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18:1

신 포도의 속담(에스겔 18:1-9)

악한 관습이 선한 법률을 낳는다는 말이 있다. 또 이와 마찬가지로 가끔 부당한 반성이 정당한 증명을 결과한다. 또 악한 속담이 선한 예언을 낳는다.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보자.

Ⅰ. 유대인들이 포로기에 흔히 사용했던 악한 속담이 나와 있다. 이미 앞에서 그 중 하나를 보았고(12:22), 그것에 대한 대답도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를 보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는 것이었다. 즉 "날은 더디고, 모든 묵시는 응험이 없다. 곧 경고는 농담이로다" 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나와 있는 "이것은" 마치 시행된 심판은 그릇되었다는 듯이,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너는 이스라엘 땅에 관한 이 속담을 사용한다. 이제 그 땅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황무하게 되었으므로, 그의 말씀에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라고 한다. 우리는 우리 조상들의 죄로 인해 벌을 받는도다. 자연의 인과의 질서에 있어서는 사람이 먹거나 마신 것이 잘못된다면 단지 그들 자신만이 해를 당하는 반면, 여기서는 아비가 신 포도를 먹음으로써 자녀의 이가 시거나 마비되는 것과 같으니, 하나님의 섭리는 매우 불합리한 것이로다."

1. 그러므로 이 속담에도 일리가 있다는 점을 시인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그가 "아비의 허물을 아들에게 돌리리라 "고 말씀하셨다. 특히 우상 숭배의 죄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로 인해 우상 숭배 죄악의 악독함을 나타내고, 하나님은 그 죄를 증오하신다는 것과, 그가 우상 숭배자들에게 내리실 무거운 형벌과, 그에 대한 의로운 분노를 나타내고자 하셨다. 이것은 자녀들에 대한 애정으로 인하여 부모된 자들이 죄를 억제하며, 자녀들이 어버이들에 대한 존경심으로 인하여 죄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예언자를 통해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지금 멸망을 임하게 함은 므낫세와 이전의 다른 왕들의 죄를 주목한 때문이라고 종종 공포하셨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민족을 하나의 정치적 통일체로 여기시면서, 민족적 죄에 대해서는 민족적 심판으로 징계하시기 때문이다. 옛 허물들을 인하여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은, 단지 한 사람으로 "그가 늙었을 때, 그의 어렸을 때에 지은 죄를 받게하는" 것과 같다(욥 13:26). 그리고 그렇게 함이 하나님께는 불의가 없다. 그러나,

2.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을 비난하는 구실과 자기들에 대한 하나님의 처사가 항상 잘못되었다는 비난의 구실로 삼으려 하였다. 지금까지는 고의적인 죄책을 지고 있는 자는 "신 포도를 먹는다" 는 말이 옳았다. 그들은 조만간 그들이 느끼고 있는 바를 행한다. 포도는 유혹의 때에는 아주 좋게 보일 것이나, 돌이켜 볼 때는 그 맛이 쓸 것이다. 포도는 죄인의 이를 시게 할 것이다. 양심이 깨어나서 그들 앞에 죄를 나열시키면, 그것은 이가 실 때처럼 그들의 안락을 형편없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들이 아버지의 우행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자기들이 맛보지 않았던 쾌락 때문에 고통을 느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처럼 보복하심은 부당하며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생각은 얼마나 악한가 ! 그 무례함이 얼마나 대담한가 ! 또 그것이 얼마나 교활하며, 그 비교의 수법이 얼마나 음흉한가를 보라. 경건한 일에는 냉소한 많은 자들이 농담에 있어서는 천재적 소질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과 종교에 반대하는 지옥의 악덕도 이와 같이 조직되고 선전된다. 여기서는 그것은 한 속담 속에 담겨졌다. 그것도 흔히 쓰여지는 그런 속담에 담겨졌다. 그들은 때때로 그것을 반복하였다. 그리고 분명히 그 뜻이 불경스런 의미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완전한 불경을 비난한다는 핑계로 스스로의 피난처를 찾았다.

이로써 그들은 매를 맞고도 겸손해지지 않았음이 드러났으니, 자신을 정죄하고 하나님을 의롭게 여기는 대신에 그들은 그를 정죄하고 자신들을 의롭게 여겼다. 그러나 이처럼 "조물주와 다투는 자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Ⅱ. 이 속담에 대한 정당한 책망과 응답을 보자. 그런 속담을 "왜 사용하느냐?" 이것은 다음과 같은 책망이다. "너는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시험애 보려는 것이냐? 혹은 이로 인해 그가 너를 진멸하시기까지 너에게 진노하도록 그를 격분시킬 작정이냐? 이것이 네 자신을 그와 화목시키고 너를 그와 화평케 하는 길이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답변을 보자.

1. 그 속담의 사용은 금지되어야 한다. 이것이 언명되고, 맹세로 확정된다(3절). "너희가 다시는 이 속담을 쓸 기회를 못가지게 되리라." 즉(그것은 다음과 같이 읽을 수도 있다) "너희가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이 속담을 폐기하겠다는 약속의 주제가 되었다(렘 31:39). 여기서는 그것은 경고의 주제가 되고 있다. 예레미야서에게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리라는 것을 뜻했다. 여기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심판의 길로 그들을 대적하러 나오실 것을 암시한다. 그는 그들이 그런 속담을 무례히 말한 것으로 인해서 다시는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징계하시니, 또 다른 경우에서와 같다(렘 23:34, 36). 하나님께서는 저 잔소리꾼을 침묵시킬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 내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 모든 황무케 하는 심판이 임해야 할 충분한 악행이 있음을 만방에 알리실 것이다. 그들은 조상들의 죄를 답습하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때문이다. "네 자신의 양심이 네게 말할 것이며, 네 모든 이웃들이 확인할 것은, 네 자신이 네 이전에 너의 아버지가 먹은 것과 같은 신 포도를 먹지 않았더면 너의 이가 시기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2. 진실로 그 말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불의하고도 이유없는 비난이었다. 왜냐하면

