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망을 위촉받는 선지자(에스겔 2:1-5)
여기에서 에스겔에게 주어진 칭호는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말씀하실 때 그를 "인자" (1,3절), "아담의 아들, 세상의 아들" 이라 부르신다. 다니엘도 한때 그렇게 불리어졌으나 (단 8:17), 그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이런 호칭은 다른 예언자들에게는 붙여지지 않았고, 오직 에스겔에게만 사용되었다. 우리는 그 칭호를 다음과 같이 취급할 수 있다.
1. 그것은 비천하고 품위를 감소시키는 명칭이다. 에스겔이 풍성한 계시로 자고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가 여전히 인자이며 비천하고 연약하고 죽어야 할 피조물이라는 것을 유념시킨다. 에스겔에게 알려진 다른 모든 것 중에서, 그가 "인자" 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가장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자기를 밝히 나타내신 것은 자기를 여간 낮추신 것이 아니었다. 선지자는 이 점을 알아야 했다. 이제 에스겔은 생물들 곧 천사들 가운데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이 죽어가고 있는 생물 곧 인간이란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만 했다. 이와 같이 방문받고 존귀하게 된 인간 혹은 인자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비록 그의 보좌 주위에 즉각 그의 심부름을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거룩한 천사들을 화려한 수행원으로 거느리고 계신다 할지라도, 그들을 묵과하고 "인자" 인 에스겔을 세워 "이스라엘의 집" 에 대한 하나님의 사자로 삼으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보배를 "질그릇 안에 가지고 있으며" (고후 4:7) 하나님의 메시지가 우리들과 같은 인간을 통해 우리에게 보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이 주는 공포(terror)는 "우리를 두렵게 하지도 않으며, 그들의 손은 우리를 무겁게 누르지도 않는다" (시 32:4), 에스겔은 제사장이었다. 그러나 제사장직은 가치가 하락되었고 그 명예는 티끌에 묻혔다. 그러므로 스스로 낮추며 인자들 즉 보통의 갑남을녀처럼 낮게 처신하는 것은 에스겔과 그의 모든 명령에 어울렸다. 이제 에스겔은 예언자로서, 하나님의 사자(ambassabor)로서, 모든 왕국들 위에 있는 지배자로서 고용되었다(렘 1:10). 또한 에스겔은 매우 명예스런 위치(직위)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에스겔은 그 자신이 "인자" 라는 것과 그가 행하는 모든 선은 그 자신의 힘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 아니고(왜냐하면 그는 인자였기 때문에), 모든 영광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만 했다.2. "인자" 라는 칭호는 명예스러우며 존귀한 명칭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구약 성서에 사용된 메시야의 칭호의 하나이기 때문이다(단 7:13, "나는 인자 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보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자신의 칭호를 차용하셨다.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접근했고 인간 사이에서 매우 큰 권위에 접근했으므로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마치 다윗 왕이 "주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혹은 그리스도로 불리워졌던 것같이, 예언자 에스겔도 "인자" 로서 불리워졌다.
Ⅰ. 에스겔은 여기서 세움을 입고 일어서게 되는데 이는 그가 사명을 받기 위해서이다(1,2절).
