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다니엘 0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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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느부갓네살의 하나님 찬양 (다니엘 4:1-3)

Ⅰ. 여기에는 왕이 반포하는 조서나 포고문 또는 회람용 서신의 일반적 형식이 약간 비췬다(1절). 느부갓네살이 사용한 문체는 허세나 화려한 게 전혀 없고 평이하며 간결하며 꾸밈이 없이 "느부갓네살 왕" 이라고만 되어있다. 다른 때 같으면 그는 어마어마한 표현으로 자기 칭호를 과장하련만 여기서는 그 모든 허세를 버리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늙었고 혼미한 정신 상태에서 회복한지가 얼마되지 않은 때문이다. 그의 정신 이상은 그를 비천하게 만들고 굴욕을 당하게 만들었었는데 그는 이제 하나님의 크신 주권을 심사숙고하여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포고는 자기 백성을 대상으로 할 뿐만 아니라 천하에 거하는 모든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이 문서에 접하게 될 모든 자를 향해서도 선포된 것이다. 여기에는 그 자신의 수치스런 기록이 내포되어 있지만 그는 모든 자들이 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바램을 가지고 말한다. 아마 왕 자신이 반포하지 않았더라면 어느 누구도 감히 이를 공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원본 그대로 출간했을 것이다. 그는 온갖 부류의 사람들에게 이 말을 주목하라고 엄명을 내린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이 기록에 관계가 있으며 이 말씀은 모든 자에게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글의 대상자들에게 일반적 형식으로 "너희에게 많은 평강이 있을지 어다" 라고 인사를 건넨다. 명령을 내리면서도 안부를 빌며 그 나라의 아비답게 자기 백성을 축복하는 것은 왕에게 어울리는 행위이다.

Ⅱ. 여기에는 조서의 내용이 나온다. 그가 이 조서를 쓰는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그와 관련된 하나님의 섭리를 남들에게 알리기 위하여(2절). "나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그는 참 하나님을 그렇게 부른다)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알게 하기를 즐겨하노라."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제 정신 이상에서 회복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지당하게 그를 낮추셨으며 얼마나 은혜롭게 그를 결국 회복시키셨는지를 원방에 알리고 미래를 위해 기록하는 것이 자기의 의무이며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자기의 빚이라고 생각했다. 만국은 물론 느부갓네살에게 일어난 일을 귀가 울리도록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자기한테서 직접 전한 말을 분명히 들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이는 그들에게 이 일 속에 하나님의 손길이 관련되어 있음을 알리고 그의 마음이 이 일로 어떤 감명을 받았는지도 알려서 그들로 하여금 이 일을 소문꺼리가 아닌 신앙의 재료로 말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느부갓네살에게 일어난 사건은 감탄할 만한 이적일 뿐만 아니라 교훈받을 만한 표적이기도 했고 "여호와께서는 다른 모든 신들보다 크시다" 는 것을 세상에 나타내 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처사 즉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책망이든 은총이든 남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본문의 경우처럼 그 일이 비록 우리 자신에게 수치가 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바지가 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결코 그 일을 숨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영혼을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말하는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쾌히 하려고 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들의 칭찬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기들을 반대하여 하신 일이나 자기들이 하나님의 반대를 받을 만한 자들이라는 것은 말하기 싫어한다. 우리는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뿐만 아니라 우리 죄를 고백하고 우리 불의에 대한 형벌을 받아들이고 여기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대왕처럼 이 두 가지로 수치를 자청함으로써도 하나님께 영광을 드려야 한다.

2. 그 자신이 이 섭리로 많은 감동을 받았으며 각성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3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에 대해 언제나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말해야 하며 우리가 남들도 주목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하나님의 크신 일에 우리 자신부터 감동되었음을 나타내 주어야만 한다.

(1) 그는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에 찬탄을 금치 못한다. 그는 놀란 자답게 말한다. "크도다 그 이적이여 능하도다 그 기사여." 느부갓네살은 이제 늙었고 40년 이상을 지배해왔다. 그는 어느 누구못지 않게 세상일을 많이 경험했고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일도 당해봤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렇게 감동된 적은 없었고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만큼 놀랄 만한 사건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는 얼마나 위대하고 강력한 것인가! 하나님의 행하신 사건과 그 사건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신적 지혜의 산물을 많이 보면 볼수록 그것들은 우리의 눈에 더욱 기이하게 나타날 것이다(시 118:23; 66:2)

(2)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지배를 추론한다. 이것은 그가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 라고 승인하게 된 것이다. 그 왕국은 자신의 왕국과 같지 않다. 느부갓네살은 이제 세계를 지배하는 그리고 인간의 자손들에 대한 우주적이고 절대적인 지배권을 가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영존하는 이 왕국의 영광이다. 다른 사람들의 통치는 한 세대에 한정되고, 다른 왕가도 수 세대에 한정되지만 하나님의 지배는 영원하다. 느부갓네살은 여기서 다니엘이 예언한 왕국을 가리키는데 그 왕국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세우실 나라요 망하지도 아니할 나라이다(2:44). 그 나라는 메시야의 왕국을 의미하지만 느부갓네살은 섭리의 왕국으로 이해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완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올바르게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예언서를 실제적으로 유익하게 사용하고 적용할 수 있으리라.

 

4:2 없음.

 

4:3 없음.

 

4:4

느부갓네살의 두번째 꿈 (다니엘 4:4-18)

느부갓네살은 교만 때문에 자기에게 작용한 심판을 언급하기에 앞서 받은 따끔한 경고를 기술한다. 심판이 이르기 전 그는 경고를 받았고 거기에 정당한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그는 심판을 방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그는 미리 그 일의 어떠함과 결과를 통고받는데 이것은 그 일이 발생했을 때 미리 받은 예언과 그 일을 비교해 봄으로써 그가 그 일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깨닫고 그렇게 발표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그는 세상에는 신의 섭리뿐만 아니라 신의 계시도 있으며 하나님의 역사는 그의 말씀과 일치한다는 것을 믿게 될 터였다.

