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서론
(1) 제목
유대인의 전통을 따른 히브리어 성경은 본래 사무엘서를 상하 구분 없이 한 권으로 취급하여 ‘사무엘’이라 불렀다.
(2) 저자
사무엘. 사무엘 사후의 이야기는 나단 혹은 갓이 기록한 것일 수 있다.
(3) 기록 연대
보수주의 학자들은 본서의 기록 시기를 분열 왕국 직후(B.C. 930년)로부터 사마리아 함락(B.C. 722년) 사이로 본다.
(4) 주제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삶 뿐만 아니라 민족 전체의 운명을 친히 섭리, 주관하신다는 사상과, 또한 하나님의 축복과 심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하에서 그 예정하신 뜻과 목적으로 귀결된다.
사울이 죽은 후. 사무엘상, 하를 연결해 주는 의미 있는 구절이다(Cahen, Wordsworth). 랑게(Lange)는 이 문구가 2장에 나온 용례처럼(2:1, 그 후에) 단순히 내용의 흐름을 바꾸어 주는 보편적 형식으로서 사무엘상, 하와 구분점이 되는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구약 역사서 중 상당수가 ‘ … 가 죽은 후’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음을 보아(수 1:1, 삿 1:1, 왕하 1:1) 이 문구를 사무엘상, 하를 구분하는 기준점으로 삼는 것은 적절하다. 더욱이 이 문구에 의해 내용면에서 폭군 사울 왕의 시대와 성군 다윗 왕의 시대가 명확히 구분되는 것을 보아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사무엘상, 하가 히브리 성경에서는 한 권으로 되었을지라도 이 문구를 기준으로 구분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
다윗이 … 쳐죽이고. 삼상 30:16-20의 사건을 가리킨다. 즉 앞서 다윗은 아기스와 함께 출전(出戰)하느라 잠시 시글락을 비워 둔 적이 있다. 그 때 아말렉 족속이 시글락을 침입, 다윗의 백성을 약탈하였는데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다윗은 그 뒤를 추격, 아말렉을 격파하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였다.
시글락. 브엘세바 북서쪽 19.2 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이다. 원래 시므온 지파에게 배당 되었으나(수 19:5, 대상 4:30) 사울 시대에는 블레셋의 지배하에 있었다. 한편 가드의 아기스 왕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고 있을 때 시글락을 다윗에게 주어 외부의 적들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꾀하기도 하였다(삼상 27:6, 대상 12:1, 20). 즉 사울에게 쫓기던 다윗이 가드로 도망와 아기스 왕과 군사적 관계를 맺고 이 곳을 얻었다. 덕분에 다윗은 지금까지 이곳을 그의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세력을 확장하며 은거할 수 있었다(삼상 27:8-9, 30:26-30).
사울의 진영에서 나왔는데. 사울과 그 휘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레셋군을 맞이하여 교전(交戰)하던 격전지(삼상 31:1-7)에서부터 도망쳐 나온 것을 가리킨다.
그의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 이는 그 당시 근동 지방 사람들이 극한 슬픔을 표시하던 한 방법이다(수 7:6, 삼상 4:12). 특히 그중에서도 자신의 옷을 찢는 행위는 극도의 고통이나 번뇌에 사로잡혔을 때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나타내던 한 표현법이다. 한편 그 밖에도 고대 근동인들은 금식, 굵은 베옷을 입는 것, 허리에 굵은 베를 띠는 것 따위로 자신의 슬픔을 표현하곤 하였다(창 37:34, 삼상 31:13, 왕상 21:27, 시 35:13). 그러나 본 절에 나오는 이 사람의 행위는 다음에 이어지는 그의 위증(僞證)에 비추어 볼 때(5-10절) 전적으로 거짓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윗에게 … 엎드려 절하매. 이는 곧 다윗을 자신의 주(主)로 인정하는 경외와 복종의 자세이다. 즉 이는 이제 죽은 사울에 이어 이스라엘의 차기(次期) 왕위에 오를 자가 곧 다윗임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왜냐하면 땅에 두 활과 무릎이 닿을 정도로 부복하는 행위는 당시 백성들이 자신의 군주나 지도자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던 자세였기 때문이다(14:4, 19:18, 창 42:6, 삼상 24:8, 왕상 18:7, 왕하 2:15).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도 인간적으로 씁쓸한 감정을 떨칠 수 없다. 왜냐하면 얼마 전까지도 사울 휘하에서 충성을 다하던 자가 사울이 죽자(1절) 바로 다윗에게로 도망쳐 와 이처럼 새로운 충성을 표하니 그의 약삭빠름과 간특함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풀핏 주석, 매튜헨리 주석).
