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환상(에스겔 11:1-13)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알 수 있다.
Ⅰ.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방백들은 크게 방심하고 있다. 에스겔은, 환상 중에 이스라엘 방백들이 그 성읍의 당면한 사건들을 의논하기 위해서 모여 있었던 성전 문으로 옮겨졌다. "주의 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여호와의 전 동문 곧 동향한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그 문에 25인(人)이 있었다." 이 예언자가 성령의 명령에 얼마나 잘 순종했으며, 자기 앞에 전개된 것을 얼마나 잘 관찰했는가를 보라. 여기에 나오는 25명 사람들은 에스겔이 앞에서 보았던 성전 문에서 "동방을 향하여 경배하던" (8:16). 그 25명의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인 것 같다. 성전 문에서 동방을 향하여 경배했던 25명의 사람들은 제사장들이나 레위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전 현관과 제단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오는 25명의 사람들은 소송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집 문에" 앉아 있는 방백들이었다(렘 26:10). 그리고 이들은 예배를 드리는 데 있어서 타락된 행위 때문이 아니라,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 잘못 행했기 때문에 문책을 받았다. 이들 중 두 사람은 이름이 나와 있다. 그것은 이 두 사람이 가장 지도적인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비록 예언자가 몇 해 동안 외지에 있었지만 그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블랴다" 와 "야아사냐" 다. 본문의 야아사냐는 8장 11절의 인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나오는 야아사냐는 "사반" 의 아들이며, 여기에 나오는 "야아사냐" 는 "앗술의 아들" 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예루살렘이 24구(區)로 분할되어 있기에 여기에서 나오는 이 사람들은 그 24구를 관할하는 지배자들이거나 혹은 구청장들이었다고 말한다.
1. 하나님이 이 예언자에게 말해 준 25명의 사람들의 일반적인 특성릉 보자. "이 사람들은 불의를 품고 있는 사람들이다(2절). 이들은 공공의 안전을 도모한다는 구실 아래 백성들의 죄악을 더욱 심화시키며, 예언자들이 경고해 주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백성들에게서 제거한다. 그들은 이 성 중에서 악한 꾀를 베푼다. 예언자들을 제지하고 침묵시키기 위하여, 바벨론 왕에 대해서 반역하기 위해서, 그리고 성읍을 극단의 궁지로 몰고 가기 위해 백성들을 충동한다." 백성들에게 평화를 줄 일이 그 백성이 신임하는 방백들의 눈에 가려져 있다면, 그것은 그 백성들에게 매우 불행한 일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심판과 보상의 날이 와서, 불의(재앙)가 실행되면 - 하나님은 누구의 집 문에 그 재앙을 갖다 놓아야 할지를 아시므로, 사람들은 그 재앙이 올바로 실행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고, 따라서 비록 지위가 높은 현명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었을지라도, 이제는 "그들은 불의를 품었던 자들이다" 라고 말할 것이다.2. 이런 특성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에게 구체적인 문책이 가해진다. 그들은 그들이 회의 석상에서 했던 말 때문에 고발당한다. "전능자의 회중에 서 있는" 자는 그 사실을 인지할 것이다(3절). 그들은 이런 결과에 대해서 말하기를, "예언자들이 지금까지 그렇게 종종 경고했던 바 우리의 성읍의 멸망은 그들이 말했던 것처럼 그렇게 가깝지는 않다" 고 한다. 그들은 마침내는 이루어지고야 말 개혁사업에 대해서 자기들이 그렇게 적의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다. 하나님의 참으심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것은 오랫동안 악용되어 왔다)이 그런 날이 속히 오지는 않으리라는 희망을 갖게 한다. 사탄은 인간들에게 심판이 불확실하고 의심스런 것처럼 생각케 함으로써 설복할 수 없는 곳에서는 그 심판이 멀리 있는 것 같이 생각하도록 설복함으로써, 자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만약에 이 일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심판은 가까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실제로는 "심판이 문 앞에 서 있다."
