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첫 번째 견해의 입장에서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아즈’는 상당히 폭넓은 말이므로 성전 완성 한 달 전을 가리키는 것도 가능하다. (2) 6:38의 ‘팔월’은 본 장의 봉헌식까지 다 끝난 시점일 수 있다. (3) 모든 마루리가 팔월에 끝났더라도 성전의 봉헌식은 전통적인 절기, 즉 칠월의 장막절에 맞추는 것이 의의가 깊으므로 앞당겨 했을 가능성이 있다. (4) 오랜 숙원 사업이자 거국적 최대 관심사인 성전 봉헌식을 해를 달리할 정도로 미루었을 까닭이 없다(Pulpit Commentary).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성전 기구 제작(7:13-50) 기간을 고려한다면, 그래서 완전한 끝마무리 이후에 성전의 봉헌식을 치루었을 것이라고 본다면, 두 번째의 견해도 일리가 있다(Expositor’s Bible Commentary).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 성 곧 시온에서 메어 올리고자 하여. 여기서 ‘시온’(Zion)은 예루살렘 남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구릉 이름인데, 이곳에 세워진 산성을 다윗이 여부스 족속으로부터 빼앗아 ‘다윗 성’(the City of David)이라 명명하였다(삼하 5:7). 그리고 다윗은 이곳 다윗 성에다 장막을 설치하고 여호와의 언약궤(법궤)를 임시로 안치하여 놓았었다(삼하 6:1-19).
이스라엘 장로와 … 족장들을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에게로 소집하니. 광야를 유랑하던 시절의 모세 성막에서 이제 영구적 건물인 솔로몬 성전으로 법궤의 자리를 옮기는 봉헌식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뜻깊은 역사적 순간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지도자들과 백성의 대표자들이 모두 소집된 자리에서 성전 봉헌식은 공개적으로 성대히 거행되어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장로와 족장들’은 중앙 집권적 정부가 임명하는 관료와는 구별되는 사람들이다. 즉 그들은 인격이나 지혜, 무용 등의 탁월함으로 인해 혈연 및 지파 공동체 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른바 자연 발생적인 공동체내의 유지나 지도자들이다(Davies). 그런고로 이들은 성전 건축에 관해 의논할 당시에도 다윗에 의해 소집된 바 있으며(대상 28:1-3), 건축 재료를 위해 자신들의 보물들을 기꺼이 바치기도 하였다(대상 29:6-9). 이렇듯 성전은 범민족적 사역에 의해 건축되었으므로,그 봉헌식에 있어서 국민의 대표자인 이들을 소집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다윗 역시 궤를 옮겨오던 당시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을 소집하였었다(삼하 6:1).
에다님월 곧 일곱째 달. ‘에다님’은 ‘시내에 물이 흐른다’는 뜻이다(Gesenius). 유대 종교력으로 7월(오늘날 태양력의 9-10월에 해당)에는 특별히 건기가 끝나고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Robinson). 곧 이른 비가 내리는 때로서, 이때 시내가 흘러내리기 때문에 명명된 월명(月名)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특별히 ‘일곱째 달’이란 설명 어구가 첨가된 것은 이 달의 이름이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티스리’로 바뀌었기 때문이다(Keil).
절기에. 원래 ‘절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그’에 관사를 붙여 ‘헤하그’가 되면 그 자체로 ‘초막절’(장막절)을 의미하는 이름이 된다(대하 7:8, 느 8:14, 사 30:29, 겔 45:23, 25). ‘초막절’은 유대 종교력 칠월 15일부터 시작하여 칠 일간 거행되는 절기로, 연중 절기 중 가장 크고 즐거울 뿐만 아니라 제일 마지막으로 거행되는 수확의 절기였다. 그리고 본래 이 절기는 광야의 유랑 생활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출 23:16, 34:22, 레 23:33-36, 민 29:12-32, 신 16:13-16). 그런데 이 초막절에는 계약 율법이 낭독되는 순서가 있었는데, 이로 미루어 ‘초막절’은 계약 갱신의 목적을 지닌 것이기도 하였다(Rylaarsdam). 따라서 바로 그러한 절기에 율법의 돌판이 담긴 법궤를 성전에 안치하는 것은 매우 의미 깊은 일이었다. 아울러 초막적(장막절, 수장절) 행사는 광야 생활 동안 지켜 보호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면서, 동시에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사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하는 절기였다. 이런 의미에서 초막절을 맞이하여 광야 생활 이후 유리 방황하던 언약궤를 영구한 안식의 장소인 솔로몬 성전에 안치시키는 일은 매우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회막. 보통 ‘장막’ 또는 ‘성막’으로 불리던 ‘회막’은 실로와 놉을 거쳐 당시에는 기브온에 있었다(대하 1:3). 따라서 ‘언약궤’는 다윗 성으로부터, ‘회막’은 기브온 산당에서부터 각각 솔로몬 성전으로 운반되었다.
성막 안의 모든 거룩한 기구들. 이 모세 성막의 옛 기구들은 이제 그것들(놋제단, 향단, 떡상, 촛대 등)을 대신할 솔로몬 성전의 새 기구들이 제작되었으므로(7:23-50),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옮겨져 성전 창고에 보관되었을 것이다(7:51).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그것들을 메고 올라가매. 제사장들은 특별히 언약궤를 메고, 레위인들은 성막과 여타 성막의 모든 기구들을 광야 여정에서처럼 그 옮기는 방식과 절차를 따라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으로 옮겼을 것이다(Keil, 민 4:1-33).
내소. 본 절에서 ‘내소’로 번역된 히브리어 ‘데비르’는 6:16, 17에서 ‘내소’로 번역된 바로 그 단어이다.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라. 언약궤(법궤)는 금으로 만들어진 그룹들의 펼쳐진 날개 아래 안치되었다. 6:23-28 주석 참조.
그 채는 … 그 곳에 있으며. 법궤 운반용 ‘채’(pole)는 법궤의 고리에 꿰어진 상태로 있었는데(출 25:13, 15),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 광야 생활 동안 나그네로 지냈음을 상기시켜 준다(Patterson).
오늘까지. 본서(열왕기서)는 바벨론 포로 이후에 기록되었다(서론, 기록 연대). 그러므로 본서가 기록될 당시에 솔로몬 성전은 파괴되었고(B.C. 586년), 따라서 법궤에 딸린 채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오늘까지’란 말은 솔로몬 성전의 파괴 이전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저자가 본서를 기록할 때 이전의 기록물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Keil, Hammond).
