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 여쭈어. 아마도 이때 다윗은 우림과 둠밈으로 여호와께 물었을 것이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림과 둠밈을 단 에봇을 아비아달 대제사장이 입고 있었는데, 당시 그가 다윗과 함께 있었다(삼상 23:6). 둘째, 다윗은 과거에도 아비아달의 아버지 아히멜렉에게 우림과 둠밈을 사용, 하나님의 뜻을 물어봐 달라고 한 적이 있다(삼상 22:10). 한편 이처럼 다윗은 사울의 사후(死後) 자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는 정세 속에서도 자기의 기분에 따라 행동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았다. 이러한 다윗의 행동은 중요한 일을 만날 때마다 취한 행동으로서(5:19, 삼상 22:10), 이는 그가 그만큼 자기의 앞길을 하나님께 맡기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이제 사울이 죽은 시점에서 다윗은 고국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런데 이와 관련 다윗이 특별히 유다 땅을 염두에 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는 아직 사울 가문을 추종하는 적대 세력이 있었으니(8, 9절) 그는 자기 지파, 유다 땅에서 필시 정착지를 구하려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Lange).
헤브론. 예루살렘 남서쪽 약 40 km 지점에 위치한 고성(古城)이다.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이며(수 15:13, 삿 1:10) ‘헤브론’의 뜻은 ‘연합, 친교’이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새로운 정착지를 찾는 다윗에게 헤브론으로 가라고 명하신 까닭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 헤브론은 유다 지파의 성읍이며 유다 지파 지역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서 다윗이 유다 지파의 세력을 업고 왕이 될 정치적인 거점으로 알맞은 곳이었다(4절). (2) 헤브론은 여호수아 시대에 갈렙에게 패퇴한 아낙 자손들이 차지했던 요새로서(수 15:13-17) 산지가 성읍으로 둘러싸인 군사적 요충지였다. (3) 그리고 무엇보다도 헤브론에는 다윗과 친분이 두터운 유다의 장로들이 거주하고 있었다(삼상 30:26, 30).
갈멜 사람 … 아비가일. ‘아비가일’의 뜻은 ‘아버지가 기뻐하심’이다. 아름답고 지혜로운 여인으로 본 남편 나발 사후(死後) 다윗에게로 개가(改嫁)하였다. 삼상 25:39-42 주석 참조. 그녀 역시 다윗에게 아들을 낳았는데 일명 ‘다니엘’(대상 3:1)이라고도 하는 ‘길르압’이다(3:3).
기름을 부어. 다윗은 그의 일생 동안 다음과 같이 세 번 기름 부음을 받았다. (1) 약 15년 전 사무엘에게서(삼상 16:13), (2) 본 절에서 유다의 장로들로부터 유다의 왕으로, (3) 약 7년 6개월 후 이스라엘 장로들에게서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5:3). 그런데 다윗의 두 번째, 세 번째 기름 부음 받음은 사실상 첫 번째 기름 부음 받음의 결과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사무엘을 통해 받은 기름 부음은 원칙적으로 하나님이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하신 사건이었으며 그 결과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두, 세 번째의 기름 부음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아무튼 성격상 두 번째, 세 번째의 기름 부음은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구체화 되는 사건, 즉 다윗이 실제로 왕위에 오르는 공식적인 행사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1) 하나님이 말씀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삼상 15:29)과 (2)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는 당시에는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결국 승리한다는 영적 진리(요 16:33)를 발견하게 된다.
사울을 장사한 사람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니이다. 길르앗 야베스는 요단 강 동편, 므낫세 지파의 영토 내에 있는 성읍이다(민 32:39-40). 벧스안에서 남동쪽으로 약 20 km 지점에 위치한 이곳 일대는 요단 강 동쪽 유역에서 가장 비옥한 땅으로 일찍부터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이 생명을 걸고 사울의 시체를 되찾아 엄숙히 장례를 치러 준 까닭(삼상 31:11-13)은 일전에 그들이 암몬 왕 나하스에게 포위당했을 때 사울이 와서 구해 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삼상 11:1-11).