그들은 멸망이 아직 멀었다면, "집을 건축하자" 라 한다. "하던 일을 계속하자." 왜냐하면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속담 같은 표현으로 보이며, 단순히 이런 것을 의미하리라. 즉 "우리는 끓는 남비 안에 있는 고기처럼 이 성읍 안에서 안전을 얻는다. 이 성의 벽돌은 우리에게 있어서 놋성벽처럼 될 것이며, 고기 가마는 그 밑에 있는 불의 피해를 입지 않듯이 우리는 성읍을 포위한 포위자들로부터 어떤 해도 입지 않을 것이다. 우리를 우리의 성읍에서 끌어내어 포로가 되게 하려는 사람들은, 끓는 남비에서 고기를 꺼내려는 자들 같이, 자기들의 위험을 증가시킬 뿐임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9절에서 답변한 말씀의 내용으로도 보인다. 즉 "내가 너희를 그 성읍 가운데서 끌어낼 것이다(9절). 그런데도 너희는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너희를 끌어낸 그후에는 이 성읍이 너희 가마가 되지 아니하고, 너희는 그 가운데 고기가 아니었다(11절)는 것이 명백해질 것이다."
어쩌면 이 구절은 "속죄 제물의 고기" 를 특별히 언급하는 것 같다. 속죄 제물이 가마에서 끓는 동안에 그 "가마" 로부터 고기를 꺼내는 것은 제사장들 자신들에게도 큰 범죄가 된다(삼상 2:13, 14 참조). 또한 예루살렘이 거룩한 도성이고, 그 성읍 안에 살고 있는 자기들은 선민들이라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간섭 받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가졌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혹자는 이 구절이 처음 환상 가운데서 "끓는 가마" 로 상징된 예루살렘을 보았던 예레미야에 대한 희롱이었다고 생각한다(렘 1:13). 방백들은 희롱과 조소어린 말로 말하기를, "자, 만약에 예루살렘 성읍이 끓는 가마가 된다면, 우리는 그 가마 안에 있는 고기와 같으니, 누가 감히 우리를 간섭하겠는가?" 라고 한다. 이와 같이 그들은 자기들이 그처럼 했기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여호와의 사자들을 조롱했다. 그러나 "너희는 조롱하는 자가 되지말라. 너희의 속박이 심해질까 하노라" (사 28:22). 방백들의 마음은 참으로 완고하여, 그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해서 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은 더욱 방심하게 되었다.
Ⅱ. 방백들을 방심에서 일깨우기 위해서 취해진 방법을 보자.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섭리가 그들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이런 것들을 이해시키고, 활용하도록 돕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경고를 준다(4절). "그러므로 그들을 쳐서 예언하라." 그들을 깨우쳐 주라. "오 인자(人子)야." 이런 죽은 자들과 마른 뼈들에게 "예언하라." 죄인들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하기 위해 사역자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친절은, 그들을 비록 자기들의 재난과 위험과 불행을 보지 않으려 해도, 그런 것들을 그 죄인들에게 알려 주는 일임을 명심하자. 우리가 죄인들에게 가장 배척하는 자로 나타날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그들을 위한 최선의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도전적이며, 죄악으로 완고해졌던 사람들에게 에스겔 예언자가 할 말을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에,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했으며," 권능과 용기를 충만케 해 주면서, "너는 말하라" 고 했다. 죄인들이 스스로에게 아첨하여 그들 자신들의 멸망에로 항하게 될 때, 그때가 바로 그들에게 외쳐야 하는 때이다. 만약에 그들이 그런 행위를 계속한다면 그들은 어떤 평화도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의 사역자들도 때로는 이렇게 수줍어하고 겁이 나서 할말을 잃기 때문에, "가서 말하라. 담대히 말하라" 는 음성을 들어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이 예언자에게 말을 하라고 명령하시는 분은 말할 내용까지도 일러 주신다. 그리고 그분이 "이스라엘 족속" 으로서의 방백들에게 직접 말씀해야 한다(5절).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방백에게만이 아니라 전 국민에게 저들의 소송사건의 진상과 긍지를 알도록 말해야 한다. 그들은 "이스라엘 족속(집안)" 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 관심을 가지고, 친절하게도 그들에게 경고를 주신다. 그들은 이에 대해 그 경고를 들을 의무가 있다. 그러면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전달해야 할 내용은 무엇인가?
1. 하늘의 하나님이 저들 자신이 믿고 있는 어리석은 신뢰를 알고 있음을 저들로 알게 하라(5절). "너희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다 아노라. 이런 일을 결행하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비밀스런 궁리, 나쁜 것인 줄 알면서도 그리로 얼굴을 향하는 그 이유를 내가 아노라."하나님은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것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들어 있는 것까지도, 즉 말한 것뿐 아니라 생각하고 있는 것까지도 모조리 알고 계신다. 어떤 생각이 순식간에 마음에 뛰쳐들었다가 다시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사라졌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아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들 자신보다 더 잘 아신다. "그는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통촉하신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부지런히 경계하여 헛된 것이 틈타지 못하게 해야 한다.
