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의 어리석은 동맹(역대하 16:1-6)
이 사건의 연대와 열왕기 상의 역사와를 어떻게 조화시키나 하는 문제는 매우 난처하다. 바아사는 아사왕 26년에 사망하였다(왕상 16:8). 그렇다면 어떻게 이 일이 아사왕 36년에(그 때에는 바아사 가문은 이미 완전히 끊어지고 오므리가 왕위에 있었다.) 있을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그것은 아사 왕국 즉 유다 왕국의 36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르호보암의 통치 1년으로부터 계산하면 아사 치세 16년에 부합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15장 19절도 그런 식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런데 아사왕 15년까지 더 이상 전쟁이 없으리라고 했던 15장 19절을 해석한다면 그 앞 구절(15장 10절)도 같은 아사의 15년에 있었는데, 어떻게 이것이 큰 일로 표현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여기에 기록된 아사의 실책이 있는 뒤(16장) 그는 전쟁을 하였다(9절)고 했다. 조세푸스(Josephus)는 그 사건을 아사왕 26년에다 두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이 역대하 16장을 가필한 자에게 실수가 있었다고 생각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인정한다면, 15장 19절의 계산은 용이하게 된다.
여기에 나오는 이 구절들은 우리가 이전에 본 것들이다(왕상 15:17 이하). 아사는 이 일에서 몇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
1. 그는 이방왕 벤하닷과 동맹을 맺으며 자신을 과대평가한 것 등은 잘못이었다(3절). 그가 자신보다는 자기와 하나님의 언약과 또 자기 조상들과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더 의지하였더라면, 자기의 동맹을 그처럼 자랑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자기 조상이 시리아 왕족과 맺은 동맹을 그렇게 뽐내지도 않았을 것이다.2. 만약 그가 이스라엘의 전체적 영예를 온당하게 존중했더라면, 훗날에는 유다 자신에게도 말썽거리가 될지도 모를 그런 외국 군대를 불러들이며 공동의 적을 자기 나라로 끌어들이기보다는, 바아사를 돌이키게 할 다른 어떤 방책을 강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3. 어떤 분노도 없이 단순한 뇌물의 공세로 인해 바아사와의 동맹을 파기한 것은 의심할 나위도 없이 벤하닷의 죄악이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벤하닷을 사주하여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은 아사의 죄악이었다. 왕이나 나라의 공신력이 그렇게 값싸게 타락되어서는 아니 된다.
4.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여호와의 전에서 금과 은을 꺼낸 것은 죄를 가중시킨 것이다(2절). 그의 세속적 정략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성전이 약탈되어야만 했던가? 하나님을 자기 편에 가담시키고 하나님을 자기의 우군으로 삼으려면 차라리 여호와의 전에 예물을 바치고 기도와 간구를 드렸어야 했을 것이다. 그랬다고 하면, 그는 이런 비용을 들여서 벤하닷을 자기 편으로 삼는 따위의 일은 할 필요가 없었다.
5. 벤하닷의 군대가 이스라엘의 성읍들에게 부당하게 입힌 온갖 피해, 즉 그들이 흘린 모든 피와 노략한 전리품에 대해 아사는 전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면 좋을뻔 하였다(4절). 아마 아사도 그들이 사태를 그렇게까지 심하게 몰고 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딴 사람들을 범죄하도록 끌어들이는 자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것이 무슨 일인지 알지도 못하며 그것이 어디에서 끝날지도 모르는 법이다. 죄악의 시작은 물이 새어들어오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계획만은 성공하였다. 벤하닷은 바아사를 강력히 견제하여 그로 하여금 라마 건축공사를 중단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고, 자기 나라의 북쪽을 방위하는 일에 열중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이로 인해 아사는 바아사의 축성 공사를 파괴할 수 있는 기회뿐만 아니라, 그 재료까지도 탈취해서 자기의 것으로 전용해 쓸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하였다.
아사왕이 최후(역대하 16:7-14)
Ⅰ. 아사가 벤하닷과 동맹함으로 인하여 여호와의 선지자를 통해 아사에게 명백하고도 진실한 질책이 가해진다. 꾸짖은 이는 선지자 하나님였는데, 그는 우리가 열왕기 상 16장 1절과 역대하 19장 2절에서 읽은 다른 한 선지자 예후의 아버지였다. 아사가 벤하닷과 맺은 조약에는 몇 가지 그릇된 점이 있음을 살폈다.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 선지자가 가장 큰 잘못이라고 책망하는 죄는, "그가 수리아 왕을 의지하고 그의 하나님이 자기 편이라고 하더라도 벤하닷을 자기 편에 확보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자기를 도와주지 못하실 것이며, 또 그러지도 않을 것이요, 하나님은 이러한 간접적인 방식으로 자기를 도울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불신 당하며, 또한 당신의 권능과 인자하심보다 사람의 팔에 더 의지하는 자들을 볼 때 분노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곧 그에게 영예를 돌리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그 영예를 딴 것에 바치게 되면, 하나님은 자신이 모욕당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신다.