(1) 하나님께서는 아이들이 그들의 아비의 전철을 밟아 "그들의 죄악의 분량을 채우지" (마 23:32)않는다면, 그 아비의 죄로 인해 그 아이들을 벌 주지 않으리라. 따라서 그들을 불평할 이유가 없으니, 그들이 겪는 것은 모두 그들이 받을 만한 스스로의 죄보다 오히려 작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비의 허물을 아들에게 내리겠다" 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그 아들에게 어떤 곤란을 주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단지 "그들의 공로에 따라" 판단하시는 것이다. 이 사실은 그 아비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를 말해 주는 것이요, 그에 따라 즉시 책벌하지 않는 것이니, 그 까닭은 그는 "그의 죄악을 쌓았다가 갚으시기" 때문이다(욥 21:19).

(2) 자식들(때로는 무고한 자식들)이 그의 아비의 악행 때문에 액운을 당하는 것은 오직 일시적인 환난에서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환난의 성질을 바꾸실 수 있으며, 그 환난으로 하여금 그것을 만난 자에게 유익하게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영적이며 영원한 재앙에 대하여는(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자식이 전혀 그 아비의 죄로 인해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이 사실이 자세히 나타나 있다. 그리고 크신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악하고 비합리적인 사람들과의 소송을 심리하시기를 기꺼워하시며, 그가 즉시 그들을 쳐서 벙어리 혹은 죽은 자로 만들지 않으시고 그들 앞에서 사실을 진술하도록 허락하셨으며, 그가 판단될 때 명백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이다. 하나님은 이 답변 속에서,



[1] 그 자신의 절대적이고 명백한 주권을 견지하시고 주장하실 것이다. "보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4절).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할 것없이 모든 사람의 아들들의 모든 영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신다.

첫째, 영혼은 그의 것이다. "만물의" 창조자이신 그는 특별한 의미에서 "영혼의 아버지" 이시니, 그의 형상이 인간의 영혼에 찍혔기 때문이다. 그것은 창조 때에 그렇게 되었다. 또 그것은 만물의 갱신에 있어서 그러하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람의 영(생명)을 조성하시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이 하나님" 이라고 일컬어진다.

둘째, 모든 영혼은 그의 것이니, 그에 의해 그리고 그를 위해 창조되었다. 모든 영혼이 그에게 책임을 지고 있다. "아비의 영혼이 내 것임과 같이 아들이 영혼도 내 것이다." 우리의 지상의 어버이는 오직 "우리 육체의 아비" 일 뿐으며, 우리의 영혼은 그들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에 도전하신다. 이제 이 문제를 명확히 하기 위해 그 다음을 살펴보자.

1. 하나님께서 아비와 아들 양자에게 있어서 기꺼우신 것을 행하시며, 아무도 "당신은 무엇을 하십니까?" 하고 하나님께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명백히 하려 하심이다. 우리에게 우리의 존재를 허락하신 그가 다시 그것을 취한다 해도 우리에게 잘못을 범하는 것이 아니며, 그가 단지 우리 존재를 부지해 주는 것과 안위해 주는 것 중 일부를 찾아간다 할 때는 더구나 말할 것도 없다. 그와 변론하는 것은 마치 "만들어진 물건이 자기를 만든 사람에게, '왜 당신은 나를 이처럼 만들었습니까?' 하고 말하는 것" 처럼 불합리한 일이다.

2. 하나님께서는 아비와 아들 양편에 호의를 베푸실 것이며, 아무에게도 곤란을 주시지 않을 것임을 확실히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드신 어떤 것도 미워하지 않으시며, 따라서(성인에 대하여 말하면, 그는 스스로 행동할 수 있다) 아무도 그들 자신의 태만에 의하지 않고는 죽지 않도록 모든 영혼에게 친절을 베푸신다는 것을 확신한다. "모든 영혼이 다 그에게 속한지라." 따라서 그는 그들에 대한 심판에 있어서 공평하시다. 우리 모두 우리에 대한 그의 관심과 다스리심에 순복하자. 그는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주여, 내 영혼이 당신의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당신께 바쳐 당신을 위해 쓰여지고 당신 안에서 행복하게 되도록 하겠읍니다" 하고 대답하자. 하나님께서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나에게 바치라. 그것은 내 것이니라" 고 말씀하시며, 그에 대해 우리는 "아버지여, 내 마음을 취하소서. 그것은 당신의 것입니다" 고 순복해야 한다.

[2]하나님께서는 그의 주권을 주장하심으로써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도 있으나, 각 사람에 대해서 공평하고 마땅한 심판의 법칙을 지시하시고, 책정하신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계속 범죄하는 죄인은 반드시 죽을 것이니, 그의 범죄는 그의 파멸이 되리라. "범죄하는 영혼은 죽으리라." 곧 하나님의 호의로부터 배제되리니, 그 호의는 곧 그 영혼의 생명과 축복이다. 또 그의 진노 아래 영원히 거하리니- 그것 그의 죽음이요 재앙이다. 죄는 "영혼" 이 짓는 것이며, 육체는 오직 "불의 도구" 일 뿐이다. 죄는" 영혼의 죄" 라고 일컬어진다(미 6:7). 따라서 죄에 대한 벌은 "환난과 곤고" 이다(롬 2:9).