그는 꿈으로써 장래 일을 주목하였는데 우리는 그의 꿈에 대한 묘사에서 다음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Ⅰ. 그에게 이 경고가 주어진 시간. 그 때는 그가 자기 집에서 편히 있으며 그의 궁에서 평강할 때였다. 그 때는 그가 애굽을 정복한지 얼마되지 않은 때였다. 그는 전쟁을 승리로 끝맺고 그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 일은 그의 통치 34년이나 35년에 일어났다(겔 29:17). 그가 꿈을 꾼 것은 이 무렵이었고 그 꿈은 일 년 후 실현된 것이다. 그 후 칠년 간 그는 정신 질환을 앓고 나서 다시 건강을 회복하였다. 그 무렵에 그는 이 조서를 썼고 2년 간 살다가 재위 45년 되는 해에 붕어했던 것이다. 그는 오랜 전쟁으로 피로해 있었고 지루하고 위험한 원정을 많이 감행했었는데 이제야 겨우 자기집에서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대적도 없고 악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인간들 중 가장 강대한 자들이 극히 안전한 가운데 쉬면서 평강하다고 생각할 때조차 그들을 두렵게 하실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Ⅱ. 꿈에서 받은 인상(5절). "한 꿈을 꾸고 그로 인하여 두려워했다." 그는 젊어서부터 전쟁에 드나들면서 전쟁의 위험을 표정하나 변치 않고 보아왔던 자였다. 우리는 하챦은 일이 그를 놀라게 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는 하나의 꿈으로도 그를 공포에 질리도록 만드신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그의 침상을 부드럽고 편했을 것이다. 호위하는 자들도 그의 잠자리를 잘 지켰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자신의 침상에서 한 생각이 그를 편치 못하게 만들었으며 뇌속으로 받은 이상 곧 자기 상상의 산물은 그를 번민하게 만들었다. 세상에서 극히 위대한 자가 자기 영혼에게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눅 12:19)고 할때도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교란자들, 수 만 명에게 고통을 준 자들을 바로 그들 자신에게 고통과 번민을 주는 자로 만드실 수 있으시며 강한 자의 두려움이 됐던 자들을 바로 그들 자신의 두려움이 되게 하실 수 있다. 꿈이 몰고 온 경악과 인상에 의해 그는 그 꿈이 평범한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으로 보내진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Ⅲ. 그는 꿈의 의미에 대해 술객과 점성사들에게 묻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는 이제는 전처럼(2장) 그 꿈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는 꿈을 생생하게 기억했으나 그 꿈의 해서과 그 꿈이 예시하는 바를 알고 싶었다(6절). 명령은 곧 바벨론의 모든 박사들에게 하달되었다. 그들은 마술과 점으로써 동물의 내장은 검사하거나 별들을 관찰함으로써 장래 일을 예고한다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왕은 그들 중 누구라도 그 꿈의 해석을 할 수 있는지 보기 위해 모두가 출두해야 한다고 명령한다. 이들은 유사한 경우에 이따금씩 왕에게 모종의 만족을 주었을 거이고 그들의 기수로 왕을 즐겁게 할 만큼 그의 의문에 대답을 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그의 기대는 어긋난다. 그는 그 꿈을 그들에게 고했다(7절). 그들은 꿈만 말해 주면 어김없이 해몽하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2:12, 13) 그들은 그 해석을 그에게 알게 하지 못했다. 꿈 해석의 열쇠는 신성한 예언에 있었다(겔 31:3 이하 참조). 에스겔서에서는 여기의 느부갓네살처럼 암수르인이 교만 때문에 찍히는 나무로 비유되고 있다. 그것은 연구한 적도 정통하지도 못한 책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들을 이 꿈으로 어리둥절하게 한 뒤 다니엘의 해몽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기여케 했다. 바벨론의 멸망의 다가올 때 그들의 사술과 진언과 별 보는 자와 점성사들이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할 것이라던 이사야의 예언(사 47:12, 13)은 여기서 성취되었다.

Ⅳ. 왕은 다니엘을 청하여 이 꿈의 해석을 부탁했다. "그 후에 다니엘이 들어 왔다" (8절). 그 는 박수와 술객들이 악하다고 하여 그들과의 합류를 거절했거나 아니면 그들이 다니엘의 선함을 싫어하여 같이 행동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는 왕이 다니엘보다 자기 술객들이 할 수만 있다면 해몽의 영광을 받도록 하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다니면 박사들은 어른이었으므로(2:48) 다니엘은 전처럼 가장 마지막에 자문을 받게 되었으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의 마지막 피난처로 삼고 모든 다른 구조의 가망성이 없어질때까지는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으려는 자들은 많다.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을 몹시 칭찬하며 자기가 부여한 이름을 특별히 주목하고 그 이름을 택한 자신이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것은 좋은 조짐이었다. "그는 내 신 벨의 이름을 쫓아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자이다." 그는 다니엘의 드문 재능을 칭찬한다. "그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지라" 고 왕은 그의 면전에서 얘기한다(9절). 우리는 그가 이런 찬사를 듣고 으시대긴 커녕 참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가 느부갓네살의 쓰레기 같은 잡신에게로 돌려진다는 데 비애를 느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느부갓네살에게는 이상한 잡물이 섞여있다. 하나님께 대한 찬사가 금방 잡신에게 결부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확신과 배치되는 타락에 동조하는 자들에게서 보통 발견된다.