호렙. 시내 산의 여러 봉우리 중 하나로 추정되는 ‘호렙 산’(Mt. Hored)은 율법이 주어지고 하나님과의 언약이 맺어진 곳으로(신 4:10-13), 통칭 ‘시내 산’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출 3:1 주석 참조.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과 동일한 것인가 아니면 구별되는 다른 것인가로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 혹자는 다른 특별한 언급이 없고, 12절은 단지 캄캄한 곳에 계신 하나님을 말하므로 본 절은 그저 캄캄한 구름을 지칭한다고 본다(Bähr). 그러나 더 많은 이들은 여기서 ‘영광’은 ‘구름’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보고, 어떤 ‘밝은 빛’, ‘맹렬한 불’ 같은 것으로 설명한다(Hammond, Keil). 여기서 우리는 그 구체적 형태는 결정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영광’은 ‘구름’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밝힐 수 있다. ‘구름’과 ‘영광’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본래 하나님의 영광은 너무 강렬해서 인간이 직접 대면할 수 없는 것이다(출 33:20).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구름은,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외피(外皮) 구실을 하는 것이다(10절).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구름이 곧 영광 자체일 수 없음도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본 절이 전해 주는 ‘짙은 구름’은 그만큼 강렬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 자체와는 구별되는 것임도 알게 해 준다. 한편, 이처럼 구약 시대에는 ‘빽빽한 구름’으로 당신의 임재의 가시적 표식을 삼으신 하나님께서는, 신약 시대에는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로써 당신의 임재를 알리사 교회의 시작을 기념하셨다(행 2:2).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근거로 다음 두 가지가 제시된다. (1) 광야를 유랑하던 시절의 성막이 갖는 이동성과 임시성에 대해 정착과 안정이 있는 성전의 영구성. (2) 다윗과 그의 후손에게 영구한 왕위를 세워 주시겠다는 삼하 7:14-16의 약속.
온 회중을 위하여 축복하니. 축복은 제사장만의 고유 권한이라는 데 근거해서(민 6:22-27), 혹자는 본 절의 솔로몬의 축복을 “권한은 없지만 그저 축하로서 했을 뿐”이라고 해석했고(Hammond), 혹자는 “제사장의 축도를 대신 수행한 것”이라고 각기 해석했다(Stanley). 그러나 (1) ‘축복하다’에 해당되는 ‘바라크’의 용법은 실로 다양한데, 때로는 백성이 왕을 축복하는 경우에도 사용되었고(66절), (2) 축도가 아닌 광범위한 의미의 ‘축복’은 제사장에게만 국한된 것이 결코 아니었다(창 14:19, 신 7:12-16). 결국 문맥으로 보아 본 절의 축복은 하나님의 축복을 확신한 공동체의 우두머리가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경축사와도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손으로. 성경에서 ‘손’(히, 야드)이란 말의 사용 용법이 여러 가지이므로, 그 의미 또한 다양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과 같은 형태로 사용되게 되면 보통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 또는 능력을 의미하게 된다. 좀 더 살펴보면 ‘손’은 (1)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책임 및 권한을 나타내며, (2) 어떤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실질적 능력 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로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말씀하신 바를 이루실 능력도 가지고 계신 분이심을 솔로몬은 고백하는 것이다.
이루셨도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말씀하신 대로 (1) 아들 솔로몬을 세워 다윗의 위(位)에 앉도록 하사 나라를 견고케 하셨다(삼하 7:12). (2) 또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솔로몬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집, 곧 성전을 건축케 하셨다(삼하 7:13).
내 이름을 둘 만한 집. 구약 사상에서 ‘이름’(히, 쉠)은 단순한 호칭이나 명찰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이름은 그 이름의 소유자가 갖고 있는 총체적이고도 본질적인 성품을 나타낸다(창 27:36, 32:28, 삼상 25:25 등). 즉 이름은 바로 그 이름을 가진 존재 그 자체이다. “이름이 있는 곳에 그 이름의 주인공이 있다”(Schmidt). 그러므로 성전에 하나님의 이름을 둔다는 것은 곧 하나님 자신의 임재를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존재를 그 곳에 계시하시고, 또한 당신의 권위와 영광을 그 곳에 두시겠다는 의미이다(신 12:5).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에 관심을 갖고 거룩히 지키시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신다(겔 20:9, 39:7). 결국 이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30절)이 땅의 백성들 사이에 있을 수 있도록 하는 통로요 매개체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둔 집, 성전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 사이에 임재하신 처소로서 하나님께 ‘허락받은’ 곳이 된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름을 두는’ 주체는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전이든 성물이든 그 자체가 하나님을 속박해 둘 수 없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후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신앙에서 돌아섰을 때 성전은 무의미한 건물로 전락되었고 결국 파괴되고 말았다(사 1:10-17).
아무 성읍도 택하지 아니하고. 본 절과 병행 구절인 대하 6:5, 6을 참고하면, 이 말은 ‘다른 지파의 어느 성읍도 뽑히지 않고 오직 유다 지파의 예루살렘이 뽑혔다’는 의미를 보충해야 뜻이 분명해진다.
다만 다윗을 택하여. 본 절은 수많은 나라들 중 유독 이스라엘을 택하사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고(출 19:6), 또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 유독 다윗을 택하사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상기시키고 있다(시 78:70). 한편 본 절을 통해 솔로몬은 (1) 자신을 비롯한 모든 백성들이 자고함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였으며 (2) 하나님의 크신 위엄과 주권 앞에 전적으로 순종할 것을 다짐하였고 (3)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하고자 하였다.
네 아들 그가 … 성전을 건축하리라. 여호와를 향한 다윗의 열심은 성전 건축을 위한 소원으로 불타올랐으며, 이를 구체화시키기 위해 다윗은 건축 자재를 마련하는 등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였다(대상 22:2-16).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다윗의 마음을 기쁘게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성전 양식까지 자세히 계시해 주셨다. 그렇지만 정작 성전 건축 사업만큼은 솔로몬에게 위임하셨다(대상 28:12-20). 여기서 하나님의 주권 개념이 여실히 드러났으며, 그러한 하나님의 뜻 앞에 흔쾌히 순복한 다윗의 신앙 자세 또한 후세의 귀감이 될 만한 것이었다.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이름’은 그것에 의해 호칭되는 사물이나 사람의 ‘존재’ 그 자체를 상징한다.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은 곧 그분의 존재 자체를 의미한다(16절). 이런 점에서 성전은 하나님의 지상 임재의 상징적이고 가시적인 처소인 것이다.
