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사밧왕의 기도(역대하 20:1-13)
전장(前章)에서는 여호사밧이 자기 나라를 개혁하고 사법 기구를 확립하며 그것을 통해서 종교를 바로잡는 일을 잘 수행했다는 사실을 읽었다. 그러므로 그의 나라에는 평화와 번영이 와야 마땅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다시 곤경에 처하였다는 것을 본다. 그것도 그의 깊은 신앙심에 대한 온 보답으로서 왔던 그 찬란한 구원의 손길 직후에 이러한 곤경이 닥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직분을 충실히 행할 때에도 곤경을 당하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놀라우신 은총을 보여주시려는 기회라고 믿어도 좋다.
여기에 적인 내용에서 우리는 다음의 일들을 살펴볼 수 있다.
Ⅰ.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과 그 밖의 연합군이 거대한 힘을 지니고 여호사밧의 나라를 침입해 오고 있었다(1절). 여호사밧은 그 적군이 이미 자기의 영토를 침입해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매우 놀랐다(2절). 그들이 어떤 구실로 여호사밧과 싸우려 했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들은 소돔이 있었던 "바다 저편에서" 곧 "사해" 로부터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요단 동편에 놓여 있는 열 지파들을 지나 행진해 왔고, 그 지파들은 그들에게 길을 비켜주어 국경을 넘어가도록 해 준 것 같다. 그 지파들은 최근에 여호사밧이 자기들을 도와 길르앗 라못을 되찾게 해 준 일을 이렇게 감사할 줄도 몰랐다. 여러 나라들이 이에 연합하였다. 특히 "롯 자손" 이라 불리우는 자들과 동맹한 것이다. 그들은 모두 롯 자손을 도왔다(시 83:6-8). 이웃 나라들은 여호사밧을 두려워했다(17:10). 그러나 아마도 그가 아합과 친밀히 지내게 되자 그의 품위를 낮게 평가했던 것 같다. 또 그의 이 행동이 하나님을 분노케 했으므로 이번이야말로 그의 왕국을 점령할 좋은 기회라고 상상했을 것이다.
Ⅱ. 여호사밧은 침략자를 대적할 준비를 했다. 그가 군대를 소집했다는 언급은 없었으나, 군대를 소집하는 일은 그가 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수단을 사용하면서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탁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큰 관심사는 하나님의 은총을 얻어 하나님이 자기 편이 되시어 안전하게 방어해 주시도록 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가 근래에 "여호와의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 (19:2)하는 말을 들었었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그의 조상 다윗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로 잡고자 하시면, 우리를 인간의 손에 맡기지" 아니하신다.
1. 여호사밧 왕은 두려워했다. 양심의 가책 때문에 두려워했다. 죄를 거의 짓지 않은 사람일수록 죄의식에 대해 민감하다. 놀라움이 공포를 더욱 불러 일으켰다. 거룩한 두려움은 기도하는 일과 예비하는 일에 박차를 가해준다(히 11:7).2. "그는 직접 여호와께 간구하였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자기 편으로 만들려했다. 여호와께 은총을 얻으려고 간구하는 자들은 견고한 마음으로 진지한 뜻을 품고 열심히 그리고 담대하고 계속적으로 그에게 간구하여야 한다.