1. 에스겔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일으켜 세워졌다. "인자야, 일어서라." 그의 엎드린 모습은 큰 존경심의 태도였다. 그러나 그의 일어선 모습은 그의 업무를 위해서는 매우 적합하며 준비된 자세였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경배심은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행동에 방해가 되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 행동을 촉진시키고 자극해야 한다. 에스겔은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두려움과 경외감 속에서 "엎드렸" 으나 재빠르게 다시 일으켜 세움을 입는다. 왜냐하면 스스로 낮추는 자들은 "높임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종들이 실의에 빠지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그들을 비천하게 했던 것과 같이 다시금 그들을 일으켜 세우실 것이다. 종노릇하게 하신 바로 그 영이 양자로 세우는 영이 되실 것이다.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즉각 행하려고 일어설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리라는 것도 기대해야 한다.2. 에스겔은 하나님의 명령에 동반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일으킴을 받는다(2절).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일어서라" 고 명령했다. 그러나 에스겔은 그 자신의 힘으로는 자신을 일으킬 수 없었고, 이 환상을 바라볼 만한 용기도 가지지 못했기에, "그 신이 그에게 임했으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셔서 우리 안에 기꺼이 역사하신다. 즉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을 우리 안에서 기꺼이 이루시며 일어나라고 명한 자들을 손수 세우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분기시켜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을 주실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할 때에야 "우리들 안에서 역사하실" 것이기 때문이다(빌 2:12). 에스겔은,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말씀하실 때, 신이 그에게 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의 영(신)을 말씀으로써 운반하며, 그 말씀은 영(신)에 의하여 유효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의 신(spirt)은 예언자를 발로 일어서게 하는 실의에서부터 "일으켜 세우셨다." 왜냐하면 "그는 위로자" (별칭 :보혜사)이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경우에 있어서, 다니엘도 하나님의 접촉으로 강하게 되었고(단 10:18), 요한도 그리스도의 오른손으로 일으킴을 받았다(계 1:17). 그 신은 그를 일으켜 세우고 그로 하여금 명령받은 대로 기꺼이 행하게 했다.
이 때 그는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분의 음성을 들었다. 앞에서도 그는 이 음성을 들었다(1:28). 그러나 지금 그가 들은 음성은 이전보다 더 명백하고 분명했으며, 그를 그 말씀에 복종시켰다. 그신은 우리의 의지를 의무에로 기울게 함으로써 우리를 일으켜 세우며 이로써 그 의무에대한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총명을 주신다.
Ⅱ. 에스겔은 여기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대한 메시지를 가지고 가라는 사명을 받는다(3절).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노라." 하나님은 오랫동안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자기 종 선지자들을 보내오셨다. 제 때에 선지자를 일으켜 세워 그들에게 보내셨지만 거의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학대했기 때문에 이제 포로가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 중에서 에스겔을 예언자로 세워 하나님의 사자들이 학대를 받는 그곳으로 보냈으며, 현재 속박의 고통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훈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지 시험하고자 하셨다. 생의 부지물은 은혜의 수단과 마찬가지로 백 번도 더 박탈된 뒤에도 계속 우리에게 온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반은 이 사자를 그들에게 보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에스겔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들의 의무에 복종하게 하기 위하여 보내어졌으며, 이스라엘 자손들을 여호와 하나님께 돌이키게 하기 위하여 보내어졌다. 이스라엘 백성은 "패역한 백성" (3절), "패역한 족속" (5절)이 되었기 때문에, 에스겔은 하나님의 심부름을 수행해야 할 근거가 거기에 있음을 알아야 했다.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 이라 불리어진다. 그들은 그들의 경건한 조상들의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비참하게 변절했기 때문에, 보통 이방인들에게 사용했던 칭호인 고임(Goim, 백성)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이스라엘 자손들" 은 "구스인들의 자손들" 처럼 되었다(암 9:7). 왜냐하면 그들은 "패역" 했기 때문이다. 본국에 있는 반역자들은 타국에 있는 적들보다 자기들의 왕을 더 화나게 한다. 이스라엘 인들의 우상 숭배는 어떤 것보다 더 큰 죄였으며, 그들을 "패역한 백성" 들이라 일컫게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의로운 주권자를 반대하여 다른 통치자를 세웠고, 횡령자에게 충성을 행하고, 공물을 바쳤기 때문이다. 이것은 최고의 반역 행위였다.(1) 이스라엘 자손들은 줄곧 패역한 세대였고 그들의 패역을 고수했다. "그들과 그들의 열조들은 내게 범죄했다." 옛날과 조상들을 자기 편에 두고 있는 자들이라 해서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범죄와 타락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들의 열조가 걸어갔던 악한 길로 걸어간다는 것은 변명이 되긴커녕 오히려 우리 죄를 참으로 가중시키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보다 먼저 갔던 사람들의 죄악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패역을 계속해 왔으며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패역 때문에 하나님의 견책 아래 있을 때 그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오늘날까지" 여러 방법과 수단이 이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패역한 행동을 계속했다.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 즉 아하스 같은 사람은 비록 그들이 "고통가운데 있을" 지라도 "더욱 더 죄악을 범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일어난 변화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으며, 여전히 변화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2)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제 패역한 중에서 완악해졌다. 그들은 철면피한 얼굴을 가진 "뻔뻔스런 자손들" 이 되었으며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마음이 굳어졌고, 제멋대로 하려고 했으며, 고집이 세어서 겸손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죄악에 대해서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염치심이나 의무감의 영향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특징이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 즉 지도자들의 특징이었으리라고 생각하고 싶다.