2. 백성들에게 저항하라고 충고한 자들은 갈대아인들의 검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안에서 이미 죽었거나 앞으로 죽어야 할 모든 자들의 살인자임을 알게 하라. "가마 속의 고기" 처럼, "그 안에 남아 있는" 자들은 오직 그렇게 살해된 자들뿐이니라. "너희가 이 성읍에서 많이 살륙하였도다. 법률의 핑계로 인해서 부당하게 재판정의 이슬로 사라진 자들뿐 아니라, 예언자들의 충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집과 현명치 못한 교만으로 너희가 전쟁의 칼에 넘겨준 자들을 너희가 모두 죽였느니라. 때문에 너희 고집샌 자들은 살해된자로 예루살렘 거리를 채웠도다" (6절). 옳지 못하게 또는 고의적으로 전쟁을 일으키거나 수행하는 자들은 스스로 엄청난 살인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그들이 치른 전장에서나 공격에서 죽은 자들은 "저들이 살륙한 시체" 라고 불리워질 것이다. 이러한 시체들만이 이 "가마" 속에 남을 유일한 고기들이다(7절). 그리하여 그 성을 차지할 자들은 거기에 매장된 자들 외에는 아무도 없게 될 것이다. 묘지들의 거처 외에는 주민들의 거처가 예루살렘에는 없으리라. 죽은 자들이 되어서 자유한 자 외에는 그 성 중에 자유한 자가 없게 되리라.
3. 저들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여겨왔지만, 이제는 할 수 없이, 피난으로든 포로로 끌려가서든, 예루살렘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리라는 점을 알게 하라. 너희가 원하든지 말든지 "내가 너희를 그 가운데서 끌어내리라" (7, 9절).그들은 하나님을 격분시켜 그 성읍을 버리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없어지면 자기들의 지략과 힘으로 능히 이 성읍을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들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는 점을 알리실 것이다. 저들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을 자기의 집(성전)에서 쫓아 낸다면, 그는 심판을 통해서 저들을 집에서 쫓아 내실 것이다. 가장 안심하고 있던 자가 가장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이 성읍은 너희가 가마가 되지 아니할 것이며, 너희는 고기가 되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이 생각한대로 그 안에서 잘 지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보금자리에서 죽음을 당하리라. 그 가운데서 너희가 안전하리라 자긍하지만, 거기에 오래 있지 못하리라."
4. 하나님이 그들을 예루살렘 중에서 쫓아내시고 나면,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심판이 다시 그들을 추적할 것이며, 이 심판은 저들이 예루살렘에 붙어 있는 한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 심판임을 저들로 알게 하라. 저들은 자기들이 갈대아인들에게로 나아갈 경우 칼을 무서워했다. 그러므로 "가마" 속에 남아 있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말씀하시길 "내가 칼을 너희에게 임하게 하리라" (8절). 그리고 "너희는 칼에 의해 엎드러질 것이다" (10절)고 하신다.악인들에게는 두려움이 미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하나님의 심판이 작정되고 나면, 놋성벽으로라도 그 심판을 막을 수가 없다.
그들은 이방인들의 손에 넘어갈까봐 겁을 내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타국인의 손에 넣으리라. 너희가 분개하고 있는 자들이므로, 그들의 수중에 빠지기를 싫어하는 그런 자들의 손에게니라" (렘 38:17, 18 참조). 저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에게 심판(벌)을 내리리라" 고 하신다. 또 그들은 생각하기를, 심판이 내린다면 그것은 예루살렘 내에서일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르기를(10, 11절), "이스라엘의 변방에서" 벌 하리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느부갓네살이 가나안의 끝에 있는 하맛의 땅, 리불라에서 유다의 귀족을 모두 살해해 버렸을 때 실현되었다.
아무리 자기들이 살고 있는 땅에 뿌리박은 자들이라도 자기들이 지금 살고 있는 그곳에서 죽게 되리라는 보장을 받을 수는 없음을 기억하자.
5. 이 모든 것은 저들의 죄에 대한 온당한 벌임을 알게 하라. 또 저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의 심판의 계시" 임을 알게 하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임을 알게 되리라" (10, 12절).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려 하지 아니하던 자들은 하나님의 칼에 의해서 여호와는 죄를 증오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될 것이요, 또 그 같은 하나님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일은 거만한 죄인들에게 여간 두려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되리라. "내가 벌을 내리리라." 그러면 "너희는 내가 여호와임을 알리라." 여호와는 "그의 법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을 통해서 알려지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그가 율법을 세우신 자임이 드러난다. 그것은 그가 율법 파괴자들을 처벌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 중에 벌을 내리리라." "너희가 내 법도를 지키지 아니했음이라" (12절).