둘째, 그의 의로움에 계속 거하는 의로운 사람은 반드시 살리라. "사람이 만일 의로와서" 선한 원칙과 선한 정신과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대한 증거로써, "법과 의를 따라 행하면(5절), 그는 정녕 살리라. 내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9절)." 만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부응하는 양심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임무로 삼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그의 목표로 삼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 영원히 행복할 것이다. 또 그가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중보자를 통하여 용서받을 것이다.

이제 이 의로운 사람의 성격의 특성을 보자.

1. 그는 주의깊게 자신을 죄의 오염으로부터 지키며, 악은 모양이라도 멀리 한다.

(1) 제 4계명에 거역하는 죄를 멀리 한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문제에 있어서 그는 질투(경계)하나니, 하나님께서도 그러하시다는 것을 그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산당에 세워진 우상에게 희생을 바치지도 않았을 뿐더러, "산 위에서 먹는" 일조차 하지 않았다. 즉 "우상에게 바쳐진 희생 제물을 먹음" 으로써 우상 숭배자와 교제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고전 10:20). 그는 그들과 함께 우상의 제단에 엎드리지도 않았을 뿐더러, 산당에서 함께 식사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방의 우상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집의 우상들" 도 혐오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대체로 허용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고백하는 백성으로 여겨졌던 자들에게도 박수 갈채와 찬양을 받았다. 그는 저 우상들에게 경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눈조차 들지" 않았다. 그는 그들에게 호의를 가진 눈을 돌리지 않았고, 전혀 관심도 없었으니, 그들의 은혜도 바라지도 않았으며, 그들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유혹에 빠지는 것을 보았으므로, 올가미에 걸리지 않기 위해 그들을 감히 쳐다보지도 않았다. 우상 숭배자의 눈은 "음행을 행한다" 고 했다(겔 6:9; 신 4:19 참조).

(2) 제 7계명에 거역하는 죄를 짓지 않았다. 그는 삼가 조심하여 "성결하고 영예롭게" 아내를 대했으며, "부정한 정욕" 에서 대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감히 "그의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 아니하며, 타락시키거나 유혹하려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또 아내가 "부정결로 인해 격리되었을" 때는 접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율법에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레 18:19; 20:18). 육체의 욕망을 항상 이성(理性)과 미덕에 굴종시키는 것은 지혜와 공의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3) 제 8계명에 거역하는 죄를 짓지 않았다. 그는 "의로운 사람" 으로서, 거짓으로나 율법과 권리의 미명으로나 "사람을 박대하지 않았고, 힘과 권력을 가지고 "억탈하지 않으며," 그들의 물자나 땅, 나아가서 그들의 자유와 생명을 강탈하지 않았다(7절). 학대와 폭력은 대홍수를 초래했던 저 옛세계의 죄였으며, 아직도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해서는 보복자이시며, 앞으로도 보복자이실 죄이다. 아니 오히려, 그는 "변을 위하여" 돈을 꾸어 주지 않고, "이자를 받지 아니하며" (8절), 비록 계약에 의해서이기 때문에 상관없는 일이었을지라도 그것이 율법에 의해 금지되어 있는 한, 감히 행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에는 이방인 나그네들에게서는 적당한 변을 받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동포들로부터는 그런 일이 금지되었다. 의로운 사람은 이웃의 궁핍을 기화로 자기 이익을 취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땀과 노고로 먹고 살 정도로 편안과 게으름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에 따라 그가 꾸어 준 것의 이자를 못 무는 사람들로부터 억지로 취하려 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 금리를 지불하지 못하게 된 자들로부터 허락된 것을 늑탈하는 가혹한 일을 하지 않으리라. 오히려 그는 이득뿐만 아니라 손실에 있어서도 기꺼이 함께하려고 할 것이다. Qui sentit commodum, sentire debet et onus-즉 이득을 누리는 자는 빚도 감당해야 한다.

2. 그는 그가 맡은 의무를 행하는 데 있어서 양심적이다. 그는 율법에 따라 가난한 채무자에게 "전당물을 도로" 주었다. 출애굽기 22장 26절에,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꼭 필요한 옷을) 다시 그에게 돌려 보내어 그로 잠옷을 입고 잘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고 되어 있다. 나아가 가난한 자들에게 그들의 것을 돌려 보낼 뿐만 아니라, 그는 "주린 자에게 그의 식물을 주었다." 정직하게 획득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식물" 이라고 일컬어짐을 주목하라. 남에게 주는 것은 부당하게 취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도 "나는 번제물을 위한 강도질을 미워하노라" 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사람은 나발처럼 그들의 식물이 "그들 자신" 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발은 그리하여 그 식물을 다윗에게 주려고 하지 않았다(삼상 25:11). 그러나 그것이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들이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라. 의복은 식물과 마찬가지로 필요하며, 그에 따라서 이 의로운 사람은 자비롭게도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힌다" (7절). 도르라가 가난한 사람을 위해 만든 겉옷은 그녀의 자비의 증거로써 만들어졌던 것이다(행 9:39). 이 의로운 사람은 "스스로 손을 금하여 죄악을 짓지 아니하였다" (8절). 만일 나중에 가서 부주의로 나쁜 일을 한 것이 드러나게 되면, 그는 그것을 시작했다고 하여 계속하지 않는다. 그는 "죄악" 으로 깨닫은 것에서 "스스로 손을 금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기회가 그것을 행하는 데 따라서 "사람 사람 사이에 진실히 판단하며 (한 재판관으로서, 한 목격자로서, 한 배심원으로서, 한 심판자로서), 그 공의가 어떻게해서든지 행해지도록 관여하여 아무도 우롱되지 않고, 우롱된 자는 바로 잡아지고, 모든 사람은 제 몫을 갖도록 하며, 기꺼이 중재자로 나선다. 그는 여기 있는 바대로 어떤 좋은 일이든 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이웃에 대해 좋은 직책을 다한다.