[1]하나님은 그들에 대한 이런 점을 아셨으며, 또한 그들이 얼마나 완고하며, 교정이 불가능한지를 알았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겉치레와 신앙 고백이 어떠하든지 간에, 각자의 참 인품을 완전하게 아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2]하나님이 예언자에게 이런 사실을 말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루는 데 보다 좋은 방법과 구실을 알도록 하시기 위해서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하나님의 책망을 "거치른 행동" 이라 부를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날카롭게 견책해야 했으며, 신랄하게 다루어야만 했다. 하나님은 에스겔의 설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감동을 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놀라거나 거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것을 말해 주신다.
2. 하나님은 이 사지를 보내심으로써 통치하신다.
(1) 하나님은 자기가 보내시는 자에게 명령하실 권위가 있다.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4절)." 선지자와 사역자를 보내고, 그들에게 사명을 부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특권이란 데 주목하자. 성 바울은 그에게 직분을 맡긴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했다(딤전 1:12).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았듯이 사역자들도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입는다. 그는 헤아림이 없이 성령을 받으셨기에 "성령을 받으라" 고 말씀하시면서 성령을 사람들에게 주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뻔뻔" 하고 "패역" 했다. 그럼에도 "나는 너를 그들에게 보낸다." 그리스도는 은혜의 수단을 많은 자들에게 주신다. 그는 그들이 은혜의 수단을 선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아시면서도 주신다. 또 그는 지혜를 얻게 하기 위해 미련한 자의 손에 귀한 것을 주셨지만 그들은 마음에 두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적대감을 가지기까지 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은혜를 확대시키고 그 자신의 심판을 정당화시키실 것이어서 그들을 변명할 수 없게 하고 그들의 정죄를 더 참을 수 없게 하실 것이다.
(2) 하나님은 자기가 사자로 보내는 자들에게 명령할 권세를 가지신다.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에스겔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했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해지고,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서 시행되어져야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서 전해져야 한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교훈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전했다. "진실로, 진실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또한 예언자들은 종으로서 우리의 "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하다" 고 말했다. 예언자들의 글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또 그렇게 존중되어야 한다는데 우리 각자는 주목해야 한다.
(3) 하나님은 자기 사자를 보내는 사람들(이스라엘인)에게 책임을 물을 권세를 가진다.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이 그 말씀을 경청하든지 등을 돌리든지, "그들은, 그들 가운데 선지자가 있은 줄을 알지니라." 또한 그들은 경험에 의해서 그런 사실을 알 것이다.
[1]만약에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복종하면, 그 말씀이 하나님의 사자와 그의 권능에 의해 전달된 것이라는 사실을 즐거운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이다. 그 말씀은 그들에게 선을 행했다. 그리고 말씀을 그들에게 전한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그 사명을 받았으며 이를 시행하기 위해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 했다. 이와 같이 성 바울의 설교로 회심한 사람들은 "그의 사도됨을 인친 것" 이라고 일컬어진다(고전 9:2). 사람들의 마음이 말씀으로 뜨겁게 되고 그들의 의지가 그 말씀에 복종하게 될 때 그들은 스스로 그것이 "인간의 말" 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 이라는 사실을 알고 증언하게 된다.
