하거나 더 나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Ⅲ. 본 예언의 대상. 이것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받은 말씀이다. 열 지파는 그 때 죄 가운데서 무르익으며, 멸망을 향해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 중에서 선지자들을 일으켰지만(2:11) 그들은 그 선지자들을 존중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유다 땅 드고아에서 한 선지자를 세워 보내신다. 이것은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면 그들이 귀하게 여기도록 하시기 위해서다. 그리고 아마 그 역시 자기 나라에서는 목자였다는 이유로 멸시 당했기 때문에 다른 나라로 파송되었을 것이다(마 13:55-57).
Ⅳ. 예언 시기.
1. 본서는 율법서와 마찬가지로 이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 왕들의 통치시기에 의해 추정된다. 그 때는 유다 왕 웃시야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 시대로서 양국의 정세는 매우 호조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양국은 다 범죄했고 따라서 죄와 임박한 심판에 대해 경고를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은 그들이 현재의 번영 때문에 그들 스스로 무죄하다고 생각하거나 영속적 안전을 과신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2. 본서의 연대는 아모스의 예언이 언급한 특정 사건에 의해 추정된다. 이것은 지진 전 2년에 묵시받은 말씀이었다. 이 지진은 웃시야 시절에 있었던 것으로(슥 14:5) 전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상게서에는 그들이 지진을 피하여 도망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그 지진에서 피해 도망할 수 있었을까? 혹자는 이 지진이 이사야의 환상 때에 있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문지방의 터가 요동하여, 사 6:4). 유대의 전승으로는 웃시야가 무엄하게도 제사장의 집무소를 침범하여 분향하러 들어갔을 때(대하 26:16) 이 지진이 일어났다고 한다. 교회사가 요세푸스도 이 지진을 언급하여(Antih, 9:11) 이르기를 "이 지진으로 한 산의 반 동강이 네 마장 떨어진 평지로 이동하였고 그것은 왕의 동산(금원)을 망쳤다" 고 하였다. 하나님은 아모스 선지를 통해 2년 전에 지진으로 그들의 궁을 결딴내리라고 경고하셨다(3:15).
Ⅴ. 이 예언의 도입부가 나오는데 여기에는 본 예언의 전체적 범위가 내포되어 있다(2절). "여호와가 시온에서 부르짖으신다."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위협과 섭리를 통한 그 위협의 실시는 사자의 포효소리가 목자와 양떼를 두렵게 하듯이 두려울 것이다. 여기서 아모스는 그의 동시대인 호세아(호 11:10)나 요엘(욜 3:16)과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사자는 움켜 찢기 전에 포효한다. 하나님은 치시기 전에 경고를 주신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이 경고는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시온과 예루살렘 즉 그곳에서 선언된 하나님의 신탁에서 유래한다. 주의 종은 그로써 경계를 받기 때문이다(시 19:11 참고). 그곳은 하나님의 특별한 거주지다. 우리 하나님은 그 땅에 대한 심판을 집행하시기 위해 그 뜰에서 영장을 발부하실 것이다(렘 52:30 참조). 시온에는 속죄소가 있었다. 여호와는 거기서 부르짖으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행위가 자비와 모순되지 않으며, 자비에 의해 완화되고 경감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니, 이것은 경고이지만 실제로는 자비의 행위이다. 우리가 징계받음은 정죄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2. 이 경고는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가? 목자의 초장이 애통한다. 이것은 목자들이 사자의 포효를 두려워해서거나 아니면 비유로 나타난 일 즉 한발의 결과를 실감한 때문일 것이다(4:7). 가뭄은 갈멜(극히 비옥한 땅)산 꼭대기를 마르게 하여 사막같이 되게 하였다(욜 1:12-17).
심판의 위협 (아모스 1:3-15)
여호와가 여기서 하시는 말씀은 역시 그의 말씀(렘 12:14)을 빌어 설명할 수 있다.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산업으로 준 산업을 다치는 나의 모든 악한 이웃에게 대하여 나 여호와가 이 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을 그 땅에서 뽑아버리리라" (렘 12:14). 다메섹은 이스라엘 북방에 근접한 이웃이었고 두로와 가사는 서쪽, 에돔은 남쪽, 암몬과(다음 장의) 모압은 동쪽 이웃이었다. 이들은 전부가 한 때 이스라엘에게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였다(겔 28:24). 그들은 이모저모로 이스라엘에게 악한 이웃이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송사를 지지하신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들을 악한 이웃이라고 부르시고 그들과 회계하러 나오신다. 그들 각자를 취급하는 방법은 부분적으로 동일하다. 따라서 노력은 그들을 일괄해서 취급하지만 그들에게는 각각 독특한 점도 있다.