세우신. 여기서 ‘세우다’는 히브리어 ‘쿰’이 아니라 ‘카라트’이다. 그런데 ‘카라트’는 언약과 관련된 문맥에서는 ‘쿰’과는 달리 ‘언약을 체결하다’ 또는 ‘언약을 개시(開始)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20절, 5:12).
여호와의 언약을 넣은 궤. 즉 ‘법궤’ 또는 ‘증거궤’로도 불리는 ‘언약궤’를 가리키는데, 이 언약궤 속에는 여호와 언약의 핵심이자 요체인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이 들어 있었다(출 25:16, 40:20, 신 10:5). 그리고 이 언약궤는 성전의 가장 깊숙한 내소, 곧 ‘지성소’에 안치되어 있었다(6절).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성경 용례상 ‘하늘 또는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편다’는 말 자체가 곧 ‘기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종종 사용된다(Hammond, 출 9:29, 사 1:15). 그런데 히브리어 ‘파라스’, 즉 손을 펴거나 뻗치는 행위는 보통 ‘간청’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동작을 하늘을 향하여 하게 되면 곧 하나님께 간구하는 의미의 자세가 되는 것이다. 아무튼 여기서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자로서 공적 예배를 인도하는 목자 또는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하 전개되는 솔로몬의 기도는 성경에서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공중 기도의 하나이다.
온 마음으로 … 행하는 종들에게 … 은혜를 베푸시나이다. 신 7:9과 동일한 의미를 함축한 구절로서, 이는 솔로몬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진솔한 신앙 고백인 동시에 오늘날 성도들에게 던지는 신앙적 메시지이기도 하다. 각박하기 이를 데 없는 생활 전선(戰線)에서 시달리는 자들에게 있어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란 불가능해 보일 때가 많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에게는 당신의 베푸시는 은혜와 도우시는 권능이 반드시 함께 할 것이라고 약속되었다(시 27:9, 125:1). 또한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며 우리를 눈동자처럼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시 17:8, 마 10:30, 히 13:8). 따라서 성도들은 목전의 환난에 좌우되지 아니하고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 뜻대로 살아감으로써, 성숙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광스러운 면모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빌 1:20).
오늘날과 같으니이다. 히브리어 ‘카욤 하제’(as it is today)는 3:6에서와 같이 눈 앞에 전개된 일들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 성취임을 인식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감사를 담고 있는 표현이다.
자기 길을 삼가서. ‘삼가다’(히, 샤마르)는 ‘지키다, 주의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 말은 율법을 면밀히 주의하여 지키라는 의미로 자주 사용된다(출 20:6, 레 18:26, 신 26:16, 겔 11:20). 특히 우리말로 ‘삼가다’는 ‘조심하다’ 또는 ‘경계하다’라는 소극적인 뜻에 그치는데 반해, 히브리어의 ‘샤마르’는 보다 적극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즉 ‘샤마르’의 기본 개념은 ‘ … 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다’이다. 따라서 ‘샤마르’는 단순한 절제나 경계가 아닌 애정이 담긴 실천을 내포하고 있다. 즉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면밀히 계획, 실천하는 행동적 의미가 짙은 말이다.
네가 내 앞에서 행한 것 같이. 다윗은 향후 이스라엘 열왕들의 행적을 판단하는 표준과 척도로서 제시된다(9:4, 15:11 등). 그런데 다윗이 그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인물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그가 ‘하나님 앞에서 행하였다’는 말에 요약되어 있다.
내 앞에서 행하기만 하면. 조건절로 되어 있음에 주의하라.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곧 인격적 관계임을 강조해 준다. 사실 성전이든 언약궤든, 혹은 성례전이든 그 안에서 인간과 만나시는 분은 산 인격체이신 하나님이다. 언약에서도 마찬가지로 언약을 매개로 인간과 대면하시고 만나시는 하나님은 그 언약의 주인으로서이며 결코 언약에 속박된 상태가 아니다. 그러므로 솔로몬 및 다윗 왕조에 주어진 언약도 인격적 관계가 그러하듯 계약 당사자의 성실이 바탕이 되어야만 했다.
이제 … 그 하신 말씀을 지키시옵소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바대로 솔로몬이 다윗의 왕위를 물려받았고, 또한 위대한 성전 건축 사업도 완료되었다(삼하 7:12, 13). 이제 남은 것은 다윗 가계를 통해 영원토록 왕위에 오를 자가 끊어지지 않는 것 뿐이었다. 솔로몬은 바로 이러한 약속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약속에는 ‘만일 네 자손이 그 길을 삼가 …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이라는 조건이 부가되어 있었다(2:4). 하지만 말년의 솔로몬은 하나님의 율법을 거역하고 말았다(11:6). 그 결과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열되었고, 북 왕국은 다윗의 혈통과 무관한 자에 의해 통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은 유다 왕국 조차도 누적된 범죄로 말미암아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는 운명에 처해졌다. 그러나 이렇듯 표면상으로는 하나님의 왕위 약속이 깨어졌다 하겠으나, 영원한 왕국에 관한 하나님의 숨겨진 경륜은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신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다(눅 1:27). 요컨대 그러한 궁극적이고도 최종적인 약속 성취는, 첫째로 당신의 영광과 이름을 위해서이며, 둘째로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넘치는 사랑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시 23:3, 요 13:1).
