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妬忌)를 격발시키는 우상(에스겔 8:1-6)
에스겔은 지금 바벨론에 있다. 그러나 그가 앞 장에서 전했던 진노의 말씀은 예루살렘과 관계된 것이었다. 포로들은 자기들의 평화와 환난을 예루살렘의 평화와 환난에 달려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에스겔을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환상을 본다. 이 환상은 제11장까지 계속된다.
Ⅰ. 환상을 보게 된 날짜가 나타나 있다. 에스겔이 보았던 첫 번째 이(환)상은 "사로잡힌 지 5년 4월 5일" 에 있었다(1:1, 2). 그러나 이번 환상은 포로로 사로잡힌 이후 꼭 14개월이었다. 아마 에스겔이 이스라엘의 죄악을 담당하기 위해서 좌편으로 누워 390일을 지낸 이후, 유대의 죄악을 담당하기 위해서 우편으로 누워 40일을 지내기 이전이었다. 왜냐하면 지금은 에스겔이 누워 있지 않고 집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가 우리에게 전한 말씀에 대해서 특히 눈여겨 보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멀지 않아 우리에게서 그것에 대한 계산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Ⅱ. 때와 시기를 잘 포착해야 한다.
1. 예언자는 진지한 자세로 깊은 명상을 하며 "그의 집에 앉아 있었다." 우리가 세상을 멀리하고 우리 자신의 마음 가운데로 몰입하면 할수록 그만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좋은 장소가 마련된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더 잘 알게 될 것이다.또한 에스겔은 자기에게 찾아 오는 친구들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그의 집에 앉아서"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무엇을 알려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지혜를 주실 것이다.
2. 당시 포로로 있던 "유다의 장로들이 에스겔 앞에 앉아 있었다." 그 날은 안식일로 여겨진다. 매안식일마다 예언자에게서 말씀을 듣고, 그 예언자와 함께 회당에 모여서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이 그들의 상례였다. 그러나 지금은 성전과 회당도 없으며, 제사장과 제단도 없기 때문에, 안식일을 재대로 지킬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엘리사 시대의 선한 사람들처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사실은 여호와의 큰 자비를 입는 것이다(왕하 4:23). 그러나 유다 장로들이 에스겔에게 나아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에스겔의 말을 들으려고" 무릎꿇고 "앉았다" 는 것은 특별한 경우에 국한된 일이라고 혹자는 생각한다. 여기서 다음을 살펴보자.(1)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들에게서 율법이 없어졌을 때" -제사장들의 "말은 지식뿐이다" (7:26)-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에게는 상의해 줄 예언자가 있었다. 하나님은 장소나 사람에게 매어 있지 않는다.
(2) 포로 상태에 있는 유다 장로들은, 그들이 고국에서 평화스럽게 살던 때보다 지금은 선지자의 말씀을 더 많이 갈망하며, 선지자들을 더욱 존경하고 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환난의 줄" 에 얽히게 하시고 나서,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한다" (욥 36:8, 10; 시 141:6), "이(환)상의 골짜기" 에서 환상을 경멸하던 자들도 지금은 주의 말씀이 귀하고, "이상이 드물다" 고 하면서 환상을 찬미한다.
(3) 우리의 선생들이 궁지에 몰리어, 은밀한 곳에서 비밀리에 가르쳐야 할 때에는, 우리도 열심히 그들에게로 나아가 그들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하나님의 종들의 집은 그들의 이웃을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동안 그가 유숙하는 집에서 설교했으며, 하나님은 그를 그곳에 남겨두었으나, "어떤 사람도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Ⅲ. 예언자 에스겔이 받은 성령의 감화를 보자. "여호와의 손이 거기서 내게 임했다" 고 했다. 여호와의 손이 그를 사로잡았다. 마치 그를 이 환상으로 집어 넣은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런 것을 견딜 수 있도록 그를 도와 주기 위해서였다.