Ⅰ. 그들 전부에게 대해 책망으로든 판결로든 반복되는 것이 무엇인가 살펴보자. 그들 각각에게 대한 하나님의 쟁변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라는 말로 서두를 삼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였다. 열방들은 그를 자기들의 신으로 섬기지 않지만 자기들이 심판관 되신 그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온 세상의 하나님이시며, 그들에게 하실 말씀을 갖고 계시고, 그 말씀은 그들을 떨게 만들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시온에서부터 그들을 쳐서 부르짖으신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과 유다를 위협하시기 전 열방에게 심판을 선언하신다. 하나님은 열방을 채찍으로 사용하셨다. 그러나 이제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열방에게 심판을 선언하신다. 이는 열방의 교만과 무례에 제동을 걸고, 그들을 낙담시키는 가운데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이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게 대한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셨음을 목격하고 그들 역시 하나님께 대한 관계를 상실 당하지 않으셨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1. 이 모든 민족에게 대한 기소장은 아주 흡사하다.(1) 그들은 "서너 가지 죄" 라는 공통된 표현으로 규탄받고 있다. 이것은 많은 범죄를 지칭한다. 우리는 한두 가지는 소수의 표현에 쓰고 서너 가지는 다수의 표현에 쓴다. 라틴어에서는 매우 행복한 사람을 terque quaterque beatus-즉 서너 배 행복한 사람이라고 한다. 또는 이것은 세 가지와 네 가지 즉 일곱 가지 죄를 말한다고 할 수도 있다. 일곱은 완전수다. 따라서 이것은 그들이 그 죄의 양을 다 채웠고, 파멸이 성숙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세 가지(즉 다양한 죄)와 네 번째라고 읽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각 민족의 네 번째 죄는 명시되어 있다. 다른 세 가지 죄는 언급되지 않는 반면(잠 30:15, 18, 21, 29 비교) 유독 넷째 죄만 나오는데 하나님은 특별히 이 한가지 죄를 더 의중에 두고 계시는 것 같다.
(2) 네 번째 죄로 지목되고, 유독 명시된 것은 바로 박해의 죄다. 그들 각자에게 특별히 추궁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입힌 이런 저런 피해이다. 왜냐하면 핍박은 민족의 불의의 한계를 채우는 죄이기 때문이다. 그 죄는 특별히 셈을 치르게 될 것이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다" (마 25:42). 하물며,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내 양식을 빼앗아갔다" 고 하는 말을 들을 자야 일러 무엇하랴?
2. 그들 모두에게 판결도 아주 동일한 표현을 쓰고 있다.
(1) 그들의 죄가 절정에 달했으므로 하나님은 그 벌을 일으키지 아니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오랜 유예 기간을 주셨고, 왕왕 그들의 처벌을 돌이키셨지만, 이제는 더 이상 돌이키지 않으실 것이며, 공의가 제 길을 가게 하실 것이다. "내가 그 벌을 취소하지 아니하리라(혹자는 그렇게 읽는다). 죄많은 열방에게 죽음과 공포를 말하면서 시온과 예루살렘에서 발한 음성(2절)을 취소하지 않으리라." 이것은 철회 불가능한 판결이다. 하나님께서 그 판결을 말씀하셨고, 그것을 다시 취소하진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격동시키는 자들에게 오래도록 인내하시지만 항상 참으시지만은 않으실 것이다. 명령이 반포된 다음에는 시행될 것이다.
(2) 하나님은 그들 중에 불을 보내실 것이다. 이것은 이 모든 악한 이웃에게 대해 다 선포되고 있다(4, 7, 10, 12, 14절). 하나님은 그들의 성읍에 불을 보내실 것이다. 계획적이든 우연이든 성읍과 가옥을 잿더미로 만드는 불이 일어날 때에는 그 화재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해야 했다. 그 불은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다. 죄는 하나님의 질투의 불길을 불러 일으키고 그것이 다른 불을 점화시키는 것이다.
Ⅱ. 책망으로든 판결로든 무엇이 언급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그것은 각자가 자기 분깃으로 취해야 할 것인데, 그 각각이 독특한 것이다.