하늘들의 하늘. ‘하늘들의 하늘’로 번역된 히브리어 ‘쉐메 핫샤마임’은 두 가지로 이해 가능하다. 즉 (1) 그것은 히브리어가 최상급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평범한 표현일 뿐이라는 견해(Gaster). 이 경우는 ‘하늘 끝’ 또는 ‘아주 높은 하늘’(the highest heaven)이라는 뜻이 된다. (2) 그것은 히브리인들이 갖고 있는 일종의 우주관, 즉 하늘이 층층으로 되어 있다는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견해(Schottgen). 이 경우 ‘하늘들의 하늘’은 그렇게 ‘겹쳐진 하늘 중 최상층’(heaven of heavens)을 의미하게 된다. 참고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에서 최고의 신 아누(Anu)는 여러 층 중 최상층의 하늘에 거주했다고 한다(Gaster). 어쨌든 어느 쪽의 견해를 취하든 문맥상 본 절의 “땅과 하늘들의 하늘”은 천지, 곧 우주 전체를 의미하는 말이다. 즉 우주 전체로도 담아 낼 수 없을 하나님의 무한성을 수사적(修辭的)으로 표현한 말이다(렘 23:24).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우주 전체로도 무한하신 하나님의 처소로서는 부족하거늘 하물며 일개 건물에 지나지 않는 조그마한 성전이 감히 하나님의 처소일 수 있겠느냐는 겸비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성전이 하나님의 처소일 수 있는 것은 성전 자체의 어떤 가치나 능력이 하나님을 메어 둘 수 있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무한하신 분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직 은총으로 성전을 인간들 사이에 임재하시는 당신의 처소로 삼으신 것이다. 이러한 역동적인 사실을 망각하게 되면 심각한 오류를 낳게 된다. 실제로 후대의 타락한 이스라엘은 그 역사에서 자주 불순종과 불의에 빠지면서도, 무조건 성전을 마치 하나님이 묶여있는 장소처럼 생각하는 잘못된 신 개념을 가졌다(렘 7:4, 미 3:11). 결국 본 절에 내포된 의미는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된다. (1) 하나님의 편재성(偏在性). 즉 하나님께서는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대주재(大主宰)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건축된 성전에 국한되실 수 없다(행 17:24). (2) 당신의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땅 위에 당신의 임재를 상징하는 처소를 마련토록 하셨다는 사실 자체 속에 하나님의 무한한 비하와 크신 긍휼이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비하와 사랑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죄인의 모습으로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절정에 달했다(롬 8:3, 히 1:3).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 ‘부르짖음’은 ‘간구’와 마찬가지로 ‘하난’에서 온 말이다. 또한 ‘비는’이란 말도 ‘기도’와 마찬가지로 ‘팔랄’에서 온 말이다. 그런데 ‘하난’은 자비와 동정을 필요로 하는 어떤 슬픈 처지를 전제(前提)한다. 여하튼 이러한 어휘가 구사된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오직 하나님만 의뢰코자 하는 간절하고도 절박한 심정이 토로되었기 때문이다.
주의 눈이 주야로 …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성전에서, 그리고 성전을 향하여 기도를 드리는 근거가 제시되고 있다. 즉 그것은 성전 자체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주의 눈이 주야로” 성전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전은 그 곳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그 곳을 향한 인간의 기도를 매개(媒介)해 주는 장소이다(단 6:10, 시 5:7, 욘 2:4). 이러한 성전의 핵심적 특성 및 기능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속에 잘 요약되어 있다(사 56:7, 마 21:13). 한편 ‘주의 눈’에 대해선 9:3 주석을 참조하라.
주께서 계신 곳 하늘. 비록 본문이 하나님의 임재 처소로서 성전을 봉헌하는 장면이지만, 하나님의 진정한 거처는 ‘하늘’이라고 거듭 밝힘으로써 성전을 상대화시키고 있다(34, 36, 39, 43, 45, 49절). 한편, 본 절의 ‘하늘’은 우주 내의 어느 한 장소를 가리킨다기보다 성전을 포함하여 어떠한 제한된 장소라도 하나님의 참된 거처일 수 없다는 점을 선포하는 데 강조점이 있다. 즉 본 절은 솔로몬 성전이 하나님의 진정한 처소일 수는 없으며, 다만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의하여 당신의 백성을 만나실 장소로서 땅 위에 그 곳을 지정하셨을 뿐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말 속에는 하나님의 전지 전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곧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모든 인간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감찰하신다는 것이다(39절). 이렇듯 치밀하신 주의 통찰은 경건한 자의 간구에는 보호하시는 은총으로, 그리고 패역한 자에게는 진노의 심판으로 작용하게 된다(시 91:4, 렘 17:10).
맹세시킴을 받고. 어떤 사건의 재판에 있어 도저히 판결을 내릴 수 없거나, 증인들을 내세울 수 없게 되면 최종적으로 다툼 또는 판결을 끝맺기 위해(히 6:16) 맹세를 시켰다(Roland, 출 22:11). 예를 들면, 분실된 물건이 우연히 어느 사람의 수중에 있음이 발견되었을 때 그는 그 물건을 고의로 훔친 게 아니라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그 맹세를 인정해야만 했다. 이것은 오직 맹세의 대상자가 되시는 진리의 하나님께서 판결할 문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주의 제단. 성전 안뜰에 있는 ‘번제단’을 의미한다. 일반 백성들이 만일 성전에서 맹세할 경우에, 그들은 소위 ‘평민의 제단’인 번제단 앞에서 맹세하였다(마 5:23, 24).
악한 자 … 의로운 자 … 갚으시옵소서. 하나님은 인간의 선악에 대하여 보상과 처벌로 정당히 보응하신다는 사상은 성경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응사상은 계약 관계에서 아예 공식화(公式化)되어 있다(Towner). 즉 하나님 말씀에의 순종 여하에 따라 저주와 축복의 보응이 임하리라는 것이다(신 28:1, 2). 그런데 이러한 보응은 곧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에 근거하여 신정 국가의 공의를 올바로 세우고자 하는 데 목표가 있다. 솔로몬의 특별 간구 내용 중 무엇보다 먼저 등장하는 내용이 백성들의 맹세의 신실함과 공의로운 보응 사상이다. 이처럼 선민의 공동체 내에서 공의를 이루는 문제는 하나님 앞에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레 19:15, 신 16:18, 33:21, 시 35:24, 사 61:8 등).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선민 이스라엘이 대적에게 패배하는 것은 곧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 것이었다(레 26:17, 39-42, 신 28:25, 48).