허나 그가 그의 형제에게 의롭고 진실한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 것이니, 그의 인품을 완성하려면 반드시 그의 하나님께도 그와 같이 행해야만 한다(9절). "그는 내 율례를 좇느니라." 이는 그의 직접적인 예배의 의무와 관련된다. "그는 그의 모든 규례를 지켰으며," 그것을 모두 존경하고 거기에 부응하며, 끊임없이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진실로 행하였다. 그리하여 스스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충실했으며, 그 자신을 하나님과 연합시킴으로써, 배은망덕하게 "그를 떠나거나, 그를 못본 체하지 않는다." 이런 자는 의로운 사람이니, "정녕 살리라." 그는 확실히 살 것이며, 생명을 가지되 더 충만히 누리며, 진실되게 살 것이며, 평안히, 영원히 살리라. "계명을 지키라." 그러면 너는 "생명에 들어가리라" (마 19:17).

 

18:2 없음.

 

18:3 없음.

 

18:4 없음.

 

18:5 없음.

 

18:6 없음.

 

18:7 없음.

 

18:8 없음.

 

18:9 없음.

 

18:10

의의 길(에스겔 18:10-20)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서 심판의 일반 법칙을 제정하셨으니, "인내심을 가지고 선행을 계속하는" 자들에게는 영생을,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는" 자(롬 2:7, 8)에게는 노와 분을 베푸실 것임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여기서는 사람의 부모 관계와 인척 관계가 사태를 변경하지 못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Ⅰ. 하나님은 그 법칙을 양자의 경우에 자세히 적용하신다. 유다왕의 가계에도 있었고, 흔히 사적인 가계에서도 일어나는 일이지만 경건한 부모가 사악한 자녀를 가지며 사악한 부모가 경건한 자녀를 가지는 수가 있다. 여기서 가르쳐 주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악인은, 비록 그가 경건한 아비의 아들일지라도, 정녕 그의 범죄로 멸망할 것이다. 만일 이전에 말한 저 의로운 사람이 그 성격이 그의 아비의 성격의 정반대인 "아들을 낳았더라도," 그의 형편은 역시 정녕 그렇게 되리라.

(1) 매우 경건한 아비의 아들이라도, 그가 받은 훈계, 좋은 교육과 필요한 책망, 그가 당한 규제, 종족에는 그를 위해 들여진 노고와 그를 위해 바쳐진 기도에도 불구하고, 악하고 부도덕하며, 그의 아비의 슬픔거리, 그의 가족의 부끄러움, 그의 세대의 저주요 재앙이라고 악명높게 판명될 수 있다는 사실은 새삼스런 것이 아니다. 여기서 보면 그런 아들도, 그의 선한 아비는 두려워하여 주의 깊게 피하였던 저 모든 흉악한 죄에 빠지고, 그의 아비는 양심에 따라 행하였고 그러면서 만족을 느꼈던 저 모든 선한 의무들을 떨쳐 버린 것으로 가정되어 있다. 그는 그의 아비가 행하였던 것 모두를 행치 않고, 모든 일에 있어서 그의 모범과 반대되게 행한다. 그는 여기서 노상 강도로 묘사된다. - "강도요 피흘리게 하는 자로다." 그는 우상 숭배자이다. "그는 산 위에서 제물을 먹거나(11절), 우상에게 눈을 들었다." 그의 선한 아비는 결코 행치 않았던 일이다. 또 그는 마침내 우상 숭배자와 함께 잔치를 먹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희생을 드리게 되었으니, 본문에는 "가증한 일을 행한다" 고 했다. 죄의 길은 내리받이 길이기 때문이다. 그는 간음자요, "그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는" 자이다. 그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 까지도 학대하는 자이다. 그는 가엾은 자를 약탈하며, 자기 생각에 스스로를 방어할 힘이 없는 자들을 억압하며, 약한 자를 짓밟고 이미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데 쾌락과 자만을 느낀다. 그는 그가 "주어야" 할 자들로부터 "빼앗는다." 그는 공공연히 "탈취했다." 그는 "변을 위하여 꾸어 주며," 계약에 의해서 착취했다. 그리고 그는 전당물을 도로 주지 아니하고," 그 빚을 갚았을 때에도 불의로 그것을 계속 가지고 있다. 악한 자녀를 가진 선량한 어버이들의 경우가 특별한 것이라고 여기지는 말라. 우리는 은총이 피(혈통)를 통해 흐르지 않으며, 또 언제나 은총의 방편을 수행하는 것도 아님을 유의하자. 경주의 숭산이 항상 빠른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며, 전투가 항상 강한 자에게 승리를 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잘 교육받은 자녀는 잘 행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가 그 자신의 것이며, 그의 성령이 자유스런 행위자라는 것과 비록 우리가 우리 자녀에게 좋은 교육을 실시해야 하지만 그는 반드시 그것을 축복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로 알게 할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그 어떤 것에서보다 원죄의 힘과 특수 은총의 필요성이 나타난다.

(2) 여기서 우리는 이 악인이 그가 선한 아비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범죄 때문에 영원히 멸망할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게 된다. 그는 그가 선조의 경건 덕분에 세상에서 잠시동안 번성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것을 회개치 않았으니 "살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안에서 행복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정녕 죽을지라." 그는 영원히 불행하게 되리라.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그것은 그의 탓이니라. 그는 자기 자신의 파멸자임을 시인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선한 아버지와 관계되어 있다는 것이 그를 유리하게 해 주기는 커녕 오히려 그의 죄와 그의 죄책을 더욱 악화시켜 주리라. 그것은 그의 죄를 더 흉악하게 만든다. 아니, 그것은 그를 진정 다 악하고 더 방탕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그의 불행을 이후로는 더 참을 수 없도록 만들 것이다.