1. 수리아의 수도 다메섹에 대해, 수리아는 왕왕 이스라엘을 성가시게 괴롭혔다.(1) 다메섹에 특유한 죄는 길르앗 사람들을 학대한 것이었다. "저희가 철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 (3절). 이것은 문자 그대로 그들이 길르앗인들을 수중에 장악하고 고문하거나 잔인하게 죽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다윗도 이와 같이 암몬인을 톱질하고 써레질하였다(삼하 12 :). 우리는 수리아왕 하사엘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얼마나 무자비하게 수행했는지는 열왕기에서 본다. 그는 어린아이를 메어치며, 아이 밴 부녀를 갈랐다(왕하 8:12). 그가 이스라엘을 얼마나 황폐시켰는지 살펴 보라(왕하 10:32, 33). 또는 이것은 비유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가 이스라엘 땅을 황폐시켰는데 바로 이 비유는 그 역사에 사용되고 있다. "그가 그들을 진멸하여 타작 마당의 티끌같이 되게 하였다" (왕하 13:7). 사람들은 왕왕 부당하고 악한 일을 행하지만 그에 대해 혹독한 셈을 치르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렇게 행하도록 허용하시는 것은 정당하다. 하나님은 교회를 자기가 타작한 것이라고 부르시며, 자기 마당의 곡식이라고 하신다(사 21:10).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교회를 타작대상으로 삼으며, 자기 마당의 겨로 만든다면 틀림없이 그 행위에 대한 말을 듣고야 말 것이다.
(2) 다메섹에 특유한 형벌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서 보내는 불이 우선 왕궁에 붙을 것이다. 그 불은 도성도, 지방의 소읍도 외면하고 하사엘의 집에 붙을 것이다. 그 불은 벤하닷의 궁궐 곧 수리아 왕들이 거주하던 왕궁들을 사를 것이다. 벤하닷이란 이름으로 불리운 왕들은 많았다. 아무리 비싼 가구로 장식되고 아무리 견고하게 축조된 왕궁도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수는 없다는 데 주목하자.
[2] 적군이 그 성에 진입할 것이다(5절). "내가 다메섹의 빗장을 꺾으리라. 그러면 성문은 활짝 열리게 될 것이다." 아니면 이것은 비유로 해석할 수 있다. 그 큰 성을 금성철벽으로 의지하던 자들은 실망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 성의 견고와 안전에 열쇠 구실을 하는 것으로 신뢰받던 모든 것이 실망시키게 될 것이며, 불충분한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심판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올 때는 그것을 돌이키려고 생각해 봐야 헛 일이다.
[3] 그 백성은 칼로 멸망당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웬 골짜기에서 그 거민을 끊으리라." 아웬 골짜기는 우상 숭배의 장소였다. 왜냐하면 수리아의 신들은 골짜기의 신들로서(왕상 20:23). 골짜기에서 예배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우상들은 산당에서 예배되었다. "내가 벧에덴에서 홀 잡은 자도 끊으리라." 이것은 권세의 홀을 잡은 작은 군후들이나 벧에덴 즉 "쾌락의 집" 에서 잡고 있는 홀을 자랑하던 다른 이들을 가리킨다. 우상 숭배에 탐닉하던 자와 육욕에 빠진 자들은 다 함께 망한다.
[4] 그 국민은 길로 데려감을 당할 것이다. 길은 메데 나라에 있었다. 우리는 이 일이 약 오 십년 뒤에 성취됨을 볼 수 있다. 유다왕 아하스의 사주로 앗수르왕 디글랏빌레셀이 다메섹으로 올라와 그 백성을 사로잡아 길로 옮겼던 것이다(왕하 16:9).
2. 블레셋의 수도 가사에 대하여.
(1) 블레셋에 특유한 죄는 이스라엘이나 유다의 모든 포로를 끌어갔다는 것이었다. 혹자는 이것이 여호람에게 대한 침공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즉 블레셋 사람들은 유다를 침노하여 여호람의 모든 아들들과 왕궁의 재물을 약탈해 갔기 때문이다(대하 21:17). 또는 이것은 아마 산헤립의 유다 침공시에 블레셋으로 피난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피난민을 사로잡아서 헬라인에게 팔아넘긴 사실을 가리킬 것이다(욜 3:4-6). 또는 그들은(본문에서처럼) 에돔인에게 붙였을 것이다. 에돔인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항상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이라면 하나도 남겨 두지 않고 전부 끌어갔고 할 수만 있으면 이스라엘의 이름을 끊으려고 도모했다(시 83:4-7).