주께로 돌아와서 … 이 성전에서 주께 기도하며 간구하거든. 본 절은 적에게 패배하여 포로로 끌려간 경우를 말하고 있다. 신정(神政) 국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전쟁의 패배는 곧 하나님의 징계요, 선민(選民)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어 자기 땅에서 추방당하는 것은 곧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했다(Greenberg, 호 9:3-5). 따라서 이스라엘이 다시 자기 땅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징계의 해제요 하나님께로의 귀환이다. 혹자는 본 절이 단순히 회개 기도를 의미하고, 포로의 경우는 다음 절(34절)에서 나온다고 보나(Hammond), 수긍할 수 없는 견해이다. 왜냐하면 (1) 문맥상 33절과 34절은 하나의 주제로 묶여지며, (2) 본 절의 “돌아와서”(히, 슈브)가 일단 추방을 전제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한편, “주의 눈이 주야로 보고 있는”(29절) 성전으로 돌아오는 것은 곧 주께로 돌아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기도하며 간구하는 것’은 자복하는 겸허한 심령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사실 간절함이 없는 기도는 진실성이 결여되어 외식으로 흐르기 쉽다(눅 18:1-8).
조상들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땅은 단순히 군사적 점령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기업이다(Williams). 따라서 그 땅에서 추방됨은 이스라엘의 위약(違約)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의 결과이다. 이러므로 조상들에게 선물로 주신 땅, 곧 그들의 기업으로 돌아오는 것은 다시 계약에의 충실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늘이 닫히고 … 주께 벌을 받을 때에. 가뭄은 이스라엘의 자연 환경에서는 국가적 재난이었다(17:7, 18:1). 왜냐하면 팔레스타인은 샘이나 강이 흔치 않아서 가뭄이 한번 들면 아예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 같이 되기 때문이다(Scott). 이처럼 이스라엘의 농작물은 때를 따라 이른비(가을비)와 늦은비(봄비)가 오느냐 오지 않느냐에 절대적으로 달려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가나안 족속이 폭풍과 농작물의 신(神)으로 섬기는 바알(Baal)을 숭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의 길에 빠질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 문을 닫고 오히려 비를 내려주지 않음으로 해서, 모든 축복의 제공자는 오직 하나님 뿐이심을 보여 주시고자 했다. 그런고로 당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뭄은 그저 자연적 재난이 아니라 그러한 재난을 통해 범죄한 백성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채찍이었다.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어떤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바로 그 이름의 권위에 참여하여 그 대리자로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Abba). 따라서 어떤 이름을 찬양한다는 것은 바로 그 이름을 가진 이의 권위 및 주권을 찬양한다는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징벌을 당한 이스라엘이 그 곤궁한 처지에서 주의 이름을 찬양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주권 및 그 보호하에 들어가는 것이요, 모든 우상 숭배에서 떠나 여호와 유일 신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죄에서 떠나거든. ‘떠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슈브’는 회개에 있어서 인간편의 행동들을 가장 포괄적으로 요약해 주는 말이다. 회개의 행동은 (1) 죄에서 돌아서서 (2) 선을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슈브’에는 바로 이 두 가지 소극적, 적극적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떠나다’는 한글 표현이 갖는 소극적 의미에다가, 보다 적극적으로 선을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한편 ‘슈브’는 포로 귀환을 의미하는 동사로도 자주 활용된다. 즉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는 것과 죄의 상태에서 돌이키는 것은 동일한 영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33, 34절).
전염병. ‘전염병’(히, 데베르)은 ‘전염병’ 또는 ‘악성 유행병’을 의미한다. 특히 이 단어는 ‘기근’이나 ‘칼’ 같은 다른 단어와 항상 나란히 등장한다(렘 14:12, 21:7, 9, 24:10 등). 그리고 ‘전염병’도 하나님이 주시는 징벌로 이해되었다(삼하 24:10-17).
메뚜기나 황충. ‘메뚜기’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르베’는 문자적으로 ‘무리, 떼’를 의미한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그대로 ‘메뚜기 떼’를 의미한다(삿 6:5, 7:12, 욥 39:20, 렘 46:23). 한편 ‘황충’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실’은 ‘게걸스럽게 먹다’에서 유래된 말이다(Hammond). 이 곤충은 엄청난 농작물 피해를 가져왔기 때문에 그 같은 이름을 갖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성경에서 그렇게 엄청난 재난을 가져 올 수 있는 곤충은 메뚜기이므로 ‘황충’은 곧 ‘메뚜기’이거나(McCullough), 아니면 적어도 메뚜기의 일종으로 간주되고 있다(Gesenius). 그렇다면 본 절의 ‘메뚜기나 황충’은 단지 하나의 대상, 즉 메뚜기 떼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신 28:38).
적국이 와서 성읍을 에워싸거나. 솔로몬 당시 애굽은 쇠퇴일로에 있었고 앗수르는 아직 미약한 세력에 불과했으므로, 당시의 강대국 이스라엘은 외세의 침략에 대해 별로 염려할 바 없었다. 그러나 솔로몬은 개인과 민족의 흥망 성쇠를 좌우하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철저히 믿고 있었으므로, 후대에 발생할지도 모를 재앙을 예견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예견은 결코 솔로몬의 기우(杞憂)에서 나온 것이 아님이 후일 역사적 사실로서 입증되었다(왕하 17:6, 25:8).
모든 행위대로 … 갚으시옵소서. 32절 주석 참조.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성경에서 ‘마음’(히, 레바브)은 정서 활동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전 인격적 핵심을 가리키는 말이다(Dentan). 이 핵(核)으로부터 정서, 지식, 의지의 활동이 일어나고 또한 외적 활동까지도 포괄하게 된다(18절). 그런데 이 인간의 마음은 오직 그 마음을 지으신 하나님만이 온전히 분별하시고 그에 따라 판결을 내리실 수 있다(렘 17:9, 10).
이스라엘에 속하지 아니한 자 … 이방인이라도. 본 절의 ‘이방인’(히, 노크리)은 이스라엘에 귀환한 자들을 일컫는 체류자(히, 게르)와는 구별된다(민 15:14 이하). 다시 말해 ‘노크리’는 이스라엘에 일시 방문한 상인이나 여행자들이다(Hamlin). 예를 들면 스바 여왕이나 나아만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10:1-13, 왕하 5:1-19). 또한 정치적 목적으로 입국하는 각국의 사절들도 이에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본 절이 이방인들을 향해 개방성을 띤다는 점에서 꼭 이스라엘에 내방한 자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즉 ‘세상 만민’을 향한 개방성이다(43절). 이처럼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도 포함하는 하나님의 전 우주적 통치, 곧 말씀(복음)의 전세계주의적 성격은 비록 희미하나마 구약 시대에도 면면이 흐르고 있는 주요 사상 중 하나이다(창 22:18, 출 22:21, 민 15:14-16, 시 22:27, 28, 사 49:6 등). 그러나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사상이 보다 뚜렷히 나타난다(롬 3:29, 고전 8:6).