이스보셋. 대상 8:33, 9:39에 의하면 그는 사울의 넷째 아들로서 그 본명이 ‘에스바알’로 되어 있다. 에스바알은 ‘바알의 사람’이란 뜻인데 이것이 ‘부끄러움의 사람’이란 뜻인 ‘이스보셋’으로 바뀐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 당시 ‘바알’이란 히브리어는 ‘주인’ 또는 ‘주님’을 의미했다. 그러나 후대에 이스라엘에 바알 종교가 들어오면서 사람들은 바알이란 말을 경멸하게 되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이름에 포함된 ‘바알’이란 말을 ‘부끄러움’이란 의미의 ‘보셋’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여룹바알’이란 이름이 ‘여룹보셋’ 또는 ‘여룹베셋’(11:21)으로 바뀐 것도 아마 갈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Keil & Delitzsch, Lange, Rust, Pulpit Commentary).
마하나님. ‘두 진영’ 또는 ‘두 군대’라는 뜻이다. 이곳은 유서 깊은 땅으로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고향 가나안으로 돌아가던 중 천사들을 만났던 곳이다(창 32:1-2). 때문에 야곱은 그곳을 ‘마하나임’이라고 불렀는데 그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 다만 추정하면 요단 동쪽 갈르엣과 얍복 강 사이에 위치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곳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판의 기업 경계에 위치했으므로 아브넬과 이스보셋은 이 두 지파를 쉽게 통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수 13:26, 30). 한편 이곳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다윗이 위기에 처했을 때 피신하였던 곳이기도 하다(17:24, 27, 19:32).
아술. 이곳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추정이 있다. (1) ‘그술’을 가리킨다는 추측(시리아역과 벌게이트역). 즉 필사자가 히브리어 ‘게슈리’라는 말을 ‘아슈리’라는 말로 잘못 베꼈다는 것이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그술은 아람 소국(小國)의 하나로서 다윗 시대에 자신의 왕을 모시고 섬겼던 지역이다(3:3). 따라서 이 추측은 옳지 않다. (2) 아술이 아셀 성읍과 그 지역을 가리킨다는 추측(Keil & Delitzsch). 즉 아셀 성읍은 이스르엘 동편에 위치한 곳으로 길보아 전투 때(삼상 31장) 블레셋에게 빼앗겼으나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다시 점령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Bachienne). 이 추측은 바로 다음에 이스르엘이라는 지명이 나오는 것을 볼 때 매우 가능성이 있다(Rust).
이스르엘. 요단 강에서 길보아 산(삼상 31:1)을 거쳐 갈멜 산 부근을 지나 지중해까지 뻗쳐 있는 비교적 넓은 계곡과 평야 지대이다. 하지만 사울 당시 이스라엘은 길보아 전투에서 패하여 이곳을 블레셋에게 빼앗겼다. 그런데 이스보셋이 이곳의 왕이 되었다고 하니 이는 분명 아브넬이 다시 군사들을 규합하여 정복하였을 것이다.