Ⅳ. 에스겔이 본 환상은 무엇인가?(2절) 그는 "한 모습을 보았다." 즉 사람의 "모습" 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허리 이하는 "불" 같고, 허리 위는 "광채" 가 나는 그런 모습이었다. 이것은 에스겔이 본 바 앞에 나왔던 모습과 같았다(1:27). 아마 그것은 둘 다 같은 인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에스겔과 함께 앉아 있던" 유다 장로들은 (마치 바울과 함께 여행했던 사람들처럼) 광채를 보고 매우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행복한 광경은 그들이 은밀한 곳에서 예언자와 함께 참석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음성을 듣지는 못했다(행 22:9).
Ⅴ. 환상 가운데서 에스겔은 예루살렘으로 옮겨진다. 에스겔이 보았던 환상이 "손 같은 것을 펴서 에스겔의 머리카락 하나를 잡았다." 펴진 손은 성령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을 "하나님의 손" 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또는 에스겔 안에서 활동하시는 영이 "그를" "들어 올렸다." 그래서 그는 외적인 강제력이 아니라 내면적 정신력에 의해서 지탱할 수 있었으며, 그 일을 수행할 수 있었다. 신앙이 돈독한 하나님의 종들은 머리카락 하나에 의해서 (즉 하나님의 뜻의 가장 작은 암시에 의해서도) 그의 의무에로 이끌려진다. 왜냐하면 그 안에 활동하는 영이 그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도록 하기 때문이다(시 27:8).
에스겔은 놀랍게도 "하늘과 땅 사이로 들어 올려졌는데," 그것은 그가 마치 독수리의 날개를 타고 날아가는 것과 같았다. 에스겔과 함께 앉았었던 장로들은 아마도 이런 광경를 보았을 것이다(그로티우스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들은 여호와의 "손이 에스겔의 머리카락 하나를 잡아 에스겔을 들어올리는" 광경을 본 증인들이다. 그때 에스겔은-계속해서 이어지는 환상을 보는 동안 - 다시금 무아의 상태에 빠졌으며,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알지 못하고 - 이와 비슷한 경우에 바울처럼 - 더 이상 "말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한 가장 좋은 준비 상태이며,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이 세상을 초월하는 신적인 빛의 매개체이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것들의 자극을 초월하는 신적인 빛의 매개체이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것들의 자극을 초월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하늘로 올려진 에스겔은 환상 중에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소에로 옮겨졌다. 왜냐하면 하늘로 올려지려는 사람들은 마음속에 하나님의 성소를 간직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신은 마치 에스겔이 직접 하나님의 성소에 있는 것처럼 에스겔의 마음속에 성읍과 성전을 묘사해 주었다. 믿음으로 우리는 거룩한 도성인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다. 또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다.
Ⅵ. 그곳에서 에스겔은 무엇을 보았는가?
1. 에스겔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4절).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에스겔이 앞에서 보았던(1장) 보좌와 바퀴들과 생물들과 같은 모습이었다. 하나님의 종들은 어느곳에 있든지 혹은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믿음으로써 바라보아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한다. 성소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보았던 사람들은 그것들을 다시 보려고 갈망해야 한다(시 63:2).이런 되풀이되는 하나님의 영광의 환상을 통해서 에스겔은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존엄심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이 환상들이 여기에서는 다른 의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환상 중에 나타난 하나님처럼 영광과 권능의 하나님을, 지저분한 신, 비방거리의 신, 거짓된 신, 그리고 무용지물인 신들로 바꾸어 놓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더욱 무겁게 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보는 하나님의 영광이 더욱 영광스러우면 영광스러울수록 우리의 죄악은 더욱 더 추하게 보인다. 특히 우상 숭배의 죄악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수치로 바꾸는 것으로서, 더욱 추한 죄악이다. 이런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에게서 떠날 때면, 그들의 재앙은 더욱 심해지며(11:23), 집과 성읍은 더욱 황폐케 될 것이다.