1. 왕은 우상 숭배의 언어와 방언을 구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예배로 전향한 자가 아니다. 그는 우상 숭배자이며 이것은 그의 말에 누설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신들 운운하며 하나의 신을 충분히 여겨 묵묵히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그는 전능하신 한 분께 따르지 않고 있다. 혹자는 이렇게도 생각한다. 왕이 거룩한 신들의 영이라고 말할 때는 악신도 있고 선신도 있으며 사람들이 악신을 섬기는 것은 재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일 뿐이고 다니엘은 선하고 자혜로운 신의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만유의 주시라는 것을 재삼 재사 인정했으면서(2:47; 3:29) 여기서는 벨이 여전히 자기 신이라고 인정한다. 그는 또 다시 다니엘을 칭찬하는데 그 칭찬은 그를 하나님의 종으로서가 아니라 박수장으로서 대접하고 있다. 그는 그 지식이 본질상이나 정도에 있어서도 박수들의 지시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느부갓네살이 우상 숭배와 얼마나 밀접했던가를 살펴보자. 그는 다신관(多神觀)을 가지고 있었고 벨을 자기 신으로 택했다. 그는 이 두 가지의 불합리성이 논박의 여지가 없이 증명됐음에도 불구하고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는 다른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신들이 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기 신들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렘 2:11). 많은 사람들이 체면상 자기 길을 떠나지 못한다고 생가하나 그 때문에 그릇된 길을 고집한다. 느부갓네살의 각성은 얼마나 이완되고 그는 자기의 깨달음을 얼마나 쉽사리 저버리는지 주목하자. 그는 한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든 신들의 신이시라고 부렀다(2:47). 그런데 이제는 거룩한 신들이라고 부름으로써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다른 신들과 동렬로 취급한다. 그것이 신속히 실천되지 않으면 그것은 순식간에 망각하고 사라져 버린다는 데 주목하자. 느부갓네살은 참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식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기에 곧 뒷걸음질쳐서 거짓 신들께 대한 이전의 존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2. 왕은 다니엘에게 대한 큰 평가를 표현한다. 그는 다니엘이 참신의 종 오직 하나님만의 종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다니엘을 자기 술객들이 갖지 못한 통찰력과 예견력을 가진 자로 간주한다. "네게는 어려울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아노라." 예언의 영은 원수들이 판단해도 점술의 영보다 능가한다는 데 주목하자. 여기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기술에 대한 공정한 시합에 따라 얻어진 판정이었다.

Ⅴ. 느부갓네살은 자기 꿈을 상세히 서술한다.

1. 그는 숲 속의 모든 나무보다 빼어나게 무성하고 장엄한 나무를 보았다. 그 나무는 땅의 중앙에 있었다. 그것은 바벨론의 통치자 느부갓네살을 표현하기에 안성마춤이었다. 왜냐하면 바벨론은 당시 세계의 중앙에 있었던 때문이다. 모든 인방 군주를 압도하는 그의 위엄과 혁혁함은 심히 높은 이 나무의 높이로 상징되었다. 그 나무는 하늘에 닿았다. 그는 자기 주변 사람들보다 더 높았고 따라서 신적 존귀를 받으려고 의도하였다. 아니, 그는 주변 사람들을 힘으로 압도했다. 그가 거느린 강력한 군대는 파죽지세로 그 앞에 있는 모든 것을 휩쓸었다. 그러므로 그의 막강한 군대는 이 나무의 견고함으로 표현되고 있다. 점점 커지는 그의 유세는 열방의 화제꺼리가 되고 만인의 시선을 한 몸에 모았기에(어떤 이는 시기의 눈으로 봤고 어떤 이는 경이에 찬 시선을 보냈을 것이다) 이 나무의 모습은 땅 끝에서도 보인다고 한다. 이 나무는 보기 좋고 먹기 좋은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갖고 있었다(12절). 그 아름다운 잎사귀는 느부갓네살의 화려하고 웅장한 궁정을 의미한다. 그의 궁정은 나그네들의 경탄과 그 나라 백성의 영광이었던 것이다. 이 나무는 보기에 장관을 이루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용도도 매우 컸다.

(1) 보호에 이용된다. 그 가지는 짐승과 새들의 피난처가 된다. 통치자는 그 백성에게 더위와 풍우를 피하게 하는 피난처가 되어야 하며(사 4:6) 그들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 자신이 위험을 당해야 하고 어떻게 하면 그들을 안전하고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는지 궁리해야 한다. 가시나무는 자기를 나무들 위에 군림하게 한다면 그들더러 와서 자기 그늘에 피하게 하겠다고 청한다(삿 9:15). 충성을 유도하는 것은 곧 보호이다. 세상의 군왕은 그 백성에게 마치 큰 나무의 그늘과 같다(삿 32:2). 아니 바위는 견고하긴 하나 차갑기 때문에 그들은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인다고 한다(시 17:8). 그 날개 아래는 안전한 뿐만 아니라 따뜻하기도 하다.

(2) 양식을 얻는 데도 사용된다. 앗수르인은 백향목으로 비유되었다(겔 31:6). 백향목은 그늘만 제공할 뿐이다. 그러나 본문의 나무는 열매도 많이 가지고 있다. "그 열매는 많아서 만인의 식물이 될 만하고 무릇 혈기있는 자는 거기서 식물을 얻었다." 이 강대한 나라는 광대했을 뿐만 아니라 선을 베풀기도 했을 것 같다. 느부갓네살은 자기 나라를 가난하게 만들지 않고 부유하게 만들었으며 자기 힘과 세력을 이용하여 부와 교역을 가져왔다. 권세를 행하는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는다(눅 22:25). 권세를 유지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참으로 은혜를 베푸는 은인이 되는 것이다. 권세자들이 자신의 부와 권력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선한 일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그것은 곧 많은 사람의 의지가 되고 그들을 부양시키는 것이다. 재물이 많아지면 먹는 자도 많아진다.

2. 느부갓네살은 이 나무의 파멸에 대해 외치는 소리를 듣는다. 그는 그것을 완전히 기억했다가 여기에 술회하고 있는데 그는 아마 들은 대로 축어적인 서술을 하는 것이리라. 이 편결은 천사가 전했다. 그는 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고 이 판결을 큰소리로 외치는 것을 들었다. 이 천사는 여기서 순찰자 또는 감시자라고 불리우는데 그것은 천사들이 그 본질상 영이기에 졸지도 자지도 않을 뿐더러 그 직분상 영들을 섬기며 끊임없이 보살피고 위대하신 주인을 섬길 온갖 기회를 살피기도 하는 때문이다. 그들은 순찰자로서 하나님의 경외자들 주위에 진을 치고 그들을 구출하여 자기 수중에 굳게 붙잡는다. 이 천사는 사자였으며 거룩한 자였다.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집에 합당하다(시 93:5). 그러므로 하나님께 고용되어 그를 수종하는 자는 거룩한 자들이다. 그들은 자기 성품의 순결과 정직성을 보존하여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 여기서 이 나무에 선고된 파멸을 검토해 보자.