와서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이러한 이방인들의 기도는 아마 어떤 경우에는 단순히 외교 사절로서 그 나라의 민족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정도일 수도 있다(Montgomery). 혹은 단지 성전의 수려함과 명성 때문에 그 외양이나 잠시 보고자 방문했을 수도 있다(대상 22:5). 그러나 나아만의 경우처럼(왕하 5장) 좀더 절실하게 찾아 오는 이방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땅의 만민 …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 이방인의 기도에 응답해달라고 요청하는 이유가 밝혀진다. 즉 주의 이름을 알고 이스라엘의 신앙처럼 주를 경외하게 해달라는 것이다(왕하 5:15-19). 이처럼 이스라엘의 신앙은 일찍부터 세상 만민들에게 개방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바울이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열려진 구원을 말함으로써 편협한 유대주의에 반기를 들었을 때, 그것은 구약에 반대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약을 옳게 증언하는 것이었다(롬 10:12, 13). 한편 성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다는 사상은 주의 이름을 성전에 두신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16, 29절). 여기서 강조점은 ‘주의 이름’에 있는 것이며, ‘성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장소의 신학’이 아닌 ‘이름의 신학’을 내세움으로써, 솔로몬은 하나님이 특정 장소에 제한당하는 분이 결코 아님을 밝히 드러내려 했다(Anderson).
싸우고자 하여 주께서 보내신 길로 나갈 때.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전쟁은 언제나 하나님께 속한 일이었다(삼상 17:47). 그러므로 공격이든 방어이든 모든 전쟁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일로 믿었다(Toombs). 그래서 본 절과 같이 전쟁터에 종군(從軍)하는 것을 “주께서 보내신 길”과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견지에서 전쟁에 임하는 병사들은 자신들을 하나님께 봉헌된 전사로 생각하였다(삿 5:2, 사 13:3).
성전이 있는 쪽을 향하여. 본 절과 48절은 이제까지의 경우들 보다는 훨씬 멀리 떨어진 장소를 시사하다. 즉 전쟁터와 적국에 포로로 잡혀간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단지 그들은 성전이 있는 ‘방향’ 쪽으로만 향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나마 잊지 않고 방향만이라도 성전 쪽을 향하려는 간절함은 곧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히 은총과 도움을 구하고자 하는 내적 열정 그 자체이다(Bähr). 그런고로 솔로몬은 그들이 그처럼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멸시치 않을 것으로 확신하고,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다. 그런데 이처럼 성전과 예루살렘을 향하여 바라보고 기도하는 행위는 포로기 이후에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나의 관습처럼 굳어졌다(Bähr, 단 6:11).
범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이것은 솔로몬이 일곱 번째 간구(46-51)와 같은 내용의 기도를 하는 까닭을 설명하는 말이다. 즉 범죄하지 않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결국 그러한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적국에 포로로 잡혀가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는 전제 하에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레 26:27-39, 신 28:64-68). 이것은 솔로몬이 인간의 전적 부패(total depravity)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우리는 솔로몬의 지혜가 단순히 국정(國政) 사무나 자연 현상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의 본질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욥 15:16, 렘 17:9, 롬 3:10-18).
넘기시매. ‘넘기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탄’에는 ‘내버려두다’ 또는 ‘허락하다’는 뜻이 들어 있다. 좀더 사법적인 의미로는 ‘대가를 지불토록 어떤 것을 넘겨준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창 23:9, 신 15:10 등). 그러므로 본 절 속에는 (1) 포로가 되는 것은 범죄의 대가를 치루는 것이며, (2) 적에게 패배하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하에, 즉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가능한 일이라는 믿음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범죄하여 반역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범죄’(히, 하타)는 ‘목표에서 빗나감’을 의미하고, ‘반역’(히, 아와)은 ‘그릇됨, 어그러지고 구부러짐’을 의미한다. 그리고 ‘악을 짓다’(히, 라샤)는 ‘방종에 빠져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절은 한 번 빗나감으로써 점점 심각해지는 죄의 양상을 점증적으로 보여 준다. 한편 솔로몬의 이 말은 후일 바벨론 포로 시절에 경건한 유대인들에 의해 죄를 깊이 통회할 때 그대로 사용되었다(단 9:5, 시 106:6).
조상들에게 주신 땅. 34절 주석 참조.
성전 있는 쪽을 향하여. 44절 주석 참조. 한편 본 절에서 우리는 기도할 때의 방향이 땅→성→성전으로 점점 좁아져 가고 있음을 보게 되는데, 이는 될 수 있는 한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모해야 된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기도와 간구. 28절 주석 참조.
그들의 일을 돌아보시오며. 이에 해당하는 기본 동사 ‘미쉬파트’는 ‘판단하다’란 뜻이다. 곧 하나님께서 인간의 간구에 대해 공의와 긍휼로 판단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회개의 진실성 여부에 따라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다. 45절 주석 참조.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불쌍히 여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하밈’은 ‘부드러운 자비심’(tender mercy)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본 절에서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적들로 하여금 그러한 마음이 일어나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여기서 솔로몬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에 국한된 분으로서가 아니라, 이방 통치자의 마음까지도 당신의 뜻대로 지배하실 수 있는 분으로서 신앙하고 있다(시 106:44-46, 스 1:1). 그런데 그렇게 적들의 동정심이 일어나도록 하는 보다 근본적인 동인(動因)은 바로 하나님의 동정심이다. 즉 심판을 받아 마땅하지만 회개하는 이스라엘에게 다시 자비와 용서로 대하시는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불쌍히 여김’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이다. 또 한편 ‘라하밈’은 ‘태’ 또는 ‘자궁’으로 번역되는 ‘레헴’과 깊은 관련이 있다(3:26). 이는 마치 젖먹이 자식에 대한 어미의 마음처럼 이스라엘을 향해 지극한 애정과 안타까움을 갖는 상태를 가리킨다(시 106:44-46).