군사가 …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이미 삼상 31:1-7에서 자세히 언급된 상황이다. 이 같은 이스라엘의 대패(大敗)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사울에게 주셨던 예언(삼상 13:14, 15:23, 26, 28, 28:19)의 성취라는 의의를 지닌다.
내가 우연히 … 올라가 보니. 아말렉 청년의 거짓말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사무엘상 마지막 장에 의하면 사울의 죽음을 목격한 자는 그의 ‘병기 든 자’로서 처음부터 사울과 함께 길보아 전투에 참여했던 것으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삼상 31:1-6).
길보아 산. 이스르엘 골짜기에 위치한 해발 497 m의 석회암 구릉이다. 삼상 31:1 주석 참조.
사울이 자기 창에 기대고. 혹자(Clericus)는 이를 사울이 창을 사용, 자살을 시도하려 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기대다’에 해당하는 ‘샤안’은 ‘기대다, 쉬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극도로 지친 사울이 땅에 꽂힌 자신의 창을 의지한 채 힘들게 겨우 서 있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봄이 낫다(Lange). 이는 당시 위기에 처해 있던 사울의 비참한 형편을 분명히 증거해 준다.
병거와 기병은 그를 … 따르는데. 다시 한번 아말렉 청년의 거짓말이 드러나고 있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병거는 평지에서나 사용 가능한 도구이지 산에서는 그 사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스라엘군이 블레셋군을 피해 길보아 산으로 도망친 이유도 저들이 병거를 타고서 추격해 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삼상 31:1). 그러자 그 때 블레셋군은 병거나 기병대신 ‘활쏘는 자들’을 동원하여 이스라엘군을 추격했었다(삼상 31:3).
그의 곁에 서서 죽이고. 이처럼 아말렉 청년은 자신이 사울의 부탁을 받고서 사울을 죽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삼상 31:3-4에는 사울이 블레셋군이 쏜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자 절망하여 자살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 이같은 차이점에 대하여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학자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1) 성경은 성령의 영감(靈感)에 의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여러 자료들을 모아 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편집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라는 견해(Ewald). (2) 사무엘상, 하의 저자가 동일인이 아니기 때문에 생긴 차이점이라는 견해(Wordsworth). (3) 아말렉 청년이 다윗으로부터 보상을 받기 위해 사울이 자결한 사실을 숨긴 채 거짓 증언을 했기 때문에 생긴 차이점이라는 견해(Lange) 등이다. 이 중 첫 번째 견해는 성경영감설 자체를 부인하는 자유주의적 견해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리고 두 번째 견해는 사무엘상, 하의 저자가 비록 다르다 할지라도 동일한 사실에 대해서는그 내용을 서로 달리 진술할 수 없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세 번째 견해는 지금껏 우리가 살펴본 바와 일치한다. 즉 사울의 죽음에 관한 아말렉 청년의 보고는 처음부터 거짓으로 일관된 위증(僞證)이었다.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세 번째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Brown, Fausset, Jamieson, Rust, R. H.Pfeiffer).
왕관. 원어 ‘네제르’는 일반적으로 ‘왕관’(crown)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블레셋과의 전투에 나선 사울이 이러한 왕관을 착용했을리는 만무하다. 아마 이는 사울의 투구에 둘러 있던 좁다란 금띠로서 왕권을 상징하던 것인 듯하다.
팔에 있는 고리. 사울이 팔에 차고 있던 고리는 고대 근동의 군지휘관들이 흔히 지니고 있던 장신구 중의 하나이다(민 31:50). 오늘날 발굴된 앗수르의 조각물들을 보면 손목과 팔에 고리를 찬 병사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Lavard, Wycliffe).
외국인. 이에 해당하는 원어 ‘게르’는 이스라엘에 임시로 체류하는 타국인(히, 노크리)과는 달리 이스라엘에 정착하여 그 사회에 동화(同和)된 이방인을 의미한다(출 22:21, 23:9). 이들은 유대 후기에 완전한 시민들처럼 대우를 받았으며(겔 47:22), 제3의 십일조를 분배받는 특권을 누렸다(신 14:29). 또한 이들은 여호와 종교로 개종할 경우 이스라엘인과 다름없이 율법에 대한 책임이 있었으며, 동시에 율법의 보호를 받았다(출 12:48-49, 레 16:29, 17:8,15, 18:26, 19:34, 24:22, 25:6, 신 1:16, 10:18, 16:11). 뿐만 아니라, 이들은 법소송에서 위대하신 영주, 곧 하나님께 직접 호소할 수 있었다(레 24:22). 그러나 이들은 이스라엘인과 같이 땅을 소유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분명 외국인이 갖는 불이익이었다. 때문에 아말렉 청년은 이러한 불리한 입장으로 인해 다윗에게 아첨하려 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Rust).