(1) 나무를 벌채하라는 명령이 나온다(14절). 도끼가 이 나무 뿌리에 놓여 있다. 아무리 높고 아무리 견고한 나무라도 멸망의 날이 올 때에는 안전할 수가 없다. 그 나무를 피난처로 삼던 짐승들과 새들은 쫓겨나 흩어지게 된다. 나뭇가지는 절단되고 잎은 우수수 떨어지며 열매는 흩어진다. 세상의 번영은 절정시에라도 불확실한 것임을 주목하자. 극히 화려한 가운데서 최대의 권세를 과시하던 자들이 자기가 신뢰하고 자랑하던 모든 것을 박탈당하는 일은 비일비재이다. 섭리가 바뀌면 걸출하던 자들이 포로가 되고 자기 분수 이상으로 풍족하게 살던 자들이 궁핍하게 되며 한때 식객과 간청자를 많이 두던 자들이 남에게 신세를 지게 된다. 그러나 여호와의 집에 심겨 그에게 열매를 맺는 의로운 나무(시 92:13)는 결코 벌목되거나 잎이 시들지 않을 것이다.

(2) 뿌리는 보존되도록 하라는 배려가 베풀어진다(15절).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두어 온갖 일기에 노출되게 하리라. 거기서 돌보아 주는 자없이 풀 속에 파묻혀 잇게 하라. 이전에는 그 가지 아래 피신하던 짐승들이 이제는 그 그루터기 위에서 휴식하게 하리라. 그러나 그것이 갈가리 찢기지 않고 오물처럼 짓밟히지 않으며 그것이 아직 더 좋은 날을 위해 예비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철과 놋줄로 테두리를 돌려 견고하게 하리라." 심판 중의 하나님께서 자비를 기억하고 계시다는 데 주목하자. 그 형편이 극히 사면초가인 것처럼 보이는 고독자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들을 예비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나무는 소망이 있으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며 물기운에 움이 돋는다(욥 14:7-9).

(3) 천사는 직접 그 의미를 느부갓네살에게 설명한다(16절). 이 나무가 뜻하는 인물이 누구이든지 간에 그는 존귀와 국가와 인간의 존엄을 박탈당하며 이성의 사용을 빼앗겨 짐승처럼 일곱 때를 지나게 되리라고 선고받는다. "그는 짐승의 마음을 받으리라." 이것은 현세적 심판 중에서 가장 슬프고 쓰라린 심판이다. 이것은 차라리 죽은 것보다 천 배나 더 나쁘다 비록 당사자는 거의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지만 다른 어느 누구보다 더 두려운 저주의 대상이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과하시려는 외적 고난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그 고난을 끈기있게 참으며 이성의 사용과 양심의 평화를 계속 허용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만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자기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처럼 높이는 교만한 폭군들(겔 28:22)은 인간의 마음을 박탈당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마땅하다.

(4) 이 일은 사실성이 확증되고 있다(17절)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이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심판관으로서 이 일을 결정하셨다. 그는 이 칙령에 서명을 하셨다. 그의 영원하신 계획에 준하여 명령이 발해졌다.

[1] 하늘의 천사들이 이를 입증하고 시인하고 갈채를 보냄으로써 동의하였다. 이 일은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결정하시고 행하시는 어떤 일에 있어서도 천사의 권면이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계획의 실현에 천사들의 사역을 이용하시듯이 때로는 사람들 모양으로 마치 천사들과 상의라도 하시는 것처럼 묘사된다. "내가 누구를 보낼꼬" (사 6:8). "누가 아합을 꾀겠느냐?" (왕상 22:20) 마찬가지로 본문은 이 판결의 엄숙성을 의미한다. 왕의 어명 또는 비답은 este me ipso-즉 집의 앞에서라는 말로 되어 있지만 헌장 따위는 "이름을 부서(副署)한 우리들 앞에서" 란 말로 되어 있다. 느부갓네살의 운명도 그와 같이 순찰자들의 명령에 따라야 했다.

[2] 지상의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이 일을 탄원했다. "이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다." 느부갓네살의 무거운 멍에 아래서 신음하던 하나님의 고난받던 백성들은 하나님께 복수를 해 주시도록 부르짖었다. 그들은 요청했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런 대답을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압제받는 자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는 그가 들으실 것이기 때문이다(출 22:27). 아합 때에도 엘리야가 이스라엘에 대해 탄원하자 그의 말대로 우로가 없으리라는 판결이 내려 졌던 것이다(왕상 17:1).