3. 그는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고 공포했다." 참회와 기도의 날을 지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고 "여호와의 도우심을 구하는" 일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비상시국에 육신의 원기 회복을 금하고 금식하는 것은, 우리가 지은 죄를 스스로 정죄하는 징표이요(우리는 우리가 먹는 빵보다도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하나님이 설사 우리에게서 빵을 빼앗아 가시더라도 정당한 것이다) 앞으로도 자기를 부정하며 근신하겠다는 표징이다. "죄에 대하여" (for) 금식하는 것은-비록 그것이 전에는 우리에게 맛있는 빵과도 같았을지라도-이제는 "그것으로부터" (from) 떠나겠다는 결심을 뜻한다. 이러한 때에는 치리자들이 백성들에게 모두 금식하며 기도할 것을 명하여 그 일을 민족적 행사로 삼아 민족적 전체가 하나님의 은총을 알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4. 백성들은 쾌히 유다의 모든 성읍으로부터 나와 성전 뜰에 모여 기도하는 일에 동참했으며(4절). 자기들의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여호와의 집의 문전걸식 자처럼 "여호와 앞에 섰다." 그들만이 아니라 그들의 가족도 위험에 처해 있으므로, 가족들도 데리고 와 여호와께 간구했던 것이다. "주여, 우리는 진정 주를 진노하게 한 백성들입니다. 파멸을 받아 마땅하나이다. 그러나 여기 천진무구한 의로운 어린이들이 있사오니, 그들은 그 폭풍 속에서 멸망당하지 않게 해주옵소서" 니느웨는 그 어린이들 때문에 용서받았다(욘 4:11). 그들이 모인 장소는 "여호와의 전" 에 있는 "새 뜰" 앞이었다. 이것은 아마도 근래에 만든 뜰(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여인들의 뜰" 이라 불리웠다고 주장한다)에 덧붙여 만든 뜰이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기도에 응답으로 주셨던 그 은혜로운 약속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모이게 된 것이다. 그 응답은 이런 것이었다.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라" (7:15).
5. 여호사밧이 직접 하나님의 회중의 대변자가 되었다. 그 일을 제사장들에게 맡기지 않았다. 분향을 피우는 것은 왕들에게 금해져 있었지만, 왕들도 기도하고 설교할 수는 있었다. 여기에 여호사밧이 이때 간구한 기도 또는 그 일부가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매우 훌륭한 기도이다.
(1) 그는 거룩한 섭리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였고,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으며 거기에서 위로를 얻었다(6절).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물론 주님밖에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 없사옵니다. 그러하오니 그것을 나타내소서 모든 나라들과 천지 만물과 심지어 주를 모르는 이방 사람의 모든 나라들까지도 주의 권세 아래 있지 아니하옵니까? 그러하오니 이방 사람들을 다스려 주시어서, 무서운 힘으로 쳐들어 오는 그들을 속박하여 주소서. 주의 손에는 아무도 능히 막을 수 없는 권세와 능력이 있지 아니하옵니까?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나타내 주시옵소서. 주의 전능하신 힘을 영광되게 하옵소서."
(2) 그는 자기들과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를 제시했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신 주는 바로 우리 열조의 하나님이며(6절), 우리의 하나님(7절) 이시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택하여 섬겨오던 하나님이 아니 오면 우리가 그 누구를 의지하며 위로를 구하겠나이까?"
(3) 그는 자기들이 지금 소유하고 있는 이 아름다운 땅에 대한 자기들의 권한을 제시했다. 이것은 논쟁할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주는 그것을 주의 친구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셨나이다. 아브라함은 주의 친구이었으며(야곱의 영예를 나타내기 위해 야고보서 2장 23절에도 "그는 하나님의 친구라 칭함을 받았다" 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그의 자손으로서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기를 바라나이다" (롬 11:28; 신 2:7, 8, 9). "주께서 이 땅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셨나이다. 여호와여 주가 주신 이 기업을 부당한 요구자들에게서 지켜 주시옵소서. 주의 기업에서 우리를 쫓아내지 마옵소서. 우리는 소작농들이며, 주님은 우리의 지주이시옵니다. 주께서 그 땅을 지키지 아니하시나이까?" (11절)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지켜주시리라는 것을 평온한 마음으로 바랄 수 있다.
(4) 그는 성소, 곧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건축한 성전을 언급하였다(8절).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상급을 받기 위해 성전 세운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것을 드린" 것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단지 자기들이 환난 중에 있으면서 이 전 앞에서 주께 부르짖을 때는 들으시고 구원해 주시리라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표징하는 것이었다(8, 9절). "여호와여, 우리가 이것을 건축한 의도는, 이러한 때에 우리의 믿음에 격려를 받으려는 것이었나이다. 여기 여호와의 이름이 있사옵고, 여기에 우리들이 있나이다.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시어 주의 이름이 영광 받으소서."