2. 의로운 사람은 비록 그가 악한 아비의 아들일지라도 정녕 행복하리라. 비록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어도, 만일 자녀가 그 포도와 관계하지 않으면, 그들은 결코 그 때문에 화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1) 불경건한 아비의 아들도 경건해질 수 있다고 가정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 찬양을 돌릴 것은, 종종 실제로 그러하다는 점이다). 그는 아비의 잘못이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가를 알므로, 현명하게도 "두려워하여" 그 아비의 발자취를 따르지 않을 수 있다(14절). 통상적으로는, 아이들은 어버이의 기질을 닮고, 그들의 모범을 모방한다. 그러나 여기서 보면 아들은, "그 아비가 행한죄를 보고," 흔히 그렇듯이 그와 마참가지로 행하는 대신에, 그처럼 행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사람들은" 진실로 "가시떨기에서 포도나무를 모으지" 않으나, 하나님께서는 가끔 그렇게 하신다. 돌감람나무로부터 가지를 취하여 참감람나무에 접붙이신다. 악한 아하스는 착한 히스기야를 낳았으니, 그는 "그 아비의 행한 모든 죄를 보고" 그가 함처럼 그의 아비의 수치를 말하거나 그것을 악화시키지 않고 그것을 꺼려하고 부끄러워하여, 그것이 그 자신의 아비의 비방이며 파멸이었으므로 죄의 화를 생각했다. "그가 두려워하며 그대로 행하지 아니한지라." 그는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그의 아비에게 악한 영향을 미치며, 그것이 하나님과 모든 선인들에게 얼마나 죄악스러우며, 그가 그것에 의해 얼마나 큰 상처와 불명예를 얻게 되며, 그가 가족에게 어떤 재난을 초래하게 되었는가를 알았다. 그래서 그는 "그대로 행하지 아니한다." 만일 우리가 적절히 악인의 "길을 살피기만" 한다면, 우리 모두는 그들과 사귀거나 그들의 뒤를 쫓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특수한 사례들이 의로운 사람에게 주어졌던 인품에서와 거의 같은 말로써 열거되어 있다(6절 이하). 이것은 어떻게 선한 사람들이 "같은 영으로," 같은 걸음으로 걷는 가를 보여 주려 함이다. 여기 이 의로운 사람은, 그가 그의 아비의 죄를 조심스럽게 피하려 하면서, 그의 부의 미덕을 조심스럽게 닮으려 했다. 우리도 돌이켜 보면, 우리에게 권고될 만한 실례 뿐만 아니라, 우리가 모방해야 할 모범도 발견하게 되리라. 이 의로운 사람도 바리새인처럼 "나는 간음하지 않는 자요, 착취하지 않는 자요," 학대자, 고리대금업자, 우상 숭배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뿐만 아니라, 그는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혔다." 그는 "손을 금하여 가난한 자를 압제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아버지가 가난한 종, 소작인, 이웃에게 가한 압박을 발견했을 경우, 그들의 짐을 가볍게 해 주었다. 그는 "내 아버지가 하신 것을 내가 준수할 것이며, 만일 그것이 잘못이라면 그것은 그의 잘못이었지 내 잘못이 아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 마치 아비가 부과했던 세금을 비난했던 르호보암처럼 하지 않았다. 그는 "손을 금하여 가난한 자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그들로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다시 보복하게 해 준다(15-17절). 이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며 그 율례를 행하였으니," 그의 의무를 한 번 다했을 뿐더러, 계속 순종의 길로 행하였다.



(2) 은혜없는 아비만이 그의 죄악 중에 죽을 것이며, 은혜를 입은 아들은 아비로 인한 화를 결코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에 관하여 말하면(18절), 그가 잔인한 압제자였고 "해를 입혔으므로," 아니 비록 그가 부와 힘을 가졌으나 그것을 가지고 그의 백성에게 선을 행하지 않았으므로, 비록 그가 높지만, "그조차 그 죄악으로 인하여 죽을 것이며," 영원히 파멸할 것이다. 그러나 정직을 지킨 자는 "정녕 살 것이며," 안락과 행복이 있을 것이며, "그 아비의 죄악으로 인하여 죽지 아니하리라." 아마 그의 아비의 악함은 그의 재산을 줄였고, 그의 이익을 약화시켰을 것이나, 그가 하나님께 용납되는 것과 그의 영원한 복지에는 전혀 침해가 되지 않으리라.

Ⅱ. 하나님은 이제 그 같은 속담이 하나님을 우롱한 것이 아니냐고 질문한다. "이처럼 사태가 명백한 데, 너희는 이르기를 아들이 어찌 아비의 죄를 담당치 않겠느뇨 하는도다. 아니다. 그는 그렇지 않다. 그는 만일 그 자신이 법과 의를 행할 것이라면, 그렇지 않으리라" (19절). 그러나 이 백성이 그들의 아비의 죄를 담당하여 법과 의를 행치 않았고, 따라서 마땅히 그들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을 받고, 비록 그들이 그들 아비가 매우 불친절하게도 그들에게 남겨 준 나쁜 전례를 불평할 충분한 이유가 있지만,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정을 전혀 불의의 것으로 불평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우리 열조는 범죄하여 죽었고, 우리는 그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애 5:7).