주의 소유. ‘소유’(히, 나할라)은 ‘소유’ 또는 ‘상속 재산’이란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영구적인 소유’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주의 ‘나할라’라는 말은 그들이 결코 버림받을 수 없는 존재, 곧 하나님의 특별하신 소유로 주의 보호와 아낌 및 관심의 대상이라는 의미이다. 출 19:5 주석 참조.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러한 믿음에 근거하여 비록 불순종으로 징벌을 받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회개하면 마침내 원래의 위치로 회복될 것이라는 희망을 언제나 가질 수 있었다(출 34:9, 신 4:30, 31, 9:26, 시 33:12). 그런데 이처럼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주의 ‘나할라’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근거는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계약’이었다(출 19:5, 6, 렘 11:4). 따라서 이제까지 솔로몬의 모든 기도는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상대자로 삼으시고 언약을 맺은 사실에 근거하여 드려졌다. 솔로몬은 결코 이스라엘 자신의 미덕이나 공로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호소할 수 없었다(신 7:6-11).
눈을 들어. ‘눈’(히, 아인)은 성경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으나(시 119:18, 잠 6:17, 겔 6:9, 마 6:22), ‘하나님이 눈을 든다’는 표현은 인간을 살피시고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을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이다(시 33:18, 34:15). 반면에 ‘하나님이 눈을 가린다’는 표현은 인간의 기도와 요청을 무시함을 의미한다(사 1:15).
종의 간구함 … 들으시옵소서. 기도를 시작할 때 사용된 문구(28, 29절)가 지금 기도를 마무리 짓는 부분에 다시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들어달라는 간청으로 앞뒤가 구성된 솔로몬의 기도는 51, 53절에서 보듯 이스라엘이 주의 소유라는 점을 이유로 들어 응답을 요청한 것이다.
세상 만민 가운데에서 그들을 구별하여. 이 말은 출 19:6의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에 상응한다. 한편 ‘구별하다’(히, 바달)란 말 속에는 ‘분리되다, 차이를 만들다’는 뜻이 있는데, 이 말은 이스라엘이 이방 여러 나라와 특별히 구별되었다는 문맥에서 자주 등장한다(스 6:21, 느 9:2, 10:28). 그런데 ‘거룩’(히, 콰도쉬)에도 이러한 ‘구별’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리고 이러한 거룩 및 구별에는 단순히 속된 것에서 분리되는 것 외에도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봉사하는 면이 들어 있다(Eichrodt). 출 19:6의 ‘제사장 나라’는 바로 그러한 구별의 적극적인 면을 알려 주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은 타민족과는 분리된 선민(選民)인 바 이는 이스라엘로 열방 중 제사장 나라로 봉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출 19:6 주석 참조).
주의 기업. 51절 주석 참조.
손을 펴서 하늘을 향하여. 22절 주석 참조.
기도와 간구. 28절 주석 참조.
아뢰기를. ‘아뢰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팔랄’은 ‘호소하다, 기도하다’는 뜻을 갖고 있는데, 여기서 ‘테필라’(기도)란 말이 파생되어 나왔다(28절). 그런데 ‘팔랄’은 ‘중개자로서 행동하다’는 뜻도 있다(Thomas). 그렇다면 본 장의 솔로몬의 기도는 그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솔로몬의 기도는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일종의 중개자로서 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축복하며 이르되. 14절 주석 참조.
그가 … 태평을 주셨으니. 여기서 ‘태평’(히, 메누하)은 ‘안식’이란 뜻인데, 이 안식에의 약속은 신명기 12:9, 10에서 주어진 것이다. 비록 수 21:44에서 이 안식이 성취되었지만,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아직 많은 가나안 족속들이 도처에 있었고, 영구한 평화의 상징인 성전도 건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 시대의 정복을 거쳐 마침내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 성전이 건축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안식(태평)은 완전히 성취되었다. 솔로몬은 지금 이러한 사실을 감격스럽게 신앙 고백하고 있다.
말씀하신 대로. 이 역시 히브리어 ‘다바르’를 번역한 것이다. 24절 주석 참조.
모세를 통하여. ‘통하여’로 번역된 히브리어 ‘베야드’는 수단을 나타내는 전치사 ‘베’와 ‘손’이라는 뜻을 가진 ‘야드’의 결합이다. 따라서 이는 ‘모세의 손을 빌어’ 또는 ‘모세를 통해’라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다. 공동번역은 “모세를 시켜”로 번역하였다. 한편, 이처럼 솔로몬이 말하는 근거 구절로 우리는 레 26:3-13과 신 28:1-14의 내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루어지지 아니함이 없도다. 여기서 ‘이루어지지 아니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팔’은 ‘떨어지다, 내던져지다’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는 죽음이나 멸망 또는 방치 등을 지칭하는 데 쓰인다(삿 20:44, 애 1:7, 대상 20:8). 이처럼 전능자요 선지자인 하나님의 말씀 또는 약속은 호리라도 헛되이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
떠나지 마시오며. ‘떠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자브’는 ‘버리다, 포기하다’는 뜻도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소리치신 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에서 ‘샤바크’(사박)란 말이 바로 이 ‘아자브’에 해당하는 아람어이다(마 27:46). 그러나 때로 하나님께서 성도를 일시 ‘아자브’하시는 경우는 (1) 연단을 위한 징계로 고통과 곤경에 일시 처하게 하시는 경우(시 22:1, 37:25, 사 41:17), (2) 그리고 인간의 심중에 있는 것을 알아보기 위한 경우(대하 32:31) 등이 있다.
버리지 마시옵고. ‘버리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타쉬’는 ‘배척하다, 거절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아자브’에 비해 ‘나타쉬’는 좀더 거부의 뜻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명령하신. ‘명령하다’(command)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와’는 여러 맥락에서 활용되지만(룻 2:9, 삼상 17:20, 삼하 21:14), 특히 하나님이 그 주체인 경우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1) 하나님의 명령은 곧 성취와 완성을 의미한다(시 33:9, 사 45:12). (2) 하나님께서 명령하실 때는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수단도 같이 주신다(출 31:2-6). (3) 하나님의 명령은 곧 진실이다. 그리고 그 진실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이 뒤따른다(신 28:8, 시 105:8). (4)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는 수행해야 할 모든 것을 하나님 편에서 책임진다는 약속이 내포되어 있다(대상 16:15).
계명과 법도와 율례. ‘계명’(히, 미츠와)과 ‘법도’(히, 호크)와 ‘율례’(히, 미쉬파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말씀과 명령을 가리키는 중언법(重言法)적 표현이다(2:3, 신 4:1). 따라서 여기 언급된 세 가지 규례들을 지킨다는 것은, 곧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을 의미한다.