(5) 여호사밧은 그의 적들의 망은과 불의를 탄원했다. "우리는 이처럼 주의 영광을 위하나, 그들은 주의 영광을 대적하는 자들이옵니다."
[1]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가 옛날에 베풀었던 은혜를 악으로 갚으려 합니다. 주는 이스라엘이 그들을 침노하지 않기를 원하셨으며, 또한 그들을 어지럽히는 것을 허락치 않으셨"기 때문이다(신 2:5, 9, 19). "에돔과 다투지 말고 모압을 괴롭게 말며,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지 말라." 비록 그들이 너희를 괴롭히더라도 그러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우리를 침입해 오는 것을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을 악으로 갚는 자들을 물리쳐 주옵기를 기꺼이 탄원할 수가 있다.
[2] "그들은 옛적부터 지니고 있는 권리를 침해하려 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기업에서 우리를 쫓아내고, 그것을 차지하려고 오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12절)? 주께서 그들을 벌주시지 않으렵니까?" 하나님의 정의는 억울한 일을 당한 자들의 피난처이다.
(6) 그는 자기가 구원을 위해서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음을 자백했다. 그에게는 아주 잘 훈련된 큰 군대가 있었지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나이다. 주 이외에는 의지할 것도 없으며, 자랑할 것도 없으며, 주의 특별하신 임재와 축복이 없이는 그 어느 것도 기대할 수 없나이다. 우리는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우리는 주를 의지하오며 우리의 기대는 모두 주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이 환란은 절망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고, 매우 당황하여 곤경 속에 있나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절대적인 구제책이나이다. 즉 주만 바라보며, 주의 주권을 인정하고 거기에 겸손히 복종하며, 믿음과 정적으로 의지하며, 간절한 믿음으로 기도하며, 희망과 인내로 기다리는 것이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를 의탁하옵니다. 우리의 영혼이 주를 기다리나이다."
하나님의 응답(역대하 20:14-19)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여호사밧의 기도를 은혜롭게 응답해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도 즉각적인 응답이었다. "그가 아직 말하고 있는 중에 하나님은 들어주셨다." 그리하여 회중은 각자 돌아가기 전에 자기들이 승리하게 되리라는 확신을 얻었다.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이다.
1. 예언과 영은 높은 자리가 아니라 바로 "회중 한 가운데" 있었던 한 레위인에게 임했다(14절). 성령은 바람처럼 "임의로 분다." 그는 아삽의 아들로서 노래하는 자들 중의 하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직분을 영예롭게 해주셨던 것이다. 그가 이전에도 선지자였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아마 그랬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그가 더욱 존경을 받게 되었던 것 같다.여기에 예언된 일은 바로 그 다음 날 실행될 일이었으므로, 그의 예언은 곧 확증될 것이었으며 별다른 표적이 필요치 않았다.
2. 비록 그들이 당한 사태는 매우 위험스러웠지만,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으라고 격려했다(15절). "두려워 말라. 너희를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많은 두려움을 이미 겪었느니라. 그러니 이제 다시 그를 떠나게 될 두려움은 품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니라. 즉 너희의 힘과 뜻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고로 너희가 바라는대로 그가 지키시고 앞으로도 계속 함께 하실 것이다."3. 예언자는 그들에게 적의 동향을 알려 주었고, 적들을 향해 나아가 그들과 만날 수 있도록 상세한 방향을 지시했다. "내일(금식한 그 다음날) 너희는 그들을 대항하여 마주 나가라" (16, 17절). 구원을 선포하는 자가 구원받을 자들을 명령하며 시간과 장소에 알맞는 필요는 지시를 내리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4. 그는, 대적을 완전히 격파시키는 일에 있어서 그들은 유쾌한 구경꾼이 될 뿐 영광스런(하나님의) 도구들이 되지는 않을 것임을 확신시켜 주었다. "너희는 조금도 공격을 가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그 일은 다 이루어져 너희 손에 들어올 것이다. 가만히 서서 보기만 하라" (17절).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에게 말한 것과 같이(출 14:13),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그는 스스로 그의 일을 하실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하시리라. 전쟁이 그에게 속한 것이라며, 승리 역시 그의 것이 되리라." 그리스도의 군사는 자기의 영적 적을 향해 단지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평화의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의 발아래 짓밟으실" 것이며, "그를 승리자로 높이" 세워주실 것이다.