[2]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말씀에 귀를 귀울이지 않는다면(마치 그 말씀이 "패역한 족속에게는" 두려움이 되었던 것처럼), 그들은 그들이 멸시했던 자가 참으로 예언자였다는 사실을 양심의 비난이나 예언자를 거절함으로 말미암아 임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의해서 알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경멸한 것이 얼마나 치명적이며 위험한 것인가를 또한 얼마나 큰 낭패인가를 자기들의 슬픈 경험으로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을 위협하던 하나님의 심판이 성취됨에 따라, 그들을 고발한 그 예언자가 하나님이 보낸 자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그 말씀은 열조들에게 임할 것이다" (슥 1:6). 우리는 다음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들을 것인지 거절할 것인지" 를 결정해야 하며, 이곳에 의해서 그들의 운명은 결정될 것이다.
둘째, 우리가 그 말씀에 의하여 교화를 받든지 혹은 받지 않든지 간에,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며 그의 말씀을 존귀하게 하고 영예스러운 것이 되게 할 것이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 말씀이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게 하는 "향기" 가 되든지, 혹은 "죽음에서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향기가 되든지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원래적 방법으로 나타날 것이다.
선지자가 받은 명령(에스겔 2:6-10)
자기 사명을 받았던 선지자는 여기에서 훈령을 받는다. 그것은 명예스런 직책이며, 에스겔은 이 명예스런 지위에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섬김의 직책이다. 여기서 예언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Ⅰ. 대담성의 요구. 에스겔은 자기 일의 수행 과정에서 난관과 반대에 봉착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들 때문에 자기 일에서 밀려나거나 힘없이 하지 않고, 담대한 용기와 결심으로서 행해야 했다. "인자야, 너는 그들을 두려워 말라" (6절). 하나님을 섬길 목적으로 어떤 일을 하려는 사람들은 인간의 얼굴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우리에게 매우 헤어나기 어려운 함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은 전처럼(3, 4절) 이스라엘 백성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선지자에게 말해 주신다. 그들은 "찔레와 가시들" 이며, 그가 어디로 향하든 간에 할퀴고, 찢고, 괴롭힌다.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끊임없이 집적거리며 선지자들을 말의 올무에 빠드리기 위하여 서로 "상론" 한다(마 22:15). 그들은 "찌르는 찔레" 이며 "고통을 주는 가시" 이다.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찔레와 같으며, "가장 정직한 자라도 가시 울타리보다 더 뽀쪽하다" (미 7:4). 가시와 찔레는 죄와 저주의 열매며, 여자의 자손과 뱀의 자손간의 적의 만큼이나 긴 역사를 갖고 있다. 악인들, 특히 하나님의 예언자들과 백성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은 대지를 유해하게 하며, 좋은 씨(seed)를 질식시키며, 하나님의 경작을 방해하며, 하나님의 경작자들을 괴롭히는 찔레와 가시 같은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에 가까이" 있으며, "그들의" 마지막은 불사름이 될 것이다(히 6:8). "기드온이 숙곳 사람들을 가시와 찔레로 가르쳤던 것처럼" (삿 8:16) 하나님은 때때로 자기 백성들의 징벌과 교육을 위해서 이 가시와 찔레들을 사용하신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가장 나쁜 특질은 아니다. 그들은 독이 있으며 해로운 "전갈들" 이다. 전갈의 찌름은 할퀴는 찔레보다 천 배나 더 해로운 것이다. 박해자들은 독사의 자식들이며 뱀의 후손이다. 독사의 독은 그들의 혀 밑에 있다. 그들은 들짐승 중에서 가장 간교하다(창 3:1). 그리고 선지자의 형편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은 그가 이런 전갈들 가운데서 거하게 된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예언자를 괴롭히기 때문에, 예언자는 그 자신의 집에 조용히, 그리고 안전하게 있을 수 없다. 이런 악한 사람들이 그의 악한 이웃이며, 그 악한 이웃들은 에스겔에게 화를 입힐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가지고 있고, 또한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말씀하셨듯이(계 2:13, "나는 네가 하는 일과 네가 사는 곳을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위가 있는 데라"), 예언자에게 이런 사실을 주의시킨다. 에스겔은 환상 가운데서 천사들과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 산에서 내려올 때, 그는 자기가 "전갈 가운데 거주한다" 는 사실을 발견한다.2.