악한 가족에게 저주가 수반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수반된 저주가 회개와 개변에 의해 소멸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회개치 않는 사람과 돌이키지 않는 사람이 멸망하는 것은 자기들 탓이다. 그러므로 확정된 심판의 법칙이 반복된다(20절). "범죄하는 영혼은 죽을지라." 하나님께서는 지상의 재판관에게 부여하신(신 24:16) 사항을 친히 수행하시리라. "아들은 죽지 않을 것이니," 만일 그가 그 아비의 발자취를 밟지 않는다면 "그 아비의 죄악으로 인하여"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아비가 죄악을 방지하는 그의 의무를 성실히 행하려 하면, "그 아들은 죄악으로 인하여" 죽지 않으리라.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계시되는 그 날에" (지금은 구름에 가리워져 있으나), "의인의 의도" 온 세상 앞에서 "자기에게로 돌아가는" 듯하리니, 영원한 안락과 명예, 또 예복과 면류관으로써 그에게 임하리라. 그런데 "악인이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원한 혼란, 사슬과 짐으로써 그에게 임하며, 그를 바닥없는 웅덩이로 가라앉히는 산으로써 임하리라.

 

18:11 없음.

 

18:12 없음.

 

18:13 없음.

 

18:14 없음.

 

18:15 없음.

 

18:16 없음.

 

18:17 없음.

 

18:18 없음.

 

18:19 없음.

 

18:20 없음.

 

18:21

회개에의 권고(에스겔 18:21-29)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실 때 지키실 또 다른 심판의 법칙을 보게 된다. 이로써 그의 다스리심의 공평하심이 더 진작된다. 이전 것은 하나님께서 집안이나 후손에게서 일어난 변화에 따라, 좋게 혹은 나쁘게, 보응하시거나 벌하시리라는 것을보여 주었다. 여기서는 선하든 악하든 간에 그 사람 자체 안에서 일어난 변화에 따라 보상이나 벌을 하시리라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동안 훈련을 받는다. 시련의 시간은 이 생이 다하도록 계속되며, 그 결과에 따라서 시련의 시간은 우리에게 영원히 있게 될 것이다. 이제 여기서 다음을 살펴보자.

Ⅰ. 공정히 진술된 이 사례를 보자. 이것은 이전에도 많이 언급되었는데(3:18 이하), 여기서 다시 한 번 언급된다(21-24, 26). 그것이 중대한 문제요, 생사의 문제요, 영원한 생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1. 악한자는 그 악에서 돌아서라는 정당한 요청이 있다. "만일 악인이 돌이키면, 정녕 살으리라" (21, 27절)는 확신이 다시금 나와 있다.

(1) 참된 개심자에게는 무엇이 요구되는가? 이 사면의 행위를 받을 자격을 어떻게 구비할 수 있을까?

[1] 회심으로 향한 첫발은 헤아림이다. "그가 스스로 헤아리고, 돌이켰으므로" 라고 했다(28절). 죄인들이 악한길로 다니는 이유는 그들이 "그로 인해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을 헤아리지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탕자라도 한 번 "스스로 돌이켜" 본다면, 앉아서 조금이라도 그의 처지가 얼마나 딱하며, 또 얼마나 쉽게 개선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그는 곧 "아버지에게 돌아갈 것이다" (눅 15:17). 또 음녀는 "그때의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다" 고 생각이 들면, "본 남편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호 2:7).

[2] 이 같은 헤아림은, 반드시 죄에 대한 혐오감을 낳는다. 그가 "자기의 행한 악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마음의 성향의 변화를 뜻한다. 그는 "그의 죄와 그의 죄악" 에서 돌아서야 하는데, 이것은 생의 전환을 뜻한다. 그는 그의 모든 악한 길을 끊고, 그가 범죄했던 곳에서 더 이상 그리하지 않을 결심을 해야 한다. 이것은 죄에 대한 증오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가 더 이상 우상과 무슨 상관을 하리요?"

[3] 이 죄에 대한 혐오는 보편적이어야 한다. 그는 그의 "모든" 죄와 "모든" 범죄에서 돌아서야 한다. 데리라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이나 림몬당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은 남김없이 버려야 한다. 죄를 진실로 미워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죄에서 돌아선 것이 아니다. 또 모든 죄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죄는 죄로써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

[4] 이것은 하나님과 의무에로의 회심(전향)을 수반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율례를 지켜야" 하며(왜냐하면 순종은 만일 신실한 것이라면,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법과 의를 행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부합될 것을 삶의 법칙으로 삼아야 하며 육체의 뜻과 세상의 길을 취해서는 안 된다.

(2) 이처럼 죄를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선 자들에게 무엇이 약속되는가?

[1] 그들은 "영혼을 보전하리라" (27절). 그들은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다" (21, 28). "범죄한 영혼은 죽으리라" 고 했으나, 범죄한 자들이라도 절망하지 말고, 죄를 돌이켜 때맞게 회개할 것 같으면, 그 예고된 죽음은 금지될 수도 있음을 깨닫자.

다윗도 "내가 범죄하였다" 고 하며 죄를 뉘우치고 시인했을 때, 곧장 죄사함을 확신하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삼하 12:13), 당신이 영원히 죽이 않으리라." 그는 "정녕 살으리라." 그는 영혼의 생명인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할 것이며, 영혼에 대해서는 "죽음의 사자" 와 같은 "그의 진노" 를 받지 않을 것이다.



[2] 그들이 회개하여 사함받은 죄들은 심판 때에 그들을 대적하여 고소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이 그 죄 때문에 많은 책망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 범죄한 것이" 비록 많고, 흉악하고, 하나님을 격노시키며 크게 그를 욕되게 했을지라도,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려니와" (22절). 그를 대적하는 말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 죄는 그를 멸망시키는 원인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저 큰 날(심판날)에 그 죄들이 그를 슬프거나 부끄럽게 하려고 그를 대적하여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그 죄는 가리워질 것이며, 아무도 찾거나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용서의 긍휼의 충만함을 암시해 준다. 죄가 사해질 때는, 그것이 "말살되어 더 이상 기억되지 않는다."