2. 이스라엘의 수치를 보았다. 그런데 그곳에는 "투기의 우상들이 제단 북향 문에" 놓여 있었다(3, 5절). 이 우상들은 확실치는 있으나, 아마 므낫세가 만들어서 성전 안에 세워두었던(왕하 21:7; 대하 33:3) 바알의 우상이거나, 혹은 아세라 목상일 것이다. 요시야 왕은 이 우상들을 제거했으나, 그의 후손들이 성전에다 다시 세웠는데, 그 우상들은 "태양신" 으로서, 요시야 왕 때 "여호와의 전의 입구에서" 발견했던 그런 우상들이다(왕하 23:11). 그리고 이 우상들이 지금은 "입구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예언자는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것이 어떠한 우상이었는지를 말해 주지는 않고 있다. 단지 어떤 우상이든지 간에, 그것은 하나님을 극도로 대적하는 것이었으며, "투기를 격발케 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우리의 양심에 확신시키기 위하여, 그것이 "투기의 우상" 이었다는 사실만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남편이 아내의 매음 행위를 분개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상 숭배에 분개하실 것이며, 그 행위를 분명히 복수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나 1:2)이시기 때문이다.(1) "여호와의 집에" 이러한 우상을 세우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투기를 격발케" 하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 경배의 일과 직접 상관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나, 주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고 말씀했던 그것과 관계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런 우상을 "제단 문 안에" 세웠는데, 그곳은 사람들이 회집하는 곳이었으며, "제단 문" 이라 불리어졌다(5절). 이런 일이 뜻하는 것은,
[1] 우상을 증가시킴으로써 면전에서 하나님을 모욕하고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되며,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모욕이고,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반항이다.
[2] 백성들을 타락시키기 위해서, 재물을 들고 여호와의 집에 제단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붙잡아 우상에게 제물을 드리도록 유혹하는 것이다. 솔로몬이 묘사한 것처럼 음란한 여인들은 "자기 집 문에 앉아서,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객을 불러 이르되, '무릇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잠 9:14-16)고 한다. 그러므로 이런 우상들은 "투기의 우상" 로 불리어진다.
(2) 우리는, 에스겔이 하나님의 전에서 이런 우상들을 보았다는 사실이 그에게 매우 놀라웁고 비통한 일이었다는 점을 잘 알수 있다. 왜냐하면, 에스겔은 이미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어떤 개혁을 일으켰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세상과 교회는 더욱 죄악에 물들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
[1] 하나님은 우상 숭배의 사악성과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이 백성들을 파멸에 이르도록 던져버릴 충분한 근거가 있음을 에스겔에게 보여 준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이런 가증스런 일이 일어났을 때면 "하나님이 그의 성전에서 떠나리라" 것을 예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그후 그곳을 완전히 떠나지 않았던가? 사람들이 이런 가증스런 일들을 의도적으로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고의로 그의 성소를 떠날 것이며, 백성들의 운명은 파멸에 이르게 되리라. 사실상 이런 결과로 인해서 그들은 거라사 지방 사람들 처럼 하나님이 "그들의 지방에서 떠나 주시기를" 갈망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곳을 떠날 것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자기의 성소를 위엄스럽게 하지도 않을 것이며, 예전처럼 보호하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의 성소를 비방거리로 삼고 파멸하도록 내버려 둘 것이다.
[2] 지금도 백성들의 행위가 심히 악하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보이신 모든 심판에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낼 줄 것이지만, 사태는 더욱 악화될 것이다. "너는 방향을 바꾸어 보라" (우리 성경에는 없음). "이보다 더 가중한 일을 보고" 깜짝놀라게 될 것이다. 한 가지 가증스러움이 있는 곳에는 많은 가증스러움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리라. 죄들은 혼자 다니지 않는다.
70 장로들의 타락상(에스겔 8:7-12)
여기에서는 예루살렘에서 범해진 가증스런 일을 계속 보게 된다. 그리고 성전 안에서만 벌어지는 죄악도 보게 된다.