야살의 책. 여기서 ‘야살’은 ‘의로운 자’(righteous one)란 뜻이다. 그러므로 ‘야살의 책’은 ‘의로운 자의 책’으로 번역될 수 있다(Keil & Delitzsch, Lange). 이 책은 수 10:13에도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이 최소한 여호수아와 사무엘 이전에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의 기원이나 그 정확한 내용도 알 수 없다. 다만 추측컨대 이는 이스라엘 민족 역사상 위대한 인물이나 큰 사건을 노래한 서사시를 수록했던 고대 문서였을 것이다(Goldschmidt, Keil).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25, 27절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구절로 본 애가의 후렴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한 다윗의 슬픔이 얼마나 극심한 것이었는지를 잘 드러내 준다.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여인들이 싸움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용사들을 기쁨으로 맞이하며 춤과 노래로써 축하하는 것은 근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습(출 15:20, 삼상 18:6)이었다(Keil, Lange, Wycliffe, Pulpit Commentary). 다윗은 거민들과 수치와 슬픔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조시키는 가운데 더욱 애잔한 심정으로 애가를 읊고 있다.
할례 받지 못한 자. 특히 이 말은 블레셋과 관련하여 자주 사용되었는데(삼상 14:6, 17:26, 31:4) ‘개 같은 자’라는 의미를 지닌 경멸어이다(Pulpit Commentary). 아마도 이는 이스라엘의 선민(選民) 사상에서 기인된 것으로 오직 할례 받은 자만이 하나님 안에서 존재 의의를 지닐 수 있다는 의식(意識)의 반영일 것이다(창 17:9-14).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여기서 ‘제물’(히, 트루마)은 거제를 의미한다(레 7:14, 32). 그런데 이는 ‘처음 익은 곡식가루 떡’을 드리는 것이니(민 15:20) ‘제물 낼 밭’이란 곧 풍성한 첫 열매를 내는 비옥한 땅을 의미한다. 그리고 본 절에서 다윗은 길보아 산이 메마른 박토가 되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함께 애도해 주기를 기원하고 있다.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않아함 같이 됨이로다. 옛날에는 적의 무기가 미끄러져 빗나가도록 하기 위해 방패에 기름을 바르는 것(사 21:5)이 보통이었다(Lange, Wycliffe, Pulpit Commentary). 그런데 이제 ‘사울의 방패가 기름칠도 않은 채 버려졌다’(공동번역)는 것은 곧 사울은 전사하고 그의 방패는 피 묻은 채 나뒹구는 비극적 상황을 가리킨다(Keil & Delitzsch). 이와 관련하여 랑게(Lange)는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이스라엘의 현상태를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하였다.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화살은 피에 취하고 칼은 육체를 삼킨다’(신 32:42)는 것과 같은 시적(詩的) 표현이다. 즉 이는 과거 사울이 ‘천천’이나 되는(삼상 18:7) 많은 적들을 살육하였음을 회상하고 있는 구절이다.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자식으로서 끝까지 아버지를 버리지 아니하였을 뿐 아니라 죽기까지 신하로서 충성을 다한 요나단의 효심과 충정을 기억하게 해주는 구절이다. 즉 과거 요나단은 다윗과의 우정으로 인해 아버지 사울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당하기까지 하였다(삼상 20:30-34). 그러나 요나단은 결코 그러한 사울을 배반하지 않고 조국을 수호하다가 사울과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삼상31:1-6).
독수리보다 …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전쟁에 능하였던 위대한 용사나 영웅들을 가리킬 때 흔히 사용되던 말이다. 즉 독수리 같은 날쌤(욥 9:26, 잠 23:5, 합 1:8)과 사자와 같은 힘셈, 용감함(신 33:22, 시 104:21, 호 13:8)은 고대의 용사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던 특징이다(Lange, Keil & Delitzch Commentary).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이는 곧 생전에 요나단이 다윗에게 베풀어 주었던 은혜가 지극하였음을 의미한다. 사실 과거에 요나단은 사울의 왕권이 다윗에게로 넘어가게 된 것도 개의치 않고 그를 자기 목숨처럼 위하며 사랑하였다(삼상 20:12-17).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기이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라’는 ‘경이롭다, 불가사의 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주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권능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출 15:11, 욥 5:9, 9:10, 시 17:7, 78:4, 139:14, 사 29:14, 슥 8:6).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표현이 사용된 것은 실제로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경이로울 만큼 자기 희생적이었으며 영원 불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을 최상급으로 표현한 말이다. 남녀의 결혼은 단순히 육체적 결합만이 아니라 영혼의 결합도 의미한다(창 2:24, 25, 엡 5:22-33). 따라서 남녀의 영적 결합은 매우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은 이보다 더하다고 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마음이 통하고 그들 사이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는 극찬의 말이 아닐 수 없다(삼상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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