[3] "그들의 행한 의로 인하여(안에서) 살리라." 마치 그들의 의가 그들에게 용서와 복락을 가져 주고 죄의 속량 조건이 되는 것인 양 그들의 의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의로 인하여(안에서)" 이다. 저들의 의는 그들의 중보자가 그를 위해 값주고 산 모든 축복을 그들의 것이 되게 해 주며, 또 그 자체가 그 축복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서 저들은 살 것이다.

(3) 회개하여 돌이킨 죄인에게 이 약속에 따라, 용서와 생명에 대해 희망을 가지라고 격려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는 장래의 순종이 결코 그의 과거의 불순종에 대한 가치 있는 보상이 될 수는 없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품성, 속성, 그리고 즐거운 뜻이 친히 말씀하신 바대로(23절) 긍휼을 베푸시고 죄를 사해 주실 것임을 알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었다.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아니다. 결코 아니다. 너는 그처럼 생각할 이유를 조금도 가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벌하실 결심을 하신 것은 사실이다. 그의 공의가 그들의 벌을 요청하며, 따라서 참회치 않는 죄인들은 영원히 그의 진노와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그의 포고의 뜻이요, 그의 단호한 뜻이지만, 그의 본래의 뜻, 즉 그의 기뻐하시는 뜻은 아니다. 비록 그의 주권의 정의가 죄인은 죽을 것을 요하지만, 그의 본성의 선하심은 그것을 반대한다. "어떻게 내가 너를 버리겠느냐. 에브라임아?" 그것은 여기서 비교적으로 나와 있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파멸을 기뻐하지 않으니, 오히려 그들이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는 그의 공의가 그들의 저주를 통해서 영화롭게 되는 것 보다는 그의 긍휼이 그들의 구원을 통해 영화롭게 되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

2. 의를 떠나지 말라는 정당한 경고가 의인들에게 내린다(24-26절). 여기서 살펴 볼 것이 있다.

(1) 배교자의 성격은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남" 이다. 그는 끝까지 의인으로 있지 않고(사도의 말에 의해 나타나듯이,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다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느니라," 요일 2:19), 단지 의인으로 통했을 뿐이다. 그는 교단에 속했고, 남들도 그를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고백을 차버리고, 처음 사랑을 떠나, 하나님의 진리와 길을 부인하고 저버린다. 그리하여 의를 혐오하는자가 되어 "그 의에서 떠나," 그가 항상 가졌던 것, 즉 의에 대한 은밀한 증오를 드러낸다. 또, "그 의로부터 돌이켜," 그는 "범죄하고," 이완되고, 타락하며 육욕에 빠지고, 불의해지고 부절제하게 된다. 요컨대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한다." 더러운 영이 마음을 다시 점령하게 되면, 그는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한다" (눅 11:26).

(2) 배교자의 운명을 보자. 그가 한 때 "의로운 사람" 이었다고 "살겠느냐?" 그렇지 않다. factun non dicitur fuod non perseverat- 즉 남아 있지 않는 것은 했다고 하지 않는다. "그의 허물" 과 범죄(이것은 그의 파멸에 대한 충분한 이유이다) 때문에, "그 지은 죄" 로 인하여, "죽으리니," 영원히 죽으리라(26절). "마음이 패역한 자는 자기 행위를 만족하리라" (잠 14:14). 그러나 이전의 그의 고백과 행실이 그를 조금이라도 세워 주지 않을까? 적어도 그의 벌을 완화시켜 주는 도움을 줄 수 없을까? 그럴 수 없다. "그 행한 의로운 일 모두" 는 비록 사람에 의해 그처럼 박수를 받았으나, 그에게 면목이나 위로가 될 수 있도록 "기억되지는 아니하리라." 참회자의 악이 잊혀지듯이, 배교자의 의는 잊혀진다. 율법에 보면, 나실인이 더럽혀지면, 그가 지나간 날 동안 잘지킨 구별의 날도 모두를 상실하듯이(민 6:2),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끝마친" 자들은 그들의 과거의 봉사와 수고가 모두 "헛되게" 된다(갈 3:3, 4). 만일 우리가 보존하지 않는다면 "일한 것을 잃는다" (요이 8).

Ⅱ. 비록 매우 부패했으나, 이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속의 양심에 호소를 하고 있다. 그는 죄인들이 그들의 입으로 한 말로 심판을 받듯이, 하나님도 그들의 말로써 시인될 것이기 때문이다.

1.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한 비난은 참람된 것이다(25, 29절). "이스라엘 족 속" 은 무엄하게도 "주(主)의 길이 공평치 않다" 고 하니, 이보다 더 불경하고 불합리한 처사는 없다.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않겠느냐?" 그의 뜻이 선악과 시비의 영원한 법칙이신, 그의 길이 불공평할 수 있느냐? "온 땅의 심판자가 의를 행치 않겠느냐?" 틀림없이 그렇게 행하시리라. 그는 달리 행할 수가 없다.

2. 하나님께서 그들을 변론하심은 매우 은혜롭고 겸비하신 일이다. 이 참람한 자들조차 하나님께서는 정죄하기 보다는 죄를 깨닫게 하고 구원하시라고 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제 곧 그의 의를 비난한 자들을 벌하시사 영원한 기념비로 삼아, 그의 의의 영예를 나타내시리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이미 어떻게 큰 악을 숨쉬었던 저들을 또 다른 숨을 쉬도록 놔두어야만 하는가? 이미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고 말했던 저 혀에게 지옥이 아닌 어떤 곳에서 다시 말할 기회를 주어야 하는가? 그렇다. 그 이유는 지금은 하나님의 인내의 날이요, 그가 그들과 변론하는 것을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그들로 자백할 것을 요구하신다. 다음은 너무나 명백하여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1) 그의 길이 공평성. "내 길이 공평치 아니하냐?" 틀림없이 그 길은 공평하다. 그는 의롭지 않은 것을 사람에게 결코 과하지 않는다. 죄인에 대한 현재적 징벌, 그의 친 백성의 환난, 그리고 회개치 않는 자의 영원한 저주에 있어서 "주의 길은 공평하다."