우리가 항상 그의 율법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의 말씀으로 된 법도를 실행하는 것이, 그의 손이 내리는 심판(심판과 법도는 영어로 같은 단어임 - 역주)이 우리에게 파멸과 당혹을 가져 주지 않도록 사전에 방지하는 유일한 길이다.
어떻든 하나님의 법도(심판)는 이행되리라. 율법은 계율로서든 형벌로서든 지켜지고야 말 것이다. 우리가 그의 계명인 법도를 지킴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다면, 그는 우리에게 경고했던 바대로 자기의 심판을 시행함으로써 우리에게서 스스로 "영광을 취하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가 여호와시오, 만유의 주재이시며, 인간의 조롱을 받지 않으시는 분임을 알게 되리라. 또한 저들이 하나님의 법도를 팽게쳐 버리고 그것을 지키지 않게 되면, 저들은 "저희 사망에 있는 이방인들의 법식대로" 행하고, 저들의 불경하고 야만적인 관습을 따라 예배하게 된다는 사실도 주목하자. 인간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일정한 규칙을 버리면, 끝없이 방황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규례를 준수" 해야 될 정당한 이유가 있으니, 저들이 "이방인들의 가증스런 관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레 18:30).
Ⅲ. 이 같은 각성의 말씀에 곧 뒤이어서 각성을 시키는 섭리가 나와 있다(13절). 여기서는 이런 점들을 살펴 볼 수 있다.
1. 에스겔은 큰 권능으로 예언한다. 아니 차라리 커다란 하나님의 권능이 거기에 수반된다. "이에 내가 예언할 때에, 브나냐의 아들 블라댜가 죽었다." 1절에 의하면, 블랴다는 예루살렘에 모인 25방백 중 우두머리였다. 그리고 이 같은 사건은, 본문에서처럼 에스겔이 기도하고 있을 때(8절) 연노한 자들을 죽이는 살상 사건이 보았던 것처럼, 환상 중에 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 예언은 선포되면 반드시 실현될 일이었으므로, 실제와 다름없이 분명한 일이었다. 블랴다의 죽음은 이 예언의 완전 성취를 알리는 한 전조였다.때로 하나님은 어떤 죄인들을 쳐서 자기의 정의의 기념비로 삼으시사, 다가올 일에 대한 경고를 발하신다. 또 어떤 죄인들은 가장 안전하다고 방심하고 있다가 갑자기 죽음의 함정에 걸려들고 만다. 마치 베드로가 예언했을 때 그의 발 앞에서 꺼꾸러진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자들이다.
2. 에스겔은 지극히 동정어린 마음으로 기도했다. 블랴다의 갑작스런 죽음이 에스겔의 예언을 확증해 주었고, 그에게 영광을 돌려주었지만, 그는 그 문제에 대해서 깊은 염려를 표하며, 마치 블랴다가 자기 친척이나 친구라도 되는 듯이 마음을 쏟고 있다. 간절한 마음으로 "그가 엎드리어,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오오라 ! 주 여호와여 !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다 멸하려 하나이까? 이미 우리가 당한 심판으로 많은 자들이 사라졌나이다. 그런데 칼을 패해 살아남은 자들은 이렇게 하늘의 직접적인 손에 의해서 죽어야 하나이까? 그렇다면 주는 정녕 저들을 멸하는 것이옵니다."사울이 죽었을 때 사무엘이 오랫동안 애곡했듯이, 아마 이것은 에스겔이 이처럼 사악한 방백이라도 그렇게 죽어가는 것을 기뻐하지는 아니했음을 말해 줄 것이다. 다윗도 자기를 핍박하고 미워하던 자들의 병고를 애통했다. 그러므로 우리도 비록 악한 자들일지라도 남들이 이렇듯 갑작스레 죽어가는 것을 보면 동정할 줄 알아야 한다.
자비의 예고(에스겔 11:14-21)
이 예언은 "모든 산들과 작은 산들" (사 40:4)을 낮추는 것은 물론이요, "모든 골짜기들" 을 높이려는 의도에서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예언자들은 교만한 자들과 방심한 자들에게는 죄책을 깨우쳐 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고 사람들의 멸시를 받는 자들에게는 위안을 주는 말을 해야 한다.