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대한 악인들의 행위가 무엇인지 그에게 말해 주며, 또한 그들이 "그들의 용모" 와 "그들의 말" 로 그를 놀라게 하려고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들은 예언자를 괴롭히며 위협할 것이다. 그들은 예언자를 경멸하는 눈초리로 바라볼 것이며, 그를 위압하고 당황하게 하기 위하여 흉악한 얼굴을 할 것이다. 또한 그들은 에스겔을 예언자의 위치에서 끌어 내리거나, 적어도 그들의 거짓을 말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의 심판으로써 그들이 위협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만약에 그들이 이런 방법으로 에스겔을 방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그를 번민하게 만들고 난처하게 하며 그의 마음의 안정을 교란시키려 할 것이다. 이제 그들은 그들 자신의 모든 세력을 빼앗겨서 포로의 신세였으므로 그들의 표정과 "그들의 말" 외에는 예언자를 박해할 만한 방법이 달리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언자를 박해했었다. "보라, 네가 이같이 말하여도 악을 행하여 네 욕심을 이루었느니라" (렘 3:5). 만약 그들이 더 큰 힘(power)을 가졌더라면, 더 많은 화를 입혔을 것이다. 그들은 이제 패역에 대한 벌로 특히 하나님의 선지자를 학대한 죄에 대한 벌로 사로잡힌 중에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악하다. "미련한 자를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잠 27:22).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역사하지 않는 한, 어떤 하나님의 섭리도 그들 자신을 겸손하게 하지 못할 것이며 인간들을 개심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악하다 할지라도, 에스겔은 그들을 놀라지도 않았으며 두려워 하지도 않았다. 또한 에스겔은 그들의 어떤 협박에 의해서도 낙담하지 않았고, 기가 꺽이지지도 않았으며, 그의 일을 중단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에서 자신의 안전에 대해 확신을 가졌으며, 강한 결심과 유쾌한 마음으로 그의 일을 계속했다.
Ⅱ. 하나님은 에스겔이 충실한 사람이 되기를 요구했다(7절).
1. 에스겔은 그를 보낸 그리스도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으면 안된다. "너는 내 말을 그들에게 고할지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위탁받는 것은 선지자의 명예이다. 동시에 그들이 그 말씀에 밀착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다. 사역자는 항상 이런 규칙에 따라서 말해야 한다.2. 에스겔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혼을 구원하는데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에스겔은, 자기가 받은 그대로 그의 메시지를 그들에게 전해야 했다. 에스겔은 그들이 그 말씀에 응하도록 했으며, 말씀을 그들의 기분에 맞추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심히 패역한 자" 라는 것은 사실이며, 그들은 패역 그 자체이다. 그러나, 그들이 기뻐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내 말을 그들에게 고하라." 사람들이 말씀 아래서 불순종하고 말씀을 유익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해서 사역자들이 그들에게 대한 설교를 중지해서는 안 된다. 어떤 선도 행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만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더라도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있게 될 기회를 물리쳐서는 안 된다.
Ⅲ. 에스겔은 하나님의 지시를 준수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1. "그 앞에 펼쳐진" 책의 내용에서 어떤 지시가 나오는지 그일반적 암시가 여기 주어지고 있다(10절).(1) 하나님의 지시(명령)는 매우 광범위했다. 왜냐하면 두루마기 책의 "안팎에 글이 씌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장의 종이에 사면으로 글씨가 씌어진 것과 같았다. 한 면에는 그들의 죄가 들어 있었고 다른 면에는 그들의 죄로 인해서 그들 위에 내려지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타락하고 패역했을 때 그들에게 아주 많은 이야기를 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2) 하나님의 지시는 슬픈 것이었다. 에스겔은 슬픈 심부름으로 보냄을 받았다. 두루마리 책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애가와 곡과 재앙" 이었다. 그의 메시지를 이렇게 표현한 것은 그 메시지에 경청할 자들의 마음 상태를 염두에 둔 때문이다. 그 말씀은 그들을 울게 하며 고통(재앙)과 슬픔으로 절규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화로다. 슬프다" 는 것이 그들의 부르짖음이 될 것이다. 진노의 위협과 죄의 발견, 이 두 가지는 애가의 내용이 될 것이었다.