기브온 못 가. 이곳에는 양 진영이 탐을 낼 만큼 많은 물을 담아 놓을 수 있었던 큰 저수지가 있었다. 미국 펜실바니아 박물관 팀(1956-1960년, J. B. Pritchard 가 이끔)의 발굴 조사에 의해 오늘날 그 못의 규모가 드러났다. 그 안에는 79 개의 층계가 나선형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직경은 약 11 m, 깊이가 약 14 m이다. 따라서 이곳에 물을 채우면 4-6천 명이 물을 마실 수 있었으니 당분간 성이 포위되더라도 물 걱정은 안 해도 될 정도였다. 이렇게 볼 때, 기드온 못은 물이 귀한 가나안에서 아주 중요한 식수 공급원이었으며 전략적으로 차지하는 의미 또한 매우 컸다. 그러므로 이곳의 지배권을 쟁탈하기 위해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요압이 이르되 일어나게 하자. 아브넬의 제안에 요압이 이처럼 선뜻 응낙한 것은 반드시 자기 부하들이 이길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신 누구보다도 지기 싫어하고 급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아브넬로부터 조롱하는 소리를 듣는 것이 싫어 이를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Matthew Henry). 하지만 그 결과는 양측 모두 12 명씩의 인명을 잃게 되었다. 만일 아브넬이나 요압 중 한 사람만이라도 부하를 사랑하며 생명의 고귀함을 알고 있었다면 이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일제히 쓰러진지라. ‘일제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흐다우’는 ‘함께, 똑같이’란 의미이다. 구약에서 이 말은 (1) 행동의 일치(신 25:11), (2) 시간의 일치(시 4:8)를 의미할 때 사용되었다. 그런데 여기서의 이 말이 두 번째 경우인 시간의 일치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들이 다 똑같은 상처를 입고 똑같은 시간에 쓰러져 죽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은 그들이 모두 상처를 입고 죽었다는 의미로서 행동의 일치를 나타내는 것임이 분명하다. 아무튼 이 말에서 우리는 그 날에 대표로 나온 24명의 용사들이 (1) 방어 무기(방패 등)도 없이 싸웠고 (2) 아주 치열하게 싸웠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그들이 양 손에 칼과 방패 따위를 들고 있었다면 상대방의 머리를 잡을 수 없을 것이다(Pulpit Commentary).
헬갓 핫수림. 이는 ‘헬갓’과 ‘핫수림’이 합해진 복합 명사이다. 이 중 ‘헬갓’은 ‘들’(field)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해석의 초점은 두 번째 단어 ‘핫수림’에 있다. 왜냐하면 ‘핫수림’은 ‘추르’의 복수형으로 이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의견이 분분하기 때문이다. (1) ‘옆구리’로 보는 견해(공동번역). 이 견해를 따르면 ‘헬갓 핫수림’은 ‘옆구리들의 들’이 된다. (2) ‘음모자’로 보는 견해(LXX). 이에 의거해서 데니우스(Thenius) 같은 이는 ‘헬갓 핫수림’을 ‘모해자들의 들’로 해석한다(Lange). (3) ‘반석’으로 보는 견해(Vulgate). 이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은 반석이 ‘강함’을 의미한다는 사실에 근거해 ‘헬갓 핫수림’을 ‘강한 자들의 들’로 해석한다(Patrick). (4) ‘날카로운 칼날’로 보는 견해(Dake, Keil & Delitzsch, Lange, Pulpit Commentary). 그 근거로서 첫째는 ‘추르’가 대부분 ‘반석’이라는 의미를 갖지만, 시 89:43에서 ‘날카로운 칼날’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둘째, 이러한 의미는 칼날에 찔려 소년들이 모두 죽은 본문의 사건과도 매우 부합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한편 이상과 같은 네 가지 견해 중 처음 세 견해는 그 근거가 불충분할 뿐 아니라 본문과도 잘 부합하지 않는다. 따라서 네 번째 견해에 근거해 ‘헬갓 핫수림’을 ‘날카로운 칼날들의 들’로 해석하는 것이 비교적 무난할 것이다.
요압.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아버지이심’이다. 요압은 다윗 왕조의 중심 인물이며 또한 본서에 빈번히 등장한다. 그는 다윗의 조카로서 다윗이 왕이 되기 전부터 다윗을 추종했으며, 이스라엘의 통치 영역을 확장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10:6-19, 11:1, 12:26, 왕상 11:15-16). 그러나 그는 이중 인격자의 성질을 가진 자로서 한편으로는 다윗을 심히 괴롭히기도 했다. 즉, 그는 다윗을 위해 시온 성을 쌓는 데 협력하는(대상 11:8) 등 많은 충성을 하였으면서도(14:23, 31-33, 18:14-33), 한편으로는 다윗이 죽이지 말라고 부탁, 또는 명령한 압살롬, 아마사, 아브넬 등을 교묘한 꾀를 써서 살해하였다(3:27, 18:14, 20:10). 이러한 사실은 그가 진정으로 다윗 왕조를 위하는 진실된 마음으로 충성했던 것이 아니라 다분히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이나 야망으로 행동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까닭에 다윗은 그를 미워하고 경계하게 되었다. 결국 요압은 이러한 자기의 기질로 인해 솔로몬의 군대 장관 브나야에게 살해 당하고 만다(왕상 2:31-35). 우리는 요압의 이와 같은 행동을 통해 한 가지 교훈을 얻게 된다. 그것은 곧, 참된 충성이란 많은 일을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기질과 욕망을 버리고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데 있다는 사실이다.