본장의 전반부에서는, "시온에 편안히" 지내고 있던 자들을 깨우치는 말씀이 있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받은 예언자 에스겔이 여기서는 바벨론에서, 그리고 그곳의 "강가에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고" 앉아 있던 애통자들에게 주는 위로의 말씀을 받았다.
Ⅰ. 경건한 포로들은 예루살렘에 존속하고 있던 자들에 의해서 크게 모욕과 학대를 받았다(15절). 하나님은 예루살렘 주민들이 이미 바발론으로 끌려가 버린 자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를 이 예언자에게 일러 주신다. 하나님은 바벨론에 끌려간 자들을 "좋은 무화과나무" 라고 인정해 주셨고, 그가 저들을 바벨론으로 끌어간 것은 저들의 유익을 위해서라고 선언하셨다. 그런데도 예루살렘에 있는 자들은 저들을 업신여기고, 저들 중의 최상의 성자라 할지라도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최악의 죄인만 못하다는 식으로 생각했다.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바벨론 포로민들을 뭐라고 묘사했는가?저들은 "네 형제" 이니라고 하나님이 예언자 에스겔에게 말씀하신다. 그래서 네가 관심과 사랑을 가져야 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네 친족의 사람들(문자적 의미로는, "네 구원의 사람들")이요, 친척이며, 재산을 양도받을 권한이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포로가 되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그럴 수 없는 자들이다. 저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 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여기셨다. 그것은 저들만이 자기들의 정직을 지켰고, 포로가 됨으로써 개혁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저들은 에스겔과 같은 족속, 같은 민족일 뿐 아니라, 같은 정신의 소유자였다. 저들은 그의 청중이요, 거룩한 규례로 에스겔과 교제하는 자들이었다. 아마 이 때문에 저들을 "그의 형제, 그의 친족의 사람들" 이라 했으리라.
2. 그들은 "예루살렘 거민" 에게 어떤 무시를 당했는가? 예루살렘 거민들은 저들을 보고, "하나님이 너희에게서 멀리 떠났다" 고 했다. 평안히, 교만한 맘으로 지내는 자들은 겸손하고, 또 섭리에 의해서 굴욕적인 자리에 처한 형제들을 경멸했다.(1) 이들은 저들을 교회의 구성원에서 제외시켜 버렸다. 저들은 통치자들과 구별되었고, 하나님의 의지에 순응하여 바벨론의 왕에게 굴복하고 말았다고 하여, 예루살렘인들은 저들을 파문시켰다. "너희는 여호와께서 멀리 떠났도다. 우리는 너희와 아무 상관이 없노라." 잘못된 자들은 양심적인 자들을 잘라내기를 기뻐한다. 자기들의 감정에 따라서, 남들을 향해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것인양 비난하는 법이다.
(2) 뿐만 아니라 국민의 일원으로서도 제외되었다. "이 땅은 우리에게 주어진 소유이다. 바벨론 왕에게 굴복한 너희는 너희의 재산을 몰수당했다. 그러므로 너희의 것도 우리가 가져야 할 권리가 생긴 것이다."
하나님은 번영하고 있다 하여 고난 중에 있는 형제를 업신여기는 자들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를 눈여겨보신다.
Ⅱ. 하나님은 형제들이 저들에 대해 행하는 무례한 것을 감안하시어, 저들에게 은혜로운 약속을 주신다. 저들을 미워하고 학대하면서, "하나님의 뜻이로다" 하는 자들이 있지만, '하나님은 저들의 즐거움" 이라는 사실이 알려질 것이다(사 6:5).
하나님은 자기의 손길이 저들을 쳤고, 그것이 그 형제들로 하여금 저들을 이길 기회를 주었다는 사실을 시인하신다(16절). "내가 그들을 멀리 이방에 흩은 것은 사실이다. 저들은 마치 버림받은 사람들처럼 보이고, 자기들이 싫어하던 민족들과 어울려 살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저들을 위해 자비를 예비했느니라."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경멸을 퍼붓는 때를 즈음하여 그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다윗이 시므이의 저주의 말을 인하여 자기에게 하나님이 복 주시기를 바랐던 것과 같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대적들이 저들을 절망에 빠뜨리려 하는 때를 이용하여 저들을 지원해 주신다.
이제 하나님의 약속 내용을 보자.
1. 하나님는 저들이 성전을 이용하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 보상을 주시시라(16절). "내가 저들이 이른 열방에서 작은(우리 성경, "잠깐") 성소가 되리라."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었다. 바벨론에는 성전이 없었지만 하나님이 있었다.(1) 하나님이 "저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즉 피난처가 되리가. 저들은 그에게로 도망할 것이요, 그 안에서 "제단의 뿔" 을 잡는 사람처럼 안전을 얻으리라.