거룩하고 행복한 백성들이 이 책의 예언에 나타나는 그런 죄와 불행의 상태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 보다 더 한탄스럽고, 더 슬프고, 더 비참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에스겔은 예레미야의 애가를 반영한다. 하나님이 풍부한 자비를 갖고 계신다 해도 회개치 않는 죄인들은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애가와 재앙" 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2. 여기에는 하나님의 지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는 것과 그 메시지를 전하는 것)를 준수하라는 명백한 훈령이 나오고 있다. 에스겔은 이제 그 말씀을 받기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다음과 같은 명령을 받는다.(1) 열심히 그 말씀에 경청하도록 하라는 것.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들어라" (8절). 하나님의 말씀을 남에게 말하는 자들은 그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듣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하며 또 그 목소리에 순종해야만 한다. "너는 패역하지 말아라." 너는 이 사명의 계속을 거절하지도 말며,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을 멈추지도 마라. 너는 네 동포에게 노여움을 입을까봐 달아나지도 말라. 그들은 "패역한 족속" 이며 너는 그들 가운데 살고 있다. 그러나 너는 그들을 좋아하지 말며, 악을 행하는 그들을 따르지도 말라. 만약에 죄악을 질책하는 임무를 가진 하나님의 사자들이 죄를 묵인하고, 죄인들을 기쁘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그들에게 보여 주지 않거나, 그 죄악의 치명적 결과를 알려 주지 않고, 그들의 비위를 거스르거나 그들의 악감을 살까봐 무서워한다면, 그들의 죄악에 동참하며 그들처럼 패역한 자들이 될 것이다. 만약에 사람들이 회개하는 그들의 의무를 행치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자들은 죄를 질책하는 그들의 의무를 행해야 한다. 그들은 성공 여부를 고사하고라도 그 위안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가졌던 즐거움이다(사 50:5,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않았다"). 선량한 사람들이라도 그 제비(운명)가 악한 시기와 악한 장소에 떨어질 때에는 극악한 죄악에 대한 경고를 받을 필요가 있다.
(2) 그 말씀의 은총과 능력을 경험함으로써 선지가 자신의 마음으로 그것을 소화하라는 것.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들을 뿐만 아니라, 너의 입을 열고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을 먹으라. 그것을 먹을 준비를 하며 또 기꺼이 맛있게 이 말씀을 먹으라."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그들의 하늘 아버지를 발견하고 그가 주시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만족히 여긴다. 하나님의 손이 에스겔에게 내미셨던 것은 글이 가득 씌어져 있으며 둥글게 말려 있는 "두루마리 책" 이거나 "두꺼운 책" (종이나 양피지가 두루마리 같이 말려 있는) 이었다. 하나님의 계시는 그리스도의 손으로부터 우리에게 온다. 그리스도는 그것을 예언자들에게 주셨다(계 1:1). 우리는 "두루마리 책" 을 바라볼 때, 그 책을 우리에게 주시는 그 손(hand)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그 두루마리 책을 선지자에게 가져온 분은 "그 책을 그 앞에 펴셨는데" 이것은 그로 하여금 맹목적 신앙으로 그 책을 삼켜버리게 하지 않고, 그 책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한 후에 그 책을 받아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패역하지 말고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을 먹으라" 고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자기 규례와 섭리로 우리에게 할당하시는 것을 받지 않는다면,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과 채찍에 복종하지 않고 화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패역한 자로 간주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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