날마다 필요한 대로. 즉 ‘매일의 필요한 것을’을 의미한다. 출 16:4, 마 6:11 등의 구절에서 같은 뜻의 말을 찾아 볼 수 있다. 진정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필요에 따라 매일의 필요한 은혜를 풍성히 채워주실 것이다.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여기서의 ‘하나님’은 ‘하엘로힘’으로 정관사 ‘하’가 붙어있는 ‘그 하나님’(the God)이다. 즉 살아계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친히 강한 손과 편 팔로 구원의 역사를 베푸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킨다. 따라서 진정 ‘여호와’만이 참되고 유일하신 신(神), 즉 ‘엘로힘’이신 것이다. 한편 본 절은 23절과 함께 신명기적 신앙 고백의 형태를 띠고 있다(신 4:35, 39).
완전하게 하여 … 지킬지어다. ‘완전하다’(히, 샬렘)는 어떤 관계가 비뚤어짐 없이 건전하게 조화된 상태를 의미한다. 또한 그렇게 회복된 관계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런데 이 ‘샬렘’에서 ‘평화’를 의미하는 ‘샬롬’이 파생되어 나왔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이 ‘샬롬’(평화)의 관계에 있는 상태를 곧 ‘샬렘’(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본 절에서 보듯 그와 같은 ‘샬렘’(완전)의 결과 혹은 과정이 곧 ‘법도를 행하며 계명을 지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완전’을 의미하는 헬라어 ‘텔레이오스’는 “완전히 성숙함, 그리고 지정된 목적에 도달함”을 의미하고, 라틴어 ‘페르펙투스’(perfectus)는 “처음부터 철저히 만들어진 것”을 의미한다(Campbell).
오늘과 같이. 성전 봉헌시 왕과 백성들의 마음 상태가 순종과 헌신으로 불타오르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이렇듯 당시에는 왕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므로서 번영과 평안의 상태를 누렸으나, 후일 왕과 백성들이 가증한 우상 숭배의 죄악에 빠지고 말았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성도들은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깊이 깨달아 늘 깨어 있기를 힘써야 한다(벧전 5:8).
다 여호와 앞에 희생제물을 드리니라. 언약궤 안치식(1-21절)과 솔로몬의 봉헌 기도(22-61절)가 끝난 후, 마지막으로 거대한 규모의 화목제가 드려짐으로써 성전 봉헌식은 그 절정에 달하였다. 병행 구절인 대하 7:4-10에는 악기를 동원하여 여호와를 찬양하는 장면까지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당시 여호와께 대한 감사와 헌신, 친교의 표시는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 사건인 성전 봉헌식을 맞이하여 거대한 규모의 희생제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63절).
소가 이만 이천 마리요. 양이 십이만 마리라. 이 숫자가 너무 많다고 생각한 일부 학자들은 본 절의 기록을 과장 또는 오기(誤記)로 생각하기도 한다(Montgomery, Thenius). 그러나 전반적인 정황으로 미루어, 이는 가능한 숫자이다(Keil, Bähr). 왜냐하면 (1) 보통의 화목제와 달리 성전 낙성식이라는 역사적 대사건을 위한 제사일 뿐 아니라, (2) 이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하맛 어귀에서부터 애굽 하수까지’의 전 국민(가장 및 대표들)으로 나타나고 있고(65절), (3) 원래의 번제단만으로 감당할 수 없어서 성전 앞뜰 가운데를 구별해 특별히 사용해야 할 정도였기 때문이다(64절). 그리고 제물(짐승)을 잡고 준비하는 일은 반드시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의 임무만은 아니었다. 이러한 일은 제물을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은 누구든지 할 수 있었다. 단지 희생제물의 피를 번제단 사면에 뿌리는 일만이 제사장의 직무였다(레 1:5, 6, 3:2, 8). 한편, 다윗 시대에 30세 이상의 레위인들이 38,000명이었으므로(대상 23:3), 비율에 따라 솔로몬 당시의 제사장들의 수효는 대략 2,000~3,000명 정도였을 것이다(Keil). 그러므로 이러한 전반적인 상황를 고려한다면, 낙성식 기간의 7일 동안 소 22,000 마리와 양 120,000 마리의 희생제물을 처리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참고로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을 보면, 네로 황제 당시의 유월절에 양 250,000 마리가 2~3시간 동안에 제물로 드려졌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역대기를 비롯한 고대의 모든 역본들의 기록이 본문의 기록과 일치하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의 숫자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봉헌식을 행하였는데. 여기서 ‘봉헌식’은 ‘시작하다, 봉헌하다, 창설하다’란 뜻의 ‘하나크’에서 파생된 말로, 가옥이나 성전 등을 완공한 후 이를 기념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예식을 의미한다(신 20:5, 대하 7:5, 9). 한편, 후대 유대인들은 ‘하눅카’(Hanukkah)란 절기를 지켰는데, 이는 ‘수전절’(修殿節)이란 의미로 곧 수리아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Antoochus Epiphanes)가 예루살렘 성전을 훼파하여 더립힌 것을 재건하고 성결케 하여 재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하맛 어귀. 하맛(Hamath) 왕국의 남쪽 경계는 곧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였다(Haldar, 민 13:21, 수 13:5, 삿 3:3). 이 나라는 후에 앗수르의 살만에셀 2세에게 정복된다.
애굽 강. ‘애굽 강’(히, 나하르 미츠라임)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의 남쪽 경계선으로 나온다(창 15:18).그리고 여기서 강은 바로 나일 강을 가리킨다.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는데. 원래 ‘장막’(tent)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이동식 거처로 이스라엘이 광야 유랑 시절에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 시대 당시는 가나안 정착 이후로도 400여 년이 지난 때로, 이 때는 이스라엘도 집을 짓고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절에서 ‘장막으로 돌아가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집으로 돌아가다’라는 의미로 사용된(삼하 20:1, 삿 7:8) 관습화된 언어 표현이다(Keil, Hammond).
다윗과 …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로 … 즐거워하였더라. 성전 봉헌식을 마무리 짓는 본 절에서 솔로몬 대신 특별히 다윗의 이름이 거론된 것은, 성전 건축은 다윗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 실질적인 성전 건축자는 다윗이었기 때문이다(Keil, Bähr). 즉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단순히 다윗의 계획과 이상을 실행에 옮기는 역할을 감당했을 뿐이다(Hamm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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