5. 여호사밧과 그의 백성들은 믿음과 경건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이것을 확신했다.
(1) 그들 여호사밧이 제일 먼저 그 다음에 모든 백성들-은 "몸을 굽히고 여호와 앞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시는 이 표징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받아 들이면서 이렇게 믿음으로 말했다. "주의 말씀대로 우리에게 행하소서."
(2) 그들은 목소리를 높여 하나님을 찬송하였다(19절). 적극적인 믿음을 지닌 자는 하나님의 증서가 현금과 마찬가지로 확실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직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그 약속을 매우 감사하게 여긴다.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시 60:6).
여호사밧의 승전(역대하 20:20-30)
앞에서 드린 기도가 응답되고 그 약속이 이루어져 적군이 전멸하고 여호사밧의 군대가 개선(그것은 승리라기보다는 개선이었다)을 거두게 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Ⅰ. 여호사밧의 군대처럼 하고서 싸움터에 나온 군대는 일찍이 없었다. 그에게는 "싸움을 예비한" 군사들이 있었으나(17:18), 여기에는 그들이 칼이나 창, 방패나 활 등으로 무장되어 있는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여호사밧은 다음과 같은 배려를 했다.
1. 그들이 믿음의 갑옷을 입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그들이 출전할 때, 그는 그들에게 무기를 준비하고 열을 맞추어 가며 명령을 준수하여 용감히 싸우라고 말하는 대신에,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여" 선지자의 입을 통해 나온 그의 말씀을 믿으라고 명하였다. 또 그렇게 하면, 그들이 "형통하고 견고히 서게 되리라" 는 것을 확신시켜 주었다(20절). 믿음이 주는 용기가 참된 용기이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때에 하나님의 권능과 긍휼과 약속을 믿는 것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견고히 서게 해주는 것은 없다. 이처럼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는 마음이 "견고하여" 온전한 화평을 누릴 수 있다. 우리 영혼의 싸움에서도, 심지어 믿음에 있어서도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형통하는 것이며 승리하는 것이다.2. 찬송하고 감사하는 자들을 선두에 세우도록 주의를 기울였다(21절). 여호사밧은 행동방침을 의논하는 회의를 소집하여,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군대 앞에서 행하게" 하라고 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의 성결-이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이시다-을 찬양하는 일밖에는 할 일이 없었다. 이전에는 그들이 성전(이것은 성경의 아름다움이다)에서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아름다운 옛 송영으로 하나님을 찬미했었는데, 지금도 그때처럼 하나님을 찬미하라는 것이었다. 그 찬양은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라는 것이다. 적군을 향해 나가는 이 기이한 모습의 출전을 통해서 여호사밧은 이런 것을 표명했다. 즉 자기는 하나님의 말씀(전쟁에 앞서 이것이 그에게 승리를 가능케 했다)을 굳게 신임하고 있다는 것을 표명하고 있으며, 자기의 병사들에게는 용기를 주면서 적을 당혹케 하려는 것이요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기의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번제와 희생 제물" 보다도 찬미가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기 때문이다.
Ⅱ. 이처럼 적의 군사를 많이 죽인 군대는 일찍이 없었다. 기드온이 미디안 군대를 칠 때처럼, 천둥이나 우박, 천사의 칼에 의해 이들을 물리친 것은 아니었으나 칼날의 충돌이나 팔의 힘 또는 소스라칠듯한 큰 소리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몰래 보내신 천사들의 복병으로 그들을 치게 하셨거나 혹은 패트릭(Patrick) 감독의 의견대로, 적군들의 복병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혼돈하게 했을 때, 서로 적으로 착각하여 "저희가 피차에 살육하였" 을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도 피한 자가 없도다."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 하나님은 이것을 행하셨던 것이다(22절).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찬미할 때 그들의 "일을" 돕는 것을 즐기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노하셨다" (시 80:4)는 사실을 읽은 적은 있으나, 그들의 "찬송에" 대해 노하셨다는 것은 읽는 적이 없다. 그들이 단지 찬송을 시작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이미 다 이루어 놓으셨다.