나아가 저들은 성전이 아니고서는 그 어디서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하나님과의 교제를 포로가 되어간 그 땅에서 누리리라. 그들은 "성소에서 보았듯이," 거기서 "하나님의 권능과 그의 영광을 볼" 것이다. 저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징을 갖게 될 것이다.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총이 저들의 기도와 찬양을 성별시켜 줄 것이니, 제단이 그 예물을 성별시켜 줌과 같다. 그리하여 그것이 "황소보다도 더 여호와를 기쁘게" 할 것이다.
(2) 하나님은 "작은 성소가 될 것이다." 저들의 눈에는 그가 보이지도 않으리라. "높고 거대한 예루살렘에 있는 집" 은 부러움과 악의로 가득한 눈으로 보는 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왕상 9:8). 그들은 소수요 비천하다. 그래서 작은 성소가 저들에게 적당하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낮은 처지를 중히 여기시고, 자기의 은혜를 저들의 처지에 따라 맞추신다. 하나님의 은총의 겸비를 보라. 지극히 위대하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작은 성소가 되신다.
자기들 탓으로 된 것이 아닌 한, 공중 예배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그들과 직접 역사하시어 위로하실 것이다.
2. 하나님은 때가 오면 저들의 환난을 종결하실 것이고, 저들을 포로에서 구출하시어, 다시 안정을 주시며, 저들의 땅에서 살게 하실 것이다(17절). "내가 너희, 곧 그처럼 흩어졌고 멸시받던 자들, 동향인도 업신여기는 너희를 모으리라.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서 모으리라. 너희를 섞여 살던 자들에게서 구별하고 너희를 포로로 하던 자들에게서 구출하리라. 그후에 내가 너희에 이스라엘 땅을 주리라.사람이 아무리 우리를 비난하더라도 그 비난이 우리에게 내릴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을 막지 못한다. "내가 이스라엘의 땅을 너희에게 주리리." 새로이 허락해 주리라. "그리고 너희는 그리로 가리라."
3. 하나님은 은총을 통해서 저들을 죄에서 떠나게 하시리라(18절). 저들의 포로 생활이 저들의 우상 숭배를 실제로 치료하게 되리라. "저들이 자기 본향에 다시 돌아오게 되면, 거기에 있던 모든 가증한 것을 제거해 버리리라." 지금까지 좋아하던 저들의 우상이 이제는 가증하게 보이리니, 자기들이 포로 생활을 하던 바벨론의 우상만이 아니라 자기들의 고향 가나안의 우상도 그러하다. 저들이 이전처럼 그 우상들을 섬겨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일체의 유품도 남겨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가증한 것을 제거하리라." "그때에야", 우리가 번영의 터전으로 돌아가게 된다. 즉 옛 상태의 죄악과 우행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게 될 때이다. "내가 더 이상 우상과 무슨 상관을 하리요?"4. 하나님이 큰 권능으로 그들을 의무의 길에 되돌려 보내실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악을 행하기를 그칠" 것이요, "선행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것은 저들의 환난이 끝나게 될 뿐 아니라 그들이 평화의 길에 들어서게 되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이 그들에게 좋은 정신을 깃들일 것이다. 그는 나무를 좋게 만드실 것이다(19절). 이것은 복음의 약속이다. 하나님이 하늘의 가나안을 위해 작정한 모든 자들에게 이 약속은 실현된다. 하나님은 하늘을 예비하셨을 뿐 아니라, 그 하늘을 위해서 모든 것을 예비해 두셨기 때문이다.
약속의 내용은 이렇다.
[1] 하나님이 "그들에 한 마음을 주리라." 많은 신들을 섬겨서 갈라진 마음이 아니라 참되신 하나님을 위한 온전한 마음, 하나님을 향해 굳게 고정된 마음, 그리고 방황하지 아니하고 변함없이 통일되어 있는 마음을 주실 것이다. "한 마음" (일치한 마음 - 한글)이란 진실하고 정직한 마음이요, 말과 행실이 일치하는 자의 마음이다.