그 예언자는 그것이 왕의 우행이었다고 명백히 말해주고 있다(9절). 우리에게 우리가 의지할 만세 반석이 있으면서도, 꺾어진 갈대에 기대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는 그의 우행을 납득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점을 보여 주고 있다.
1. 그는 자기 경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였다는 것(8절). 모든 사람 중에서도 아사만은 하나님을 불신할 이유가 없었으니, 그는 그토록 능력이 큰 조력자가 자기와 함께 하심을 경험하였었고 그 앞의 자기 아버지와 같이 "그가 자기 하나님 여호와께 의지하였기 때문" 에 그 구조자 즉 하나님에 의하여 위협적인 적군에게서 승리를 거두게 되지 않았던가!(13:18; 14:11) 그 예언자는 이렇게 말했다. 즉 "에티오피아인들(구스인들)과 룹 사람은 한 나라를 집어 삼킬만한 거대한 무리들이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당신이 여호와께 의지한고로, 그가 저들을 당신의 손에 붙히지 않았었는가? 그래 그런 하나님이 바아사를 대적하여 당신을 돕기에 부족하신 분이겠는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많이 체험하였지만, 그 많은 경험도 그에 대한 우리의 의혹을 더욱 가중시킨다. 하나님은 여섯 번이나 곤경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지 않으셨던가? 그런데 일곱 번째 궁지에서는 그를 의심할 이유가 있단 말인가? 우리 인간의 마음은 얼마나 간사한 것인가. 우리는 어쩔 수 없어서, 필요에 의해서만 하나님께 신뢰를 둔다. 그렇지만 일단 우리가 기대어 있을 수 있는 다른 것들이 생기는 날에는 쉽사리 그것들에게 너무 의지를 하며 우리 자신의 이해력에 너무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세상이 미소지으면서 아주 그럴듯하게 비위를 맞추는 때에라도, 하나님께만 믿음직한 신뢰를 둘 수 있다.2. 아사가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그의 섭리에 대한 지식과는 동떨어진 행동을 하였다는 것이다(9절). 아사는 "여호와의 눈이 지면의 여기 저기를 두루 감찰하시어서 그 마음이 온전히 자기께로 향하는 자들을 강하게 붙잡으신다" 는 것을(그렇게 해독할 수도 있다) 몰랐을 리 없었다.
(1) 즉 하나님은 무한하신 지혜로 이 세상을 지배하셔서 피조물들과 그 피조물들의 행동은 끊임없이 그의 감시 하에 있다. 섭리자 하나님의 눈은 빨리 보는 눈이다. 그 눈은 "달리고" 있다. 그 눈은 열심이다. 그 눈은 "여기저기 이리저리" 달린다. 그것은 멀리 보는 눈이다. "온 땅을 두루 살피며" 지구의 어느 구석이든 그의 감찰 아래 있다. 가장 암흑의 땅도 가장 먼 곳도 그의 살핌 아래 있다. 그의 눈은 그의 손을 그의 권능의 팔을 지휘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강하심을 스스로 나타내 보이시기 때문이다. 사탄이 지상의 여기저기를 걸어다니느냐? 섭리자는 이리저리로 "달리신다" 또 섭리자는 결코 길을 잃고 방황하지 않는다.
(2)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이익을 위해 세상을 다스리시며 저희의 구원에 대한 자기 사랑의 계획을 추구하여 만사를 행하시되, 모든 것을 "자기 종 야곱을 위하여 자기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해" 하신다는 것이다(사 45:4). "그리스도께서는 만물 위에 있는 교회의 머리이시다" (엡 1:22).
(3) 마음이 하나님께 대하여 정직한 자는 하나님의 지켜 주심을 확신할 수 있으며, 이 세상에서도 그것에 의존할 수 있는 온갖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저희들을 의무의 길에서 보호하실 수 있으시며(지혜와 힘은 그의 것인고로), 실제로 그는 저희를 보호하시려고 의도하신다. 이 점을 실제로 믿지 못하는 불신앙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게 되는 모든 일의 기초가 되며, 그것은 하나님께 대해 두 마음을 품는 것이다. 아사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였고, 그런 까닭으로 벤하닷에게 추파를 던졌다.
3. 그는 자기 이득에 상반된 행동을 하였다고 했다.
(1) 그는 수리와 왕의 세력이 증대해지지 못하도록 억제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였다(7절). "그의 군대가 네 손아귀에서 빠져 나갔으니",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람의 군대가 바아사와 연합했을 것이고, 그 결과 바아사의 군대와 함께 멸망당했을 것이었다.
(2)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여, 그 후부터는 평화를 기대할 수 없었고, 오히려 전쟁이 가져다 주는 끊임없는 경보를 각오하여야 했다(9절). 마음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찾을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상실하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보호권 밖으로 벗어나게 하는 자이다.