무슨 이유로 그들이 서로 분쟁을 하게 되었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암몬 사람과 모 압사람들은 에돔 사람과 충돌하여 그들을 죽인 후에, 그 다음에는 자기네들끼리 엉키어 서로를 죽였다(23절). 이처럼 하나님은 때때로 사악한 백성들을 이용하시어 서로를 멸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서로 갈라져 대적하도록 작정하신 자들을, 무엇이 연합시킬 수 있겠는가? 서로 분열되어 싸우는 무리들은 그 어느 편도 좋은 것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는 이 비참한 결과를 주목하라. 친구를 대적처럼 대하는 자들은 이렇게 비참하게 멸하게 된다.
Ⅲ. 여호사밧의 군대처럼 아무 일도 하지 않고서도 이렇게 손쉽게 노략물을 나누어 가진 군대는 일찍이 없었다. 그들이 이 거대한 군사들을 보러갔을 때는, 살아서 싸우려하는 자들을 발견하는 대신 모두 죽어 땅에 엎드러진 시체가 쓰레기처럼 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24절).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는 자들에게 얼마나 풍성한 자비가 베풀어지며, 하나님은 때때로 자기 백성의 기도와 기대보다도 더욱 풍성히 이루어지신다는 사실을 보라. 여호사밧과 백성들은 적에게 약탈당하지 않도록 구원해 달라고 간구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적의 노략물을 풍성히 주셨다. 싸움터에서 얻은 약탈물은 매우 훌륭했고 또 풍성했다. 그 약탈물은 한 번에 "가져갈 수 없을 만큼 많았으므로 사흘 동안에 모았다" 고 했다(25절). 이제 하나님께서 이 많은 무리의 적들로 하여금 유다를 치러 오게 한 목적이 밝히 드러났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결국에 가서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는 것을 깨달아 그들이 겸손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들이 개심한 것을 훼방하는 것 같았으나, 마침내는 그들의 개심에 대한 대가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Ⅳ. 이렇게 엄숙하고 거대한 감사제로 승리를 송축한 것도 일찍이 없었다.
1. 그들은 싸움터에 나오기 전에 진영에서 하루를 잡아 찬송하는 일로 보냈다. 물론 그들은 그 후 곧 많은 감사의 제물을 드렸다. 그러나 제4일에도 그들은 골짜기에 모여 지극한 성과 열을 다하여 하나님을 송축했다. 이 날의 일로 인하여 그곳은 브라가 골짜기 곧 "축복의" 골짜기라는 이름이 붙여졌다(26절). 이로써 이 놀라운 역사가 영원히 기억되도록 했다. 그것은 후손들에게 하나님을 의탁하도록 격려해 주기 위한 것이었다.2. 그러나 그들은 이것으로도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여 모든 사람이 여호사밧을 선두로 예루살렘까지 엄숙히 행진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이 행진하는 동안 계속 찬송을 드렸고, 기도를 통해서 얻게된 자비를 감사드리기 위해 "여호와의 전으로" 갔다(27, 28절).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은 단 하루에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가 자비하심을 얻었을 때는-우리가 간구할 때에 그러했던 것처럼-자주 찬송을 되풀이 해야 한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을 송축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또 우리가 뭔가를 얻고 있는 동안은, 찬미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며 영원히 그렇게 할 수 있기를 희망해야 한다.
나라 전체가 받은 자비는 "여호와의 전의 뜰에서" 모든 백성들이 인정하도록 해야한다(시 116:19).
Ⅴ. 이 승리처럼 좋은 성과를 거둔 승리는 또 없었다.