(2) 블레셋인에게 특유한 형벌은 다음과 같다. 즉 하나님은 가사에 불을 보내서 그 궁궐들을 사르고 블레셋의 다른 도시들 즉 아스돗과 아스글론과 에그론의 거민을 끊으실 것이다. 그들이 모든 포로를 다 끌어감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에게 행했듯이 하나님도 그들의 파멸시에 그들을 완전히 끝장 내실 것이다. 왜냐하면 블레셋의 남아 있는 자조차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다(8절). 하나님은 자기 교회와 그의 백성을 완전히 끝장내려고 생각하는 자들을 철저히 말살하실 것이란 사실에 유의하자.
3. 두로에 대해(9절). 두로는 부와 강한 힘으로 유명한 성이었고, 그 자체가 하나의 왕국이었다.
(1) 두로의 죄는 모든 포로를 에돔에 붙였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피신하기 위해 도망해 들어왔거나 아니면 어떤 경로든 그들의 수중에 떨어진 이스라엘 포로들을 에돔인에게 팔아넘겼던 것이다. 그들은 이스라엘 포로들이 어떤 간난과 역경에 처하게 될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들의 이익만 도모했다. 이 점에서 그들은 형제의 계약 즉 두로왕 히람과 솔로몬 사이의 동맹을 망각했다(왕하 5:12). 그들의 유대는 너무나 친밀하여 히람은 솔로몬을 그의 형제라고 불렀다(왕상 9:13). 원한과 악의가 우정과 형제의 계약을 깨뜨릴 때는 그 죄가 더욱 가중된다.
(2) 두로의 징벌은 궁궐을 소멸시킨다는 것밖에 없다. 이 일은 실제로 느부갓네살이 십 삼 년 간 포위한 끝에 성을 함락시켰을 때 이루어졌다. 두로의 상인들은 모두가 제왕 같았고 그들의 개인 집들도 궁궐 같았다. 그러나 불은 누추한 오막사리든 고루거각이든 가리지 않고 태워버릴 것이다.
4. 에서의 후손 에돔에 대해.
(1) 에돔의 죄는 지치지 않고 무자비하게 하나님의 백성을 추격하며 그들에게 화를 입히기 위해 온갖 기회를 다 이용했다는 것이다(11절). "저는 칼로 그 형제를 쫓아갔다." 에돔왕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 경내를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막았다(민 20:18). 그 이래로 에돔인들은 항상 그런 태도를 견지했다. 그들은 전장에서 정면으로 맞설 만한 힘과 용기를 갖추진 못했다. 그러나 다른 대적이 이스라엘이나 유다를 패주 시킬 때면 언제나 추격하는 이들과 합세하여 패주하는 자들의 후미를 덮치고 거의 반죽음이 다 된 자들을 살륙했다. 이것은 비겁자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다(비겁자는 자기 원수가 불리할 때면 이런 것입니다. 으례 이런 식으로 나온다). 그들은 긍휼을 다 버렸다. 가장 용기가 없는 자들이 대개 가장 잔인하다. 에돔이 바로 그러했다. 에돔의 악의는 "그의 긍휼을 말살시켰다" (원의는 그렇다). 그는 인간의 온정을 스스로 포기하고 야수의 맹렬함을 옷 입었다. 그런 자로서 그의 노는 항상 맹렬하였다. 그의 잔인성은 충족을 몰랐다. 그는 이스라엘의 피를 아무리 빨아도 족한 줄 모르고 마치 말거머리 모양 계속 "달라, 달라" 하고 부르짖었다. 아니 그는 분을 끝없이 품었다. 그는 분노의 대상과 분풀이할 기회를 원하여 분을 저장해 두었다. 분은 그의 가슴에 쉬고 있었다. 그는 마치 달콤한 떡조각처럼 분을 그의 혀 아래 굴리고 있다가 기회가 오면 이스라엘의 얼굴에 뱉았다. 그런 잔인한 노와 맹렬한 분은 저주받을 지어다. 그렇게 난폭한 분노는 인간을 악마처럼 만든다. 악마는 삼키기 위해 끊임없이 찾아다닌다. 또 그런 인간은 자기 분노를 영원히 품지는 않으시는 하나님과 다르다. 에돔의 악의는 천륜에 어긋난다. 왜냐하면 그는 의당 보호해야 할 자기 형제를 이처럼 쫓아다닌 까닭이다. 그것은 마치 에서가 야곱을 증오한 이래 그 가문에 상속되기라도 한 듯 사뭇 유전적이었다. 시간조차 그런 적의를 마멸시키지 못했다. 아니, 에돔인에게 대한 이스라엘의 형제적 행위도 소용없었다(신 2:4). 이스라엘에게는 에돔에게 대한 우애가 율법으로 명시되어 있었다. "너는 에돔인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니라" (신 23:7).