Ⅱ. 이 꾸짖음에 대해 아사는 불쾌했다. 비록 이 말이 하나님의 사자로 알려진 자에게서 나왔고 그 견책이 합당하고도 정당한 논리 위에 서 있고 구구절절이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의도된 것이라곤 하지만, 그는 자기의 우행을 지적해 말하는 이 선지자에게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그 선지자에게 격노하였다" (10절). 아사는 이런 인물인가? 이런 사람이 자기의 일생동안 그 하나님 여호와께 마음이 온전하였던 자인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실족하지 않도록 조심하도록 하라! 지혜로운 자라고 하면서도 화를 내다니! 이스라엘인이라고 하면서 예언자에게 성을 내다니! 선량한 사람이라는 그가 책망을 참지 못하고 자기의 허물에 대한 훈계를 견딜 수 없었다는 말인가! 여호와여! 하나님께서 인간을 인간들의 마음대로 하도록 방임해 두실 때 그 인간은 꼴이 무엇이 되겠습니까? 자기 자신의 행위를 우상화하는 자들은 반박에 견디지 못하며, 까다롭고 열정적 기질에 멋대로 만족하는 자들은 그 때문에 무례한 행실과 불경건에 빠지고 말 것이어서 언젠가는 하나님에게까지 정면으로 덤벼들게 될 것이다. 이러한 쓴 뿌리가 어떤 몸서리 나는 열매를 맺는가 살펴 보라.
1. 그는 노하여서 선지자를 옥에 넘겼으며, "그를" 죄인처럼 "수옥에 넣었다." 어떤 이는 "착꼬대에" 들여 보냈다고 해석하기도 하며, "감방(길고도 좁은)에" 넣었다고도 한다. 하나님의 예언자는 책망에 견디기는커녕 도리어 그것을 나쁘게 받아들이는 많은 사람들을 겪게 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2. 이렇게까지 그릇된 행동을 한 "그가" 그 위에다 "백성 중 몇몇을 학대하기" 까지 하였는데, 아마 그들은 수난중인 그 선견자를 인정하는 사람들이었거나, 아니면 그의 특수한 친지들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박해하는 데에다 자기 권력을 남용한 그는 나아가서 그 자신의 수하인들을 분쇄하기 위해 그 권력을 오용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로써 아사는 스스로를 약화시켰으며 자기의 이득을 상실하였다. 대개의 박해자들은 폭군들이었다.
Ⅲ. 그는 병이 들었다. 죽기 2년 전에 "그의 발에 병이 들었다" (12절). 아주 심한 통풍으로 큰 괴로움을 당하였다. 그가 선지자를 차꼬에 채웠으므로, 이번에는 하나님이 그를 차꼬에 채우셨다. 그러므로 그의 징벌은 그의 죄에 대한 보답이었다. "그의 병은 심히 중하였다" 고 했다. 그의 병이 절정에 이르렀다고 번역하는 자도 있고, 그의 병이 정수리에까지 올랐다고 번역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그 병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이 병은 재난이요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가" 병에 걸리자 낫기 위하여 여호와께 구하는 대신 "의사들에게 구하였다" 는 사실이 바로 그의 죄였다. 그가 의사를 이용하는 것은 의무의 하나였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을 저들에게서 기대하고 그들을 의지했다는 것이 바로 그의 죄악이었고 우행이었다. 피조물의 도움이란 것은 언제나 피조물을 지으신 조물주를 염두에 둔 것이라야 하며, 그에게 의존하는 경우에만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조물주 없이는 제 아무리 놀라운 기술을 가지고 극도의 충실성을 보유한 의사라 하더라도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이들 의사들이 이스라엘 국민들에게는 생소한 이방인들로서 일종의 요술사들이었으며, 아사가 마치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이들에게 의뢰하였다고 생각한다.
Ⅳ. 그의 죽음과 장례. 그의 장례식은 다소 성대하였던 것 같다(14절). 그들은 "그를 위해 굉장한 장례" 를 치렀다. 나는(혹자들이 생각하듯) 그 스스로가 이 호화판 장례를 명하였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으며, 또 유대인들의 방식대로가 아니라 이방인들처럼 매장되기를 바랐던 것이 그의 허영의 한 증좌였다고 생각하고픈 마음도 없다. 참으로 "그는" 마치 자기 무덤을 염려하는 자와 같이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팠다" 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 화려한 장례는 오히려 그의 말기의 실수와 약점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그를 향해 품었던 큰 존경심의 발로였던 것으로 생각하고 싶다. 그것은 그의 죽음에 즈음하여 그에게 경의를 표한 것이었다. 비록 오점을 남긴 적이 있더라도 선량한 자들의 탁월한 경건심과 유용성은 찬양하고 기념되어야 마땅하다. 그들의 잘못은 무덤 속에 매장되어 버리고 그들의 공헌은 그 무덤을 넘어서까지 기억해 주어야 한다. "선을 행하며 죄를 짓지 않는 정직한 자는 하나도 없다" 고 말하신 분이 "그러나 정직한 자를 기억함은 복된 일이라" 고 또한 말했으니, 그것이 그대로 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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