[2] "새로운 영(神)을 주리라." 즉 하나님의 섭리가 그들에게 베풀어 주실 새로운 처지에 잘 부합되는 기질의 정신을 주리라는 것이다. 성결된 모든 자들은 "새로운 영" 을 지닌다. 전혀 옛 영과는 다른 영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그런 자들은 새로운 원리를 좇고, 새로운 관습을 따르며, 새로운 목표를 추구한다. 새 이름, 새 얼굴만으로는 새로운 영이 없는 한 소용이 없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3] 하나님이 "그들의 육체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하리라." 썩어진 성질에서 제하리라. 저들의 심령이 이전과는 달리 더 이상 죽은, 건조한, 그리고 돌같이 단단한 상태에 있지 않고, 이제는 좋은 열매를 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돌짝 밭" 에 떨어진 씨앗처럼, 좋은 씨앗을 낭비해 버리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4] 하나님이 그들에게 "육체의 마음을 주리라." 즉 죽은, 썩은 육체의 마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육체의 마음을 주리라. 하나님은 저들의 마음이 신령한 고난과 기쁨을 체감할 수 있게 하시며, 부드럽게 만드시고, 감동을 잘 받을 수 있게 만드실 것이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역사요, 그의 은사이다. 약속된 은사이다. 그 은사로 인해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놀랍고 행복된 변화가 일어난다. 이런 변화가, 하나님이 본향으로 데려가실 자들에 베푸신 약속이다. 마음의 변화가 동반될 때, "그때에야" 그 같은 외적 조건의 변화가 더욱 의미있게 될 것이다. 또한 "더 좋은 나라," 곧 천국에 갈 자들에게는 모두 이같은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2) 저들의 행실이 그 원리에 부합될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새로운 영을 주리라." 그러나 그것은 종교에 대해서 말을 잘하고 변론을 잘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들이 내 율례를 좇게 하기 위해서" 이니라. 그리고 어떤 생활 속에서나, 어떤 예배에서나 "나의 규례를 지키게 하려" 함이니라(20절). 이 두 가지는 병행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새로운 영과 새로운 마음" 을 준 자들은 이 두 가지 일을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저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깨어진 것 같았고 잊혀졌던 것 같았던 옛부터의 계약이 갱신되는 것이다.
우상 숭배를 통해서 보면, 저들은 하나님을 버린 것이 분명하다. 또 저들의 포로 생활을 보면, 하나님이 저들을 버린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저들이 우상 숭배에서 치료되어 포로 생활에서 구출되자,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다시금 서로를 시인했다. 하나님은 그들속에 당신의 훌륭한 사업을 행하시자 저들을 당신의 "백성" 으로 삼으셨다. 그러자 그들을 향한 그의 선의의 징표로 그가 "저들의 하나님" 임이 드러나게 된다.
Ⅲ. 개혁되기를 싫어하는 자들에게 대한 진노의 예고가 있다. 심판(벌)이 경고되면, 의로운 자들은 구별됨으로써 그 심판의 재앙을 받지 아니하게 되듯이, 은총이 약속되면, 악한 자들은 구별되어 그 귀한 은총의 위로를 받지 못하게 된다. 저들은 이 일에 아무런 해당이 없다(21절). "그러나" 은총을 받지 못하는 자들이 평화와 무슨 상관 있으리요?
다음을 관찰해 보자.
1. 저들을 뭐라고 묘사했는가"저들의 "마음이 미운 것들의 마음을 좇는다" 고 했다. 마귀가 예배를 받으려고 애쓰듯이, 저들은 또한 마귀를 예배하려고 열성이다.
또는 "새로운 영" 을 가진 자들과는 반대로 "저들은 우상의 마음을 좇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성질로나 행실로나 저들은 자기들이 섬기는 우상과 같으며, 그들에게서 잔인성과 조잡성을 배운다. 여기에 바로 저들의 모든 악의 뿌리, 마음의 부패의 근원이 있다. 마치 저들의 개혁의 뿌리는 마음의 갱신에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저들의 마음은 제길로 행하며, 그 사람의 사람됨과 일치한다.
2. 저들의 운명은 무엇인가?저들의 운명은 정의와 공포를 수반한다. "내가 저들의 행실을 저들의 머리에 보상해 주리라." 저들의 행한 대로 대가를 주리라. 하나님은 단지 인간들을 그들의 행실에 따라 대우하신다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의 정의로움을 잘 말해 주는 것은 없다. 그러나 또한 이것보다 더 잘 죄인의 비극을 말해 주는 것도 없다.