(5) 그 의도가 선언되고 있다. 이 나무의 벌채 명령이 하달된 것은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신다는 것을 인생으로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심판이 집행되어야 하는 것은 생각과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실제로 계시다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이다. 그 하나님은 세상을 지배하시는 신이시다. 그는 세상 속에 자기 나라를 소유하고 계시며 그 나라의 사무를 처리하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대해서 소유하는 바로 그 주권으로 인간 나라를 다스리기도 하시며 자기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신다. 높이는 일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시 75:6, 7). 하나님은 전혀 기대하지도 않던 자를 권좌에까지 높이시며 야망에 불타는 자들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드신다. 때때로 그는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고 그들로 자기 목적에 봉사시키신다. 그는 양떼 속에 있는 다윗을 세우셨듯이 보 잘 것 없는 자들을 세우신다. 그는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방백들과 함께 세우시다(시 113:7, 8). 아니, 때로는 악한 자를 세우셔서 패역한 백성에게 채찍이 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행하실 수 있으시며 행하실지도 모르며 때로는 이렇게 행하시면서 자기 일을 조금도 설명치 않으신다. 느부갓네살을 낮추심은 인생들로 이 일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응보의 세계 곧 영들의 세계로 이미 가 있는 자들은 이것을 안다. 죽은 자는 지극히 높으신 자가 다스리신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산 자는 너무 늦기전에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해 이것들을 알게 되어야 하며 명심해야만 한다. 이와 같이 느부갓네살은 자기가 보고들은 꿈을 완전히 그리고 신실하게 말한 뒤 다니엘에게 그 해석을 요구한다. 그는 다니엘외에 이 일을 해석할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다니엘이라면 이 일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거룩한 신들 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이 네 안에 있음이니라." 거룩한 하나님이란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적합한 칭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을 안에 두고 있는 자들에게는 많은 것이 기대된다. 느부갓네살이 그 나무가 바로 자신의 파멸을 뜻한다고 의식했는지 아닌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 그는 허영심에 차서 그것이 자기와 적수 관계에 있는 다른 군주의 몰락을 의미한다고 안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꿈에서 받은 것이 자기 적수의 파멸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즐거운 전망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여튼 그것이 자기에게 유리하든 불리하든간에 그는 그 꿈의 의미를 알고 싶어 안달이 났으며 다니엘에게 그 꿈의 해석을 의존하고 있다. 하나님이 전체적 심판의 경고를 주실 때 우리는 그의 의사를 이해하고 싶어해야 하며 성에서 부르짖는 주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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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느부갓네살의 꿈의 해석 (다니엘 4:19-27)

우리는 여기서 느부갓네살의 꿈의 해석을 본다. 그 꿈이 그에게 적용될 때 그리고 꿈속의 나무가 바로 느부갓네살 자신이라고 선포되었을 때, "왕께서 바로 그 사람입니다" 라는 말이 나왔을 때 그 꿈의 해석은 더 이상 필요가 없었다. Mutato nomine de te faqutanarrnaur-즉 이름만 바꾸면 그것은 바로 네 얘기다. 그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로 심판된다. 그의 운명은 그렇게 될 것이다. 그 자신이 그것을 결정하였다. 이 일은 너무 명백하여 다니엘은 듣자마자 얼마동안 놀랐다(19절). 그는 그토록 위대한 왕에게 그토록 큰 심판이 임한다는 데서 경악과 공포를 금할 수 없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으로 몸이 떨렸다. 동시에 그는 왕에게 흉한 소식을 고해야만하는 자기 입장을 깨닫자 당황하였다.

Ⅰ. 해몽에 대한 머릿말은 조정 신하로서 왕에게 드리는 정중한 경의이다. 왕은 다니엘이 놀라 서있는 것을 보았고, 그가 자기에게 말하기를 주저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다니엘을 격려했다. "다니엘아, 너는 이 꿈과 그 해석을 인하여 번민할 것이 아니니라. "이 말은 아마 다음 둘 중 한 가지 태도로 말해졌으리라.

1. 진정으로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신탁을 알기 원하는 자는 그 신탁이 자기를 위하든 반대하든 간에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따라서 사역자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말하도록 줘야 한다.

2. 또는 진리를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자로서. 그가 나중에 이 경고를 전혀 개의치 않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그의 말이 이런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너는 이 꿈과 그 해석을 인하여 번민할 것이 아니니 나는 그 꿈과 해석이 나를 괴롭히지 않으리라 믿고 또 그것을 내 마음에 두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느부가네살이 자신에게 대한 관심을 가지든 안 가지든 다니엘은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따라서 그 꿈이 왕을 미워하는 자에게 응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의 머리 위에가 아니라 당신의 적들의 머리에서 비추는 나쁜 징조이기를 원하나이다" 고 말했다. 비록 느부갓네살은 우상 숭배자였고,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고 박해하는 자였으나 지금은 다니엘의 왕이었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비록 지금 그 꿈을 예시하고, 이제 예언하려고 하지만 왕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Ⅱ. 해몽은 꿈을 왕께 적용함으로써 다시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왕의 보신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하늘에 닿았으니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인의 식물이 될 만하고 들짐승은 그 아래 거하며 공중의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더라 하시오니, 왕이여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20-22절). 다니엘은 왕의 꿈에 나타난 나무의 푸르름으로 현재의 번영을 보여 준다. "왕이여, 왕은 열왕의 왕이시라.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셨고 인생들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이, 어느 곳에 붙이사 다 다스리게 하였으니 왕은 곧 그 금머리니이다" (2:37, 38). "나무의 파멸은(23절)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명정하신 것이 내 주 왕에게 미칠 것을 나타낸다" (24절). 그는 그의 왕위를 박탈당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쫓겨나며 그의 이성을 빼앗기고 짐승의 마음이 그에게 주어지며,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그들과 함께 친구가 될 것이다. 또한 소처럼 풀을 먹고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며,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즉 칠 년을 지나리라. 그리고 나서야 그는 지극히 높으신 자가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깨달음 후에야 느부갓네살은 그의 통치권을 다시 회복하게 될 것이다(26절). "나라는 분명히 당신에게 주어지리이다. 그리고 나무의 그루터기처럼 견고하리이다. 왕께서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하나님은 여기서 하늘이라고 불리운다. 이는 하늘에 하나님이 자기 보좌를 세우시고(시 103:19), 하늘에서 모든 인생을 감찰하시기(시 33:13) 때문이다. 하늘까지도 하나님의 것이다. 가시적 천공이 이 땅에 대해 갖는 영향력은 하늘의 하나님이 하계에 대해 행사하시는 지배권을 희미하게나마 나타낸다. 우리는 하늘께 죄를 얻었다고 말한다(눅 15:18).

Ⅲ. 해석의 끝에는 다니엘이 한 예언자로서 왕에게 주는 경건한 충고가 나온다(27절). 그 꿈의 해석시 느부갓네살이 관심을 나타냈는지의 여부는 고사하고라도 한 마디 충고의 말은 대단히 기회가 좋은 것이었다. 그가 무사려했다면 그를 깨우쳐 줄 터였고 그가 고민했다면 그에게 위로가 될 터였다. 그 충고는 그 꿈과 해석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다니엘은 그것이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예언처럼 조건적이라고 알았던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검토해 보자.