(2) 여기에는 에돔의 특별한 처벌이 나오지 않고 있다. 다만 하나님은 불을 보내 그들이 궁궐들을 사르겠다고 하신다(12절). 우리 형제에게 대한 분노의 불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점화시킨다는 데 주목하자.
5. 암몬인에게 대해(1-15절).
(1) 암몬인의 성난 불길은 몹시 맹렬히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재난을 기뻐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그들에게 금수만도 못한 짓을 하였다. 그들은 길르앗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다. 이것은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는 잔인을 극한 행위이다. 이것은 인간의 탈을 쓰고 그렇게 비인간적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하사엘은 이런 죄를 범했다(왕하 8:12). 이것은 짐승 같은 분노로 저질러진 일이었다. 성난 맹수는 그 앞에 나타나는 것이면 무엇에게든지 덤벼들어 찢듯 열화같이 노한 자는 전후를 분별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인종을 멸절시키려는 악마적 계획에 의해서 자행된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태어난 자들뿐만 아니라 장차 태어날 자도 전부 죽이려는 심산이었다. 이것은 애굽인의 잔인성보다 더 악했다. 암몬인이 그렇게 행한 것은 자기 지경을 넓히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길르앗을 자기 소유로 만들고자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땅을 주장하거나 문제를 일으킬 자가 없도록 하려고 했다. 우리는 암몬인들이 이스라엘에게는 아들도 상속자도 없다는 구실 하에 갓(즉 길르앗)을 유업으로 얻었다는 기록을 읽었다(렘 49:1). 악한 농부들은 "이는 그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의 것이 되리라" 고 말했다(막 12:7). 우리는 이런 자들의 운명이 얼마나 비참하며 그들의 죄가 얼마나 악한지 안다. 자기 지경을 넓히기에 혈안이 된 자들은 왕왕 극히 두려운 행위도 서슴치 않으며 그 원인은 극히 잔인한 탐욕이란 점을 명심하자.
(2) 그런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얼마나 맹렬히 타들어가는지 관찰하자. 하나님이 어느 사람에게 행해진 것이든 이런 일로 벌하지 않으시겠는가? 하물며, 자기 백성에게 그런 일이 자행된 때에랴! 이런 민족에게 그가 보수하지 않으시랴? 물론 할 것이다. 전쟁의 날에 외침으로 그 불은 점화될 것이다. 즉 전쟁이 불을 붙일 것이다. 그 불에는 칼이나 함성이 뒤따를 것이며 그것은 공격을 개시하려는 군인의 납함 소리 같을 것이다. 그것은 회리바람의 날에 폭풍 같아 그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순식간에 맹렬히 무너뜨릴 것이다. 또는 이것은 이 태풍과 폭풍은 그 불을 더욱 강하게 번지도록 하며 그 태우는 소리가 외침 같을 것임을 뜻한다. 여기서 특별히 위협하는 것은 왕과 방백들의 나포이다. 그들은 유다가 사로잡힌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벨론왕에게 잡혀갔다. 하나님의 섭리, 아니 그들 자신의 죄가 어떤 변화를 가져 오는지 유의하자. 왕들은 포로가 되고 방백들은 죄수가 된다. "밀곰은 사로잡혀 가리라." 혹자는 이것을 암몬의 신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들은 자기 신을 몰록(왕이란 뜻)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 신과 그의 방백을 즉 그를 시종하던 그의 제사장들이 함께 사로잡혀 갈 것이다. 그들의 우상은 그들을 보호하긴커녕 그 자신도 함께 포로되어 갈 것이다. 입제와 기만으로 자기 지경을 넓히려고 꾀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의 지경에서도 추방되어 마땅하다는 데 주목하자. 타인의 권리를 예사로 침해하는 자들이 자기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자들에게 전혀 저항할 수 없게 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