Ⅰ.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보자. 하나님은, 환상 가운데서, 에스겔을 "뜰의 문" 으로 즉 성전의 바깥 뜰로 데려갔다. 그 뜰의 좌우에는 제사장들의 숙소가 있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먼저 "우상들의 방" 으로 데리고 갈 수도 있었으나, 이스라엘의 감추어진 죄악을 에스겔이 직접 살펴 보게 하기 위해서, 또 한편으로는 우상 숭배자(제사장)들이 우상 숭배의 행위를 얼마나 주의깊게 실행하는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 에스겔을 서서히 그들에게로 데리고 간다. 제사장들은 자기들의 행위를 더욱 비밀스럽게 하기 위해서 숙소 앞에다 담을 쌓았다. 그곳을 지나는 통행인들로부터 저들의 가증스런 행위를 감추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저들이 수치를 당할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영략없는 표지였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빛을 싫어한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집에 있을 때의 자기들을 본 자들이 자기들의 사생활을 알게 되는 것을 조금도 원치 않았다. 그것은 자기들의 행실이 표리가 부동하다는 것을 알게 될까봐서였다. 그러나 "보라, 담에 있는 구멍을" (7절). 그 구멍은 비밀스런 구멍으로서, 그 구멍을 통해서 세인들의 눈으로부터 자기 자신들의 가증스런 행위를 감추고, 더 성공적으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들의 위선을 감추어 주는 벽에 구멍이 있어서 그들의 위선을 폭로시키며, 그 구멍을 통해서 꾸준하게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위장이 감추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그 같은 수법으로는 저들의 계획을 진행할 수 없다. 우화 속에 나오는 나귀의 귀는 사자의 가죽 밑에 감추어져 있다.
에스겔은 "담에 있는" 이 "구멍" 을 더 크게 만들어 한 "문" 이 있음을 "보았다" (8절). 에스겔은 이 문을 지나서 "창고" 로 들어갔다. 아마 제사장들이 기거하는 어떤 방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거기에서 그들이 행하는 악하고 가증스런 행위" 를 (9절) 보았다. 자기 자신이나 남에게서 죄악의 비밀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끊임없는 탐구가 뒤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사탄은 간계와 깊음과 책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우리는 이런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마음은 다른 모든 것보다도 교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일을 살피기 위해서는 아주 엄밀해야 한다.
Ⅱ. 에스겔이 발견한 내용을 보자. 에스겔이 발견한 것은 매우 슬픈 사실이었다.
1. 에스겔은 사면이 우상의 그림으로 채워진 방을 보았다(10절). 이방 민족에게서 가져온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들이 사면 벽에 그려졌는데," 그것은 가장 악한 "여러 곤충들" 과, 독이 있고 해로운 "가증한 짐승들" 의 그림이었다. 이스라엘 족속이 이러한 것을 경배했던 것이다. 적어도 이런 것들은 예배의 대상이 되고 나면 가증스런 것이 된다. 이것은 일종의 만신전 곧 모든 우상들의 집합체였다. 이스라엘 족속들은 이 만신전에게 헌신했다. 십계명의 제 2 계명은 지상의 모든 형상을 금하고 있기에, 인간이 만든 상들은 매우 악한 것이며 위험스런 것이다.2. 에스겔은 그 방이 우상 숭배자들로 가득 차 있음을 알았다(11절). 한편에는 이런 그려진 우상들에게 분향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장로 칠십인" 이 있었으며, 다른 한편에는 많은 우상 숭배자들이 이런 사악한 행위로써 서로서로를 격려하고 있었다. 이런 행위가 은밀한 방에서 행해지고 있기에 칠십 명이 모인 회합일지라도 감출 수가 있었다.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하는 장로들의 수가 바벨론에 있는 에스겔의 처소에 나아와 앉아 있던 장로들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1절). 그들은 "칠십 인" 이었는데, 이 숫자는 저 유명한 산헤드린 곧 국가의 최고 의결 기관의 회원수에 해당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들을 두려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연령으로나 직책으로나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들" 이며, 그들의 지위의 권한으로 우상 숭배를 금하고 처벌할 수 있으며, 우상이 발견되는 어느 곳에서든지 그것을 폐하고 없애버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자신들이 비밀리에 우상들을 경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의 높은 지위를 유지할 목적으로만 공적으로 하나님 예배를 시인하고 진행했던 것이다.