1. 그의 충고는 얼마나 겸손하며 친절하며 공손한가! "오, 왕이여, 나의 간하는 것을 받으소서. 이 충고를 사랑과 선의에서 나오는 것으로 해석하소서 오해하지 마소서." 죄인들에게는 그들의 유익과 행복을 내세워 공손히 설득하고 간청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사도는 사람들이 권면의 말을 용납하도록 건청한다(히 13:22). 만일 사람들이 그런 권면을 부드럽게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소기의 목적을 거두는 셈이다.

2. 그의 충고는 어떤 것이었나?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에게 그의 심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물리요법을 받으라고 권면하지 않고 회개하여 그의 삶을 바꾸라고 충고한다. 그는 자기 백성을 압제했고 그의 동맹들을 불공평하게 다루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에게 주어야할 멋을 주고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보상하며 공의를 행함으로써 속죄해야 했다. 느부갓네살은 가난한 사람들, 하나님의 가나한 사람들이, 불쌍한 유대인들에게 너무 무자비했었다. 그래서 그는 간난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보이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동정을 베풀고, 그들을 해방시키거나 억압을 늦춤으로써 죄악을 속해야 했다. 회개에 있어서 우리가 악행을 그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명심하자.

3. 이 충고의 동기는 무엇인가?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비록 그 충고가 심판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하더라도 이합왕의 겸비 때처럼(왕상 21:29), 이로써 심판의 유예를 얻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심판이 오기 전에 고통은 더 길어질는지 아니면 심판이 올 때 고통은 더 짧아질는지 모른다. 그는 이 점을 그에게 확실히 말할 수가 없었다. "혹시 장구하리이다. 그렇게 나타날 수도 있나이다." 심판을 막는 가능성만 해도 그것은 우리의 죄를 떠나서 우리의 삶을 바꾸도록 하는 요인이 된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혹자는 이것을 "그것이 왕의 잘못을 치료할 것입니다" 라고 읽기도 한다. "이렇게 하여 분쟁은 끝날 것이며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4:20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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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 가운데로 쫓겨난 느부갓네살 (다니엘 4:28-33)

우리는 여기서 느부갓네살의 꿈이 성취되고 다니엘의 해몽이 정당화되며 확증받는 것을 보게 된다. 느부갓네살이 다니엘을 기뻐했는지 싫어했는지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Ⅰ. 하나님의 인내. "이 모든 일이 다 느부갓네살 왕에게 임하였느니라" (29절). 느부갓네살 왕은 자기 죄를 회개하거나, 가난한 포로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은 것 같다. 그의 평안함은 그 동안뿐이었다. 왜냐하면 느부갓네살이 "사로잡힌 자들을 그 집으로 놓아보내지 않은 것" 은 여전히 하나님과 쟁정이었기 때문이었다(사 14:17). 다니엘은 그에게 회개할 것을 충고하였고, 하나님은 그의 말씀에 신실하시므로 그는 왕에게 1년의 여지를 주셨다. 하나님은 죄인들에 대해서 오래 참으신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벧후 3:9).

Ⅱ. 왕은 오만불손하여 하나님의 인내를 악용했다. 느부갓네살은 호화로운 바벨론의 왕궁에서 거닐었다. 그는 모든 속령과 함께 자기의 명령 하에 있는 광대한 도성의 전경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교만하게 거닐고 있었다. 그는 혼자말로 했거나 또는 자기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아마 그는 모모한 외국인들에게 자기 왕국의 영광을 보여 주면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 바벨론은 크지 않은가?" 그렇다 그 성은 대단히 방대해서 성안에서 45마일을 걸을 만큼 넓었다. 성안에는 사람들이 넘쳤고, 그들은 모두 부유했다. 그 도시는 황금의 도시였고 그것의 위대성을 외쳐도 손색이 없었다(사 14:4). 집들과 성벽과 망대와 공공기관의 건물들은 굉장했다. 바벨론에 있는 모든 것은 위대하게 보인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 위대한 바벨론은 내가 건설하였다" 고 그는 말한다. 바벨론은 그가 태어나기 수세기 전에 창건되었다. 그러나 바벨론을 강화시키고 미화시킨 것은 느부갓네살이었다. 우리는 바벨론의 대부분이 그의 오랜 통치 기간 중 재건되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느부갓네살은 마치 시이저가 로마에 대해서 Lateritiam inveni, marmoream reliqui - 즉 나는 벽돌을 발견했지만 그것으로 대리석을 남겼다 라고 자랑했던 것처럼, 바벨론을 건축한 것을 자랑한다. 느부갓네살은 그가 바벨론을 건설하여 왕국의 집즉 제국의 수도로 삼은 것을 자랑한다(원문에는 :왕국의 집으로 삼았다고 되어 있음 :역주). 그의 지배권에 속한 열방과 비교할 때 이 광활한 도시는, 단지 하나의 집에 불과했었다. 그는 바벨론을 그의 백성들의 도움으로 건설했으나, 그는 자기 능력과 권세로 건설했다고 자랑한다. 그는 자기 편리와 안전을 위해서 바벨론을 건설했는데, 마치 그럴 필요성이 없었던 것처럼 순전히 자기 위엄하여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건설했노라고 자랑한다. 교만과 자만심은 세상에서 큰 일을 이룩하는 위대한 자들을 극히 쉽사리 엄습하는 죄라는 데 주목하자. 그들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영광을 자기 자신이 취하기 쉽다.

Ⅲ. 왕의 교만함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느부갓네살은 그와 같이 우쭐거리며 걷고, 자랑하면서 자기 그림자를 경배하고 있었다. 왕의 입에 거만한 말이 있을 때, 하늘로부터 능력있는 말씀이 나아왔다. 그 능력있는 말씀에 의해서 그는 다음과 같은 것을 박탈당한다.