아비새. ‘선물의 아비’란 뜻이다. 아비새 역시 형 요압과 함께 일생 동안 다윗 왕조에 충성을 다 하였다(17:25, 대상 2:16). 그는 요압과 더불어 다윗 군대의 유력한 장군이 되어(10:9-10) 압살롬의 반역을 평정하며(18:1-15) 다윗의 목숨을 구하는 등(21:15-17) 많은 공을 세웠다. 특히 그는 혼자서 창으로 삼백 명의 적군을 무찌른 일로 유명하다(23:18, 대상 11:20).
아사헬. ‘하나님께서 만드심’이란 뜻이다. 요압과 아비새의 동생으로서 다윗의 30 용사 중 한 사람이다(23:24). 다윗의 군대 장관이었기도 한 그는(대상 27:7) 특히 발이 빠르기로 유명하였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이스보셋의 군장(軍長) 아브넬에게 살해당하는 불운을 격는다(23절).
창 뒤 끝으로 … 찌르니. 이것을 보아 아브넬이 아사헬을 죽일 마음은 없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그저 아사헬이 쫓아오지 못하도록 하려고 창 뒤 끝으로 찔렀다(Hertzberg, Lange).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사헬이 죽은 것은 아마 (1) 창의 뒤 끝에 금속 종류가 부착되어 있었거나(Lange, Pulpit Commentary), (2) 아사헬의 달려옴이 너무나 빨랐기 때문일 것이다(Matthew Henry).
엎드러져 죽으매. 이처럼 18절에서부터 본 절에 이르기까지 아사헬의 죽음이 상세히 묘사되고 있다. 아마 이는 훗날 요압에 의해 아브넬이 살해당한 이유가 바로 이 아사헬의 죽음 탓이었음을 분명히 밝히기 위함인 듯하다(3:27, 30).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참혹한 일’에 해당하는 ‘마라’는 ‘괴로움, 불미스러움, 쓴 맛’ 등의 뜻으로서 여기서는 양측 모두 전멸하고 마는 ‘비극’을 의미한다. 때문에 불가타역(Vulgate)은 이를 ‘목숨걸고 싸우는 일이 얼마나 절망적인 것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로 번역하고 있다(Lange, Pulpit Commentary).
형제 쫓기를 … 명령하겠느냐. 지금 대진해 있는 군사들이 형제들, 곧 같은 민족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넬의 간교성과 다급함을 엿볼 수 있다. 즉 먼저 동족간의 싸움을 제의하고 피흘리기를 좋아하였던 그가(14절) 이제 전세(戰勢)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동족애에 호소하여 휴전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로써 휴전이 성립되게 된 것은 지극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는 곧 장차 다윗을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려 계획하고 계신 하나님(5:1-5)의 간섭하심의 결과였음이 분명하다.
아침에 각각 다 돌아갔을 것이요. 즉 아브넬의 전쟁 제의만 없었더라면 기브온 못가로 나아왔던 양측의 군사들(13절)이 서로 화해하는 가운데 당일 아침에 각기 처소로 돌아갔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Lange).
비드론 온 땅. ‘비드론’의 뜻은 ‘협곡’ 또는 ‘갈라진 틈’이다. 이로 보아 ‘비드론 온 땅’이란 요단 강 동편의 한 골짜기 일대를 가리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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