환상의 결말(에스겔 11:22-25)
1. 하나님의 임재가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떠난다. 전갈이 이 예언자에게 전달되었고, 그가 충분히 알게 되었으며, "진귀한 자와 사악한 자들" 을 가려내는 방법을 잘 알아들었을 "그때에 그룹들이 저들의 날개와 그 곁에 있는 바퀴들을 들었다" (22절). 이것은 10장 19절과 같다. 천사들이 이 낮은 세상에서 자기들의 심부름을 마치면 떠나려고 날개에 오른다. 그들은 지체치 아니한다. "성전의 동쪽문" 에 머물려 있던(10:19) "여호와의 영광" 이 여기서는 "성읍 중에" 있다고 되어 있다. 또한 여기에 보면 그 영광이 다시 떠남에 때해 아무도 방해하거나 간섭하는 자가 없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영광은 "그 도성의 동편에 있는 산" 으로 옮겨갔다(23절). 즉 "감람 산" 으로 옮겨간 것이다.이스라엘인들이 이 산에다 우상을 세우고, 성전에 있는 하나님과 대결했다(왕상 11:7). 그래서 그 산을 "부패한 산" 이라고 했었다(왕하 23:13). 그러므로 하나님은 말하자면 거기에다가 자기의 본부를 세우시고, 거기에다가 자기들의 성전을 마련하리라고 생각하고 있던 자들과 대결하실 채비를 차리신 것이다. 그 산에서 보면 예루살렘 전경(全景)이 들어 온다. 하나님이 그리고 가신 것은, 자기가 하신 말씀(신 32:20)을 이루려 하심이었다. "내가 저들에게서 내 얼굴을 숨기리라. 내가 저들의 결국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리라."
그리스도께서 "성읍을 보고 우신" 것도 바로 이 산에서이다. 그리스도는 로마인들에게 의해서 그 성읍이 최후의 파멸을 당할 것을 예견하셨던 것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그리로 옮겨간 것은, 마치 필요할 때 다시 부르면 들릴 수 있는 거리로 가신 것이다. "이날, 그들의 날" 에 그들이 부르면 응답하리라. 그래서 저들은 "자기들에게 평화를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헤어지기 싫어함은 종종 이별을 낳는다. 사실상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었다. "에브라임아. 네가 어찌 높아지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구하겠느냐?" 그러나 하나님이 오래 견디시지만, 항상 참는 것은 아니시니, 마침내는 저들을 버리시고, 영원히 버리시니, 하나님을 버린 자들은 버림을 받을 것이다.
2. 이 환상이 에스겔을 떠나갔다. 마침내 그 환상은 "그에게서 떠난 지라" (24절). 에스겔은 그 환상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것을 본 그는, 이 환상은 거룩한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위에서 와서 다시 위로 되돌아가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성도들의 환상이 천국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것은 아님을 알자. 성도들은 그 영광의 빛줄기를 본다. 그리고는 다시 사라진다. 그들에게서 떠난 환상은 거룩한 기쁨을 줄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잔치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이 환상이 올라간 곳도 감람산이요,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심을 보이신 것도 바로 그 산에서이다. 당시에 그를 "육체로 보았던" 자들도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한다. "그의 발이 감람산에 서게 되고" 거기에서 계속되리라는 것이 예언되어 있었다(슥 14:4).
3. 이 예언자는 포로들에게 되돌아 간다. 환상과 무아경 속에서 그를 예루살렘으로 인도해 갔던 바로 그 영이 다시 그를 갈대아로 되돌려 보냈다. 지금은 그의 거처가 거기에 한정되어 있고, 그곳이 그가 일할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임했던 성령은 그를 포로 생활에서 구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포로 생활 속에서도 그에게 위로와 힘을 주기 위해서였다(이것은 구원이나 마찬가지였다).4. 그는 자기가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청중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25절). 그는 주기 위해서 받았다. 그리고 "그에게 명하신 자에게 신실했다." 그는 자기의 전갈을 매우 열성적으로 전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말했다." 또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주신" 것만 말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보았던 커다란 죄악상과 그 도성에 재촉되고 있는 멸망을 이야기해 줌으로써, 예레미야가 조언해 준 대로 자기들이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사실에 대해 후회하지 않게 하며, 그렇게 된 것을 서운해 하지 않도록 하고, 뒤에 남아 있는 자를 부러워하거나 거기로 돌아갈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있는 곳에서 자족할 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죄악과 멸망이 도사리고 있는 성읍에 살기를 누가 탐하랴 ! 진노와 저주 속에서 예루살렘에 사느니 하나님의 가호 아래 바벨론에 사는 것이 더 낫다. 그러나 이런 소식이 포로된자들에게 직접 전해졌지만, 그 내용이 예루살렘에 있는 자들에게도 인편으로 전해졌을 것이 분명하다. 이것으로 인해서 예루살렘이 경고를 받아들인다면 다행한 일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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