1. 왕으로서의 명예. "나라의 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느부갓네살이 자기 왕국의 보호를 위해 난공불락의 성채를 세웠다고 생각한 순간 그 왕국은 그에게서 떠나갔다. 그가 그 성은 난공불락의 성이므로 아무도 그것을 그로부터 빼앗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을 때 그 왕국은 저절로 떠나가고 있다. 물론 그가 그 왕국을 전적으로 지배할 수 없게 되자 곧 왕국은 그의 수중에서 떠나간 것이다.

2. 그는 인간으로서의 명예도 박탈당했다. 그는 그의 이성을 잃었고, 바로 그 이유로 자기 지배권도 상실했다. "그들은 너를 사람들로부터 쫓아낼 것이다" (32절). 그리고 그것은 성취되었다(33절). 그는 같은 시간에 쫓겨난 것이다. 갑자기 그는 미치게 되었다. 그의 이해력과 기억은 사라져 버렸고, 이성적인 영혼의 기능은 파괴되었다. 그래서 그는 인간 중에서 가장야만적인 동물이 된 것이다. 그는 벌거벗었고, 스스로 이성적인 피조물의 사회에서 피하여 숲과 나무 사이를 광포하게 뛰어 다녔다. 그는 자신의 종들에게 쫓겨났다. 그의 신복들은 그의 이성 회복을 가망없다고 보고 포기했으며 그를 더 이상 돌보지 않았다. 그는 (백수의 왕 사자처럼) 야수의 정신을 갖지 않고 비천한 동물의 정신을 가졌다. 그는 소처럼 풀을 먹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 사람의 목소리로 말하지 않고 소처럼 울었을 것이다. 혹자는 그의 몸전체가 머리털로 뒤덮여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두발과 수염은 깎거나 빗질하지 않았으므로 독수리 털처럼 되었고, 그의 손톱은 새 발톱과 같았다. 여기서 잠깐 쉬면서 이 비극적인 광경을 자세히 살펴보자. 그리고 이로부터 교훈을 얻도록 하자.

(1)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이성을 사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를 보자. 그리고 우리가 이성에 대해 얼마나 감사해야 하며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일이나 이성을 잃은 행위를 저지르지 않도록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지 살피자. 우리는 여기서 어성의 존중을 배우고 우울증이나 정신 분열증이나 환각 증세에 빠진 자들의 처지를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정신 이상자를 능멸하지 말고 온정을 베풀 줄 알아야 하며 따뜻이 맞아야 한다. 그것은 인류 공동의 적이자 시련이다. 이제나 저제나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 여기서 인간의 영광과 위대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살피자. 이것이 위대한 느부갓네살 대왕인가? 이 비참한 동물은 가난한 거지보다 더 초라하지 않은가? 이것이 왕좌에서는 그토록 영화롭게 보이고 군진에서는 그토록 막강하게 보이며 열방을 진압하고 지배하기에 족한 문무 겸전의 느부갓네살 왕이란 말인가? 그런 자가 이제는 등에 옷을 걸칠 만한 이성조차 갖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이 사람이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격동시키던 자가 아닌가?" (사 14:16) 지혜자는 자기 지혜를 자랑하지 말며 용사는 자기 힘을 자랑하지 말 것이다.

(3)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어떻게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그들을 얼마나 부끄럽게 하시며 멸시하시는지 살피자. 느부갓네살은 인간 이상이 되려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인간 이하의 것으로 만드신 것은 지당하다(욥 40:11-13 참고). 하나님께서는 자기 조물주의 경쟁 상대로 자처한 그를 짐승의 수준으로 떨어뜨리신 것이다.

 

4:29 없음.

 

4:30 없음.

 

4:31 없음.

 

4:32 없음.

 

4:33 없음.

 

4:34

느부갓네살의 회복 (다니엘 4:34-37)

우리는 여기서 느부갓네살이 파멸로부터 다시 회복되어(" 7년이라는 기간이 차매") 제 정신을 찾는 것을 본다. 그가 살아 있었던 것은 하나의 자비였다. 왜냐하면 생명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으며, 느부갓네살처럼(" 그 기간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우리도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느부갓네살은 더 이상 짐승처럼 세상을 바라보지 않았으며 하나의 인간으로서 보기 시작했다. Os homini sublime dedit-즉 하늘은 인간에게 올바른 용모를 주셨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것보다 더 한 것이 있었다. 그는 믿음 이 깊은 사람으로서, 회개한 사람으로서 자비를 구하는 겸손한 경건자로서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자각하게 될 때까지는 결코 그렇질 못했다.

Ⅰ. 그는 그의 이성을 사용하게 되었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해진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분이 다스리신다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 그런 비참한 상태를 계속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여기서 우리는 그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기사에 접하게 된다.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한다." 하나님을 송촉하지 않고 찬미하지 않는자들은 총명이 없는 자로 간주되어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또한 인간이 경건해지기까지는 이성을 올바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때까지는 인간으로서 사는 게 아니다. 이성이 종교의 주체나 토대인 것처럼 (그래서 이성을 갖지 않은 피조물은 종교적이 될 수 없다), 종교는 이성의 영광이며 왕관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이성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이성은 공허한 것이 된다. 이것은 이성을 회복한 느부갓네살의 첫 번째 행동이었다. 자기에게 되돌아 온 이성을 하나님 찬미에 사용하자 그는 비로소 다른 모든 이성의 향유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이성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는 이성을 하나님께 대한 찬미와 감사에 적용할 줄 몰랐다. 우리가 이성을 부여받은 것은 바로 이 큰 목적을 위해서다. 그의 어리석음은 지혜의 수단이 되었다. 그가 회복하게 된 것은 심판에 대한 꿈에 의해서가 아니었다(그것은 꿈처럼 곧 잊혀졌다). 그는 그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야 그의 귀는 열려서 교훈을 듣게 되었다(욥 36:10). 제 정신으로 돌아오기 위해 그는 먼저 제 정신이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의 마음 가운데 있던 좋은 생각과 거기서 나오는 좋은 행동은 그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었다는 사실이 이로써 드러났다. 이제 느부갓네살은 마침내 무엇을 깨닫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배울 수 있다.