1. 왜냐하면 이것을 계기로, 여호사밧의 왕국은 매우 훌륭하고 막강한 나라라는 것이 다른 나라들에게 인식되었기 때문이다(29절). 하나님께서 이처럼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셨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수룬의 하나님같은 자가 없도다. 오 너 행복한 이스라엘이요!" 그것은 이웃나라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그의 백성을 해하지 아니하려는 경계심을 불러 일으켰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들에게 싸운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2. 나라 안은 매우 평안하고 조용하게 되었다(30절).
(1) 그들은 태평을 누렸다. 신상과 숲을 파괴하기를 꺼려했던 자들도 이제는 그것을 만족히 여겼다. 또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처럼 그들을 구원해 주신 이후로는 단지 하나님만이 자기들이 숭배해야 할 분이며, 그가 명하신 대로만 행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 하나님이 사방에 평강을 주셨으므로, 이웃 나라로부터 침입 받을까 하는 두려움이 없이 태평을 누렸다. 하나님이 평강을 주셨는데 누가 어지럽힐 수 있겠는가?
여호사밧의 종말(역대하 20:31-37)
여기에서 여호사밧의 역사는 끝나게 된다. 본서 역대기가 발행될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믿을 만한 이야기가 선지자 예후에 의해 기록되었으며(19:2), 이것은 그 당시에 현존해 있었다(34절). 그러므로 당시인들의 기사에 대해서는 그것을 참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다스리는 동안,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일을 행하며 그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충성되고 그의 백성들도 그렇게 하도록 돌보았다는 것이 그에 대한 총평이다. 그러나 두 가지의 한탄스러운 일이 행해졌다.
1. 즉 그 백성들은 아직도 산당에 집착을 가지도 있었다(33절). 이방신들을 세운 자들은 제거되었다(17:6). 그러나 참된 하나님을 숭배해야 할 그곳에 산당이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별로 책잡을만한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여 백성들을 불쾌히 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여호사밧은 그것을 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열조의 하나님을 섬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이 수치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여호사밧의 개혁에 호응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진심으로 응한 것이 아니었으며, 거기에 마음을 정한 것도 아니었고 열의와 결단력을 품고 훌륭한 원칙 하에 그렇게 행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 백성들의 마음이 식었을 때에는 아무리 훌륭한 치리자라도 그들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었다.2. 여호사밧 자신도 여전히 아합의 집안과 친밀히 지내고 있었다. 그것으로 해서 그는 노골적으로 비난을 받고 벌을 받게 되었지만,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자기 아들을 그 집안의 딸과 결혼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매우 악하게 행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잘 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사밧은 아하시야의 아버지에게 했던 것처럼 싸우지 않고 그와 교제하였으며, 다시스로 향하는 일종의 동인도 회사 선박을 만드는 일에 동업자가 되어 주었다(35, 36절).
여기에 "나중에 라는" 시간이 강조되어 있다. 즉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수치스럽고 치명적인 타격 없이 승리를 거두게 해 주셨을 뿐 아니라 재물을 주시어 이렇게 큰 일을 행하여 주셨는데, 그 후에 그가 직접 악한 왕에게 가서 교제했다는 것은 매우 배은망덕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처럼 남겨 주셨거늘 그가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일을 행하는 족속들과 연혼하여야겠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는 것" 이외에 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스 9:13, 14)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
(1) 예언자를 보내셨다. 그는 여호사밧의 계획이 헛되다는 것을 예언했다(37절).
(2) 그리고 폭풍을 일으켜 그들이 항해를 하기 전 항구에서 배를 파손시키셨다. 이것이 아하시야와 교제를 끊으라는 하나님의 경고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후에 아하시야가 다시 자기와 결합할 것을 요구했을 때 여호사밧은 "허락치 아니하였다" (왕상 22:49)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악을 행하는 자와 교제하고 우정을 맺는 것이 얼마나 해로운 일인가를 보라. 그 관계를 깨뜨린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함정을 빠져나오는 일보다는 그 속에 갇혀 있는 것이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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