(2) 그들의 길의 죄악성. "너희 길이 공평치 않은 것이 아니냐? 그들이 그러함과 네가 당한 환난은 스스로 네 자신의 머리 위에 초래한 것임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너에게 화를 내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네가 스스로를 망쳤도다." "인간의 어리석음이 그의 길을 망치며," 공평치 않게 하며, 그리고 "그의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마치 그의 길이 불공평하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잠 19:3). 하나님과 행하는 우리의 모든 변론, 그리고 우리에게 대한 그의 모든 논쟁에 있어서, 그의 길은 공평하나 우리의 길은 불공평하며, 그는 바르나 우리는 다르다는 사실이 발견될 것이다.

 

18:22 없음.

 

18:23 없음.

 

18:24 없음.

 

18:25 없음.

 

18:26 없음.

 

18:27 없음.

 

18:28 없음.

 

18:29 없음.

 

18:30

회개하라(에스겔 18:30-32)

여기서는 이 문제 전체의 결론에 해석을 볼 수 있다. 건전한 이성의 법정에서 공정한 재판 이후에, 판결은 하나님 편으로 기울어진다. "그의 길이 공평하다" 는 것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그 다음에 주어질 것은 심판(재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심판은 저주의 심판 즉 "너 주저받은 자여, 영원한 불로 들어가라" 는 심판과 다름없고 정죄일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보라, 긍휼의 기적을 ! 은혜와 신적인 인내의 날이 아직도 계속되는도다. 그리고 그에 따라서, 비록 하나님께서 마침내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국문할 것이나, 그는 은혜롭게 기다리며, 모두를 회개로의 부름과 회개에 대한 사유의 약속으로 끝내신다.

Ⅰ. 여기 우리가 부름받는 네 가지 필요한 의무들이 있다. 그것은 모두 다 동일하게 중요한 것들이다.

1.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며 우리의 길(행실)을 변화시켜야 한다. 잘못 행한 것을 후회하고, 그것을 부끄러워해야 하며, 가능한 한 그것을 다시 원상태로 돌려야 한다.

2. 우리는 "모든 죄에서 떠나야 한다" (30, 32절). "스스로 돌이켜" 방향 전환을 해야 한다. 죄에서 돌아서라. 아니, 네가 증오하는 원수처럼 그것에 대하여 등을 돌리라. 사랑하는 친구에게처럼 하나님께로 돌아서라.

3. "범한 모든 죄악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다시는 결코 돌이키지 않을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포기하며, 죄에게 이혼장을 주고, 우리가 이제껏 죄와 맺었던 모든 동맹을 파기하고, 요나에게 수부들이 행했듯이(왜냐하면 그가 폭풍을 일으켰으므로), 죄를 배 밖으로 던져 버리며, 영혼 밖으로 버리고, 죄인으로 못박아야 한다.

4.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해야 한다. 이것은 약속의 주제였다(11:19). 여기서 그것은 훈계의 주제가 되었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도 그의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는데 아낌이 없을 것이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이 이 교훈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을 과하지 않으신다. 그는 명령하시기를, 우리의 능력이 미치는 것을 행하며, 미치지 않는 것은 기도로 구하라고 하신다."

Ⅱ이 회개에로의 부름을 강화하기 위해 네 가지 좋은 논증이 나와 있다.

1. 우리의 죄가 나아가려고 하는 패망을 막는 유일한 길이요. 확실한 길은 회개이다. "그리한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 그 뜻은, 회개하지 않으면, 죄악은 지금과 영원에 있어서 우리를 패망케 할 것이지만, 회개하면, 우리는 안전하며, 불에서 건져내는 나무처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2. 회개치 않는다면 확실히 멸망하여, 우리의 피가 우리 자신의 머리 위에 임할 것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생명과 구원보다 죽음과 저주를 택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죄인들이 죽는 이유는 그들이 "죽고자 하는" 때문이다. 그들은 죄로 이르는 길을 내려가려 하며, 생명이 주어진 길로 올라오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죄인들, 특히 이스라엘 족속의 죄인들은 아주 멍청스럽고, 아주 이상하게 행동한다.

3.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패망을 기뻐하시지 않으시고, 우리의 복락을 바라신다(32절). "나는 죽는 자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니라." 이것은, 그가 회개하는 자의 회복을 기뻐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회개하라는 격려와 약속이기도 하다.

4. 회개하면 우리는 영원히 산다.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우리에게 "회개하라" 고 말하시는 분은, 회개로 말미암아 "살라" 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그는 우리에게 "살라" 고 말하신다. 그러므로 생명과 죽음이 모두 우리 앞에 놓여 있다.

 

18:31 없음.

 

18:32 없음.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48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01장
47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02장
46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03장
45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04장
44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05장
43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06장
42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07장
41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08장
40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09장
39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10장
38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11장
37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12장
36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13장
35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14장
34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15장
33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16장
32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17장
»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18장
30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19장
29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20장
28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21장
27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22장
26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23장
25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24장
24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25장
23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26장
22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27장
21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28장
20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29장
19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30장
18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31장
17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32장
16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33장
15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34장
14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35장
13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36장
12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37장
11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38장
10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39장
9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40장
8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41장
7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42장
6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43장
5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44장
4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45장
3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46장
2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47장
1 에스겔 메튜 헨리 주석, 에스겔 48장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

All the Bibles, Commentaries and Dictionaries here have their own rights.
All rights are reserved for them, not for us. Thanks! Praise our great God, Christ Jesus!

HANGL Lingua Franca 한글 링구아 프랑카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