그 장로들은 "각자 그들의 손에 향로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우상 숭배를 매우 좋아했기에, 그들 모두가 제사장이 되고자 했으며 이 우상들을 위해서 향을 마구 피웠기 때문에 "향의 빽빽한 구름이 하강한 것" 같이 방 안에 가득채웠다. 정말 이런 우상숭배자들의 열심은 참 하나님께 무심히 경배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리라.
에스겔은 그가 이미 알고 있었던 한 사람에 대해서 특별한 주위를 기울었다. 그 사람은 마치 우상 숭배자들의 지도자처럼, 그리고 아마도 이런 사악한 행위를 자행하는 시대에 있어서 최고 의결기관의 우두머리인 양, 이런 우상 숭배자들의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들이 가증스런 일을 행할 때 백성들이 타락한 다는 사실은 당연한 일이다. 지도자들의 죄악은 다시금 죄를 유발시킨다.
Ⅲ.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이 들렸다(12절).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그 방에서 이런 가증스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느냐?" 여기서 다음 일들은 주의깊게 살펴보자.
1. 그런 일은 "어두움 가운데서" 행해졌다. 왜냐하면 죄악된 일들은 "어두움의 일" 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지위와 위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런 행위를 숨겼다. 세상에는 숨겨진 많은 죄악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계시의 날" 에는 그런 죄악이 드러날 것이다.2. 이 방은 우상 숭배를 위해 있는 이와 유사한 많은 방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우상들을 경배하기 위해서 함께 이곳에 모였다. 그러나 그들 "각자" 가 우상들에게 자기들의 생각대로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자신의 처소 옆에 "각자의 우상을 모시는 비밀 방" 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우상 숭배자들은 각기 자기 집의 수호신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가족들은 비밀리에 그 우상들에게 예배를 드린다. 이렇게 은밀한 곳에서 우상들을 경배하는 이유는 그들 자신들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해서였다. 즉 그들은 "우상을 섬길 방" 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왜 예배를 드릴 장소를 가지고 있지 못하는가?
3. 저들의 우상 숭배의 밑바닥에는 무신론이 있다. 그들은 "어두운 곳에서" 우상들을 섬기고 있다. 그런데 이 우상들은 이방 나라의 신들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경배해야 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이 땅을 버리셨다. 또 여호와는 우리에게 관여하지 않으신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고 한다.
(1)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시야 밖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들의 행위가 비밀스럽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알 수 없으며, 그러기에 그들의 가증한 행위는 하나님의 눈에도 감추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악한 일을 행하는 자들은 어두움, 곧 죽음의 그림자가 있는 곳에다 자신들을 감출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함을 실제로 불신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이탈하는 우리의 배신에 근거한다. 그러나 교회는 바로 이런 우상 숭배의 죄악을 바로 이야기 하고 있다(시 44:20, 21). "만약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다면, 하나님이 이를 찾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분명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것이다.
(2)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돌보심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도다." 혹은, "여호와는 우리의 땅을 버리셨으며, 우리의 땅을 적들에게 희생되도록 버려두셨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어떤 다른 신을 찾아보호를 받아야 할 때이다. 우리의 유일신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구원할 수도 없으며, 구원하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많은 신들을 가져야만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태도이다. 설사 하나님이 그들을 먼저 버렸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을 저버릴 수 없다. 이런 생각은 그들의 죄의 책임이 하나님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책임을 전가하는 아주 경솔한 행동이요, 참으로 멸망을 재촉하는 행위임을 명심해야 한다.
태양과 담무스 숭배(에스겔 8:13-18)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알 수 있다.
Ⅰ. 더 많은, 더 큰 가증스런 일들이 이 예언자에게 발견되었다. 에스겔은 자신이
보았던 것이 매우 악한 것이라고 생각했다(13절). 그러나 "너는 다시," 전에 본 것보다(6절) "더욱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15절). 이 세상에는 가증스러운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지 않고 은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과 사귀면 사귈수록, 그리고 세상을 많이 알면 알수록, 세상이 부패했다는 것을 더 잘 알게 된다. 또 나쁜 일을 알고 있을 때는 더 나쁜 일을 보았을 때에만 먼저 알고 있던 나쁜 일에 대한 놀라움을 그치게 되는 법이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살피고 조사해 보면 역시 그런 것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아주 많은 여러 종류의 가증스러운 죄악의 세계가 있다. 우리가 많은 잘못된 것을 발견했을지라도 여전히 우리는 더 많은 잘못을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이란 아주 사악하기에 아무도 그 마음을" 완전히 "알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발견된 가증스러움은 다음과 같다.