1.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계신다. 그리고 그의 존재는 변화와 종말을 모른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스스로 그것들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아첨군들은 때때로 "오, 왕이시여, 만수세를 하시옵소서" 라고 그에게 알랑거린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은 이제 어떠한 왕도 영원히 살 수 없으며,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영원하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2. 하나님의 왕국은 그와 마찬가지로 영원하며, 그의 권세는 대대에 이른다. 그의 왕국에는 혁명도 상속도 없다. 하나님은 영원히 사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왕노릇하시며 그의 통치는 영원하며, 그의 왕국에는 종말이 없다.

3.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나라가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필요로 하시지 않는다. 그는 그들은 고려도 하지 않으신다. 아무리 위대한 인간일지라도 하나님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지고하심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들의 초라함을 생각한다.

4. 하나님의 왕국은 우주적이며, 하늘의 군사와 땅의 모든 거민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의 억제와 제어하에 있다. 천사와 인간은 다 하나님께 고용된 책임적 존재다. 가장 높은 천사도 하나님의 명령을 초월하지 못하며 가장 보잘 것 없는 인간도 그의 인식밖에 있지 않다. 하늘의 천사는 하나님의 군대이며, 지상의 인간들은 그의 소작인들이다.

5. 그의 능력은 불가항력적이며, 그의 주권은 억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뜻대로 행하시며 자기 계획과 목적, 자기 법령과 모략을 따라 행동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기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행하신다. 그는 예정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성취하신다. 그리고 아무도 그의 뜻에 거역할 수 없으며, 그의 계획을 변화시킬 수도 없다. 아무도 그의 행동을 책망할 수 없으며, 그 행동의 의미를 물을 수도, 그리고 그 행동에 대한 이유를 요구할 수도 없다. 창조주와 다투며 "당신은 누구냐" ? 혹은 "왜 당신은 그렇게 행하느냐?" 고 말하는 사람은 화있을진저!

6. 하나님의 행하시는 모든 일은 좋은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모두 진실하다. 왜냐하면 그가 하시는 모든 행동은 그의 말씀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의 길은 공평하다. 즉 하나님의 길은, 지혜롭고 의로우며 슬기와 형평의 법칙에 정확히 일치하며 지혜롭고 의로운 심판이시다. 그의 일에서는 잘못을 찾을 수가 없다.

7. 하나님은 그의 적 가운데서 가장 교만한 자를 겸손하게 만드시는 힘을 가지고 계신다.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 (37절). 하나님은 하나님과 다툴 수 있다고 자기 능력을 자신하는 가장 교만한 자들을 다루실 수 있다.

Ⅱ. 느부갓네살은 이성을 되찾았고, 그로써 자신을 다시 되찾으며 번영을 재확립하고 기뻐한다(36절). "그 동시에 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다." 앞에서도 그는 그의 총명이 돌아왔음을 말한 적이 있다(34절). 그런데 여기서 또 그 말을 한다. 왜냐하면 이성의 사용은 우리가 아무리 감사해도 부족하다고 할 수 있는 자비이기 때문이다. 그의 관원들은 그에게 조회했다. 그는 관원들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그가 이성을 회복하여 통치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덤으로 전보다 더 잘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아마도 그 꿈과 해몽은 잘 알려졌었고 궁정에서 화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정신 이상자가 된다던 예언의 첫 번째 부분은 성취되었으므로 그들은 예언에 의해서 7년째에 그가 다시 자신을 회복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이를 믿고 그들은 때가 차자 느부갓네살을 영접할 준비를 갖추었을 것이다. 그러자 그의 위엄과 광명이 그에게로 돌아왔다. 그는 광기에 사로잡히기 전과 꼭 같은 상태로 돌아 온 것이다. 그는 이전에 어떤 방해도 받지 않았었다. 그때처럼 그는 이제 자기 나라에서 그 위치를 확고부동하게 굳힌 것이다. 그는 바보가 되었고 그럼으로써 그는 그 이전의 어느 때보다 더 현명해졌다. 전일에는 수치와 불명예의 심연에 있던 그가 이제는 지극한 위세를 더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나라와 나라를 정복하며 다닐 때의 위세를 능가하였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1.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때, 특히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앙적 인식과 참회하는 죄의 고백으로 영광을 돌리게 될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영광을 주시며, 첫 아담의 죄로 인해서 상실했던 그들의 존엄성을 회복하실 뿐만 아니라, 둘째 아마의 의와 은총으로 그들의 위세를 더욱 크게 해 주실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또 그럴 때만이 그렇게 기대할 수 있다.

2. 재난은 그들이 보냄받은 일을 행할 때 사라질 것이다. 느부갓네살이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지배를 깨달았을 때,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를 회복할 수 있었다.

3.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우리가 취하고 주는 모든 것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느부갓네살은 그의 왕국을 되찾았을 때,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였다(37절). 우리는 이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고, 우리는 번영을 누림으로 그를 칭송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느부갓네살이 그의 삶과 통치를 끝낸 것은 이런 사건 이후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유세비우스의 인용에 의하면 아비데누스는 갈대아의 전승으로부터, 바벨론이 고레스에 의해서 취해질 것을 예언했다고 한다. 그가 여기서 볼 수 있는 선한 마음을 계속 지녔는지 우리는 언급이 없어 알 수 없으며 그가 반대로 행했다는 것은 나타나지 않는다. 만일 그토록 큰 훼방자요, 박해자였던 느부갓네살이 자비를 얻었다면 우리 역시 자비를 소망할 수 있다. 우리는 거저 주시는 자유로운 은사를 찬미해야 한다. 느부갓네살은 그 은사로 말미암아 잠시 동안 이성을 잃었으나 그의 영혼을 영원히 건지게 되었던 것이다.

 

4:35 없음.

 

4:36 없음.

 

4:37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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