1. "여인들이 담무스를 위하여 울고 있다" (14절).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란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참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는 오히려 눈물로써 우상을 섬기는 짓이다 ! "허무한 것들을 쫓으며" "자기 자신의 자비를 저버리는" 행악자들은 이와 같이 참으로 어리석다.혹자는 그들이 그리이스인들이 섬기던 미남신(美男神) 아도니스를 위해 눈물흘렸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에집트인들의 우상 오시리스를 위한 것이라고도 한다. 전해지는 바로는 담무스 상은 울기 위해서 만든 것이고, 우상 숭배자들은 그 우상들과 함께 울었다. 여인들은 그 담무스의 죽음을 슬퍼했으나, 얼마 안 되어서 담무스가 다시 소생되었기에 기뻐했다는 것이다.
애곡하는 여인들은 "여호와의 전의 북문에 앉아 있었다." 거기에서 그들은 마치 하나님을 거역하고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우상 숭배에 대한 성스러운 예식을 드리는 눈물을 흘렸다. 혹자는 이 우상 숭배자들은 육체적인 간음도 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이 두 가지 일은 대게 병행하기 때문이다. 또 전자로써 거룩한 것을 욕되게 한 자들은 "잘못된 욕정에 빠지게" 되기 때문에 인간성까지도 욕되게 만들고 말기 때문이다.
2. "남자들은 태양을 경배하고" 있다(16절). 이런 행위는 어마어마하게 큰 가증스런 행위로써, 실지로 "여호와의 전 안뜰에 있는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제단에서는 가장 거룩하고 성스러운 종교 의식이 행해져야 하는데, 이들은 거기서 이렇게 가증스런 사악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질투의 하나님은 자기 면전에서 모욕하는 이들에게, 왕이 하만에게 말했던 것처럼 "내 집, 내 앞에서 왕비를 능욕하려는가?" 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곳에는 "25인이 있는 데," 그들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돌려야 하는 영광을 태양에게 돌리고 있었다. 혹자는 이들 25명이 왕과 그의 왕자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히려 이들을 제사장들로 보아야 하리라. 왜냐하면 이곳은 제사장들의 뜰이며, 제사장들이 자주 드나들기 때문이다. 참 종교를 선봉했던 사람들은 우상 숭배를 경계하고 참 종교를 보호할 책임을 갖고 있는데, 이 제사장들은 참 종교를 배반한 사람들이다.(1) 제사장들이 "여화와의 전을 등졌다." 그들은 고의로 여호와의 전을 잊고, 그것을 얕보며, 모독을 주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훈에 그들의 등을 돌리고 그것을 경멸하게 되면, 그들 자신들의 새로운 고안물을 찾아 끝없이 방랑하게 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불경건은 우상 숭배와 모든 죄악의 시발점이다.
(2) 그들은 "그들의 얼굴을 동쪽으로 향하고" 떠오르는 "태양을 경배했다." 이것은 고대 우상 숭배의 한 실례이며, 욥기에 언급되어 있고(욥 31:26), 다른 민족에게서는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어떤 민족은 이런 이름으로, 또 어떤 민족은 저런 이름으로 태양을 숭배한다.
이 제사장들은 태양 숭배가 그 역사에 있어서 오래고, 동방에서는 널리 있는 일이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을 성전 뜰에서 태양숭배를 행했으며, 그것이 예배 의식에 삽입되어 있지 않으면 하나의 무위(無爲)의 죄를 짓는다고 생각했다. 우상 숭배자들의 어리석음을 보라. 그들은 마치 태양을 신처럼 여기며, 그것을 바알 곧 "주님" 이라 부른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태양을 우주의 종으로 삼으셨다(왜냐하면 태양을 뜻 하는 이름, 쉐메쉬가 바로 종을 뜻하기 때문이다. 신 4:19). 그런데 우상 숭배자들은 하나님이 만든 광명은 경배하면서, "빛들의 아버지'는 경멸하고 있다.
Ⅱ. 이런 발견들로부터 유출된 결론을 보자. "인자야, 너는 이런 일들을 보았느냐 !(17절) 너는 그런 일들이 여호와의 전에서 행했던 것을 일찍이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느냐?"
1. 하나님은 가증스런 범죄에 관하여 예언자에게 호소한다. 보다 선한 것을 알고 고백하며, 또한 열방보다 더 많은 특권을 갖추고 있는 "유다 족속에게 이런 일이 경한 일이라" 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신탁과 율법을 가지고 있는 유다 족속들이 "이곳에서 가증스런 행위를 범했다" 는 사실이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범한 죄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 이런 범죄와 같은 가증스러움이 어찌 "황폐케 되지" 않겠는가?(단 9:27)2. 하나님은 이스라엘 각처에서 발견된 기만과 압제로부터 그들의 가증스런 죄악을 더욱 악화시킨다. "그들이 포악으로 그 땅을 가득 채웠도다." 하나님께 범죄한 사람들이 서로 범죄함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기이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신성한 모든 것들이 공의로운 모든 것을 유린했다는 사실도 기이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저들의 생활의 사악함은 심지어 저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까지 가증스럽게 했다(사 1:11). "그들은 포악으로 그 땅을 채웠으며, 그런 후에 성소에 있는 나의 분노를 격발시키기 위해서 성전으로 돌아온다. 그들이 드리는 희생 재물은 그들의 죄악을 속죄해 주기보다는 더 보태 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를 진노케 하기 위해서 돌아오며(그들은 끊임없이 내 진노를 일으켰다) 심지어 그들의 코 위에 나무가지를 두었다." 이런 표현은 그들이 하나님을 조롱하고 비웃는 것을 나타낸다. 그들이 "나무가지를 그들의 코 위에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조롱한 것이다. 아니면 가증스런 이런 행위는 그들이 섬기는 우상들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우상 숭배자들이 사용했던 관습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 14장 13절에서 우상 숭배자들이 사용했던 화환에 대해서 읽는다. 거기에 보면, 모든 열심당원 사람들은 꽃다발처럼 냄새맡는 데 사용하기 위해서, 나무가지를 들고서 밖으로 나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이 성경 구절에 다른 의미를 제시한다(요 15:6). 마소라 원문이 해석한 것처럼, "그들은 나무가지를 그들의 진노" 곧 "그(하나님)의 진노에 던져 버렸다." 즉 이것은 말라죽은 포도나무 가지처럼 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계속 타게 하는 연료를 보태 주는 일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진노의 불은 그렇게 뜨겁게 타오르지는 않지만 이미 불붙어 있다.
혹은 나무가지를 코에 두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이나 사람에게 대해서 아주 큰 모독과 가증스러움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가증스러운 세대이다.
3. 하나님을 그들에게 오로지 "멸망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즉 그들이 이와 같이 죄악으로 심히 기울어졌기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진노로써 갚으리라" (18절). "그들은 포악으로 이 땅을 채웠으나," 하나님을 이 땅을 그들의 적들의 강포로써 채울 것이다.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제안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1) 하나님 자신의 연민에의 호소, "내 눈이 아끼지 않을 것이다." 회개가 하나님의 눈에 숨겨질 것이다.
(2) 그들의 기도에의 호소, "그들이 큰 소리로 내 귀에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기 위하여 부르짖는다기 보다는, 여전히 그들의 죄악의 응징을 위하여 부르짖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짖어도 아무 응답이 없었던 그들 자신의 우상들 처럼, 이제 하나님도 그들의 기도에 귀머거리가 된 것처럼 침묵하실 것이다(왕상 18:26). 전에는 "그들이 부르짖기 전에" 하나님이 들었고, "그들이 말하기 전에 대답하셨지만," 지금은 "그들이 나를 간절히 찾으나, 만나지 못하리라" (잠 1:28). 하나님이 중히 여기는 것은 큰 목소리가 아니라, 정직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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